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원

정명원
Jeong Myeong-Won
KIA 타이거즈 No.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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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정명원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66년 6월 14일(1966-06-14) (57세)
출신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신장 189 cm
체중 89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89년
드래프트 순위 1989년 2차 2순위(태평양 돌핀스)
첫 출장 KBO / 1989년
마지막 경기 KBO / 2000년
획득 타이틀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정명원(鄭明源, 1966년 6월 14일 ~ )은 전 KBO 리그 현대 유니콘스투수이자, 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1군 투수코치이다. 현대 유니콘스넥센 히어로즈의 투수 코치를 거쳐 2009년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의 2군 투수코치로 활동하다가 2011년 시즌 후부터 2013년 시즌까지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동생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전 야구 선수인 정학원이다.

1 선수 시절[ | ]

1.1 태평양 돌핀스 시절[ | ]

중학교 때까지는 투수였으나 군산상고 시절 쟁쟁한 투수들에게 밀려 내야수로 전향했다가[1] 원광대 시절 끝 무렵에 투수로 복귀했으며[2] 대학 졸업과 함께 1989년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마운드 신인 3총사'라고 불린 박정현, 최창호와 함께 선발 투수로 등판해 빠른 직구와 포크볼을 주무기로 11승(5선발승)[3] 4패를 기록,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27.1이닝을 던져 7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부진하며 2년차 징크스와 동시에 부상과 재활로 시련을 겪었다. 1991년에 12승(3선발승)[4] 6패, 2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이듬해 다시 부상 재발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재활 훈련을 하면서 가끔 1군에 모습을 드러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1994년 마무리 투수 보직으로 50경기에 등판해 '4승 2패, 40세이브, 1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뛰어난 활약을 하며 기록했다. 특히 당시 40세이브는 종전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인 1993년 선동열의 31세이브를 무려 아홉 개나 뛰어넘는 기록이었다. 이 해 그는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또한, 올스타전에 출전해 3이닝 퍼펙트를 기록해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됨으로써 쏘나타2를 받았다. 팀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진출이자, 인천 연고 팀 역사상 한국시리즈 최초 진출을 기록했으나 LG 트윈스와의 3차전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팀이 역전패가 되는 빌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4차전에서도 소속 팀이 패해 4전 전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고 199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그쳤다. 이듬해인 1995년 그는 마무리 투수로 1점대 평균자책점, 9승 7패, 16세이브를 기록하였다.

1.2 현대 유니콘스 시절[ | ]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에 인계되면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1996년에 1점대 방어율, 8승 5패, 26세이브를 기록하여 마무리 투수 부분 TOP 5순위에 드는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러나,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의 모습은 불안한 난조를 보였다.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팽팽한 상황에서 9회 말에 구원 등판했으나 선두 타자 박철우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졌고, 이어서 4차전에서 9회초에 마무리로 등판했지만, 상대팀 보내기 번트를 다이빙 캐치하려다 내야 안타가 되는 실책성 플레이를 범하면서 무사 만루의 위기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간신히 더블플레이가 나오며 고비를 넘겼다. 1996년 소속 팀이 창단 첫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당시 상대는 해태 타이거즈였는데, 3차전에서 팀이 패하면서 1승 2패로 해태 타이거즈한테 밀렸다. 당시 현대 유니콘스 투수진은 거의 체력이 소모된 상황이었다. 이때 4차전에서 마무리 투수였던 그가 선발 등판하여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노히트 노런을 기록[5][6]함으로써 침체된 팀의 분위기를 한번에 반전시켰다. 하지만 곧이어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승리하여 2승 3패로 궁지에 몰리자 3일 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 그가 등판했고 결국 체력적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다음해 1997년에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을때, 3점대 방어율, 2승 10패, 28세이브를 기록했는데, 이 때부터 그의 주무기였던 포크볼이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하면서 등판 때마다 자주 불안한 모습과 난조를 보였다. 1998년 팀의 주장으로 임명됐고, 선발 투수로 다시 보직을 바꾸어 2선발로 활약하여 1점대 방어율, 14승(모두 선발)[7] 8패의 성적을 거두며 1998년에 시즌 최소 방어율을 기록하여 재기에 성공했다. 1998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됐으나 5차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98년 팀 창단 첫 우승이자, 인천 연고 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 그는 인터뷰에서 '같이 함께 동고동락해 왔던 박정현, 최창호 두 선수가 이 영광을 함께할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움이 남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1999년 초반에는 선발 투수로 활약했지만 3연패를 당하는 등[8] 부진하여 마무리 투수로 다시 보직을 옮겼으나, 4점대 방어율, 5승 4패, 7세이브에 그쳤다. 나이에 따른 체력 노쇠화로 인해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2000년 선발 투수로 활약하여 3점대 방어율, 5승 2패를 기록했고, 2000년 한국시리즈 두 번째 우승을 기록한 후 이듬해 2001년 4월 5일 염경엽과 함께 시즌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2 야구선수 은퇴 후[ | ]

