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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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후쿠옹 자전[편집]

'후쿠옹 자전'이 출간되어 읽었다. 이 책을 읽고서야 후쿠자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게되었고 이제 나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는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훌륭한 사람이었다. 이 책은 그의 초기 반생을 상세하게 구술한 책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나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역자 허호의 매끄러운 번역 덕으로 이 덤덤함이 잘 살아나고 있어서 후쿠자와를 알고싶다면 다른 어떤 책보다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인상적인 부분 몇개를 옮겨본다.

  • p037 : 그의 어머니는 동네 거지를 잡아다 이를 잡아주고는 그 보답이라며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 p093 : 다시는 유곽에 가지 않겠다는 동료의 맹세를 받아놓구선 그의 맹세를 깨게 만들기 위해 계략을 세워서 그를 속인 후 나중에 고기를 얻어먹었다.
  • p114 : 당시 양학에 매진하는 자신들을 표현한 문장이 있다. 그저 어려운 것은 즐거운 것이라며 고중유락, 고즉락의 경지였던 듯 하다. 말하자면 이 약이 어떤 병에 잘 등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외에 이렇게 쓴 약을 먹는 자는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어떤 병인지 묻지도 않고 그저 쓰기만 하면 무작정 먹겠다는 혈기였던 것이다.
  • p136 : 네덜란드로부터 근대적 항해술을 전수받은지 5년만에 일본인 만으로 이루어진 항해를 처음으로 시도했다.(1860) 후쿠자와는 이것을 표트르 대제도 하지 못했을 쾌거라고 자평했다. 결국 항해에 성공하고 나서 미국의 환대를 받자 그것을 마치 자기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취직을 해서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에서 시국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그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 p143 : 후쿠자와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웹스터 사전을 구매했다. 사전이 인프라라는 것을 절감한 인물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 p146 : 다른 사람들이 술집에 왔다갔다 할 동안 사진관에 갔다가 사진관집 딸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부녀자와 다정하게 사진찍은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거라며 자랑을 했다. 후쿠자와는 이런 류의 가벼운 장난을 평생동안 즐겼던 것 같다.
  • p153 : 사절단이 프랑스의 호텔에 갔는데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갈 때 호위 두명을 대동하고 그들이 칼과 촛대를 든 채 문을 열고 일을 보았다고 한다. -_-
  • p158 : 후쿠자와는 책의 디테일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논리를 읽고싶어했다. 개별적인 구조는 책에 다 나와있으니 그것을 보면 되고 그것보다는 병원이 운영되면 자금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징병제와 모병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선거는 무엇이고 국회는 무엇인가, 왜 양당제를 채택하여 서로 싸우고 있는가 등 좀 더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알고자 노력했다.
  • p267 : 부채에서 단도가 나오는 것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부채속에서 단도가 나오는게 뭐가 신기해? 그보다는 차라리 단도를 휙 뽑았을 때 부채가 나온다면 몰라. 반대로 만들면 칭찬해줄지 몰라도, 그런 살벌한 걸 만드는 놈은 칭찬해줄 수 없어. 전혀 신기하지도 않아.라고 답했다. 역시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후쿠자와는 세상은 약육강식이며 식민지를 두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겼고 따라서 자연히 조선 침략을 지지했고 그 이론을 제공했던 사람이다. 당시에 제국주의자였던 사람을 모두 비난할 수는 없다. 그건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놈이 다르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왜 신분제에 안주했는가라고 묻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후쿠자와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알고싶어했으며 또 얼마나 열심히 알아나갔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어떻게 노력해왔는가이다. 그는 분명히 거인이었다. -- 거북이 2006-8-1 12:38 pm

2 # 후쿠자와 유키치 - 쾌남아의 생애[편집]

ISBN:8972553964 ISBN:4532190177

  • 원제:福澤諭吉-快男子の生涯(2000)
  • 저자:카와무라 신지(川村眞二, 1948-)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아마 두가지 면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간 후쿠자와, 그리고 하나는 일본의 계몽 사상가 후쿠자와.

