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님의 김광석

Deadlink recovered from http://web.archive.org/web/20011101091311/myhome.shinbiro.com/~juni117/kks.htm (including http://zuny.i.am )

김성준님께 멜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으셔서,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지기 전에 남아 있는 자료라도 남겨 두고자 여기에 글을 옮겨 둡니다. 혹시 김성준 님이 우연히라도 이 페이지를 들리시게 되셨을 때 만약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시면 SonDon에게나, 고려바위 관리자 가운데 한 사람(예를 들면, 거북이에게)에게 말씀해 주세요. 바로 지워 드리겠습니다.


1 # Who's He[ | ]

김광석 (640122-1001xxx)
본적: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 345-10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398-12. 8/7 (전입일자.'94.10.14)
부인: 서해순(650914-2036xxx)
딸: 김 서연(9)

그의 삶은 노래와 함께 흐른다. 64년 1월 22일, 대구 대봉동에서 형 둘과 누나 둘 아래 막내로 태어나며, 68년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 살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76년, 경의 중학교에 입학하여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그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79년 대광고등학교 입학 하여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때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기타를 튕기며 이런 저런 노래를 하고 있을 무렵, 한 친구에게서 '젊은 예수' 라는 운동권 가요집을 선물받게 되는데, 그 안에 있던 '못생긴 얼굴'을 부르다가 그만 남자답지 못하게 울어버리 기도 한다. 84년, 김민기씨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며 이때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든다. 85년 1월 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 중 사망한 큰 형으로 인해 6개월을 복무하고 그해 7월 제대한다. 군을 마치고 복학하여, 무얼할까 하던 그는 '못생긴 얼굴'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사는것도 괜찮겠다싶어, 노래의 길을 택한다.

87년 여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것을, '산울림'의 김창완씨가 듣고 음반을 내자고 하여 '동물원 1집'을 내 놓는다.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거다"라며 농담같은 진담을 했었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동물원"앨범은 많이 팔렸다. 그들은 많이 팔린 이유가 그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 자신의 음악을 찾고 싶었던 그는 동물원 친구들과 헤어져 89년,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1집을 내놓으며 홀로 열심히 뛰고 또 뛴다. 그런 힘든 중에도, 노래만큼 사랑도 포기 못한다며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는 달콤한 가정을 꾸민다.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을 내고,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내며, 이젠 정말 노래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93년에는 '거리에서'의 세계와 '광야에서'의 세계 모두 녹아있는 '다시부르기 1집'이 나오며, 94년에 발표된 '서른 즈음에'와 '일어나'가 담긴 4집에서는 좀 더 명확해진 노래의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95년에는 모던포크의 계보학을 정리한 '다시부르기 2집'이 발표된다. 매해 음반을 발표하면서도, 관객과의 호흡을 좋아했던 그는 소극장 공연을 성실하게 가져왔고, 95년 8월에는 학전 소극장 에서 1천회 기념 공연을 갖기도 한다.

96년 1월 6일 맑은 웃음과 노래만을 많은이의 가슴에 심어놓고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1964년 1월 22일 대구 출생
1976년 경희 중학교 입학
1979년 대광고등학교 입학
1982년 명지대 경영학과 입학
1984년 김민기(개똥이) 음반 참여
1988년 동물원 1집 발매
1989년 김광석 1집 발매
1990년 결혼
1991년 김광석 2집 발매
1993년 김광석 3집, 다시부르기 1집 발매
1994년 김광석 4집 발매
1995년 다시 부르기 2집 발매
1995년 8월 1천회 기념 공연
1996년 1월 6일 사망

2 # His Life[ | ]

2.1 # 기사모음[ | ]

2.1.1 # MBC 명사 탐방 : 빛돌이 김광석[ | ]

가수 빛돌이 김광석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가수 김광석을 1000여회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착한 빛돌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목소리에 순수함이 배어져 나오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차분함과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전달해주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의 곁을 떠난 지 2년이 넘었습니다.

1964년에 태어난 그는 경희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바이올린, 오보에 등 다양한 악기를 배웠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단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민기 씨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군 제대 후 동물원 1집을 내놓은 그는 1989년 그만의 앨범을 선보였습니다. 1집에 수록된 '기다려줘'는 대중적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었던 곡이었죠. 91년에 그의 대표곡이 되어버린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을 내고 이어 3집을 발표한 그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정리하는 [다시 부르기 1집]과 [다시 부르기 2집]을 발매합니다. 김광석은 자신의 앨범 중 특히 4집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자리를 찾은 느낌으로 만든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말했을만큼 그 자신 스스로가 만족했었던 작품이죠. 이 앨범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의 발라드 계열에서 포크계열으로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한국 가요계 현실로써는 하기 힘든 1000여회 소극장 공연을 마친 그는 1천회 기념 공연을 갖기도 합니다. 그의 공연장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의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소리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김광석은 또한 운동권 노래를 순화한 정서의 대중가요로 선보이고 있다는 평을 들었는데요. 일반 대중가요의 사랑 타령 일색에서 비껴난 건강한 그의 노래들은 있는 그대로의 어쿠스틱한 연주로 더욱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는 70년대 김민기로부터 시작된 모던 포크의 계승자였습니다. 김민기 이후로 뚜렷한 포크 계열의 가수가 없던 상황에서 그의 등장은 80년대와 90년대의 댄스 중심의 단순한 가요계 경향을 다양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2.1.2 # 1996년 어느 학습지에 실린 기사[ | ]

무대는 모름지기 껍데기를 벗고서 있는 그대로 서는 공간이어야 한다.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무대는 의미가 없다.

95년 말 라이브 콘서트 1천 회를 마침내 돌파하고 새해 벽두에 그가 죽었다. 어쩌면 가수로서는 황금기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던 그가 말한마디 없이 떠나간 것이다. 분분한 뒷말을 남기고......

"콘서트는 내 생활 자체이다.이전에는 공연장 이라든가 음향 기기와 기술, 콘서트 자체애 대한 대중적 인식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콘서트 문화가 형성되기 무척 힘들었지만, 이제는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이 또한 저 혼자 잘나서 되는 게 아니다. 무대 스테프와 연주를 맡고 있는 동료들과의 하모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대는 모릅지기 껍데기를 벗고서 있는 그대로 서는 공간이어야 한다. 흔히 복서들이 링위에선 숨을 곳이 없다고 하잖는가. 무대에 서는 사람의 마음 또한 다를 바 없다. 무대에선 결코 지나치거나 처져서는 안 된다. 그 호흡을 본능적으로 유지하여햐 한다."

"나의 무대를 찾는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기대를 가슴에 안고 무대를 지켜 본다. 특히 숨소리가 손데 잡힐 듯한 소극장 무대에선 눈빛만 마주쳐도 알 수 있다. 그 각각의 기대를 얼마나 만족시켜 주는가가 관건이다. 그럴 때 나는 광대이다.무대의 나와 객석의 관객이 혼연 일체가 되어 드높아질 때 우리 모두 잠깐이나마 해방을 맛본다. 나는 <이등병의 편지>를 부를 때가 특히 그러하다. 장교로 복무하다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는데, 와이셔츠 입은 관객들이 이 노래의 동심원 속으로 빨려 드는 저릿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결국 무대는 '노는'장소이다.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무대는 모두에게 의미가 없다.이 이외의 목적이 무대에선 존재하면 안된다."

"우리의 문화에서 가장 큰 위기는 전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통은 단지 옛날의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며 전통이 없으면 손쉽게 서구의 문화,특히 미국과 일본의 대중 문화에 경도된다. 하나가 유행하면 너도나도 뒤따라 그 일색이 되는 거리의 패션과, 하다 못해 한자리에서 5년도 버티지 못하게 한판을 갈아 치우는 카페들을 보라. 뉴욕의 음악 거리인 그리니치의 작은 카페에 들은 적이 있는데, 그곳은 별 특징도 없었지만 무려 80년이나 되었단다. 나는 그 곳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아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대중 문화의 저역을 느꼈다. 나는 아빠가 느낀 것을 딸래미가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2,3세대가 공유하는 공간이 있는 문화는 손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 공개방송에 나가,공부 대신 골프를 선택하여 집요하게 매달린 결과 만족스런 삶을 누리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의 예를 들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단 자신이 선택했으면 끝장을 봐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때가 마침 입시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그 얘기는 잘려 버렸더라. 공부는 못했지만 흔히 하는 말로 모범생이었던 나의 10대 시절을 후회할 때가 가끔 있다. 그 때 냐가 좀더 많은 생각과 경험을 했더라면 지금 나의 음악이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2.1.3 # 조선일보 연예란 기사[ | ]

지난 1월 돌연한 죽음으로 팬들에게 충격을 줬던 요절가수 김광석의 미발표 유작곡 부치지않은편지가 추모앨범 가객에 실려 발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광석은 80년대 중반 대학가 노래운동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멤버로 노래를 시작, 그룹 동물원을 거쳐 솔로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얻었던 포크스타. 사랑했지만 나의노래 일어나 등 삶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서정적인 노래들은 그에게 70년대 모던 포크를 계승한 90년대의 마지막 싱어라는 찬사를 안겨줬다.

이번에 앨범으로 나온 유작 부치지않은편지는 그가 의문의 자살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며칠 전에 녹음했던 노래. 당시 김광석은 작곡가 백창우와 시(시)를 대중가요로 만드는 <노래로 만나는 시>란 앨범을 기획, 그 중 첫 곡으로 정호승 시에 백창우가 곡을붙인 부치지않은편지를 녹음했다. 그런데 며칠후 김광석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 기획도 중단되고 말았다. 백창우는 이 노래가 묻혀버리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끝에 박학기 안치환 권진원등 김광석과 가깝던 가수들이 그의 대표곡들을 리바이벌하는 추모앨범 가객을 만들면서 부치지않은편지를 머리곡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김광석의 음악을 아끼던 팬들에게 큰 위안이 될 부치지않은편지는 애절한 멜로디와 가사가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편곡된 포크풍의 노래. 여린 듯 하면서도 힘있게 솟구쳐 뻗어가는 김광석 특유의 맑은 보컬이 가슴시리도록 애틋한 감상(감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는 노랫말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미리 노래한듯 해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2.1.4 # 96년 에스콰이어에 난 기사[ | ]

세상을 떠난 이들의 노래는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 생전에 부른 노래를 들을 땐 그 가수가 살아서 다가오는 느낌이다. 노래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그가 했던 이야기, 표정 등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된다. 노래가 끝 잠시 동안 계속되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는 깊은 한숨으로 번진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덤가에는 아직도 헌화하는 인파로 붐빈다. 존 레논은 지의 유자하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완벽하게 결합시킨 그의 음악적 역량은 지금도 감탄의 대상이다. 최근에는 김성재와 서지원 등의 죽음으로 많은 소녀 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감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훗날 그들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더라도 소녀 시절에 좋아했던 가수들에 대한 기억은 애틋한 감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광석과 김현식. 이 두 가수 역시 다른 요절 가수들처럼 죽음으로 음악활동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두 가수와 노래들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96년 새해의 비보를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혹자는 그걸 부정하기도 한다. 그가 죽은 후에도 노래는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10대부터 40대에게 이르기까지 김광석의노래가 가지고 있는 감성은 모두에게 강하게 다가온다. 그가 내놓은 앨범들은 스테디 셀러로 여전히 건재하며 대학가에서는 아직도 김광석을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는다. 그가 죽었건 죽지 않았건 김광석의 노래는 팬들의 삶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두 가수에 대한 기억과 노래를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그들이 부른 노래는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살아온 삶은 어떠했기에 세상을 떠난 가수들을 현세로 불러오려고 하는가. 김광석과 김현식, 두 가수에겐 한 가지 공통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점은 표피적인 공통점일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수가 쉽지 않은 삶을 살다갔고 그것을 노래로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부단한 고민 속에 표현한 노래들이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 또한 두 가수가 함께 가지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김광석이 차분하게 읊조렸다면 김현식은 정열적이고 폭발적이었다. 김광석이 맑은 음성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아쉬워했다면 이별에 대해 절규하는 김현식이었다.

