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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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趙炳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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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4년 5월 21일(1894-05-21)
조선 충청도 천안군
사망 1960년 2월 15일 (65세)
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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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대한민국
본관 한양
학력 와이오밍 대학교 학사·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박사[2]
직업 독립운동가, 경찰관, 정치가
경력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겸 고문
민주당 대선후보
제5대 내무부 장관
부모 아버지 조인원(趙仁元, 독립운동가)
어머니 남양 홍씨 부인
형제 남동생 조병호(趙炳鎬, 독립운동가)
배우자 노정면(盧禎冕)
자녀 조윤형(차남), 조순형(삼남) 등 3남 2녀
종교 개신교(장로회)
의원 선수 2
정당 민주당
지역구 서울 성동구 을
당내 직책 대표최고위원 겸 고문

조병옥(趙炳玉, 1894년 5월 21일 조선 충청도 천안 출생 ~ 1960년 2월 15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병사.)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 초반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안창호에게 감화되어 그의 흥사단수양동지회, 국민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뒤 태평양 전쟁 무렵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서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뒤 미군정의 경찰총수를 지냈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친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 제2대 경찰 통수권자였고 장택상과 더불어 친일경찰들을 재등용한 사람 중 한명이다.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에서 활동하였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입당, 신익희·윤보선·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의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 병으로 미국 워싱턴 D. C.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서하였다. 제1공화국 후반 여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장택상, 이기붕 등과 수시로 만나 회담, 절충을 주도하였으며, 기자들이나 강경투쟁을 요청하는 야당인사들에게 하던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회자화되었다. 본관은 한양,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유석(維石)이다.

1 생애[ | ]

2 상세한 연보[ | ]

  • 1946년 12월 2일 조미공동위원회에서 자신을 비방한 최능진에게 국립경찰의 협화와 명령계통의 확보에 유해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요구함.
  • 1947년 7월 7일 우익에 의한 테러 사건이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는 담화 발표.
  • 1948년 4월, 5·10선거를 앞두고 선전과 동원을 위해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약칭: 향보단)을 백만명 규모로 조직하였다.
  • 1948년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의 주도로,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 등이 제주를 방문해 제주 4.3항쟁에 대한 비밀회의를 가졌다.
  • 1948년 9월 1일 대통령 특사 단장으로 17개 자유우방국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 1953년 이승만이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자, 조병옥은 이승만이 유엔 정책에 반하는 지나친 행동을 했으며 외교상의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병옥을 규탄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조병옥은 급기야 심야에 테러까지 당했다. 그는 쇠뭉치로 머리를 맞아 실신했다. 조병옥은 응급 치료를 받은 뒤 수원으로 피신했으나 6월 25일에 연행되어 서대문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약 한 달만인 7월 20일 풀려나긴 했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써 기억력을 거의 상실해 한때 폐인이 될 위기마저 겪었다.[3]

3 흡연관[ | ]

조병옥은 27세에 담배를 처음 피워 사망 직전까지 흡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기호흡기 질환에는 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애연가이기도 했다. 조병옥은 '담배를 피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무슨 죄악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것이 내가 기독교 신자라는 잠재의식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작용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한 번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끊는 것은 퍽 힘든 일이라 생각하였다.[4]

고요한 달밤에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한 대 피우는 담배 맛이란 정말로 진미일 뿐만 아니라 재떨이에 놓은 담배연기가 한 원을 그리며 천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멀끔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깊은 산중의 절간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스님(僧)이 무슨 무아지경에 도달한 감을 주는 것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담배 철학일는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담배 예찬자는 결코 아니다. 즉 담배는 사람에게 해는 될지언정 이로운 것이 못되는 까닭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 그러나 나는 적적할 때, 심심할 때, 무슨 생각이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으레 습관화되어 담배를 피우게 되는 것이다.[4]

그는 담배의 묘미와 함께 기독교인인데 교리를 어기지는 않나 하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그는 27세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여[5] 조병옥은 달밝은 밤에 발코니나 베란다에 나와서 달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그는 평생 애연가가 되었다.

4 평가[ | ]

4.1 긍정적 평가[ | ]

해방 이후 정부수립에 대한 공로와 내분 수습,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성격이었다. 또한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노련한 협상가로 능력을 발휘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4.2 부정적 평가[ | ]

미군정 당시 친일파 경찰을 채용한 점에서 최능진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왔고,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부분 지휘와 과잉진압에 관련된 것도 비판받고 있다.