일단 인간 후쿠자와를 보자. 이 책은 좀 미화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믿어야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쿠자와는 상당히 강직한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그건 일본 특유의 무사도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양 사상가이면서도 충효라는 유교적 도덕관념에 충실한 인물로, 그는 유학 자체를 교조적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다. 사실 이렇게 생활철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유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효에 대한 것은 아버지 햐쿠스케와 어머니 오준에 대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그의 어머니는 유키치가 어렸을 때 죽은 햐쿠스케에 대한 기억들을 계속 이야기하여 햐쿠스케를 유키치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만들었다. 또 어머니 스스로가 모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유키치에게 먹혀들 수 있었을 것이고. 유키치는 아버지에 대해 못다한 효를 다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충실하였으며 그의 사상에서도 효를 매우 강조하였다.
효는 자연스럽게 충으로 이어지는데 유키치는 충을 유교적인 맹목적 충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공리적 집합체로서의 국민에 대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유교적 인간상에서 얘기하는 체면과 명분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 물질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에 썼던 '자존설'(1891)에 잘 실려있다. 자신이 옹호했던 에노모토가 명분을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중하지 못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온당치 않음을 꾸짖는 문장이다.

계몽사상가로서의 후쿠자와는 그야말로 공리주의의 화신이라고 할만하다. 계몽주의자로서 그는 의학, 교육, 지방정치 등에서 실천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학문 자체에 상당히 엄격하면서도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번역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원래 번역이란 것은 원서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다. 번역서에 쓸데없이 어려운 문자를 나열해 한두번 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원서에 얽매여 무리하게 한자를 쓰기 때문이다. 역서와 원서를 대조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없는 번역서조차 있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140p) 이것은 번역에 대한 매우 정확한 인식이다. 해체신서(1774) 이후로 이미 백년 이상 축적된 일본의 번역문화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대학시절이던 1995년에도 무슨 의도로 쓴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국한문 혼용체로 된 책으로 강의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친구가 시험 전에 국한문 혼용체의 교과서를 가져와서 나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내가 우리나라는 근대화가 아직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런 체험들이 쌓여서 가지게 된 것이다.
일본의 세계적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의 연구를 도쿄대와 국가가 제대로 밀어주지 않자 후쿠자와는 사비를 털어 연구소를 세운다. 일본에서 난학이란 기본적으로 의학이며 후쿠자와도 의사의 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고 그의 선생도 의사였던만큼 그는 의학, 위생학의 중요성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 기타사토는 제 1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베링의 공동연구자였던 세계적인 학자였다. 그런 학자가 위생학에 기여할 기회를 주지 않자 개인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해서 결국은 국가가 체면상 지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가 게이오 의숙을 세워 양학자를 길러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기 전까지는 양이파가 대세를 이루고 있어서 후쿠자와는 그때까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던 인물이다. 즉 양학을 공부하는 것은 출세의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양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일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양학을 위해, 세상에 어떤 소동이 벌어지건 변란이 발생하건 양학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 게이오기주쿠는 하루도 휴교한 날이 없다. 이 주쿠가 있는 한, 일본은 세계의 문명국이다. 세상일에 집착하지 말라. 전투는 곧 끝난다. 그 때부터 문명 일본을 만들기 위한 일대 사업이 시작된다. 이를 위해 서양 문명과 학문에 매진하라. 그 날은 이미 눈앞에 와 있다."(196p) 그는 이런한 인식으로 1882년 시사신보를 창간해 최대 신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지방정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전부터 생각해왔던 대로 도쿄보다 가고시마에 철도를 뚫었더라면 사쓰마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사쓰마의 난은 메이지 유신 최후의 전투라고 할수 있는 세이난西南전쟁(1877)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가누마라는 마을이 주변의 호수를 통해 근근히 살고있었는데 주변 마을들이 호수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합심하여 시도한 것을 짬짬이 20년간에 걸쳐 막아주었다. 