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金俊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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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 |
신상정보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생일 | 1895년 3월 14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영암군 영암면 교동리 |
사망일 | 1971년 12월 31일 (76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학력 | 독일 베를린 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
경력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최고위원 한국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호헌동지회 특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통일당 전임고문 자유민주당 특임위원 신민당 고문 |
정당 | 신민당 |
부모 | 김상경(부), 청주 한씨 부인(모) |
자녀 | 슬하 1남3녀 장남 김규식(金圭植) 장녀 김자옥(金子玉) 차녀 김자향(金子香, 삼녀 김자선(金子善) 김홍섭과 결혼 |
별명 | 호 낭산(朗山) |
종교 | 유교(성리학) →불교 →개신교(감리회) →천주교(세례명: 요셉) |
김준연(金俊淵, 1895년 3월 14일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또한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엠엘파의 중요 인사였다. 독일 베를린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다 1928년 동아일보로 옮겼다.
해방 후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에 가담했으며, 1948년의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에 지지를 보냈다.
민주국민당과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친여 인물로 분류되어 비판을 받던 중 탈당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 조직하기도 했다. 1961년 5월과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경력에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5년부터 2년간 조선일보의 기자와 주러시아 특파원 등으로 활동했다.
1 생애[ | ]
- 김준연/생애 문서로.
2 저서 및 논문[ | ]
2.1 저서[ | ]
- 《나의 소전》 (동아일보사, 1954)
- 《나의 길》(1966)
- 《나의 편력》(1969)
- 《낭산 김준연 :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 기념사업회, 허도산 편저, 자유지성사, 1998)
2.2 논설[ | ]
- 《독립노선》(獨立路線) (1947)
3 약력[ | ]
4 상훈[ | ]
5 학위[ | ]
- 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법학과 법학사
- 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 영국 런던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독일 베를린 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6 가족 관계[ | ]
弟 : 김준오(金俊梧)
7 기타[ | ]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수시로 동아일보 등에 칼럼과 평론, 사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7.1 임시정부 지지 철회 원인[ | ]
김준연은 8.15 직후 국내파인 건준세력과 해외파인 임정파가 대립하고 있을 때 해외파를 적극 지지, 건준과의 투쟁에서 그 선봉에 섰다.[2] 그러나 이렇게 해외파에 적극 접근했던 그가 그 후 해외파를 반대하는 선봉에 서게 된 데에는 임정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돌아온 임정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통일정부 요인의 자격 규정으로서 대통령은 30년 이상, 국무총리는 20년 이상, 그리고 장관은 10년 이상 독립운동을 유일한 천직으로 하여 계속 투쟁한 인사에 한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3]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측의 이러한 주장에 너무 터무늬없는 주장이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김준연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그래도 좋겠지만 장관까지 그런 규정을 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규정대로 한다면 자기가 속해 있는 한민당은 정부 요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사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때문[3] 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은 김성수 등을 임정 국무위원(장관급)으로 입각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만 그는 임정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김준연은 임정을 반대하는 선봉에 섰고, 임정 요인이 일부 중심이 된 좌우 합작이나 남북협상을 신랄하게 비난해왔다.
7.2 김구, 김규식 비난과 공방전[ | ]
그는 당초의 임시정부 지지를 철회하고 1946년 이후부터는 임시정부 세력을 건국 방해 세력으로 규정했다.
김준연은 김구를 정점으로 하는 남북협상파와 김규식을 정점으로 하는 좌우합작파를 모두 공산주의 노선과 비슷할 뿐 아니라 정부 수립에 크나큰 방해인물들로 단정했다.[3] 그래서 (남북협상 당시) 공산당이 김구에게 정치자금을 조달한다는 설이 있자 곧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다음과 같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3]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5·10 총선거는 우리 5천년 역사에 길이 빛날 광명의 전환점입니다. ...(이하 중략)... 그러나 침략주의 외세 소련은 '약소민족 해방'이라는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우리 민족을 다시 자기들의 노예로 만들려는 음모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소련의 주장을 지지하고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한 공산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시도하는 무리들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통탄해 마지 않을 일입니다.
