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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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제임스 조이스의 1916년 소설
  • 자서전적인 작품
  • ISBN 8937460459
  • 교수신문 추천 역본 : 이상옥,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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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소개[편집]

아일랜드가 배출한 세계적인 거장 제임스 조이스의 처녀작. 소년 스티븐 디덜러스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자전적 요소가 강할 뿐더러, 후에 <율리시스> 등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될 '의식의 흐름' 기법이 어렵지 않게 도입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숙학교에 다니던 유년기부터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5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일화들은 주인공 스티븐이 예술가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어가는 과정의 안과 밖을 그려보인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세상은 정치와 종교가 삶의 두 버팀목인 혼란스런 아일랜드. 감수성 예민한 스티븐은 그 속에서 성장기의 통과의례를 겪고, 극심한 종교적 죄의식에 시달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모든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하는 예술가의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 조국과 종교를 등진 유배생활을 자처해 나선다.

이 성장소설에 방점을 찍게 하는 것은 그 내용 뿐 아니라 형식 덕이기도 하다. 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주인공 스티븐에게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작가는 주저없이 그의 상념으로 독자를 인도하여 '옆길'로 빠진다.

또한 스티븐의 의식의 흐름은 주로 그의 감각에서 촉발된다. 그가 무언가를 만질 때, 볼 때, 맛볼 때, 들을 때,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기억과 상상들이 퉁겨져나오는 것이다. 그 다면적이고 풍성한 실타래를 따라가는 것은 어떻게 섬세한 소년의 마음속에서 사건들이 기억으로 재구성되는지, 어떻게 소년의 감수성이 그를 예술가로 이끌어가는지를 알게 한다.

3 # 거북이[편집]

사실 내가 읽은 판은 문학과 지성사판(홍덕선 역) 두권짜리다.

3.1 잡담 : 조이스와 나[편집]

나는 왜 조이스에게 관심을 가졌던 걸까. 아마도 교양영어 수업시간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더블린사람들의 한 편인 하숙집The Boarding House이 담겨있었고, 뭐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명한 작품이니 맥락을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잡아읽었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읽어보리라 생각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녹녹치 않았다. 난 영문학이나 서구문학들에 쓸데없는 수식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싫은데 이 작품은 특히 심했다. 나는 문학에 있어서, 특히 리얼리즘 문학에 있어서 한국 소설들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단편도 주옥같지만 대하소설류에서 독보적이다. 하여간에 이 작품은 좀 보다가 공감이 안되어 덮었다. 난 어지간해선 보다가 안덮기때문에 이 책은 내게 분한 마음으로 오래 남아있었다.

이후 율리시즈피네간의경야의 존재에 대해 알게되었다. 율리시즈는 450페이지짜리 4권 분량인데 하루동안의 일을 다룬 책이랜다. 의식의 흐름인지 자동기술법인지 현현인지 뭐 모르겠지만 호메로스의 율리시즈에 빗대어 더블린에 살고있는 블룸이라는 한 소시민의 하루를 묘사한 대작이라고 하는데...하하 일단 조이스의 물리적 업적에 놀랐다. 조이스가 유명해진 것은 율리시즈 때문이라고 한다. 당대 모더니스트들에게 인정받았단다.
피네간의 경야는 아주 압박중의 압박이다. 조이스가 율리시즈를 내고 칩거한 뒤 탈고까지 17년이 걸렸다는 이 책은 60여개국어가 사용되었으며 가능한 거의 모든 기법의 문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서구 역사를 하룻밤의 꿈에 담았다고 하는데 쓰다가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 했다고 하니 뭐 말 다했다. 이쯤에서 그는 미켈란젤로베토벤마저 연상시킨다. 얼마전에 이 작품이 국내에 완역되어서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들쳐본 적이 있다. 번역에도 한 20년은 걸렸다고 그러던데 영어 이외의 외국어로 번역된게 한글이 네번째라니 어지간히 부담스러운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일랜드 문학 교환원에서 번역하는데 밤참하라고 600만원이나 지원했단다. 하여간에 쓴 사람이나 번역한 사람이나 어지간히 집요하다. 피네간의 경야는 1923년에 파리의 한 잡지에서 부분연재된 적이 있는데 그 잡지의 이름이 Work in Progress였다. 내가 좋아하는 와이엇 형님이 1984년에 내놓은 EP의 타이틀이기도 하다.