즉 그는 중앙집권도 중요하지만 일찌기 지방분권의 중요성을 알고있었던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사쓰마와 초슈번의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진 번벌정치를 혐오했던 것도 사쓰마, 초슈만의 이권때문에 다른 곳들의 인물들이 등용되지 못하고 그것때문에 큰 관계가 그르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방색이 무척 강한 국가인 것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후쿠자와가 이룬 이런 업적들은 후쿠자와가 했다기보단 일본인들이 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순서였던 대정봉환에 반대했던 막부파는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그것이 보신戊辰전쟁(1868)이었다. 당시 막부파의 수뇌중 하나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네덜란드에 유학했던 난학자였다. 에노모토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승산없는 전쟁을 했지만 정부군의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네덜란드에서 가져왔던 만국해율전서를 보냈다. 해상국제법에 최선두에 있었던 책이었는데 아직 번역은 되지 않았었고 이 책이 전쟁통에 사라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적장에게 이 책을 보낸 것이다. 적장의 회유는 거부한 채로. 이후 후쿠자와는 이 책의 일부를 번역해 포로로 잡힌 에노모토를 구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일개 군인 뿐 아니라 수많은 서양 학자들이 존재했다. 후쿠자와를 배출한 오가타 주쿠에서 배출한 사람들, 후쿠자와가 쓴 '서양사정'을 읽고 양학자가 된 사람들, 그리고 후쿠자와가 게이오 의숙에서 배출한 인물들, 그들이 결국 일본의 변혁을 이끌어갔으며 그 인물들을 받아안은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위대하다고 찬사를 날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중국의 간섭도 받지 않았고 시기적으로 제국주의의 막차를 탈 수 있었던 행운(?)까지 있었다. 그들이 급격히 자본주의화에 성공하고 청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오른 것보다도 훨씬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월드컵 4강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일본의 근대화 역시 일본인들이 이룬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후쿠자와에 대해 읽으면서 당연히 우리의 선각자들인 유길준, 박영효, 김옥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 후쿠자와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수준 또한 결코 낮지 않았다. 유길준서유견문을 쓴 것은 1889년, 후쿠자와가 서양사정을 쓴 것은 1866년이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갑신정변(1884)을 주도했지만 3일만에 끝났다. 시기적으로 일본의 대정봉환이 1867년이었고 서남전쟁이 1877년이었으니 사실 갑신정변이 그렇게 늦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수구세력이 얼마나 강했느냐로 얘기할 수 있을텐데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은 대정봉환 당시의 일본에 비해 서구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달랐다. 병인양요가 1866년, 페리가 흑선을 끌고 일본의 문을 연 것이 1853년이다. 시작점으로 올라갈수록 그 시간차는 점차 좁아지는데 동일한 서구의 침략에 대한 대응은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강자에게 약했던 일본의 국민성에 비해 우리의 자존의식이 더욱 강했다고 인식할 수도 있지만 백년이상 난학에 접했던 일본과,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오랑캐 청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제 중화는 조선에 있다고 믿었던 한국의 차이일수도 있다. 일본인들은 개국 아니면 죽음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반면 조선의 지배계층은 아직 세상이 넓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유교적 질서 유지에 급급했던 것이다. 서양사정은 양이파와 토막파 모두가 읽은 책이었지만 서유견문은 몇몇 지식인들에게만 읽힌 채 지금은 최초의 국한문 혼용 수필(!)로 대접받고 있는것이 고작이다.
무엇이 더 옳은 것이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1950년부터 53년까지의 해방공간에서 지식인들이 모두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한국은 좌파에 의한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한국이 모두 공산화되었더라면 한국은 지금 북한의 처지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것은 정말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후쿠자와의 말대로 탈아입구를 했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아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대로 진입하는 시점에서부터 의도했던 아니던 항상 10-30년 정도의 시간차이를 두고 일본을 따라온 우리는 따라가는데만 급급한 나머지 뒤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근대화는 뒤를 일단 충분히 돌아본 다음 그것을 밟고 일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후쿠자와는 근대화가 무엇인지 알고있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전집을 출간하면서 출간 의도를 일본 양학의 뿌리를 분명하게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후대 학자들이 자신을 넘어서야 함을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전집을 만들어 놓고 간 것이다. 우리는 근대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어서 여유당 전서부터 국책 프로젝트로 현대어 번역을 해야하지 않을까? -- 거북이 2003-6-18 1:24 am

3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