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진

김시진
Kim Si-Jin
Baseball pictogram.svg
김시진.jpg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의 김시진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생년월일 1958년 5월 8일(1958-05-08) (66세)
출신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
신장 183 cm
체중 83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83년
드래프트 순위 1983년 1차 2순위(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KBO / 1983년 5월 3일
대구삼미전 구원
마지막 경기 KBO / 1992년 5월 15일
대전빙그레전 구원
획득 타이틀
계약금 3억원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기타 경력

  • KBO 경기 감독관 (2008년)
  • KBO 경기 운영위원 (2017년 ~ 2018년)
  • KBO 기술 위원장 (2018년 ~ 현재)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월드컵 1982년 서울

김시진(金始眞, 1958년 5월 8일 (음력 3월 20일) ~ )은 전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투수이자, 현 KBO 기술위원장이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해 1992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할 때까지 10시즌 동안 통산 124승 73패, 16세이브, 3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은퇴 후 태평양 돌핀스를 시작으로 13년 동안 투수코치 생활을 하다가 2006년 시즌 후 김재박의 후임으로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2007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 2009년부터 넥센 히어로즈 감독직을 맡아 2012년까지 재임하였다. 2013년부터 롯데 자이언츠 감독직을 맡았으나 2014년 10월 팀 성적 부진으로 자진사퇴하였다.[1]

1 선수 시절[ | ]

1.1 삼성 라이온즈 시절[ | ]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치고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입단 첫 해에 17승(14선발승으로 장명부(28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그 뒤 1986년 16선발승으로 선동열(17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활약했는데 6월 15일 롯데전(대구)에서 완봉승을 거둔 후[2] 7월 9일 삼미전(대구)에서 8회 강우콜드 완봉승을 기록하여[3] 순수신인 최초 2완봉승 도달 투수가 됐고 결국 그 해 5완봉승으로 마감했는데(당시 전구단 상대 완봉승) 이 기록은 아직까지 순수신인 최다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프로 데뷔 이후 5년 만에 KBO 리그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100승(87선발승)을 올렸다. 1985년 25승(21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이었는데 전년도(15선발승)에 이어 2년 연속 최다 선발승 1위) 5패, 10세이브, 201탈삼진으로 소속 구단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끄는 등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11승을 올렸다.[1] 특히, 1985년에 방어율 2.00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역대 선발 20승 이상 투수 중 최저 방어율 기록[4]으로 남아 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거둔 111승(96선발승)은 최다 승리 기록이였으나 2013년 8월 8일 배영수가 112승(당시 106선발승)을 거두면서 최다승 기록이 경신되었다. 하지만, 1985년에는 본인 뿐 아니라 같은 팀 장효조 이만수 등에게 던져진 표가 분산된 점[5], 1987년에는 저조한 방어율 탓인지[6] 정규시즌 MVP 자리에서 밀려나야 했고 1983년 홈런-타점 2관왕으로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이만수는 그 해 최다승(30승)(28선발승)을 기록한 장명부가 재일동포란 이유 탓인지[7] 경쟁에서 탈락해 MVP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으며 다음 해에는 최초 타격 3관왕으로 2연속 정규시즌 MVP가 유력했음에도 막판 타격왕 레이스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던 탓에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1986년 11월 24일부터 3년 계약 형식으로 삼성 감독에 취임한 박영길 감독이 1988년 플레이오프에서 3패로 탈락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성적부진을 선수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하여 선수들의 집단항명 사태를 불러와 임기를 1년 남겨두고[8] 도중하차(88년 11월 15일)한 뒤 정동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큰 경기에 강한 선수 보강을 위한 삼성의 판단 아래[9] 1988년 11월 22일 최동원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두 팀은 장효조김용철 등의 트레이드를 성사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 이적 후 첫 등판인 1989년 4월 14일 사직 OB전에서 무려 14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219개의 공을 던지며 2-1 완투승을 거두었으나[10] 이 후유증 탓인지 오른쪽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4연패를 당하는 등 같은 해 4승(3선발승) 9패로 부진했으며 이후 4년 간 롯데 자이언츠에서 13승(12선발승) 24패를 추가하는 데 그쳤고, 1992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지만 1990년 4월 25일 OB전에서 완봉승을 거두어 최초 개인 100선발승 투수가 됐으며[11] 같은 팀(롯데) 윤학길이 5년 뒤인 1995년 9월 16일 태평양전 선발승으로[12] 두 번째 개인 100선발승에 도달했는데 역대 2~3번째 100승에 도달한 최동원 선동열은 커리어 활동 당시 선발과 불펜 전천후로 기용된 데다(최동원)[13] 커리어 도중 불펜으로 전환하여(선동열)[14] 통산 선발승이 56승(최동원) 73승(선동열)[15]에 그친 데다 본인(김시진)은 삼성에서 96선발승, 롯데에서 12선발승을 기록한 터라 단일 팀 100선발승으로 치자면 윤학길이 최초였다. 정규 리그 통산 124승을 올렸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승리없이 7패로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다. 올스타전에서는 좋은 투구 내용을 보였으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약하다는 이유로 '새가슴', '볼넷 공장장'이라고 불렸지만, 이를 데뷔 후 5년 간 무려 1,104이닝이나 투구한 심한 혹사의 후유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 야구선수 은퇴 후[ | ]