삶에 대한 고민의 방식이 다른 것이다. 두 가지 서로 상반된 방식은 1996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적용된다. 삶이 쉽지 않은 이들에게, 진지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왔던 짧은 생의 편린들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모든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의 노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삶의 사소한 부분에 대한 애착. 노래를찾는사람들에서부터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나와 동물원에 참여하면서 대중들과 만나게 된다. 그가 부른 거리에서라는 곡은 김광석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정도로 히트하기도 했다. 특히, 흐린가을하늘에편지를써에서의 가창력은 그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물원은 그의 음악적 욕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맴버 모두 전업가수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아마추어리즘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광석은 달랐다. 솔로가수로 데뷔한 것은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고 전업가수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첫 번째 앨범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자작곡들이 많았지만 김광석 자신의 색깔을 내지는 못했다는 평이었다. 기다려줘 너에게 등의 곡이 기억될 정도이다. 김광석이란 이름이 알려진 것은 2집의 사랑했지만이다. 이 노래는 가요차트에까지 진입할 정도로 인기곡이 되었고 그의 이름 또한 대중들에게 자리잡았다. 인기가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으려고 한 김광석이었다. 사랑했지만으로 애절한 발라드 가수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나의노래가 실 린 3집, 일어나가 담긴 4집, 그리고 다시부르기를 통해 포크 가수로서 확고한 위치를 자리잡아간다. 다시부르기는 가요계에서 묻혀있던 주옥같은 노래를 다시 세상에 알리는 작업으로, 자신이 예전에 즐겨부르던 포크 곡이 대부분이었다. 여러 장의 앨범과 주옥 같은 노래는 주로 콘서트에서 전달되었다. 가끔 TV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애정을 쏟았던 건 콘서트였다. 1989년 10월에 시작한 콘서트는 1995년 8월에 1,000회를 맞이한다. 그의 이런 활동은 소극장 콘서트를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학전 소극장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김광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붐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안녕하신지요. 처음 보내드린 곡이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였습니다. 공감하시는지요. 음... 누구나 스스로의 나이에 대한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 내면서 지냅니다. 10대 때는 거울처럼 지내지요. 자꾸 비춰보고, 흉내내고, 선생님 부모님 또 친구들을... 그러다 20대 때쯤 되면 뭔가 스스로 찾기 위해 좌충우돌 부대끼면서 그러구 지냅니다. 가능성도 있고 주관적이든 일반적이든 객관적이든 나름대로 기대도 있고 그렇게들 지내지요. 자신감은 있어서 일은 막 벌리는데 마무리를 못해서 다치기도 하고 아픔도 간직하게 되고 그럽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유리처럼 지내지요. 자극이 오면 튕겨내버리든가 스스로 깨어지든가 그러면서 아픔 같은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더 아프기 싫어서 조금씩 비켜나가죠. 피해가고 일정 부분 포기하고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뭐 그때쯤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해야 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도 뭐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거나 그렇지 못합니다.

그의 얘기 속에서 웃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때론 눈물을 머금는 관객들이었다. 친한 형과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인생이야기였고 마음좋은 오빠와 함께 떠나는 가을 여행이었다.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얘기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김광석 콘서트에서의 음악적 교감은 그렇게 다정 다감했다.

"아저씨 콘서트에 앉아 있으면 꼭 아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었고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도 같고 나의 감정을 대신해서 노래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저씨의 콘서트에 가면 '아름다운 삶'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정열적으로 혼신을 다해 노래부르는 아저씨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아저씨의 삶을 얼마나 동경했던지..."

김광석 팬클럽인 '둥근소리'의 나우누리 ID가 ajeegang인 회원이 1,000회 기념공연을 보고 난 후 쓴 이 얘기는 그의 콘서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감정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슬픔을,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했고 그것은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게 닿아 있었다. 인생은 수영장이다. 자꾸 가라 앉는다

방송과의 인연은 3년 동안 진행한 불교 방송 '밤의 창가에서'라는 프로그램에서였다. 낮에는 콘서트밤에는 DJ로 활동하면서 얻은 별명이 '수퍼맨'이다.

그땐 콘서트와 다른 행사, 인터뷰 등을 마치고 와서 DJ까지 하면서 정력적으로 활동할 때였어요. 바쁜 와중에서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구요. 그래서 붙은 별명이 수퍼맨이었죠.

밤의 창가에서의 담당 구경모PD는 그를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기억한다.그중에서 가장 성실하려고 했던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한 가지 음악 장르에 국한되지 않으려고 했다. 어떤 음악이라도 도전해 보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김광석을 포크 가수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음악적 뿌리를 두고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김민기와 한대수의 맥을 잇는 유일한 가수로 김광석을 말한다. 그만큼 그는 70년대의 정서와 80년대를 이어주는, 그리고 90년대에 자신만의 포크 영역을 개척한 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블루스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마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음악에 변화가 있었다면 블루스적 경향이었을 거예요.

구경모PD가 기억하는 김광석은 '의식적인' 가수가 아니었다. 유치하다고 구박했을 정도로 삶의 사소한 부분에 애착을 많이 갖는 가수였다고 한다. 보다 더 적극적이고 사회적인 의식을 요구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대중적인 노래를 원했던 가수였다. 노래를찾는사람들에서 동물원으로자리를 옮긴 것도 이 때문이었고 솔로로 데뷔한 것은 노래에 깊이를 담고 싶어서였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어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그것을 노래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래 속에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의 메아리는 김광석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울려퍼진 것이다. 다시부르기I 앨범 재킷에 실린 글에서 그가 노래에 무엇을 담으려고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다시 부르기 음반은 길가다가 잠시 쉬는 동안 뒤돌아보고, 반성할 것 하고, 지금 느낌대로 마무리를 짓고 앞으로 다시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것이다. 지난 가을 어느날인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날이 있었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그냥 예전 학교 때 자주 다니던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대 앞이며 홍대앞, 연대앞을 돌아다녔는데 예전의 모습대로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거리도 많이 변했고... 갑자기 서글퍼지는 거다. 정들었던 곳이었는데... 내가 다니던 곳에 내 딸아이가 다니지 못한다는 생각이 서글픔을 거들었다. 왜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는지...

그의 노래는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야기, 아파하는 이야기, 그리워하는 이야기,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이런저런 이상의 이야기들을 노래에 담는다.

"음악과 사람과 일치하는 치눅였습니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노래 속에 담겨 있었죠. 진솔함이라 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일관되게 그의 음악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가창력도 뛰어났구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열심히 했다는 것, 그것이 그의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겠지요."

김광석과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음악적 동료였던 박학기씨(33세)는 그의 음악이 '나'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가 곧 노래였다는 것이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인생이란 강물위를 뜻없이 부처초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끝이 없는 말들 속�"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세상이 변해도 나�샷 어차피 살아 살아 있는걸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순간에 말라버리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한 1년 전에 제 스스로 여러가지 힘든 일이 한꺼번에 불규칙하게 터졌을 대 이런 생각을 했죠. '인생은 수영장과 같다. 이렇게 힘든 일이 자꾸만 날 가라앉게 만든다면 그래 한 번 가라앉아 보자. 내려가다 보면 바닥은 나올 것이고 바닥이 나오면 차고 올라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자꾸만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그 끝은 더더욱 깊게만 느껴지지만 다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죠. 그래 포기하자. 이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생각하고 떠오르기로 했죠. 삶은 일정 부분 만족하며 아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노래로 만든 것이 '일어나'입니다.

김광석노래집에서 김광석의 이야기와 생각은 그와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때론 좌절하고 때론 슬퍼하지만 다시 새로운 삶의 의지를 찾아가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들 곁에 있었던 삶의 노래를 이젠 들을 수 없다. 몇 장의 앨범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무대의 빈자리를 채우지는 못한다. 아쉬움과 슬픔에 앞서 그가 무대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직 의문점이 많다. 김광석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무대에서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김광석 자신은 어떠했을까? 할 이야가기 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살아갈 날들이 많았던 만큼 이야기 또한 많지 않았을까? 그의 노래처럼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또 해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2.1.5 # 렛츠 95년 12월호에 난 기사[ | ]

신기하고 불확실하며 극단적이던... 스무살 적 방황의 깊이, 내 노래의 깊이.

신기함 82년 3월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많은 기대를 품고 대학에 입학했다. 모든 게 신기한 것들 투성이었다. 축제는 내 마음을 얼마나 들썩거리게 했던가. 여자의 손을 처음 잡은 것도 그 무렵이다. 작은 여학생이 예쁘게 담배피는 모습을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당구를 배웠고,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지금은 구식이 된 '뿅뿅이'를 하기 위해 전자오락실에 들락거리는 재미도 맛보았다. 불확실 그러나 곧 내 마음 속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세미나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기득권자들이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부린 횡포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고교 때 지실이라고 배웠던 것들 가운데 진실이 아닌 것도 많음을 알게 됐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 둘, 깨달으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 자체를 회피했다. 늘 우울했다. 친구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데모 대열에 합류도 해 봤지만 어쩐지 나는 그곳에서도 겉돈다는 느낌만 들었다. 뭔가 다른 일이 있을 터인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런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을 회피하는 대가였다. 그 대신 나는 노래에 빠져 들었다. 서울대 다니던 친구에게서 나온 노래책 <메아 리>와 기독교학생청년회에서 나온 <젊은 예수>라는 책을 받았다. 그 책을 보며 무심코 기타를 '뚱땅'거리며 가수 한돌의 노래 <못생긴 내 얼굴>이나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어쩌구 하는 을 부르노라니 뭔가 가슴을 탁 치는게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그렇고 그런' 사랑 타령 노래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그 신기함. 그것을 계기로 나는 대학연합 노래서클인 '연합메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해 9월 나는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며 "가수 안 필요하세요?"라며 멋적게 얼굴을 내밀고 다녔다. 조그만 가게에선 일단 노래를 한번 해보라고들 했다. 주인 입장에선 돈도 들지 않고 손님들에게 라이브 음악을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뿐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과 술집에 놀러가서 우연히 노래했다가 그곳에 붙잡히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처음으로 무교동의 '코스모스 코러스'라는 레스토랑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어 신촌과 이대 앞 등지를 떠돌며 밤무대에 섰다.

첫 월급은 3만원이었다. 사실 교통비 정도밖에 안되는 돈인데도 내 월급날을 노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언젠가는 내가 일하는 곳에 와서 5만5천원어치 술을 먹고 내 앞으로 외상하고 갔다. 두 달 동안 월급도 못 받고 노래만 죽도록 불렀다. 그러나 나로선 노래라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때는 뭔가 자랑하고 싶었고, 무대만 마련되면 언제까지고 노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직업가수가 될 작정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로 노래하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노래하는 것만이 내 마음 속 답답함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래는 노래일뿐이며, 뭔가다른 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워진 건 아니었다.

극단적 '어디에서나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는 시구가 생각난다. 내 스무살 시절이 그랬다. 뜨뜻미지근한 건 참지 못했다. 마음 속에 '홧기운'이 많았던 시기였다. 술 먹고 사소한 것에 분노를 잘 하던 시기였다. 어느 날인가 친구와 함께 친구의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걸어가는 걸 보았다. 친구는 그냥 가자고 했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친구는 내가 분노하는 것에 오히려 의아해했고, 나는 그 일로 인해 두고두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 나는 지나치리만큼 극단적으로 대층했다.

그럼에도 노래 이외엔 다른 어느 것도 물고 늘어지지 못했다. 대안없이 화만 내는 바보였다. 가능성과 패기는 넘쳤지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보냈다. 형님은 "넌, 왜 그렇게 사니?"라며 핀잔을 줬고, 그런 나를 보는 부모님 역시 답답해하시는 눈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이... 83년 말 기어코 나는 학사경고를 맞았다. 군대간다고 휴학한 뒤 마땅히 할일도 없었던 나는 다시 기타를 '뚱땅'거리며 돌아다녔다. 서대문 로터리 근처에 있던 '말뚝이 소극장'(재개발로 현재는 없어짐)에서 임지훈, 윤설하 등과 함께 노래했다.그들에게서 노래판 얘기를 들으며 직업 가수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듬해 여름, 나는 김민기 선배의 음반 개똥이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 음반은 요즘 공연되고 있는 록 오페라 의 토대다. 그때 음반회사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찾는사람들을 결성하게 됐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 뒤 나는 다른 노래패 '새벽'에도 합류했다.

