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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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朴憲永
1946년 당시의 박헌영.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가 소장 중)
1946년 당시의 박헌영.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가 소장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무성 외무장관
임기 1948년 9월 9일 ~ 1953년 3월 31일
주석 김두봉
총리 김일성
신상정보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일 1900년 5월 28일[1]
출생지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사망일 1956년 12월 5일 (57세)[2]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에서 총살형 집행(화기에 의한 사망)[3][주해 1][3]
거주지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일제강점기 경성부
중화민국 장쑤성 난징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일제강점기 경성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대덕군 대전읍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부
미군정 한국 서울특별자유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본관 영해(寧海)
경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총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조선공산당 당수 겸 총비서
조선로동당 고문 겸 중앙대표최고위원
북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정당 조선로동당
부모 아버지 박현주
생모 이학규(아버지의 소실)
적모 최씨(아버지의 본처)
서모(이름 미상)
형제 이복형 박지영
이복누이 박신기
이복누이 박간난,
배우자 윤레나(마지막 4혼, 본명: 윤옥)
주세죽(이혼)
정순년(이혼)
이순금(이혼)[4][주해 2]
자녀 슬하 3남 2녀
(딸 박 비비안나(본명: 박영),
아들(이름 미상),
아들 박병삼(법명: 원경(스님)),
딸 박 나타샤, 아들 박 세르게이)
친인척 사위 빅토르 마르코프
사촌 형 박건영
사촌 동생 박자영
조카 박병석
5촌 조카 박병일
6촌조카 박자은
별명 아호는 이정 또는 이춘, 자는 덕영
다른 이름은 김성삼, 이두수, 이춘, 왕양옥, 박건일
종교 없음(무신론)
군사 경력
군복무 조선인민군
복무기간 1950년 6월 - 1953년 12월
최종계급 조선인민군 지상군 중장
지휘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근무 조선인민군 지상군
참전 한국 전쟁

박헌영(朴憲永, 1900년 5월 28일?[1]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 출생 ~ 1956년 12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사형 집행)은 일제 강점기 반도의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노동운동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 이력[ | ]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의 당수로 활동하였고, 좌우합작운동에는 반대하였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월북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본관은 영해(寧海).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5][6]이자 반 기독교 운동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몰락 양반 가문 출신 지주 박현주(朴鉉柱)의 서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였으며 수감 중 한번도 동료와 조직책을 누설하지 않았다. 1927년의 재판에서는 의 조직과 당원을 진술하라는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면서 광인이 되어 인분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행동으로 정신이상자로 풀려나기도 했다.[주해 3]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인사였고, 1930년대에도 계속 조선공산당의 창당, 조직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광주의 벽돌·기와 공장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활동을 통해 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을 지도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8년에 월북했으며, 같은 해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뒤에는 부수상 겸 외무장관 등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간 미국제의 간첩이란 이유로 숙청, 희생되었다. 기독교를 침략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주해 4] 체포와 수배, 도피, 은신 중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 1945년 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고[주해 5], 북조선분국을 중심으로 북조선로동당을 창건한 뒤, 당대 당의 통합으로 조선로동당이 되면서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무성의하고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아호이정(而丁, 而靜)[7], 이춘(而春)이며, 자는 덕영(德永)이다. 별칭은 대한민국 반란주모자 , 조선의 레닌[8], 암흑 속의 별[9], 비운의 혁명가 등이었다. 또한 그는 이두수[10][11], 이춘, 왕양옥, 박건일(朴健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2 생애[ | ]

3 저작[ | ]

  •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1947년)
  •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1927년)

4 연보[ | ]

4.1 학력[ | ]

4.2 일제 강점기 당시 공산주의 운동[ | ]

  •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 입당,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
  • 1922년 1월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
  • 1923년 4월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다가 체포됨
  • 1924년 출옥.
  • 1924년 8월 김단야, 이승엽 등과 함께 조선일보에 입사, 사회부 기자로 활동. 10월 필화사건으로 해직됨
  •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 이후 해방까지 지하활동. : 이때 측면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주의 단체중 하나인 '화요회'의 일원이었다. 잠시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
  • 1925년 10월 반기독교 대회의 연사로 참가. 기독교인이 일경에 밀고하여 실패하고 해산됨.
  • 1925년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신의주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상해의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발각된 것이 빌미가 돼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른 간부들 다수 구속.[12]
  • 1927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당수 차금봉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체포·구속된 뒤, 조선공산당을 지도하였다.
  • 1928년 정신이상자를 가장해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12월 임신한 아내 주세죽을 데리고 열차로 모스크바로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에 그의 탈출사실이 알려짐.
  • 딸 박 비비안나 출산, 딸은 그 뒤 고아원에 맡겨진다.
  • 1928년 11월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음.
  • 1929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 2년 과정 입학.
  • 1931년 2년과정을 마치자 코민테른은 박에게 상해로 가서 국내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상하이에 거점을 확보하고 잡지 「콤뮤니스트」를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시켰다가 발각됨.
  •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은 박헌영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했다.
  • 1932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1933년 다시 체포되었다.
  • 1939년 출옥하여 김삼룡 등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책임자가 되었다.
  • 1942년 12월 일본 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해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벽돌,기와 생산 공장 인부로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 벽돌, 기와 공장의 인부로 위장한 채 콤그룹과 비밀연락, 해방자와 같은 책자를 지하에서 발간하며 일제패망에 대비.

4.3 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정치활동[ | ]

4.4 광복 이후 활동[ | ]

4.5 북한에서의 활동과 숙청[ | ]

5 사상과 신념[ | ]

5.1 6.25 전쟁 당시 남한 인민의 봉기설[ | ]

박헌영은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22] 그는 남한 지역의 남로당원이 대구사태와 제주 4.3 사태로 상당부분 타격을 입고, 지리산태백산 등으로 잠입했으며, 식량난과 질병, 기근 등으로 대부분 전멸한 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1949년 말이 되면 4·3 사건과 여순 반란에 뒤이은 빨치산들의 유격전을 거의 진압하고, 전향한 좌익들은 '보도연맹'으로 묶어냈다.[23] 무엇보다 박헌영이 내려보낸 정치공작원과 무장게릴라들이 더 이상 남한에서 발붙일 여지가 없을 만큼 남한의 민심이 돌아서버렸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20만 남로당원 봉기설은 박헌영이 조선노동당에서 자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밝혔다.[23]

5.2 토지 분배관[ | ]

지주 가문의 서자였지만 그는 토지는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봤다.

