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는 중요해

2002 10 27 日 : 잠자리는 중요해[ | ]

아 죽음의 잠자리였다. 두어번 정차하는거야 밤버스니까 당연한건데 영 잠을 들 수가 없다. 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불편해서 잠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사람이 적어서 의자 두개위에 쭈그리고 누워보려 했지만 그것도 안되고, 아웅 죽갔다. 결국은 그렇게 잤다.

도노스티아에 도착했다. 도노스티아Donostia가 맞는 발음인지는 모르겠다만 여튼 이게 바스크 사람들이 자기 도시를 부르는 이름이고 스페인 식으로는 산 세바스챤San Sebastian이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주는 것이 좋으니 지킬 수 있는 한 지켜보기로 한다. 여튼 밤차라서 꽤 빨리 도착해 새벽 5시에 떨어질 예정이었는데 하필 오늘 섬머타임이 해제되어 4시에 도착했다. 하여간 운도 지지리도 없지. 시간 오지게 많은데 한시간이 늘어나냐...-_-
당황해하며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양키 친구 하나가 오더니 말을 건다.

혹시 여기가 지도상에서 어딘지 아니?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인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흠 요 근처 아닐까?
모르겠다 야...-_-
강따라 가야 해변이 나오는거 같으니 일단 가볼래?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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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과 릭

이녀석의 이름은 릭 뮤니츠. 호주인인데 이름으로 봐서 독일계가 아닌가 싶다. 자기는 유태인이라고 하는군. 같이 걸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얘기를 하다보니 이녀석은 18살짜리 꼬마인데 이미 6개월이상 여행중이란다. 서핑경력이 10년쯤 된다는 아주 즐거운 어린시절을 보낸 놈이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대학에 가서 디자인을 공부할거 같다고 한다.
내가 여행와서 처음으로 열등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면 아마 이놈에게서였던거 같다. 이놈은 오래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있었는데 자기 암실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건 아버지가 쓰시다가 자기에게 물려준거라고 하고. 서핑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는 이녀석은 "그럼 아버지가 너의 제일 친한 친구니?"라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을 했다. 이 시점에서 '응'이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환경과 부모, 국가에 의해 내가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자유분방한 학창시절 12년을 보내온거다. 난 한국에 있을때부터 그것 자체가 불만이었는데 심한 박탈감을 느꼈다. 나는 남녀 합반정도라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세상을 원망했었다...-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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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노스티아의 해변

이녀석은 이탈리아에서 만난 여학생 사진을 보여주었다. 바에서 만났는데 자기가 본 여자중에 가장 이뻤다고 하네. 사실 이 부분은 그다지 부러운 것은 아니지만 여튼 영어를 잘 구사하는 백인이라는 것 만으로도 이녀석은 꽤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복거일이 왜 공용어론을 말했는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길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지.
가는 길에 이녀석은 잠시 앉더니 뭔가를 꼼지락거리면서 담배처럼 만다.

너 허쉬쉬 하니?
흠 그게 뭔데?
마리화나.
아 나는 담배도 안피는걸. 그리고 한국에서는 그거 불법이여.
하하 그건 호주에서도 불법이지. 하지만 누구나 한다고.
그렇구나.
이건 내 배낭을 가볍게 해줘 :)

참 작은 도시인지라 우리는 곧 바닷가에 도착했다. 여기서 파도를 보며 우리는 여러가지 얘기를 했다. 이녀석은 큰 파도 하나가 오길 기다리며 프레임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동생 바라보는 형처럼 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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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깡촌에도 이정도 뽀대나는 AFC가 있다.

허허 나도 아무거라도 스페인에 갔는데 성당은 가봐야하지 않을까해서 갔던 바로 그 AFC인가보구먼...도노스띠야 시내에 지하주차장 근처의 AFC가 맞는가? --BrainSalad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바스크는 정말 바스크어를 쓴다. 분명히 로마자를 쓰긴 하는데 어원이 아무리봐도 라틴어 계열이 아닌거 같다. 아 신기해라. 어쩌면 로마자가 아니라 자기네 문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어학자들이 궁금해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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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노스티아의 메틀 전문점. 이런 가게도 있네...장사가 되남?