85년 1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돌아가신 큰 형님 덕택(?)에 6개월만 복무했다. 제대할 때까지 앞일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없었다. 86년 복학하니 친구들은 취업한답시고 풀숲에 머리 처박은 꿩처럼 도서관 책상에머리 숙이고 공부만 했다. 나 역시 앞 일이 걱정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비로소 절박해진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문득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노래 부르며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그길로 나는 '험한' 노래판에 뛰어들었다. 87년 여름 별 생각 없이 녹음한 것을 음반 프로듀서 김창환씨가 듣고 음반을 내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동물원 음반이나오게 됐다. 김창기, 유준열, 박경찬 등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당시가 내 20대의 방황을 마무리하던 때였지 않나 싶다. 요즘 내 노래의 깊이는 어쩌면 그 무렵 방황한 깊이 만큼의 아닌가 생각한다.

2.1.6 # 따뜻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언제나 청년같은 가수[ | ]

그를 처음 보았던 것이 언제쯤이었던가. 7-8년쯤 흘렀음직한 이야기인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허름한 연습실에서였으리라. '동물원'이라는 첨 독특한 노래 모임이 생겨나고 첫 콘서트를 준비하던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거리에서'라는 노래가 우리 가슴을 쓸쓸하게도 하고 따뜻하게도 하던... 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날, 처음 만난 그는 통기타를 퉁기며 그 노래 '거리에서'를 불렀었다. 아, 저이였구나... 그 잔잔한 노래를 참 슬픈 목소리로 불러주는 이가 바로 저 남자였구나... 새삼 다른 눈으로 그를 보았을 때 참 작은 체구에 따뜻한 눈을 가진 그 사람, 김광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을 건너와 다시 그를 만났다. 더이상 이십대의 팔팔한 청춘도 아니고, 더이상 '동물원'의 맴버도 아닌, 그는 자기 이름을 가진 가수이자 생활인의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나왔음에도 그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저 전보다 머리가 조금 길어 보였다고나 할까. 여전히 청년같은 순한 얼굴로, 그는 다시 만난 짧은 시간들을 순박하게 채색해 주었다.

삼십 고개에 섰어요, 결혼두 했구요. 나를 닮지 않아서 참 다행스러운 예쁜 딸아이도 생겼어요. 모든게 많이 변했는데... 그대로인 것이 있다면 그건 노래를 하고 있다는 거죠. 여전히 이렇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행복에 젖어 살거든요.

노래란 얼마나 질긴 끈인가. 하고 생각케 했다. 적어도 그가 노래 속에서 사는 한은 누구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구경하고, 또 그의 분위기에 함께 젖어들기도 하면서 살아가게 될 테니까. 그가 여전히 젊은 얼굴로 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의 곁에 기타가 있고, 노래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요즘 전국 투어 중이다. 노래 하나를 품에 안고, 관객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마주앉을 수 있는 작은 무대에서 여러 편의 노래 이야기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불교방송에는 그의 프로그램도 있다. 매일밤 12시 20분부터 2시까지. 깊고 어두운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밤의 창가에서'라는 심야 프로그램이다. 순박한 목소리로 DJ를 보는 그 시간은 청취자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도 참 귀한 여유를 안겨 준다. 하루를 마감하며 조용히 무릎을 꿇어보는 생각의 여유 같은 것. 또 있다. 쉬운 말로 하면 그는 '사장님'이 되었다. 젊음의 거리로 알려져 있는 홍대 주변에 아담한 건물 하나를 갖게 되었는데, 그 건물 꼭대기에는 살 집을 꾸미고, 한 층에 있는 사무실에다 '둥근소리'라는 일터를 오픈한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또 매니지먼트 업무까지 맡아 볼 계획이다.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 많이 가져요. 착하고, 알뜰하고, 센스도 있는 아내 덕분에 그저 나하고 싶은 노래만 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사는 것 같거든요, 더구나 전 뭐 그리 좋은 남편도 못되는 편이거든요. 왜 있잖아요. 보통의 아내들이 원하는 자잘한 행복 같은 거. 그런 거 통 못 채워 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인데... 아내가 이해해주니 더 고맙죠.

그의 수첩 한켠에는 다섯 살 난 딸 아이 서연이와 아내의 사진이 꽂혀 있었는데, 그걸 꺼내 보이며 '예쁘죠? 하는 듯이 묻는 눈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만하면 괜찮은 남편이며 아빠가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해 볼 수도 있게햇으니까. 그만큼 그의 속에는 가족사랑의 큰 강물이흐르고 있다는 그런 생각...

기다려줘, 사랑했지만, 나의 노래, 일어나, 그리고 이등병의 편지까지... 많이들 사랑해 주신 덕분에 부르는 노래마다에 흥이 넘쳐요. 어느새 4집 앨범까지 출반했으니 이젠 5집 준비를 해야 할 차례인데...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뜸을 들이고 있다고나 할까요? 이젠 좀 더 된장국 냄새가 풀풀 나는 그런 노래를 하고 싶거든요.

노래가 있는 한 그는 늘 청년 같은 모습일 거라고, 그래서 또다시 7-8년쯤의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나도 여전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와 헤어지는 길에서 머리 속에 새긴 느낌이었다.

2.1.7 # 샘터 95년 9월호에 난 기사[ | ]

노래는 삶의 상처를 감싸주는 것

일상에 쫓겨 바삐 살아가다 보면 가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주어진 삶이 무게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어둠과 함께 텅빈 외로움이 찾아든다. 바로 이런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을 향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인생을 조율하며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김광석(金光石, 32세, 마포구 서교동 398-2 원음빌딩 202호). 노래는 진실한 삶의 이야기라는 믿음으로 지난 '84년부터 줄곧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져온 그가 국내에서는 전례없는 라이브 공연 1천회를 맞아 서울 동숭동 학전 소극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열였다. (8.1~8.31)

BBS `밤의 창가에서'녹음차 불교 방송국에 들른 그를 17층 로비에서 만났다. "제가 좀 늦었죠?" 바로 이웃집 형을 생각케하는 외모와 말투, 가슴에 범선이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우선 1천회 공연 기념 콘서트를 축하드립니다. 라이브 무대를 고집해 오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사실 천(千)을 바라보고 노래하진 않았어요. 바둑을 둘 때처럼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한집 한집 만들어가는 데 정성을 다하듯 매번 공연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84년 민중노래 서클인 노래를찾는사람들로 공연 활동을 시작한 그는 '88년 그룹 동물원'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라이브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호소력 짙은 그의 음악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듣는이에게 가슴을 휘어잡는 잔잔한 울림과 함께 노래가 끝난 뒤에도 뭔가를 생각케 하는 독특한 흡인력이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의 비상구

"김광석 씨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표현하곤 하는데요.노래와 삶에 관한 철학이 있다면..."

문명이 발달해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려는 자신의 노래가 자칫 교과서적인 충고나 교훈조로 흐르지는 않을까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유당 시절, 아버님께서 교원노조사건으로 교단을 떠나셔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대학시절 민중음악을 선택하신 계기가 아닌지..."

직업적인 계기는 아니었어요. 아버님을 항상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고 경우 바르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어요. 사회라는 체계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위로보다는 종종 피해를 입히더군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러한 현실이 제겐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며 살아가려던 제겐 다행히도 음악이 있었습니다.

90년 6월 동갑내기 서해순 씨와 결혼, 다섯살 난 딸 서연이를 두고 있는 김광석씨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결혼하고 나서 4,5개월 동안 통장은 항상 영이었어요. 총각 시절엔 그저 내 한몸 버텨가면 그만이었는데 가장이 되어 아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몹시 괴롭더군요.....아내는 직장 생활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말없이 나를 밀어주더군요. 인정받는 것은 우선 아내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요즈음은 콘서트 외의 시간은 딸과 함께 놀아주는 시간을 가지려 애쓴다. 서연이에겐 항상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맑은 향기 나누며 살자

94년 4집 앨범 출반 이후 김광석 씨의 30대 가수로서의 완숙미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지게 된 때가 있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부터 허무가 몰려왔다고.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20대의 가능성들은 대부분 좌절되고 30대의 한계를 분명 인정해야만 했었죠. `서른 즈음에'라는 곡은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죠.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점점 더 멀어져간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그는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어나'를 힘차게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 처럼...

"4집 앨범에 수록된 `맑고 향기롭게'라는 곡은 법정 스님이 함께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대한 느낌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법정 스님을 뵈면서 마음을 잘 닦으신 분은 절로 몸에서 향기가 배어나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가만히 옆에만 계셔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생각하니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욕심만 앞세우는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이다고 그는 말한다. 일상의 조그마한 얘기거리, 재밋거리가 모이면 그것이 바로 삶의 큰 힘이라고. 처음부터 너무 큰 의미만 쫓다보면 마치 동화 속의 `무지개를 찾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처럼 허황될 것이라며 웃는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 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2.1.8 # 95년 삼성카드 사보에 난 기사[ | ]

처음엔 '설마'했었다. 저녁 시간이라면 몰라도 4시 30분부터 시작되는 낮공연이 매진돼 보조석까지 동이 난다는 신문 기사가 조금은 부풀려졌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주말도 아니고 일요일도 아닌 평일 오후 4시 대학로 학전소극장. 주로 대학생들로 보이는 남,녀 무리들이 공연장 입구에 몰려 있는데 한 가지도드라진 특징은 콘서트의 주인공이 그들 앞을 지나가도 열광을 한다거나 관심을 나타내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점이다. 그 주인공 또한 지극히 평범한 생김새와 차림새로 대중들 속에 섞여 있으면 오히려 묻혀 버릴 것 같아 사람들 앞을 그저 자연스럽게 지나치는게 당연하게 보일 정도였다.

관객과의 교감을 강조하는 가수

김광석씨. 그처럼 인간의 심연을 파고 드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흔치 않을 것이다. 랩, 댄스, 록 등 청소년들의 입맛에 쩍쩍 들러 붙는 가요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즘 통키타에 덥수룩한 머리, 그리고 결코 잘생겼다고 볼 수 없는 외모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그가 '돌연변이'로 보일 정도이다.

4시 40분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정말 빈 자리가 없었다. 아니 빈 자리는 고사하고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은 보조석까지 꽉꽉 들어찼다. 관객들은 가수가 통키타를 들고 올라와도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조용히 무대로 올라와 하모니카를 불며 노래를 하려는 그를 반가움으로 맞이할 뿐이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꽉 찬, 화려하지는 않아도 사람들의 소박한 정이 공연장에 가득한,그리고 오케스트라나 현란한 조명이 없지만 통기타 하나로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풍부함이 그의 콘서트장에서 살아 움직였다.

듣는 사람과의 교감을 강조하는 그답게 어눌하면서도 폭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말투가 한결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의 공연은 항상 좋은 느낌을 준다. 노래를 통해 인간의 삶을 느끼고, 진실을 깨닫게 하는 힘이 그 속에 담겨 있다.

제 노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살면서 겪고 느끼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죠. 이런 노래들을 직접 전달하고 싶어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겁니다."

라이브 공연 1천회. 지난 8월 11일 두번째 공연이 그 기록의 분기점이 되었다. 굳이 국내 최초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붙이지 않아도 그는 국내 가요사에 엄청난 일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러한 숫자놀이에 큰 관심이 없다. 부를 노래가 있고 장소가 준비되있고,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언제든 무대에 선다는 생각이다.

==== # 라벨르 95년 9월호에 난 기사 ==== #

음악적 교감... 이것만큼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전파매체의 슈퍼파워를 등지고 소극장공연을 통해 음악세계를 펼치는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관객의 생생한 숨결. 자신의 노래에 따라 파고를 달리하는 그들의 음악적 감성을 느낄 때마다 그는 '가수 김광석'의 살아있음을 기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아리노찾사 시절, 진실과 정의가 담긴 의미있는 노래만이 좋은 노래이며, 이것은 힘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에게 행동의 변화까지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분한 기대. 이제 그는 더이상 노래에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사회적 진실과 정의가 중요한 만큼, 인간의 순수한 감정과 삶의 사소한 단편들도 소중한 것이라는 새로운 깨달음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는 것, 잊고 있거나 잃어버린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모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 노래. 이것이 오늘의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노래의 진실이다. 20대의 들끓는 젊은 시절, 그렇게도 진부하고 속물적으로 느껴지던 사랑얘기,소시민의 살아가는 얘기,삶의 소소한 느낌들... 이것들이 이젠 더없이 소중한 노래의 주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텔레비젼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아도 음장을 내놓으면 20,30만장씩 슬금슬금 팔려버리는 것도, 공연 무대만 열면 연일 매진되어버리는 것도, 이러한 그의 소탈한 믿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겠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팬을 영광시키거나 미취시키는 법을 모른다. 다만 생각에 잠기게 할 뿐이다.