좌파 및 중도파 세력으로부터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민주당 신파와 자유당으로부터는 "주색풍류객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격을 받았다. 공공연히 주색에 빠졌다는 비판을 노골적으로 들으면서도 그는 태연히 웃었다 한다.

해방장택상과 더불어 친일경찰들을 재등용한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5 기타[ | ]

5.1 전시체제기 활동 논란[ | ]

5.1.1 친일 의혹[ | ]

2003년 12월 김희선이 그를 친일파, 앞잡이 등 원색적으로 비난했다가 파문이 일기도 했다.[6][7][8] 조병옥기념사업회에서는 사과를 요구하였으며.[9] 친일파설의 반박 자료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혐의로 옥중수감된 사진을 공개했다.[9][10][11] 사태는 김희선 국회의원의 사과로 종결되었다.[11]

문학평론가 임중빈씨는 〈한겨레〉 2001년 3월26일치에 ‘조병옥과 친일, 조순형과 조선일보 관계의 원류’라는 글에서, 그 일주일 전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칼럼 중 “개인적으로 친일행각이 별로 보이지 않는 조병옥을 범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하는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대목에 대해 반박하였다.[11] 임중빈은 기고에서 “1941년 8월25일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죽음으로써 일본에 보답한다는 각계 명사 120명의 결의 아래 친일 거두들과 자리를 함께한 조병옥은 자못 비장한 어조의 소신발언으로 부민관 중강당을 제압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조병옥이 했다는 발언의 일부다. “우리는 오늘 제국의 신민으로서 이 마당에 모였습니다. …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11] 라 하였다.

반면, 조병옥이 자신의 친일(비호) 의혹에 대해 생전에 직접 해명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나의 회고록〉(민교사, 1959)이라는 책에서 1946년 3월6일 〈대구시보〉와의 인터뷰 내용을 술회했다.[11]

5.1.2 반론[ | ]

신중론으로는 2000년 8월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21세기의 친일문제〉라는 책을 펴낸 소설가 복거일의 주장으로 “이번 논란은 ‘친일파 단죄’의 단순논리의 위험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석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으며, 고향(충남 아산) 어르신들로부터 유석이 천안·아산 지역에 꾸린 민족운동 조직의 활동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친일 의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밝혔다.[11] 그는 "친일파 문제를 자기 주장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고 객관적으로 다루기도 쉽지 않다. 예컨대, 반민특위 재판에서 무죄로 나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계속 친일파 명단에 올려놓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제는 역사학의 영역에 맡기고 그 연구 결과와 평가를 존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11] 2001년 3월 민족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친일 여부를 평가하는 엄격한 기준이 만들어진 이후 공청회 등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계획"이라 하였고 "조병옥 박사의 경우도 몇가지 친일행적이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 ‘친일파’ 여부에 대한 단정적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다"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11]

친일파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05년 9월 30일 동국대학교 교수 강정구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주최 토론회에서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친일파 후예들이 정치사에 발붙일 수 없었다"고 하였다.[12] 그리고 친일파후예의 대표적 사례로 조 전 대표와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 열린우리당 신기남(辛基南) 의원 등을 언급했다.[12]

조병옥 등이 친일파로 언급되자, 2005년 10월 16일 조병옥의 아들 조순형은 사회학자 강정구를 상대로 부친인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 박사를 친일파로 거론한 동국대 강정구 교수를 사자(死者)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겠다고 언론에 발표[12], '조병옥 선생 기념사업회'와 함께 17일 제출할 고소장에서 "고 조병옥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광주학생 항일운동과 흥사단 사건 등으로 5년여의 옥고를 치러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며 "강 교수의 허위 발언으로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12] 민족문제연구소 측 입장에 따르면, '친일파로 분류되는 기준은 자발성과 적극성을 평가했고, 반복·지속성 여부도 참조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13] 조병옥이 전시체제기 활동 의혹을 받는 지적은 임전대책협의회에서 1차례 참여해 강연했다는 것 정도인데, 그런 1~2건 정도로 지적하기는 지나친 지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과 논란은 객관적 사실 여부따지기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제기되는 성격이 강하다.

