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조봉암
曺奉岩
Cho Bong-am.png
대한민국 대한민국제1대 농림부 장관
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
임기 1948년 8월 15일-1949년 2월 22일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총리 이범석
차관 남봉순 (농림부 차관)
전임 (신설)
후임 이종현
대한민국 대한민국국회부의장
임기 1952년 7월 10일-1954년 5월 30일
전임 김동성
후임 최순주
임기 1948년 5월 31일-1950년 5월 30일
의장 신익희
지역구 인천부 을
전임 (신설)
후임 이용설, 곽상훈, 조봉암
대한민국 대한민국국회의원
임기 1950년 5월 31일-1954년 5월 30일
지역구 인천시 병
전임 곽상훈, 조봉암
후임 이용설, 곽상훈
임기 1950년 6월 19일-1952년 6월 18일
전임 김동원
후임 윤치영
진보당총재
임기 1955년-1959년
전임 장건상 (근로인민당 당수)
후임 (해산)
신상정보
출생일 1899년 10월 29일(1899-10-29)
출생지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사망일 1959년 7월 31일 (59세)
사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형무소 사형장에서 교수형 집행
본관 창녕 조씨
학력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중퇴
일본 주오 대학 중퇴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년 2월)
정당 진보당
부모 조창규(부), 유씨 부인(모)
형제 조수암(형)
조용암(아우)
배우자 김금옥(사별), 김조이(재혼)
자녀 조규호(아들)
조호정(장녀)
조의정(차녀)
조임정(삼녀)
별명 죽산 (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년 10월 29일 (음력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사형집행될 때 유가족은 딸인 호정과 아들인 규호, 인천시에서 거주하는 친누이인 조경암과 그외 조카 등 친척들이 서울시인천시에서 살고 있었다.[1]

1 이력[ | ]

그는 일제 강점기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2]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다.[3]

2 생애[ | ]

3 묘소[ | ]

2019년 7월 촬영
2019년 7월 촬영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산 사색의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에 있다.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돼 정부가 비문을 새기지 못하게[4] 할 뿐만 아니라 창령 조씨 문중에서도 비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그러나 2011년 대법원에 의하여 간첩죄 등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고 나서 유족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비문이 없는 상태 그대로 둘지 여부를 검토하였다.[5]

다음 글은 묘소앞 돌에 새겨진 죽산의 어록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

4 논란[ | ]

재판 중인 조봉암

장택상윤치영 등이 나서서 그가 이적행위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증언, 변호하였으나 이들의 증언은 기각되었다. 장택상은 법정에 조봉암을 변호하는 변론을 제출하기도 했다.

4.1 이적행위 여부 논란[ | ]

그가 양명산이 공산주의자인 것을 알 리 없다는 반론과, 양명산이 법원 진술에서 고문으로 강요당했다며 진술을 번복[6] 한 것을 들기도 한다. 조봉암이 사형당할 당시 정치계와 학계의 일부 인사들은 사법살인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주장과 함께 법살, 사법살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로는 공개발표한 전향서와 반공주의자 장택상이 그를 옹호하고, 조봉암의 구속, 재판시에는 장택상이 나서서 직접 구명과 변론을 한 점을 들기도 한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의 재판은 모함이며 무고라는 것이다. 윤치영은 그가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4.2 공산주의자 의혹에 대한 반론[ | ]

장택상윤치영은 조봉암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증언하였다. 그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그를 비판하던 측은 자유당민주당 계열이었고, 그를 공개적으로 변호하던 인물은 이승만의 측근인 장택상윤치영 이었다.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되자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7] 장택상은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며, 재판 과정에서 직접 변호하는 글을 법원에 제출하였다.

윤치영은 그가 용공분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가 진보당 사건으로 연루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그가 그리 된 데에는 주변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용공분자로 몰리는 불운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과 애석함이 남아 있다.[8]'라고 평하였다. 윤치영은 그가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후일 윤치영은 한 인터뷰에서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9] 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장택상윤치영이승만의 측근들 중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된다.

5 평가와 비판[ | ]

5.1 평가[ | ]

여운형은 그에 대한 인물평으로 '그(조봉암)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으며, 시를 읊었고 강개가 북받치면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의 장녀인 조호정씨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여운형과 가장 친했으며, 한국민주당박헌영, 이승만, 김구를 다 안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김구를 '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한다.[10]

성균관대학교수 서중석은 민국당 못지않게 그의 정치적 신조와 거리가 멀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국민당에 몸담았던 것은 정치적 피신이라고 하더라도 파격적인 일이라고 봐야 할 것[11] 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정회에 이어 국민당에 들어간 것은 그의 정치적 곡예를 보여준 것으로서, 일정한 기간 동안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고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다는 적극적인 면이 고려되었을 것[11] 이라고 평가했다.

1993년 이후 조봉암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조봉암의 유족들은 장택상이 조봉암과 가까웠고, 장택상, 윤치영 등이 직접 나서서 조봉암을 변호한 점을 들어 문민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김영삼에게 진정서를 보냈으나 김영삼은 이를 외면하였다. 1946년 5월6월 박헌영공산당을 언론에 공개 비난하고 탈당한 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를 당에서 제명시켰으며 한국 전쟁 당시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고 공격하였으나,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였고, 1990년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국통일상을 추서하였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12] 2007년 10월 에는 죽산조봉암추모사업회가 발족되었다.[12]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조봉암에 대한 전기, 평전 등 서적으로 발간되어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13]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추진 중에 있다.

5.2 비판[ | ]

1940년 이후 지하단체 조직 활동을 하였으나 소극적이었으므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유휴분자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41년 수감 중 형문에 못이긴 리승엽이 전향하고 대화숙에 가입하게 된 것은 그의 설득의 영향이 컸다. 이때문에 동료의 변절을 도왔다는 비판도 있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박진목은 그를 대인(大人)이지만 변절자라고 평가하였다.[14]

6 기타[ | ]

  • 그는 애연가였다.
  • 조봉암 사형 당시 그의 장녀 조호정이 유일한 성년으로 결혼하여 외손자녀를 두고 있었다.

7 저서[ | ]

  • 《공산주의 모순발견》
  • 《우리가 나아갈 길》
  • 《우리의 당면과업》

8 가족[ | ]

1941년 죽산 조봉암의 가족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조봉암이다.

조봉암은 아버지 조창규와 어머니 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둘이 요절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이 오래 살라는 뜻에서 이름자를 바위 암으로 정하였다. 한편 조봉암은 창녕 조씨 항렬상 환 자 돌림에 해당된다.

9 일화[ | ]

1948년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으로 있을 때, 농지개혁을 주도하여 소수의 대지주들에게 집중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당시 한민당세력을 비롯한 대지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 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다섯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19]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19] 는 것이다.

조봉암의 처형과 관련하여 과거 서대문형무소 수인들과 간수들 사이에 전해져내려오는 민담 중에 '봉암새'(혹은 '죽산조')라는 민담이 있다.

나는 어느 사이 비둘기의 벗이 되었다. 악하고 거짓 많은 인간들보다 이 비둘기는 얼마나 더 기특하며 정다운 친구인가 말이다. 비둘기가 좋아하는 콩, 그 콩을 내 밥에서 골라내어 던져준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어 먹는 배고픔 속에서도 이 비둘기 모이만은 잊지 않는다. 식후 창가로 가서 구구구 비둘기를 불러 콩알을 던진다.

여기저기 모여와 구구거리면서 그걸 쪼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끝없는 희열감에 젖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일은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딴 방의 사람들도 소중한 밥을 나누어 던져주는 것이었다.

건너편 2사의 조봉암 선생도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 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 분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죽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교수대에서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 후 사형집행의 버드나무엔 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위 ‘봉암새’ 혹은 ‘죽산조(竹山鳥)’라는 얘기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누가 지었는지 조차도 확실치 않는 ‘봉암새’의 얘기가 서대문 징역꾼과 형무관 사이에 마치 하나의 전설이나 민화(民話)처럼 구전되고 있다.[20]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조봉암의 사형에 대해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우리도 실수한 게 있다"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21]

10 조봉암을 연기한 배우들[ | ]

10.1 드라마[ | ]

10.2 연극, 영화[ | ]

극단어니스트에서 2018년11월「사법살인59:죽산조봉암」이란 연극으로 진보당사건을 재현하였다.

10.3 관련 서적[ | ]

  • 신태양사,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정치백서)》 (신태양사, 1957)
  • 박태균, 《조봉암 연구》 (창비(창작과비평사), 1995)
  • 정태영 외, 《죽산 조봉암 전집》 (정태영, 오유석, 권대복 정리, 세명서관, 1999)
  • 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장택상, 창랑 장택상 기념사업회, 1992)
  • 이영석, 《조봉암 누가 그를 죽였는가?》 (도서출판 세상의 창, 2000)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하)》 (역사비평사, 1999)
  •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정태영,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2006)
  • 《역사비평(1995년 봄 호)》(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권》 (들녘, 1998)
  •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역사비평사, 2008)
  • 주대환, 《한국사회와좌파의재정립: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산책자, 2008)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 황해문화, 《황해문화 23호:1999년 여름호》 (새얼문화재단, 1999)
  • 황정덕, 《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금창출판사, 2004)

11 같이 보기[ | ]

12 역대 선거 결과[ | ]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48년 총선 1대 국회의원 경기 인천부 을 무소속 17,620표
37.8%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초선
1950년 총선 2대 국회의원 경기 인천시 병 대한국민당 14,095표
42.8%
1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재선
1952년 대선 2대 대통령 대한민국 무소속 797,504표
11.4%
2위 낙선
1956년 대선 3대 대통령 대한민국 무소속 2,163,808표
30%
2위 낙선

13 각주[ | ]

  1. 동아일보 1959년 8월 1일자
  2. “Untitled Document”. 2007년 10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26일에 확인함. 
  3. 조봉암 선생, 독립유공자 선정 보류된 이유, 노컷뉴스, 2011년 8월 11일
  4. [1]
  5.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 알기쉬운 역사교실. 2009년 1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2월 27일에 확인함. 
  6. KBS 인물현대사-조봉암 편:진보 사형당하다, 2004.02.13자 방송분
  7.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autogenerated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8.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85페이지
  9. 〈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3
  10. 자작나무통신- 예산읽기 정책알기 :: 조봉암의 장녀가 말하는 '아버지'
  11. 이동: 11.0 11.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ijh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2. 이동: 12.0 12.1 강화, 조봉암 재조명 운동 활기 한겨레
  13. YES24 - [국내도서]죽산 조봉암 평전
  14.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통일운동가 박진목선생 "독립운동 목적 통일 달성못해" 경향신문 2005년 5월 9일자
  15. 이동: 15.0 15.1 '여성 코뮤니스트' 김조이, 건국포장 받는다 오마이뉴스 2008.08.15일자
  16. .
  17. '진보당' 조봉암 막내딸 요리책 내다 - 조의정씨, <엄마처럼> 출간...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손맛을 보고 싶다면?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4일자
  1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신동아3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9. 이동: 19.0 19.1 [인천인물 100人·86] 인천시의회 초대의장 이명호 - 구한국·왜정·미군정·대한민국… '파란만장인천의 산 역사' 드높은 香이여! 경인일보 2007년 8월 8일자
  20. 《옥창너머 푸른 하늘이》,이상두,범우사. p118~p119
  21. [2]

14 참고 문헌[ | ]

  • 《대한민국 의정총람》, 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년

15 외부 링크[ | ]

전임
(초대)
초대 농림부 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2월 22일
후임
이종현
전임
김동원
제2대 국회 전반기 (제 2)국회부의장
1950년 6월 19일 ~ 1952년 6월 18일
후임
윤치영
전임
김동성
제2대 국회 후반기 (제 1)국회부의장
1952년 7월 10일 ~ 1954년 5월 30일
후임
최순주
전임
장건상(사실상)
(근로인민당 당수)
진보당 당수
1955년 ~ 1959년
후임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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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헌 국회의원(인천부 을)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무소속
(인천부 갑)곽상훈
후임
(인천시 갑)이용설
(인천시 을)곽상훈
(인천시 병)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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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인천부 갑)곽상훈
(인천부 을)조봉암
제2대 국회의원(인천시 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인천시 을)곽상훈
(인천시 병)표양문
후임
(인천시 갑)이용설
(인천시 을)곽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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