나는 율리시즈와 피네간의 경야를 읽을 생각이 '절대' 없지만 이쯤되면 그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 문학으로 세계를 구원해볼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블린 촌구석의 시각으로 서구문명의 근본적인 모순을 성찰하고 붕괴를 생각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유럽을 방황하면서 살았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더블린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부분을 보편으로 확장시켰다. 그것만으로 그는 진보의 작업Work in Progress을 꾸준히 해왔던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그가 좋다. 그것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계속 그것을 추구하는' 그런 태도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놀러갔을 때 조이스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후졌었지만 그래도 조이스라는 인간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블룸스 데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율리시즈를 정말 읽고 즐거워하는 것일까나...-_- 여튼 아일랜드에 다녀온 덕에 조이스의 소설을 읽다 나오는 지명중 상당수는 알게 되었다.
(블룸스 데이는 율리시즈의 배경이 되는 하루를 말한다. 이 날은 조이스가 부인과 첫 데이트를 한 날이며 동시에 조이스가 반항적인 디덜러스에서 무기력한 블룸으로 변하게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한다. 이날은 율리시즈의 팬들이 더블린에 모여 블룸이 방황한 거리들을 함께 따라다니는 날로 기념되고 있다. 블룸스 데이 근처에는 조이스 관련 논문들이 쏟아지고 그것을 정리해서 출판하기도 하는듯 하다. 더블린에서 한부 받아온 것이 집 어딘가에 짱박혀있다...-_- )

그리고 지난주던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시작했다.

3.2 젊은 예술가의 초상[편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에고이스트'(도대체 무슨 내용을 다룬 잡지일까...-_-)라는 잡지에 1914년부터 게재된 것이다. 원래는 그의 습작이었던 '영웅 스티븐'이 원작이며 이것을 개작한 것이다. 즉 이것은 그가 '더블린 사람들'보다도 먼저 기획했던 작품이라는 얘기다.
이 소설은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라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며 당연히 조이스의 자전적인 얘기다. 사실 소설가든 누구든 자기얘기를 하고싶어하니까 어떤 소설을 읽을때 작가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것은 당연한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전형적이다. 스티븐은 스테판 성인에서 따온 것이며 디덜러스는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디덜러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디덜러스의 이야기는 이후 율리시즈에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이 이름은 매우 의도적이다. 스테판 성인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중의 하나이며 디덜러스는 크레타의 미궁을 만들어낸 천재였지만, 결국 교만한 이들 이카루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비운의 장인-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디덜러스는 세상의 고통을 기민하게 느끼면서도 예술가라는 불분명한 길을 걷고있는 조이스 자신의 이미지이다.
이 책은 일단 성장 단계에 맞춰서 I~V까지 5부분으로 나뉘어있다.

딱히 전위적인 문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장황한 묘사가 너무 많고, 의식의 흐름이 장황한 묘사속에 구렁이 담넘듯 넘어가기 때문에 읽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이놈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거지, 여긴 어떤 장면이야...하다가 놓치게 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요주의 필요하다. -_-
성장소설이라고 해서 평이하게 사건들이 나열되어있을거라 생각하면 강력한 오산이며, 주로 디덜러스의 사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들에 집중되어 아주 촘촘하게 묘사되고 있다. 거의 미니멀리즘이다.

  • I

I에는 기숙학교에 들어가게된 디덜러스의 이야기이다. 디덜러스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본 기억이 있다. 그는 우주의 세계의 유럽의 ... 쿨롱고우즈 기숙학교의 초급반에 속해있는 것이다. 이런 기억은 남자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 대담한책읽기에서 '남자의 탄생'이라는 책에 관한 부분을 보면 미국 대통령이 더 세냐 유엔 사무총장이 더 세냐 하는 것으로 싸웠다는 기억들이 나온다. 나 역시 그런 비슷한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디덜러스는 권력관계속에서 자신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남자라면 대체로 겪게되는 성장과정의 한 과정이다. 그는 강압적인 카톨릭 기숙학교의 규율속에서 자아를 억압하는 습관을 기르게 된다.
그는 동급생들과 장난치다가 친구들이 밀어서 그만 똥통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로부터 고자질만은 하지말라고 배웠던 그는 단지 숨막힐것 같은 기숙학교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어한다.
가끔 집에 돌아갔을때 그에게 있는 기억이라곤 정치적 토론 뿐이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아일랜드 내부의 세력도 수구적 카톨릭과 그에 반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있었다. 조이스가 이 책을 출판한지 3년뒤, 1919년부터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이것에 관해서는 마이클콜린스라는 영화를 참고하라. 한일관계와 유사한 면도 좀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 이렇게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관한 자료가 적다니 충격이다...-_-)
디덜러스의 잘못도 아닌데 그에게 매질을 가한 선생, 그리고 그것이 너무 억울해서 교장에게 얘기한 디덜러스. 일단 누명은 벗었지만 디덜러스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 II

