"도덕경 11장"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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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
{{번역 표
| align="center" | 三十輻共一
|<poem>
| align="center" |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통에 모여있으니
서른 개 바큇살이 하나의 통에 모여있으니
|-
그 없음에 쓰임이 있다.
| align="center" | 當其無, 有車之用,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니
| align="center" | 그 없음에 쓰임이 있다.
그 없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
문과 창을 뚫어 집을 만드니
| align="center" | &#22479;埴以爲器,
그 없음에 집의 쓰임이 있다.
| align="center" |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니
 
|-
따라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 때문이다.
| align="center" | 當其無, 有器之用,
</poem>
| align="center" | 그 없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poem>
|-
三十輻共一轂,
| align="center" | 鑿戶&#29270;以爲室,
當其無,有車之用。
| align="center" | 문과 창을 뚫어 집을 만드니
埏埴以爲器,
|-
當其無,有器之用。
| align="center" | 當其無, 有室之用,
鑿戶牖以爲室,
| align="center" | 그 없음에 집의 쓰임이 있다.
當其無。有室之用。
|-
 
| align="center" |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故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
| align="center" | 따라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때문이다.
</po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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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매우 명쾌한 구절입니다. 없음의 쓰임을 말하고 있는것이지요. 역시 이 부분도 없음의 존재가 있음을 강조해줌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대립자의 공존이지요. 무엇이 비어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문과 창처럼 항상 열려있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것이고 그릇처럼 한상 비어있어야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역시 앞서 말씀드린 15장의 '이 도를 가진 이는 가득 채우려 하지 않으니, 채우지 아니하여 낡게하고 새로움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구절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br/>
이는 매우 명쾌한 구절입니다. 없음의 쓰임을 말하고 있는것이지요. 역시 이 부분도 없음의 존재가 있음을 강조해줌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대립자의 공존이지요. 무엇이 비어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문과 창처럼 항상 열려있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것이고 그릇처럼 한상 비어있어야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역시 앞서 말씀드린 15장의 '이 도를 가진 이는 가득 채우려 하지 않으니, 채우지 아니하여 낡게하고 새로움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구절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br/>
하지만 이것을 삶 속에서 체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울 듯 하군요.<br/>
하지만 이것을 삶 속에서 체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울 듯 하군요.<br/>
제가 이 강좌와 함께 듣고있는 교양중에 '예술과 사회'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이 강좌는 제목과는 다르게-이거 정말 문제이긴 합니다만- 공공미술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례조사를 하기위해 테헤란로에 있는 공공미술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건축에는 '1%법'이라고 해서 총 건축비의 1%이상을 미술작품에 할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문제가 많습니다. 비리가 횡행하므로 이런저런 작가들의 형편없는 작품들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이 장과 관련해서 답답하게 느낀 것은 건축 부지는 좁은데 그 앞에 이런 미술품을 세우느라고 건물에 바짝 붙여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차라리 아무것도 안 세웠으면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반드시 조형작품을 설치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비어있지 않고 무언가로 꽉 채워놓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br/>
제가 이 강좌와 함께 듣고있는 교양중에 '예술과 사회'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이 강좌는 제목과는 다르게-이거 정말 문제이긴 합니다만- 공공미술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례조사를 하기위해 테헤란로에 있는 공공미술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건축에는 '1%법'이라고 해서 총 건축비의 1%이상을 미술작품에 할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문제가 많습니다. 비리가 횡행하므로 이런저런 작가들의 형편없는 작품들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이 장과 관련해서 답답하게 느낀 것은 건축 부지는 좁은데 그 앞에 이런 미술품을 세우느라고 건물에 바짝 붙여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차라리 아무것도 안 세웠으면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반드시 조형작품을 설치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비어있지 않고 무언가로 꽉 채워놓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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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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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저, 김용옥 역, 老子-길과 얻음, 통나무, 1989<br/>
老子 저, 변정환 역, 道德經, 경산대 출판부, 1994<br/>
王弼 저, 임채우 역, 왕필의 노자:老子王弼注, 예문서원, 1997<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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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老子 저, 김용옥 역, 老子-길과 얻음, 통나무, 1989
* 老子 저, 변정환 역, 道德經, 경산대 출판부, 1994
* 王弼 저, 임채우 역, 왕필의 노자:老子王弼注, 예문서원, 1997