교복단추 하나 풀어헤칠 줄 모르고 얌전하게 지냈던 '바보같던' 10대. 중학교 현악반 시절, 바이올린, 색소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고, 남못지 않게 노래도 불렀지만 음악적 미래를 상상도 못했으며, 그 어떤 미래도 꿈꾸지 않았던 무덤덤한 시절,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공부보다는 뒤늦게 만난 김민기의 음악세계가 더 매혹적이어서, 노래에 슬슬 매달리기 시작한 20대, 남들은 TOFEL을 끼고 취직을 준비할 때, 통기타를 메고 음악거리를 헤맸고, 사회의 정의 실현을 위한 창구로 노래를 생각했고, 자신의 미래로 노래를 결정한 시절, 결혼 이후 구차스런 가난 때문에 가장으로서 체면을 깎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음악은 여전히 그에게는 가장 강력한 행복인자.

90년대 포크송의 1인자로 우뚝 선 30대 더이상 통장에 '0'이라는 비참한 숫자가 찍히지 않을 만큼 음악으로 경제적 안정까지 찾은 대중가수로서의 현재. 동년배 넥타이 부대의 출세지향적인 야망 대신 건강하고 진실한 삶의 노래를 가슴에 품은 오늘. 40대에는 세계 최고의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계를 일주하고, 60대에는 연애하는 꿈을 지녔다. 그는 그 어떤 시절에도 음악을 족쇄로 생각한 적이 없지만, 그것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음악과 분리해보지도 못했다. 음악적 인생은 이제 '즐거운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즐거운 족쇄'를 차고 오늘도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 한, 그는 늘 행복한 음유시인으로 우리 곁을 지킬 것이다.

==== # 탁구저널 95년 9월호에 실린 기사 ==== #

가수 김광석에게는 느낌이 있다.

불교방송 17층, 라디오 프로 '밤의 창가' 녹화중인 그를 만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기 무섭게, 동행했던 사진기자가 무슨 인터뷰를 그렇게 빨리 끝내냐며 내내 아쉬워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토탈 20분, 그중 10분은 그가 녹화시간으로 써버리고 나머지 10분 동안 모든 인터뷰를 마쳤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했다. 느낌 때문이었다고 했다. 굳이 이것 저것 묻지 않아도 그가 지닌 느낌만으로도 할당된 페이지보다 더 많은 페이지를 채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어떤 사람은 녹음기 앞뒤를 채워 돌려가며 인터뷰를 해도 느낌이 없어 쓰는데도 힘이 들고 다 써놓고도 뒤가 개운치 않은데 비해, 가수 김광석은 단 10분의 인터뷰 만으로도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슴으로 느껴진 느낌들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그에게 붙여주고 싶은 별명 하나가 있다. 바로 "고요한 노래꾼"이다.

8월말까지 그는,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콘서트 1000회 기념 공연을 가졌다. 매 공연때마다 보조석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노래를 가슴에 담아가고자 찾은 사람들로 인해 학전소극장 비좁은 지하통로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돈을 주고 표를 끊었음에도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 겨우 그의 옆 모습만 볼 수 있는 구석에 신문지를 깔고 앉은 어느 관객은, 그런 것에는 털끝만큼도 연연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저 그의 공연무대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딱딱한 바닥의 몸트림을 잊고 있었다. 관객은 인생을 어느 정도 알만한 나이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아직까지는 젊은 나이이고, 노래 역시 그래서 관객이 학생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방학중이거나 토요일 오후 같은 날에도 학생층은 정확한 수치로 0.2%에 불과하다. 이유는 그의 노래는 설익은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른 즈음에 걸친 사람들이 어느날 삶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때 공감할 수 있는 노래가 있고, 사랑의 체험을 너무 아프게 해서 너무 아픈 사랑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통해 사랑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고, 힘겨움을 딛고 일어서라는 용기를 주는 노래가 있고, 60대 노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살이를 표현한 노래가 있다. 때문에 삶의 깊이를 모르면 그의 노래의 맛이 덜해지는 것이다. 또한 그의 공연장은 노래가 있음에도 고요하기만 하다. 노래를 들으면서 요즘 시쳇말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고 재정리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가수 김광석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고루 나눠 줄 수 있는 재능이다. 오늘 귀기울이던 노래가 내일이면 그 노래를 부른 가수와 함께 허무하게 잊혀져버리는 요즘, 그래서 그를 귀한 노래꾼이라 해둔다.

2.1.9 # KOREA LIFE 95년 8월호에 난 기사[ | ]

33살의 나이에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내고 조용히 자신의 공간을 지키며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가수가 있다. 바로 콘서트의 일인자 김광석씨다. 싱어 송 라이터로서 주로 방송보다는 콘서트 위주의 활동을 벌이는 그는 특히 대학생들이나 20-30대 사이에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84년 '노찾사'로 가수활동을 시작한 김광석씨는 '동물원'으로 한창 대중들에게 알려진 뒤에 솔로로 전향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색깔있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 왔다. 8월 학전소극장에서 한 달 예정의 콘서트공연을 계획중인 그는 올해로 여섯번째의 공연을 해온 바 있다. 김광석씨는 TV 활동, 라디오, 축제, 일반행사가 모두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청중과 하나가 되는 콘서트 현장에서 가장 자기만족을 느낀다고 한다. 살아있는 음악을 전하려는 그의 의지가 돋보인다.

김광석씨는 '다기부르기'라는 음반을 내놓고 있는데 1집은 노찾사와 동물원 시절에 불렀던 노래 중 녹음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좋아했던 곡중에서 선별을 해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몇년 후에 들어보면 그 음악이 주는 느낌이 다르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시부르기 2집'은 어느날 시간이 비자 일부러 신촌, 홍대, 이대, 고대앞의 20대에 자주 가던 술집이나 카페들을 찾으러 나섰는데 한곳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 없어서 허전하고 서글픈 마음에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만들게 된 것이라고 한다. 본인의 18번은 [친구], [나른한 오후]라고 말하는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5살난 딸 하나를 두고 있다. 4집음반을 만들 때 그는 매우 지쳐있었고, 답답한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만든 곡이 '일어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노래는 딸아이를 얻었을 때 만든 곡이라고 한다. 딸아이를 직접 받았는데 그때의 감정을 쓴 노래가 '자유롭게'였다. 그때의 신성한 감동은 그에게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 나온 '60대 노부부 이야기', '이등병 편지', '나의 노래', '사랑했지만','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그에게는 소중한 노래들이다. 특히 다시부르기2집은 자신의 마음과 곡이 잘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 20대에 만든 노래는 사랑, 개인적 이야기가 많이 담겨져 있는 반면 30대에는 인생살이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많이 만들게 됐다고 한다. 요즘 가요계의 음악장르가 한쪽에 치우치는건 문제가 되지만 젊은 후배들의 음악성을 높게 평가하는 그는 가요계의 현실을 탓하기 보다는 스스로 할 탓이라고 강조한다.

노래를 만들때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애정이 많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포부나 계획을 묻는 기자에게 김광석씨는 "앞으로 더욱 준비작업을 철저히 해서 1년에 2-3차레 공연을 꼭 열심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 겸허함을 잃지 않는 김광석씨의 의지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콘서트장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를!

2.1.10 # 가수 박학기씨와의 만남[ | ]

김광석과 박학기의 첫만남은 그들이 세살때 대구시 대봉동 로터리 근처의 한 주택가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김광석의 집은 박학기의 외갓집 한집 건너 있는 '번개 전업소'(박학기의 얘기로는 당시 김광석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던 분이 지금의 번개표 형광등 개발자라고 함)였다. 이미 부모님들끼리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도 소꿉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물론 부모의 말에 근거한 얘기라고) 그 후. 세월이 흘러 각자 대구를 떠나 있는 상태에서 1988년을 맞았다. 당시 박학기는 데뷔엘범을 내놓아 '향기로운 추억'으로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고, 김광석은 그룹 동물원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날 박학기의 어머니가 계모임에 다녀오시더니 "니 광석이 기억하나, 그 얘 엄마가 그러는데 '식물원'인가 뭔가 하는데서 노래한다카드라. 니 모르나?" 라고 하신 데서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음악활도을 한다는 공통점에 더욱 친한 관계로 발전될 수 있었다. 이 때 박학기는 먼저 유명가수가 됐지만 김광석은 무명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얼마뒤엔 또 다시 안양 비산동에서 함께 살게 되어 더욱 자주 볼 수 있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며 살아가기도 했으니 둘의 관계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니 두사람의 조인트 콘서트가 이뤄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2.2 # 그 외 관련 글들[ | ]

2.2.1 # 95년까지의 공연연보[ | ]

1987.10 <노래를 찾는 사람들> 1회 정기공연 참가
1988 <노래를 찾는 사람들> 2회 정기공연 참가
1988.1 <동물원> 1집 음반 '거리에서'등 수록
1988.3 <동물원> 콘서트 (샘터 파랑새 극장)
1988.5 <동물원> 콘서트 (미리내 소극장)
1988.8 <동물원> 콘서트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1988.12 <동물원> 콘서트 (힐튼호텔 컨벤션 센타)
1989.2 <동물원> 콘서트 (사랑방 소극장 무료공연)
1989.5 <동물원> 콘서트 (동숭아트센타)
1989.10 김광석 1집음반 발표 ('기다려줘', '너에게'등 수록)
        김광석 콘서트 (계몽문화센타)
1990.8 <겨레의 노래>공연 참가
1991.3 김광석 2집음반 발표 ('사랑했지만','꽃'등이 수록)
1991.6 김광석 콘서트 (계몽문화센타)
1991.7 김광석 콘서트 (마당세실극장)
1991.9 김광석, 안치환 <가을콘서트> (학전소극장)
1991.10 김광석, 안치환 <가을콘서트> (학전소극장-앵콜)
1992.3 김광석 3집 발표 ('나의 노래','나무'등이 수록)
       김광석 콘서트 (샘터파랑새극장)
1992.5 김광석 콘서트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륨)
1992~1993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진행
1992.8 김광석 콘서트 (학전소극장)
1992.12 김광석, 안치환, 배훈 <겨울 콘서트> (학전소극장)
1993.3 김광석 콘서트 (샘터파랑새극장)
1993.5 김광석 콘서트 (힐튼호텔 컨변션센타)
1993.5~6 김광석 콘서트 (전국투어)
1993.7 김광석 콘서트 (학전소극장)
1993.10 김광석 음반 다시부르기 I 발표
1993.12 김광석 콘서트 (마당세실극장)
1994.2 김광석 큰 콘서트 (KOEX 전시관)
1994.2~4 김광석 전국토어 콘서트
1994.5 <배트를 들라>꿈의 구장 음반 참가
1994.6 <한톨의 밀알이 되어> <내가 필요한거야> 한국 기아대책기구 음반 참가
       김광석 4집 발표 ('서른 즈음에','일어나'등 수록)
1994.8 김광석 콘서트 (학전소극장)
1994.10 김광석 큰 콘서트 (잠실 롯데월드 호텔)
1994.11 김광석 아틀란타 공연
1995.3 김광석 음반 다시부르기 Ⅱ 발표
1995.2~4 김광석 8개도시 투어 콘서트
         'GREEN TREE STORY'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수원,인천, 청주, 광주)
1995.5 100일 콘서트-박학기와 조인트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1995.8 김광석 1000회 기념콘서트 (학전소극장)
1995.9~10 1000회 기념 전국투어 콘서트
1995.10 김광석 콘서트 (연강홀)
1995.11 필라델피아, 팬실베니아 대학공연
        뉴욕 맨하탄 머킨콘서트홀 공연

2.2.2 # 김 광석 다시부르기 1의 CD에 있는 글[ | ]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붉게 물들어 내일을 기약하는 저녁 노을은 그저 아쉬움입니다.
익숙함으로 쉽게 인정해 버린 일상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시 뒤집어 보고 내 걸어온 길들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나날들, 내 뒷모슴을 말 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 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던 세상살이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부대끼는 가슴이 아립니다.
읽다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끼게되는 내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듯 불러왔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번 부끄럽습니다.
지난 하루의 반성과 내일을 기약하며 쓰는 일기처럼 되돌아보고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미련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하다말고 문득 바라본 거울속의 내가 낯설어진 아침,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젊은 날의 꿈이여.... 1993. 2. 6. 김광석.