II에는 디덜러스가 세상과 더욱 충돌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는 동급생들의 이지메를 당하거나 그들과의 관점의 차이를 계속해서 느끼게된다. 그는 이단적으로 여겨지며 이것은 동급생 뿐 아니라 교사 신부들에게서도 받는 대접이다. 그가 단지 바이런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 뿐만 아니라 그를 신부들에게 이르겠다고까지 위협한다.
아버지는 가끔 자신의 고향인 코크로 놀러가는데 그 길에 디덜러스를 동행한다. 코크에서 아버지는 나름대로 소영웅이고 친구가 많다. 아버지는 디덜러스를 똑똑한 아들이라고 인정하며 디덜러스 역시 아버지로부터 조금은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디덜러스의 작문이 인정을 받아 디덜러스는 약간의 돈이 생겼고 이것을 그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약간의 사치였지만 그것은 금새 고갈되었고 그는 그 소박한 사치가 그저 잠깐의 도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욕망에 굴복하여 창녀의 가슴에 안긴다. 그는 그 순간 울고마는데 그것은 죄의식과 안도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여기서 디덜러스 역시 여자를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로 보고있다. 이것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가진 일반적인 시각중 하나로 생각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편안한 존재인 동시에 육욕의 대상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많은 문인들이 적어내려간 소설속의 창녀를 보면 이런 두가지 관점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인더컷에서 느낀 남성에 대한 여성의 두가지 관점과 반대되는 지점에 놓여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III

III은 디덜러스가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회한과 두려움으로 가득차있다. 그것을 조이스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무려 46페이지(189~235)에 걸쳐 신부의 설교를 적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이스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크리스트교가 가지고 있는 그 가공할만한 새도-매저키즘적인 교리 시스템인 것이다. (최근에는 예수를 새디즘적으로 학대하여 논란이 되었던 패션오브크라이스트가 개봉되기도 했다.) 원죄의식, 천국과 지옥, 유일신. 유일신을 믿지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위협으로 사람들을 항상 두려움에 떨면서 크리스트교에 복종하게 만드는 그 시스템을 조이스는 미니멀리즘적인 묘사를 통해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디덜러스가 겪는 정신적 고통은 이후 트라우마로 남는다.
디덜러스는 그 두려움에 떨며 신부에게 고백을 하고 그것으로 죄가 사해졌을거라고 가슴 한구석으로 믿은 뒤 영성체를 받아먹는다.
이런식으로 죄의식을 주입하느니 나는 차라리 군 입대 전에 친구들을 창녀촌에 보내주는 친구들의 우정(?)쪽이 훨씬 인간적이라고 느껴진다. 조이스가 얼마나 그것을 혐오하는지는 책을 읽다보면 진저리나도록 절감하게 되며, 실제로 조이스는 처음에 뛰어난 성적으로 신학의 길을 권유받았지만 부모님의 염원이었던 성직자의 길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는 암으로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그에게 충실한 신앙생활을 권유했지만 그것마저 거부할 정도였다. -- 거북이 2004-5-23 3:32 pm

  • IV

이제 디덜러스는 그 하룻밤의 타락을 씻기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나간다. 그는 몸의 학대까지도 시도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뇌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순간의 의심이나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사제와의 대화속에서 나온 '치마'라는 단어가 가진 부드러운 어감에조차 쉽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사제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제수이트 교의 사제가 되라는 종용을 받는다. 그리고 사제가 된 모습을 상상하다가 다시 받게 된 친구들의 야유, 그리고 그 야유속에서 일어나자 보이는 것은 소녀의 흰 다리, 그리고 그러한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디덜러스의 깨어남 등이 모호한 언어를 통해 전개된다.
도대체 에피파니의 순간이 어디야 하고 찾던 중 혹시 여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해설을 보니 맞다고 하는구만. 확실히 방황은 IV장까지에서 어느정도 마무리지어지고 V장부터는 자의식을 가진 디덜러스의 생각들이 나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 디덜러스는 V장에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이고 자신을 찾기위해 헤매고 다닌다. 자신의 내면에 담긴 탐미적 경향을 자각하게된 것은 분명해도 말이다. 그런 방황은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디덜러스의 탐미적 여성관이다. 디덜러스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의 이미지들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서 자신의 아니마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게 개인성으로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편들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여성상만이 존재한다. 이것 역시 조이스라는 인간의 솔직한 자기고백이라고 생각해보면 왠지 재미있다.