==#==
"없음" 보다는 비어 "있음"이 "爲"無爲의 해석에 좀 더 가깝지 않겄냐? --[[SonDon]]
"없음" 보다는 비어 "있음"이 "爲"無爲의 해석에 좀 더 가깝지 않겄냐? --[[SonDon]]


: 돈군. 여기에 爲無爲라는 구절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구절 자체는 비어있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우리말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나저나 지금 읽어보니 아직 그리 매끄러운 문장이 아닌 구석도 좀 있구먼. 정말 매끄러운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며 번역하기란 진짜 어려운지도 모르겠네. --[[거북이]]
: 돈군. 여기에 爲無爲라는 구절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구절 자체는 비어있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우리말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나저나 지금 읽어보니 아직 그리 매끄러운 문장이 아닌 구석도 좀 있구먼. 정말 매끄러운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며 번역하기란 진짜 어려운지도 모르겠네. --[[사용자:Pinkcrimson|거북이]]


:: "爲"無爲의 기본 마인드가 [[도덕경]]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일테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게라는 뜻이었다네. --[[SonDon]]
:: "爲"無爲의 기본 마인드가 [[도덕경]]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일테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게라는 뜻이었다네. --[[S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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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같이 보기==
*[[도덕경 10장]]
{{도덕경}}
*[[도덕경 12장]]
 
==참고==
* {{위키문헌|도덕경}}


[[분류: 도경]]
[[분류: 도덕경]]

2019년 11월 11일 (월) 20:48 기준 최신판

1 내용[ | ]

번역 원문

서른 개 바큇살이 하나의 통에 모여있으니
그 없음에 쓰임이 있다.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니
그 없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집을 만드니
그 없음에 집의 쓰임이 있다.

따라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 때문이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


이는 매우 명쾌한 구절입니다. 없음의 쓰임을 말하고 있는것이지요. 역시 이 부분도 없음의 존재가 있음을 강조해줌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대립자의 공존이지요. 무엇이 비어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문과 창처럼 항상 열려있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것이고 그릇처럼 한상 비어있어야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역시 앞서 말씀드린 15장의 '이 도를 가진 이는 가득 채우려 하지 않으니, 채우지 아니하여 낡게하고 새로움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구절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삶 속에서 체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울 듯 하군요.
제가 이 강좌와 함께 듣고있는 교양중에 '예술과 사회'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이 강좌는 제목과는 다르게-이거 정말 문제이긴 합니다만- 공공미술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례조사를 하기위해 테헤란로에 있는 공공미술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건축에는 '1%법'이라고 해서 총 건축비의 1%이상을 미술작품에 할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문제가 많습니다. 비리가 횡행하므로 이런저런 작가들의 형편없는 작품들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이 장과 관련해서 답답하게 느낀 것은 건축 부지는 좁은데 그 앞에 이런 미술품을 세우느라고 건물에 바짝 붙여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차라리 아무것도 안 세웠으면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반드시 조형작품을 설치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비어있지 않고 무언가로 꽉 채워놓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2 참고 문헌[ | ]

  • 老子 저, 김용옥 역, 老子-길과 얻음, 통나무, 1989
  • 老子 저, 변정환 역, 道德經, 경산대 출판부, 1994
  • 王弼 저, 임채우 역, 왕필의 노자:老子王弼注, 예문서원, 1997

3 #[ | ]

"없음" 보다는 비어 "있음"이 "爲"無爲의 해석에 좀 더 가깝지 않겄냐? --SonDon

돈군. 여기에 爲無爲라는 구절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구절 자체는 비어있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우리말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나저나 지금 읽어보니 아직 그리 매끄러운 문장이 아닌 구석도 좀 있구먼. 정말 매끄러운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며 번역하기란 진짜 어려운지도 모르겠네. --거북이
"爲"無爲의 기본 마인드가 도덕경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일테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게라는 뜻이었다네. --SonDon
없음을 모두 비어있음으로 바꾸면 그릇, 집과 같은 비유에서 너무 공간적인 빔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요? 허(虛)가 단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문맥상 꼭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있음과 없음이란 포괄적인 해석도 저는 괜찮아보이는데요... ... ^^; --Qny37

4 같이 보기[ | ]

도덕경
상편 하편

5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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