2.2.3 # 김광석씨가 알고싶다~!?[ | ]

1.취미가 뭐여유
       악기 수집,주로 기탄데 아직 좋아하는 모든 기타를 다 갖진 모탯꼬. 5개쯤 되나보네.
2.좋아하는 (색,음식)
       두부,녹차를 좋아하고 (녹차는 광적으로 좋아함) 인터뷰중에도 녹차를 마시고 이써꼬 나보고도 머그라고 해씀
       수박색과 고동색을 좋아함.
3.용돈과 지출내역
      일정치가 않아서 모르겠고, 대개 음반,책,술값으로 지출된다.
       (나중에 나도 한잔 사주기)
4.좋아하는 가수/노래
       Donovan,김 민기,송 창식 노래에 대한 대답은 안해줘씀
       (속으로는 아마 "사랑했지만" 이러는거 아닌지 몰라)
5.좋아하는 배우,영화
       더스틴 호프만,커크 더글라스
6.첫사랑
       말하고 싶지 않음(부인에게 혼남)
7.이상적인 여자,남자
      나의 부인(내가 좋아하니까)--> 우문현답
8.즐기는 스포츠
       수영
9.스트레스 해소법
       잔다
10.자주 가는 곳
       홍대 앞(솔직하게 얘기하시죠 맨날 집~!!)
11.혼자있을 때 주로 하는 일
       책보고,텔레비젼보고,잔다(자는 거 누가 모르남)
12.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
       새벽(새벽에 주로 글도 쓰시고 음악작업도 하신데요)
13.밤에 주로하는 일
       책보고,가족과함께 텔레비젼 시청하거나 얘기
14.기억나는 팬선물
       오랫동안 써온 일기를 내게준 학생
15.좋아하는 패션 스타일
       청바지에 조끼(숏다리가 더 자가 보이는거 아닌지 몰라!?)
16.버릇, 습관
       목을 운동하듯이 돌리고,쑥스러우면 웃는다.
17.징크스
       없으시답니다.
18.자신의 외모에 대한 생각
       짧은 다리가 불만이시랍니다.
19.가장아끼는 것
       책(? 어떤 책인지 후에 자세히 알아볼께요,)
20.스케쥴 없는 날은 뭘하시는지..?
       애기하고 놀아주거나, 친구를 만난다.
21.어릴적 꿈
       아버지가 되는 것, 회사원
22.팬레터는 하루에 몇통이나?
       20통
23.친한 연예인은..?
        박학기
24.신체상의 비밀은?
         발사이즈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25.즐겨 듣는 음악
        포크
26.기억에 남는 여행은?
          93년도에 미국에 갔을때.. 15박 16일 동안 갔었는데, 새로운 문화에 대한 기억이 인상적이었다.
27.노래연습은 언제 어디서?
          노래연습은 거의 안하고, 기타연습만..
28.즐겨 부르는 노래(18번)
          친구
29.즐겨보는 TV프로그램
       칠협오의
30.태어나서 가장 슬펐던 일, 기뻤던 일..
          큰형이 돌아가셨을때, 아기 태어난 날
31.주량
        소주 반병에서 2병정도까지는..
32.담배
        하루에 2갑
33.좋아하는 음식
       두부
34.해보고 싶은 음악쟝르
       Rock, Blues
35.기억에 남는 콘서트
       91년 7월에 마당세실에서 한달동안 6 연했는데 가장 기억에..  어렵게 혼자해서 기억에 남고,반응도 좋았고
       그 당시에는 콘서트를 자주 안했기 때문에 공연도중의 멘트가 나의 진솔한 삶의 고백이었다.
       그때의 좋은 기억으로 콘서트를 자주 하게되었다.
36.가수이외에 하고 싶은 일
       룸팬(천상 가수를 하는게 최선의 일이겠군요)
37.어떤상황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대답없음(아마도 공연중일거라고 생각됨)
38.소원
       dobro 라는 쇠로된 기타를 가지고 싶다
       (이것은 증폭장치된 기타임 참고로 얘기하면 소유하고 있는 기타가 12대래나 뭐라나~~)
39.보통 친구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에 뭘 하는지..?
       술을 먹거나 여행을 한다.
40.노래를 하게된 동기나 루트,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선배노래하는 업소에 구경갔다가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시작

2.2.4 # 돌아온 타잔[ | ]

타아-잔 아아~~~아

나는 대구 대봉동서 번개전업사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둘과 누나 둘이 있고 국민학교 선생님이시던 아버지(교원노조 하시느라 해임을 당하셨다)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살았다. (가수 박학기는 우리집(번개전업사)에서 두번째 건너집 모란양장점의 조카였다. 어렸을때 같이 놀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기억이 않난다2살 때 일을 기억하는 학기의 기억력이 너무 놀랍다....- 학기와 조인트콘서트를 자주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3살때 마당이 넓고 옆에 과수원이 있는,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범어동으로 이사 갔었다. 4살 때 까지의 일은 잘 생각안난다.

그 후 5살 때 서울 장충단 공원 옆으로 이사를 했다. 장충단 공원에서 돌미끄럼도 타고 분수대에서도 놀고 그러다 지치면 옆 태극당에서 아이스크림 사먹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타~~아 잔인데 국민학교 3학년 때 창신동으로 이사했다. 이 당시 유명한 TV 프로그램은 **타잔** 이었다.(30대 초.중반의 사람들이라면 너무나 좋아했던 프로그램이다.) 우리 동네에서 TV가 있는 집은 한 곳 밖에 없었다. 그 집에 내또래 한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내가 사투리를 쓴다고 따돌리며,'타잔'을 보여주지 않았다. (흐어~헝) 그러던 어느 날,자기가 시키는데로 하면 '타잔'을 보여준다고 했다. 앗 이 기쁨! 드디어 나도 타잔을 보는구나...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친구 : 광석이 너 내가 시키는데로 할 수 있지 !!!
  광석 : 좋데이
  친구 : 내가 널 우물 옆에 묶을 거다.
  광석 : 니 맘대로 하그라
  그리고 그 친구는 내게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물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이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아버지  : ......

단칸 방에 세들어 살던 우리 집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던 19인친가 25인친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TV를 사가지고 오셨다. 난, 전날의 그 물고문은 생각 나지도 않았다. 어린마음에 TV를 갖게 된 그 기쁨이란 ......

2.2.5 # 자전거, 그리고...[ | ]

TV에 이은 또 하나의 기쁨은, 5섯살때 인걸로 기억한다. 어느날 술에 걸쭉하게 취하신 아버지의 어깨에 세발 자전거가 들려 있었다. 당시의 환경에서는 정말 생각하기 힘든 기쁨... 언젠가 왜인지 아버님께 여쭤 볼 생각이다.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이었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때문에 우리 식구는 모두 내가 3살 때 살던 대구 그 집으로 이사했다. 난 동덕국민학교(대구)로 전학하게 되었고 거기서 2년간 기억나는 일이라고는 토끼를 기르던 일과동네 야구를 즐기던 일이다. 아카시아 잎으로 토끼 밥을 주면.....누구처럼 앞 이빨만 두개 나온 귀여운 모습이 생각난다.

6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다시 이사해서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경희중에 입학했을 당시에도 지금처럼 키가 작았다. 원래 특별활동으로 기계체조를 하고 싶었는데 신체 조건상 현악반에 들었다. 사실 거기서도 첼로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큰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바이올린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남경진,서우준,정태욱과 나 이렇게 현악 4중주를 하던 기억이 안다. 가끔 축구부에 끌려가서 얻어 맞던 기억도 난다.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악기들 배우고 (밴드부에서 관악기도 배웠었다. 지금은 잘 못하지만) 여름방학 때 합숙하면서 연습하던 기억들이며, 경희대 크라운 홀에서 발표회도 갖고 졸업식 때 현악반주해서 바이올린으로 특별상을 받은 기억들이며.. 돌이켜 보면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는 중학교 때 이었던 것 같다.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학교의 영향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여기서 교회봉사 활동이며 성가대 활동을 했고 당시 학교에서는 시간도 많이 들지 않고 해서 합창단 활동을 했다. 고 3이 되어서는 남들처럼 공부한 기억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이제 나의 20대가 막을 연다.

2.2.6 # 어린날 추억 어린 창신동[ | ]

어릴적엔 지금보다는 훨씬 많이 걸어다닌것 같다. 살기는 동대문에 살면서 장충동 부터 혜화동 까지 하루걸러 한번 뛰어 다니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어린시절 가장 장거리 걸은 기억은 광나루(뚝섬)에서 수영하다가 돈을 몽땅 잃어 버리고 동대문까지 걸어왔던 날이다. 약 10리길 국민학교 3학년때니 꽤먼 거리였다. 목마르면 소방서에서 물 얻어 마시고 하며 꼬마들 5명이 힘들어 하며 약5시간 정도 걸었으니, 요즈음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꽤 대견하다는 생각이 스스로 든다.

2.2.7 # 장충단공원 벤치를 이용 해도 좋은 장소다.[ | ]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온건 5살때다 뭐가뭔지 하나도 모를 때 처음 살던곳은 장충동 태극당 뒤 어느 골목안 인데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아침이면 작은형(5살차이 나니까 그때 형은 10살)과 태극당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 (기계에서 꽈베기 처럼 나오는것 그당시엔 정말 드문 먹거리였다)사서 길건너 장충단 공원에서 반나절 놀고 돌아오던 기억이 난다 그당시 장충단 공원 놀이터에는 지금은 어디로 옮겨놓았는지 모르지만 돌로 만든 미끄럼틀이 있었다. 요즈음에도 2호터널쪽이나 동국대 쪽에 가면 그당시 생각이 난다. 가끔 햇살 좋은날 갈 장소가 마땅하지 안으면 분수도 있고 놀이터도 있는 장충단공원 벤치를 이용 해도 좋은 장소다.

2.2.8 # 제가 아는 김광석님은...[ | ]

제가 아는 김광석님은 맑고 고운 목소리만큼이나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을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행적을 과거형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아프기만 할뿐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도 그분에 대하여 많은 이들에게 알릴 생각입니다. 김광석님은 언제나 가수로 남길 원했습니다. 가수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분이 원하는 세상,그세상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기에 잠시 자신만의 세상으로 가신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늘 기억속에 머무르는 맑은 음성과 가슴을 적시는 그의 노래 그리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던 그분의 고독 몇 줄의 글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아야 했던 오직 노래만이, 때묻은 기타와 하모니카만이 그분이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매체였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픕니다.

나는 가수다.가수는 노래꾼이다. 노래로 밥먹고 잠자고 꿈꾸며 살아간다.이게 직업이다. 나는 무슨 자기 소개서 같은것을 쓰면 직업란에 가수라고 쓴다. 내가 가수라고 내세울만큼 내직업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매일같이 라이브 무대에 서고싶다.