어쨌든 이 장은 별로 길지도 않은데 특히나 모호한 언어로 이루어져있다. 이미지의 심상을 만들어내기 어려울 정도이고 장면들이 중첩되거나 날아가버린다. 내가 예전에 왜 보다가 덮었었는지 알것같다...-_-

  • V

디덜러스는 잠시 기숙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로 이 150 페이지에 달하는 V장은 채워진다. 수많은 저서의 인용구, 바이블의 구절들, 아일랜드의 역사 등을 끄집어내어 조이스는 사념의 그물을 엮는데 당시의 모더니스트들은 정말 저것들을 다 읽고 머리속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나는 맥락을 이해하고 넘어간 구절이 거의 없었다는 것만 고백할란다. 어쨌거나 디덜러스는 유부녀에게 유혹당한 친구의 이야기와 꽃파는 소녀에게 또 정신이 팔려버리고 만다.

학감과 디덜러스의 대화, 디덜러스와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조이스는 자신의 미학론을 설파한다. 예술이니 욕망이니 이상이니 평화니 하는 단어들이 관념적으로 오고간다. 선문답같은 식으로 오가는 것도 많아서 솔직히 지겹다. :) 하지만 인상적인 대화도 가끔 있다. 예를들면 다음의 대화

그렇지만 왜 넌(디덜러스) 빵조각을 두려워하지?
그 뒤에 악의적인 실체가 있는 것 같아서 난 두렵다고 말하는거야.
그러면 네가 불경한 성찬식을 갖는다면 로마 카톨릭의 하느님이 너를 내리쳐 죽이고 저주받게 만들 거라는 걸 두려워하니?
로마 카톨릭의 하느님은 그걸 지금이라도 할 수 있지. 내가 그것보다도 두려워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스무세기동안 권위와 공경이 하나로 응집된 상징에 대해 거짓된 충성의 맹세를 하여 나의 영혼속에서 일어날 화학 반응이야.
넌 극한적인 상황이라면 그런 신성모독죄를 저지를 수 있겠니? 가령 네가 그런 행위에 벌을 주는 시대에 살았다면 말이야.
난 과거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아닐거야.
그런데 넌 신교도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난 신앙을 버렸다고 말했어. 그렇지만 자존심을 버린것은 아냐. 논리적이고 일관성있는 부조리를 버리고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없는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게 무슨 해방이 되겠니?(2권 p.177)

디덜러스는 이런 대화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무조건적인 탈출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조리함에 굴복하는, 좋게 표현하면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적은 그의 일기로 끝난다. 이 젊은 예술가는 그녀의 사랑을 얻는데 그만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이상의 '날개'처럼 떠나자! 떠나!등의 자조적 영탄조의 구절들로 일기를 적고있으며 일기의 마지막을 자신의 수호신인 다이달로스가 자신에게 함께하길 기원하며 마무리짓는다. 이것은 디덜러스가 결심을 하고 아일랜드를 떠남을 암시하며 이 소설이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마지막이 아닐 수 없다.

간신히 이 소설을 다 읽고(글자만 간신히 판독해버리고)나서 느낀점은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디덜러스에게 상당히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디덜러스는 주변의 몰이해속에 살았고 욕망에 무력했던 인간이었지만 자기의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꽤 노력하면서 살았던 거다. 그리고 그런 디덜러스에게 나는 나를 투영시킬 수 있었다. 뭐 나를 순교자라고까지 생각하진 않지만 나는 충분히 몰이해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하고있다. 누구나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저 내가 세상에 대해 느껴온 것이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 것 뿐이다. 아일랜드를 떠나는 시점의 디덜러스가 나의 27살에 해당되는건지 아니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만.

모르긴해도 디덜러스의 미래가 그다지 밝진 않아보인다. 내 미래는 밝게 칠할 수 있을까나아~ -- 거북이 2004-5-29 1:29 am

혹시 이 책을 읽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말씀하시길 내 기꺼이 증정하겠음. 뭐 독후감 한편정도는 요구하겠지만 그냥 간단하게 500자 안쪽이면 충분하니 마음놓고 얻어가시라~ -- 거북이 2004-5-29 1:49 am

4 같이 보기[편집]

5 참고[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