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프로그

1 서문[ | ]

『HoPE (Progressive Rock)-호프 음악이야기 (go SGGHOPE)』 363번 제 목:[아트록잡지] 1호 이탈리안 록의 역사 올린이:boryking(정용상 ) 97/02/25 15:31 읽음:145 관련자료 없음


A.R.M(아트록 매거진) #1에 있는 특집을 올립니다..
여기 있는 빈 공간에는 사진이 있는 공간입니다....
응....우선 1권 내용만 올리고 요청이 있으면 2권 3권도 올려보죠....

이태리 프로그레시브 록의 역사 ( PART 1 탄생) - 서문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태리 본국에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던 Italian Progressive Rock 물결이 10년이 지난 후 우리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또다시 이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지면을 통하여 이 음악을 또다시 다루게 되었다. "음악이 흐르는 밤에"라는 심야프로에서 Latte E Miele, Premiata Forneria Marconi와 New Trolls 등의 음악들이 최초로 전파를 통해 소개된 이래, 이제 그들의 음악은 숨겨진 음악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의 대중 음악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웬만한 레코드숍에서 그들의 앨범 등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었고 FM방송에서도 자주 소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음악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10년전의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늘날의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여기에서 다루려고 하는 Progressive Rock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이태리에서 황금기를 맞았던 이태리인들의 기질이 물씬 풍기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이다. 같은 반도국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태리인들의 음악들은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의 기호에 가장 잘맞는 음악인 것 같다. 음반판매고로 보나 방송 리퀘스트로 보아도 여러나라의 Progressive Rock중에서도 이태리 Progressive Rock이 단연코 으뜸이다. 1970년에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깐쏘네(Canzone)와 더불어, 비록 뒤늦게 알려졌지만 Progressive Rock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Italian Progressive Rock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MBC - FM 심야 프로그램 "음악이 흐르는 밤에"였다. 지면에서 최초로 소개된 것도 이 프로그램에서 홍보용으로,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던 "Underground Papyrus"였다. 그러나 그 소책자는 이 방대한 음악들을 소개하는데 자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지면도 무척 빈약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더욱 어려웠던 것은, 게으름으로 인한 시간의 궁핍이었다. 아뭏든, 지난번으로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었던 Underground Papyrus의 폐막은 다소 아쉬움을 남기지만 Art Rock으로서의 새 출발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1년전, 새로이 발매된 Underground Papyrus 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특별호로 기획되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던 이유중에 가장 큰 원인은 자료의 방대함때문에 발생했었던 편집자의 과대한 욕심때문이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자료때문에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막막했다.

그러다가 작업이 뒤로 미루어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Progressive Rock을 어설프게 다룬 Underground Papyrus가 발간되었던 것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Art Rock으로부터, 앞으로 여러회에 걸쳐서 Italian Progressive Rock이 총괄적으로 심도있게 다루어질 예정이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어느 Progressive Rock전문잡지도 다루지 못했던 많은 분량과 자세한 내용의 Italian Rock이 앞으로 Art Rock을 통해서 심층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물론, 외국의 음악이기 때문에 사진자료나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주로 1970년대에 발간된 수백권의 여러 이태리 음악 전문지와 그동안 수집해 온 수천장의 앨범자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대부분의 앨범리뷰나 요소요소에는 편집자의 주관적 견해도 앞으로의 특집속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2 탄생[ | ]

I. Italian Rock의 탄생

이태리 Rock의 역사를 살펴보면 Rock의 종주국인 영,미국과는 달리 지연과 문화의 역사임을 알게 된다.
Underground Papyrus의 종지부를 찍었던 Underground Papyrus 서문에서 다루었던 독일 Rock의 역사처럼 Italian Rock 역시 본국의 대중매체와 음악산업사회로부터 소외와 냉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 미국의 Rock 물결이 전유럽을 강타했을때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Rock 음악을 결코 막을 수 없었으며, 더구나 젊은 층에 급속으로 확산되어 가는 Rock음악을 자신들의 음악들보다도 더욱 선호하는 경향까지 보이게 된다. 이태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뚜렷한 특성도 없이 만들어져 왔던 이태리의 Light Music (경음악)에 식상한 이태리의 젊은이들은 영, 미국의 색다른 음악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레코드 업계도 자연적으로 영, 미국의 음악을 복제하는데에 급급했다.

2.1 Rock'n'Roll의 상륙[ | ]

i. Rock'n'Roll의 상륙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태리 Rock의 역사는 늦게 시작되었고 또한 적지않은 사회적 문제점도 남기면서 지체되었던 불운의 역사였다. 이태리 Rock이 지체되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Rock의 생산개체인 레코드 산업의 구조적 결점 때문이었다. Rock'n'Roll이 태동했던 195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말까지 이태리 레코드업계는 급속도로 변해가는 음악시장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수단이 부족했고, 새롭게 등장했던 젊은 소비자층의 취향에 결코 앞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중,장년층의 소비자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레코드업계는 짧은 시간내에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젊은 수용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떠한 준비도 갖추어 놓고 있지 않았다. Rock'n'Roll은 1956년 Elvis Presley의 음반들과 함께 이태리에 상륙하게 된다. 당시, 이태리 틴에이져들은 Elvis 이외에 Neil Sedaka, Pat Boone, Harry Belafonte, Paul Anka, The Platters 등의 음악을 뚜렷한 구분도 없이, 뒤범벅으로 즐겨 들었는데, 이러한 Pop Musician 들을 구분하게 되었고, Buddy Holly 나 Little Richard 그리고 Jerry Lee Lewis와 Chuck Berry 등이 이태리 음악시장에 부재해 왔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1950년대 말에 이태리에 상륙했던 Rock'n'Roll은 먼저 이태리의 북부와 대도시의 중앙부에 집중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제한적 현상을 보였다. 물론, 영,미국의 Rock'n'Roll과 Rock Music은 젊은 층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당시, 레코드 (소프트 웨어)와 플레이어(하드웨어)는 평균 노동자 봉급에 비해서 매우 비싼 편이었다. 또한 노동자층은 이러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습관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때문에 대도시의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우선적으로 이러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코드와 플레이어의 보급이 점차적으로 늘어나면서 젊은 노동자층들도 이러한 음악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PFM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약했던 Mauro Pagani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회와 어른들로부터 저항하기를 원했던 젊은이들은 Rock을 통해서 그들을 구별짓게 할 수 있었죠. 옷차림새나 행동으로 말입니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청바지등을 입고 기름을 발라 이마에 착 붙인, 곱슬한 앞머리로, 어슬렁거렸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차림은 노동자층의 것이었죠... 옷차림이나 이미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Rock을 추종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이나 50년대 Brescia의 크리스챤 민주당정신을 공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래가사에 있어서 듣는 이의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영, 미국의 Rock Music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강렬함과 개인적인 탐미적 경험이 풍부했으며 더구나 당시 이태리 노래들과는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이러한 음악이 흥미를 창출해 내고, 독특한 감흥을 주었던 것은 뮤지션들의 자신감 넘치는 연주와 노래 그리고 당시로서는 쇼크라고 할수 있는 몸놀림과 제스츄어였다. Rock과 함께 변모해 가는 의상과 패션은 음악 그 자체보다도 더 만연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매체와 무엇보다도 영화로 빠르고, 넓게 확산되어 갔다. 새로운문화를 즉각 접촉하고 가까이 했던 층은 중류층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또한 그것이 전파되는 것도 역시 젊은이들에 의해서였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한 그들은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들을 치장했고 종종, 간접적으로 심볼과 모델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추종하는 심볼과 모델들, 즉, Elvis와 Beatles 등이 우상화되었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세대들간에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태리의 젊은이들은 Rock 음악의 종주국이 겪어야만 했던 기성세대와의 견해적 충돌을 체험하면서도 미, 영국의 Rock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결코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굴복하고 만다. 그것에 그들의 오래된 전통을 맞추고 재창조하려 했으며 때로는 Rock에 관계된 이야기와 의미를 개조하기도 했다.

2.2 Beat Rock의 출현[ | ]

ii. Beat Rock의 출현

완전히 분류된 장르로서 Italian Rock은 1970년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음악스타일로서는, 1950년대말부터 가끔씩 등장하고 있었다. 때로는 몇몇 이태리 가수들이 그들의 데뷰곡으로 Rock이나 그와 유사한 작품을 들고 등장하기도 했으나 곧 그들의 경력을 포기해야 할 만큼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당시 이태리의 Rock이라고 불리웠던 작품들은 대개 보사노바나 왈츠와 같이 경음악으로 분류해야 할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이태리에는 오랫동안 Rock Musician 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Rock을 연주하던 Session Man들은 있었으나 그들의 주업은 무대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위해 댄스뮤직을 연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우로 파가니는 당시 음악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이태리 Rock의 출현은 이것을 믿지 않았던 레코드업자들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대중들의 요구와 압력에 의한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레코드업자들의 맏음의 부족은 1960년대에 등장하게 되는 "Beat"시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성공하고 있었던 "Cover Version (이태리 그룹들에 의해 재녹음된 영, 미국의 Rock)"으로 말미암아, 레코드업자들은 이태리 뮤지션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뮤지션들과 레코드사와의 관계는 업자가 "우리는 당신들이 해볼 만한 좋은 작품들을 갖고 있지!"라고 말할 때나 성립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아니면 "외국에서 이미 좋은 판매고를 거두었던 작품을 당신들이 해봐야겠어!"라고 할때만이, 레코딩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만약, 그룹으로서 "우리가 이것들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결코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레코드업자들의 편견과 강요로 많은 이태리 뮤지션들은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창작력보다는 모방하는 능력이 더욱 인정을 받았던 시대였다. 이태리 뮤지션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대중매체와 대중들이었을 것이다. 대중들은 알아듣기 힘든 영, 미국의 음악만을 선호했고 대중매체는 대중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영, 미국의 음악만을 소개하는데 급급했다. 따라서 음악시장에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 미국의 Rock에 대항하여 아주 적은 점유율이라도 얻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던 이태리의 뮤지션들은 모방식품이라도 들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태리 뮤지션들은 영, 미국의 Rock을 모방하면서도 이태리인의 기질을 잘 살려 성공했던 사례는 Renato Carosone가 대표적이다. 그의 곡 "Tu Vuo*ffa Americano" (미국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그대)에서 가사와 음악사이의 괴리가 어떻게 풍자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곡은 Rock을 통해 흉내내는 사투리로 된 가사를 통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또한 노래 속에서 *Okay*라는 단어를 자주 등장시키고 뚜렷한 나폴리의 멜로디를 섞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Beat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이태리의 Rock에 가까운 음악들은 영어권의 운율에 맞추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것은 "이태리 언어의 특성을 영어권 음악의 테두리안에서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였다. 이 원초적인 문제가 Beat 그룹들에 의해 해결때까지 이러한 이탤리 음악들은 불완전한 운율과 오래된 Canzone의 모든 빈약성을 계승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불완전성과 빈약성을 무너뜨린 최초의 Beat 그룹들이 바로 I Nomadi, I Corvi, I Rokes, 그리고 Equipe 84 등이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이태리 Beat 그룹의 음악적 원류는 크게 두 개의 맥류로 나누어져 있다. 1964 - 1965년에 결성되었던 많은 그룹들, 그들은 주로 Beatles와 Rolling Stones 등을 찬미하고, 추종하고, 그리고 흉내내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맞추어 무대에 등장했다. 또하나의 맥류는 소수의 그룹들로, 작은 극장의 밤무대에서 소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었던 그룹이다. 이들은 다시 두개의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리듬솔로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종종 솔로보컬을 대동하는 기본편성의 그룹과 여기에 색소폰, 피아노 그리고 가끔 트롬바와 오르간을 첨가시키는 다중편성의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사실, 두번째 맥류에 속한 그룹들은 실력과 재능을 고루 겸비한 인재들이었으나 첫번째 맥류의 그룹들에 의하여 항상 짓밟히고, 그늘에 가려져 왔던 그룹들이 대부분이었다.