5.2 4·3 사건 진압회의 관련 해프닝[ | ]

5월 5일 미군정청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 부사령관 윌리엄 F. 딘,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등이 비행기편으로 제주도에 착륙했다. 5일 오전 12시부터 4·3 사건의 해결을 놓고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 등 9명이었다.[14][15]

회의의 주제는 4·3의 진압에 대한 것이었고, 최고수뇌회의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김익렬과 조병옥의 난투극이 발생한다. 회의에서 첫 번째로 발언하게 된 최천 경찰감찰청장은 4·3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할 것을 주장하고, 이어 발언한 김익렬 연대장은 무력 위압과 설득,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김익렬은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 혹은 남로당 공산주의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나 자세한 경위를 알기 어렵다고 발언한다. 폭동자 수가 증가된 것은 빨치산이 우익 인사들을 학살했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며,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한다.

김익렬이 증거로 제출한 사진첩을 들여다보던 윌리엄 F. 딘 장관은 흥분하여 사진 자료들을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던져주며 조병옥에게 화를 낸다. 그런데 화가 난 조병옥이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된다. 조병옥은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에게 제출한 자료는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김익렬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라고 지적했다.[14][15]

화가 난 김익렬은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김익렬을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병옥은 계속해서 김익렬을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라며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딘 장군은 조병옥이 김익렬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김익렬을 쳐다봤고, 맨스필드 대령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격분한 김익렬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

김익렬은 당시 27세로 원래 일본예비육군사관학교출신의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해방 후 국군소위로 임관해 2년만에 중령이 된 젊은이였다. 이 날 조병옥은 제주 무장대 대장인 김달삼이 김익렬과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생인것과 김익렬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활동중인 당 간부임을 폭로하였는데 폭로 당시 조병옥이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유도 3단이던 김익렬 중령은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병옥은 김익렬의 표현에 의하면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고 한다. 넥타이로 목이 졸린 조병옥은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 제주경찰청장이 말리러 올라왔으나 김익렬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고, 맨스필드 대령과 안재홍이 달라붙어 김익렬과 조병옥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역시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14][15]

송호성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손을 놓고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라며 제지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달라붙어 다시 김익렬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김익렬과 조병옥의 몸싸움은 격화되었고, 5월 5일의 회의는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딘 장군은 통역관 김모 씨를 불러 안재홍 민정장관과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느냐며 불러 물었다. 그런데 통역관이 딘 장군에게 안재홍 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통역하였다. 이성을 상실한 김익렬은 조병옥의 넥타이를 붙잡고 통역관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음낭을 걷어 찼다. 놀란 딘 장관과 안재홍, 송호성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장군은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김익렬의 팔을 붙잡아 비틀고, 조병옥에게서 떼어놓고는 강제로 의자에 앉혀놓고는 두 팔을 결박하여 꼼짝 못하게 했다. 소란은 끝이 났고,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14][15]

5.3 일화[ | ]

1950년미국 국무성에서 이승만을 제거하려 하자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16]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16]

권위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담배를 피운 유일한 장관은 조병옥뿐이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 주재 시 국무위원들의 흡연을 금지하였고, 회의 중 담배를 피우는 조병옥에게도 흡연하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태연히 회의장에서 담배를 피웠다.

한편 민주국민당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윤보선은 철저하게 야심을 감추었지만 조병옥은 윤보선이 크게 드러날 것이라면서 그의 속에 뭔가 있다고 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권력욕을 드러냈다.

5.3.1 이승만 귀국 직후의 이벤트[ | ]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17]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17] 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

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덜어선 회장의 수만은 청중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퍼져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조병옥은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 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구그이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18]

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의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하지 장군도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18]

6 참고 문서[ | ]

  • 강준만 (2004).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54,106,123,147쪽쪽. ISBN 978-89-5906-045-0. 
  • 동아일보 사설(횡설수설) 홍찬식/維石 趙炳玉, 2003-12-17자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 민족운명의 기로(서울 경무부 경찰공보실, 1948)
  • 나의 회고록(해동출판사, 1986)
  • 민주주의와 나(영신문화사/1959년)
  • 조병옥, 나의 회고록
  • 조병옥, 민주주의와 나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2(인물과사상사, 2006)
  • 이형, <조병옥과 이기붕> (삼일서적, 2002)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번역, 일월서각, 1986)
  • 브루스커밍스, 브루스커밍스의 한국현대사(커밍스, 창비(창작과비평사), 2001)
  • 신태양사,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정치백서) (신태양사, 1957)

7 가족[ | ]

미국 뉴욕에서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광주노씨 노병선(盧炳善)의 딸 노정면과 결혼하였으며 노정면은 진명여고와 뉴욕의 드류 학원을 졸업했다. 5남매가 있으며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윤형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순형이 그의 아들들이다.