은퇴 후 현대 유니콘스의 2군 투수코치로 재직하며 유망주들의 육성에 활약하다가 2007년 1군 투수코치로 승격됐고,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우리 히어로즈에서도 1군 투수코치로 임명되어 활약했었다. 2009년에는 넥센 히어로즈의 재활군 코치로 임명된 후 선수들을 육성하다가 2009년 시즌 후에는 2군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2011년 시즌 후 당시 감독이었던 김진욱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의 1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두산 베어스의 몇몇 투수들에게 자신의 현역 시절 장기 중 하나였던 포크볼을 전수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2013년 시즌 후 자신을 1군 투수코치로 불렀던 김진욱이 프런트와의 불화로 해임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했다.[9] 이후 김민재 코치와 함께 kt 위즈로 이적했다.[10]

3 출신 학교[ | ]

4 수상[ | ]

5 에피소드[ | ]

  • 1996년 6월 무렵 정규 리그 2위를 하고있던 현대 유니콘스는 당시 1위였던 삼성 라이온즈와 3연전을 벌였다. 처음 2게임을 모두 승리한 현대 유니콘스는 3번째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1점차로 뒤지던 5회말, 박충식을 상대로 한 장정석의 역전 만루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하고, 이후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었던 백인천은 투수를 박충식에서 이상훈으로 교체했다. 교체된 이상훈은 나오자마자 2회에 걸쳐 현대 유니콘스이근엽, 권준헌, 박진만의 무릎 근처를 연속으로 맞췄다.
    이에 현대 유니콘스는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그가 6점차로 크게 이기던 상황에 9회초 등판했는데(당시, 그는 삼성 라이온즈 투수들이 자주 빈볼을 던지는 것을 지켜보며 불의에 참지 못해 자진 등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그는 선수단 내에서 리더 역할을 해왔던 선수였다) 일단 첫 타자 양준혁에게 위협구를 던졌다. 양준혁이 이에 반발하자, 그는 2구에 양준혁을 맞췄다. 이때,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뻔했으나 그보다 어렸던 양준혁이 참았고, 1루로 걸어가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 했다.
    삼성 라이온즈 측은 1루 주자 양준혁을 그보다 나이가 위였던 이종두로 교체해 이후에 벌어질 만한 빈볼 상황에 대비했으며, 곧바로 그는 특유의 빠른 직구로 다음 타자 이승엽의 등을 맞췄다. 그리고 곧바로 양 팀은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켰으며 경기 후 벤치 클리어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그는 KBO 상벌위원회로부터 10게임 출장 정지 및 벌금을 내는 것으로 처분받으며 사태는 마무리됐다. 이 사건으로 삼성 라이온즈현대 유니콘스는 더욱 앙숙 관계가 되었으며, 그는 현대 유니콘스 고위 간부로부터 금일봉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후 10게임 동안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그 대신 가내영이 마무리로 등판했다.
  • 1996년, 정규 리그 4위로 마감해 준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현대 유니콘스는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한화 이글스쌍방울 레이더스를 이기고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왔으나,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까지 올라오면서 투수력이 소진된 상태에 해태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경기에서 1 ~ 3차전을 치른 현대 유니콘스에게는 4차전에 선발 투수가 고갈된 상태였다. 시리즈 게임 스코어 2승 1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현대 유니콘스 코칭 스태프는 마무리 투수인 그를 4차전 선발 투수로 기용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러나, 이전 2차전 게임에서 당한 부상으로 주전 포수 장광호마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4차전 선발로 등판하는 마무리 투수인 그는 무명 포수 김형남과 호흡을 맞추어 해태 타이거즈 타선을 상대했다. 그는 1회초부터 흔들리면서 1사 2, 3루의 위기를 겪었지만, 후속 타자들을 잡아 위기를 넘겼다. 이후 그는 안정감을 찾아갔고, 9이닝 무피안타, 3사사구, 9탈삼진으로 한국시리즈 최초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그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현대 유니콘스 타자들 역시 7회까지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선발 투수였던 이대진에게 무득점으로 밀리면서 투수전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8회말 수비 실책과 및 내야 안타로 현대 유니콘스가 무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고 한국시리즈 11타수 1안타로 부진했던 박진만이 적시타를 쳐 내면서 리드를 잡기 시작해 8회 말에만 4점을 내며 한국시리즈 4차전을 승리함으로써 한국시리즈 스코어 2승 2패로 균형을 맞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러나 1996년 한국시리즈해태 타이거즈가 5~6차전을 승리하며 4승 2패로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6 통산 기록[ | ]





































