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ISBN:8971991542


요즘 다모라는 드라마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황보윤은 서자로서 무관으로 종사하는 당대 최고수의 무인인데 이 양반의 어린 시절이 묘사되는 장면들을 보면 서자들이 조선시대때 겪었던 수난들이 비교적 리얼하게 묘사되어있다.
박제가는 그런 서얼출신이다. 그래서 그는 고작 규장각 검서관의 직함밖에 가질 수 없었으며 만년에 영평현령으로 재직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그는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대에 살았기 때문에 다른 서얼 지식인들과 함께 실력으로 문단의 주류(까지는 물론 아니었지만)가 될 수 있었으며 이후 '북학파'라는 학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박제가가 나이 29세(1778년)에 북경을 다녀와서 적은 문집인 이 북학의는 이후 수차례의 수정, 보완을 거쳐 49세때 정조에게 바친 책이다. 즉 박제가에게 있어 필생의 대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조에게 바치기 전에도 필사본으로 당대에 회람되었다. 고종의 즉위가 1864년이니 나라가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백년 전에 그는 부국강병책을 내놓은 것이다.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듯이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해서 일본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것처럼 그 역시 영정조대의 태평성대가 지나면 쇠락기가 다가올 수 있음을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대응하자고 했던 것이다.

북학의는 요즘식으로 제목을 적는다면 '한권으로 읽는 중국식 부국강병책'이다. 이덕무, 채제공과 함께 사신으로 북경(연경)을 다녀와서 적은 책이다. 문제는 그동안 이 양반의 행적이다. 그는 수레, 배, 벽돌, 성, 농사, 철, 문방구, 골동품, 약, 다리, 번역 등에 대해 가리지 않고 적었다. 그것도 대충 적은 것이 아니라 수레의 크기는 어떠하고 생김새가 어떠하며 심지어 여자의 저고리 주름은 어떠한가 등등도 적었다. 아마 내가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 이 양반에게 디카라도 하나 쥐어줬다면 나에게 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사신주제에 이런 것들을 적으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교류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가 깊은 수준의 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가 얼마나 실용적인 학자인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면모는 열하일기나 다른 북학파들의 저서에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다.
그 외에 정책적인 면으로 병제, 과거, 관직 체계 등에 대해 논하고 있고 재부론, 유생 도태론과 같은 급진적인 것들을 말하고 있다.

박제가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가 서얼이라는 것을 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번듯한 양반이었다면 이런식의 급진적인 것을 얘기하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골품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한 세력이 6두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북학의와 같은 제안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신분제의 동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의 자유가 적었기에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제가와 북학파는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그들과 같은 이들이 훨씬 많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들은 힘없는 소수 서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젊어서 문학에 심취해 그 필명을 중국까지 날릴 수 있었고 이후 정조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검서관이 되었을 때 경세가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충실했다.
하지만 정조는 문체반정을 일으킬정도로 조선의 지배 이념은 성리학이라는 것을 잘 알았으며 그런 세상에서 박제가가 꿈꾸는 세상을 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박제가는 조선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를 대번에 수레로 지목할 정도로 상업의 중요성에 대해 갈파한 사람이었다. 유통이야 말로 생산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중국에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왜 진시황이 이천년전에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했는지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인들이 적어도 입고 먹는 것에서는 넉넉한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요즘에도 유효하다. 지금 IT는 여전히 전세계적인 표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잘먹고 잘살기, 더 나아가 부국강병을 위한 박제가의 집요한 중국배우기는 그를 너무 중국에 매몰되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문에 그는 정조가 죽자마자 고문과 유배를 당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박제가는 우리도 중국어를 써야 진짜 문장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식으로까지 얘기했었다. 물론 이것은 우리도 중국어를 사용하자라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박제가는 우리가 한문을 뜻글자로 인식하면서 그것을 또 우리말로 푸는 방식에는 언어적 장애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중국을 베껴라라는 식으로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철저하게 베낀 뒤에야 제대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격하게 말한 것이라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를 요즘 말로 부른다면 아마 국제주의자 내지는 세계시민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당시 일본이 상업(은 수출이 기반이 되었던 에도시대)으로 매우 부강한 나라임을 알고있었으며 중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에 네덜란드같은 유럽이 침략했다는 것도 어설프게나마 알고있었으며 한역된 서양 의학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사려했으나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었다는 것도 적어두었는데 정말 그런 것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그가 북경의 책거리인 유리창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보면 지식 덩어리(책들!)에 강타당한 학자의 순진한 표정이 떠올라 미소짓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선배로서 신라의 최치원과 선조대의 조헌을 들고있는데 그 둘이야 말로 한국사에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안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외국의 배가 표류해오면 일단 가서 그 배를 모두 살펴보고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조선의 유자들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큰 문화충격은 바로 서적을 들여와 유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길준이 미국에 다녀와서 '서유견문'(1889)과 비교해보면 북학의는 너무나도 진보적인 책이었음을 다시한번 알 수 있다. 당시 북학의가 사회적으로 널리 읽히고 실행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면, 아니 그보다 백년 뒤에라도 누구나 서유견문을 읽고 공감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은 후쿠자와유키치의 '서양사정'(1866)이 나왔을때 전국의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그 때문에 서구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비록 그것은 제국주의라는 짐승의 길이었지만) 그리고 그 토양은 '해체신서'를 1774년에 번역해내었던 문화교류의 힘이었다. 1774년이면 박제가의 '북학의'가 나오기 4년전이다. 당시 박제가는 일본의 저력을 알고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박제가가 통탄해 마지않던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하는 습관은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에 뙤놈과 왜놈이라는 단어로 남아있다. -- 거북이 2003-10-4 12:2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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