5.3 종교관[ | ]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한 그는 늘 종교는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아편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하곤 했다. 특히 기독교는 종교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종교라고 평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24]'이자 억압과 차별의 수단으로, 야만인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24]'로 학살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잔인한 종교이자 사상이었다.

5.4 맹목적 반미주의에 대한 반대[ | ]

그는 미국이나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괴롭힌다고 보면서도 이는 미국, 일본만이 아니라 다른 강대국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파악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부터 해방정국에서의 반미주의적인 감정에 대해 맹목적인 반미 감정은 옳지 못하다며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공산주의자로서는 드물게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고 해방된 조선의 건설에 있어서도 많은 기대를 갖기도 했다.[25] 당시 평양에서는 국제공산주의의 돌격대장을 자칭하는 자들이 있었고, 또 당시 스탈린한국공산주의자들을 오로지 반미 투쟁의 도구로만 이용하려고 했다.[25]

박헌영이 평양에 가면 반미투쟁을 강화하도록 강요했으며 그때마다 박헌영은 이남의 인민들이 보는 미국은 이북측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일방적인 침략자들이 아니고 해방자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너무 심한 반미투쟁을 전개하면 당은 고립되고 만다.[25]고 주장하여 자기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미국이 특별히 사악한 집단은 아니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괴롭히는 것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라고도 항변하기도 했다. 미국을 옹호한다거나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는 이러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만 '이것은 사실 모 방면에서 요구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25] 후일 박갑동은 '박헌영이 아니고 다른 공산주의자가 그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남에서의 반미 투쟁은 더 극렬했을 것[25]'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박헌영은 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독일의 나치를 패퇴시키는데 기여한 미국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으며 맹목적인 반미주의는 옳지 못하다고며 과도한 반미 투쟁은 삼가고 미국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볼 것을 설득하였다.

5.5 프락치 활용[ | ]

그는 한때의 동지였던 여운형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여운형의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두고 감시하였다.

김규식의 주변에도 프락치를 심어두었다. 그가 심어둔 프락치 중 권태양김규식의 비서로 채용되어 삼청장의 핵심부로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삼청장김규식 주변의 정보를 빼내 그에게 전달하였는데, 그가 김규식에게 보냈던 프락치 중 권태양은 노선을 변경하여 성시백의 공작원이 되었다. 성시백은 김일성의 부하였다.

5.6 한국 전쟁 시 세균전 의혹 제기[ | ]

한국 전쟁 중 그는 미국이 생화학 무기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 10월 박헌영은 UN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화학 무기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1952년 2월 22일에도 박헌영은 미국의 세균전 감행 주장을 제기하며 유엔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26] 하고, 미국은 1952년 1월 28일부터 세균을 가진 대량의 곤충을 북한상공에 비행기로 살포한[26] 다고 주장했다.

6 박헌영 재판의 의미[ | ]

1955년 12월 15일 평양에서는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자 한국공산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인 박헌영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광복 직후부터 내연되기 시작한 김일성-박헌영 간의 알력과 경쟁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권력투쟁으로 비화되었다.[27] 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판결문은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27]

공판문헌은 박헌영이 일찍이 1919년 경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하여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년 2월 초순 일제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탄압에 복무하였으며 1939년 10월 언더우드와 결탁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는 반역의 길에 들어섰다고 질타하고 있다. 또한 전쟁기간인 1951년 9월 초순 당과 정부를 전복할 무장폭동을 단행할 것을 토의하고 1952년 9월에는 무장폭동으로 당과 정부를 정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고 있다.[27] 전쟁 직후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김일성의 정치적 승리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27]

7 논란과 의혹[ | ]

7.1 수령 무오류론의 희생양[ | ]

한국여론협회에서 1946년 7월 조사 발표한 초대 대통령 예상 후보 지지율 (1946-07-23 동아일보) : 이승만 1916표 (29%), 김구 702표 (11%), 김규식 694표 (10%), 여운형 689표 (10%), 박헌영 84표 (1%), 기타 110표 (2%)

정치학자 최장집은 박헌영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봤다. 박헌영은 북조선 수령 무오류론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김일성 유일체제하에서 독자적인 한국형의 사회주의체제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52년 12월 5차전원회의를 계기로 박헌영,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의 제거를 통하여 휴전이 후 제기 될 수밖에 없는 전쟁책임을 물어 가장 강력한 남로당세력을 최종적으로 숙청함으로써 김일성 리더쉽의 불가오류를 확인하고 유일체제를 강화하는 길로 나갔다.[28] 최장집은 박헌영의 숙청을 북조선의 김일성 독재 체제가 확립된 시점으로 간주했다.[28]

7.2 박헌영 대통령 유력자설[ | ]

1947년미군정은 당시 사태를 그대로 방관했을 경우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전망하였다. 1947년 당시 미군정 내의 보고서들은 남한에서 토지문제, 보통선거, 주 40시간 노동, 남녀평등 등 좌익이 강조해 온 것을 우익은 제의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29] 몇 개의 보고는 총선을 실시하면 박헌영이 대통령에 뽑힐 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고 한다.[29]

1947년 3월 21일에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는 지금 만일 남한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였다.[30] 이는 그대로 미국 국무성에 보내는 정보문서인 G-2 Periodic Report. No. 485(1947.03.21)을 통해 미국 정부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만일의 가능성까지 고려한 보고서에 어떻게 기록했느냐와는 달리 실제의 대통령 예상후보 여론조사에서는 박헌영은 이승만과 비교가 되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31]

소련의 정보 기록에 의하면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예상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은 다음과 같다.[32]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주한미군사는 1946년 이른 봄에 이미 남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의 영향력이 박헌영을 넘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33] 소련의 뜻이라면 맹종하는 남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의 뜻이 박헌영 아닌 김일성에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때문일 것이다. 박헌영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막연한 상정일 뿐,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7.3 한국전쟁 책임 공방론[ | ]

북한과 친북성향의 학자들은 6·25 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박헌영에게 몰고 있다. 그들은 한국 전쟁의 원인을 김일성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닌, 공산당을 배신한 박헌영의 사주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며, 미국이승만보도연맹 집단살해 공작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 및 친북한계의 다른 비판으로는 김일성과는 상관 없이 그가 일방적으로 스탈린, 마오쩌둥과 짜고 한국 전쟁을 기획했다는 설과 그가 김일성에게 전쟁을 하자고 했다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6.25 전쟁은 박헌영의 일방적인 책임이라고 볼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서울주변에 거점을 형성한 그가 미군정의 혹독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했을 때 그는 정치적 망명객의 입장이었는데, 그는 6·25전쟁을 통해 반전을 노렸으나 '휴전'으로 세력만회에 실패하면서 '휴전'의 공은 김일성에게 그 과는 박헌영에게 돌아갔다.[34] 한편 그가 한국 전쟁을 실행하면 20만 명의 남로당 파르티잔들이 북한 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7.3.1 한국 전쟁 책임에 대한 반론[ | ]