2.2.9 # 김광석[ | ]

김 광 석
1964년 1월 22일 대구 대봉동 번개전업사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
1968년 상경하여 창신동에서 창신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냄.
1976년~1982년 경희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다니며
중학교때는 현악반에서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등의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혔으며 고등학교때는 합창반에서 활동하기도 함.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1학년때 대학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다가 한친구가 선물해 준
"젊은 예수"라는 가요집안의 "못생긴 얼굴"을 부르다가 그만 울어버림.
1984년 김민기씨의 "개똥이"음반에 참여하고 이때 만난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든다.
1985년 1월 군에 입대하였으나, 군생활중 사망한 큰형으로 인해
그해 7월에 제대한다. 군을 마치고 복학하여 무얼할까 고민하던 그는
"못생긴 얼굴"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노래의 길을 선택한다.
1987년 여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것을
"산울림"의 김창완씨가 듣고 음반을 내놓자 하여
"동물원 1집"을 내놓는다.(1988년 1월)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거다"라며 농담같은 진담을 했었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동물원"앨범은 많이 팔렸다.
그들은 많이 팔린 이유가
그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1989년 10월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 동물원 친구들과 헤어져
김광석 솔로 앨범1집 발표.
1990년 친구의 동생과 8년 열애끝에 결혼하여 달콤한 가정을 꾸림
1991년 3월 이 수록되어 있는 김광석 2집 발표,
5월 30일 예쁜딸 서우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받음.
1992년~1993년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 진행
1993년 10월 김광석 발표.
1994년 6월 김광석 4집 발표. 등이 수록.
1995년 3월 김광석 발표.
1995년 8월 1일~8월31일 1000회 기념콘서트 .
1996년 1월 6일 맑은 웃음과 노래만을 많은이의 가슴에 심어놓고
훌쩍 하늘나라로 감.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그의 노래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사랑이라는 이유로> <바람이 불어 오는곳><이등병의 편지><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나의 노래><나른한 오후> <그대 웃음소리><흐린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그녀가 처음 울던 날><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옛모습> <말하지 못한 내사랑><마음의 이야기><나른한 오후>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마음속의 풍경><행복의 문> <너하나 뿐임을><새장속의 친구><안녕 친구여><바람과 나> <맑고 향기롭게><내마음의 문을 열어줘> <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아스팔트 열기속에서>......

2.2.10 # 김광석님께 : 이원재 씀[ | ]

지난 1월 6일 새벽에
우리는 착하고 멍청한(?) 통기타 가수 한 사람을 하늘나라로 올려보냈다.
벌써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꿈 속에서 걷고 있는듯한 느낌일 뿐이다.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그냥 '광석이는 없다'라는 현실로 돌아올때마다
나의 모든 것이 무기력해질뿐, 아무런 느낌조차 오지 않는다.
이젠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84년, 어느 녹음실에서 나는 광석이를 만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히히'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뭐 하시는 분이세요? 히히, 저는 맨날 이렇게 놀고먹는 놈이랍니다."하고
인사를 건네던 녀석,
광석이와의 첫만남이었다.
이듬해85년 여름, 내가 홍대앞 부근에서 카페를 하면서
음악하던 선후배 그리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고
술에 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때도,
이 개구장이 녀석은 "히히, 여기 숨어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지?" 하며
또다시 불쑥 나타났고,
90년, 원판가게를 하며 그 동안의 통기타 생활을 정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에도,
"요놈아 내가 왔다. 아무리 숨어도 소용없지?"하며 나타나기도 했다.
이 개구장이 녀석은 이후에도 불쑥불쑥 나타나서는
나를 여기저기 데려가서 자기가 맡은 프로에서 느닷없이 노래도 시켰다.
또 어떤때는 새벽에 집으로 전화를 해서는
커피를 사달라 술을 마시자 하면서 땡강(?)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얼굴은 웃고 있었어도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꾸준한 노력으로 광석이는 상당히 성숙한 음악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후배나 동료 잘되는 꼴을 못보는 망할놈의 통기타 바닥!
나는 학기와 그리고 광석이의 아내, 또 광석이의 친구들에게서
그동안 전혀 몰랐던 10여년 동안의 통기타 가수 김광석의 고뇌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광석이는 몹시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잘 나간다는 댓가로 싫은 소리도 듣고 욕도 먹고
뒤에서 손가락질도 해대고,
그래서 개구장이 녀석이
언제부터인가 풀죽은 녀석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96년 1월 6일 새벽에
이 개구장이 녀석은 훌쩍 위(?)로 올라가 버렸다.
맨 처음의 개구장이 모습을 다시 찾지 못한체로 말이다.
나도 한명의 죄인이고 그 외에 통기타를 들고 다니면서
광석이에게 형이란 소리를 듣던 이들도
모두가 광석이를 일찍 하늘나라로 올려 보낸 죄인들이다.
이제와서 반성하고 울어대면 뭘하나.
이 망할놈의 개구장이 녀석!
저 위에서 낄낄거리며 내려다 보고 있겠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몇십년이 지나야 올라가서 물어볼수 있을게다.
광석이는 무진장 순진했고 무진장 착했으며
무진장 개구장이였고 무진장 노래를 잘했던 녀석이었다.
지금 이순간에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다.
"히히, 나 광석이야."
망할놈! 괘씸한 놈! 꽤나 보고싶다....

--이원재 씀--

2.2.11 # 광석이는 : 최지열 씀[ | ]

광석...
그는 거절 하는데 익숙치 못한 친구였다.
밤에는 지인들과의 만남을 가져야 했고
다음날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정된 concert에서 열창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곡을 쓰고 음반을 내고 가족들을 돌보고,
친구와 선후배들을 챙겨주었다.
해서 그는 나름대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고
만만치 않은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삼십이년의 짧은 인생을
결코 짧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바쁘게 살다가 간 것이다.
십여년전 그는 고대앞에'고리'라는 까페를 차렸었다.
까페이름을 '고리'라고 지은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는
"사람과 사람. 인연과 인연을 연결시키는 고리역활을 해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라는 대답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독특한 냄새가 풍기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까페의 실내장식을 직접했다.
싸구려 소파며 조명등을 사다가 이렇게 저렇게 배치해보고
미술하는 친구를 불러서 간판을 만들게 하였다.
재능이 별반 없는 나는 소위 노가다를 통해 약간의 공헌을 했다고 자위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고리라는 까페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고
길지않은 기간동안 운영되었으나,
그를 아는 많은 이들에게 나눔의 따뜻한 공간이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분명 그랬다.
세월이 흘러 그는 직업가수의 길을 가게되었고
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인연의 고리는 묘한것인지 내가 들어온 회사의 여사원모임이
'고리회'라는 것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 여사원회가 1년에 한번씩 주관하는
일일 고리자선찻잡에 그를 초대하여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되었었다.
예전에 고리라는 까페의 주인이 고리회가 주관하는 고리찻집에서
노래를 하게 된 기억이 난다.
"지가요 친구를 잘못 두었어요. 지가요 좀 비싼 놈인데요.
오늘은 공짜입니다. 제 친구 여기서 일을 하는데
석유개발을 한데나 어쩐대나..."
이제 더 이상 그의 넉살을 들을 수가 없다.
1990년 어느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 장가간다. 함 좀 져주라" 그래서 함을 져주었다.
행복하게 잘 살라고...
그러나 6년후 나는 벽제 화장터의 유골분쇄기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내야 했다.
하루는 그의 공연 마지막날과 노래마을 사람들의 공연날이 겹친 일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광석이네 무리와 노래마을 사람들이
혜화동 정육점 2층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뒷풀이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서른 즈음에'를 작곡한 승원이형에게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라니 어떻게 이런 노래를 만들어서
사람가슴을 아프게 합니까"라는 칭찬반 불만반의 이야기를 했었다.
광석이를 화장시키는 동안 승원이형과 형수에게 이 이야기를 또 해야 했고,
학전앞에서 치뤄진 노제때도 이 노래를 들어야 했다.
안된다고 이럴수는 없다고 외쳐보았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안다.
많은이들에게 이별의 처절함을 남기고 완전히 앞서서 갔다.
이제 우린 그저 그를 가슴한결에 고이 묻을 수 밖에...

- 1996년 1월 18일 최지열 씀.

2.2.12 # 너무나 슬픈 목소리의 가객 김광석 : 구경모 (불교방송PD)[ | ]

너무나 슬픈 목소리의 가객 김광석

김광석과 필자와의 인연은 91년 필자가 연출하던 FM심야프로에 그를 디스크 자키로 기용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약 4년간 같이 방송일을 해왔고 타계하기전까지 PD와 DJ라는 공식적 관계를 넘어 호형호제하는 개인적 친분을 유지해 왔다.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음악에 관한 견해 이외에도 91년에서 95년까지 가까이서 본 인간 김광석에 대한 필자의 관점을 피력하는 것도 이제 고인이 된 김광석을 그의 음악과 더불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슈퍼맨, 김광석

김광석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다. 그는 근래에 로드매니저를 잠시 고용한적이 있으나, 그의 활동기간을 통틀어 매니저 없이 거의 혼자서 모든 활동을 꾸려왔다. 그의 활동영역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콘서트, 그리고 봄, 가을로 붐비게 되는 각 대학 축제등의 초대가수, 또 음반녹음, 방송 프로그램의 DJ, 기타 다른 방송활동이나 행사및 공연등에 초대되는 일들이었다. 이런 활동을 섭외나 홍보 그리고 스케줄 관리를 전담하는 매니저 없이 혼자서 처리한다는 것은 실로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김광석은 홀로 그일을 다해냈다. 그리고 왜 매니저를 두지 않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를 둘만한 가수가 아니라서.."

그의 주된일과는 아침에 보통 방송사 한 두곳을 가서 녹음이나 녹화를 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자신의 공연이나, 서울 혹은 전국의 대학이나 단체에서 초청한 행사에 응하고 밤에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신문이나 잡지를 위한 인터뷰, 혹은 음반을 위한 녹음작업을 하고 새벽에는 컴퓨터통신을 통한 팬들과의 온라인대화나 작곡이나 작사 또는 연습, 혹은 독서에 몰두하는...옆에서 보기 정말 대단하다싶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보여왔다.

그는 선천적으로 자그마한 체구에 걸맞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체질이었고, 주변에서는 흔히 그 성실함을 빗대어 슈퍼맨이라 불렀다.

여린 감성과 깊은 통찰력의 타고난 가수

김광석의 성격은 감성적으로는 상당시 여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무척 강한 두가지 면을 동시에 보였다. 자신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철저함을 추구하였지만 주위에 관해서는 동시에 늘 관대히 대해왔다. 음반을 낸 초창기 형편없는 대우에 몇마디 불평만으로 막대한 이윤을 그대로 저버렸으며, 힘들게 살아도 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늘 자신의 삶의 방식과 그 해답에 대해 목말라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젊은이 중의 한명으로서 우리들이 처한 이 시대상황에서의 작은 감정의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감정의 원인과 이유를 밝히려 애썼다. 그리고 잘 살려고 힘썼고, 늘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철저한 자기훈련의 결과로 매사에 깊은 통찰력을 갗춘 그는 자신의 여린 감성으로 이 타락한 세상과 결국 타협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는 언제나 다정다감했으며, 바르게, 진정으로 착하고 올곧게 이세상을 살고자 했다. 늘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자로 예쁜 딸의 아빠로 그리고 좋은 후배로 선배로 친구로..

김광석 노래의 핵심은 사랑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등의 그룹을 거쳐 모두 6장의 독집앨범을 남겼다. 1989년에 '기다려줘'가 수록된 1집음반을 시작으로 '사랑했지만'이 수록된 2집이 1991년.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이 1992년에, 그리고 '일어나'가 수록된 마지막 앨범4집이 1994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1993년에 자신의 곡과 다른 가수의 곡을 리바이벌한 [다시부르기1]이 1993년에,[다시부르기2]가 1995년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김광석의 음악여정은 [노찾사]와 [동물원]의 그룹시절, 그리고 4장의 독집앨범 그리고 2장의 다시부르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노찾사]나 [동물원]시적은 김광석 스스로 나이로나 음악적 연륜으로나 자신의 음악의 형성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찾사]라는 그룹의 성격이 가지는 한계, 그리고 결국 아마추어적 성격을 버릴 수 없는 [동물원]이라는 그룹을 나와서 솔로 즉 전업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는 행위부터가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1집에서는 10곡의 수록곡중 6곡의 자작곡을 싣고 있는데 보컬(창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김광석 고유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정립이 아직 확고 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는 편곡을 맡은 연석원의 영향이 이 음반에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집에서는 연주곡1곡과 이장수가 작사한 '슬픈노래'에 곡을 붙인것 이외에 나머지 8곡을 모두 다른 작곡가의 곡을 수록했다. 이 때부터 김광석 고유의 음악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조동익이 편곡에 가세함으로서 1집보다 훨씬 더 그의 노래를 심도있게 그려낸다. 그러나 김형석이 대중적인 편곡으로 만든 '사랑했지만'이나 '사랑이라는 이유로'같은 곡들은 훗날 김광석의 노래와는 음악적 스타일의 측면에서 구별된다.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부터는 김광석 스스로 전적으로 앨범을 프로듀서하는 본격적인 김광석 음악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다. 오래전에 써두었다가 3집에서야 수록한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를 포함 '행복의 문'등을 수록,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발표한 앨범이다.