최초로 Beat그룹들이 성공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이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이태리에서 Beat그룹이 많아지고 붐이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던 것은 수입악기점의 악기 판매고가 부쩍 늘어나고 담배가게의 담배판매고 역시 늘어나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유명한 외국상표를 달고 있는 Beat 악기들의 판매고가 급증하는 것은 Beat 연주자들이 그만큼 급증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음반업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음악적 가치관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Beat 그룹의 제1세대로서 재능있고, 현명하며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태리의 음악시장에 도전했었던 그룹들로서는 I Rokes, Delfini, New Data, Equipe 84, I Nomadi, 그리고 Ribelli 등이 있었다. 후에 이들의 음반 판매고가 영,미국 그룹들의 레코드 판매고에 육박하는 수십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게 될 줄이야 음반업자나 그룹들 자신조차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이 그저 "우연"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모순이 있었다. 한 그룹도 아니고 어떻게 많은 그룹들이 이러한 똑같은 우연을 만들어낼 수 가 있었을까....?

이들중 I Rokes는 이태리태생의 그룹은 아니었으나 이태리에서 활동해 성공한 특이한 경우의 외국인 그룹이다. 이들은 4인조 그룹으로서 리더인 Teddy Reno로부터 그들의 고향인 런던에서 결성되어 Beatles처럼 독일 함부르크로 가서 무명생활을 마치고 곧 이태리로 건너와서 데뷰작 "Un'A'nima Pura"를 발표한 후 Beat 그룹으로 변신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시끄러운 음악들로 분리, 구분되었던 그들의 음악들은 발표되자마자 의외로 잇따른 성공을 거두었다. Beat의 붐을 일으켰던 I Rokes의 첫번째 Beat곡은 "C'e Una Strana Espressione Nei Tuoi Occhi"로서 50만장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

그 당시, I Rokes와 쌍벽을 이루었던 라이벌 그룹으로서 Equire 84가 존재했다. 이태리 Modena 출신의 Maurizio Vandelli, Franco Ceccarelli, Victor Sogliani와 Alfio Cantarella, 이렇게 네명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Rolling Stones, Moody Blues, 그리고 Hollies등 영국 그룹들의 음악들을 이태리 감각에 맞게 변형시켜 크게 성공했다. Equipe 84는 후에 Progressive Rock 그룹으로 변신,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I Rokes와 Equipe 84의 대성공은 Italian Rock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들의 음악이 영,미국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Italian Rock의 정초석이 되는 Beat의 출현을 예고했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공백기도 없이, I Rokes와 Equipe 84의 뒤를 이어, 북이태리의 도시 Padova로부터 오르간주자를 앞세우는 4인조 그룹 I Delfini가 Beat음악을 내걸고 등장했다. 이들의 사운드는 보다 진보된, 전형적인 Beat음악으로서 밝고 쾌활한 "Stasera Sono Solo"와 "Quella Dei Sogni Miei"라는 곡들을 성공시켰다. 이와 더불어 Equipe 84의 출신지인 Modena로부터 I Nomadi라는 수퍼그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음악성은 이태리 Progressive Rock계에서 최고로 손꼽힐 만큼 매우 특이한 선율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Bob Dylan과 Sony & Cher 그리고 Barry McGuire와 Peter Paul & Mary의 Folk 영향권에 다소 영향을 받은 그들의 작품 "Come Potete Giudicar"은 초기 Italian Beat계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후에 많은 Progressive Rock 그룹을 배출시키게 되는 밀라노로부터는 Ricky Maiocchi 가 이끄는 그룹 I Camaleonti가 돌연 등장, Small Faces의 곡을 이태리적으로 변형시킨 "Sha La La La"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주로 외국곡들을 이태리어로 번안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리더인 Ricky Maiocchi는 곧 솔로로 전향, Linea Verde의 곡 "Uno In Piu"를 싱글로 발표, 커다란 성공을 맛보았다.

역시 밀라노 출신들인 I New Dada와 I Dik Dik은 데뷰 당시부터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그룹들로서 오늘날에도 그들의 음악은 인기를 잃지 않고 있다. I New Dada는 밀라노 중산층의 청년들로 결성된 그룹으로서 그들은 행운아들이었다. Rieti 지역 전체의 Festival에서 입상했으며, 로마의 유명한 Piper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Chissa Chi Lo Sa?", "Studio Uno", "Andiamoci Piano", "Musica da Film", "Aria Condizionata" 등등 많은 TV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1965년 Beatles의 이태리 순회공연과 1967년 Rolling Stones의 순회공연시 오프닝 그룹으로 참가했던 억세게 운이 좋은 청년들이었다. I New Dada는 사실상 커다란 음악적 재능을 지닌 그룹은 아니었다. 그들은 "Na Mia Vice", "*L*amore Vero", 그리고 Rhythm & Blues의 고전인 "T Bird"와 "I go Crazy" 등을 이태리곡으로 만들어냈고, 결성 멤버였던 Maurizio Arceri는 후에 솔로로 독립해서 감성적인 노래들을 부르는 가수로 전향했다. I New Dada, 남다른 음악적 경험과 창작력도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이태리의 Beat그룹으로서 많은 인기를 끌어 모았던 대표적인 그룹의 하나임에는 틀립없다.

I Dik Dik도 역시 활동적인 그룹이었지만 I New Dada와 마찬가지로 음악적으로는 능력이 없었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항상, 다른 뮤지션들이 이미 만든 곡들을 가지고 활동했다. 특히, 국외 히트곡들을 이태리어로 번안하여 부르곤 했다. 그러나 레파토리 선정에 있어서의 그들의 치밀함과 남다른 노력은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훌륭한 가창력을 지닌 Lallo Sbrizziolo라는 보컬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최대 강점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취약점을 보강해 줄 수 있었던 인물들은 바로 이태리의 대표적인 작사가 Mogol과 천재 음악가 Lucio Battisi였다. Mogol은 I Dik Dik을 위해 가사들을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초기 제작자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1966년, Mamas & Papas의 히트곡 "California Dreaming"을 번안한 "Sognando la California"로부터 Len Barry 가 불러 히트시킨 "1-2-3"에 이르기까지 리바이벌한 곡들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에 있어서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면, 그것은 1960년대말 "음악에 정통한" 위대한 대중음악 작곡가 Lucio Battisti와의 만남이었다. Lucio Battisti는 Mogol과 함께 I Dik Dik의 작곡가, 제작사로서 합류했다.

Verona출신의 선두 Beat그룹 I Kings가 등장했을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당시 인기절정의 미국 그룹 The Kinds와 혼동했고, 그 덕에 그들은 유명해질 수 있었다. 또한 같은 지역 출신인 Dino도 Bob Dylan의 곡을 리바이벌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Parma 출신의 I Corvi는 결성초에 "Datemi una Lacrima per Piancere" "Lece" "Raggazo di Strada" 등의 곡을 가지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Beat그룹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Fausto Leali와 I Ribelli, 두개의 형태로 분열되었다. Franco Leali는 1959년부터 Brescia지역에서 프로 뮤지션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던 비틀즈의 곡들을 연구, 분석하고 자신의 곡으로 만든다음 들려주곤 했었다. 그는 이태리에 비틀즈의 곡들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틀즈의 곡으로서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비틀즈의 외모를 흉내내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비틀즈의 음악을 분별력있게 수용한 뮤지션이었다.

1963년, Fausto Leali는 그룹 I Novelty와 함께 오랫동안 비틀즈의 레코드를 듣다가 비틀즈의 " Please Please Me"를 이태리어로 번안해서 레코드 데뷰를 하게 된다. 그는 "La Campagna in Citta"식의 이태리어로 된 제목을 내걸고 비틀즈의 작품들을 번안하거나 변형해 잇따라 음반시장에 내놓았다. 실질적으로 Fausto Leali는 비틀즈 계열에 속하는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항상 뒤에 그룹을 대동했던 보컬리스트, 연주자로서 그리고 훌륭한 뮤지션으로 당시 이태리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드러머 Gianni Dall*Aglio가 이끌었던 그룹 I Ribelli의 역사는 Celentano의 Back그룹으로서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라는 보잘것없는 역사를 갖고 있으나 두명의 기타리스트들, Giorgio Gaberi와 Gino Santercole와 함께 독자적으로 이라는 싱글을 발표, 30만장의 판매기록을 올리기도 했다.