북한에서는 그가 공산당을 배신하고 한국 전쟁을 기획했다, 김일성과는 상관 없이 그가 일방적으로 스탈린, 마오쩌둥과 짜고 한국 전쟁을 기획했다는 설과 그가 김일성에게 전쟁을 하자고 했다, 그가 남한으로 내려가면 20만 명의 남로당빨치산들이 호응하여 통일을 이룰 것이라고 속였다고 비난한다. 김일성은 1954년 12월 23일 조선인민군 군·정 간부회의에서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비난했다.[22] 김일성은 "남조선에 당원이 20만은 고사하고 1000명만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을 하였더라면 미국놈이 발을 붙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남반부의 군중적 기초가 튼튼하고 혁명세력이 강하였더라면 미국놈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22]"라고 했다.

박헌영은 1952년 1월2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에게 전쟁에서 인명살상과 물자피해를 들어 승산이 없음을 말하고 전쟁을 중단하자고 한 것도 박헌영이었다.[주해 6]

그러나 박헌영은 공산당을 배신했다는 근거는 없으며, 한국 전쟁 내내 미국의 침략을 규탄하였고, 미국이 DDT를 뿌렸다는 의혹을 국제사회에 제기하기도 했다. 1952년 1월에는 중국펑더화이와의 면담에서 박헌영은 '더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35] 히기도 했다. 또한 박헌영이 전쟁을 하자고 하여 김일성이 순순히 복종하고 전쟁을 할 단계는 아니었으며, 남로당 빨치산이 호응한다는 발언을 했다 하여 6.25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박헌영에게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박헌영은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22]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22]

7.4 한국 전쟁 동조 논란[ | ]

1949년 8월 12일8월 14일 스티코프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 기록을 보면 이미 두 사람은 전쟁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여름휴가를 떠나기 직전 이들을 만난 스티코프는 "두 사람이 무력 남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이날 만찬에서 있었던 김일성·박헌영과의 대화를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이들의 대화록은 1995년 공개된 구(舊)소련 비밀문서에 담겨 있다.

7.5 미국 간첩 의혹[ | ]

소련KGB요원을 지낸 이노겐치 김은 '박헌영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들어가 진상을 조사하였고, 박헌영의 미국 간첩 혐의의 증거가 불충분하여 처형을 막았다'고 증언하였다.[36] 박길룡 등은 1953년 소비에트 연방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자 북한에서도 국내파 등이 중심이 돼 김일성동유럽을 방문한 사이 김일성 축출을 시도했는데 실패로 끝나고 급거 귀국한 김일성이 ‘그 리론가[주해 7] 어떻게 됐어’라며 그날 처형토록 지시했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36] 소련파였던 박영빈은 박헌영으로부터 미국의 간첩입을 시인하는 증언을 들은적이 없다고 말하였다.[37]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37]

미 군정기 당시부터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1945년 9월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하자 박헌영은 서울의 전 반도호텔에서 미군 주둔 사령관 하지를 만나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책에 순응하고 미군정의 포고와 제반 법규를 준수하겠다는 밀약을 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하지와 언더우드를 함께 만났으며 이 때 간첩선이 언더우드에서 하지로 정식 인계되었다. 하지는 이 자리에서 박헌영에게 조선공산당 안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할 것, 중요한 공산당활동을 사전에 통보할 것, 공산당 안에서 분열사상을 조성할 것, 공산당을 합법적, 타협적 방법으로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 미군정 앞에서 폭동, 파업 등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 간첩 비밀을 엄수할 것 등 새로운 지령을 주었다. 또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전반적 조직 체계와 활동 정형, 당의 지도를 받는 대중단체의 조직체계와 간부명단, 민전정책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 이후 3월과 5월에도 하지에게 조선공산당 장성정형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당의 태도와 협의대상 문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46년 3월 하지는 박헌영에게 이승엽과 조일명을 당의 중요 지위에 배치하고 간첩활동을 보장하도록 지령을 주었고 이에 따라 박헌영은 리승엽조선공산당 경기도당위원장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등용하고 그에게 '우익 정당 프락치' 사업을 맡겼으며, 조일명을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등용하였다. 이승엽과 조일명은 당 내부에서 수많은 비밀자료를 미군정에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1945년 9월에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 우익인사를 입각시키고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하여금 이를 지지하도록 한 것도 미국 간첩 의혹으로 지적되었다. 그가 참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국을 '해방자', '원조자'로 규정한 친미부르주아공화국이며 이에 많은 대중들이 소수특권계급을 위한 우경투항주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실패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북한과 주사파적 성향,친북성향의 학자들과 논객들은 박헌영을 '미국의 스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6.25 남침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박헌영의 남로당 무장봉기 실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잘못이 없으며, 박헌영의 배신과 함께 박헌영과 미국의 밀약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인민군 패전의 책임 모두를 박헌영의 책임이라고 하여,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으로 처형했고 주장한다.[38][39][40][41][42][43] 그러나, 북한과 친북세력의 주장처럼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거나 미국 혹은 친미 인사와 사전모의·교신했다는 등의 객관적 증거는 없다.

7.5.1 미국 간첩설에 대한 반론[ | ]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라고 주장했으나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북에 의하면 그가 '여자 시론'이라는 잡지의 편집원으로 취직했을 때 선교사 언더우드, 잡지 '여자 시론'의 주간인 차미리사와 교류한 것을 근거로 들었으나 언더우드차미리사와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 미국 간첩이라는 물증이 되지는 않는다.