8 저서[ | ]

  • 《민족운명의 기로》 (서울 경무부 경찰공보실, 1948)
  •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
  • 《민주주의와 나》 (영신문화사/1959년)

9 조병옥을 연기한 배우들[ | ]

9.1 텔레비전 드라마[ | ]

9.2 라디오 드라마[ | ]

9.3 연극, 영화[ | ]

10 같이 보기[ | ]

11 역대 선거 결과[ | ]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50년 총선 2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민주국민당 13,498표
26.41%
2위 낙선
1952년 대선 2대 부통령 대한민국 민주국민당 575,260표
8.1%
3위 낙선
1954년 총선 3대 국회의원 경북 대구시 을 민주국민당 29,805표
67.32%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초선
1958년 총선 4대 국회의원 서울 성동구 을 민주당 27,428표
75.44%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재선
1960년 대선 4대 대통령 대한민국 민주당
0%
사망

12 각주[ | ]

  1. 수술 후유증
  2. 조병옥:지식백과
  3. 1953년 이승만이~위기마저 겪었다.: 이영석, 《야당40년사》(인간사, 1987),82쪽; 백선엽,《군과 나: 백선엽 회고록》(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278쪽.
  4. 4.0 4.1 4.2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74페이지
  5.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73페이지
  6. 임동석 (2003년 12월 14일). "조순형대표 선친은 친일인사" 파문”. 한국일보.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9월 25일에 확인함. 
  7. 정녹용 (2003년 12월 14일). “우리당 김희선 "조병옥 친일파". 한국일보. 2008년 9월 25일에 확인함. [(과거 내용 찾기)]
  8. 한국일보 : "趙대표 선친 명예훼손 김희선의원 사퇴하라"[(과거 내용 찾기)]
  9. 9.0 9.1 김민아 (2003년 12월 16일). ““조병옥박사 욕보인 김희선의원 사퇴를””. 경향신문. 2008년 9월 25일에 확인함. 
  10. “조병옥 기념사업회 親日반박 사진제출”. 매일경제. 2003년 12월 17일. 2008년 9월 25일에 확인함. 
  11.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역사평가 삐거덕대는 조병옥 한겨레신문 2003년 12월 22일자 기사
  12. 12.0 12.1 12.2 12.3 조순형 “부친 조병옥박사 친일파 매도… 姜교수 고소” 동아일보 2005-10-17일자 기사
  13. 친일 명단 공개, 실사구시적으로 보자
  14. 14.0 14.1 14.2 14.3 김익렬 기고, 1948년 8월 6일, 8월 7일, 8일자 국제신문
  15. 15.0 15.1 15.2 15.3 김익렬 유고 : 1970년대 작성, 1988년 12월 김익렬 사망 후 발표, 미간행 출판물
  16. 16.0 16.1 강규형 외 《청소년을 위한 우리 역사 바로 보기》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85페이지
  17. 17.0 17.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3페이지
  18. 18.0 18.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4페이지

13 외부 링크[ | ]

전임
(미군 24군 헌병 사령관, 현역 미육군준장)로렌섬
제2대 경무국장
1945년 10월 21일 ~ 1946년 1월 15일
후임
(경무부장)조병옥
전임
(경무국장)조병옥
초대 경무부장
1946년 1월 16일 ~ 1949년 1월 6일
후임
(내무부 치안국장)이호
전임
백성욱
제5대 내무부 장관
1950년 7월 ~ 1951년 4월 24일
후임
(서리)장택상
전임
신흥우
제16대 대한체육회 회장
1951년 6월 17일 ~ 1952년 9월 27일
후임
이기붕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대구시 병)이갑성
제3대 민의원의원(대구시 을)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민주국민당민주당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병)이우줄
후임
(대구시 갑)신도환
(대구시 을)이병하
(대구시 병)임문석
(대구시 정)조재천
(대구시 무)조일환
(대구시 기)최희송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성동구 갑)임흥순
(성동구 을)김재황
제4대 민의원의원(성동구 을)
1958년 5월 31일 ~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성동구 갑)유성권
후임
(성동구 갑)유성권
(성동구 을)홍용준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틀:대한민국 경찰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