1966년은 이태리에서 Beat음악이 커다란 붐을 이루었던 뜻깊은 한해였다. Beat음악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이태리 음악계를 강타했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기존 Beat그룹과 더불어 많은 신생 Beat 그룹들이 등장, 무수히 많은 곡들을 만들어 내었다. Beat의 효시 그룹인 Equipe 84는 "Resta"와 "Io ho in mento te"를, I Rokes는 "Ascolta nel Vento"와 "Che Colpa abbiamo noi"를 발표했고, I Corvi는 "Sono un Ragazzo di Strada"를, I Dik Dik은 "Sognando la California"를, I New Dada는 "Non Dirne Piu"를 I Nomadi는 "Non non Ci Saremo"를 I Camaleonti는 "Io Lavoro"를 I Ribelli는 "Alla Buena de dios"를, 그리고 I Giganti는 "Tema"를 각각 발표했다. 당시, 이태리 대중음악계의 우상으로 군림했었던 Rita Pavone, Gianni Morandi와 Mariolino Barberis 등의 그늘속에서도 이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음악층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Beat음악의 붐은 빨리 달아 올랐던 만큼, 1년만에 갑작스럽게 사그라 들고 만다. 1967년 서로 라이벌로서 Beat 계를 이끌었던 Equipe 84와 I Rokes가 갑작스럽게 활동을 정지햇고 해산위기에 봉착했다. 그동안 그들의 앨범 판매고는 엄청났고 인기 또한 하늘로 치솟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들의 해산 위기는 Beat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Equipe 84는 Mogol의 작사와 Lucio Battisti의 작곡으로 된 "29 Settembre"라는 곡을 끝으로 그들의 거대한 Beat시대를 마감시켰다. I Rokes는 어렵게 해산위기를 벗어나 당시 서서히 불어오는 히피 문화 (Flower Culture)를 유입시켰다. I Giganti는 "Proposta"라는 곡으로 대중가요제 Sanremo에 참가했고, I Nomadi는 Beat계에서 탈피, Guccini와 함께 본래의 Modern Folk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Beat계열의 곡 "Dio e Morto"는 의외로 높은 반응을 얻었다. I Ribelli는 Celentano와의 활동을 중지하고 새로운 가수 Demetrio 와 함께 "La Follia"와 같은 Easy Beat류의 음악과 "Pugni Chiusi"와 같은 새로운 멜로디를 그들의 음악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I Dik Dik은 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를 이태리어로 번안한 "Senza Luce"를, I Camaleonti는 "Hamburg"를 번안한 "L*ora della more"를 발표했다.

1967년, 1년간 잠시 빛을 발했던 Beat Music 시대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을 때, 이태리 Beat계가 음악계에 기여한 업적에 대한 평가는 창조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내세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남겼음에 틀림없다. 이태리 대중음악사의 논리적인 관점에서, Beat시대는 복제 시대를 의미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외부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빌어온 시대였으며 긍정적으로 볼때 확실히 성공했던 하나의 음악 조류였으며 또한 연주력을 위주로 음악성을 논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연주 위주 형태의 음악은 사실 이태리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와 선조의 깊은 음악적 뿌리를 갖고 있는 이태리인들의 기질이 바로 연주를 강조하는 Beat시대부터 점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가장 커다란 업적은 1970년대초에 화려하게 타오르게 되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을 잉태했다는 점에 있다. 즉, Beat계는 앞으로 우리가 이 지면을 통해서 심층적으로 다루게 될 Italian Progressive Rock의 밑거름과 정초석이었다. Beat계의 출현과 퇴장으로 인하여 New Trolls, Formula 3, Le Orme, Banco del Mutuo Soccorso, Il Balletto di Bronzo, Latte e Miele 등 Italy Beat의 제2세대, Progressive Rock그룹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3 FESTIVAL[ | ]

『HoPE (Progressive Rock)-호프 음악이야기 (go SGGHOPE)』 367번 제 목:[아트록잡지] 2권 이탈리안 록의 역사(2):페스티발 올린이:boryking(정용상 ) 97/02/25 23:04 읽음:141 관련자료 없음


또 다시 올립니다 이번엔 아트록 매거진 2호에 실린 특집입니다.
음 이테리 프로그레시브록을 좋아하시는문들 많죠.
아마 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겁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테리록을 좋아하거든요....

ITALIAN ROCK의 역사(제2회) "FESTIVAL"편 제1부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Beat그룹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이다. Beat그룹의 침체는 외국음악의 완전한 복제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롭게 변형된 형태의 이태리 음악이 등장하리라는 예고였다. 당시, 이태리 대중음악계는 완벽하게 양분된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SANREMO FESTIVAL를 통해 대중들의 이목을 끌어 볼려는 대중성과 상업성 띤 가수들이나 그룹들이 존재했었던 반면, 미, 영국의 Psychedelic Rock(Flower Movements)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젊은 뮤지션들이 자신의 이태리적 기질에 수입된 새로운 음악 영양소를 섭취하여 독특한 Italian Rock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후자의 뮤지션들과 그룹들이 대중들 앞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2-3년의 꽤 오랜기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외부의 도움(레코드사나 후원자) 없이 자비로서 창작과 연습을 해야만 했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그들의 작품을 제작할 레코드사가 없었으며, 발표할 공연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국은 물론, 커다란 공연장이나 소규모의 극장과 클럽 등도 그들에게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자 마자 이러한 악조건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Lucio Battisti와 Mogol(창간호 참조)의 아이디어로 창립된 소규모 레코드사 Numero Uno의 출발과 함께 많은 신흥 마이너 레이블들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L'Orchestra, Cramps 그리고 Ultima Spiaggia등의 설립은 이태리의 수많은 젊은 뮤지션들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대기업들도 산하에 마이너 레코드사를 설립, 레코드 업계에 불어닥친 불황에 대처하는 자세를 취했고, 이미지 향상을 위해서도 과감한 투자를 해야만 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새로운 이태리 노래(Nuovo Canzoniere Italiano)"라는 슬로우건 아래 급속도로 이태리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한다.

보다 깊숙히 이태리의 Rock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위의 현상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Underground잡지 "Re Nudo"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밀라노를 본거지 로 미,영국의 Hippie문화를 소개했었던 "Re Nudo"는 당시 젊은 세대에게 적지 않은 영 향을 반영했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자유의 물결을 심어?獵쨉?선두주자 역할을 했던 Media였다. 그러나, 잡지의 성격상 좌익정당에 대항하는 문화를 소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는 이태리의 좌익정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태리 좌익정당은 이 잡지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주입시 키고자 했다.

그리고 Rock이라는 젊은이들의 대중음악을 통해서 정당의 이익을 얻고자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Feste del Proletariato(프로레타리아 청년들의 축제)"로??나타난다. 이러한 축제는 1969년 여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었던 Woodstock Festiv al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당시, 이태리에는 수많은 신진 Rock그룹들이 결성되고 있었 으나 그들의 공연을 받아줄 연주장소(클럽이나 극장)가 거의 없었다. 클럽주인이나 극 장주인은 그들의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약, 빌릴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장소 사용비가 터무니 없이 비싼 장소였다. 좌익정당은 바로 이점을 이용하여 젊은 뮤지션?涌“? 제공할 수 있는 공연장 즉, Woodstock과 같은 장소를 찾게 되었고, Rock공연을 통해 그 곳을 찾는 수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정치이념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이태리의 극장에서는 미,영국의 많은 Festival을 영상처리한 영화들을 상영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음악기록 영화들을 보았던 이태리의 뮤지션들과 대중들은 이태리에도 저러한 음악축제가 열렸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좌익정당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옥외 장소를 제공했으며, 이태리의 뮤지션들과 대중들은 그 장소를 통해 음악적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Feste del Proletariato(프로레타리아 청년들의 축제)"를 시작으로 많은 Festival이 이태리 도처에서 개최되기 시작한다. 최초에 정치적 목적을 띠었던 Festival은 점차적으로 진정한 음악을 위한 축제로서 변모해 갔고, 이러한 Festival을 통해서 진지한 음악만을 고집하는 소위 "Progressive Rock"과 "Avant-Garde"를 지향하는 그룹들이 황금기를 맞게되는 것이다. 실력과 창의력만 있으면 무명의 신진 그룹이라도 거대한 Festival에 참가서를 낼 수 있었고, 지금 우리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많은 이태리 그룹들이 바로 이러한 Festival을 통해서 데뷰를 하게된다.

수십개의 크고 작은 이태리의 Rock Festival에 대한 기사들을 주의 깊게 읽다보면 당시의 입장료(티켓값)이 무척 저렴했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관계된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태리의 청중들은 정열적이고 다혈질적이며, 쉽게 열광,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태리 대중적 기질이 1971년 7월 5일, 밀라노에서의 Led Zeppelin공연에서 "폭동"이라는 현실로 드러났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티켓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력으로 공연장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들의 주장은 "음악은 우리들의 것이다-그것을 갖겠다!"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모든 공연장은 저지하는 경찰과 무료티켓을 주장하는 젊은이들간의 전쟁터로 변모했다. 이것을 염려한 프로모터와 공연 관계자들은 Festival의 입장료에 대해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외에도 Italian Rock Festival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남아있지만 뒤로 미루어 두고, 아래 지면을 통해 당시, Festival 기사들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하여 소개한다. 너무나 방대한 자료들이기 때문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2회에 걸쳐 소개하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추서: 여러분들이 아래의 기사들을 통해서 Italian Progressive Rock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될 수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3.1 Jam Session과 Festival에 대한 연주자들의 토론[ | ]

1. Jam Session과 Festival에 대한 연주자들의 토론

(LA JAM NEL POP ITALIANO-1973년 8월 21일 화요일 RIMINI에서) 음악적인 발전에 Festival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대중과 음악인들이 함께 호흡할 수 있다. 서로의 대화는 무척 중요한 것이다. 특히, 서로 닫혀져 있는 음악인들끼리의 대화와 화합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태리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Rock의 한 양상으로 째즈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이른바 Jam이라는 것이 있다.