미 군정기 당시 하지나 언더우드와 밀약을 하고 공산당의 자료와 정보를 넘겼다는 북측의 견해 역시 근거가 희박하다. 박헌영이 미국의 지령을 받고 언더우드를 통해 하지를 소개받고 그의 지령을 받았다면 1947년 이후 남로당이 불법단체로 규정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월북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하지나 언더우드에게 조선공산당의 기밀을 넘겼다는 북측의 의견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1947년 이후로 수시로 미군정은 남로당을 내사했고, 조선 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남조선로동당과 박헌영의 혜화동 가택을 수사했다. 박헌영과 공산당원들은 미군정과 미국 CIC방첩대를 피해 수시로 당의 주요 기밀문서를 옮기기까지 했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 우익인사를 입각시키고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하여금 이를 지지하게 한 것을 미국 간첩이라 볼 근거는 되지 않는다. 박헌영은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활동에서 '8월 테제'선언을 선언했었는데, 8월 테제의 주요내용대로 민족주의 우익과도 통일전선을 펴야한다고 주장한것대로 내각명단을 기초한것이다.

당시 이승만여운형여운홍, 허헌 조차도 대표자로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허헌 등은 인공 내각의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실패를 소수특권계급을 위한 우경투항주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실패는 당연하다는 북측의 주장 역시 설득력이 떨어지며 인공 내각의 실패는 1945년 10월 미군정 주둔 이후, 미군정과 하지 사령관은 미군정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포고를 하면서 인공 내각을 부정하였고, 인공 내각의 견제를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태도와 정부 호칭 사용을 허락하는 등의 견제정책을 취함으로 자연스럽게 몰락하였다.

소설가 이병주는 미국간첩설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일성 일당은 박헌영 일당을 미국의 스파이라고 몰아 처단했다. 박헌영 일당이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로당과 남로당의 지휘를 받은 빨치산은 스파이에 의해 놀아난 집단이 된다. 박헌영 일당이 아무리 허울 좋은 주장을 내건다 해도 미국의 스파이인 공산주의자를 민족이 용납할 까닭이 없다.[44] 그런데 김일성이 박헌영 일당의 죄를 그렇게 조작했다면 이것 역시 용납할 수 없다. 그런 가공한 짓을 예사로 하는 김일성 일당은 분명 범죄집단이다.[44]'라며 비판하였다.

7.6 신탁통치 찬성에 대한 반론[ | ]

박헌영은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 委員會)」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상임위원)이 되었으므로 처음에 반탁의 입장이었다는 것은 별로 논란할 여지도 없다.[15] 이후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사실이고, 동아일보 등 언론이나 한민당이 그가 찬탁한다고 모함해서 할 수 없이 찬탁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는 어렵고, 소련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소련은 평양의 조만식이 끝까지 소련의 찬탁 요구를 거절하자 친일파 누명을 씌워 1946년 1월 5일에 연금해 버렸다. 신탁통치 찬반 논란에서 박헌영은 자신의 처음 소신을 꺾고 소련의 요구에 순응하는 길로 갔으며, 그는 항상 소련에 종속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도처에서 드러난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를 찬성했다는 주장은 동아일보의 오보와 미국인 기자 존스턴의 날조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46년 1월의 인터뷰에서 박헌영은 현재 한국은 소비에트화할 단계가 아니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45] 있다. 또한 발언 도중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가령 된다 해도 소비에트 조선은 언제나 독립국이오.'라고 소련 편입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박헌영은 또한 45년 12월 30일에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여했고, 조선공산당 공식 성명을 통해 반탁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박헌영은 조선의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다. 또 조선이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이 편입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내용의 허위기사를 작성, 발표했다.

그렇게 되어서 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에서 '박헌영이 존스턴에게 1국 신탁제를 지지하며,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방송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보도자료'로 내보내 파문이 커졌다. 박헌영은 신탁통치 찬성을 부인성명을 발표하였고, 조선일보는 방송의 보도와 박헌영의 부인 담화를 함께 실었다.[45]

그러나 동아일보1946년 1월 16일자에서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상항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의 희망'이라는 기사와, '박헌영의 매국언동, 한민당에서 배격을 결의'라는 기사를 싣고, 1월 17일 '조공 박헌영씨 언동에 큰 파동, 전국적으로 배격운동, 각 정당과 50개 단체 분연 궐기'라고 보도하였다.[45] 1월 18일 동아일보는 이것을 가지고 다시 사설을 썼다. 존스턴 미국 기자와 동아일보의 오보에 이어 우익 언론에서 계속 박헌영의 신탁통치 찬성 기사를 내보내자 박헌영은 공식적으로 부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찬성했다는 것의 거짓인 것은 그가 부인성명을 내자 1월 5일 합동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외신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공동성명서를 냈다.[45] 는 점이다. 그러나 존스턴은 다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말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뉴욕타임즈에 오보는 없다. 존스턴씨와 박헌영씨의 회담진상 경위'라는 제하로 기사를 보도하였다.[45] 그러나 존스턴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출국하였고 박헌영은 찬탁론자로 몰리게 되었다. 박헌영이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1946년 2월로 소련의 신탁통치 찬성 의사와 미소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이후였다.

7.7 여운형 암살 배후 의혹[ | ]

2007년이정식교수는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남로당의 박헌영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46][47]

여운형이 암살당한뒤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호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미군정과 연탁한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48] 1945년 5월 여운형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우 합작에 반대하는 남로당과 갈라서자, 한 남로당 간부는 소련에 보낸 보고서에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로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49]

미 군정남로당과 결별한 여운형을 공산 세력에 역공을 가하는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 암살 당일 여운형미 군정이 제의한 민정장관 자리를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공산 진영이 '장식용 황금 도끼'라고 조롱했던 여운형이 그들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로 변할 우려도 함께 갖고 있었다.[49]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도 박헌영을 여운형 암살의 유력 용의자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또한 여운형의 딸 여연구 역시 박헌영의 부하들의 개입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여운홍은 해방 정국에서 좌파에 의한 테러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여운홍은 후일 여운형의 암살과 관련, 좌파에 의한 테러를 지적하기도 했고[50], 여운형의 둘째딸 여연구는 부친을 암살한 것이 종파분자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가리킨다.[50] 이정식 교수는 이를 근거로 남로당 계열 등 박헌영계열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50]

그러나, 박헌영은 정치테러를 할만한 실력 행사 능력을 가지지 못했고,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체포령이 내려저 9월 총파업 시기 비밀리 월북해 북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 상황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여운형 암살 당시 여연구는 모스크바 유학 중이라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며 “당시 수사당국은 좌파 한지근이 범인이라고 밝혔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51] 따라서, 박헌영의 소행이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52]

반면에 김일성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53]는 것이다.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은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때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53] 박갑동은 '이러한 근거들은 미국자료에 의하면 여운형의 진짜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나와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미국 자료"를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연구자도 이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어떤 자료에도 미군정이 여운형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썼다.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은 '여운형과 김일성의 관계에 미뤄, 김일성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박갑동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썼다.[54]

8 신념[ | ]

  • 인민의 고무래 : 평등하고 자유로워서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세력의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55]

9 상훈[ | ]

10 가족 관계[ | ]

박헌영의 자녀 중 성년까지 생존한 자녀는 딸 박 비비안나와 아들 박병삼(법명은 원경)이 있다. 그 밖에 그의 가까운 친척은 대부분 무후이고, 5촌 조카 박병일(한국 전쟁 중 사망)이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 그의 5대조의 묘가 소재해 있다.