4














W
H
I
P
1989 태평양 24 11 4 .733 2.45 38 18 2 1 6 0 139.1 126 4 46 6 68 3 4 5 60 38 571 1.23
1990 25 2 4 .333 7.57 15 1 0 0 2 0 27.1 44 3 13 2 11 3 0 2 28 23 137 2.09
1991 26 12 6 .667 2.25 49 5 1 1 14 0 132.0 103 3 36 5 60 4 0 7 41 33 521 1.05
1992 27 3 1 .750 3.52 7 3 2 1 0 0 38.1 38 4 14 1 20 0 0 0 15 15 160 1.36
1993 28 0 1 .000 1.50 2 1 0 0 0 0 6.0 4 0 1 0 3 0 0 0 1 1 25 0.83
1994 29 4 2 .667 1.36 50 0 0 0 40 0 105.2 77 2 22 1 74 0 0 3 16 16 401 0.94
1995 30 9 7 .563 1.75 52 0 0 0 19 0 103.0 68 1 23 10 59 3 0 8 25 20 396 0.88
1996 현대 31 8 5 .615 1.58 53 0 0 0 26 0 97.0 64 3 40 10 59 5 1 5 24 17 388 1.07
1997 32 2 10 .167 3.50 55 6 1 0 28 0 115.2 101 11 20 0 71 6 0 5 46 45 461 1.05
1998 33 14 8 .636 1.86 28 26 5 3 0 0 184.0 141 7 60 1 123 5 0 3 59 38 742 1.09
1999 34 5 4 .556 4.06 30 11 0 0 7 0 84.1 92 11 34 5 52 2 0 2 40 38 372 1.49
2000 35 5 2 .714 3.98 16 11 0 0 0 0 61.0 75 2 21 0 34 4 1 1 35 27 267 1.57
KBO 통산 : 12년 75 54 .581 2.56 395 82 11 6 142 0 1093.2 933 51 330 41 634 35 6 41 390 311 4441 1.16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빨간 글씨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7 각주[ | ]

  1. 홍재현 (2012년 3월 8일). “[코치, 그들을 말한다] 두산 투수코치 정명원 ‘PS 노히트 노런 통산방어율 3위’”. 스포츠동아. 2020년 10월 27일에 확인함. 
  2. 고봉준 (2017년 1월 19일). “[코치, 그들을 말한다] (9) kt 정명원 투수코치 “이제 막내라는 핑계 없다””. 스포츠동아. 2020년 10월 27일에 확인함. 
  3. “개인 성적”. 한국야구위원회. 2015년 4월 1일. 526면. 2019년 2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23일에 확인함. 
  4. “개인 성적”. 한국야구위원회. 2015년 4월 1일. 526면. 2019년 2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23일에 확인함. 
  5.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배영수가 10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는 비공인 기록이다.
  6. 손장환.남궁욱 기자 (2004년 10월 25일). “아쉽다 배영수 `10이닝 노히트노런`”. 중앙일보. 2009년 11월 22일에 확인함. 
  7. “개인 성적”. 한국야구위원회. 2015년 4월 1일. 526면. 2019년 2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23일에 확인함. 
  8. 이준호 (1999년 5월 24일). “정명원 “내 전공은 역시 마무리””. 문화일보. 2019년 4월 23일에 확인함. 
  9. 두산 정명원 투수코치 사의 - 연합뉴스
  10. KT, 두산 출신 정명원·김민재 코치 영입 - 노컷뉴스

8 외부 링크[ | ]

{{{제목}}}
선동열 {{{현재}}} 이상훈

틀:한국 프로 야구 노히트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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