여름에 Rimini의Il Club dell'Altro Mondo(다른 세계의 클럽)는 로마근교의 넓은 아아치 모양의 해변에서 밤마다 일하는 음악가들을 위한 확실한 근거지이자, 이태리 Rock의 중심지가 되었다. 올해 역시, 전통적으로 Altro Mondo의 무대는 주목할만한 몇명의 세션을 받아들였다. Premiata Forneria Marconi, Banco Del Mutuo Soccorso, Formula Tre의 매우 충실한 멤버들부터 Osanna, Il Balletto Di Bronzo의 멤버들과 Alan Sorrenti와 Area에 이르기까지 좀더 이색적이고 암시적인 멤버 구성속에서 모든 팀들에게 약간의 명예를 안겨다 주었다.

1년동안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예상했었던 것보다 매우 부족했다. 단지, 매우 중요한 Alberto Radius의 데뷰 솔로앨범만이 발매되었을 뿐이다. 행동보다는 말과 계획만이 앞선 한 해였다. 누구의 실수인가? 음악가들 사이에 서로 자신들의 음악과 함께 토론하거나 충고하는 식의 우정이나 우애가 있었는지 각자에게 묻는다. 영국의 Ian Anderson의 모습에 많은 아름다운 가면과 과대광고를 했다라는 것이 전부인가를 묻는다.

이번 Session은 Italian Rock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모든 뮤지션들이 Session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Banco Vittorio Nocenzi는 "Jam은 자신의 그룹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일하고, 그 나머지 틈이 날때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음악적 접촉을 시도하는 것은 아티스트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순간들이다"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션은 뮤지션 자신의 정확한 분석을 제공하며, 뮤지션의 가능성, 발전성을 확인해 주며, 뮤지션이 개선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한편, 다른 뮤지션들의 연주를 감상하는 것과 자신의 음악공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가르쳐준다. 참가자 전원이, 표현 감각의 일체감과 자제심에 대한 감각까지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중 만약, 어떤 연주자가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돋보이려고 한다면 그는 자연적으로 소외될 것이다. Jam이 동반시키는 음악적 구조는 역시 즉흥연주이다. Il Balletto di Bronzo의 키보드주자 Gianni Leone는 Jam을 통해서 역시 활기찬 즉흥연주를 펼친다. 그는 Jam을 통해 더 좋은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고, 즉흥연주의 중요성을 늘 피력해 왔다. Formula 3의 Alberto Radius는 "음악이 더이상 취미생활이 아니고 직업이 되었을때, 음악을 자기자신의 피와 땀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세션이란 불가피한 요소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데뷰 솔로앨범 역시 Jam형태로 비롯되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종종 Jam Session은 서투른 뮤지션들 사이에서 혼란과 지루함과 그리고 비생산적인 소음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PFM의 Franz Di Cioccio는 Jam Session으로 부터 비롯될 수 있는 단점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항상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 형편없는 Jam Session에서 순진하게 함정에 빠져 버리곤 한다. Jam의 본질은 느낌을 만드는 데에 있다. 대담한 모습을 감추면서, 자신의 과대노출을 억제하면서. 느낌으로 연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서 좋은 아이디어와 추측 그리고 새로운 시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Jam Session에서의 자기과시는 인간을 저속하고 추하게 만든다. 나는 기본바탕에 필요할 것 같은 리듬파트의 부분에서 이러한 단점을 발견한다. 타악기주자는 독주가가 아니다. 오히려 솔로연주자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가라 앉히면서 연주에 전념해야만 한다. 이러한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무대 위에는 1인자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고, 커다란 혼란으로 연주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Mauro Pagani가 그의 말에 덧붙인다. "내 의견으로는 Jam Session의 단점이란 멤버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균형의 부족이다. 몇몇 연주자들은 자기 동료들에게 결코 공간을 남겨둠이 없이 혼자서 연주에 열광적으로 빠져든다. 무엇이든 경험을 통해 보완되어야 하며 이러한 나쁜 현상은 아직까지 매우 드물게 일어나고 있다." Alan Sorrenti의 베이시스트인 Vito Manzari가 그의 말을 받는다. 이태리에서 지금까지 지켜보아온 나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것들을 Session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집중력과 동일성에 대한 부족에서 비롯된 오류이며, 그 속에는 단지 과대망상과 과시욕이 있을 뿐이다. Saint Just의 여성 리더 Jane Sorrenti와 Tony Verde등도 그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다.

토론에 참가한 뮤지션들은 레코드 발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들은 이태리의 ?슭퓽岵?배경을 지배하고 있는 상부구조는 현재, 미, 영국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Fe stival이나 Jam Session의 레코딩과 같은 것을 허가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화제를 돌려 이태리 음악계의 깊은 곳을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논쟁적인 뮤지션은 PFM의 Franz인 것 같다. "대중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커다란 문제점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작품이 녹음된 뒤 그 작품을 발매하는데 독점을 요하는 것은 이태리 음악에 있어서는 큰 손실이다.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최근, 구속력이 있고 매우 긴 기간동안의 계약을 체결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오히려 영국에서는 앨범발매 횟수에 대한 계약을 채택하고 있으며, 아티스트가 보다 더 한가롭게,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매니저에게 묶여있다. 그래서 모든 그룹의 각 멤버들은 각기 별도의 계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멤버들 각자는 그룹과 함께 어떤 특정수의 음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후에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부담없고 자유스럽다. 여기서 외국 음악시장의 Session에 대한 정당화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소속그룹인 PFM은 이태리 레코드업계에 대해 위험을 느꼈고, 무명으로 남아있지 않기 위해서 개인별로 활동하고 있던 다섯명의 연주자들로서 계획적으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Banco의 Vittorio Nocenzi는 "이태리에서 Rock그룹의 구조라는 것은 아직도 사춘기 소년의 단계에 놓여있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오직 레코드 녹음뿐이다. 시장은 아직도 환기되어 있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Banco의 Organist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첫번째 가장 좋은 길은 앨범을 솔로형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음악가는 역시 개인적인 음악성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Vito Manzari가 이태리 음악계의 다소 어두운 상황을 말한다. "이태리에서 보다 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레코드 녹음실이 두,세개 더 존재한다 하더라도 좋은 레코드 분배처를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중의 대부분은 아직도 덜 성숙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Festival이나 콘서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연장에 몰려들어온 청중들은 여러분들의 진보적인 작품이나 실험성, 예술성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당신의 가장 유명한 곡을 요청한다. 물론 그들중에는 훌륭한 청중도 역시 존재한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들은 무대위에서 연주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Mauro Pagani가 말한다. "음반에 대한 어떤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또는 대중들을 위해서 시간들을 할애하여야 한다. 음반으로 보급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실 대중들과의 만남은 우연적이지 않게 Festival과 같은 계획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라는 것을 핑계삼아 대중들과의 그러한 만남과 약속을 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엉뚱하게도 Il Balletto Di Bronzo의 키보드주자 Gianni Leone는 음반에 대한 Jam만을 이야기 한다. "나는 솔로가 두각을 나타내는 앨범을 구상하고 있다." Il Balletto Di Bronzo의 Organist가 계속 말한다. "모든 곡 하나하나마다 각 솔로주자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그의 주장은 Pink Floyd의 Ummagumma를 의미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대중이 선택을 잘 해주기를 바랄뿐이다.

여기에 모인 뮤지션들은 Session앨범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러한 일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일을 실현하고자 했던 계획이나 믿음이 결코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태리 대중이 바랬던 이태리의 Super Session앨범은 결코 발매되지 않았다. Alberto Radius는 곧 Demetrio Stratos와 함께 자신의 솔로앨범을 녹음할 것이다. Demetrio는 Area의 싱어이며 그리이스인이였다. Radius는 5년전 부터 Demetrio와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었고 그는 전에는 Ribelli의 멤버였지만 지금은 Area의 멤버이다. Demetrio가 말한다. "Session에서 나와 같은 싱어의 경우에 새로운 차원, 연주에서 나의 목소리를 삽입하기 위한 자유로운 공간을 발견한다. 초청된 세, 네명의 가수의 목소리에 보다 비중을 많이 할애한 음반은 아마 훌륭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커다란 힘이 있다. 서로가 악기도 빌려주고, 기술적인 부분들을 함께 연구한다. 순회중인 영국이나 미국 뮤지션들도 마음을 열고 우리와 Session을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3.2 벌거벗은 임금의 페스티발 : 1973년 7월 8일 기사[ | ]

『HoPE (Progressive Rock)-호프 음악이야기 (go SGGHOPE)』 375번 제 목:[아트록잡지]3권 이탈리안 록의 역사(3) 올린이:boryking(정용상 ) 97/03/05 15:58 읽음:189 관련자료 없음


Italian Art Rock의 역사 ( 제3회 )

"Festival"편 제2부

1. Il Festival di Re Nudo

벌거벗은 임금의 페스티발 : 1973년 7월 8일 기사

(1) Preludio

어떤 불투명한 수준을 놓고 매년 여러 뮤지션들을 초청하여 이루어지는 Festival della Musica d'Avanguardia delle Nuove Tendenze 가 존재한다. 3년 전에는 PFM과 함께 항구에서. 2년 전에는 Banco와 Alan Sorrenti와 함께 로마에서 훌륭하게 행사가 치루어졌고 올해는 Dedalus, Piazza delle Erbe, Cervello, Free Love, Alberto Motore, Oro, Perigeo 와 Vince Tempera등의 장래가 촉망되는 팀들과 함께 나폴리에서 행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인기스타인 Patty Pravo를 섭외한 것에 그들은 자만하고 있다. 전위음악과 더불어 진취적인 성향이 있는 뮤지션들을 엄선했었던 과거와 달리 다소 상업적인 경향을 띄며 이 행사는 존재하려 한다.
우리들에게 해롭고도 너무나 싫은 바이러스균으로 오염된 이러한 무모스러운 이 행사의 연결고리는 심각하게 행사를 손상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특히 이태리에서 현대음악의 옳은 발전에 대하여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이제까지 3회에 걸쳐 이어져 왔었던 이 행사의 전통과 행복했었던 시간들 그리고 우울했던 순간들이 변색되어 진다.