그녀석을 따라서 오씨네 팬션(Aussie's Pansion, 오씨는 호주인들을 말함)방을 일단 잡고 어떻게할까 하다가 같이 나왔다.
녀석은 피곤해서 잔다며 해변에 드러누웠고 나는 산토 토메Santo Tome미술관에 갔다. 이 조그만 동네의 미술관에 의외로 그림이 많아서 나는 놀랐다. 일부는 프라도나 다른 큼직한 미술관에서 기증받은 것들이지만 자기네 그림들도 상당히 많다. 그리고 나는 바스크 지방의 그림들이 의외로 강렬해서 또한 놀랐다. 이놈들도 까딸루냐만큼 독자적인 성격이 강하구나라는 생각을 다시한번 했다. 아니 까딸루냐에 비해 말이 훨씬 다르기때문에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리라. 여튼 이정도 미술관이 이런 촌구석까지 놓여있는 상황은 역시 한없이 부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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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그림의 제목이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유럽에서 본 가장 맘에 드는 여자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이런 곳에서 만나는 것을 보면 이런게 인연이 아닌가 싶다. 미술관에서 사진찍는 것은 나쁘지만 몰래 한장 찍었다. 죄송함다~

  • Mille Marcelle Souty
  • Ignacio Zuloaga
  • Dario de Regoyos / Aurresku 유화인데 도자기 깨진거 붙여놓은 것처럼 그렸다.
  • Lucas Padilla / El Ajusticiado 고야를 연상시키는 잔혹한 느낌이 드는 그림.
  • Jose Vaillegas Cordero / Sevillana Senorita Retrato 주름 표현이 고흐를 연상시키는 초상화
  • Antonio Ortiz-Echague / Amaren Musaa / Tafialeteko Biandre / Nere Emazte Eta Alaba Gelan
  • Jenaro Urrutia / Paisaia Aurrekoleihoa
  • Miguel Angel Alvarez / Arrantzalea
  • Francisco Ituaaino 로트렉이나 이곤쉴레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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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토메 미술관

여튼 여기는 해변이 아담하지만 너무 이쁜 곳이라 확실히 기억에 남을만한 곳이다.
미술관 옆에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넘어가보려 했다. 나는 이 동네에 대해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쓱쓱 돌아다녀볼 생각이었던 거다. 지층이 노출되어있어서 조금 보았다. 내가 지금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 나도 지질학과를 나왔다고. -_- 하지만 봐도 모르겠다. 셰일층과 석회질이 많다 정도 밖에는... 나에게 지질학 물어보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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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여기서 나는 매혹당했어.

여튼 산자락을 넘어가려는 찰나에 나는 완전히 놀라버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 대서양이 펼쳐져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가 해안도시라는 것이야 알았지만 이렇게 가까운데 이렇게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있을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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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해변

나는 해변을 걷기시작했다. 방파재에 부딛쳐 부서지는 파도를 잡기위해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방파재 바로 위에서 파도 부서지는 것을 보니 다시금 바다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언제나 친근하며 언제나 공포스럽다. 밑에서 끓어오르는 그 살떨리는 청자빛, 그리고 그 어떤 추상화보다도 싸이키델릭한 무늬를 보여주는 거품. 단 한번도 동일한 무늬를 보여주지 않는 그 거품들을 보며 나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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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떼기 싫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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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

산꼭대기 마리아상을 포함하야...산세바스티안의 해변이 가진 매력은 왠만한 남국의 리조트들보다 훨씬 매력있었지...아...여행가고시포..ㅠ.ㅠ --BrainSalad

좀 더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기위해 나는 끌려들어가듯 산으로 올랐다. 바다가 끌어서 산에 올라가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알이다. 올라갈수록 바다가 더 보여서 계속 올랐다. 위에는 요새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포도 남아있고 가장 위에는 마리아 상이 있는것을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거 같기도 하다. 요새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조금 노닐다가 비가 올거 같아서 내려갔다. 슬슬 내려가고 있었더니 비가 꽤 온다. 하지만 기분은 눈물젖은스카이섬 때와는 전혀 다르다. 쿨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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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노스티아 해변

내려가다가보니 미술관들은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구겐하임 빌바오를 보기 위해 바스크로 올라온 것이 아니었던가. 난 서둘러 내려왔다. 유스호스텔에서 확인해보려 했으나 문이 잠겨있길래 나는 다른 유스호스텔로 가서 물어보았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닫을거라고 한다. 도노스티아의 지도를 하나 얻은 나는 곧바로 터미널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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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나서야 찍은 분수. 이걸로 도노스티아와의 반나절 만남은 끝이었다. 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든 몇안되는 도시다.

헉헉거리며 터미널에 갔는데 아직 문을 안열었다. 무슨 점심시간이 두시간이나 되냐...-_- 3시에나 연단다. 나는 서울의 친구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구겐하임 빌바오의 개관시간을 알아달라고. 10분동안 빵과 음료수를 먹다가 전화를 해보니 정말 닫는다고 하는군. 나는 3시까지 기달려 바로 버스표를 끊고 3시 반에 빌보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역시 사람은 피곤해야 잘 자는 법. 한두시간을 신속하게 움직이느라 기력을 써버렸더니 금방 잠이 온다. 아웅 여기는 경치도 괜찮은데 왜 이리 쏟아지는지. 한시간은 까무룩 잔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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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의 전철역

빌보에 내리자마자 말이 안통해서 또 헤맬뻔 했다. 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말이다. 다행히 영어 잘하는 괴청년이 나타나서 나를 전철역까지 데려다주었다. 호오 이런 깡촌에도 지하철이 있군. 지금은 라인이 하나밖에 없다. 역들은 깔끔한데 생긴것이 다들 똑같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아서 들어갔다. 7E던가? 아주 비싸다. 아웅 역시 미국놈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깐. 비싼 놈들. 여튼 여기는 볼거라곤 건물 하나밖에 없는 곳이다. 이런 그지같은 컬렉션으로 이정도 명성을 얻은 것은 순전히 구겐하임이라는 이름값과 프랭크게리가 설계한 이 건물 때문일 것이다.
이 건물은 강 주변이고 다리 밑이라는 환경과 최대한 조화로우면서도 뽀대를 나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다. 건물 자체는 가운데를 비워두어 공간감을 주고 정형적이지 않은 방들이 그 공간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있다. 그리고 2, 3층 내에서의 이동은 구름다리로, 층간의 이동은 계단과 투명 엘리베이터로 하게 되어있어서 가능한한 시각적 쾌감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있다. 그리고 직선과 곡선을 묘하게 섞는가하면 직선으로 곡선을 만들어내는 등 입체감을 살리려고 노력을 하고있다. 그리고 각 방들은 천장이 높아서 공간감 유지에 도움을 주고있다. 20세기 초의 속도감을 중시했던 화풍이 그대로 건물로 옮겨진 듯한 미래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에 균형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옆의 빌보강과 주변 산책로, 그리고 정면에 있는 꽃개(꽃게가 아니다. -_-)이다.

  • 막스에른스트 / Historie Naturelle 아 역시 독일인이여.
  • 미로 / Flight Bird Plain
  • 에밀놀데 / Young Horses
  • 칸딘스키 / Poster for First Phalanx Exibition
  • Jon Fryt / Study of a Dog / Fox Hunt
  • 루벤스 / Roman Charity or Crimson and Pero 마드리드에서 보았던 젖을 물고있는 죄수의 그림
  • Peter Sneyers / Winter 표정이 좋은 꼬마다.
  • David Ryckaert III / Peasant Cat Dog
  • David Teniers / Monkey Kitchen
  • Maskor-Kopa / Shell Cup Neptune Naiad
  • Franz Snyders / Sketches Cat's Head

여튼 구겐하임을 보고있으면 죤 그리어슨의 "예술은 거울이 아니다, 망치다."라는 문장은 "예술은 망치가 아니다, 사기다."로 바꿔야 하지않을까 싶다. 이런 컬렉션으로 그런 마케팅을 구사한다음에 입장료를 7E나 받는 것을 보면 역시 자본의 맛은 단가보다.

구겐하임을 나오자 또 비가 온다. 바스크에서는 비를 맞게 운명지워져있나보다. 유스호스텔을 찾아야하는데 영 안보인다. 적당히 하나를 찾았는데 방이 없단다. 다른데 어디 있냐고 물어봤더니 잘 모른다네. 바로 밑에 있는 집은 45E나 한다. 다시 방이 없다는 집에 가서 다시 물어봐 겨우 조언을 받았다. 알고보니 아까 내가 들어가볼까 하다가 말았던 그 집이군. 25E라니 조금 비싸긴 하지만 하는수없어 그냥 묵었다. 주인아줌마가 술에 취해있다. -_- 여기서 호스탈Hostal은 우리나라의 여관이나 모텔, 팬션Pansion은 우리가 찾는 유스호스텔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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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고 구렸던 잠자리

헤메는 도중에 책 위주로 파는 벼룩시장을 발견했다. 스페인어와 바스크어로 된 책들은 내가 알바 아니지만 정말 싸게 팔긴 하더군. 꽤 커서 벼룩시장이라고 말하기 미안한 수준이지만 그 가격은 벼룩시장에 걸맞다. 내가 유럽에서 발견한 유일하게 '매력적인' 벼룩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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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과 밤의 빌보강

조금 다니다보니 바스크 음악 CD들도 좀 판다. 봐야 뭔지는 잘 모르지만 메틀, 펑크, 심포닉 락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있나보다. 이토이즈Itoiz같은 그룹은 박스셋까지 있더라. 새거인데 장당 6E라니 값도 괜찮다. 나는 6장을 고르고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30E
35E
35E에 한장 더
35E에 내가 지명하는 걸로 한장 더
좋다.

깔끔하게 흥정이 되었다. 유럽에서 성공한 유일한 흥정이다. 이 친구는 음악을 좀 아는지 내가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둘 다 좋아서 뭐 하나 짚기 어렵다'라거나 '사람들은 보통 이걸 좋아하지만 나는 요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등의 추천을 해주었다. 이 친구의 호의가 맘에 들어 조금 더 샀다.
그리고 나중에 집에와서 들어보니 아주 좋더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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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네고했던 착한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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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유럽서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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