11 평가[ | ]

박헌영·남로당 노선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에서 두 개의 경향성이 존재한다.[60] 그 하나는 좌경적·모험주의적 지도에 대한 비판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이들의 주체적인 측면보다는 당시 남한 사회가 처하고 있었던 객관적 상황 특히 미·소의 규정성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밝혀야 할것은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상황의 규정성과 주체적 대응의 상호관계 속에서 양자의 비중 정도를 명확히 하는 것일 것이다. 박헌영·남로당노선에 대한 평가의 두 경향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논문으로는 이미숙, '박헌영·남로당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역사비평"제5호, 역사문제연구소,1989 여름)와 정병준,'박헌영·남로당노선 무엇이 문제인가'가 있다.[60]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6%가 박헌영을 지목하였다.[61]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에 한표도 받지 못하였다.[61]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68표를 얻어 3위였다.[61]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84표를 얻었다.[61]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62표를 얻었다.[61] 1946년 당시 미군정사회주의 계열을 탄압하지 않을 경우 박헌영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우려가 있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다.[주해 9]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샵신이 믿는 한국인 친구에게 자신이 조선공산당을 통제하고 있으며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부하(henchman)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62] 그가 소련의 지시를 받고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섰다든가, 수시로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든가, 스탈린의 북한지도자 결정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든가 하는 행보를 보면 철저히 소련의 의사에 종속된 사람으로, 공산주의자는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이승만의 비판이 타당한 면이 있다.

박헌영의 최후가 사실상 김일성북조선에 독재정권을 건립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박헌영은 1955년 12월 5일 반당(反黨)·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22] 이는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고,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으로써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권력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계기가 됐다.[22] 는 시각도 있다.

최장집에 의하면 그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갈등은 혁명 세력의 통합성을 저해했다고 평하기도 했다.[60] 반면에 민족해방투쟁세력의 고립·분산적 활동은 해방 후 특히 남한에서 혁명지도부의 통합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예컨대 남한에서 좌익세력과 중경 임시정부세력 사이의 대립,1946년 신전술 전후의 여운형세력과 박헌영세력의 분열 등은 이를 보여준다.[60] 한편 지주, 일부 한인 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은 해방 후에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에 직면하여 반혁명세력이 되었고, 이들은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지원과 일제가 남겨 놓은 강력한 관료체제를 이용하여 민중들의 도전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게 된다.[60]

최장집은 박헌영과 김일성이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시각이 편협하였다며 이 점을 공통점으로 지적했다. 국제정치와 전후 국가체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시야의 협애함이라는 면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약점을 공유하고 있었다[63] 한다. 이들이 세계정치의 주변지역에서 투쟁하던 민족해방운동에서 벗어나자마자, 국제정치적 변화에 대응하는 학습기간이 주어지지도 않는 상태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 세계정치의 중심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나 한민족 전체에게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63] 는 것이다.

11.1 긍정적 평가[ | ]

박헌영은 솔직하고, 자신의 생각을 지킨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다. 또한 직선적이었으며[64], 꾸밈이 없고[64], 대학교 교수와 같은 풍모[64]를 지녔다는 평가가 있다. 주로 선생님, 지식인의 스타일이었으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담담했다 한다. 박헌영의 비서이자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의 간부를 역임한 박갑동에 의하면 '박헌영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의 말은 대학교 교수의 강의와 같이 담담하며 직선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쏘는 듯한 안광과 단단한[64]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확고하고 꾸밈이 없는 듯했다.[25]'고 평하였다. 그는 약속을 지켰으며 지킬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의 말에는 실천이 따르는 것만 같았다[25]는 평가도 있다.

미국을 맹목적으로 배척하자는 의견에 맞서 미국과의 외교론을 펼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박헌영이 합리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가졌기에 해방정국에서 유혈사태를 최대한 막거나 방지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박헌영이 아니고 다른 공산주의자가 그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이남에서의 반미 투쟁은 더욱 극렬했을 것이다.[64]'라는 시각과 '만약 박헌영이 소련의 지시대로 모두 움직였다면 남쪽에서는 날마다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았으리라 믿어진다.[64]'는 평가도 있다.

11.1.1 원칙주의자[ | ]

박헌영에 대해 처음부터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한번 자신의 사람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는 자신의 간담까지 드러낼만큼 솔직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고집스럽고 편협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한 성정덕분에 맑스주의 역사학에릭 홉스봄처럼 신념을 굽히지 않는 원칙주의자로 살았다. 그 예로 조선총독부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재판중 공황상태에 의한 광인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비운의 혁명가라는 평가가 있으며[12] 이론가라는 평가도 있다.

오슬로 대학교 교수 박노자는 박헌영이 스탈린주의도그마에 빠져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에 열성적 노동계급 혁명가였다는 평가를 내렸다.[65] 한국의 대학교 교수 최규진은 그가 빼어난 이론가이며 이론이 굳센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66]

11.1.2 남북의 외면과 평가절하[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의 경쟁자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월북인사이며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주해 10] 실제로, 남한과 북한 그 어느곳에서도 박헌영에 대해 기념하는 어떤 묘소도 기념비도 없다. 그는 일제 강점기 중 독립 운동과 민족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쳤으나 남·북한 모두에서 버림 받은 것이다.

11.2 부정적 평가[ | ]

비타협적이며 편협하다,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주로 존재한다. 조선공산당에서 출당되었던 조봉암은 그가 편협하고, 종파적이라고 비판했다.[67][68] 그러나 조봉암의 비판에는 1920년대 후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김구와 비교해서 김구가 자주독립적인 반면 그는 외세의존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김구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반탁운동의 의미는 자주독립에 관한 논쟁에서 우파가 좌파에 승리를 거뒀다는 데 있다. 반면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을 따른 북한노선을 추종해 찬탁에 나섰다가 남한 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자주독립보다 사회주의 노선을 따른 결과였다[69]

또한 고집스럽고 괴팍스러운 인간[64] 이라는 평가도 있다. 일에 있어서 철저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들만 썼기 때문에 편협적인 점, 선동력과 포용력등 대중적인 정치가로서는 부적격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70][주해 11] 그밖에 쇼맨십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남한에서는 남한을 적화하려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71] 또한 한국 전쟁의 원흉 중의 한사람이라는 비판도 있다.[72] 일부에서는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근거삼기도 한다[20] 그의 이념에 대해서도 편협하고 종파적인 교조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다.[73] 어떻게든 남한 체제에 적응하지 않고 월북하여 몰락을 자처했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북조선에서는 김일성과의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밀려나 숙청되어, '미국의 스파이', '반당종파분자'라는 죄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한과 함께 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좌우합작노선의 여운형·김규식도 ‘북한과 함께’였으며 김구 또한 결국은 북한을 찾아가는 무리수를 범했다는 것이다.[69]

11.2.1 군사력 외면에 대한 시각[ | ]

박정희는 그가 무력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에 의하면 박헌영은 빨치산 출신인 김일성과는 달리 군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74] 육사 3기생부터 군내당을 건설하기로 한 것 같은데 지휘체계의 혼선이 컸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도 중앙당의 이재복이 지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도당이 관리하던 하사관들이 멋대로 주동하여 일으킨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74]

12 인물평[ | ]

박갑동은 그를 '단단한 표범과 같은 인상을 지닌 사람[64]'이라고 평하였다. 박갑동은 '그와 처음 악수를 하며 느낀 인상은 '표범과 같이 단단하고 민첩한 사람'이라는 그런 것이었다. 싸늘하게 웃는 풍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 같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와 직접 가까이 접촉할 때까지 박헌영 이라는 사람은 공산주의 투쟁 밖에는 모르는 편협하고 무서운 사람인 줄만 알았다.[64]'는 것이다. 박헌영은 풍골이 뛰어나게 잘생긴 영웅형은 아니며, 또 순간적으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웅변가도 아니며 초면인 사람을 한번 만나 자기 편으로 만드는 그런 매력적인 힘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64] 또한 그는 과장된 행동과 과잉 반응을 거부했고, 이는 정치인으로서는 다소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세심하게 배려하며 생일과 가족들의 행사까지 사소한 것도 기억하고 챙겨주기도 했다.

또한 '종종 그의 곁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폭넓고 상식이 풍부하며 일반에 알려진 것같이 그렇게 괴팍스런 인간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때에 그는 해방 전에 지하로 도피생활을 할 때 자신이 손수 끓여 먹던 찌개 이야기를 구수하게 늘어놓아 주위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게 한 일이 있다.[64]'고 한다. 을유문화사 창업주 정진숙에 의하면 이상백을 통해 만난 박헌영은 '시골 샌님' 같았다고 회상하였다.[75]

그러나 박헌영도 자신이 한번에 쉽게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매혹적이지 못한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박갑동에 의하면 '박헌영의 풍모에서 풍기는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 다소 대중 정치가로서는 결정적인 마이너스가 된 것을 자신도 알고 있는 듯 했다.[64]'고 진술하였다.

13 유흥과 놀이의 문외한[ | ]

박헌영은 유흥과 놀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이런 점은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취약점으로 작용하였다. 김일성소련 대사관을 자주 찾아가 함께 술도 마시고, 당구도 즐긴 반면 박헌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박헌영은 남한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점도 소련이 그 대신 김일성을 선택하는 요인이 됐다.

스티코프 당시 연해주 군관구 정치위원이 보낸 보고서에는 김일성은 "골수부터 뼛속까지 소비에트 사람이며, 자식들이 우리나라(소련)에서 태어난 빨치산"이라고 적혀 있다.[76] 스티코프에 의하면 당시 박헌영과 같은 남로당 지도자들은 남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 관계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관저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자주 놀러와 술을 함께 마시고 당구를 즐겼다는 것이다.[76] 박헌영이 노래, 당구, 유흥 등을 전혀 즐기지 못한 점 역시 취약점이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을 찾아가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당구도 쳤다. 그러나 김일성의 교육 정도가 낮은 것이 문제가 돼 소련 군정은 재소 한인들을 불러 김일성에게 당과 정부 운용 방침을 교육시켰다.[76]

14 김규식과의 비교[ | ]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심지연은 김규식과 박헌영의 퇴장을 비교하였다. 김규식과 박헌영은 이론가, 합리주의자, 냉철하다, 샌님과 같다는 공통된 이미지를 지녔다. 그러나 김규식과 박헌영은 1945년 이후 서로를 적대시했다. 심지연 교수에 의하면 한 인물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시대정신이 대두되고,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아름다운 퇴장’과 개인의 파멸은 물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볼썽사나운 퇴장’으로 나뉘는 것이다.[77]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김규식(金奎植)은 전자요, 박헌영(朴憲永)은 후자다. 김규식은 해방정국에서 정치세력의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좌우(左右)합작을 시도했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국내외의 역학(力學)관계상 합작이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지난한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77] 그러나 정국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자 김규식은 주변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계를 떠났다.[77]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인물이 박헌영이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일제 시대의 비밀주의를 답습하는가 하면, 젊고 유능한 새 인물을 기용하는 대신 소수의 파벌 위주로 당을 운영했다. 좌우합작을 파탄시켰고, 좌익진영의 통합을 위해 물러나야 했을 때 오히려 전면에 나섰다.[77] 당내에서 비판이 일자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는 논리를 펴며 총파업과 항쟁을 주도했다. 이처럼 독선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전략·전술로 일관하는 바람에 박헌영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노선을 따랐던 수많은 조직과 조직원들이 파멸하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77]

심지연은 김규식은 시대 정신에 부합하려 노력한 반면 박헌영은 독선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전략, 전술로 일관하였음을 양자의 차이점으로 지적했다.

15 기타[ | ]

1919년 상하이에 도착하기 이전까지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공산주의자가 되면서는 반기독교적인 입장에 섰다. 이후 그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교육, 의료시설, 구호 사업 등을 빌미로 조선인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침략의 도구,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규정하였다.

그가 폭력혁명을 신봉하지는 않았으나 과격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로 규정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945년 9월에는 한민당 창당대회에 참여하여 창당축하 인사와 함께 축사를 낭독하기도 하였고, 소련의 지시를 받기 이전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조직 시에는 김성수, 김구우익인사들의 입각에 찬성하였으며,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회를 결성했을 때 참여하기도 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를 놓고 친일파 청산을 꺼리는 이승만과 김구의 묻지마식 단결에 반발하여 독립촉성회를 탈퇴한 것이 박헌영의 일방적인 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반면 남노당의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우익 단체들과 맞찬가지로 친일 경력의 지식인들로 채워졌다고 하는데 이는 친일파를 엄청 싫어 하는 박헌영의 성향으로봤을때 모함으로 보여진다. 1947년 1월부터는 대한적십자사의 전신인 조선적십자사의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사로 선출되자 조선적십자사 총재 김규식은 반발했고, 수시로 그와 마찰하였다. 김규식은 그를 혐오하였다고 한다.

이승만돈암장을 찾았을 때 이승만의 비서였던 윤치영은 직접 간을 봐서 식사를 차려왔다. 김원봉은 윤치영이 해온 식사를 단숨에 해치웠지만 박헌영은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면서 끝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15.1 조선공산당 재건 노력과 좌절[ | ]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년 12월 이후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공산당 재건 운동을 추진했다.[주해 12] 1945년 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웠다.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놓고 김일성이 분국 설치 허용을 요청하였으나 박헌영은 당의 본부는 수도에 둔다는 점과 일국일당주의 원칙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소련, 중국 측의 압력으로 허용하였다.

그 뒤 김일성은 북조선분국을 당수인 박헌영의 상의 없이 북조선로동당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1946년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당대 당의 통합으로 합당을 요구하자 그는 어쩔수 없이 승복하여 조선로동당을 창건하면서 그가 조직한 공산당은 와해되었다.

15.2 언론인 경력[ | ]

1919년 잡지 여자 시론에서 기자로 단기간 근무하였고[주해 13] , 1924년~25년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사업을 위해 상하이로 파견된 1932년 1월부터 1933년 7월까지는 김단야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지를 발행했다.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었던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의 발간과 감수 등에 직접 관여하였다.[주해 14]

16 일화[ | ]

왜소한 체구에 근육이 적은 체형이었으며 술과 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신장은 161cm로 작은 체격이었으나, 고집이 강하고 굳건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78]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성격이었다. 여운형 계열에서 리강국 등을, 장안파 공산당에서는 리승엽, 임화 등을 빼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들은 1953년 처형될 때까지 박헌영을 따르고 신뢰하였다.

취미로는 요리하는걸 좋아했었고 솜씨도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며[79], 독서를 좋아하였다. 기억력이 비상했다고도 한다.

이론가이자 치밀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체육 보다는 독서와 명상을 즐겨했는데 이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리론가라고 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적으로 돌변한 뒤에 리론가라는 칭호는 (사변적인 지식인이라는)경멸적인 의미로 많이 활용되었다. 또한 미국 유학을 꿈꾸고 영어 공부를 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미국유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영어는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기초적인 수준의 일본어러시아 어를 구사하여 별도의 통역 없이도 직접 외신 기자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의 국내외 공산주의 서신이나 이론을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는 이론적 지식이 해박한 편이었고 1945년의 8월 테제 등은 박헌영이 직접 작성했던 것이었다.

해방 직후의 한 여론 조사에서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뽑혔다. 여운형이 2위고 3위는 이관술이다. 이승만김구는 그 한참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다수 여론조사에서는 이승만이 압도적 1위였고, 박헌영은 김구, 여운형보다도 상당히 아래였으며, 이름도 못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80]

김일성은 박헌영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않자 발가벗긴후 셰퍼드 우리에 던져넣어 개에게 물어뜯기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박헌영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재판에서도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55]

17 같이 보기[ | ]

18 박헌영을 다룬 작품[ | ]

위키문헌 "저자:박헌영" 위키인용집 "박헌영"

19 참고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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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주해[ | ]

  1. 박길룡의 증언, 박길룡에 의하면 그가 총살당한 뒤, 처형당한 장소 근처 야산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박헌영은 처형 직전 윤레나와 두 자녀를 출국시킬 것을 부탁했으나, 이들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 박헌영과 이순금이 정식 결혼은 아님.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55년 12월 작성된 박헌영 재판 기록문에 따르면 '그가 일제 경찰과 서로 짜면서 광인행세를 하고 풀려났다.'고 적혀있다.
  4.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의 투옥과 죽음 등은 그를 자연스럽게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의 지도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이는 당의 본부를 국가의 수도에 둔다는 공산주의 정당의 강령과도 위배되는 조치였다.
  6. 1952년 2월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을 그만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은 이제와서 그만둘수 없다며 그의 종전주장을 일축했다.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당시 전쟁반대 및 중립화통일을 주장하는 김원봉, 안재홍, 조소앙 계열의 책동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7. 김일성은 평상시 박헌영을 '리론가'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매사 논리적이고 따지고 원칙을 중시하는 박헌영을 비아냥 거리는 별명이었다.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441
  8. 1939~1945년 동거, 정순년이 강제로 친정아버지에 의해 목수에게 개가한 뒤, 박헌영이 윤레나와 재혼하기 전까지 그가 박헌영의 동거녀 역할을 하였고, 사회주의운동가들은 그들을 부부로 대우했다.
  9. 대표적으로 1946년 10월, 남로당 결성 이전이었던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한 대구 10.1사건이 터지기도 한 만큼 한동안은 공산당이 우세했었던 시각이 있었다. 실제로 미군정이 1946년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 계열 정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10.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 이후 관련 서적과 언론들이 나왔고, 2000년 이후부터는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서훈 노력과 함께 박헌영 재평가 여론과 서훈을 추서하려는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1. 한편, 프락치 지휘부 김형선을 비롯해서 공산주의 이론가 김오성등 인민당 프락치로 심어두고, 장안파 공산당여운형 계열에서 꾸준히 사람을 빼오는 등 포섭노력을 벌인 것으로 보아 자기 편만 신뢰하였다는 비판은 유효하지 못하다는 반론도 있다.
  12.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인 김재봉, 강달영, 안광천, 차금봉 등이 옥사하고 다른 지도자들도 옥사, 처형 등으로 사라지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3. 북조선은 그가 잡지 여자 시론에서 근무한 점도 미국 간첩설의 근거의 하나로 제시하였으나 잡지 활동과 미국과의 관련성, 그가 여자 시론의 기자로 재직 중 미국인들에게 포섭되었다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4. 직접 기사의 내용을 읽어보고 담당 기자를 불러 교열을 지시하기도 했다.

21 각주[ | ]

  1. 1.0 1.1 출생 연도는 1898년 출생설과 1901년 출생설이 있다.
  2. 사망 연도는 불명확하며, 1953년 사망설과 1955년 사망설, 1956년 사망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3. 3.0 3.1 평양 근교 기슭 야산에서 처형당한것으로 추정. 이는 박헌영 처형을 했던 방학세의 운전수였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4. <이순금 일대기>동지와 연인들 Archived 2015년 7월 20일 - 웨이백 머신 울산포커스 2006년 12월 31일
  5. 박헌영 부인 주세죽씨에 사후 건국훈장
  6. 노무현 정부 시절 조선공산당 활동을 독립 운동으로 인정하였으며, 박헌영은 당시 조선공산당 핵심 간부였다.
  7. 1929년, 소련 유학시절에 지었던 호. '인민의 고무래'라는 뜻으로 하층 노동자, 농민계급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8. “한국일보 : 박헌영 전집 총 9권 출간”. 2011년 11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13일에 확인함. 
  9. 한국전쟁(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6) 45
  10.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280페이지
  11.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을 당시 일제 밀정들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썼던 가명.
  12. 12.0 12.1 12.2 12.3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동아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3. 강준만 (2004년 4월 3일).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 서울: 인물과사상사. ISBN 89-88410-89-0.  57~58쪽
  14.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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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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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정창현,《인물로 본 북한현대사》(민연, 2002),120쪽.
  20. 20.0 20.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종석250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21.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박헌영이 1956년 7월 19일에 평양 기슭 야산에서 방학세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증언이 있다.
  22. 22.0 22.1 22.2 22.3 22.4 22.5 22.6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didaros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23. 23.0 23.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gidodos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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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잡지 선구 1945년 12월호 대통령 예상 후보 여론조사 지지율
    1946-07-23 여론조사 초대 대통령 후보 지지율
  32.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33.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Ⅰ KOREAN POLITICS AND PEOPLE - THE FIRST SIX MONTHS > The Communist Party His( Kim, Il Sawng) influence in Southern Korea had nearly eclipsed that of Mr. Pak by early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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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36.0 36.1 [출판]남로당지도자 박헌영 자료집 내는 아들 圓鏡스님 :: 네이버 뉴스
  37. 37.0 37.1 한국전쟁(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6) p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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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Cover Story] 인간은 미리 형성된 선입견에 의해 관성적으로 사고한다
  43. “한국일보 : "박헌영은 언더우드2세의 스파이". 2011년 11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13일에 확인함. 
  44. 44.0 44.1 이병주, 《지리산 7》(한길사, 2006) 379페이지
  45. 45.0 45.1 45.2 45.3 45.4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autogenerated13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46.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 네이버 뉴스
  47.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4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88~289쪽 참조.
  49. 49.0 49.1 [허동현의 모던타임스] [10] 여운형 딸 "아버지는 종파분자들이 암살했습니다" 조선일보 2012.05.24
  50. 50.0 50.1 50.2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신동아 2007년 9월호(통권 576호)
  51. “몽양 여운형, 남로당에 암살 가능성”
  52. 《여운형을 말한다》,아름다운책. -몽양 암살범에 대한 질문 (김병태)-부분 참조
  53. 53.0 53.1 《통곡의 언덕에서: 남로당총책 박갑동의 증언》(서울:서당,1991) p257
  54. 《북한의 역사2권》,p755. 김학준 저.
  55. 55.0 55.1 인터넷 경향신문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56. 묘소는 충남 예산군 신양면 대덕리 화전평에 있다.
  57. 호적에 기록된 사망일은 1907년 12월 19일이다.
  58. 이정 박헌영 일대기(임경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8) 45쪽에는 족보의 기록을 취했다 라고 첨언하였으므로 1912년 사망설이 아닐 수 있다.
  59. 박현주의 본처 탐진최씨의 호적상 사망년도는 1907년이다. 따라서 다른 여인의 소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60. 60.0 60.1 60.2 60.3 60.4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choiss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61. 61.0 61.1 61.2 61.3 61.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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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63.0 63.1 [최장집 논문] 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의 문제 조선일보 1998.11.05
  64. 64.00 64.01 64.02 64.03 64.04 64.05 64.06 64.07 64.08 64.09 64.10 64.11 박갑동, 《박헌영》 (인간사, 1983) 118페이지
  65. [제728호] 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 문화 : 뉴스 :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 한겨레21
  66. 《내일을 여는 역사 17호》 (편집부 지음, 서해문집, 2007) 29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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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방송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69. 69.0 69.1 [8·15특집/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해방직후 역사 논쟁
  70.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autogenerated7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71. “코나스넷”.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13일에 확인함. 
  72. "전쟁 나면 남조선 20만 봉기" 박헌영, 뭘 믿고 장담했을까
  7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2006) 443페이지
  74. 74.0 74.1 국민교재(18) 박정희의 진실 10문10답
  75.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 은행원서 출판계 투신한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 조선일보 2005.08.25
  76. 76.0 76.1 76.2 "[붉은왕조 증언요약] 소, 김일성에 강제로 북한 떠맡겼다", 조선일보 1997년 6월 30일자
  77. 77.0 77.1 77.2 77.3 77.4 [아침논단] 리더십에도 유효기간 있다 조선일보 2004.01.28
  78. <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안재성 지음.
  79.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안재성 지음. p207
  80. 孫世一의 비교 評傳 (7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建國準備委員會 3週日 -1945年 8月(中)- 월간조선 2010년 4월호

22 외부 링크[ | ]

22.1 참고 자료[ | ]

전임
(초대)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김책, 홍명희와 공동)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후임
박헌영, 홍명희, 최창익, 허가이
전임
박헌영, 김책,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총리
(홍명희, 최창익, 허가이와 공동)
1951년 1월 30일 ~ 1953년 3월 31일
후임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전임
(초대)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외무장관
1948년 9월 ~ 1953년 3월 31일
후임
남일
전임
(초대)
제1대 조선인민군의 총정치국장
1950년 9월 ~ 1953년 3월 31일
후임
김재욱
전임
차금봉
제9대 조선공산당 당수 권한대행
1927년 7월 ~ 1927년 12월 10일
후임
박헌영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 해체)
전임
박헌영
(조선공산당 당수 권한대행)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 해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의 임시 지도자
1927년 12월 10일 ~ 1945년 8월 15일
후임
박헌영
조선공산당 위원장 겸 총비서
전임
박헌영
조선공산당 위원장 겸 총비서
1945년 8월 20일 ~ 1946년 11월 23일
후임
(남로당에 흡수)

틀:조선인민군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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