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스카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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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0 04 金 : 눈물젖은 스카이섬[ | ]

날이 꾸물꾸물하고 비가 온다. 관광지에서 비를 맞으며 바가지를 쓰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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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이 스카이섬이다. 춥다. 흑...T_T

처음에는 섬을 한바퀴 돌 생각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배를 타고 말레익까지 갈 수 있는 아마데일로 일단 간 다음 그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버스타고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갔는데 내려주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헉. 비는 찔찔 내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내린 아저씨는 세워둔 차로 가더니 시동을 건다. 우리는 그 아저씨에게 아마데일은 어떻게 가냐고 물었는데 아저씨 왈 차타고 한 삼십분은 죽어라 달려야 할거라고. 아저씨가 이 섬의 중심 마을(?)인 브래드포드까지 가니까 일단 자기랑 같이 간 다음 버스를 타고 아마데일로 가라한다. 오오 이거 불운속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행운이다.
이 아저씨는 꽤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한국을 알고있었다. 자기 차가 예전에 대우차였다고 한다. 대우가 망한 것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데-우-라고 분명하게 말해주니 뭐랄까 묘한 느낌이 든다.
자꾸 도로에 곰 그림 그려진 표지판이 있길래 안되는 영어로 물었다.

여기 곰이 자주 출몰하나요?
어 그거 회사 이름인데?
-_-

도로공사를 하는 회사 이름이 베어였던 것이다. 여튼 우리는 브래드포드에서 내렸다. 버스가 하나 있었는데 이놈이 또 운좋게 바로 아마데일까지 가는 것이다. 비속에서 삽질하는 것은 간신히 면했다.

이 버스는 우편 배달부 역할도 하는것 같다. 신문이나 잡동사니를 함께 싣고 브래드포드보다는 분명 시골일 아마데일까지 전달하는 것이다. 기사 아저씨가 짐을 다 싣자 우리는 출발했다. 버스 안에는 WooRam과 나 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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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둘이 자화상 모드로 하나 찍다. 이때만 해도 그 고생을 할 줄은 몰랐다.

한 2-30분은 줄구리장창 달린거 같다. 이거 모르긴해도 제주도 정도의 면적은 될거같다. 이런데 우리는 작은 섬이겠거니하고 한나절 배회만으로 관광을 끝내려했던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이렇게 무심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스페인에 대해서도 당연히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여튼 이 섬은 울퉁불퉁하고 황량하다. 물론 녹지가 훨씬 많지만 종종 황무지같은 곳도 꽤 눈에 많이 뜨인다. 언제나처럼 바보 양들이 점점이 흩어져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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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니 한방 찍고싶었다. 배 선착장 화장실인듯.

일단 배편을 확인하니 네시간 이상이 남는다. 어디 퍼질러서 바다라도 보고싶어 빗속을 걸었다.비가 점점 세진다. 기념품가게에 들어갔는데 이런저런 보석류와 원석류, 도자기 등을 팔고있다. 돌들은 브라질이나 모로코 등지에서 사온다음 가공한 것들로 삼엽충 따위의 화석이 박혀있었다. 도자기는 이 섬에서 만든것이라고 하는데 꽤 이쁘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 여기서 사다가 갤러리아 명품관같은 곳에서 팔면 머리에 총맞은 아줌마들이 열배쯤은 주고 살거같다. 여튼 누가 여기까지와서 살까싶은 것들을 팔고있는 조금은 의아스러운 가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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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뽀대가 좋아보이는 도자기

조금 더 가니 유스호스텔이 하나 있다. 가볼까 하고 올라갔더니 이거 공사중이란다. 그 사악한 인부는 비가 오니 조금 들어왔다가라는 말은 안하고 공사중이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만 한다. 차라리 선착장이라도 가면 비 긋고 몸이라도 조금 덥힐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말이다. 옳은 말이다. 하는수없이 우리는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이 꽤 먼것을 보니 한참 걸어왔나보다.
돌아와보니 결국 꼴랑 다 젖었다. 한동안 방수점퍼가 안젖길래 꽤 쓸만하군 이러고 있었는데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계속 맞고다녔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물이 들어오더라. 의자에 옷을 널고 좀 말리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비가 또 약해진다. 아 최악의 여행지 스카이섬이여.