(2) Toccata

1. Pubblico Napoletano : 본질적으로 야채와 과일재배에만 열중인 나폴리 시민들은 역시 깡통과 토마토 그리고 신문을 무대를 향해 던지는 등 무대위를 종종 공격했었다. 그들은 공연장을 다녀 갔다는 기념품으로 몇개의 마이크로폰을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현명한 대중은 음악을 즐길줄 알았고, 그것을 들을 능력이 있었고, 또한 훌륭한 연주인들에게는 뜨겁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렇지 못한 연주인에게는 토마토를 던지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2. Patty Provo :관중들로부터 몇차례의 토마토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정치적인 내용으로 교활하고 빈틈없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우리는 정치를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Pravo는 정치에 관한 그녀의 언급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에 토마토를 청중들이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지러진 무대위에서 Lou Reed의 노래들을 망가뜨리고 Sonny & Cher의 곡을 부르기도 했다.

3. Gli Sfortunati : L'Uovo di Colombo는 그들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한 경향이 2번이나 급변했던 Alusa Fallax. 그리고 확장된 연주를 들려주었던 Museo Rosenbach. 그들이 매우 흥미로운 앨범을 지금에 와서야 취입한다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4. Alan Sorrenti : 무대위에서 때때로 보여주었던 그의 수줍음을 로마에서 떨쳐버리는데 성공했다. 나폴리 출신인 Alan은 명쾌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음악으로 청중들 모두를 흥분시키는 능력이 있다.

5. Vinvenzo Tempera : Vince 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Tempera 는 피아노의 작은 신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Vincento는 아직도 어리며 테이블에서 소녀들과 함께 먹는 것을 즐기는 철없는 소년임을 여러분들은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는 항상 배고파 한다. 그 역시 배멀미를 한다는 사실은 페스티발 전체에서 가장 관심있고 재미있는 개성을 보여주었던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인간미이다.

6. Studio Sette : 오늘날 위험을 무릅쓰고 팝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나폴리의 어느 작은 레코드사의 이름이다. 어떤 예술적 표현의 한 형태에만 몰두했었던 음악의 중심적인 산실이라는 점에서 이 소규모의 레코드사는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7. Eddie Ponti : 품위를 지니면서 토마토 세례를 선택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가 원하는 만큼 아직 이태리 Pop계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가 힘들게 얻은 결과는 그가 이태리 팝의 대부임을 입증시킨다.
ciuffini처럼 머리를 쓴다면 그의 임무를 완벽하게 달성시키게 될 것이다.

8. Living Music : 영어가 록의 공명에 있어서 음운상으로 적절할 뿐만 아니라 나폴리의 대중과 의사 소통하기에 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데뷰엘범을 발표했었던 그룹이다.

(3) Fuga

그렇다면 이러한 페스티발은 계속 존재해야만 하는가? 정말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행사의 가장 훌륭한 공적이라면 TV조차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혀 관심이 없었던 Media들이 이러한 행사에 놀라운 관심과 흥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Sorrnti 나 Banco와 같은 뮤지션들과 그룹들이 광범위하게 알려질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이 Dedalus에게도, Free Love에게도, 다른 가수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페스티발은 상업적인 어떤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는 것이 명백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들은 토마토를 계속 무대를 향해 던지게 될것이다.


3.3 제 2회 Davoli축제 : 1973년 4월 13일의 금요일[ | ]

2. Il 2'Raduno Davoli

제 2회 Davoli축제 : 1973년 4월 13일의 금요일

올해 역시 Reggio Emilia에서 Davoli축제가 거행되었다. Willy Davoli에 의해서 기획된 팝 축제이다. 성능이 좋은 앰프덕분에 참가한 그룹들은 그들의 음악적인 기량과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최고의 무대연주를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공연은 지금껏 이루지 못했던 가장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Il Rovescio della Medaglia, Garybaldi, De De Lind, Alphataurus, Pholas Dactylus, Bottega del Fabbro, Chippies 등이 이번 Pop Davoli 음악축제의 참가명단이다. 약 2천5백명의 젊은이들이 스포츠센터에 모여들었다. 기획자인 Willy Davilio 와 Franco Norma는 적지않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고, Banco Del Soccorso는 무리한 스케쥴때문에 참가할 수 없었다. Gianni Nero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참가의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성공은 거의 완벽했다. 모든 공연무대는 관중 모두에게 커다란 의미를 주었으며, 참가한 높은 수준의 그룹들은 쉼없는 6시간의 긴 음악적 여정을 무리없이 잘 마무리 지었다. 모든 연주자들이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관중들은 그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연출자, 공연자, 그리고 관객은 하나처럼 움직였다.

참가 그룹은 모두가 레코드녹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연주력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Bottega del Fabbro경우는 무대위에서 그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그룹으로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사운드를 거리낌 없이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아마도 기술적으로 가장 잘 준비된 그룹인것 같다. 이태리에서 가장 촉망받고 있는 유명한 그룹 Le Orme멤버들의 의견에 따르면 Pholas Dactylus의 음악은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풍부한 사운드를 자랑하며 또한 문화적으로도 가치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Chippies역시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유능한 드러머인 Raul Papini와 그의 형제는 훌륭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공연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그룹은 역시 Alphataurus였다. 그들은 한마디로 완벽한 그룹이라고 보아야 될 것이다. 신인그룹, 언더그라운드 그룹답지 않게 그들은 실험성 뿐만 아니라 최근의 젊은이들이 즐기고 있는 강렬한 사운드, 여기에 세련되고 미세한 감정이입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이 연주하는 동안 청중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부터 날아온 괴물들인가? 수준높은 Pop Festival 에는 결코 빠지지 않는 Garybaldi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Bambi Fossati 는 [Sound Music]을 충분히 연주해 주었다. 그는 Beatles의 곡 [A Hard Day's Night]을 훌륭하게 번안하여 행사장의 분위기를 북돋아 주었다.

공연장은 예외적인 De De Lind의 출현으로 더욱 뜨거워지게 되었다. 베이스 주자인 Eddy Lorigiola와 드러머 Ricky Rebajoli가 펼치는 스윙재즈의 경쾌한 리듬과 명확한 연주 덕분에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차게 된다. 그리고 기타리스트이자 풀룻주자인 Matteo Virolli의 기교와 보컬리스트이며 기타리스트인 Vito Paradiso와 다중악기 주자 Gilberto Trama의 탁월한 기술적 역량은 우리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의 긴 제목의 데뷰앨범 [Io Non So Da Dove Vengo E Eon So Dove Mai Andro. Uomo E Il Nome Che Mi Han Dato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도 알 수 없다....내게 이름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라는 그들의 음반과 이 행사의 라이브 연주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이태리 팝의 신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있는 Il Rovescio Della Medaglia도 가장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으며 그들은 아마도 올해에 가장 성공했었던 그룹인 것 같다. 그들의 무대는 스트로보(사진촬영시에 쓰는 광도높은 방전관)로 고정된 조명아래 화려한 동작과 수천개의 색색깔로 된 물방울과 함께 환상적인 공연장면을 연출했다. 연주에 있어서도 대단히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었고 관중들로부터 커다란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올해가 바로 Il Rovescio della Medaglia의 해가 될 것인가? 그룹 멤버 6명 모두 높이 평가받을만한 기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음악적 능력은 그들을 신뢰하도록 만든다.

3.4 Il Festival Al Di Mestre : 1973년 7월 15일 기사[ | ]

3. Il Festival Al Di Mestre : 1973년 7월 15일 기사

Un Primo Passo [첫행진] ... 기획자 Gianni Ravera 덕분에 Rock음악계의 새로운 그룹들과 함께 국제적인 첫 만남이 베네치아 Mestre에서 개최되었고, Rock음악 제작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표출되었다. 이 행사에는 이태리의 새로운 Rock물결에 자극을 받은 Jon Hiseman 의 Tempest, Amon Duul II와 Beggar's Opera와 같은 외국 그룹들도 참여했다.

Pop 페스티발과 같은 매우 복합적인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어렵고 또한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태리 안에서는 청중들의 매우 다양한 요구를 이상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만 할 것 같다. Festival 기획자들은 Pop의 정통성 위에서 순수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만족시켜야 하며, 입장권을 구입한 열렬한 관중들의 폭넓은 음악적 경향에 촛점을 맞우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음악적 기만함과 무례함 그리고 Radio, TV등의 무지에 대항해야만 한다. 매우 망신적인 팝 페스티발이 이 때문에 생겨났고 이러한 페스티발들이 늘 냉담하게 분석되어졌다. 또한 페스티발에 대한 이러한 분석들은 음악적인 내용을 배재시켰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다. 특히, 외형만을 중시한 행사들이 대중들의 가장 절실한 음악적 욕망을 져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현재, 만연하고 있는 아마츄어 정신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종합하고, 하나로 합치는 이상적인 팝 페스티발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 다행히 "환상곡"의 위대한 조국 이태리는 이러한 많은 전형적인 행사들을 개최할 준비가 되어있다. 전통이나 유행을 뛰어넘어 Rock음악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미, 영국에서 생성되었던 본래의 구조로부터 거의 벗어나 있는 독특한 이태리 특유의 Rock이다. Mestre에서 개최된 "POP음악의 새로운 그룹과 함께 하는 국제적인 만남" 제1회 행사는 이러한 취지에서 비롯된다. 음악적 행사의 숙련된 기획자 Gianni Ravera...그리고 그의 부친 이름아래 행사가 놓여진다. 이제 종교적인 침낭을 거부하면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듣게 해주는 새로운 차원의 페스티발이 준비되었다.

이 페스티발의 매우 중요한 목표는 유러비전으로 방송, 전파되는 것이다. 기획자인 Ravera는 TV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페스티발에 참가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음악을 즐겁게 들려주는 것 만으로는 이제 충분치 않다. 배고픔과 모순에 도전하면서 연주에 그들의 일생을 바치는 이러한 예외적인 젊은이들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확실히 TV방송은 아주 중요한 목표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젊은 뮤지션에게 그들이 어렵게 공동생활을 해오면서 이제 그들이 성공한 것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Ravera는 TV방송의 재개가 이 패스티발을 도와줄 정도의 커다란 힘이 있다고 믿는다.