2.1 투수 코치 시절[ | ]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하고 1993년 태평양 돌핀스의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1992년 정동진 감독이 부임할 때부터 투수코치 영입설이 나돌았지만 태평양 구단 측에서[16] 대구 출신 코치들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해 왔다. 이후 오랫동안 김재박과 같이 활동하였으며, 2007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감독이 되기 전까지 투수 코치로 계속 활동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아마추어 실업 야구 팀 현대건설 야구단에서 잠깐 코치 생활을 하기도 했었으나, 이내 곧 1998년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로 임명되어 프로에 복귀했고, 그 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첫 우승을 거두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를 맡으면서 그는 김수경, 임선동, 조용준, 오주원, 황두성, 박준수, 장원삼 등 뛰어난 투수들을 조련하고 육성하는 데에 뛰어났으며 투수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투수 코치를 맡은 기간 동안 그는 '명 조련사'로 불렸는데, 1998년 김수경,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주원 등이 신인왕을 수상했던 것을 예로 들면 그는 투수 코치로서 선수들을 키우는 데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감독 생활에도 이어져 넥센 히어로즈 최초 1차 지명으로 선발한 좌완 투수 강윤구 역시 2009 시즌에 옥석으로 평가받았다.[17] 시즌 전 트레이드로 홍역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걸출한 신인 우완 투수 고원준을 배출하였으며, 트레이드로 영입한 금민철을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그가 투수 코치로 있는 동안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에서 뛰어난 투수들이 많이 배출되어 '투수 왕국'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2 감독 시절[ | ]

2.2.1 현대 유니콘스 시절[ | ]

2006년까지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를 역임하다가, 2006 시즌 종료 후 LG 트윈스의 감독이 된 김재박의 뒤를 이어 현대 유니콘스의 2대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 2007년에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은 현대 유니콘스에서 감독으로 생각 이상의 선전을 하여 시즌 56승 69패 1무로 시즌 6위를 기록하였다. 2007년 고별전을 끝으로 시즌 후 재정난을 이겨 내지 못한 현대 유니콘스는 이듬해 3월 해체되었다.