그리고 '일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수록된 4집은 이제 담담히 희망과 좌절을 관조하며 삶을 노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본격적인 포크, 컨트리적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하는 4집음반과 다시부르기 1.2집은 예전 앨범과 달리 김광석 고유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앨범들이기도 하다. 특히 다시부르기 2는 경지에 이른듯한 보컬과 포크와 컨트리 혹은 블루스의 흔적까지 엿보이는 음악적 성숙도가 깊은 앨범이다. 선곡에 있어서는 다시부르기 1이 동물원시절의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나 노찾사 시절의 '광야에서', '그루터기'등 자신의 예전곡들을 중심으로 했다면, 다시부르기 2에서는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그 생명을 아직 잃지 않는 곡인, 한국 포크의 정신이 담겨진 '바람과 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등의 노래를 과감히 리바이벌하여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방향의 확고한 설정과 더불어 앞으로의 새로운 영역과 음악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큰음악적 변화기의 단계에 다다른 상태를 보여주었다.

김광석은 생리적으로 포크적 성향을 많이 가진 음악인이었다. 그의 음악자체가 통기타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점에서 자연스레 그의 음악이 포크에 가까울 수 있는 점도 있지만, 김광석의 심성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국화된 장르 즉 70년대 김민기, 조동진, 한대수 등의 포크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포크적 성향위에 김광석은 늘 컨트리와 블루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포크음악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메세지송의 전유물이었다면, 김광석은 자신의 음악적 심화를 컨트리나 블루스 특히 '블루 그래스'나 '힐리빌리'등의 음악에서 찾으려 했다. (생전에 내쉬빌에 처음으로 다녀온 뒤 컨트리 풍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기억도 새롭기만 하다.) 물론 김광석의 음악감상의 폭은 재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음악적 방향은 컨트리나 블루스였을 것이다. 그것을 예시한 음반이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된 다시부르기2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음악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의 주제는 늘 사랑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그다지 원만히 대해주지 않았고, 그는 늘 처절한 사랑의 아픔으로 속을 삭였다. 그리고 노래로 표현했다. [잊음]에 대한 그의 열망은 1집에 '내꿈', '슬픈 우연'에서, 2집의 '너 하나뿐임을', '슬픈노래', 3집의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행복의 문'으로 그리고 4집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자유롭게'등 직접 곡을 쓰거나 가사를 붙힌 곡들에서 계속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잊음의 고통과 더불어 '나의 노래'나 '일어나'같은 희망찬 노래들을 동시에 부름으로서 그는 포용하고, 이해하고, 결국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을 담고자 했다. 그의 노래에 그리고 그의 가슴에...

행복하세요..

김광석은 방송때나 헤어질때나 그리고 사인을 할때에 늘 쭈글쭈글 웃으며 '행복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얼마나 그가 행복에 대해 갈망했으면 그다지도 외쳤을까. 그는 늘 진솔하게 인생을 살고자 했고, 무엇보다 솔직한 삶을 노래하고 노래를 통해 삶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힘의 원천이 자신의 노래로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그 무엇이 그의 노래로도 치유될 수 없었는지..

김광석은 무척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슬픈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는지...김광석은 마치 그의 인생처럼이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객이었다.

2.2.13 # 광석아 : 박학기[ | ]

광석아..
오랜만에 내 방 책상위에 앉았다.
컴퓨터에도... 악기위에도..나의 한가로움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고..
1월 22일. 오늘이 너의 생일인데
같이 밥먹고 술 마시고 당구도 쳐야 하는데...
벌써 16일이 지났구나
문득 니가 없음에 익숙해져가는 나를 발견하며...
그게 서운하고... 미안하고... 또 허무해...
너의 그 주름진 웃음... 파계승 같다던 짧아진 머리...
독수리 발톱같던 오른손톱...쳐진 어깨...
흙 내음나던 목소리... 휘적이던 걸음...
내 무딘 기억력이 얼마동안이나 잡아둘 수있을런지
몇일전 내꿈에 찾아온 네 모습
너의 맨발이 시려 보였어. 그 파란 트레이닝 바지도.
무슨말을 하려 했는지...
연극 같았던 너의 마지막 모습. 이제야 새삼 네가 이 곳에 없음이 느껴져.
부디 좋은 곳에 있길...

1996년 1월 22일 새벽 4시 47분
- 학기가 -

2.2.14 # 오랜 날들이 지난뒤에도... : 백창우[ | ]

그대, 무엇을 꿈꾸었기에
어느 하늘을 그리워했기에
아직 다 부르지 못한 노래 남겨두고
홀로 먼길을 떠나는가.
다시 날이 밝고 모든 것들이 깨어나는데
그대는 지금 어느 구석진 자리에 쓸쓸히 서서
무얼 바라보고 있는가.
고운 희망의 별이었는데
이 형편없이 망가진 인간의 세상에서
그대의 노래는 깜깜어둠속에 길을 내는
그런 희망의 별이었는데
그댄 말없이 길을 나서고
우린 여기 추운 땅에 남아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거냐
도대체 무얼 노래해야 하는 거냐
알것같아, 그대 말하고 싶었던 게 무언지
그대 온 몸으로 노래하던 그 까닭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 청춘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들려 들릴거야
그대의 기타소리
대숲의 바람처럼 몸을 돌아나오던
그 하모니카 소리
우리 고단한 삶에 지쳐 비틀거릴 때마다
우리들 마음속에 소용돌이칠 그대의 노래
우리들 팍팍한 마음속에 뜨겁게
울려날 그대의 목소리
어느날 영롱한 나팔꽃처럼
환히 피어날 그대의 노래
그대는 그렇게 우리들 탁한 삶의 한켠에
해맑은 아침으로 따뜻한 햇볕으로
남아있을테지
다시 겨울이 오고, 오랜 날들이 지난뒤에도

- 백 창 우 -

2.2.15 # 글모음[ | ]

그는 영원한 서른셋의 나이로 우리곁에 남았다. 이 노래로 인해 우리는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본다. 20대에 가졌던 가능성과 기대를 접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해야하는 서른 즈음... 그러나, 그 답답함 속에서도 그는 30대 역시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았음을 노래하기위해 '일어나'라고 외치기도 했다. 꿈에 다다르기 위해, 서른을 넘기면서도 기타를 붙잡고 성실하게 걸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고 노래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별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 우리는 이 노래를 들으며 그의 고단했던 행군을 다독여 줄 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영원한 서른셋의 나이로 우리곁에서 웃으며 노래하고 있는 그를 본다.

'거리에서'는 '가수 김광석'을 우리에게 선물한 노래다. 그때만해도, '김광석'이라는 이름보다 '거리에서'라는 노래제목을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로, '가수 김광석'은 이 노래로 인해 우리앞에 모습을 보인것이다. '거리에서'는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김광석'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의 영혼이 만져지는... 이것이,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그의 앞으로 모이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이 노래는 그에게 소중하다. 그러나, 그는 이 노래를 부르기 꺼려했다. 가사말처럼 될것만 같아서...

얼마전 우리는, 어두운 무대 위에서 진통처럼 '그날들'을 부르던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진통처럼 이 노래를 부른다.

82년 대학 1학년, 통기타 하나 들고 라이브 까페에서 노래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즐겨 부르던 노래다. 나의 눈물이 네 뒷모습으로 가득 고여도 나는 너를 떠날 수는 없을것만 같아...

"지금의 노래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백창우씨가 만든곡이다.
당시의 젊은 나에게 이 노래는 의미가 있었다.
이런 사랑을 한번 해봤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내 사랑의 전형이었다고 할까?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때 그래봤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지금의 내 생활은 그때의 순수함에서 이제 많이 벗어나 있다.
내가 책임져야하는 가족이 생긴 후부터 잘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잘살고 싶다.
세상에 언제나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많다.
과거로 치부하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추억속의 장소, 물건, 사랑 등등...
때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와 함께 그때의 이야기를 -첫사랑의 추억도 좋고 헤어짐의 아픔을 간직한 장소라고- 해보고 싶다.
어쩔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전부 한꺼번에 없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슬프다. 아! 모르겠다."
"이등병의 편지를 처음 들은것은 1990년 겨레의 노래 공연준비할 때이다.
처음 이곡을 부를때는 어머님과 돌아가신 큰형님 생각이 났었다.
국민학교 5학년때 11살 차이나던 큰형님이 군대에 가셨다.
일주일쯤 지난후에 누런 봉투에 싸여 형님이 입고 가셨던 옷가지들이 집으로 배달되었고,
어머니께서 빨래하시며 우시던 모습이 생각났고,
1980년 10월 결혼식을 20일 남겨두고 돌아가신 큰형님 생각이 났다.
그 당시 형님은 육군 대위이셨다.
이등병의 편지는 나의 훈련소시절 생각보다는 어머님, 형님생각에 노래를 부르면서도 울먹거린적이 여러번 있었다.
형님 돌아가신 후로 김치맛이 변할 정도로 맘상하신 어머님께 나의 노래를 드리고 싶다."
"며칠전, 어느 모임에 갔습니다.
그 모임에 참가하신 칠순 할머니께서 24년 생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
비오는 어느날 우산도 없이 장보고 오는 길에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내리는 비도 잊은 채 서서 들으셨답니다.
그 노래가 '사랑했지만' 이라고 하시더군요.
감정은 나이와는 상관없다라고들 하면서도, 할머니나 부모님께서는 날 이해하지 못하실거라고
무의식중에 단정짓고 잘 이야기 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지요. 저 또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시도하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수동적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그 할머니의 잊었던 감정을 되살려준 노래이기에 조금 더 열심히 부르고 좋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않은 날, 붉게 물들어 내일을 기약하는 저녁 노을은 그저 아쉬움입니다.
익숙함으로 쉽게 인정해버린 일상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시 뒤집어 보고 내 걸어온 길들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나날들, 내 뒷모습을 말 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던 세상살이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부대끼는 가슴이 아립니다.
읽다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내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듯
불러왔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번 부끄럽습니다.
지난 하루의 반성과 내일을 기약하며 쓰는 일기처럼 되돌아 보고 다시 일어나 가야할 길을 미련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하다말고 문득 바라본 거울속의 내가 낯설어진 아침,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날의 꿈이여. 1993. 2. 6." (다시부르기 1에서...)

그가 동물원의 조랑말이 아닌, 그의 노래를 하고자 허허벌판에 우뚝 선 조랑말이 되어 펴낸 1집에 담겨 있는 곡이다. 이때가 그에게 있어 가장 힘든 시기였다. 모든것을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해오다가 혼자 서려는 것이 암담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곡 만드는 일부터 홍보와 매니저 일까지, 모든게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밤낮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의 꿈, 노래를 위해...

"이 노래는 아마 방송에서는 듣기 힘들겁니다. 중간의 가사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어요."
"음악을 통해 제가 항상 꿈꾸는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팬들과도 항상 새롭게 만나고 싶고 노래에서도 매일매일 새로움이 묻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새로움의 열망, 밑바닥에서 항상 변하지 않는 나만의 목소리, 색깔이 남아서 빛나고 있길 동시에 꿈꿉니다.
변화를 꿈꾸는 것과 변하지 않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를 간직하고 싶다는 열망은 이율배반적인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공생공존의 관계에 있다는게 저의 믿음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그 본질의 빛이 더욱 밝게 빛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중심을 잃지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때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선씨가 만들고 취입했던 곡이죠. 10년전쯤에 좋아했던 노래였습니다. 그녀는 참 착했어요.
그가 아무리 잘못해도 웃어주고 약속시간에 늦게 나와도 미소로 맞아주고,
그가 그녀에게 한눈을 팔아도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러다가 참다참다 못해 그녀가 처음으로 울어버리죠.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요.
한번 울고 간거죠. 그러게 있을때 잘하지, 왜 가고나서 가슴이 온통 무너진다는 둥 하늘이 캄캄하다는 둥 하는지...
여러분 모두 있을때 잘 하세요."


"89년 쯤으로 기억된다. 마포대교를 건너는 중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절절해서 나도 모르는새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 김목경씨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라는 노래였다."

난 책을 접어 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이제 우리는 그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싶다. 이제는 맑아진 저 하늘에...