명백하게 모든 것들이 이제는 아마츄어를 넘어선 단계에 놓여있다.
우리는 Jumbo의 떨어지는 듯한 울림, 격렬한 음의 대비로써 풍부한 음악을 행하는 L'uovo di Colombo의 유창한 Rock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그룹들은 이제 이태리 최고의 수준에 도달해 있다. 무엇보다도 Jumbo의 리더 Alvaro Fella는 가수이자 작곡가로써 이태리 정상에 올라 있음을 입증한다. 또한 Jumbo를 이태리 Rock계의 최고봉으로 올려놓은 것은 플륫주자인 Dario Guidotti의 덕분이기도 하다. 이 페스티발에서 나폴리의 특성과 전통을 보여주었던 Il Balletto Di Bronzo는 베이스주자 Fungo와 가수인 Cacao와 함께 소개되었다. 이들은 결코 전에 함께 연주한 일이 없었다. 필연적인 혼돈 가운데 그들의 [Jumping Jack Flash]는 가장 생기있는 연주로써 페스티발 무대에 올려졌다.
통상적으로 늘 시끄러운 나폴리인들 기질에 어울리게 Cervello도 역시 참가했다. 그들은 이전의 페스티발에서 보여주었던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그대로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Cervello 를 소개했던 역시 나폴리 출신의 Osanna가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다양한 제스츄어와 Tony Marcus의 신비한 바이올린과 함께 무대의 여기저기를 누비고 돌아다녔다. Marcus, 그는 미국인 연주자였으나 지금은 확실히 나폴리의 시민이 되어 있었다. 또다른 미국출신은 Eugenio Finardi이다. 그는 매우 호감을 느끼게 하는 젊은이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무명 그룹이 있는데, 그들의 그룹명은 Odissea이다. 이 그룹은 매우 흥미를 갖게 하는 그룹으로 매우 경쾌하고 광대한 음악을 제공한다. 가장 훌륭한 수준의 가사로 그들의 음악을 장식하고 있으며 내세우고 있는 테마 자체도 체계가 잡혀있다.
일찌기,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소 중세적인 경향이 있는 두 그룹은 Pizza delle Erbe 와 La Tarola Rontoda이다. Pizza delle Erbe는 보다 더 고무적이고 독창적인 그룹이다. La Tarola Rontoda는 보다 더 풍부한 경험과 훌륭한 기교를 지녔다. 또한 무익한 음악의 개념에서 우리들의 뇌리에 여전히 얽매이면서 존재하고 있는 두 그룹 Campo di Marte와 Mucchio가 있다.
그들 가까이에는 항상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논쟁적인 내용을 싣고 있는 Franco Battiato가 존재한다. Franco는 그의 녹음실에서 전자음악이라는 실험작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독일인들의 성역지대로써 알려져 왔었던 전자음악에 그가 이태리인으로써 과감하게 도전한 것이다. 우리들의 환상은 이것으로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이태리에서 더 많은 뮤지들에 의해서 이러한 환상이 계속 터져나오리라는 것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3.5 Rassegna di Musica Contemporanea : 1973년 7월 27-29일 공연에 앞선 기사[ | ]

4. 3a Rassegna di Musica Contemporanea : 1973년 7월 27-29일 공연에 앞선 기사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 지난해에 Gualdo Festival로 부터 논리적 발전을 이루었던"La 3a Rassegna di Musica Comtemporanea" 가 해수욕으로 유명한 장소에서 개최될 것이다. 행사에는 진보적인 Rock작품들로부터 Jazz와 Folk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그룹들이 선보이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경쟁을 자극하는 일 없이 유명한 그룹이든 그렇지 않은 그룹이건간에 누구나 실력이 있다면 참가할 수 있다. 솔로 뮤지션들은 무대를 결코 포기하는 일 없이 그룹들과 함께 즉흥으로 연주할 것이다. 동시에 보다 더 조직적인 구성을 혼합하면서 결국 진정한 흥행의 컨서트를 취할 것이다.

Rassegna di Musica Contemporanea는 개최되었던 첫해부터 Pop, Folk, 그리고 Jazz를 접목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도는 두번의 대회로써 더욱 안정된 양상을 보이면서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7월 27일부터 30일까지 Civitano Marche에서 이태리를 대표하는 이름들이 모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름들을 살펴보자. Progressive Rock 에서는 Osanna, Quella Vecchia Locanda, Premiata Fomeria Marconi가 등장하고 Folk 에서는 Maria Carta, Tony Santagata, Noris de Stefani 그리고 Jazz 에서는 Romano Mussolini 와 그의 4중주단, Santucci-Scoppa-D?/FONT]Andrea, Toto들이 참여한다.

공연장소는 산업화 되어가고 있는 장소...일손이 부족한 까닭에 다른지역에서 이주해온 새로운 거주자들에 의해 불모화된 지역이다.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즐기기만을 원하는 도회지의 젊은이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Giacomo Bataglioni라는 이 지역의 소년이 말하기를 "경제적, 사회적인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때때로 전력을 기울일 줄 아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장소에서 Claudio Rocchi, Formula 3, Le Voci Blu, Mia Martini, Le Orme, Osanna, Il Rovescio Della Medaglia 그리고 Trip등이 참가했던 제 1회 페스티발이 탄생했었다. 당시, 이태리의 Rock을 대표하는 선두주자들의 이름들을 볼 수 있었다. 1971년 8월 5일부터 8일까지 Gualdo의 어느 작은 지방에서 이태리의 거의 모든 신문과 주간지의 특파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페스티발에 대해 언급하면서ㅡ 그와 동시에 아주 심각한 지역 문제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기사화했다. 이 페스티발을 통하여 이러한 사회 문제들이 공식적으로 광범위하게 다루어졌고,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와 더불어 Rassegna라는 행사가 성공했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첫번째 행사 후 1년이 지난 뒤, 두번째 행사에서도 Giacomo Battaglioni는 일터에 남았다. 그는 말했다. "어떤 것이 동요된다. 그러나 난 나의 지역에서 좀 더 일하고 싶다...". 그리고 Gualdo에서 Banco del Mutuo Soccorso, Garybaldi, Fine del Viaggio, Folkaldo, Flea on the Honey, Nuova Idea, Le Orme, Osanna, Osage, Procession, Quella Vecchia Locanda, RRR 그리고 Trip등이 지명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상의 수여부분이 설립되었다. Trip, Le Orme, Pappalardo, Mia Martini, Gabriella Ferri, Osanna, PFM, Delirium, New Trolls 등이 상을 받았다. 신문과 기자들, 조직자들과 레코드 제작자들에 의해 상은 제정되었다. 작년에 참석했었던 연주자들은 그들의 활동과 더불어 독특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었다. 올해 역시, 지난 1년동안 그들이 얼마나 활동을 해왔는가를 평가하는 상이 제정되었다. 상은 전문기자들, 음악의 전문가들 (프로그래머, 음악평론가,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들)그리고 작년 수상자를, 레코드사의 책임자들, 전문화된 신문의 독자들 사이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투표를 통해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올해는 처음으로 지역신문의 독자들이 표본조사에 참여한다. 기호에 대한 투표용지도 나왔다. [Corriera Adriatico]와 [Il resto del carlino], [Il Messaggero]와 [Il Tempo]의 지방대회와 몇달전부터 공적인 투표용지가 교부되어졌던 Civitanova Marche의 주요 1700명의 가족들....이러한 전체 투표의 결정적인 결과는 다음 7월 25일안에 알려질 것이다. 조사된 자료는 4일간의 저녁공연이 끝나는 마지막 무대에서 발표되어질 것이다. 3번째 Rassegna di Musica Contemporanea에 참가자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3.6 RDM에 의한 음악인들의 모임 ; 1974년 2월 17일 기사[ | ]

5. Pop Meeting per il Rovescio Della Medaglia

D.M에 의한 음악인들의 모임 ; 1974년 2월 17일 기사

우리 신문으로부터 기획된 연주자들의 모임은 만족스러운 성공을 거두었다. 저녁공연에 참가한 팀들은 Banco del Mutuo Soccorso, Franz di Gioccio (Premiata Forneria Marconi), Antonello Venditti, Francesco de Gregori, Perigeo 의 몇몇 멤버들이었다. Mauro Pelosi, Albero Motore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참가했다. 자정의 시간으로 인해 유쾌한 저녁공연은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았다.

지난주에 발표된 것처럼 지난 1월 31일에 로마의 Piper에서 대중의 신중한 박수갈채와 함께 Il Rovescio Della Medaglia의 호의로써 우리 신문에 의해 구성된 만남이 전개되었다. 기회가 생길때마다 우리는 젊은 대중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못한다. 그때마다 그 시기에 개최되었던 지방공연들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R.D.M에 의한 폭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겠지만, 그들로써는 일과 희생의 세월이 지나간 후 웅장한 연주법의 상실로 인하여 강한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경우, 이러한 모임의 형태는 쉽게 이루어진다. 예를들어 몇달전에 Soft Machine 과 Pink Floyd는 Robert Wyatt의 주선으로 Rainbow극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지금까지 이러한 일들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모임행사는 다른 어떤 공연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리 음악가들은 오직 가사만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려 한다. 또한, 이기주의와 경쟁심리의 악순환을 중단시키는 것에 무기력해 왔었다. 그러나, 작년에 Contro-Canzonissima라는 주제와 함께 이미 보다 더 진정한 공동작업에 대한 첫 걸음이 이루어 졌었다. 음악가들은 과거에 결코 생각도 못했던 화합과 우정이라는 풍토를 조성하게 되었다. 또한 , 이러한 모임으로 인하여 효과적인 결속이라든가 경험의 안정된 변화와 모든 뮤지션들에게 인간적인 면으로나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지금 Il Rovescio Della Medaglia를 위한 이러한 성공적인 만남과 더불어 Controcanzonissima로부터 비롯된 열의있는 만남의 결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만남으로부터 생기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 이태리 음악가들이 결속되는 과정속에서 에피소드를 초월하는 중요한 음악적 여정이 펼쳐지기를 우리는 기원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음악가들 사이에서 Show Business로 비롯되는 상업적인 요소들 즉, 이익다툼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을 떨쳐버리고 순수한 창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다는데 이러한 모임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모임에는 Il Rovescio Della Medaglia 외에도, 항상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앞장서 왔었던 Banco del Mutuo Soccorso 의 멤버 들이 있으며, 외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돌아온 Premiata Fomeria Marconi의 Franz di Cioccio가 있었고, 이태리의 가장 흥미있고 독창적인 자작곡을 노래하는 가수들 중 2명, 즉 Antonello Venditti와 Francesco de Gregori가 있었다. 여기에 Perigeo의 몇몇 멤버들도 있었다.

이번 만남에서 가장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던 Banco는 최초로 그들의 새로운 앨범이며 세번째 앨범인 [Io Sono Nato Libero(나는 자유의 몸으로 태어났다)]의 다양한 곡들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매우 대담한 자세를 고수했던 Antonello Venditti 는 그의 레파토리중 몇개의 곡을 소개했다. 그 중에서 익살스럽고 즐거운 독창적인 작품인 [Mio Padre ha un Buco in Gola(나의 아버지는 목속에 구멍이 있다)]는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Francesco de Gregori는 친구 Venditti 의 음악보다 더 내적인 음악을 들려주었다. De Gregori의 음악은 Bob Dylan의 맥류위에서 비롯되는 개인적이고 새로운 화제를 결부시킨다.

Il Rovescio Della Medaglia는 [Contaminazione(오염)]에서 몇개의 곡들을 발췌하여 소개했다. [Contaminazione]는 그들의 최근 앨범으로 이전의 작품들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와 예술적 원숙미에 도달한 보다 차원놓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고전적인 면을 부각시킨 대신 Hard의 측면을 포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뜻깊은 만남의 사회자는 시종일관 재미있게 진행을 이끌었던 Eddie Ponti로써 음악가들의 화합을 주도했던 영웅호걸이다. 그는 Cioccio와 Banco, Perigeo, Rovescio의 멤버들의 모임을 조직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션은 아쉽게도 너무나도 일찍 막을 내리고 만다. 운명을 예고하는 자정 12시가 다가왔고, 한정된, 엄격한 시간속에서 이러한 모임의 장소는 문을 닫아야만 했다. Il Rovescio Medaglia멤버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던 열정과 빛나는 눈빛을 기억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러한 모임이 계속 되기를 희망한다.

.........즐 거 운 시 간 보 내 세 요....:-) .......................

4 음악 시장[ | ]

4.1 프로그의 인기 이전[ | ]

그 동안 이태리 Rock 역사를 정리 요약해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언어 전달이었다. 특집자료로 사용되어 왔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이 너무나도 생소한 이태리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완벽하게 번역, 소화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이 투자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Italian Rock에 커다란 관심을 가져왔었던 가까운 일본이나 그외의 여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특집기사는 지금까지 꿈꾸지 못했었다. 아무튼, 4회 연재로써 이 특집기사를 마감하면서 이태리 Rock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보충하고, 그 총괄적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Italian Progressive Rock(흔히 “Italian Rock”으로 언급되어지는)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험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 영국의 Rock을 보방하면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변형되면서 이태리 인들의 기질이 담긴 Rock이 생산될 때까지 10년간의 역사에 대한 것은 Art Rock창간호에 자세히 소개된바 있으나 1950년대 후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배제되어 있어 이 지면을 통해 잠시 그 당시의 이태리 레코드시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태리에 Rock’n Roll이 상륙한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세계 음악시장을 강타한 젊은이들의 우상 Elvis Presley의 음반들과 함게 이태리에 처음 등장한 Rock’n Roll은 이태리시장에서는 약 2년동안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8년, 45RPM Single(EP)의 등장과 Juke Box의 다량보급으로 Rock’n Roll은 뒤늦게 이태리에서 붐을 맞는다. 하지만, 미국, 영국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회, 문화적 사건들과 비교해 보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이태리인들은 서서히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새로운 젊은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태리에서는 이 기간동안 불투명한 사회, 문화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이태리의 깐소네는 방황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두가지의 형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하나가 문화적인 전통과 악기를 사용하는 보컬 위주의 깐소네(전통에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도 현실주의에 입각한 많은 부분을 추구했다고 마랄 수 있다)로써 대부분 무대 뒤에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동반했다. 또다른 하나는 현실주의에 부응하는 십대들 층을 겨냥한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이다. 이 부류에 호응했던 젊은이들은 Rock’n Roll에 무조건 열광하는 젊은이들에 대항하는 또다른 젊은세대로써 뚜렷한 주제와 언어를 내세우는 이를 테면 지성적인 부류였다. 당시,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음악시장도 이 두부류의 음악층을 겨낭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상업성과 직결되었다.

그 이전 해까지 (1957년까지) 성공을 거둔 노래들은 대부분잉 번악 곡들이었고 1958년을 기점으로 노래들이 독특한 아티스트들의 개성과 직결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햇다. 또한, 레코드 발매에 있어서도 녹음방식의 혁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1958년 당시, 이태리의 레코드사들의 녹음 Studio는 15개로 늘어났고, 점점 증가되는 추세였다. 물론, Sanremo Festival의 성공이 음악시장을 크게 확장시켜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태리 레코드 시장의 발전을 위한 주요한 해는 1958년이었다. 1958년쯤이 되어서야 결정적이고 확실한 일련의 음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음악들은 Nilla Pizzi, Claudio Villa, Luciano Tajoli등에 의해 등장한 소위 이태리 인들의 기질이 담긴 음악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십대들이 사용하는 악기로서 노래들을 만들었다. 요컨대, 음악시장의 특이한 3가지 형태의 커다란 흐름을 정해놓았다. 첫째로 천천히 진행되긴 했지만 더 강하고 확실한 변화는 싱어송라이터들의 등장이었다. Domenico Modugno는 ‘Nel Blu, Dipinto di Blu’라는 곡으로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승을 했고 그의 음악은 소위 제노바풍의 노래로 분류되었다. 그와 함께 Paoli, Bindi, Tenco등이 음반시장에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은 그 동안 음악에 등을 돌리고 있었던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하는 그들 자체가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하는 그들 자체가 지식인들이었다. 두번째로, 절규조로 노래하는 가수들, Toni Dallara, Betty Curtis, Joe Sentieri등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뜻하지 않았던 성공이다. 이들 가수들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불어온 새로운 록을 모델로 받아들여 좀더 느린 템포로 변화시켰다. 세번째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밀라노 출신 록커들의 탄생이다. 그들의 음악들은 풍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고 이들의 첫 출현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Giorgio Gaber, Enzo Jannacci, Adriano Celentano와 Chigo등의 밀라노의 Rocker들이 1958년에 데뷔했다.

역시, Italian Rock 역사에 있어서 1958년은 획기적인 한해였다. 음반 판매량을 보아도 이 사실이 쉽게 입증된다. 1957년, 이태리 국내의 총 음반 판매량은 11,940,700이었는데 비해 1958년에는 16,875,200눈에 띄게 증가했다. 41%의 음반판매 증가율은 한마디로 경이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음반시장의 혁신에 가장 커다란 힘을 작용시킨 요인은 녹음 Studio에 대한 레코드회사의 정책 변화 때문이었다. Milano를 근거지로 하는 레코드사 Ricordi가 새로 생겨났으며 150번째의 음반발매를 기념하여 레코드 녹음실에 모인 대표자 Nanni Ricordi와 Franco Crepax는 다른 레코드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제노바 출신의 많은 싱어송라이터와 그룹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밀라노 출신의 록커들 Jannacci와 Giaber, 그리고 Omella Vanoni등도 합류하게 된다. 1958년에는 Adriano Celentano외에도 Mina가 Baby Cate라는 가명을 내세워 데뷔한다.

미국은 이태리 음악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체계적이고 치밀한 방법으로 이태리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이미 기반을 닦아 왔었다. 1953년에 RCA가 Roma에 이태리 지사를 열면서 아무런 잡음 없이 살며시 들어왔고, 1950년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조심스럽게 음악시장을 지켜보고 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싱어송라이터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태리 음악계는 모방의 시대 즉 Cover Version의 시대를 맞는다. 이때가 미,영국의 음악만이 환대 받는 이piperRed.jpg 태리 음악계의 어두운 암흑기였다. 1960년대 중반, 독창성이 배제된 모방의 시대를 거쳐 Beat 시대가 도래한다. Beat계의 우연한 성공으로 이태리 음악계는 상업적으로 커다란 힘을 얻었지만, Beat역시 Cover시대의 연장일 뿐 그들의 독창성은 역시 배제되어 있었다. Beat의 시대는 너무나 짧았고, 1960년대말 Beat의 열기가 가라 앉자마자 젊은 뮤지션들의 “우리들의 음악찾기”라는 “노래의 혁명”이 일어난다. 결국 방송가와 극장가 그리고 레코드업계의 편견을 꺽어보려는 젊은 뮤지션들의 운동은 정치와 Rock문화가 융화되는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태리의 좌익계열은 이러한 젊은이들을 최대로 이용하려 했었고 이것으로부터 미국의 Woodstock Festival을 모델로 삼은 수많은 옥외 Festival의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Festival을 발판으로 수많은 이태리 Rock그룹들이 데뷔했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최초의 이태리 Rock Festival은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Caracalla”이며 가장 유명했었던 Festival은 Latte E Miele가 무대 데뷔했었던 Villa Pamphilli(1972)이다.

다행스럽게도, 수많은 Festival을 통해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룹들은 1960년대의 그룹들이 지니지 못했었던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미, 영국의 Rock음악에 뿌리를 두고있으면서도 이태리 특유의 향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Italian Progressive Rock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초, Italian Rock + Italian Progressive Rock의 수식이 성립될 정도로 대부분의 Rock그룹들이 실험정신과 창조력에 불타고 있었고, 수많은 Festival이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Mass Media는 여전히 그들을 냉대했으며, 그들 중에 행운아들만이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을 발표할 수 있었다. 두차례에 거러쳐 소개되었던 Festival에 관한 기사들은 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4.2 요약[ | ]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수식처럼, Italian Rock의 역사를 Italian Progressive Rock으로 간주한다면 그 역사는 매우 짧다. 그 역사는 최초의 Concept앨범을 내놓았던 New Trolls에 의해 시작되어 Progressive Rock의 마지막 유산으로 기록되는 Locanda Della Fate의 유일한 앨범으로 끝이났다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 역사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를 의미한다. 그 이전의 Beat시대와 그 이후의 신세대 시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약 9년간의 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럼, Italian Rock의 그 중요한 약 9년간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Italian Rock의 가장 중대한 시기(1069~1970)는 연대별로 크게 5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첫번째 시기는 1969년 초부터 1970년 초까지로 Beat그룹들이 Progressive Rock그룹을 변신하는 기간이었다. 즉, 이 기간은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탄생기인 것이다. 이 당시의 선두그룹들은 후에 Super Group으로 성장되는 New Trolls, Le Orme 그리고 Quelli(P.F.M.의 전신그룹)등이 있었다.

두번째 시기는 이태리 인들의 기질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로 1970년도 중반부터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들의 음악은 이전의 음악들과 비교해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그룹들은 Il Balletto Di Bronzo, Formula 3, Trip등이었다.

세번째로 분류되는 기간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황금기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던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이 기간동안 가장 많은 Festival과 Concert가 개최되었으며, 레코드 발매량과 그 질에 있어서도 최고를 기록했던 기간이었다. 지금까지 명반과 걸작으로 손꼽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 기간에 생산된 것들임을 생각할 때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던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또다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때부터 Italian Rock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F.M.이 영국과 미대륙 그리고 일본까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Le Orme와 Banco도 외국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항상 미, 영국의 Rock 음악만을 수입해 왔었던 이태리에서 Rock의 역수출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양과 질적으로 그들의 Rock음악이 미, 영국과 겨룰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던 반면 여전히 본국 이태리에서는 방송매체가 무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대활약했었던 그룹들은 Latte E Miele, Nuova Idea, J.E.T., Osanna, Reale Accademia Di Musica, Il Rovescio Della Medaglia, Garybaldi, Jumbo, N.T. Atomic System, metamorfosi, Quella Vecchia Locanda, Alphataurus, Circus 2000 등등이다. 이 당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각 그룹들의 주요멤버들의 개성이 크게 돌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괴상한 행동과 언동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던 Osanna의 취주악기주자 Elio D’anna, 예수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 Metamorfosi의 플륫주자이며 보컬리스트인 금발 Davide “Jimmy” Spitaleri, 그리스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성공한 개성파 보컬리스트 Area의 Demetrio Stratos 등이 대표적인 개성 파들이었다. 또한, 훌륭한 Guitarist로써 Alberto Radius (Formula 3 – Il Volo)와 Nico Di Palo(New Trolls)를 탁월한 키보드주자로써 Joe Vescovi(Trip)와 Gianni Leone(Leo Nero – Il Balleto Di Bronzo)를 뛰어난 드러머로 Franz Di Cioccio(PFM)와 Nunzio Fava “Cucciolo”(Osage Tribe) 그리고 베이스 주자로 Bob Callero(Osage Tribe)와 Patrick Dijivas(PFM)를 다중악기 주자로써 Mauro Pagani(PFM)를 손꼽을 수 있다.

네번째 시기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의 시기로 수퍼그룹들이 분열되거나, 기존의 그룹들이 해산되어 탄생한 제2세대 그룹들의 활동시기이다. 1973년, 극치를 이루었던 Progressive Rock의 열풍이 서서히 가라앉은 시대이다. New Trolls의 분열로 생겨난 Ibis, Formula 3의 후신 그룹으로 탄생한 Il Volo, Garbaldi의 분신으로 탄생한 Bambibanda E Melodie등이 활약했고 Biglietto Per L’Inferno, Maxophone등과 같은 실력이 뛰어난 신진 그룹들도 상당수 눈에 띤다. 특히, 밀라노 출신의 6인조 그룹 Maxophone는 이태리 Progressive Rock의 황금기인 1973년에 결성되어 Banco와 Rocky’s Filj, Edoardo Bennato의 제작자로 알려진 Sandro colombini에 의해 발탁될 때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헛되어 보냈지만, 결국, 이태리 Rock역사에 영원히 남을 유일한 앨범을 5개월만에 완성했다. 그들의 유일한 앨범은 1975년에 발표되어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Italian Rock의 맥을 간신히 이어주었다.

다섯번째 시기는 1977년으로 까지 연장시켜 주었던 그룹은 바로 Locanda Delle Fate였다. 피에몬테 출신의 7인조 그룹은 원래 3인조로 출발, 3명의 멤버를 보충한후 새로운 보컬을 맞이하여 7인조라는 대규모의 그룹이 되었다. 이 그룹이 행운을 얻게 된 것은 그리스의 천재 뮤지션 Vangelis의 친형인 Niko Papathanassiou와의 만남이었다. Niko는 음반제작자로 활약하고 있었고 Locanda Delle Fate를 유망주로 발탁하여 Polydor로부터 음반제작을 의뢰, 역사에 남을 명반을 탄생시기게 된 것이다.

Locanda Delle Fate의 유일한 앨범 “Forse Le Lucciole Non Si Amano Piu(반딧불은 아마도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Italian Rock을 빛내주었던 마지막 반딧불이었다.

5 외부 링크[ | ]

이탈리아 록의 역사. 위에 타이핑된 것의 원본이다. SARF는 회원 등급이 필요하다. --Pinkcrimson (토론) 2020년 2월 7일 (금) 11:50 (KST)

원본
정리본

6 이탈리안 락과 문화 사대주의에 관한[ | ]

제 목:*** 이탈리안 락과 문화 사대주의에 관한 관련자료:없음 [1642] 보낸이:구윤성 (art1203 ) 1994-11-29 14:01 조회:226

언제 부터인지 이탈리안 락의 '환희'는 우리 곁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다.이것은 일본의 문화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 내지는 속이 쓰리면 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는 문화 사대주의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 에서 이탈리안 락과 문화사대주의와 무슨 상관이라는 의아 심을 가질 수 도 있다. 차라리 우리의 옛 음악 이라면 몰 라도...물론 우리의 옛 음악은 말할 나위도 없을 정도이다. (비참할 정도로 핍박받고 가리움 당했으니...) 또한 외국음악을 주로 다루는 이 게시판에서 사대주의 운운 하는 것도 별 시덥잖은 소리이며 말도 안되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들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우리의 것만 최고라든지, 어거지로 음악적 예술적 접목을 통해 우리 것을 찾아 보려고 하는 노력들은 분통터지게 가 슴 답답한 초라함에서 비롯된 '문화 컴플렉스'이고 더욱 뼈 아픈 부분만 건드리는 창조적이지 못한 행로라고 생각된다.

각설하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한심한 작태는 일관성 없 고 모든지 감추고자 하는 현재까지의 문화정책에 있었다고 본다. 세상에.. 주택가 깊숙히까지 퍼져있는 '안마시술소' 라는 간판이 수도 없이 즐비하고 그곳이 윗분들이 다들 알 면서도 은근슬쩍 눈감아주는 비공식적이면서 공식적인 '공 창지대' 임은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인데, 한 국판 '펜트하우스'는 유교사상 운운 하면서 발간되지 못하 게 주절주절거리는 비논리적이며 속물근성 가득찬 떳떳하지 못한 작태라니 ! 단편적인 예를 든 것이지만 이러한 개방화되지 못하고 진정 알것은 모르는 우리의 문화 시스템들이 더더욱 묘한 호기심 과 단발적인 유행성 돌림병만 유발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에 개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얘기가 자꾸만 다른 곳으로 가는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프로그레시브라는 국한된 쟝르만 생각해 볼때도 언제나 일 본의 영향을 받아 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료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빌보드 챠트에만 익숙해있던 미국의 팝시장에만 �?아가게 되었던 것도 이유일 수 있다. ( 필자 역시 학창시절 토요일만 되면 'American Top 40'를 듣느라 수업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이어폰을 숨기기 바빴다...쩝) 여하튼 이탈리안 락이 일본에서 뜸하더니 체임버 락, 브리 티쉬 락 이 다시 집중 연구 되고, 포크 락이 강세를 띠고, 희귀음반에만 연연하게 되고...

이러한 행로를 개가 졸졸 따라오듯 항상 몇년 아니 십년은 뒤처져서 밟아 왔던 것이 이쪽 계통을 듣는 사람들의 일반 적인 행로 였었던 것도 사실이다.(요즘은 많이 발전했지만..) 대개 이탈리안 락에 대한 최근의 프로그레시브 팬들의 반응 은 보통 이러하다. "아직도 이태리냐 ? 이제 한물 갔잖아 ?" "연주는 영국그룹의 카피뺀드이고 보컬은 엄청 못하잖아 ?" 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고 엄청난 환희를 제공하는 이탈리아 음악을 이렇게 단순하고도 의미없이 대접하는 것 은 필자에겐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섭섭한 부분이기도 하고 음악적으로 갈등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 는 의심스럽다. 과연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 나 많이 이탈리안 락을 들어 보았으며 깊이 있게 들었는지...

개중에 영국뺀드들의 흉내를 내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그룹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일본인들이 밟아 왔던 행로의 흉내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잘 아는 이탈리안 뮤지션들 중에서도 너무나도 멋진 그룹들과 멋진 앨범들이 아직 즐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영국 이나 기타 국가의 아트락을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이탈리안 락이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80년대 초반 심야방송에서 흘러나오던 이탈리안 락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가 없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충격' 이었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두근거리는 '흥분' 이었다. 요즘도 '루치오 바티스티'나 '라떼 에 미엘레'의 음악을 듣 노라면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영화처럼 쫘악~ 펼쳐지는 이탈리안 락 !!!! 더 이상 일본의 유행처럼 지나가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늘도 여느때 처럼 장황하게 횡설수설만 하게 된 것 같군요. 사실 오늘 아침 안개가 자욱히 끼어있길래 'I POOH' 의 음악을 출근길에 황급히 찾아서 듣고는 ( 비가 오는 날이나 안개 낀 날 이면 언제나 'I POOH'를 듣는 습관이 있음.) 거역할 수 없는 감동을 다시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마후 이들의 음악을 게시판에 올려야지 하는 생각과 이 좋은 음악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구윤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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