2.3 넥센 히어로즈 시절[ | ]

2008년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히어로즈에서는 이광환을 경질하고 그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구단과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2억원, 연봉 2억원 등 총 8억원에 계약을 맺으면서 히어로즈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08년 10월 10일 감독 취임식을 가졌다.[18] 2009년에 6위를 기록하였지만, 시즌 후반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와 치열한 4위 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시즌 초반에는 한때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특히 강윤구강정호, 황재균 등의 젊은 선수들은 이택근, 이현승, 장원삼트레이드 파동 때 "트레이드 불가"로 못박을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2009년 8월 6일 SK전에서 감독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2010 시즌에는 이현승, 장원삼, 이택근, 황재균 등의 이적 공백으로 인해 팀 전력에 큰 손상을 입으면서 하위권으로 쳐졌지만 어려운 팀 상황 속에서도 손승락, 고원준, 김성현, 김성태, 금민철 등 뛰어난 새 투수들을 키워 내 "투수 조련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때 갓 제대하고 마무리로 전향한 손승락이용찬을 제치고 세이브왕을 차지하였다. 한편, 경기 운영 면에 대해서 일부 팬들에게 "작전 능력이 미숙하다", "선수 교체 타이밍이 좋지 못하다" 등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선임되어 금메달에 기여하였다. 2011년에는 감독 부임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인 8위를 기록한다. 2012년에는 시즌 초반 상위권에 있었으나,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경질되었다.

2.4 롯데 자이언츠 시절[ | ]

부임 첫 해에 감독 커리어 최고 순위인 5위와 동시에 최고승률 .532를 달성했으나 가을 야구에는 실패했다. 이는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승률 포스트시즌 탈락이다.[1] 2013 시즌 계투진의 많은 블론세이브와 투수 교체에 관한 비판이 있었고, 또한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였던 김승회 혹사 논란이 있었다. [2] 2014 시즌 들어 수비진의 안정화로 리그 최소 실책 부문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으나 강민호전준우를 필두로 하는 타선의 부침과 송승준의 부진이 겹쳐 6월까지 5할대 승률을 기록했다. 한편, 9구단 체제로 인한 휴식일에 팀 내부 사정으로 인해 권두조가 수석코치에서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프런트와의 마찰로 인해 2014년을 끝으로 사퇴하였다.

2.5 그 외[ | ]

그는 현대 유니콘스 감독에서 물러난 뒤 2008년 한 해 동안 KBO의 경기 감독관으로 재직하였다. 2017년부터 KBO의 경기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롯데 자이언츠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2015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을 맡았다.

3 별명[ | ]

삐쩍 마른 체구에 머리가 크다는 이유로 꼴뚜기라고 불렸다.[19]

4 수상[ | ]

5 출신 학교[ | ]

6 등번호[ | ]

7 통산 기록[ | ]





































4














W
H
I
P
1983 삼성 26 17 12 .586 2.55 37 25 17 5 1 0 229.1 189 8 95 6 154 14 0 5 78 65 950 1.24
1984 27 19 11 .633 3.18 39 26 11 2 2 0 215.0 178 14 112 2 154 13 0 8 94 76 910 1.35
1985 28 25 5 .833 2.00 47 29 10 2 10 0 269.2 172 8 121 3 201 15 1 10 63 60 1064 1.09
1986 29 16 6 .727 2.47 30 26 11 1 3 0 196.2 161 6 110 4 87 6 0 3 68 54 822 1.38
1987 30 23 6 .793 3.12 33 27 7 3 0 0 193.1 166 9 96 1 113 7 1 5 73 67 818 1.36
1988 31 11 9 .550 3.49 25 19 5 1 0 0 144.1 107 10 70 1 67 7 0 3 62 56 602 1.23
1989 롯데 32 4 9 .308 3.87 19 16 1 0 0 0 111.2 106 8 60 3 55 8 1 3 53 48 493 1.49
1990 33 7 10 .412 4.04 26 26 4 2 0 0 151.1 136 9 57 0 67 12 0 1 75 68 631 1.28
1991 34 2 4 .333 6.18 13 9 1 0 0 0 55.1 70 5 26 0 31 1 0 3 39 38 258 1.74
1992 35 0 1 .000 13.06 4 2 0 0 0 0 10.1 17 5 8 0 2 0 0 0 15 15 53 2.42
KBO 통산 : 10년 124 73 .629 3.12 273 205 67 16 16 0 1577.0 1302 82 755 20 931 83 3 41 620 547 6601 1.30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8 각주[ | ]