우리는 이 노래에서, 언제나 다가오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하는 순간에는 세상 모든것들이 아름답게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 모든 환상이 깨지면서 현실이 느껴질때가 이별의 순간이다. 다만, 뒤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이별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그 모습을 인정하는 순간이 이별이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이별이란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일거라고 말한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이런 사실들을 깨닫기 전에 이별에 대해 마냥 가슴 아파하고만 있을때 만든 노래다. 이별을 준비하는 그의 긴 시간이 느껴진다.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늘 현실은 과장 됨 없이 솔직하다.
너무나 주관적인 기대로 날 지탱해 주던것이 무너지던 날
(언제나 수박 꿈을 잘 꾸는 여인에게) 난 사랑을 잃고 사랑을 얻었다.
내 나이 서른 둘, 스폰지 처럼 푸석푸석 해진 나의 세상맞이 날 인정함으로 또 한발 내 딛어 본다.
내 나이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이제 "ㄴ"자 붙은 나이가 된 내 아내 꽃잎위의 이슬같은
그리고 나와 주파수가 맞아 떨어진 사람들 수박 꿈을 잘 꾸는 사람들에게..." (4집 머릿말에서)
"제 노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이야기, 아파하는 이야기, 그리워하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들을 노래로 담아냅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은 류근이라는 글씨 쓰고 사는 괜찮은 사람이 가사를 쓰고 김광석이 곡을 썼다. 사랑은 이런것이다 라고 말할 순 없지만, 사랑은 많은 부분 인정해야하고, 사랑은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것. 아픔으로 더욱 사랑하게 되고, 아픔으로 더욱 괴로운것, 뭐 이런게 사랑이 아닐런지... 아픈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사실은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서른즈음에 느끼는 스스로의 한계나 답답함, 생활이나 삶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허무를 인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속의 자잘한 재미나 가벼움이 소중하다고 느끼며
재미나고 즐겁게 열심히 살아가자는 뜻으로 만든 곡입니다.
한 1년전에 제 스스로 여러가지 힘든일이 한꺼번에 불규칙하게 터졌을때, 이런 생각을 했죠.
'인생은 수영장과 같다. 이렇게 힘든 일이 자꾸만 날 가라앉게 만든다면 그래 가라앉아보자.
내려가다보면 바닥은 나올것이고 바닥이 나오면 차고올라 수면 위로 떠 오를것이다.'
하지만 가라앉으면 앉을수록 그 끝은 더더욱 깊게만 느껴지지만
다시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할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죠.
그래 포기하자 이선에서 만족해야한다 생각하고 떠오르기로 했죠.
삶은 일정부분 만족하며 일정부분 아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노래로 만든것이 '일어나' 이죠."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것입니다.
누구나에게 어떤이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랑을 인정 받을수 있어야 하는게 바로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가 생각했던 여행은 삶의 의미였다. 새로운 것들과 그 안에서의 새로운 나를 꿈꾸며 길을 떠나고, 갑자기 불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하여도 기대감으로 인해 보이지도 않는 길끝을 향해 걸어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나날들을 노래하였다. 마흔이 되면 할리데이비슨 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것이 꿈이었던 그는, '때론 이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햇살이 눈부신 곳 그곳으로...

1996년 1월 돌연한 죽음으로 많은 음악팬들을 안타깝게했던 故 김광석의 추모앨범이 그의 1 주기 즈음인 1996년 12월 (주)문화뮤직.콤에서 출반(발매 1997년 1월) 되었다. 이 앨범에는 그의 미 발표곡인 "부치지 않은 편지"를 비롯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들이 부른 그의 히트곡이 수록되어있다.

故 김광석의 유작이자 미발표곡인 "부치지 않은 편지"는 시인 정호승의 시에 노래마을의 백창우가 멜로디를 붙인 곡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전 녹음한,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이다. 故 김광석은 지난해 말 백창우의 기획아래 [노래로 만나는 시] (시를 대중가요화 한 음반) 앨범을 계획하였다. 이 곡은 그 앨범의 수록 예정곡 중 첫 녹음곡이었으나 아쉽게도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의 곡이여서 음반화 작업을 미루워왔다. 하지만 그를 기리는 많은 음악인과 팬들을 위해 음반화하가로 결정하고 그의 1주기를 즈음해 (주)문화뮤직.콤을 통해 출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음반에는 그의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들인 박학기, 안치환, 권진원을 비롯해 윤도현, 이정렬, 김현성 등 그에게서 많은 음악적 영향을 받은 후배 뮤지션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앨범에서 그들은 故 김광석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불러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였다.

故 김광석은 80년대 중반 노래운동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창단 멤버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동물원' 활동을 통해 그의 음악적 역량의 발휘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했으며, 89년 솔로로 전향 ,<나의 노래>, 등 맑은 서정의 세계와 힘 있는 노래들로 고른 연령층의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또한 故 김광석은 탁월한 가창력과 열정적인 무대 매너로 라이브 가수의 대표로 지칭되었으며, 1995년 8월 라이브 콘서트 1천회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국내 라이브 문화가 활기를 띠는데 크게 기여를 했으며, 소극장 공연 사상 3만명이라는 최대 관객동원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故 김광석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70년대 모던 포크를 게승한 90년대의 마지막 싱어"라는 평가를 받았던 9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포크 싱어이다.

돌연한 그의 죽음을 암시라도 하듯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의 "부치지 않은 편지"에서 그의 음악적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3 # 게시판에 올린 글들[ | ]

[6] 제목 : 문양수님 보세요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2 20:12 읽음 : 70 관련자료 없음

환경사랑이라..
반갑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운동중에 맑고 향기롭게 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어쩌면 비슷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군요
행복하시길 빕니다.

[7] 제목 : 강상규씨 ** 그 날들 **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2 20:23 읽음 : 69 관련자료 없음

너무 아름다운 화면이더군요

그 노래는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그 날들 입니다. 창기가 만들고 가사도 쓰고 했지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는 제가 만든 곡이죠

저는 그처럼 아름답게 쓰지 못하고 이러게 간단하게
애기하지만 ...

가슴이 따뜻해지는 얘기들을 더 많이 나눌 수 있도록....

그럼 안녕

[8] 제목 : 수진양 보세요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2 20:31 읽음 : 67 관련자료 없음

수진양 ID가 예쁘네요
물론 이름도 예쁘구요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익숙하죠
저 딸이 하나 있어요!
서연이가 아빠 노래하는 걸 좋아하죠

슬픔은 시간이 지나가며 조금씩 추억으로 변해갈거라고 생각...

음악을 사랑하게된 나도 어쩌면 음악이 주는 노래가 주는
힘에 빠져 있다고 할까요.
음악을 많이 듣지요
음악을 많이 들으세요
좋아요. 흐~~(요 기호 요거 멋있어요?)

자주 만나요 여기서라도

[9] 제목 : 윤희님 반갑습니다.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2 20:38 읽음 : 58 관련자료 없음

거기가 삼랑진인가요?
저는 고향이 대굽니다.

서울이랑 대구랑 왔다 갔다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죠
학기랑 어렸을 때 같이 놀았다고 학기가 그러더군요
가수 박학기 알죠?

지금은 학기랑 매우 가까워져서 같이 공연도 하고 그럽니다.
번개전업사집 아들 나와 모란양장점집 조카 박학기.
재미있는 인연들이죠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자탕 알아요
우리 집앞에 감자탕 잘하는 집이 있어요
엣날 기차가 지나다니던 철로위에 이층집이라고 있지요
물론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죠.

다시 만나요.
안녕
[10] 제목 : 종현님도 행복하세요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2 20:46 읽음 : 62 관련자료 없음

인연이란 그런건가 봅니다.
우연히 얘기치 않게 만나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는 우연들 말입니다.

컴퓨터를 잘하지는 않습?"다.
필요해서 한글을 조금 쓰는 정도지요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밝지만은 않았죠??

그런 세월을 넘어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어제는 집에 꽃을 심었지요.
잠시지만 행복했지요.
앞으로 꽃이 피어나고 자라고 지더라도
그것이 나와 우리 식구들을 행복하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꽃은 아름답지요
꽃처럼 어여쁘게 세상이 되었으면...

여기서라도 자주 만나게 되길 빌고 언젠가
정말 감자탕에 소주잔이라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13] 제목 : 수진씨 봐요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3 10:46 읽음 : 87 관련자료 없음

수진씨 반갑군요

자주 뵈요

[25] 제목 : 박영근씨 서툴어서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5 01:43 읽음 : 58 관련자료 없음

인사는들어 오는대 컴은 서투르고 대답 이렇게하면되나요

[27] 제목 : 영근씨 에게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5 01:53 읽음 : 57 관련자료 있음(TL)

감자탕 살수 있어요

[29] 제목 : 또치씨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5 01:58 읽음 : 85 관련자료 없음

자세히알려주세요
[39] 제목 : [a] 답장 이라기엔 좀 쑥스럽지만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6 20:51 읽음 : 95 관련자료 없음

모다 안녕~~~~하시죠?
6/6일 아침일찍 일어나서 밥도안먹고 국립묘지엘갔죠
큰 형님뵈러 현충일때마다 차때문에 고생이죠
반포에 사는 아는분 집앞에 주차하고 걸어서 20분
도착하니 11시30분
친지들은 이미 와 계시고
서둘러 술한잔 올리고 앉아
형님얘기,아이들얘기
매형과 청주 한병푸고 땡볕아래 잠자고나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서
지금 거울을보니 올여름
썬텐은 잊고 살기로했네

[47] 제목 : 이등병의 병장면회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09 23:37 읽음 : 64 관련자료 있음(TL)

제가 이등병시절 (평생 이등병 이지만)
동물원 같이하던 박경찬이 면회 갔던 기억이 남니다.
수박 두통 사주고 담배도 한보루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뒷모습은
아직도 생생 합니다
무엇인가 자꾸 뒤를 잡듯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친구 면회 한번 가 주세요 혼자서.

[53] 제목 : [답] 혜화동은요....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12 23:32 읽음 : 71 관련자료 있음(TL)

혜화동은 김창기씨가 88년 여름 친구가 이민갈때 느낀것 들을
곡으로 쓴겁니다.노래도 직접부르고 김광석이는
하모니카 불고 코러스 했지요 참 기타도 쳤다
6년전이라 혼동되네요
저도 좋아하는 좋은곡이지요

[63] 제목 : [답]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19 15:49 읽음 : 87 관련자료 있음(TL)

말하자면 공연은 마당이고 tv는 인형집이지요
내가노는걸 그저보고 공감하고 잘되면 하나가되는게
공연 이라고 한다면
tv는 나자신은 없고 내가 인형처럼 보여질 뿐 인겁니다
pr을 위해선 tv가 좋은 수단 이지만
기분 좋은 자리라곤 할 수 없지요.

[72] 제목 : [또치씨]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6/26 23:27 읽음 : 77 관련자료 없음

뭐 그사람도 또치씰 좋아 하고 있는것 같은데요
잘해보세요 사랑은 표현해야 서로서로 를
아껴 줄 수 있는 거니까

[90] 제목 : 저 잘 다녀 왔습니다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7/11 22:59 읽음 : 89 관련자료 없음

12시간 만에 도착 했어요 발리에서 자카르타 싱가포르 서울
즐겁고 한가롭게 휴가 잘~~~~다녀 와셔여 고맙습니다.~~~~~

[133] 제목 : 김 광석 팬 클럽 가입 안내
올린이 : 김광석 (김광석 ) 95/08/02 01:05 읽음 : 96 관련자료 있음(TL)

문의 전화
337 6320 둥근소리 사무실로 문의 하세요
야유회, 김광석 공연 할인 ,회원 모임의날,등여러가지
행사가 준비중 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
붉게 물들어 내일을 기약하는 저녁 노을은 그저 아쉬움입니다.
익숙함으로 쉽게 인정해버린 일상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시 뒤집어 보고 내 걸어온 길들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나날들.
내 뒷보습을 말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던 세상살이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부대끼는 가슴이 아립니다.
읽다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내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듯
불러왔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번 부끄럽습니다.
지난 하루의 반성과 내일을 기약하며 쓰는 일기처럼 되돌아 보
고 다시일어나 가야할 길을 미련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하다말고 문득 낯설어진 아침.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1993.2.6.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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