이들은 민족의 숙원인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소위 남북협상이라는 빛좋은 통일방안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소위 남북협상에서 얻[3] 어온 것이 무엇입니까.[4]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겠다는 소련의 궤도에 맹종한 것 외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러면 김구, 김규식 등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동포 여러분은 매우 이상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고[5] 김구는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으니만큼 김구 역시 공산당 노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민족적 입장을 저버리고 계속 공산당과 손을 잡고 다시 남북협상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나는 이들을 동포의 이름으로 규탄하거니와 동포 여러분은 이에 새로운 인식과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4]
한국민주당 김준연
며칠 후 한민당도 당의 이름으로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김구와 김규식을 신랄히 비난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공격적인 이 성명은 곧 한국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김준연과 한민당의 성명을 보고 누구보다도 치를 떤 것은 한독당의 김학규(金學奎)였다.[4]
“ | 각주 선생님, 이걸 좀 보십시오. 한민당의 김준연이란 자가 우리를 아주 공산당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세상에 이런 죽일 놈이 있습니까.[4] | ” |
김학규에게서 신문을 받아든 김구는 돋보기로 김준연의 성명을 읽었다.
“ | 음 내 머지않아 이런 성명이 나올 줄 알았지. 나보다 김규식 박사가 더 안됐군![4] | ” |
극도로 흥분한 김학규를 진정시키는 김구의 눈에도 분노와 울분이[4] 서려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김구는 책상 위에 놓인 붓을 들었다. '小人閑居爲不善'-김구는 말없이 이런 글귀를 써내려갔다.[6]
김구, 김규식을 위시한 남북협상파를 정면으로 공격한 김준연과 한민당의 폭탄 성명은 독촉 등 정부수립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6]
자신들을 공산당으로 몰고 간 일로 김준연과 한민당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 김학규는 나중에 김준연과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 공세를 할 때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8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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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서적[ | ]
- 《나의 길》(김준연, 1966)
- 나의 소전 (동아일보연락소, 1954)
- 《나의 편력》(김준연, 매일경제신문 연재, 1969)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 김삼웅, 《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9)
-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국학자료원,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0 역대 선거 결과[ | ]
실시년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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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총선 | 1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 | 한국민주당 | 무투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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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선 | |||
1950년 | 총선 | 2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 | 민주국민당 | 18,191표 |
|
2위 | 낙선 | |||
1954년 | 총선 | 3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 | 민주국민당 | 21,198표 |
|
1위 | ![]() |
재선 | ||
1958년 | 총선 | 4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 | 통일당 | 22,219표 |
|
1위 | ![]() |
3선 | ||
1960년 | 대선 | 5대 | 부통령 | 대한민국 | 통일당 | 249,095표 |
|
3위 | 무효 | |||
1960년 | 총선 | 5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 | 통일당 | 14,878표 |
|
1위 | ![]() |
4선 | ||
1963년 | 총선 | 6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강진군 | 자유민주당 | 28,027표 |
|
1위 | ![]() |
5선 | ||
1967년 | 대선 | 6대 | 대통령 | 대한민국 | 민중당 | 248,369표 |
|
4위 | 낙선 | |||
1967년 | 총선 | 7대 | 국회의원 | 전남 영암군·강진군 | 민중당 | 8,617표 |
|
3위 | 낙선 |
11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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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 4.0 4.1 4.2 4.3 4.4 4.5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88페이지
- ↑ 1921년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 김준연도 한때 국내의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있었다.
- ↑ 이동: 6.0 6.1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89페이지
12 외부 링크[ | ]
- 위키백과 "김준연"
위키낱말사전 "김준연"
- 다음사전 "김준연"
- 다음백과 "김준연"
- 네이버사전 "김준연"
네이버백과 "김준연"
나무위키 "김준연"
- 리브레 위키 "김준연"
- 김준연(金俊淵)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준연 - 대한민국헌정회
- 김준연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 낭산 김준연 선생 생가터 방치 : '복원작업 서둘러 관광자원화' 여론 높아 월간 전라도 닷컴
전임 이우익 |
제4대 법무부 장관 1950년 11월 23일 ~ 1951년 5월 6일 |
후임 조진만 |
![]() |
전임 (초대) |
제헌 국회의원(영암군)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후임 류인곤 |
![]() |
![]() |
전임 류인곤 |
제3대 국회의원(영암군)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민주국민당 → 민주당 → 통일당 |
후임 김준연 |
![]() |
![]() |
전임 김준연 |
제4대 국회의원(영암군)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통일당 |
후임 김준연 |
![]() |
![]() |
전임 김준연 |
제5대 국회의원(영암군)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통일당 |
후임 김준연 |
![]() |
![]() |
전임 김준연 |
제6대 국회의원(영암군·강진군)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자유민주당 → 민정당 → 민중당 → 신민당 → 민중당 |
후임 윤재명 |
![]() |
-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
- 대한민국의 제3대 국회의원
- 대한민국의 제4대 국회의원
- 대한민국의 제5대 민의원
- 대한민국의 제6대 국회의원
- 1895년 출생
- 3월에 출생한 사람
- 1971년 사망
- 12월에 사망한 사람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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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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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
-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
- 일제 강점기의 작가
- 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
- 한국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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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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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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