  1. 1.0 1.1 오마이뉴스 - 2008년 4월 기사 "최동원 · 선동렬에 가려진 위대한 투수"
  2. “프로야구 三美(삼미), 「射程(사정)거리」고수”. 동아일보. 1983년 6월 16일. 2018년 4월 20일에 확인함. 
  3. 이종남 (1983년 7월 11일). “프로야구 MBC·해태 스타트 快調(쾌조)”. 경향신문. 2018년 4월 20일에 확인함. 
  4. “20승 이상 투수”. 한국야구위원회. 2018년 3월 1일. 120면. 2018년 7월 1일에 확인함. 
  5. 윤병웅 (2010년 8월 18일). “[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 MVP 향배를 갈랐던 과거 속 요소들”. OSEN.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6. 이영만 (1987년 10월 10일). “MVP에 張(장)효조 有力(유력)”. 경향신문.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7. 장환수 (2002년 5월 13일). “[장환수기자의 장외홈런]올스타 투표의 ‘오차범위’”. 동아일보.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8. 최영호 (1999년 3월 2일). “[삼성라이온즈 18년 . 3] 박영길 감독”. 영남일보. 2020년 10월 21일에 확인함. 
  9. 윤세호 (2020년 2월 7일). “MVP 트레이드 성사된 ML, KBO리그 빅딜 사례는?”. 스포츠서울. 2020년 10월 21일에 확인함. 
  10. 기영노 편집국장 (2021년 4월 21일). “[프로야구 40년사(史), 40개 이야기] ③롯데 프랑코, 한 이닝 61구 최다 투구 '불명예'. 뉴시안. 2021년 6월 27일에 확인함. 
  11. 연합 (1990년 4월 25일). “-프로야구종합-”. 연합뉴스. 2020년 6월 9일에 확인함. 
  12. 연합 (1995년 9월 16일). “-프로야구-<최종>김재현의 날, LG더블헤더 독식”. 연합뉴스. 2020년 6월 9일에 확인함. 
  13. 한용섭 (2017년 12월 30일). “양현종-헥터, KBO 최초 2년 연속 선발 20승 가능할까”. OSEN. 2020년 10월 29일에 확인함. 
  14. 김승훈 (2020년 6월 4일). “역대 5번째 140승 달성, 선동열-이강철 기록 넘어설까”. 오마이뉴스. 2020년 11월 13일에 확인함. 
  15. 김승훈 (2020년 6월 4일). “역대 5번째 140승 달성, 선동열-이강철 기록 넘어설까”. 오마이뉴스. 2020년 11월 13일에 확인함. 
  16. “다이아몬드 쌍방울,투수成영재등 2차지명”. 문화일보. 1992년 11월 24일. 2020년 6월 17일에 확인함. [(과거 내용 찾기)]
  17. 스포츠 서울 - "히어로즈가 끝까지 지킨 강윤구는 누구?"
  18. 《한겨레》, 2008, 10, 11.
  19. “KIA 김선빈, 프로 지명 못 받은 동생 선현 걱정”. 스포츠 한국. 2010년 8월 31일. 2011년 5월 5일에 확인함. 

9 외부 링크[ | ]

틀:S-sports
이전
이광환
제2대 히어로즈/ 넥센 히어로즈 감독
2008년 10월 6일 ~ 2012년 9월 17일
이후
김성갑 (감독 대행)
이전
김재박
제2대 현대 유니콘스 감독
2006년 11월 6일 ~ 2008년 3월 11일
이후
(팀 해체)
이전
권두조 (감독 대행)
제15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12년 11월 11일 ~ 2014년 10월 17일
이후
이종운
수상
이전
최동원
제4대 한국 프로 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1985년
이후
선동열
이전
선동열
제6대 한국 프로 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1987년
이후
선동열

틀:넥센 히어로즈 감독 틀:1985년 삼성 라이온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