하이랜드는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오지에 속한다. 인버니스와 네스 강을 이르는 라인이 직선으로 스코틀랜드를 가르고 있는데 그 위쪽이 하이랜드 되겠다. 어제 스코틀랜드가 잉글리쉬보다는 아이리쉬쪽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갤릭어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바로 이 하이랜드다. 기차역에는 분명 갤릭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이 갤릭어는 그 발음이나 표기법으로 보아 분명 불어에 자까운 말인데 그러고보면 영국에 끼친 프랑스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이래저래 꽤 엄청났던 셈이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일기 쓸 시간만 늘었다. -_-
비가 좀 덜와서 잠시 밖에 나갔다. 역시 비오는 날의 바다는 무섭다. 옆에 스코틀랜드 노부부가 있길래 사진 한장을 부탁했다. 찍어준 것을 보여주었다니 오오 이런다. 일제가 역시 좋단다. 아저씨 이건 일제이긴 하지만 저는 조선놈이라구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봤자 소용없다. 그런거 설명하려면 진짜 오래걸린다. 그냥 슬쩍 지난 월드컵을 봤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가관이다. 우리나라가 나간것도 아니라서 별로 관심이 없다고. 역시 이들에게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는 남의 나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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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바다. 재패니즈 남보원을 외친 할아버지가 자꾸 웃으라고 해서 뻘쭘한 자세로 웃는 사진이 나왔다. -_-a

여기 있는것이 심심해서 페리를 타고 말레익으로 나갔다. 의외로 사람이 많다. 알고보니 단체 관광객이다. 그들을 빼곤 역시 나와 우람 뿐이다. 이 페리를 타서 우리는 탈수있는 대중교통을 다 쓸었다. 장거리와 단거리 비행기, 고속버스와 시내버스, 경전철, 배와 기차, 택시. 이제 런던가서 지하철만 타면 끝이다. 심지어 히치하이킹까지 해봤다. 교통수단 기행을 온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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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도 한방.

말레익에 도착해서 기차표를 알아보니 우리가 예매한 것이 가장 빠르다. 빨리 출발할 수 있으면 어서 이 심심한 동네를 벗어나 락의 도시 글래스고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을텐데 망했다. 덕분에 세시간이나 비어 우리는 식사도 하고 몸을 녹일겸 먹을만한 곳을 찾아갔다. 비가 찔끔찔끔 계속 오고 날씨도 추워서 어서 몸을 녹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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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에게 전화를 시도했지만 #버튼이 없어서 걸 수 없었던 우람. 우람은 이미 쥐여살기 때문에 이게 핑계가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한 컷 찍다.

샌드위치와 코코아를 시켰다. 이거 먹으면서 일기나 더 써야겠다. 아일랜드에 왜 대문호들이 많은지 알겠다. 날씨가 하도 지랄이라 할만한 것이라곤 펜대를 �잡고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을테니 말이다. 모르긴해도 분명 스코틀랜드 출신의 문호들도 많을게다.
아 역시 춥고 적적할때는 한모금 마셔주는 코코아야 말로 생에 가장 아늑한 쾌감 중 하나다. 이건 결코 오버가 아니다. 나는 훈련소에서 먹은 그 묽은 코코아 맛(훈병일기0311)을 아직 기억한다. 쾌감은 박탈감이 채워졌을때 생기는 것이다. 익숙한 것이 어느날 사라졌을때 그것에 대한 그리움은 커진다. 연인과 헤어졌을때가 가장 대표적인 때일게다. 뽀송하고 따듯한 그 무엇이 사라졌을때 그것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운다. 하지만 그렇게 아쉬운만큼 그것이 채워지면 기쁘다. 억압의미학인 것이다. 바로 오늘처럼 되는 일도 없고 날은 추운데 비까지 맞아 상가집 개만도 못한 처지에 있으면 따듯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코코아 한잔이야 말로 가장 필요한 것인게다. 같이 먹은 새우 샌드위치는 고작 공복감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진짜는 이 코코아다.
말레익은 카일 오브 로칼쉬만큼 구리진 않지만 역시 깡촌이다. 유물센터와 수족관이 있지만 결코 가고싶지 않다. 이 나라를 다녀보면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맨체스터 정도에 가야 느껴질라나.

