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Gabriel/전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로봇: 자동으로 텍스트 교체 (-음악분류 +분류:대중음악))
109번째 줄: 109번째 줄:


한편 그는 새로운 록 오페라 '모조'(Mozo)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Down The Dolce Vita', 'Here Comes The Flood', 'On The Air', 'Exposure', 'Red Rain', 'That Voice Again' 등 당시 작곡된 곡들은 이후 그의 솔로 앨범들에 다양하게 분산되어 수록되었다. 그는 75년 당시 인터뷰를 통해 늦어도 76년 안에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려는 계획을 표명하고 있는데, 실제 그의 첫 솔로 앨범이 발매된 것은 77년이었다.
한편 그는 새로운 록 오페라 '모조'(Mozo)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Down The Dolce Vita', 'Here Comes The Flood', 'On The Air', 'Exposure', 'Red Rain', 'That Voice Again' 등 당시 작곡된 곡들은 이후 그의 솔로 앨범들에 다양하게 분산되어 수록되었다. 그는 75년 당시 인터뷰를 통해 늦어도 76년 안에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려는 계획을 표명하고 있는데, 실제 그의 첫 솔로 앨범이 발매된 것은 77년이었다.
== # 1977:  - 캐나다인 프로듀서 밥 에즈린과의 작업, 음악적 다변화의 모색 ==
http://images.amazon.com/images/P/B000065VBB.01.LZZZZZZZ.jpg
1977년 2월 스물 일곱 살을 맞은 게이브리얼은 애틀랜틱 산하의 앗코(Atco) 레이블에서 자신의 첫 솔로 작 <Peter Gabriel>를 발표했다(미국의 배급은 메이저 레이블인 애틀랜틱이 맡았다). 앨범은 캐나다의 프로듀서 밥 에즈린(Bob Ezrin)에 의해 제작되었다. 당시 에즈린 역시 게이브리얼과 동갑내기인 약관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앨리스 쿠퍼, 키스 등 거물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제작하는 등 실력 있는 중견 프로듀서로 인정받고 있었다(이후 79년 에즈린은 저 유명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앨범에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에도 에즈린은 겨우 29세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은 77년 2월 게이브리얼의 솔로 1집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와 LP를 플레이어에 걸고 그 안에 담긴 음악을 듣는 순간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앨범을 여는 첫 곡 'Moribund B rgermeister'는 물론 수록곡들의 전체적 기조에서 그것은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이라기보다는 한 장의 리듬 앤 블루스 + 록 앨범이었던 것이다. 게이브리얼은 당시의 가장 기본적인 제작 방침을 후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를 '피터 게이브리얼'이라는 한 사람의 솔로 싱어라기보다는 '기괴한 분장과 의상을 입고 노래를 했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제너시스의 이전 리드 싱어'로 바라보았어요. 당시 저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 특이한 복장과 분장이 아니라 - 음악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었고, 또 무엇보다도 제너시스의 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하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론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프로그레시브와는 거리가 있는) 보다 미국적 방식의 록 음악 제작자를 맞아들여 제너시스와의 음악적 차별화를 꾀한다. 둘째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음악적 지향으로 자신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미국적 리듬 앤 블루스 + 록적 감성의 기타를 앨범의 전면에 배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선택은 미국 상륙을 본격적으로 꿈꾸었던 70년대 초 이후 그가 행해왔던 일관된 음악적 지향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면에서도 앨범의 중심 전략은 이미 단순한 제너시스와의 차별화를 넘어선다. 우리는 이를 일단 '미국 주류 취향의 젊은 제작자를 통한, 미국적 록, 리듬 앤 블루스 감성의 강조'로 정리해 볼 수 있다 - 한편 이런 기본 전략에 따라 앨범 역시 밥 에즈린이 선택한 캐나다 토론토의 '사운드스테이지'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게이브리얼이 이전의 왕성한 '실험' 정신을 완전히 상실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게이브리얼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1집은 위에 적은 두 가지 기본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미 충분히 '실험적'이다(물론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 탈퇴 이후의 솔로 활동에서도 여전히 이전 제너시스 취향의 곡들을 얼마든지 '재생산'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존경받는 거장 작가'로서의 게이브리얼은 물론, 그가 당시까지 누리고 있던 나름의 '대중적 인기'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주, 장난스러운 보컬 등이 등장하는 'Excuse Me', 'Down The Dolce Vita' 같은 곡들은 기존의 어떤 장르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게이브리얼적 유모어 감각'이 넘치는 독특한 곡이다.
본 작의 음악적 핵심은 실상 - 앨범이 자신이 구체적 방법론으로 선택한 리듬 앤 블루스적 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러한 지향의 기저에 깔려있는 실험과 모색의 정신, 즉 이전까지의 정통 영국 프로그레시브적 감성을 뛰어넘으려는 '음악적 다변화 실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는 1집의 리듬 앤 블루스적 감성을 포기한 다음 해의 2집에 의해서도 분명히 증명된다).
한편 이러한 '미국적 감성의 도입'은 그 자신이 이전부터 꾸준히 추구해오던 보다 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상업적) 감각의 획득을 위한 노력과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도 다시 한 번 앨범의 음악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앨범 '소유주'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아니라, 그러한 기획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고 현실화한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제작자' 밥 에즈린이다. 한편 앨범의 사운드는 기술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무척 뛰어난 성과를 들려주는데 이 또한 명백히 밥 에즈린의 공로이다.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다. 1집에 세션 기타리스트로 참여했으며, 이후 2집의 제작을 맡게되는 로버트 프립은 보다 솔직하게 1집 녹음 당시의 상황을 밝히고 있다: "3일을 일해 보고 나니까 전 저의 참여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떠나버리고 싶지 않았다는 거예요. 전 진퇴양난에 빠져있는(ravaged) 제 친구를 버리고 혼자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게이브리얼은 당시까지 앨범 제작자로서의 경험은 물론 아직 '음악성 있는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권위조차도 인정받지 못한 단지 유망한 솔로 싱어에 불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레코드사와 게이브리얼의 위임을 받은 제작자 밥 에즈린은 '전권'을 행사했으나, 결과는 두 사람 모두가 불만을 느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들 사이의 생경한 결합으로 나타났다. 사실 앨범의 소리와 성향은 많은 면에서 에즈린이 제작한 70년대 중후반 키스와 앨리스 쿠퍼의 사운드를 연상시킨다. 이는 어느 모로 보나 게이브리얼의 목소리와 성향에 그리 어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특히 앨범의 리드하는 두 악기, 드럼과 기타 사운드가 어울리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이후 게이브리얼의 작업들, 특히 80년 3집 이후 그가 자신의 제 빛깔을 찾은 이후의 작업들과 비교해, 그에 따르는 '사후적 결과론'으로서 77년 당시의 이 앨범을 비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80년의 성과란 77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심지어 게이브리얼 자신조차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에즈린을 선택한 게이브리얼에게 그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이처럼 1집은 게이브리얼보다는 에즈린의 공과(功過)가 겹쳐져 드러나는 앨범이다.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주목할 만한 곡은 첫 싱글 'Solsbury Hill', 'Humdrum' 그리고 단연 'Here Comes The Flood'이다. 실상 앨범을 들어본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겠지만 우선 자신이 자라난 워킹 인근의 솔즈베리 힐의 어린 시절을 노래하고 있는 'Solsbury Hill'은 음악적인 면에서 앨범의 전체적 흐름에서 이탈하는 곡이다(이 곡의 비디오 클립에는 그의 부모와 두 딸이 등장한다). 심플한 어쿠스틱 기타와 드럼, 신서사이저가 리드하는 이 상쾌한 팝적 감각의 곡은 원래 앨범 수록곡 리스트에 속하지 못했으나 최종 순간에, 그것도 첫 싱글로 실리게 되었다(아마도 레코드사의 강권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하튼 이 곡은 차트에서 영국 13위, 미국 68위를 기록하며 게이브리얼의 솔로 데뷔를 성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이는 당시까지 제너시스의 곡들이 기록했던 순위와 비교해 볼 때도 결코 '나쁘지 않은' 순위였다. 그러나 두 번째 싱글 'Modern Love'는 영미 어느 쪽 차트에도 전혀 진입하지 못했다. 한편 앨범 역시 영국 7위, 미국 38위를 기록해 '무난한'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곡들을 '이 곡들을 제외한 앨범의 모든 곡들'이라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머지 곡들이 '리듬 앤 블루스 + 록'의 감성이 주도하는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고 있음에 비해, 이 곡들은 실제로 이러한 앨범의 일관적 흐름에 대한 '이질적' 요소들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세 곡은 다른 곡들에 비해 게이브리얼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노래하는 곡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본 작에서 이후 살아남게 될 요소는 바로 이러한 앨범의 '이질적 + 정신적' 요소들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해 본다면, 'Solsbury Hill'의 팝적 감수성과 'Here Comes The Flood'의 새로운 프로그레시브적 감성이 그러한 요소들이다. 특히 '영혼에 불어닥친 홍수'를 의미하는 'Here Comes The Flood'는 이후 최근까지 그의 작업을 면면히 관통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영적 위기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평화의 갈구'라는 테마가 최초로 나타난 곡이었다.
한편 앨범은 그의 첫 솔로 앨범답게 여러 면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그의 앨범들을 특징지울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앨범은 마틴 홀(Martin Hall)과의 공동 명의로 된 'Excuse Me'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곡들로 채워져 있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우선은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게이브리얼로서는 최우선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는 가사가 실려 있지 않은 데, 다음 해 2집 발표시 게이브리얼은 이를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 1집을 우선 좀 심플하게 보이고 싶었고, 때론 가사를 싣는 것이 좀 '잘 난 척' 하는 것 같다는 기분도 있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를 쓰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제 팬들이 가사를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명백히 제 실수였지요. 이 번 2집에는 영어 가사는 물론 싣고, 또 가능하면 (각 나라 라이선스에) 번역문도 실어보려고 해요."
게이브리얼은 이후 자국어 중심주의, 혹은 영어 중심주의를 벗어나 보다 '제3자적 입장에서' 자신의 팬들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 3집, 4집 앨범을 아예 독어로 다시 한 번 취입한 사실, 2집 이후 이제까지 발표된 그의 모든 앨범에는 가사가 실려있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앨범의 전체적 이미지 측면에서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 팀 힙그노시스의 뛰어난 커버이다(이에 대해서는 본 지에 실린 게이브리얼의 커버 아트에 대한 임근영의 글을 참조할 것). 더구나 특이한 것은 그의 앨범에 별 다른 제목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실려 있는 앨범의 앞 커버에는 왼쪽 윗 부분에 그의 이름만이 작은 글씨로 쓰여있다. 이는 그의 4집 앨범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1-4집에 이르는 그의 앨범들의 제목은 모두 동일하게 <Peter Gabriel>이다 - 나는 이 글에서 편의상 관례를 따라 이를 각기 , , ,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물론 게이브리얼의 의도적인 선택인데, 그 자신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제 아이디어는 앨범을 일 년에 한 번씩 간행되는 일종의 음악 잡지처럼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제 생각엔 대부분의 그룹들이 자기들의 새 앨범이 '깜짝 놀랄 만큼 새롭고 다른' 앨범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걸로 보였거든요. 꼭 뭐, 다른 제품들하고 별로 다른 것도 없는데, 항상 그렇게 보이도록 광고하는 세제 선전들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전 제 앨범들을 전부 다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들려고 마음먹었지요."
두 번째로 특기할 만한 요소는 그가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위해 구성한 백 밴드와 게스트 뮤지션들의 면면에 있다. 77년 당시 '피터 게이브리얼 밴드'의 기본 진영은 기타의 스티브 헌터(Steve Hunter), 베이스의 토니 레빈(Tony Levin), 키보드/신서사이저의 조젭 치로프스키(Jozef Chirowski), 래리 패스트(Larry Fast), 드럼의 앨런 슈워츠버그(Allan Schwartzberg), 퍼커션의 짐 멜렌(Jim Maelen) 등이다. 여기에 게이브리얼이 키보드, 플롯을 종종 연주하고 있으며, 그 외 두 명의 게스트 기타리스트 딕 와그너(Dick Wagner)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특히 언급되어야 할 사람은 82년의 4집 앨범까지 그의 밴드에 머무른 키보드의 패스트, 그리고 폴 사이먼 밴드 등에서 일했던 스튜디오 전문 세션 맨이며 이후 킹 크림즌의 정규 멤버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게이브리얼의 앨범·라이브 등에 참여하고 있는 베이스의 레빈, 당시 킹 크림즌을 해산한 후 다양한 실험을 모색 중이던 기타의 프립 등이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77년 2월 앨범의 발매에 맞추어, 한 달 후인 3월 약 20일간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기'(Expect The Unexpected)라는 역설적 제목으로 자신의 첫 솔로 북미 투어를 실시했다. 우리는 당시의 소중한 공연 실황 부틀렉 <Peter Gabriel - Recorded Live In Cleveland 1977>(Welfare Pig·92)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연주 곡목의 선정이다.
모두 7곡이 수록된 이 부틀렉 중 1집 앨범에 실린 곡은 'Waiting For The Big One', 'Excuse Me', 'Slowburn'의 단 세 곡에 불과하며, 나머지 네 곡 중 두 곡은 마빈 게이(Mavin Gay)의 'Ain't That Piculiar'와 킹크스(The Kinks)의 'All Day And All Of The Night', 나머지 두 곡은 어느 앨범에도 실리지 않은 게이브리얼 작사·작곡의 미발표곡들인 'A Song Without Words', 'Why Don't We'이다 - 행복하게도, 앨범 미수록들을 실어야 값이 올라가는 부틀렉의 '미덕'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관중들의 분위기는 무척 흥분된 듯한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며, 연주 곡목의 주된 기조 역시 리듬 앤 블루스 + 록적 필의 헤비한 기타 사운드가 리드하는 강력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게이브리얼은 이 공연에서도 이전 제너시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곡과 곡 사이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멘트'를 넣고 있다.
한편 같은 해 4월 게이브리얼은 런던 데뷔 공연을 가졌는데 당시 공연에는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로버트 프립이 더스티 로즈(Dusty Roads)라는 가명으로 무대에 드리워진 천막 뒤에서 기타를 연주해 주기도 했다. 그 해 10월까지 게이브리얼은 전 유럽을 순회하는 투어를 계속했으나 결과적으로는 10만 파운드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1977년 말은 바야흐로 '디스코와 펑크의 시대'였던 것이다.


== # 1978:  - 로버트 프립과 피터 게이브리얼의 만남, 또 하나의 실험 ==
== # 1978:  - 로버트 프립과 피터 게이브리얼의 만남, 또 하나의 실험 ==

2018년 4월 27일 (금) 09:24 판

1 피터 게이브리얼 1975-2000

1.1 # 인트로의 인트로

통신 26호입니다.

한 열흘 정도 '무서운~ 독감'에 시달리다가 어제제서야 조금 나아져 다시 학교에 갔다오니, 갈기회 사이트에 어떤 분이 제 글을 읽는데 깨져서 다시 올려달라고 부탁하셨데요. 그래서 엣날에 써두었던 글을 다시 클릭하여 읽고 교정도 보고 하다가 아예 통신으로 올립니다.

이 글은 일단 200년에 출간된 음악 전문 잡지 [뮤지컬 박스] 2호의 특집 '제너시스와 피터 게이브리얼'의 일부로 당시 쓴 것입니다. 잡지는 제가 음악 비평가 친구들과 만든 것이고요 현재는 단행본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정간되었지요. 오랫만에 읽어보니 쑥스럽네요 ... 그래도 문단 나누기와 띄어쓰기, 맞춤법 정도만 빠꾸고 거의 고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나그네' 님께 감사드리고요 ... 여하튼 매우 흥미있는 사람, 흥미있는 글(?)이지만, 관심이 가고 취향이 맞으시면 한번 읽어 보시길 ...

글이 길어서 3개로 나누어 올렸고요 ... 맨 마지막에 관련 사이트, 앨범 사진, 정보 등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올려 두었습니다. 아, 위의 사진은 차례로 본문에 등장하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2집과 3집이지요.

혹 앨범을 듣고 싶으시면 마지막에 링크해 놓은 사이트를 참조하시고요 ... 아니면 동네 레코드 점에서도 아마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없어도 주문하면 가져다 줄꺼고요.

그럼 이만 총총이고요 기안녕입니다 ... 바야흐로 시작되는 본격적 겨울에 감기조심하시고요(아참, 저 멀리 칠레는 계절이 반대지... 그럼 바야흐로 시작될 '무더위' 조심하고...^^)...

2003년 12월 16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허경 드립니다.

1.2 # 인트로

피터 게이브리얼 1975-2000: 음악, 테크놀로지 그리고 휴머니즘의 심미적 결합

  • 들어가며

1975년 5월 피터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를 공식 탈퇴했다.

이때부터 이후 1집 <Peter Gabriel>을 발매하기까지의 약 2년 동안 게이브리얼은 영국 교외의 글래스톤베리(Glastonbury)에 머무르며 재충전의 시기를 갖는다. 당시 그를 만났던 음악 평론가 크리스 웰치에 따르면, 이 때 게이브리얼은 어린 시절 이후 중단했던 피아노 레슨을 새롭게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최근 구상한 록 오페라 (Mozzo)의 아이디어 구상에 골몰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게이브리얼은 당시 토쿄에서 막 개발되었던 소니 비디오 카메라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더욱이 UFO, ESP, 텔레파시 및 공중 부양에 이르는 갖가지 '초과학적인' 신비주의적 사상들을 탐구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이미 이렇게 말했다: '다른 종류의 음악적 하모니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학적 효과를 낳아요.' 더구나 당시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양배추 키우기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음악과 생물학, 초과학적 신비주의 사상과 최첨단 과학 기술, 양배추 키우기와 소니 비디오 카메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신화와 동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노래하던 게이브리얼은 이제 또 하나의 신비주의적 구루(guru)가 되어버린 것일까? 역시 피터 게이브리얼은 영국 음악계의 괴짜이자, 기인인 것일까?

이 글은 우리 나라에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피터 게이브리얼과 그의 음악 세계를 다루는 최초의 보고서이다.

1.3 # 게이브리얼이 부모로부터 받은 두 가지 주요한 관심 - 음악과 테크놀로지

어린 시절 게이브리얼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두 가지 주요한 관심은 음악과 테크놀로지라 말할 수 있다. 피터 게이브리얼은 1950년 2월 13일 영국 서레이(Surrey)에서 태어났다. 게이브리얼의 어머니 이렌(Irene)은 음악적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영국인들에게 <The Proms>라고 잘 알려진 야외 콘서트 <The Promenade Concerts>를 지휘한 것으로 특히 유명한 헨리 우드 경(Sir Henry Wood)과 함께 노래했으며, 그녀의 다른 네 자매 역시 모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다섯 자매는 자주 게이브리얼의 집에 모여 각기 한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린 게이브리얼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랜드 피아노와 이모들에 둘러싸여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게이브리얼은 이 이모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 랠프 게이브리얼(Ralph Gabriel)은 목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런던 대학(University Of London)을 졸업한 후 전기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는 레이더 비행 시뮬레이터 개발 작업에 참여했고, 후에 영국 방송 중계 시스템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초기 광학 섬유를 사용하는 케이블 텔레비전 시스템 '다이얼-A-프로그램'(Dial-A-Programme)을 디자인했다 - 당신이 제너시스의 팬이라면, 이 '다이얼-A-프로그램'이란 이름을 어디에서 들은 것 같지 않은가? 이처럼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음악과 테크놀로지란 두 가지 원동력은 그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그에게 형성된 것이다.

게이브리얼 어린이는 이후 인근의 보육원(nursery school!)에 보내졌고, 후에는 워킹(Woking) 근처의 초등학교 준비반(prep school)에 입학한다. 그는 세인트 앤드류즈 보이 초등학교(St. Andrew's Boy School)를 거쳐, 1963년 열 세 살 때 - 이제는 록 그룹 '제너시스'의 산실로 유명해진 -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 차터하우스(Charterhouse)에 입학한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차터하우스 시기는 그에게 정신적 외상(外傷, trauma)의 시기로 남겨져 있다. 다른 모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 숨막힐 듯한 빅토리아적 규율의 보수적 명문 사립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계급 체계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사립) 학교 시스템이야말로 영국이 자신의 계급 분화를 강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십대 초반으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소년 게이브리얼은 이 시기 자신의 우상이 된 로큰롤과 소울 음악을 만나게 된다. 이는 학생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조차 금지되던 60년대 초반의 영국 상황에서는 (소박하나마) 기존 질서와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처음 산 앨범은 비틀즈의 데뷔 앨범이에요. 또 전 제가 처음으로 비틀즈의 'Love Me Do'를 들은 게 언제 어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또 비틀즈가 위성으로 세계에 동시 생중계했던 'All You Need Is Love' 공연도 그렇고요. 전 그 때 '우리가 해냈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곡이지만, 전 정말 흥분했었어요. 저는 제가 그 세대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 전 그 때 '주말 히피'였지요. 제가 처음 갔던 콘서트는 존 메이욜즈 블루즈 브레이커즈(John Mayall's Bluesbreakers)의 마키(Marquee) 공연이고요."

60년대 당시 니나 시몬(Nina Simone),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의 열렬한 팬이던 10대의 게이브리얼은 댄스 밴드 '마이로즈'(M'Lords), 소울 밴드 '스포큰 워드'(The Spoken Word)에서 드럼을 쳤다. 더욱이 그는 차터하우스에서 이후 그의 가장 중요한 음악 동료가 될 동급생 토니 뱅크스를 만나게 된다. 뱅크스와 게이브리얼은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티스 레딩, 제임즈 브라운(James Brown)과 나이스(The Nice)의 팬임을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이후 그들은 이 학교에서 또 다른 음악적 동료가 되어 함께 제너시스를 결성하게 되는 마이클 러서포드와 앤소니 필립스를 만나게 된다.

각기 게이브리얼·뱅크스와 러서포드·필립스가 재적하던 차터하우스 내의 두 학생밴드 '가든 월'(The Garden Wall)과 '어논'(The Anon)은 1965년 5월 '뉴 어논'(The New Anon)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당시 게이브리얼은 이미 열두 살 경부터 초보적 작곡을 시도하여 이미 'Sammy The Slug' 등 자작곡을 가지고 있으며, 열세 살 생일 때 부모로부터 선물받은 드럼 키트를 자신의 보물 1호로 가진 뮤지션 지망생이었다. 이후 1967년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으로 차터하우스의 '홈 커밍 데이'에 나타난 학교 선배 조너선 킹에게 데모 테이프를 전달한 그들은 킹의 추천으로 앨범을 녹음했다. 킹은 그들에게 제너시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장본인이다. 이 1969년의 제너시스 1집 이후 75년 그의 탈퇴까지 앨범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의 가사는 - 비록 앨범의 크레딧에는 작사·작곡을 포괄하여 일괄적으로 제너시스라 기재되어 있지만 - 게이브리얼이 쓴 것이다. 이 시기 제너시스의 음악적 활동에 대해서는 본 특집의 앞부분에서 충분히 다루어졌으므로, 아래에서는 다만 그 가사를 중심으로 하여 제너시스 시기에 있어서의 게이브리얼의 정신적 변화를 아주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4 # 1965-73: 제너시스 시기 게이브리얼 가사의 두 요소 - 연극성과 영국성

이 시기 게이브리얼 가사의 핵심적 두 요소는 연극성(theatricalism) 및 영국성(englishness)이며, 아마도 이에 덧붙여 우리는 (서정적) '고독'과 (비극적) '투쟁'이라는 초기적 두 요소를 또한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영국성을 표현한 englishness는 영어에 존재하지 않는 조어로서 음악 평론가 이춘식이 아래의 참고 문헌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선 앨범 작업 중인 68년 당시 겨우 18살에 불과한 소년 게이브리얼이 가사를 쓴 69년의 데뷔 앨범 <From Genesis To Revelation>에서 드러나는 화자(話者)의 주된 정서는 무엇보다도 고독과 방황 혹은 번민이다. 이 1집을 통해 화자는 '어두운 침묵과 고독 속에 웅크리고 앉아 ... 당신을 기다리는' 나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며 ... 다만 마음을 열고 ... 나의 따듯한 난로 가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며', 때로는 당신에게 '그것이 정말 그렇게 잘못되었는지' 묻는다. 그러나 나는 한편 '당신에게 이리 와 우리와 함께 하자'고 권유하며, '언젠가 내가 당신을 사로잡고 말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감싸는 전체적 정조는 언제나 '잘못한 것은 나이며' 그는 '언제나 슬프고, 외로우며, 뒤틀려 버린 그림자'라는 우울한 상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조차도 그를 감싸 안는 것은 '음악이며, 음악만이 그가 듣는 모든 것'이다. 결국 이 자신만의 서정적 내면에 침잠해 있는 이 어린 소년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만의 장소는 그녀의 자궁 안'이다.

이제 갓 20살이 된 게이브리얼은 70년의 2집 를 통해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악만큼이나 자신이 더 이상 외롭고 번민하는 내성적 '소년'이 아니라, 여전히 고독하지만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발언하고 투쟁하는 '청년'으로 성장했음을 드러낸다. 앨범의 주된 세 정서는 서정과 번민 그리고 투쟁이다. 그의 성숙한 보컬에 실려오는 가사는 이전 1집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힘과 시적 함축미를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앨범의 가사는 커버를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적인 신화적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이로써 게이브리얼이 진정 의도하는 곳은 당시 70년의 영국 사회, 특히 그 젊은이들의 정신 세계이다. 그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으며' 그의 방황은 '신이 포기한 지 이미 오래인' 이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젊은이'의 그것이며, 그의 안식은 '황혼'에 '들길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만져보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다만 '천사들의 모습만이 나의 주변에서 춤추며 빙글빙글 돌며' 나를 위로한다. 나의 안식은 이같은 '자연'과 '환상' 안에만 있으며, 이 현실 세계는 더럽고 추하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의 모든 썩어 더러운 것들을 마셔 없애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더욱이 이 외롭고 고독하지만 자연과 신화를 사랑하며, 자신을 아낌없이 던질 준비가 된 이 비극적 영웅은 '칼로 흥한 길은 칼로 망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만 '너에게 세상의 모든 악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자신과도 싸우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차터하우스 시절 게이브리얼이 감명 받은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가사일 것이다. 영국인이 그가 인도인인 간디에게 영향받은 것은 아마도 한 일본인이 만해 한용운의 사상에 감명 받은 바와 마찬가지로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간디의 비폭력·불살생(不殺生)주의의 영향으로 학생 시절 이후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훗날 비폭력 인권 운동가들 및 양심수 석방운동을 위한 인권 단체 '국제 사면 위원회'(The Amnesty International)에 가입·활동하게 된다]

71년 21살이 된 게이브리얼은 3집 <Nursery Cryme>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도약을 이룬다. 이는 이후 오늘날까지 그의 주요한 음악적·예술적 모티브가 되는 '연극성'의 확립이다. 앨범에서 게이브리얼은 이전의 뛰어난 2집 를 능가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확립한다. 거의 모든 곡은 2인 이상의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사이사이의 '해설'마저도 담당하고 있다. 이제 화자는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고독한 젊은이 혹은 비극적 영웅이 아니라, 갖가지 은유와 비유, 특히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유모어'와 '골계미'(滑稽美)를 갖추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엮어가는 '연극적 다중 인격체'로 나타난다. 이는 특히 무대 공연시의 다양한 분장과 의상 및 조명 등으로 더욱 강화되어 각 곡마다 하나 이상의 일관적 테마를 선보이며 글자 그대로 '시어트리컬 록'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 시기 이후 게이브리얼의 탈퇴 이전까지 제너시스의 음악은 청각적인 앨범 청취만으로는 도저히 그 전모와 실체를 파악키 어려운 종류의 독특한 경험을 관중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는 가히 우리 무성 영화 시대의 '변사'(辯士)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 나라 판소리의 '소리꾼'(唱者)의 서양적 모습이라 해야 할 것이다(이하 씨어트리컬 록과 제너시스 음악 사이의 보다 일반적 관계 및 곡 해설에 대해서는 본 지 특집의 일부인 전정기의 글을 참조하라)]

여하튼 앨범은 제너시스가 음악적으로 가장 창조적이었던 71-75년 시기에 완전히 확립된 그들의 '연극성'과 '영국성'이 최초로 정립된 '현대적 고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한편 이들이 관객들에게 투사한 이미지의 다른 한 축인 '영국성' 또한 본 앨범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영국인이라면 'The Musical Box'에서 가사에 등장하는 영국 동요 'Old King Cole'의 멜로디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전 앨범들과는 달리 이 노래들의 '이야기꾼'이 인용하는 각종 전거와 사례들 역시 - 일부 신화적 주제를 제외하고는 - 거의 모두 영국적인 것들이다. 실상 이러한 점은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인들의 (사투리와 문학 작품 등을 포함한) 의식적 언어·문화는 물론 무의식적인 갖가지 은밀한 소망과 혐오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영국인들' 그 자신이 아니라면 - 사실은 불가능이라 해도 좋을 만큼 - 좀처럼 제대로 포착해 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아래에서는 좀 길지만 (말미의 참고 문헌 중 이춘식의 글 안에 번역되어 있는) 영국인 평론가 나이젤 해리스(Nigel Harris)의 글 <초기 제너시스 음악에 있어서의 영국적인 모습>를 인용해 본다:

"제너시스 음악의 가사는 부조리한 시구, 구어체 영어의 악센트 및 기호, 신화, 전설, 동화, 동요 등 영국적 문화의 요소들로 가득 차있다. ... 피터 게이브리얼은 자주 영국의 지방 악센트(사투리)와 표현을 사용해 노래를 불렀는데, 그런 다양한 억양의 구사를 통해 게이브리얼은 곡에 담긴 여러 가지 개성의 인물들을 적절히 묘사해 냄으로써 이전에는 드라마와 연극의 소도구에 불과했던 노래가 이들 무대공연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었다 ... 19세기 (심지어 현재까지도) 보육원은 부유한 영국 부모를 둔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비밀의 세계였다. 'The Musical Box'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제너시스는 그러한 특권의 세계에 매료당했고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 이는 'Return Of The Giant Hogweed', 'The Fountain Of Salmacis' 혹은 'The Battle Of Epping Forest', 'Watcher Of The Skies'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음악을 영국적 사운드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의 가사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너시스는 때로는 초현실적 형식으로 때로는 넌센스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영국적 개성의 절묘한 변형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문맥에 따라 나 자신이 번역을 약간 고쳤다)

1972년 22세가 된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의 4집 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그의 가사는 좀 더 무거워져 현실을 비판하는 은유적 가사의 곡들을 써내게 된다. 이는 각기 지구에 내려온 '외계인 지배자'와 인간의 키마저 통제하는 2012년의 '유전자 관리국'을 다룬 'Watcher Of The Skies'와 'Get'em Out By Friday'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의 보컬과 가사가 이전과도 또 한 번 구분되는 '카리스마적' 성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본 작, 특히 대곡 'Supper's Ready'를 통해서이다.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약 23분에 이르는 이 곡은 수년간에 걸친 멤버들의 개별 작곡들을 모아 밴드의 새로운 편곡과 게이브리얼의 가사에 의해 통일성을 부여받은 곡이다. 게이브리얼은 이 곡에서 초현실적 이미지와 기독교적 묵시론, 낭만주의 등이 공포 및 유모어와 한데 뒤섞인 기묘한 신화적/현실적/초현실적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곡의 내용은 먼 여행에서 돌아온 화자가 연인에게 다시금 사랑을 고백하는 프롤로그 1부와 그 이후 2-6부에 이르는 '환상 여행' 및 다시 현실로 돌아온 에필로그 7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서두에서 화자는 '대기실을 지나,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네 곁에 앉아, 네 눈을 들여다봐. 이 한 밤에 자동차 소리가 멀어져 갈 때, 난 네 낯빛이 변하는 걸 정말 봤어. 편하지 않은 것 같았어 ... 하지만 넌 ...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 걸 넌 모르니. 난 그 동안 너무 멀리 가 있었어, 네 사랑스런 두 팔에서 말이야. 너와 함께 있으니 정말 좋군. 참 오래 됐지, 그치 않아?'라고 묻는다(<연인의 발걸음>). 그들은 이어 환상에 빠져든다. '자, 이제 모든 아이들이 길을 잃은 이 곳에 난 내 운명을 걸 거야. 너도 나와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가. 기다려 봐. 요 작은 뱀놈아, 우리가 널 놀라게 해주지'라고 노래한다(<틀림없는 영원한 신전지기>). 이제 '우리는 서쪽 아이들을 만나러 들판을 건넌다. 전쟁이 시작됐어. 평화를 위해 죽이자 ... 탕 탕 탕 ... 오늘은 경축할 날이야. 우리의 적들은 오늘 임자 만난 거야. 우리의 전쟁신은 찬양하고 춤추라고 명령한다'(<이크나톤과 이차콘 그리고 그들의 어릿광대 밴드>). '전쟁이 남긴 혼돈 속에 헤매는 우리는 시체들의 산을 넘어 온갖 것들이 살라 숨쉬는 들과 숲으로 나간다. 연못가에 서 있는 젊은이는 도살자들에 의해 '인간 베이컨'이란 스탬프가 찍혀 있었어(그는 너야). 우린 놀라 쳐다봤지, 나르시스가 꽃으로 변할 때 말이야. 꽃이라고?'(<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버드나무 농장에 가면 말이야 ... 눈을 떠봐, 신기한 게 많아. 바위 위의 여우처럼, 음악 상자처럼 모두들 앉아 있거든. 엄마 아빠, 착한 사람 나쁜 놈 여기선 모두 행복해 ... 개구린 왕자, 왕자는 멋지잖아, 멋지면 달걀, 달걀은 새야. 너 몰랐니? ... 자, 그럼 우리도 바뀌어 볼까? 다 바꾸자! 니 몸이 막 녹는다 ... 넌 아직 안 가 본 방을 열어 보려고 내 목소리를 가만히 들을 때 ... 넌 언제나 여기 있었던 거야. 니가 싫든 좋든 말이야 ... 근데, 이젠 호루라기 소리, 탕 소리가 나면 다시 우리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버드나무 농장>)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땅 속으로 데려가고, 용들이 바다에서 나오며, 현자의 빛나는 은빛 머리가 날 쳐다본다. 그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 666은 이제 혼자가 아니야. 일곱 개의 나팔은 네 영혼에 직통으로 달콤한 로큰롤을 불어 대고, 피타고라스는 거울을 들고 보름달을 비춘다. 핏속에서 그는 아주 새로운 음조의 시를 쓴다 ... 자, 이제 네 그 천사 같은 푸른 눈 ... 넌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 걸 모르니, 그 동안 너무 멀리 있었어, 너의 사랑스런 두 팔에서 말이야. 이젠 너에게로 다시 돌아갈 거야'(9/8 박자 묵시록: 떠벌이 깔죽이의 유쾌한 친구들 우정-출연).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마치 강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는 것처럼, 씨앗 속의 싹이 트는 것처럼 ... 이제 우린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태양 아래 천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어 - '이 것이 크신 분의 저녁'이라고 말이야. 주인들 중의 주인, 왕 중의 왕이 어린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어, 아이들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말이야(<달걀이 달걀인 것만큼 분명히 - 아픈 사람의 발>). 그리고 가사의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 있다: "계속"(Continued).

1973년 23세가 된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와 5집 <Selling England By The Pound>를 발매한다. 앨범에서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영국적 인용구 및 억양을 구사하여 다양한 캐릭터를 창출한다. 다만 주제의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I Know What I Like'처럼 '하기 싫고 꼭 그렇게 안 해도 되는 일들을 '다 너를 위한 거'라는 명목 아래 강요하는' 말 안 통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The Cinema Show'처럼 '오랜 여행과 고생을 하고 돌아온 현자'로서의 노인에 대한 모티브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한편 'The Battle Of Epping Forest'는 런던 동부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싸운 두 갱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전 앨범들의 연장선에 있지만 보다 현실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직설법이 아닌 묘사와 은유 등의 산문적 운문체로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영국성'과 '연극성'을 평행적 두 축으로 하는 게이브리얼의 '고전적 신화/동화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1974년 그룹의 야심적 6집 더블 앨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가 발매되었던 것이다.

1.5 # 1974: <어린 양 브로드웨이에 눕다> - 연극성과 실험성/현대성

어린양브로드웨이에눕다

이제 24살이 된 청년 게이브리얼이 도전한 야심적 시도는 그룹의 6집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였다. 더블 앨범으로 발매된 본 작은 그의 기본 아이디어를 채택한 콘셉트 앨범이었고, 그는 전곡의 가사를 담당함은 물론 앨범 속지에 이에 연관된 한 편의 단편 소설마저 실어놓았다. 가히 모든 면에서 로저 워터스가 전권을 행사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79)에나 비견될 만큼, 결과적으로 게이브리얼의 전권 하에 제작된 1인작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는 실로 '시대를 뛰어넘은' 작품이었다. 따라서 앨범은 그 작품에 걸맞는 대중의 찬사도, 비평가들의 지지도, 심지어는 다른 멤버들의 동의조차도 받지 못했지만, 이 놀라운 앨범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험성 및 음악성 양 측면 모두에서 '기념비적 걸작'이란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콘셉트 앨범에는 특이하게도 정규적인 노래 가사 이외에도 피터 게이브리얼이 직접 쓴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앨범은 그 음악은 물론, 운문으로 된 노래 가사, 산문으로 된 동일한 내용의 단편 소설, 디자인 그룹 힙그노시스(hipgnosis)의 탁월한 커버 작업이 맞물리면서 본 작만의 독특한 초현실주의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 잡지의 특집 <아트 록 다시 읽기: Theatrical Rock>에 실렸으며, 특히 본 작에 수록된 여섯 장의 커버 그림들로 내용을 풀어 나간 전정기의 글이 - 본 소설의 본령인 '(현대의) 신화적 상상력'보다는 지나치게 정치적 담론의 구조틀에만 집중한 감이 있지만 - 여전히 탁월하다: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그려 나간 이 초현실적 가상 체험은 앨범 커버 안쪽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이를 아티스트 집단 힙그노시스가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커버 바깥쪽의 사진들이다. 라엘이 여행한 세계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무의식 세계였다. 그 속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잡지 해당면 두 번째 사진), 행동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자아의 목소리는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었으며, 사실 그는 벙어리에 불과했다(세 번째 사진). 무의식 속의 라엘, 그가 찾아 헤매는 형 존, 그리고 라엘 자신의 외부 세계와 현실 속의 라엘은 모두 그 자신들이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어떤 일관된 존재란 없다(네 번째·다섯 번째 사진). 여기서 피터 게이브리얼은 이성이 지배하는 자아, 즉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자아'(Cogito)는 이렇게 스펙트럼처럼 분리될 수 있으며, 따라서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는 실상 허상이거나, 혹은 극히 표피적인 모습일 뿐일지 모른다는 지극히 프로이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실재계'(Real)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라엘(Rael)이 존재하는 '상상계'(Imaginary)로 투영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을 이미지로 구체화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상계 속에서 여러 기표들의 상징화를 통해 타자를 구성하고, 그 타자들과 자신을 구분지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여섯 번째 사진). 즉 그는 무의식에 의해 제어당하기 보다는 그 무의식의 세계를 응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마지막 여섯 번째 사진은 또한 '현실의 여집합'으로서의 나, 즉 '나는 나 자신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와 관련된 것들 사이의 차이성(difference)에 의해 구성되는 타자적 존재'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실로 게이브리얼의 가사와 힙그노시스의 커버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을 만큼의 완전히 의도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본 작은 많은 점에서 참으로 선구적인 실험적 시도였다.

한편 게이브리얼의 글쓰기와 연관하여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본 작의 가사가 그 어느 때보다 산문적이며, 더구나 그 내용을 아예 풀어쓴 '소설' 양식마저도 실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의 고전 주제를 다루었던 신화·동화적 글쓰기를 벗어난 이 소설은 게이브리얼이 얼마나 탁월한 문학적 감각과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증하는 실로 뛰어난 초현실주의 문학 작품이다(더구나 게이브리얼이 이른바 '고졸'로서 한 번도 정규적인 문학 수업을 받은 사실이 없음을 생각해 보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이렇게 탁월한 음악적·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인 게이브리얼이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앨범 발표 후 매진했던 일은 다름 아닌 본 작의 영화화였다. 이전 영화 학교에 입학했던 이 '과거의 영화학도'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선택한 감독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영화 <El Topo>와 <Santa Sangre>의 감독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였다! 이 계획이 게이브리얼 자신의 그룹 탈퇴와 여타 재정적인 이유 등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호도로프스키는 그 자신 대단한 록 음악광이며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런 연유로 그는 최근 프랑스의 음악잡지 <Rock & Folk> 99년 7월호 <나의 애장 음반> 코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이 코너에서 호도로프스키는 게이브리얼과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리고 피터 게이브리얼하고는 아주 친해요. 게이브리얼이 저한테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 때 전 게이브리얼과 함께 약 한 시간 분량의 아주 복잡한 비디오 클립 시나리오를 썼지요. 근데 사정이 생겨서 영화를 제작하진 못했어요. 하여튼 중요한 건, 그 때 제가 게이브리얼한테 타로(tarot - 이탈리아의 카드놀이)를 가르쳐 줬지요 ... 그 때부터 게이브리얼은 저한테 종종 전화를 해서 자기 비디오 클립을 찍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근데 우리가 막상 만나면 우린 타로를 치느라고 비디오 클립 얘긴 항상 잊어버려요!"

1.6 # 1975-76: 제너시스 탈퇴 후의 게이브리얼 - 도약을 위한 준비와 모색의 시기

1975년 5월 피터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를 공식 탈퇴했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탈퇴 후 게이브리얼은 영국 고향 근처의 글래드스톤베리에서 가족들과 새로운 전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향후 진로에 대한 명확한 밑그림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만간 새로운 방향의 음악적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의향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어린 시절 이후 중단했던 피아노 레슨을 새롭게 받았으며, 전자·멀티 미디어 부분에도 큰 관심을 갖는 등 60년대 말 이후 처음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막 개발된 두 가지 새로운 '발명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두 가지는 소니(Sony)사에서 막 출시된 비디오 카메라와 신서사이저였다. 그는 앞으로 동시대의 음악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이 두 과학·기술적 발명의 놀라운 가능성에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당시 그는 'TV 등에 방송되기 위한 약 10분 가량의 비디오 클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뮤직 비디오'라는 용어조차 생기기 이전이던 75-76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 만약 75년 호도로프스키와의 공동 작업으로 영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가 만들어졌다면, 그의 표현대로 '록 아티스트에 의해 시도된 최초의 멀티 미디어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핑크 플로이드와 앨런 파커의 영화 <The Wall>은 82년 개봉되었다). 당시 그는 신서사이저 강의를 들었는데, 게이브리얼의 '선생님'은 다름 아닌 <Switched On Bach>를 낸 신서사이저 주자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였다(그는 원래 남성으로 월터 카를로스(Walter Carlos)였으나 성전환 수술을 거쳐 웬디 카를로스가 되었다).

한편 어린 시절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농장에서 자란 게이브리얼은 집 마당에서 양배추를 키우는 등 자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한다 -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채식주의자였다. 이 때 게이브리얼은 향후 그가 발표하게 될 곡들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후에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작곡 방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전 음악을 통해서는 말로 하는 것보다 내적 검열 같은 걸 쉽게 벗어날 수 있어요. 작곡을 할 때 전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뜻 없는 말을 흥얼거려요 - 전 이 걸 '게이브리얼어'(gabrielese)라고 부르죠. 전 이 무의미한 즉흥 게이브리얼어를 사용해서 작곡을 해요. 무의미가 없이는 의미도 없어요(There is no sense without nonsense) ... 많은 아티스트들은 마음 속에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로 직접 나아가지요. 하지만 전 가장자리에서부터 가운데를 향해서 원을 그려봐요. 무슨 일을 할 때, 뭔가 마술 같은 감정이 생겨날 때까지 기다려고, 그리고 그게 찾아오면 그걸 따라가 보지요. 이렇게 저렇게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그가 그룹 탈퇴 후 최초로 작곡한 곡은 영국의 코메디언이자 대중 음악 가수인 챨리 드레이크(Charlie Drake)를 위한 곡이었는데 실제로 발매되지는 않았다. 그 외 게이브리얼은 당시 마틴 홀(Martin Hall)의 작사로 'People In Glass Houses', 'The Box' 등 약 20 여 곡을 작곡했는데, 이 중 'Excuse Me'는 그의 1집 앨범에 수록되었다.

한편 그는 새로운 록 오페라 '모조'(Mozo)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Down The Dolce Vita', 'Here Comes The Flood', 'On The Air', 'Exposure', 'Red Rain', 'That Voice Again' 등 당시 작곡된 곡들은 이후 그의 솔로 앨범들에 다양하게 분산되어 수록되었다. 그는 75년 당시 인터뷰를 통해 늦어도 76년 안에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려는 계획을 표명하고 있는데, 실제 그의 첫 솔로 앨범이 발매된 것은 77년이었다.

1.7 # 1978: - 로버트 프립과 피터 게이브리얼의 만남, 또 하나의 실험

 

결과적으로, 애초 상업적 측면에서 무난한 출발을 보였던 게이브리얼의 1집은 다른 기존의 거물 아티스트들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영국은 물론 당시의 전 유럽을 휩쓴 펑크의 물결에 의해 침몰되었다. 게이브리얼은 이러한 재정적 적자로 인해 레코드사로부터 빨리 2집 앨범을 녹음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게이브리얼은 실로 이러한 재정적 문제보다 더 큰 본질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마도 1집이 발매된 77년 말 당시 1집에 대한 게이브리얼 스스로의 평가는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냉정히 평가해 보면 1집은 실상 '제너시스 음악과의 차별화'라는 한 걸음만을 성취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게이브리얼로서는 절대 절명의 한 걸음이었겠지만 그 한 걸음은 아직 필요 조건일 뿐 완전한 충분 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화학적 합성'에 이르지 못한 채 프로그레시브와 리듬 앤 블루스를 '물리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당시의 게이브리얼이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이러한 음악적 불만은 다음해인 78년 발매된 2집 <Peter Gabriel>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2집은 애틀랜틱 레이블에서 제작되었다). 그는 1집의 모토였던 '미국화'의 테제를 과감히 버리고 1집에 참여했던 이전 킹 크림즌의 로버트 프립을 프로듀서로 맞아들여 그만의 '게이브리얼화'를 위한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1946년 생인 프립은 1950년 생인 게이브리얼보다 4살 연상이다. 프립은 68년 자일즈 형제와의 트리오 앨범 <The Cheerful Insanity Of Giles, Giles And Fripp>으로 데뷔했지만, 그가 69년 킹 크림즌의 이름으로 발매한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Crimson King>은 같은 해 발매된 제너시스의 데뷔 앨범 <From Genesis To Revelation>과는 실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시무시한 걸작'이었다. 이후 게이브리얼은 항상 킹 크림즌과 로버트 프립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 있었으며, 프립 또한 피터 게이브리얼과 제너시스를 흥미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프립은 게이브리얼의 첫 앨범에 게스트 기타리스트로 참여했다. 게이브리얼은 프립에게 자신의 2집 앨범을 제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게이브리얼은 2집 앨범이 발매되기 한 달 전인 78년 5월 프랑스의 음악 잡지 와 행한 인터뷰에서 '프로듀서로 밥 에즈린이 아니라, 로버트 프립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1집 앨범 이후 전 좀 더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2집에서는 제 작업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 좀 더 중립적인 프로듀서와 일하고 싶었어요. 1집 때는 제가 밥 에즈린에게 바라는 걸 좀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많이 의지했지요. 그런데 요번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고, 지난 번 절 도와줬던 밥 에즈린에게 '당신의 역할을 이번에 좀 축소해 보자'고 얘기하긴 어려웠어요. 밥 에즈린은 뛰어난 제작자예요. 하지만 전 결국 이번엔 저한테 좀 더 객관적인 의견만을 제시해 주는 그런 타입의 제작자를 찾게 되었어요, 저의 작업에 대해 자신의 아이디어나 취향을 강조하는 그런 제작자 말고요 ... 그래서 전 로버트 프립에게 부탁을 했지요. 게다가 저는 프립의 실험성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저의 이번 2집에서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실험성이었어요. 그리고 앨범의 '음색'도 상당히 바뀌었지요 ... 앨범의 세 요소는 연주자와 프립 그리고 저 자신이에요."

모두 놀라운 나름의 독창성을 갖고 있으며, 또 그만큼 자기 주장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이 두 사람, 특히 프립에 대한 일반의 이미지와는 달리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인간적인' 이유에서 프립을 초청한다.

게이브리얼의 표현에 따르면, 1집에서 게이브리얼이 처했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프립은 "정확히 밥 에즈린과는 반대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프립은 단지 '작업상의 제안'으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적어도 1집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그들은 1978년 봄 네덜란드의 릴라이트 스튜디오와 뉴욕의 히트 팩토리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했다.

프로듀서 프립과 게이브리얼은 2집의 제작을 위해 베이스의 토니 레빈과 신서사이저의 래리 패스트를 제외하고는, 전혀 새로운 밴드의 라인업을 구성했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드럼의 제리 마로타(Jerry Marotta), 기타의 시드니 맥기니스(Sidney McGinnis), 키보드의 로이 비턴(Roy Bittan)·베이트(Bayete) 등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이후 86년의 5집 앨범까지 참여하게 되는 드러머 제리 마로타이며, 한편 본 작은 베이시스트 레빈이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스틱(Chapman Stick)을 처음 사용한 앨범이기도 하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현명하게도 '문제가 되었던' 이전 앨범의 두 악기 주자, 드러머와 기타리스트를 교체했다.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돋보이는 곡은 앨범을 여는 'On The Air', 'D.I.Y.', 및 'Exposer'일 것이다. 앨범의 '소리'는 전체적으로 1집보다 훨씬 그와 잘 '어울린다'. 특히 첫 곡 'On The Air'에서 들리는 레빈의 베이스와 비턴·패스트의 키보드·신서사이저, 새로 등장한 마로타의 드럼 사운드는 1집의 성과를 이미 거뜬히 뛰어넘는다. 이어지는 싱글 'D.I.Y.'는 레빈의 스틱 베이스가 처음 등장하는 곡인데, 게이브리얼 자신의 피아노와 드럼·기타 사운드가 잘 어울리는 멋진 곡이다.

이 두 곡만으로도 청자는 게이브리얼이 이전 1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활기찬'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나한테 뭘 해라 말아라 명령하지마, 난 그렇게 안 할테니까, 나한테 널 믿으라고 말하지마, 난 널 안 믿으니까 ... 일이 너무 커지면, 난 그들을 전혀 안 믿어. 네 일을 콘트롤하고 싶으면 보다 작은 걸 지켜내야 돼, 네 스스로 해야 되(do it yourself)!"로 이어지는 곡의 가사는 이후 이어질 새로운 그만의 독창적인 자기 주장을 예견케 하는 '예고편' 격이다.

다음 곡 'Mother Of Violence'는 맥기니스의 기타와 비턴의 키보드가 잘 조화를 이룬 서정적 취향의 어쿠스틱 넘버인데, 특히 마지막 부분에 잠시 등장하는 프립의 일렉트릭 기타는 곡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한편 이 곡은 당시 게이브리얼의 아내였던 질 게이브리얼(Jill Gabriel)이 가사에 참여했는데, "폭력의 어머니는 ... 두려움"(Fear, fear - she's the mother of violence)이라는 반복 후렴구를 가지고 있다. 이는 명백히 어린 시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크게 영향 받은 게이브리얼의 휴머니즘적 성향이 명백히 드러난 사례이다. 한편 이 곡은 앨범의 'White Shadow', 'Indigo', 'Flotsam And Jetsam', 'Home Sweet Home' 같은 곡들과 함께 (1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거나, 적절히 구사되지 못 한) 게이브리얼-프립 류의 '서정성'을 드러내는 좋은 곡들이다.

다음의 'A Wonderful Day In A One-Way World' 역시 레빈의 스틱 베이스 작업이 돋보이는 곡으로 전체적 가사와 분위기 측면에서 게이브리얼의 특기인 이전의 유머러스한 환상적 취향의 '골계미'(滑稽美)가 잘 드러난 곡이다. 'Animal Magic'도 이와 비슷한 연장선상의 곡이다.

앨범의 음악적 백미는 그러나 단연 LP의 뒷면을 여는 'Exposure'일 것이다. 원래 프로젝트 '모조'의 일부로 기획되었던 이 곡은 게이브리얼·프립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로타의 드럼, 레빈의 베이스, 맥기니스의 기타, 게이브리얼의 보컬과 프립의 프리퍼트로닉스(frippertronics)가 어우러져 놀라운 실험적 성취를 이루어낸, 앨범의 다른 곡들과도 깊이와 차원을 달리하는 기념비적인 곡이다. 특히 곡의 전반을 리드하는 프리퍼트로닉스와 베이스는 단순한 연주력이라는 기량의 차원을 넘어선 - 이후 80년 3집 이후 게이브리얼의 성취와 81년 새로운 킹 크림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 80년대 '프로그레시브·아방가르드 정신'의 새로운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은 전체적으로 여전히 그의 '본령'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카타르시스의 측면에서도 만족스러운 성취를 보여주지 못 하고 있다. 더구나 앨범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78년 5월 발매된 싱글 'D.I.Y.'는 물론, 동년 9월 발매된 같은 곡의 리믹스 싱글조차 전혀 차트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는 펑크의 물결이 여전히 런던을 휩쓸고 있었을 때이며, 대중은 이전 킹 크림즌의 로버트 프립과 제너시스의 피터 게이브리얼이 만든 이 데이빗 보위 스타일의 '펑크'(D.I.Y. 스피릿!) 넘버를 외면했다 - 물론 이는 게이브리얼만의 '내적 맥락'을 갖고 있으므로 상기 요소들의 맥락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현실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 앨범은 단지 팝 앨범이고 또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거듭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게이브리얼의 1집 참여 경험으로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관철시키길 극도로 꺼려했던 프로듀서 프립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앨범은 게이브리얼이 원했던 '충분한 실험성'의 측면에서도 아쉬운 바를 남기고 있다(아마도 'Exposure' 한 곡 정도만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결국 앨범은 실험적 측면에서도, 팝적 대중성의 측면에서도 의도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다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 '컬트'(cult)의 원 정의에 충실하게도 - 한 장의 뛰어난 '컬트 앨범'으로 남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2집은 - 많은 사람들이 논증하고 있는 것처럼 - 아마도 사운드적 정교성의 측면에서는 1집에 비해 기술적으로 떨어질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 안에 담긴 소리와 정신적 취향은 피터 게이브리얼의 기질과 목소리에 보다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앨범이 성취한 이러한 진일보한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필자의 이러한 평가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음악적, 정신적 지향의 뿌리가 - 1집에서 그가 시도했던 보다 정서적이고, 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미국적) 리듬 앤 블루스 + 록에 있다기보다는 - 어디까지나 이성에 호소하며, 지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영국적)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통에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프로그레시브란 글자 그대로 진보이며, 이성과 논리가 없는 곳에 진보란 없다. 기존의 것을 비판하지 않고 진보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진보의 정신이란 긍정이기보다는 부정의 정신이며, 이 부정이란 바로 기존의 것들에 대한 저항이며 비판이다. 나는 이 부정적 비판의 정신과 긍정적 사랑의 정신을 화해시키려는 것이 피터 게이브리얼이 이제까지 해온 작업의 본질을 이룬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그 결과가 성공적이며, 기존의 논리틀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게이브리얼의 이러한 '프로그레시브적 특질'은 적어도 필자의 판단으로는 가히 '체질적'이다. 적어도 게이브리얼은 2집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 지향'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았다. 그는 적어도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두 갈래 길에서 올바른 방향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그의 '몸'에 맞는 음악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2집에서 추구한 진정한 '피터 게이브리얼화'에의 시도는 사실 '로버트 프립화'에로 귀착되었던 것뿐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실제로 이후 프립은 모두 자신이 제작한 78년의 본 작과 79년 자신의 솔로 1집 , 홀 앤 오츠(Hall & Oats)의 데릴 홀(Daryl Hall)의 80년 솔로 앨범 <Sacred Songs>를 자신의 'MOR 3부작'으로 불렀다). 그는 이번에도 단지 한 걸음의 진보만을 성취했을 뿐이다.

1.8 # 1980: - 스티브 릴리화이트와 함께 만들어 낸 현대의 걸작, '몸'의 음악

 

2집의 상업적 실패는 게이브리얼을 무척이나 의기소침한 상태로 몰아갔다. 더욱이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유럽 등지의 공연을 위해 장기간 집을 떠나 있어야 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제너시스 시절부터 오랜 투어와 스튜디오 작업 등으로 좋지 않았던 아내 질 게이브리얼과의 불화를 더욱 깊은 '위기' 상태로 몰고 갔다. 더구나 시대는 바야흐로 레이건과 대처의 반동적인 '신보수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희망찬 기대로 시작되었던 솔로 활동 초기와 달리 게이브리얼은 모든 면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더구나 게이브리얼의 소속 레이블은 애틀랜틱은 그의 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3집의 결과에 따라 그를 방출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이브리얼은 방안에 틀어박혀 새로 구입한 60 파운드 짜리 소형 드럼 머신을 시험하며 3집의 곡들을 써나가고 있었다. 게이브리얼은 78년 4월 2집 출반 직전의 인터뷰에서 "2집에서는 신서사이저를 좀 더 많이, 하지만 1집과는 달리 좀 '덜 현악기적으로' 썼으며, 아마 앞으로 나올 3집 앨범에서는 완전히 신서사이저로 구성된 몇몇 곡들을 시도해 볼 작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게이브리얼은 3집 녹음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드럼 머신을 사용해 대부분의 곡들을 작곡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작곡 방식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번에는 리듬 파트를 먼저 만들었어요. 그 전에는 보통 먼저 코드를 잡고, 가사와 멜로디를 먼저 쓰는 방식이었지요 ... 이번엔 먼저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보고 그 위에 '랄라랄라'하는 식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려 보고 그 다음에 가사를 썼지요 ... 저한테는 작은 혁명이었어요 ... 더구나 그 사이에 제 음악적 취향도 조금은 변했고요."

게이브리얼은 새로운 앨범의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로 각기 스티브 릴리화이트(Steve Lillywhite)와 휴 패점(Hugh Padgham)을 영입했다. 릴리화이트는 영국의 펑크·뉴 웨이브 그룹들인 밴시즈(The Banshees)·사이키델릭 퍼즈(The Psychedelic Furs)·XTC 등의 앨범을 제작한 인물이며, 이후 U2의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다. 3집의 수록곡은 모두 게이브리얼의 단독 작곡이며, 영국 배스 및 런던의 타운하우스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3집 세션의 기본 라이업은 드럼머 제리 마로타·필 콜린즈, 브랜드 X 출신의 베이시스트 존 기블린, 신서사이저에 래리 패스트, 스틱 베이스에 토니 레빈 등이며, 기타리스트로는 데이빗 로즈(David Rhodes), 잼(The Jam)의 리더 폴 웰러(Paul Weller), 로버트 프립 등이 참여했다. 게이브리얼은 퍼커션과 베이스 신서사이저, 피아노 등을 담당했다.

이들 중 특히 중요한 인물은 이후 현재까지 게이브리얼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데이빗 로즈의 등장이다. 앨범의 사운드는 놀랄 만큼 독창적이며 뛰어난데, 이는 기본적으로 심벌즈를 제거한 자연 드럼 소리를 일종의 이펙터인 '게이트 콤프레서'(gate compressor)에 넣어 변형·증폭시킨 게이브리얼의 아이디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제너시스 연대기 중 앨범 부분에서 충분히 상론했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생략한다).

여러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79년 말 게이브리얼은 3집의 녹음을 완성했다. 앨범은 80년 2월로 발매 예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발생했다. 앨범을 들어본 소속사 애틀랜틱 레이블이 전혀 3집 앨범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전히 두비 브라더즈 스타일의 록앤록을 선호하던 애틀랜틱 레이블의 영업담당 존 캐로드너는 앨범을 '상업적 자살'(commercial suicide)이라 불렀으며, 특히 레이블의 사장인 아흐멧 에르테군은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한 남아프리카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 스티븐 비코에게 바치는 추도곡인 'Biko' 같은 곡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피터 게이브리얼의 레이블 '방출'을 결정했다. 앨범의 소유권은 영국의 카리스마 레이블로 넘어갔으며, 3집은 결국 80년 6월에야 영국의 카리스마 레이블과 미국의 머큐리 레이블을 통해 간신히 발매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앨범은 놀랍게도 영국 차트 2주간 1위, 미국 차트 22위라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을 거두며 25만장을 넘게 판매되었고, 이미 1월 발매되어 영국 차트 4위에 오른 첫 싱글 'Games Without Frontiers'에 이어 'No Self Control', 'Biko'도 각기 영국 33위, 38위를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땅을 치며 후회한 애틀랜틱의 경영진은 카리스마로부터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거액을 제시했으나 물론 카리스마는 '이미 성공한 레코드의 소유권'을 되팔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이 앨범의 모든 곡은 음악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굳이 꼽아보자면 우리는 'Intruder', 'No Self Control', 'I Don't Remember', 'Games Without Frontiers', 그리고 역시 'Biko'를 꼽아야만 할 것이다.

앨범의 첫 곡을 여는 'Intruder'는 예의 단순하고 강력한 드럼 비트로 시작된다. 필 콜린즈의 드럼은 게이브리얼 탈퇴 이후 당시까지 제너시스의 어떤 앨범보다 뛰어난 템포와 박력을 보여준다. 드럼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삐꺽이는 소리'와 이어지는 기타·키보드의 참여는 그가 이전의 '방황'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의 보컬은 개인으로서의 인간 내면 심리의 어두운 측면을 두려움 없이 탐색하고 있으며, 또 그가 이러한 '심연'을 완전히 자신의 몸으로 통과해내기 이전까지는 결코 제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앨범 전체에서 들려오는 신서사이저와 백 보컬의 적절한 사용은 이러한 내면 심리의 복잡성(複雜性, complex)과 중층성(重層性, over-determination)을 표현하는 특히 유효한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이는 'Intruder'나 'Games Without Frontiers'에 삽입된 휘파람 소리도 마찬가지이다).

제명인 '침입자'(intruder)는 사람이 아니라 '고립감'(isolation)의 의인화인데, 이 침입자는 나의 '창문으로, 문으로 기어들어 와, 나무 바닥 위에, 쟁반 위에, 장롱 속에, 전화선 속에 자신의 자국을 남긴다.' 나는 끔찍한 고독 속에 홀로 던져진 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신화·동화적 세계'와 '유모어', '서정성'을 포기한 대신 그 자리에 - 인식에의 의지로서의 - '자신의 내면적 불안과 절망의 직시'를 대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신화·동화적인 환상 혹은 골계의 세계가 아니며 - 단지 예술적 방식으로 표현된 - 보다 직접적인 공격이며 비판이다.

그는 자신을 통해 인간 본질의, 보다 정확하게는 당시 80년대 초 서구 문명의 한 개인이 겪는 전쟁과 같은 내면적 불안과 절망의 직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가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물론 '꿈'(dream)이지만, 그것보다는 더욱 더 '사실'(fact)이다. 그가 지금 움켜쥔 것은 한 줌의 '절망적 진리'로서의 '사실'이다. 이 앨범에서 수록된 노래들의 '공간'은 심리적 감옥 혹은 지옥으로서의 개인의 내면 심리 세계라는 공간이다. 한편 이러한 개인적 불안의 공간과 나란히 앨범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서는 반전·반독재·반인종주의·반파시즘의 '정치적 저항의 정서'이다.

70년의 제너시스 2집 의 'The Knife'로부터 끊임없이 반복되던 '비폭력·반전'의 정서는 79년의 솔로 2집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다가 이 3집을 통해 폭발하게 된다. 앨범의 가사는 실로 보기 드문 강력한 적극적 '저항적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도처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Games Without Frontiers', 'Not One Of Us', 'Biko'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이처럼 본 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노래에 있어 가사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높아졌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제너시스 이래 게이브리얼에게 있어 가사는 언제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본 작 이후 게이브리얼 작업에 있어 우리는 실로 - 마치 제너시스 시기에 있어 '시각적 연극성'의 경우처럼 - '가사를 모르고는 그의 음악을 이해했다'고 전혀 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와 같이 영어권이 아닌 국가의 팬들로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상황인데, 이런 점에서도 역시 필자가 언제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과 같이 법적인 의무·강제 사항으로 준수되는 '노랫말의 완전 번역'이 절실히 요청되어야 할 당위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아쉬운 대로 필자의 미숙한 번역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두 번째 싱글 'No Self Control' 역시 콜린즈의 드럼이 돋보이는 곡이다. 실로 이 곡에서 들려오는 콜린즈의 드럼 사운드는 가히 앨범의 음악적 백미이며, 콜린즈의 캐리어 전체를 통해서도 보기 힘든 '명연'(名演)이라 할 수 있다. 볼륨을 크게 높여 놓고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들으면 이 곡은 1, 2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강력한 '카리스마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이 곡의 가사는 실로 절망적인 개인의 내면적 심리 상태를 꾸밈없이 잘 드러낸 명시(名詩)이다. 그의 보컬은 이전에 보기 힘들었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힘을 획득하고 있으며, 게스트 보컬의 케이트 부시(Kate Bush)도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곡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기타와 키보드, 신서사이저도 모두 이 앨범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듣기 힘든 나름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고 있다. 특히 앨범 전체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 특히 'Lead A Normal Life'에서 - '실로폰 소리'는 그의 초조와 불안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로까지 격상된다.

게이브리얼은 'No Self Control'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맞아요, 이 노래는 정신적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 곡이에요, 거의 우울증적 심리 상태 말이에요 ... 하지만 제가 항상 그런 건 물론 아니죠."

딕 모리세이(Dick Morrissey)의 멋진 색소폰 연주 'Start'에 이어지는 다음 곡 'I Don't Remember'에서 그는 "난 내가 누구인지 몰라, 난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서류가 없어, 넌 네게 보이는 그대로 날 받아들여야 해,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그리고 난 상관 안 해, 속도 비고 머리도 비었어, 난 기억이 안나, 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 전혀 아무 것도"라고 노래한다. 이 곡 역시 제리 마로타의 드럼과 토니 레빈의 스틱 베이스가 빛나는 명곡이다.

LP의 뒷면을 여는 앨범의 첫 싱글 '국경 없는 게임'(Games Without Frontiers)는 80년대 초 새로운 피터 게이브리얼의 시대를 알렸던 중요한 곡이다. 마로타의 날카로운 드럼 머신과 프립의 시니컬한 기타, 패스트의 패러독시컬한 신서사이저가 리드하는 이 노래의 제목은 영국과 대륙을 포함한 유럽 지역에서 유명한 '국제적' TV 프로그램의 불어 제목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이 곡의 반복되는 후렴 '죄 상 프롱티에르'(Jeux Sans Fronti res)가 불어 원제이며, 다른 반복 후렴구 '잇츠 어 넉아웃'(It's A Knockout)이 영어 제목이다. 이는 유럽 각국에서 방영되는 인기 오락 프로로 유럽 각국의 참가 신청자들이 등장해 야외에서 게임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국경'을 넓혀 가는 게임이다. 쉽게 말해 예전 우리나라의 '열전 일요일!'을 생각하면 되는데, 다만 참가팀들이 국가별로 나누어 등장하는 것만이 다르다.

게이브리얼은 통렬한 가사로 이러한 '어리석은' 게임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가사에서 "한스는 로테와, 로테는 제인과, 제인은 윌리와 경기한다 ... 그리하여 윌리는 행복하다. 수키는 레오와, 사샤는 브릿과, 아돌프는 모닥불을 피우고, 엔리코는 그걸 가지고 놀고 ... 앙드레는 붉은 깃발을, 치앙 칭은 푸른 깃발을, 그들 모두는 깃대를 꼽을 고지를 가지고 있지, 린 타이 유만 빼고는, 제복을 입고, 어리석은 놀이를 하면서, 나무 꼭대기에 숨어, 무례한 이름을 부른다 ... 쳐다보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거야, 이것이 국경 없는 게임 - 눈물 없는 전쟁"이라고 노래한다. 이는 물론 대부분의 경우 또 다른 종류의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한 '애국심'이라는 허명에 현혹되어 다른 국가와 인종의 땅을 빼앗는 '문명 세계' 현대에 보내는 반전(反戰) 운동가이다.

이 곡에서 음악적으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패스트의 신서사이저와 마로타의 드럼 머신이 들려주는 '전자 음악적' 혹은 '테크노적' 요소에 있다. 80년 당시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었던 필자의 느낌은 아마도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정도를 제외한다면 당시의 대중 음악 신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와 급진성을 갖춘 '일렉트로닉' 음악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곡 'Not One Of Us' 역시 어리석은 인종차별과 자국 중심주의에 대한 역설적 비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사를 보자: "이방인의 눈물은 그냥 물이야, 눈이 사람을 속이긴 하지만 차이는 명백해, 외국인의 몸과 마음은 눈먼 사람들의 땅에선 환영 못 받아, 네가 우리하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넌 차이를 잘 알잖아 - 넌 우리들의 하나가 아니야, 아냐, 아냐, 넌 우리들의 하나가 아냐." 이 곡에서 들려오는 마로타의 놀라운 드럼은 2집과도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며 'I Don't Remember',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등과 함께 훨씬 뛰어난 아우라를 획득하고 있다. 이 곡의 말미에서 제로타의 드러밍은 아직 완숙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나름의 '신명'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곡 'Biko'는 이미 80년대 반인종차별주의·반독재 운동 가요의 대명사격이 된 곡이다. 이 곡은 그의 라이브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하는 곡으로 현재까지 종종 연주되고 있으며, 특히 그가 참여한 국제사면위원회 후원 콘서트 등의 단골 레파토리로 불리워지고 있다. 곡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인권 운동의 청년 지도자로 경찰에 의해 고문사당한 스티브 비코(Steve Biko)에게 바쳐진 곡이다(가사 참조). 마로타가 곡의 기본 드럼을, 콜린즈가 수르도(Surdo) 드럼을 연주했으며, 이에 덧붙여진 백 파이프와 게이브리얼의 보컬이 비장미를 불러일으킨다. 'Biko'는 - 'Games Without Frontiers'와 함께 - 80년대의 벽두에 게이브리얼의 '새로운' 그리고 '진정한' 전성기를 알린 걸작 싱글이다.

실로 1980년 3집 앨범 <Peter Gabriel>(Charisma)은 진정 그 자신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연 '기념비 걸작'이었다.

앨범은 아마도 1980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제작한 미국 뉴욕의 뉴 웨이브 그룹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4집 <Remain In Light>(Sire), 81년 새로운 킹 크림즌(King Crimson)의 재결성 '데뷔' 앨범 (EG)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연 걸작 앨범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아마도 우리는 여기에 핑크 플로이드의 79년 <The Wall>, 저팬(Japan)의 81년 <Tin Drum>(Virgin), 토킹 헤즈의 리더 데이빗 번(David Byrne)과 이노의 81년 조인트 앨범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Sire)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앨범의 공통점은 우선 70년 거물 그룹 출신의 아티스트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세 장의 앨범은 70년 프로그레시브·아방가르드·글램 록 신을 이끌었던 각기 제너시스·킹 크림즌·록시 뮤직(Roxy Music) 출신의 세 거물 아티스트들이 이루어 낸 글자 그대로 새로운 '르네상스'의 서막이었다.

둘째 이 세 매의 앨범은 여전히 '정통주의적·복고주의적' 60-70년대 식 '프로그레시브 록'의 문법에 고착되어 있던 일반 대중과 평론가들의 '회고적' 보수주의 정서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80년대의 새로운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셋째 앨범은 모두 기존의 그리스·로마 등 서구적 전통에만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던 기존 프로그레시브·아트 록의 문법 혹은 전형을 탈피하여, 부분적이나마 아프리카·중동·아시아 등 여타 문명권의 감수성에서 자신의 새로운 자양분을 취하고 있다.

그 예로 아프리카적 리듬의 응용은 의 'Biko', <Remain In Light>의 'The Great Curve', 의 'Thela Hun Ginjeet' 등 세 앨범 모두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이외에도 <Remain In Light>의 'Listening Wind'에서 보이는 중동 리듬, 의 'Matte Kudasai'에서 보이는 일본적 서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제명 '마테 쿠다사이'(待ってください)는 '기다려주세요'란 일본어의 영어 표기로 당시 국내 라이선스에서 '금지곡'으로 삭제되었다).

아마도 우리는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여 80년대 초 영미권 사상계에서 지배적 조류적 조류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적, 탈-서구적, 탈-합리주의적 경향의 예술적 징후로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순진하게 서구와 비서구가 대등한 위치에서 거론되고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피터 게이브리얼은 탁월한 프로듀서 스티브 릴리화이트의 도움을 받아 에서 명실상부한 '독창적 작가·아티스트'의 지위를 획득했다. 은 이전 1·2집의 시행착오를 말끔히 털어 버린 실로 '게이브리얼의 작품'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단번에 다섯 걸음, 열 걸음의 성취를 이룩한 것이다.

[조절이 안돼 No Self Control]

뭘 좀 먹어야 되겠어
난 항상 배가 고프거든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지

잠을 좀 자야 되겠어
근데 밤엔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지
싫어,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지

누군가와 전화로 이야길 좀 하고 싶어
난 아무 번호나 돌려서
난 아무나와 이야길 해
난 내가 지나쳤다는 걸 알아
이번엔 정말 너무 했어
근데 난 내가 한 일들을 생각하기 싫어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지
싫어,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지

언제나 침묵이 숨어 있었어
내가 앉은 의자 뒤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것들은 기회만 노리다가 꼭 나타나곤 했어
그것들은 움직이는 건 뭐든지 다 잡아먹어
나는 무릎이 덜덜 떨려
불이라곤 하나도 없고, 별도 다 떨어졌어
마치 벌떼처럼 말이야

   조절이 안돼
   조절이 안돼
   조절이 안돼
   조절이 안돼
   조절이 안돼
   조절이 안돼

난 네가 상처받는 걸 보는 게 싫어
넌 알고 있지
난 네가 다치는 걸 보는 게 싫다는 걸
근데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지
싫어,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지

어떤 거리를 돌아 다녀도
밤이 가고 또 밤이 가도
난 항상 빗속을 걸어다녀
난 항상 빗속을 걸어다녀
난 멈출 수가 없어
난 멈출 수가 없어
안돼, 어떻게 해야 그만 둘 수가 있지
어떻게 해야 그만 둘 수가 있지

[비코 Biko]

1977년 구월
엘리자베스 항구 날씨 맑음
그건 그냥 일상적인 사무였다
경찰서 619호실에서

오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오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이흘라 모자, 이흘라 모자
- 그가 죽었다

내가 밤에 잠을 청하려 할 때
나는 오직 핏빛 꿈만을 꿀 뿐
바깥 세상은 흑과 백
그것은 오직 하나, 죽음의 색깔

넌 촛불을 불어 끌 수는 있지만
거대한 불길을 불어 끌 수는 없다
일단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면
바람은 그것을 더 높이 불어 올리리

그리고 세계의 모든 눈이
지금 보고 있다 지금 보고 있다

1.9 # 1980: <Peter Gabriel: Ein Deutsches Album> - 독어로 부른 3집 앨범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필자의 글에 있어서 가사의 중요성이 항상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조차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마도 필자의 탐구 대상이 된 아티스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프로그레시브이든 재즈이든 또 무엇이든 영미 혹은 서구권의 '팝송' 가사는 영미권의 아티스트와 팬들이 모두 평상시에 쓰는 자기네들의 '모국어'로 되어 있다. 그러니 가사는 그들에게 '안 들으려고 해도 들리는' 지경이다 - 우리가 조성모, 유승준 혹은 핑클의 노래를 들을 때처럼 말이다. 더구나 그것이 정태춘, 안치환 혹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곡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 더구나 우리가 본 잡지에서 다루는 거의 대부분 아티스트·그룹들의 가사는 단순 소박한 '사랑 타령'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정태춘의 노래에서 가사를 빼고 듣는다는 것은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아마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를 놓쳐버리는 결과를 본의 아니게 발생시킨다. 아마도 정태춘이나, 서태지,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즈, 피터 게이브리얼, 크라프트베르크의 랄프 휘터, 혹은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라면 필자의 생각에 공감해주리라 생각된다(심지어 데이빗 길모어나 필 콜린즈도 공감해줄 것 같다. 이는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글자 그대로 '여실히' 증명된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제반 음악적 요소에 대한 해설·비평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곧 에 게재하게 될 논문 <음악을 보는 눈, 음악을 듣는 귀 - 한국 (록) 음악 비평의 철학적 조건>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하튼 1980년 3집 앨범 녹음이 끝난 후 게이브리얼은 즉시 자신의 '새로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방금 발표된 자신의 3집 앨범을 다양한 외국어로 불러 출반하려는 소망이었다. 이는 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인터뷰집 <Peter Gabriel - In His Own Words>(94)에 실린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전 제 앨범의 독일어 버전을 녹음했지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요, 우선 제 생각엔 만약 당신이 다른 나라에서 노래를 해보신다면 관객들은 당신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즉시 알게 되지요. 그래서 설령 당신이 이미지와 아이디어의 개발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해도, 아마 한 70%의 사람들은 단지 '소리'만을 듣게 뿐 당신의 '생각'을 전혀 모르지요. 한 마디로 실패, 즉 소통이 안 된 거지요.

두 번째로 지난 번 두 투어에서 전 독일하고 프랑스에서 동요 'Me And My Teddy Bear'를 독어랑 불어로 불러 봤는데 팬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물론 제 발음도 영 아니었고, 노래하면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팬들은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자기네의 말로 노래한다는 그 노력 자체를 높게 평가해 줬어요. 저의 성의를 높이 사준 거지요.

세 번째로 언어 그 자체의 문제예요. 독일을 예를 들면, 니나 하겐이나 우도 린덴베르크 정도를 제외하면 독어로 노래하는 그룹은 사실 별로 없어요. 물론 전 영국인이니까 제가 노래하는 걸 다는 이해 못 하죠. 그러니까 전 어떤 부분은 그냥 하나의 '소리'로만 발음하게 되고, 독일 사람들이 들을 때 이해하지 못 하게 되는 부분도 있지요 ...

전 포노그램 레코드사에 이런 생각을 말하고 각국에 제 의견을 타진해 보았는데 관심을 보여준 나라는 독일 하나밖에 없었어요. 프랑스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또 일본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도 불러 볼 생각이었는데 모두 거절당했지요. 전 아직도 일본어로 한 번 불러 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아시다시피 전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하니까 번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겠죠. 여하튼 하거나 못 하게 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겠죠 ... 또 하나는 제 음악이 약간 어려우니까 가사를 그 나라말로 부르면 노래의 느낌이 좀 더 잘 전달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44-45쪽)

일본어 앨범은 발매되지 않았고, 2000년 현재까지도 발매된 외국어 버전은 독일어 하나밖에 없다. 독일어 버전의 제작 과정을 들어보자: "가사 번역은 거의 직역에 가깝게 했어요. 어떤 이미지들은 번역이 잘 안 되는 것도 있어요. 독일어 번역은 우도 린덴베르크와도 작업했던 호르스트 케니히슈타인(Horst K nigstein)이에요. 그는 왜 어떤 말이 독어로 옮기기 힘든지 아주 자상하게 설명해 줬어요. 그는 심지어 적당한 각운까지 맞추어 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그의 설명을 제가 맘에 안 들어 하면 번역을 고치고 또 설명해 주곤 했지요. 여하튼 결과는 제가 바랐던 대로 만족스럽게 된 것 같아요."

의 독일어 버전은 80년 카리스마 레이블에서 LP로 발매되었고, 87년에는 버진 레이블에서 CD로 재발매 되었다. 물론 앨범에는 노래들의 독일어 제목과 가사가 실려 있다. 독어 앨범의 노래 제목들은 대부분 직역이지만, 다만 영어반의 3-4번 곡인 'Start/I Don't Remember'가 'Frag Mich Nicht Immer'(나에게 그만 좀 물어봐)의 한 곡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수록곡의 수는 영어반의 10곡과 달리 9곡이다. 게이브리얼은 독일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가 실제로 독일어 친구를 데려다 음반을 청취시켜 본 결과 "이 사람이 독일어를 못 한다는 게 안 믿어진다. 물론 발음이 약간 이상하긴 하지만 가사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필자로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은 - 그냥 원 곡의 반주에 독어 보컬만 덧입히면 될 것 같은데 - 앨범의 믹싱과 연주가 곡에 따라 원 영어 앨범과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크레딧에 이에 관한 사항은 적혀 있지 않다). 편곡이 다른 것은 이 희귀 음반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니 상관없지만, 앨범의 소리와 선명도는 영어 앨범의 그것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독어 버전 'Biko'는 8분 55초로 영어 버전의 7분 30초와 길이도 다를뿐더러 편곡도 조금 다른 그야말로 희귀 버전이다.

1.10 # 1982: <PG4: Security> - 인간 존재의 무의식에 대한 문화 인류학적 탐구

 

1982년 9월 32세가 된 게이브리얼은 전작 의 성과를 바탕으로 또 다른 걸작 를 발매한다. 카리스마에서 발매된 영국반의 제명은 역시 <Peter Gabriel>이지만, 그와 새로이 계약을 맺은 미국의 배급사 게펜(Geffen) 레코드는 판매량의 저하를 우려해 LP 커버에 라는 부제를 부착해 버렸고 이로써 그의 <Peter Gabriel> 시리즈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프로듀서·엔지니어 데이빗 로드(David Lord)와 게이브리얼이 공동 제작한 앨범은 9월의 싱글 'Shock The Monkey', 12월의 싱글 'I Have The Touch'와 함께 발표되었는데, 'Shock The Monkey'는 게이브리얼의 첫 미국 40위권을 기록한 곡으로 미국 29위, 영국 58위를 기록했으며, 그의 곡으로는 최초로 영국보다 미국에서 좋은 순위에 오른 곡이다.

이전 앨범 의 기본적 두 정서는 개인적 고립감과 사회적 저항 정신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끊어질 수 없는 방식으로 맞물려 있는데, 그가 이 중 '개인적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택한 것은 '자신의 온 몸으로 그것을 살아(혹은 겪어) 낸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전통적 서구 이성주의의 한 지류인 개인주의가 갖는 문제점, 즉 '개인적 소외와 고립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명사적 문제인데(즉 모든 개인은 '자유'롭지만, 그는 지독한 '외로움'으로 고통받는다), 이를 위해 그가 에서 채택했던 방법론은 -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 그 자유뿐 아니라 고독, 불안, 절망을 포함한 '개인주의'의 모든 측면을 받아들이되, 그들 사이의 '연대'(solidarity)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로서는 '개인주의'와 '개인들 사이의 연대'를 이어주는 논리적 연결 고리의 취약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왜 너와 연대해야 하는가?

그가 4집에서 수행하고 있는 작업의 기본적 지향은 이 논리적 '연결 고리의 정립'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택한 탐구의 방법론은 '자신의 전통인 서구적 이성주의를 타 문명권과의 탐구와 대화를 통해 상대화시키는 것', 즉 '문화 인류학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인류학적 탐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개인들 사이의 연대를 설립하기 위한 근거'를 발견하는 것에 있으므로, 결코 소박한 '문화 상대주의적' 결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찾아 헤매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문화 상대주의적 외관 아래에 놓여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 몸의 공통성 혹은 '보편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탐구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표현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한 문화의 동질성보다는 그 한계가 문제시되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비서양, 선신/악마, 이성/광기, 선/악, 아름다움/추함, 삶/죽음, 남성/여성 등 한 문명이 규정한 모든 가치와 기준이 상대화되고 의문시되는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 글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그의 이러한 무모할 정도로 야심적인, 그러나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생겨난 고유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에 대한 개관을 얻게 될 것이다.

한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자신이 '월드 뮤직'뿐 아니라, 브라이언 이노가 제작한 토킹 헤즈의 4집 <Remain In Light>(80·Sire), 이노와 토킹 헤즈의 리더 데이빗 번의 조인트 앨범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81·Sire) 등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는 이러한 '문화 인류학적인' 인식론적·음악적 관심이 어우러져 나타난 앨범이다. 의 두 열쇠말은 'I submit to trust'(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I have the touch'(나는 촉각이 있다)이다. 이는 각기 'The Rhythm Of The Heat'과 'I Have The Touch'에 나오는 가사이다. 앨범은 각 곡들은 물론 유기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수록곡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 곡 'The Rhythm Of The Heat'의 배경은 인위적 문명 이전의 상태, 혹은 최소한 서구적 기계 문명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다. 노래의 화자인 "나는 붉은 먼지가 날리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으며, 붉은 바위 저 위에는 창을 든 그림자가 서 있다 ... 자기-의식은 불명확하고, 나는 먼지를 뒤집어썼으며, 그 영혼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 이제 '나는 라디오를 부숴 버린다, 이제 바깥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시계를 부숴 버린다, 이제 하루를 나눌 수 없다. 나는 카메라를 부숴 버린다, 이제 영혼을 훔쳐 갈 수 없다. 리듬, 열기(熱氣)의 리듬은 내 발아래, 내 주변에 있으며, 힘을 가진 것은 리듬이며, 그 리듬은 내 안에 있고, 그 리듬은 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게이브리얼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체험을 연상케 한다. 프로이트의 제자로서 '분석 심리학'을 창시한 융은 인간의 원초적인 집단 무의식과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들 사이의 연관을 밝히려 노력한 심리학자이다. 그는 한 때 이러한 자신의 연구를 위해 아프리카 케냐의 원시 마을에서 그 곳 전사들의 문화를 연구하기 머무른 적이 있다.

이를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노래는 마치 융의 체험과도 같아요. 융은 그 곳에 머무르면서 전사들의 '광란에 가까운' 전통 의식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물론 융은 서구인이자, 이방인으로서 두려움을 느꼈고 갈등하게 되었어요. 이 이방의 문화에 대한 소위 '객관적 관찰자'로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자기 의식을 벗어 던지고 '그들 속에 뒤섞일' 것인가 하는 문제로 말이에요. 융은 물론 후자를 택했고 몰아적 황홀경을 체험했어요.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경험, 태도예요."

이 때 '몰아'(沒我)의 '아'(我)란 바로 서구의 분석적·이성적 자아(自我, ego)를 지칭할 것이다. 신뢰(trust)가 논리적 분석에서 오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의식적 자아를 '내던짐'으로써 얻어진다는 역설의 논리는 이미 서구 개인주의·합리주의 문화의 논리와는 다른 층위의 것이다. 그러나 '나를 내던질 때', 나는 '열기의 리듬', 즉 삶의 리듬, 삶의 근원적 충동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나는 삶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왜인가? 그 리듬은 이미 내 발 밑, 내 안, 내 주변에 있으며, 다만 나의 '이성적 의식적 자아'가 그것과의 합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게이브리얼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여, 물체의 세계에 속하는 육체보다 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의식·이성을 우위에 두는 플라톤·기독교·데카르트 이래의 서양적 이성 개념, 인간관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이 땅과 하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이 한 곡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가 어디까지나 '서양적 자아가 바라보는 세계'를 노래하고 있었음에 반해, 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인간의 근원적 자아가 바라보는 세계'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래하는 것은 물론 서구인인 피터 게이브리얼이라는 한 개인이지만, 실상 그는 '노래하는 자'라기보다는 '노래 불리어지는 자', '노래하도록 명령받은 자'에 가깝다. 한 마디로 앨범의 노래하는 이는 '무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조작'하지 않으며,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부름'에 응답하고, 그것에 '순종'할 뿐이다.

이러한 내용적 측면을 떠나 게이브리얼 밴드와 게스트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이전 와도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이 곡의 서두를 장식하는 패스트와 게이브리얼의 무그·신서사이저·프로펫 및 CMI 사운드는 이미 서구적 화음의 정통적 문법을 이탈하고 있으며, 특히 81년 조직된 재결성 킹 크림즌의 베이시스트가 된 토니 레빈의 베이스 사운드는 이전의 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장적' 곡 해석 능력을 보여준다. 이는 마로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실로 마로타의 드럼과 레빈의 베이스는 앨범 전반을 통해, 정확히 말하면, 곡의 '해석'이 아닌, '창조' 능력이라고나 해야 할 놀라운 연주를 들려준다(특히 레빈의 경우에는 보다 '모던한' 지향점을 가졌던 81년의 킹 크림즌 앨범 (81)과도 음색 및 연주 주법 상에서 적절한 차별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노래의 백미는 영혼을 쏟아내는 듯한 게이브리얼의 보컬과 아프리카 가나의 북(鼓) 연주 집단인 '에코메 댄스 컴퍼니'(Ekome Dance Company)가 연주하는 중반 이후의 드럼 섹션이다. 특히 드럼 섹션 직전에 등장하는 게이브리얼의 보컬은 그의 모든 앨범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가창력이 발휘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본 작에서는 처음 등장하는 토니 레빈의 스틱과 데이빗 로즈의 기타가 리드하는 다음 곡 'San Jacinto'의 그의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노래인데, 게이브리얼은 미국 체류 중 우연히 한 아파치 인디언을 그의 집까지 태워 주게 된다. 그는 인디언과 밤을 새워 이야기하게 되는데, 게이브리얼은 이 인디언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 인디언은 자기 소유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자기 고양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인디언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이는 곡의 한 모티브가 되었다.

인디언은 '성인식'의 한 부분으로 방울뱀 자루를 맨 무당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무당은 방울뱀이 소년의 팔을 물도록 한 후 그가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소년을 남겨둔 채 산을 내려갔다. 그 인디언 무당은 후에 - 인디언의 표현을 따르면 - '날조된 살인 미수죄'(trumped up murder charge)로 기소되었다.

게이브리얼의 말을 들어보자: "결국 그가 살아서 내려오면 그는 용감해요. 돌아오지 못하면, 그는 죽은 거죠. 아주 간단하지요. 이게 인디언이 겪은 얘기예요. 그리고 또한 미국이 그의 문화에 대해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요."

산 하신토(San Jacinto)는 스페인어로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 근처의 산맥 이름이다. 이 산 하신토 지역에는 집집마다 수영장이 갖추어진 고급 휴양지와 가난한 '인디언 보호구역'이 인접해 있다: "전 이 곡에서 수영장이 딸린 인위적 백인 세계와 산악 지방의 문화 충돌을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바로 한 모퉁이만 돌면 인디언 캐년과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산 하신토는 신성한 산이지요."

노래의 후렴은 바로 이러한 소년의 영적 체험을 그리고 있다: "줄,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힘을 가진 이 줄을 잡는다. 산 하신토, 줄을 잡는다. 산 하신토, 독이 온 몸을 덮치고 어둠이 시야를 앗아간다, 줄을 잡는다. 그리고 눈물이 나의 부어오른 뺨을 흘러내린다, 의식이 흐려져 간다, 점점 힘이 빠진다. 줄을 잡는다, 줄을 잡는다. 산 하신토, 황금 독수리가 태양으로부터 내려앉는다, 태양으로부터."

그리하여 영적 체험을 거쳐 '인간의 대지'이자, '어머니 대자연으로서의 대지'인 땅으로 내려온 화자는 현대 에콜로지 운동의 선언문이라 할 다음과 같은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우리는 걸을 것이다, 이 대지 위를. 우리는 숨쉴 것이다, 이 하늘을. 우리는 마실 것이다, 저 시냇물을.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줄을 잡아라." 이 줄은 물론 삶의 줄, 생명의 줄이다.

다음 곡 'I Have The Touch'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한 곡이다. 게이브리얼은 3집 이후 '유모어'와 '미소'를 잃어버렸다. 이는 물론 그가 자신의 감정에 있는 그대로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곡은 78년 2집의 'A Wonderful Day In A One-Way World' 혹은 'Animal Magic' 이후 그의 앨범에서 무려 4년만에 처음 듣는 '밝은 곡'이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이 곡에서 그는 자신이 새로이 발견한 삶과 연대의,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의 '근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가사 참조). 그것은 '촉각', 살과 살의, 몸과 몸의 '접촉'이다. 질문하고 의심하기 전의 '악수', 몸의 부딪힘이다.

이는 마치 기(氣)로 이루어진 이 세상의 모든 물(物)들이 만나게 되면 그 사이에서 감(感)과 정(情)이 생겨난다는 동양의 논리와도 유사하며, 서양 자체의 논리로 찾아보자면 기존의 전통적 육체·정신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적인 '살의 현상학'(la ph nom nologie de la chair)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게이브리얼의 논리는 - 다음 곡 'The Family And The Fishing Net'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 이들 두 논리가 결여하고 있는 비교 문화론적 시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와 맥락에 있어 궤를 달리한다.

한편 이 곡에서 들려오는 마로타·게이브리얼·패스트의 신서사이저 드럼·프로펫 및 로즈의 기타 사운드는 앞의 두 곡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모던한 도시 공간적 분위기를 창조하고 있다.

한편 'I Have The Touch'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의 애정은 85년 피터 월시와 그가 리믹스한 'I Have The Touch - 85 Remix' 버전, 96년 로비 로버츠슨과 그가 리믹스하여 영화 에 사용된 또 다른 버전 등 그가 모두 다섯 개의 다른 버전을 취입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접촉 I Have The Touch]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러시 아워, 왜냐고? 난 러시를 좋아하니까
사람들이 밀고 당기는 게 난 너무 좋거든
어딜 가는지는 몰라도 그 많은 움직임들
나도 몸을 움직여 - 난 촉각이 있거든

난 점화를 기다려, 난 불꽃을 찾아
어떤 기회든 만나면 난 어둠 속에 불을 켜
넌 거기 내 앞에 서있지, 그 털과 그 머리카락들
내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난 촉각이 있거든

(후렴)

접촉을 바래
난 접촉을 바래
난 너와의 접촉을 바래
악수를 하자구, 악수를 하자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걸 나에게 줘
악수를 하자구, 악수를 하자구
악수를 하자구, 악수를 하자구

어떤 만남에서든, 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말하지
인사할 때마다 난 기회를 안 놓쳐
그래서 질문하고 의심하기 전에
내 손이 먼저 움직여 - 난 촉각이 있거든

(후렴)

턱을 당기고 머리를 빗고 코를 긁고 무릎을 안아 봐도
술, 음식, 담배를 해봐도 긴장이 안 풀려
손가락을 튕기고 팔짱을 끼어 보고 깊은숨을 쉬어 보고 다리를 꼬아 보고
어깨를 으쓱해 보고 허리를 펴 봐도 도저히 어떻게 만족이 안 되

(후렴)

다음 곡 'The Family And The Fishing Net'은 가사로 보아 아마도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인 부두(voodoo)적 예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희생의 서약, 목이 잘려진 닭들, 둥글게 춤추며, 축복 받은 그들, 옷을 벗어 던진, 남편과 아내"들의 "신경질적인 손이 칼을 단단히 움켜쥔다, 어둠 속에서, 덩어리가 잘려질 때까지, 차례로 돌려지는, 작은 조각들, 몸과 살, 가족과 고기잡이 그물, 그물 속의 또 다른 이들, 몸과 살"로 이어지는 가사처럼 게이브리얼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이 문화 인류학적 여정에서 서구의 선악 개념을 간단히 넘어서 버린다.

싱글 'Shock The Monkey'는 잔인한 동물 실험의 대상이 된 원숭이에 대한 곡이라는 일반의 추측과 달리 '사랑' 혹은 '질투'에 관한 곡이라고 게이브리얼은 말하고 있다. 여하튼 그는 질투라는 한편으론 집착이자 파괴를 의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지극한 적극적 사랑의 표현이 연인들 사이에서 불러일으키는 거의 모순되는 역설적 효과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양가적 효과는 '충격! 저 원숭이가 고통받는 것을 봐, 원숭이가'라는 거의 새디스틱한 가사와 이어지는 '원숭이에게 충격을 주어 그를 되살려라'(shock the monkey to life)라는 후렴구의 대비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더구나 이 '도저히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이 앨범에서 커트된 이 싱글은 당시로서는 그의 최대 히트곡이 되었다. 한편 이 곡은 1999년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에 의해서도 메틀 풍으로 (제목이 바뀌어) 리메이크되는 등 그 '기괴한 분위기'의 진가를 십분 발휘했다.

다음 곡 'Lay Your Hands On Me'는 단연 마로타의 드럼이 돋보이는 곡이다. 특히 중반 이후 신서사이저를 제외한 모든 악기가 연주를 멈추고 드럼만이 두 차례의 강력한 스트로크를 들려주는 부분은 곡의 전체적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가히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거의 사이버적인 초현대·초현실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무서운 고독과 공포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몸과 몸의 접촉'이, 이 곡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얼어붙은 바다 위에 번쩍이는 불빛, 차가운 감정의 말없는 무게를 본다. 나는 언제나 말없이 숨어있는 저 카메라, 저 스파이의 눈에 의해 감시당한다 ... 하지만 아직도 온기가 내 몸을 돌아 흐르고, 나는 당신이 나를 이해한다는 것을 느낀다 ... 여기에는 어떤 기적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으며 다만 상식만이 있을 뿐이다 ... 당신의 손을 내게 얹어요, 당신의 손을 내게 얹어요, 당신의 손을 내게, 내 위에"로 이어지는 가사처럼 라이브에서 게이브리얼은 이 곡이 연주될 때 무대 앞쪽 끝에 눈을 감고 뒤돌아 서서 관중을 향해 쓰러진다. 그는 관중들이 자신을 받아줄 것을 믿고 그들 위에로 쓰러지는 것이다. 관중들을 자신의 손을 그에게 얹는다, 그는 관중들에 의해 관중들 사이 저쪽까지 떠내려갔다가 관중들의 손에 의해 무대로 복귀한다.

한편 이상의 세 곡에는 이전 반 데어 그라프 제너레이터(Van Der Graff Generator)의 리더 피터 해밀(Peter Hammill)이 백 보컬리스트로 참여하여 곡의 완성도를 한층 높여 주고 있다.

앨범의 유일한 '현대적 발라드'인 'Wallflower'는 당시 폴란드 자유 노조의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Lech Walesa)에게 바쳐진 곡이다. 당시 바웬사는 공산 정부의 탄압을 받아 심지어 정신병원에까지 강제 입원되었는데, 이 곡은 국제 사면 위원회의 활동가이기도 한 게이브리얼의 '헌정곡'이다. 제명인 'Wallflower'는 원래 겨자과의 관상용 식물 중 하나인 '계란풀'을 의미하지만, 이는 그 식물의 볼품 없는 외모에서 파생된 '무도회 등에서 상대가 없는 여자, 인기 없는 처녀'를 뜻한다. 후렴을 살펴보자:

"포기하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내던졌잖아요. 당신의 감옥을 만든 이들이 총알과 몽둥이와 돌로 무장한 채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은 언제나 밤을 홀로 맞지요. 그들은 당신이 자신의 살과 뼈로 지어낸 자유를 향한 길을 보지 못 해요 ...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아요, 그들은 당신을 상자 속에 넣어 버렸고 당신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아요. 당신의 영혼을 잘 보살피세요, 다치지 않게요 ... 하지만 당신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당신은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난 당신에 말할 거예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하겠다고 말이에요."

후에 영화 에도 사용된 이 곡의 멜로디와 편곡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 곡은 게이브리얼이 만들어낸 최초의 서정적 저항 가요이다.

이 '어두운'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 'Kiss Of Life'는 'I Have The Touch'와 함께 '몸과 살, 살과 뼈'라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낸 게이브리얼이 부르는 '환희의 찬가', 즉 '생명의 키스'이다. 마로타·게이브리얼·패스트가 엮어 내는 절묘한 각종 타악기 소리의 앙상블이 흥겨운 이 곡의 내용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상징들로 채택된 것이 '여성'(big woman)과 '물'의 이미지인 것이 흥미롭다. 이는 이후 게이브리얼의 음악과 사상에 지속적 영향을 미칠 요소들이다.

한편 이상 앨범에 수록된 8곡들의 작곡 저작권 크레딧을 살펴보면, 보다 먼저 작곡되었고 보다 '민속' 음악적이며 '어두운' 분위기의 'The Rhythm Of The Heat', 'San Jacinto', 'The Family And The Fishing Net', 'Lay Your Hands'의 4곡은 '피터 게이브리얼 음악사'로, 보다 나중에 작곡되었고 보다 '현대적'이며 '밝은 분위기'의 'I Have The Touch', 'Shock The Monkey', 'Wallflower', 'Kiss Of Life'의 4곡은 '클리오파인 음악사'로 적혀있어 이 두 시기 사이에 게이브리얼의 인생과 음악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Rhythm Of The Heat'처럼 '라디오를 부수는' 반서구·반문명적 자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I Have The Touch'처럼 '도시의 러시 아워를 좋아하는' 현대적·문명적 자아이기도 하다. 게이브리얼은 '다양한 문화들의 탐색'을 통해 찾아낸 '새로운 삶과 연대의 근거'를 토대로 '행복과 기쁨의 근거',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박탈하는 착취자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삶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이후 5집 에서 찬란하게 꽃피게 될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정리해 보았던 그의 문제 의식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우선 '자신의 삶의 근거'이며, 더 나아가 '너와 내가 연대해야 할 근거'를 찾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근거는 '텃치'(touch), 즉 '촉각'이며 '감각'이며, 그 대상이 되는 '몸'이고 '살'이자, 그것들의 '접촉'에서 생기는 '애정'이며 '관심'의 느낌이다. 이는 물론 '이성/육체', '정신/물체'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던 서양의 전통적 인식론·존재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화권을 벗어나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 전통들을 탐색하면서 새로운 '보편적 인간성'의 제반 가능성들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는 음악적 측면에서 '리듬과 텍스츄어'(Rhythm and Texture)라는 게이브리얼 자신의 표현처럼 모든 곡들이 위에 적은 기본적 비교 문화론의 인식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수록곡들 하나하나는 리듬이라는 음악적 날줄과 문화 인류학적 탐색이라는 인식의 씨줄이 잘 짜여진 '피륙'(texture)이다.

실로 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야심적 작품이자, 음악적·인식론적 측면 모두에서 일정한 성취를 얻어내었던 무서운 걸작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앨범의 소리는 와는 또 다른 방식의 전율할 만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엔지니어를 겸한 공동 프로듀서 데이빗 로드의 공로도 그렇지만, 이미 단순한 기교적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의 독자적 이미지-공간을 창출해 내고 있는 '피터 게이브리얼 밴드'의 네 멤버, 마로타, 레빈, 패스트, 로즈의 공로도 잊을 수 없다.

가사·음악·연주와 그것이 갖는 텍스트·텍스츄어 등 앨범의 제반 요소들은 완전히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앨범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실로 그는 앨범의 내용에 걸맞는 새로운 음악적 색채와 형식의 창조에 성공했다. 그것은 서구 문명권으로서는 전대미문의 '살의 음악', '몸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앨범에서 우리가 읽어 내야 할 점은 '자기 삶의 근거', 더 나아가 '그러한 개인들 사이의 연대를 위한 근거'를 발견하려는 한 서양 아티스트의 두려움 없는 노력, 그리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그의 의지와 실력이다. 우리는 이 앨범을 음악과 인식의 양 측면 모두에서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정한 '인류의 모험'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1.11 # <Peter Gabriel: Deutsches Album>, WOMAD 그리고 '제너시스 조인트 공연'

RealWorld

게이브리얼은 1982년 <PG4: Security>를 발매한 직후 자신의 두 번째 독어 앨범 <Peter Gabriel: Deutsches Album>을 발매한다. 독어 앨범은 3집과 달리 거의 모든 곡에서 영어 음반과 연주, 특히 보컬 파트 부분이 다르게 믹싱 되었다. 한번 수록곡의 순서에서도 각기 영어 음반의 두 번째, 네 번째 곡 'San Jacinto', 'The Family And The Fishing Net'에 해당되는 'San Jacinto', 'Das Fishernetz'의 수록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첫 곡 'Der Rhythmus Der Hitze'부터 보컬의 믹싱은 훨씬 거칠고 '원초적'으로 의도되었고, 영어반의 'I Have The Touch'는 제목도 'Kon Takt!'로 바뀌어 특히 백 보컬 파트에서 원 곡과는 완전히 다른 편곡을 보여준다. 독어 앨범은 1982년 카리스마 레이블에서 LP로 발매되었다가 1987년 3집 독어 음반과 함께 버진 레이블에서 CD로 재발매되었다.

1982년은 이러한 음악적 풍부한 성과와 달리 그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내 질 게이브리얼과의 불화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점이다. 피터 게이브리얼은 후에 자신의 아내가 된 질 무어(Jill Moore)를 중학교 시절의 한 파티에서 만났다. 이후 오랜 연애 기간을 거쳐 그들은 1970년 12월 약혼했으며, 1971년 3월 결혼했다. 게이브리얼의 제너시스 탈퇴에 한 계기가 되었던 그들 사이의 첫 딸 안나(Anna)는 1974년 7월에 태어났으며, 둘째 딸 멜라니(Melanie)는 1976년 8월에 태어났다.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록 스타의 아내'라는 위치는 한 사람의 여성, 아내로서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항시 직면해 있는 처지임에 틀림없다. 필 콜린즈도 제너시스와 자신의 상업적 성공 이후 동일한 고통을 겪게 되지만, 평론가 크리스 웰치의 자료에 따르면 연간 수백 회의 세계 순회 콘서트, 새로운 앨범의 녹음, 언론사 등과의 인터뷰 등으로 보통 게이브리얼이나 콜린즈같은 '스타들'이 1년 중 집에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게 보아도 평균 잡아 3개월 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웰치는 이를 '록 스타의 그늘'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실로 그 아내들, 더구나 어린 자녀가 있는 입장에서 아내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고독감은 쉽게 상상될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질 게이브리얼은 이러한 고독감을 못 이겨 결국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만다. 더구나 불행히도 그 상대는 4집 앨범의 프로듀서 데이빗 로드였다. 4집 앨범은 게이브리얼 자신의 집에서 녹음·제작되었으며, 이미 데이빗 로드는 80년 이후 게이브리얼의 엔지니어로서 다른 제작진들과 함께 게이브리얼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한편 녹음을 마친 게이브리얼은 앨범의 발매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사이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후에 사실을 알게 된 게이브리얼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이후 수년간 지속될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게이브리얼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WOMAD 프로젝트의 재정적 파산이었다. WOMAD는 게이브리얼의 주도로 1982년 창립된 국제 민속 음악 페스티벌 '음악과 춤의 세계'(World Of Music And Dance)의 약자이다. WOMAD는 1982년 영국 리딩에서 첫 페스티벌을 기획했으나, 모든 '선구적' 시도들이 대개 그러하듯 일반의 인식 부족 등 당시의 여러 악조건들 및 주최측의 경험 미숙 등으로 엄청난 적자로 막을 내렸다(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특집 <세계로 열린 창: WOMAD & Real World>를 참조).

당시까지만 해도 WOMAD의 조직은 물론 운영에까지 핵심적 멤버로 관여하고 있던 게이브리얼은 이로 인해 완전히 파산했고, 계획하고 있던 레코딩 스튜디오·컴퍼니의 설립은 물론 WOMAD 페스티벌 자체도 단 1회로 끝나고 말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게이브리얼은 예기치 못했던 이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위기를 간신히 벗어나게 된다. 그의 파산 소식을 들은 제너시스가 그와 WOMAD를 위한 1회의 조인트 콘서트에 동의해 주었던 것이다. 실로 제너시스와 피터 게이브리얼 팬들은 본의 아닌 계기로 자신들의 '환상'이 실현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콘서트는 1982년 10월 2일 영국 밀튼 케인즈 보울의 야외 무대에서 열렸다. 피터 게이브리얼과 제너시스가 함께 공연한 것은 1975년 5월 프랑스 고별 공연 이후 7년만의 일이었다. 슬프게도 공연 당일 내내 비가 내렸지만, 약 5만 명의 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그들은 'Musical Box' 같은 곡들을 연주했다. 연주 중 게이브리얼과 콜린즈는 서로의 포지션을 바꾸어 콜린즈가 보컬을, 게이브리얼이 드럼을 맡기도 했으며, 심지어 77년 10월 그룹을 탈퇴한 스티브 해킷마저도 'I Know What I Like'와 'The Knife'에 등장해 기타를 들려주었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렇게 해서 게이브리얼은 기적적으로 자신과 WOMAD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12 # 1983: <Plays Live> - 첫 솔로 라이브 더블 앨범

 

1983년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첫 솔로 라이브 앨범 <Plays Live>를 발매한다. 여기서 게이브리얼의 공연에 얽힌 에피소드 두 가지를 소개한다. 게이브리얼은 언제나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 소통을 중시했는데, 이를 위해 그는 관객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자 했다. 1971년 6월 19일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의 리드 싱어로서 영국 에일즈베리에서 약 700석의 공연장을 가득 메운 팬들 앞에서 정열적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당시 제너시스의 프로모터였던 데이빗 스탑스(David Stopps)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 즈음해서 제너시스의 팬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어요. 그날 공연은 정말 너무 환상적이었는데, 관중들도 앵콜을 연발했지요. 공연의 절정 부분에서 'The Knife'를 연주하고 있는데 갑자기 게이브리얼이 무대 맨 뒤로 갔다가 앞으로 막 달려가는 거예요. 무대 끝에서 멈출 줄 알았는데 ... 그냥 그대로 관중들에게 뛰어들더라고요! 관중들과 하나가 된다는 생각에 게이브리얼은 1.5M 정도 되는 무대에서 그냥 아래로 뛰어 내린 거예요, 그것도 전속력으로 말이에요." 크리스 웰치의 말대로 '아마도 게이브리얼은 이후 80년대 후반 이후에나 유행하게 될 스테이지 다이빙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스탑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중들은 춤을 추고 있던 어떤 한 커플만 빼고는 모두 옆으로 흩어졌지요. 아마 그 커플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환각이고 사실일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게이브리얼은 그 커플 위로 정통으로 떨어졌어요."

물론 게이브리얼은 관중들 모두가 그를 '안전하게' 받아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스탑스와 친구들이 한쪽 발로 절룩거리는 그를 부축해 다시 무대 위로 데리고 올라왔는데, 고통스러운 표정의 게이브리얼은 여하튼 무대 위에서 글자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자세로 공연을 마쳤다. 그러나 나머지 멤버나 관중들은 그가 그저 조금 다리를 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무대를 빠져나갔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무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에야 그들은 그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탑스는 후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날 게이브리얼은 로얄 벅스 병원으로 실려갔지요 ... 후에 그는 종종 공연에서 ('Lay Your Hands On Me'처럼 - 인용자 주) 관중들에게 등을 보인 후 천천히 그들 위로 넘어져 스테이지 다이빙을 시도하곤 했는데, 옛날 71년 에일즈베리에서 했던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방식이지요."

한편 80년의 3집 발표 후 게이브리얼은 프랭크 자파(Frank Zappa)의 유럽 투어를 서포트하게 되는데, 이 중 베를린 공연에서 그는 보다 '심각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자파의 팬들 중 그의 음악을 싫어했던 관중들이 그를 야유했던 것이다. 게이브리얼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관중들이 저한테 막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막 때리려고까지 했지요. 어떤 관중은 '영국 돼지야, 집으로 돌아가!'(English pig, go home!)라고 소릴 질렀지요. 전 무대 위로 기어올라가 그 때 제 노래 중에 가장 조용한 'Here Comes The Flood'를 불렀는데, 그것도 전혀 먹히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걸어내려 왔지요. 그날 밤은 가수로서 제 인생 최악의 날이었어요. 그 때까지 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언제나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 일이 저한테 일어났던 거예요. 그런데 일단 그 날의 충격과 상처가 좀 가시자 전 생각을 좀 달리하게 되었어요."

다음 공연도 역시 자파 밴드의 브레멘 공연 서포트였는데 - 그 날도 특히 그렇게 게이브리얼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만은 아니었지만 -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전 편안하게 마음먹고 웃기도 하고 열심히 노래했지요. 그랬더니 관중들도 호응해 주더라고요. 마지막에는 훨씬 좋아졌어요. 그렇다고 공연이 '환상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전 관중들로부터 거부당하고 도전당할지도 모른다는 저의 두려움을 이겨낸 거예요."

1983년 발매된 더블 라이브 앨범 <Plays Live>는 사실 스튜디오 앨범 와 의 사운드적 충격을 안고 무대를 찾았을, 혹은 음반을 구입했을 팬들에게는 자못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 앨범 수록곡들의 연주는 원 스튜디오 버전의 그것이 가진 테크놀로지상의 완숙한 세련미와 텍스츄어상의 완숙한 조형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첫 곡을 여는 'The Rhythm Of The Heat'이나 'I Have The Touch'같은 신서사이저·키보드 위주의 곡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스러운 첫인상과는 달리 앨범은 들을수록 라이브 특유의 거친 박력과 힘이 넘치는 음반, '자주 꺼내 듣고 싶은' 이상한 매력을 가진 음반으로 다가온다. 앨범의 음악적 키워드는 마로타의 드럼과 레빈의 베이스·스틱이다. 이 앨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이들 두 멤버의 리듬 파트가 리드하는 'I Don't Remember', 'I Go Swimming', 'Biko' 같은 곡들이다. 이들의 역량은 특히 'On The Air', 'D.I.Y', 'Solsbury Hill' 같은 1, 2집 수록곡들에서 뛰어나게 발휘되는데, 이 곡들은 스튜디오 원 곡보다 라이브 곡들이 훨씬 더 '매력적인' 희귀한 경우를 보여준다. 모두 ?곡이 수록된 본 더블 라이브는 이후 베스트 트랙을 모은 1-CD <Plays Live - Highlight!>도 발매되었다.

1.13 # 1985: <Birdy, Music From The Film> - 실패한 첫 영화 사운드트랙

 

1985년 카리스마 레이블의 사장 토니 스트래튼-스미스(Tony Stratton-Smith)는 자신의 레이블을 버진 레이블의 리차드 브랜슨에게 팔았다. 이후 1989년 게이브리얼이 자신의 레이블 리얼 월드를 설립하기 이전까지, 게이브리얼의 앨범들은 영국에서는 카리스마·버진에서, 미국에서는 84년 새로이 게이브리얼과 계약을 맺은 게펜에서 발매되었다. 1985년 게이브리얼은 젊은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영화 음악을 맡게 된다 - 그는 78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지금 가수가 아니라면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마도 영화 감독, 제작자 혹은 사진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영화는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The Wall>(82)의 앨런 파커(Alan Parker) 감독이 연출한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였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에는 게이브리얼이 작곡한 12곡이 담겨있으며, 제작자로는 게이브리얼 자신과 이전 U2의 앨범을 제작했던 프로듀서 다니엘 라누아(Daniel Lanois)가 참여했다. 앨범에는 존 하셀, 에코메 드럼 컴퍼니, 래리 패스트, 토니 레빈, 제리 마로타, 데이빗 로즈, 매니 엘리어스, 모리스 퍼트, 존 기블린 등 - 하셀과 라누아를 제외하고 - 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아티스트들이 다시금 참여하고 있다.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장례식에 울려 퍼졌으면 하는 음악'으로 본 작의 'The Birdy Song'을 들고 있을 정도로 애정을 표시하고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나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본 작은 음악적 실패작이다. '리듬과 텍스츄어'라는 제작 방침의 명백한 연장선상에 있는 본 작은 자신의 말대로 '텍스츄어와 사운드'(texture and sound)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앨범은 포인트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으며, 그 필연적인 결론으로 청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게이브리얼은 앨범에서 각기 이전 3집의 'Family Snapshot', 'Not One Of Us', 4집의 'The Rhythm Of The Heat', 'Wallflower', 'San Jacinto' 등 다섯 곡을 차례로 'Close Up', 'Birdy's Flight', 'The Heat', 'Under Lock And Key', 'Powerhouse At The Foot Of The M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인스트루멘털화하여 선보이고 있는데 모든 곡이 하나같이 원 곡의 세련된 깊이와 감성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들이다.

아마도 우리가 앨범에서 찾아볼 수 있을 몇 가지 의미는 앞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제작자 다니엘 라누아와의 만남, 처음으로 자신만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사운드트랙을 제작해 봄으로써 전반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을 그가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다.

1.14 # 1986: 걸작 5집 - 음악성과 대중성, 그리고 실험성의 완벽한 결합

 

1986년은 1975년 제너시스 탈퇴 이후 게이브리얼이 자신의 솔로 앨범들에서 해왔던 모든 실험과 노력이 완숙한 형태로 꽃핀 해이다. 1986년 5월 그는 대망의 5집 를 발매한다. 그보다 한 달 먼저 발매된 첫 싱글 'Sledgehammer'는 놀랍게도 미국 1위, 영국 4위를 기록했다. 앨범은 영미 모두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이어졌던 싱글들도 'