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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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張澤相
1940년대 후반의 장택상
1940년대 후반의 장택상
초대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임기 1948년 8월 15일 ~ 1948년 12월 24일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총리 이범석
신상정보
출생일 1893년 10월 22일(1893-10-22)
출생지 조선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칠곡군)
사망일 1969년 8월 1일 (75세) 오후 7시 15분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울고려병원
학력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경제학과 중퇴(1919년 입학)
대한민국 국방대 행정학사 1기(1956년)
경력 무소속 국회의원
대한민국 국무총리
수도경찰청장
자유당 총재
부모 장승원(부), 풍양 조씨 부인(모)
형제 박산다라, 장직상
배우자 진주 정씨 부인(사별)
진주 류씨 부인(사별)
김연식(사별)
이유앵(4혼)
자녀 아들 장병은, 장병청
딸 장병민, 장병채, 장병엽, 장병혜, 장병초
친인척 할아버지 장석용
외손자 권대규, 족형 장건상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

1 소개[ | ]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 ~ 1969년 8월 1일)은 초대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4선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작가이다.

호(號)는 창랑(滄浪), 자(字)는 치우(致雨, 아명(兒名)은 장삼욱(張三旭). 영문 이니셜은 TS.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했고, 정부 수립 이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박정희 정부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1]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남로당 등 좌익 정당과 좌익 정치운동을 단속하였으나,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학자 여현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과 정부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리(現 경상북도 구미시 임오동) 출신이다.

2 생애[ | ]

3 기타[ | ]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52년 대한민국국회부의장 장택상의 비서관을 역임했고[2]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는 국무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을 지냈다. 15대 대통령 김대중1950년대 중반에 잠시 그의 비서역으로 근무한적이 있었다.[1] 장택상은 김영삼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그를 정계에 데뷔시켰으나, 김영삼은 뒤에 민주당 구파로 건너갔다.

조봉암, 여운형의 사돈이었던 이만규 등과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있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발하여 1954년 자유당을 탈당하여 호헌동지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봉암이 끝내 호헌동지회에서 배제당하자 장택상은 호헌동지회를 탈퇴, 호헌동지회 중심으로 하는 반(反)이승만 신당인 민주당 결성에도 불참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는 이범석과 충성경쟁을 벌였고, 이승만의 다른 측근인 윤치영, 이기붕 등과는 사이가 나빴다. 1956년의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범석을 낙마시키려는 이승만의 의도를 읽고 이범석의 낙선을 지원하다가 뒤에 이범석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이범석과 화해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아내 김연식에게 선물할 반지에 장택상이라는 이름을 새겨서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사윗감이 될 새 종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한 문중의 종손에게 '우리 인연이 되면 사돈을 하세' 하며 청혼을 하기도 했다.[3] 즐겨찾는 기생집은 정담촌(政談村)이라 한다.[4] 물론 이는 그의 농담이었다.[5] 골동품 수집이 취미이기도 했던 그는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실력도 있었다.

월북인사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 성혜랑, 성일기 남매의 아버지 성유경과 먼 친척간이었다.[6] 친척관계인 인연으로 성일기 남매는 서울 수표동에 있던 장택상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6] 또한 장택상의 큰딸 장병민의 남편 채항석조선공산당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 전쟁 중에 월북했다.

3.1 유행어[ | ]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라는 그의 말이 회자화되기도 했다.[7]

4 상훈[ | ]

5 이력[ | ]

6 평가[ | ]

반공주의자이며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이라는 평가가 있고, 민주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비교적 성격은 거만한 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해방 후 조병옥과 함께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들을 대거 재고용하고 52년엔 이범석과 함께 발췌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주범이며 영남의 부패한 지역이기주의를 일으킨 인물 중 하나이다.

난세의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권력의 도화사(道化師) 등의 평가가 있고 기고만장의 기염아(氣焰兒), 술수의 화신 등의 평가도 있다.[7] 한편 감성이 풍부했던 데다, 만만치 않은 재력가였다는 평가도 있다.[7] 담백한 기질과 명랑 강직한 성격, 청빈한 기품, 불굴의 자유혼, 기지와 해학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다. 북한주석 김일성은 장택상이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11] 또한 이 때문에 이승만 사퇴 직후 '미국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었다.[11]'고 전망하였다.

해방 정국에 경찰부에서 근무했었던 교육자 박병배는 그를 두고 '가문과 총명과 학식, 그리고 날카로운 판단력과 무서운 행동력을 갖추어 해방 후의 건국사와 대한민국 정치사에 수많은 업적과 화제를 남긴 분[12]'이라고 평하였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또 야심이 있는 정치가여서 한 사람한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인물이 아니었다.'[13]는 시각도 있다. 조병옥 등과 함께 테러를 조장하였다는 비판도 있다.[14] 오만하고 괄괄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다.

7 일화[ | ]

장택상과 조병옥은 동지였으나, 강원룡에 의하면 그는 조병옥과 '경쟁관계였다.[15]' 한다. 강원룡은 수도경찰청장 당시 장택상과 조병옥의 관계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고 회고하였다.[16] 그러나 장택상은 조병옥을 업무적으로는 신뢰하였는데, 미군정 기간 중 최능진이 조병옥의 친일파 옹호를 규탄했을 때는 공식적으로 조병옥을 두둔하며 최능진을 비판했다. 최능진은 경찰직을 사퇴한 이후에도 조병옥을 비판, 이후 그는 조병옥과 함께 최능진을 논박했다.

한편 그는 국방경비대 참령이자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이형근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영갑에 의하면 이형근은 회의에서 가끔 그를 만났는데 어떤 때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험악한 사태로까지 번지곤 했다[17] 고 회고하였다. 그의 성격은 괄괄하고 직선적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오만하다는 평도 들었고, 적을 많이 만들었다.

금오산 기슭에 한사람의 왕과 3명의 장군이 나올 명당이 있다는 풍수설을 듣고 구미 상모리를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박정희의 생가와 할머니 묘가 있었다.[18] 백자 감식에 있어서는 첫 손가락에 꼽는 전문가[19] 이기도 했다.

7.1 송진우 암살 관련[ | ]

강원룡의 회고에 의하면 송진우의 암살 직후 '나중에 장택상이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로빈슨 저 ‘미국의 배반’ 참조).[20]'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장택상이 미군정청 간부에게 송진우 암살 배후가 김구라고 하기 이전에 미군정은 송진우 암살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있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다시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21] 장택상 외에도 조병옥도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한 바 있다.

7.2 이범석과의 관계[ | ]

이범석과는 해방 정국에서 우익 활동과 좌파 세력 억압 등으로 서로 연락, 협력하였으며, 1952년부산정치파동 당시에는 내무부장관국무총리로 협력하며, 내각제 개헌 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 이후 그는 족청의 세력이 강대해져 가는 것과, 자유당내 족청계의 간부직 잠식을 경계한 이승만의 의중을 파악,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입후보한 이범석을 낙마시켰다. 경찰 인맥과 총리의 직위를 이용, 경찰 병력과 인력을 동원해 이범석의 홍보물과 팜플렛을 수거하거나 이범석의 선거 홍보를 방해했다. 장택상의 선거 개입에 화가 난 이범석은 선거 직후 장택상과 서울시장 김태선을 고소했다.

그러나 사법 당국은 장택상의 손을 들어주었고, 족청에서는 그가 1953년 겨울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 부윤(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고시 진을 부산항에서 비밀리에 만난 것을 빌미로 그가 친일파라는 설을 유포시켜 총리직에서 낙마시켰다.[22] 사건 이후 이승만은 족청 해산까지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1958년 그는 이범석과 다시 화해, 협력하였으며, 공화당 이라는 친여성향의 신당 창당을 함께 준비하였으나 대통령 후보자 문제를 놓고 실패했고, 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도 함께 야당 활동을 함께하기도 했다.

낭산 김준연에 의하면 그의 형 장직상반민특위에 기소당했을 때, 장직상의 석방을 탄원한 사람 중의 한명이 이범석이라 한다.

8 저서[ | ]

  • 《장택상 회고록:대한민국 건국과 나》

9 가족 관계[ | ]

맏딸 장병민과 맏사위 채항석 부부는 남로당에서 활동한 좌익 운동가였다.[23] 1950년 4월 4일 남로당원 색출 기간 중에 장병민과 채항석은 장태식, 채항석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들은 한국 전쟁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24]

  • 양 증조부 : 장학추(張學樞, 할아버지 장석용의 양아버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를 지냈다.)
  • 생 증조부 : 장덕추(張悳樞, 할아버지 장석용의 생부, 이조판서추증)
    • 종조부 : 장석구(張錫龜, 족숙 장업추(張業樞)의 양자로 출계)
    • 종조부 : 장석봉(張錫鳳)
  • 조부 : 장석용(張錫龍, 1823년 ~ 1907년), 조선에서 이조판서 역임
    • 고모 : 인동장씨(仁同張氏)
    • 고모부 : 김화식(金華植, 1847년 ~ ?, 호는 담애(潭涯), 생원시 합격 후 현풍군수 역임)
  • 아버지 : 장승원(張承遠 1852년 ~ 1917년), 조선때 자헌대부 관찰사 역임
  • 어머니 : 정부인(貞夫人) 풍양 조씨(豊壤 趙氏, 1846년 ~ 1938년)
    • 맏형 : 장길상(張吉相, 1874년 ~ 1936년), 규장각 직각 역임
    • 둘째 형 : 장직상(張稷相, ) 선산군수 역임
      • 조카 : 장병찬(張炳贊, 기업인, 이천전기 대표 역임)
    • 누이 : 장씨(張氏)
      • 외조카 : 손병직
  • 부인 : 진주정씨(晋州鄭氏, 1889년 ~ 1908년)
  • 부인 : 풍산류씨(豊山柳氏, ? ~ ?)
  • 부인 : 김연식(金淵植, 1900년 ~ 1990년)
    • 딸 : 장병민(張炳敏)
    • 사위 : 채항석(蔡恒錫), 일설에는 김진국이라고도 한다.
      • 외손녀 : 채효선
      • 외손녀 사위 : 이OO, 대한민국 육군 초대 항공사령관 이영무의 아들[25]
    • 아들 : 장병철(張炳哲)
    • 아들 : 장병갑(張炳甲)
    • 아들 : 장병은(張炳殷)
    • 아들 : 장병문(張炳文)
    • 아들 : 장병청(張炳淸)
    • 딸 : 장병우 (1931년 ~ )[26]
    • 딸 : 장병채(張炳菜)
    • 사위 : 한유갑(韓有甲)
    • 딸 : 장병혜 (張炳惠, 1932년 12월 6일 ~ )
      • 사위 : 양각용(楊覺勇)
        • 외손자 : 권대규(權大奎, 장병혜의 양아들)
    • 딸 : 장병엽(張炳燁)
    • 사위 : 지창환(池昌煥)
    • 딸 : 장병초(張炳初)
  • 손녀 : ?
  • 손녀사위 : 정혜신
  • 첩 : 이유앵(李柳鶯, 1905년 ~ ), 의친왕의 첩이었다가 다시 남작 조명구의 첩이 된 이유색(李柳色)의 사촌동생[27]

10 작품에 나온 장택상[ | ]

10.1 장택상을 연기한 배우들[ | ]

10.2 영화[ | ]

11 기타[ | ]

장택상이 태어났던 그의 칠곡군 생가는 이후 방치되다가 법당이 되었으며, 뒤에는 음식점이 되었다.

12 같이 보기[ | ]

13 관련 서적[ | ]

  • 신태양사,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정치백서)》 (신태양사, 1957)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공저,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 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저서)》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3)
  • 장병혜, 장병초 편, 《상록의 자유혼》 (1973, 장병혜,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저) : 장택상 일대기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 브루스커밍스, 《브루스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커밍스, 창작과비평사, 2001)
  • 박용만, 《경무대 비화-제1공화국》 (내외신서, 1991)
  •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 : 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 이원순, 《인간 이승만》(1988, 신태양사)
  • 정운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 (삼인, 2008)

14 역대 선거 결과[ | ]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48년 대선 1대 부통령 대한민국 청구회 3표
1.52%
3위 낙선
1949년 총선 1대 국회의원 경북 안동군 을 무소속 5,488표
16.88%
3위 낙선
1950년 총선 2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무소속 21,407표
58.65%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초선
1954년 총선 3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무소속 27,426표
79.52%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재선
1958년 총선 4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무소속 25,391표
74.95%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3선
1960년 총선 5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무소속 12,033표
30.59%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4선
1963년 총선 6대 국회의원 경북 성주군·칠곡군 자유당 23,647표
30.89%
2위 낙선
1967년 총선 7대 국회의원 경북 성주군·칠곡군 자유당 23,389표
27.43%
2위 낙선

15 각주[ | ]

  1. 1.0 1.1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3) - 조선닷컴 인물”. 2015년 9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9일에 확인함. 
  2. "나는 이젠 객석의 관람객 박수칠 준비만 하고 있죠" :: 네이버 뉴스
  3.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448페이지
  4. 이준구, 강호성 지음, 《조선의 부자》 (스타북스, 2006) 284페이지
  5. 그의 가문도 영남 남인의 거두 여현 장현광의 후손으로 영남의 벌족이었다.
  6. 6.0 6.1 <成日耆씨가 밝힌 가문내력.蕙琅씨 소설-빨치산 활동> 연합뉴스 1996년 2월 16일자
  7. 7.0 7.1 7.2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인터뷰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8.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9. 9.0 9.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역문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0. 자유공론 2008년 5월호(한국자유총연맹, 2008) 33페이지
  11. 11.0 11.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북연213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2. 장병혜 편 《상록의 자유혼: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18페이지
  13.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 2007) 120페이지
  14. 조봉암과 1950년대(하)(역비한국학연구총서 16)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 696페이지
  15.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6) 355페이지
  16.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6) 356페이지
  17. 조영갑 《민군관계와 국가안보》(북코리아, 2006) 244페이지
  18. 백승헌, 《어디서 마음을 구하랴》 (이가서, 2007) 28페이지
  19. 고제희, 우리 문화재 속 숨은 이야기 (문예마당, 2007) 210페이지
  20.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①)‘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21. 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
  22. 이승만이 일본과 친일파를 극도로 혐오하고 경멸했던 것을 이용했다.
  23. 안성일 (2004년 6월 20일).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분단시대의 기아 이현상 - 남로당 붕괴되다〉.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 서울: 선인. ISBN 89-89205-72-7. 
  24. 《신동아》 (2006년 1월호)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25.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나는 남한 초대 항공사령관의 아들, 장택상 전 총리의 손자사위” 신동아
  26. 장택상 딸 병우씨 명예훼손 소송《조선일보》
  27. 동아일보 1925년 6월 17일자 02면, 04단

16 외부 링크[ | ]

전임
(서리)이윤영
제3대 국무총리
1952년 5월 6일 ~ 1952년 10월 5일
후임
(서리)이윤영
전임
윤치영
제2대 국회 전반기 (제 1)국회부의장
1950년 6월 19일 ~ 1952년 5월 6일
후임
김동성
전임
(초대)
초대 외무부 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8년 12월 24일
후임
임병직
전임
조병옥
내무부 장관 서리
1951년 4월 25일 ~ 1951년 5월 13일
후임
이순용
전임
(초대)
초대 대한민국탄핵 재판소 의장
1950년 ~ 1956년
후임
장면
전임
홍성하
제12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1952년 ~ 1954년
후임
이종림
전임
조경규
자유당 수석최고위원
1963년 9월 7일 ~ 1964년 2월 29일
후임
남송학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장병만
제2대 국회의원(경북 칠곡군)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후임
장택상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장택상
제3대 국회의원(경북 칠곡군)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무소속
후임
장택상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장택상
제4대 국회의원(경북 칠곡군)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무소속
후임
장택상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장택상
제5대 국회의원(경북 칠곡군)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무소속
후임
(성주군·칠곡군)송한철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스털링(M. A. Sterling)
수도 경찰국장
1946년 9월 17일 ~ 1948년 8월 4일
후임
김태선
전임
월터 스톤(Walter F. Stone)
제4대 경기도 제1관구 경찰부장
1946년 1월 12일 ~ 1946년 9월 24일
후임
박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