여행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제부터 우리는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고생 해가며 스코틀랜드를 한바퀴 휭 돌고있다. 비맞으면서 방을 구하러 다녔지만 박대만 당하고 돈을 뜯겼지 어디서도 환영해주진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바지도 다 젖어 민박집에 돌아가서 빨래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걱정을 하고있는 중이다. 왜 황금같은 시간과 돈을 날려가며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바다를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들어가봐야 고작 3분정도 꼴랑대다가 빠지는 주제에 항상 바다를 동경한다. 아마 당신도 그럴게다. 언제 한번 바다나 가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다는 무섭고 험한 곳이다. 그 곳의 룰을 지키지 않으면 어김없이 잡아먹힌다. 그래도 그곳에 가고자하는 욕망은 결코 줄지 않는다. 어쨌거나 바다는 자궁의 이미지와 우주적 이미지가 반반 섞여있다. 바다는 우주보다 우주적이다.
지금 그 답은 모르겠다. 난 여행 풋내기이다. 나에게 이 여행의 의미라면 그동안 틀에박힌 삶에서 한번 기지개를 켜본다는 것 밖에는 없다. 이제 군역을 던져버렸으니 핑계도 좋고 운이 좋으면 좋은 음반도 살 수 있을것이고. (아직도 꿈에서 못깨고 있었다. -_-) 그 외에 여행에는 고생, 뻔한 풍경, AFC, 미술관 정도가 있다. 그 돈주고 얻는 댓가 치고는 왜소하다. 뭔가가 더 있을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뭔가가 더 있긴 했다. 바로 유럽에 대한 환상이 깡그리 날아갔다는 것. 내 무의식 저 바닥에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을거라는 아주 얇지만 견고하기 짝이없는 컴플렉스 말이다. 아일랜드에 들어가서 며칠 헤매고 스코틀랜드에서 사람 사는 것을 보면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놈들 별거 아니다. 지금의 나 혹은 우리 정도면 얼마든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고있는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나를 알고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우리에 대해 날카롭지만 순진한 눈을 들이댈 수 있는가 아닌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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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멋진 풍경을 찍고싶었는데 고작 잡은게 이거다. 한심하다. -_-a

말레익에서 오는 기차길은 길었다. 6시간 이상이 걸리니 말이다. 그래도 따듯하니 좋았다. 그만큼 비바람을 맞은 여행자는 서러운거다. 오는 길에도 여러 장면들이 심심찮게 보였는데 이 경치들은 예술이라 할만했다. 꼭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장면이 지나가버려 결국 제대로 찍은것이 없지만 빽빽한 나무숲이 작은 섬 위에 있고 그 섬이 작은 호수 안에 들어있는 신비로운 풍경이라거나 폭신한 초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빛나는 물웅덩이가 띄엄띄엄 놓여있는 풍경이 있었던 거다. 이건 마치 중세 전사가 괴물잡으러갈 때 지나가는 풍경들 같다. 아마 스코틀랜드 기차여행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분명 이런 장면들에 뿅 갔을것이다. 여튼 이런 오지에 철길을 깐 거 보면 이네들도 대단하다. 중간중간 헬기로 떨어뜨리지 않으면 들어오기도 힘들것 같은 그런 곳을 이 철길은 지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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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에서 먹을것을 산 덕에 비닐봉다리를 하나 들고있다.

글래스고에서 기차를 갈아타다. 15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잠시 역 밖으로 나갔다. 바로 앞에 잔디밭이 있길래 어차피 젖은 발 맨발로 돌아다녔다. 푹신한 잔디를 맨발로 걸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기차타고 오는 길에 얼핏보니 여기는 꽤 큰 도시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다지 볼만한 것은 없어보인다. 역시 심심한 공업도시쯤은 되어야 락음악을 하는게다.
에딘버러에 도착해 야경을 보니 왠지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사이에 에딘버러에 정이 들었나보다. 역시 이쁘고 멋진 도시다.
민박집으로 돌아와서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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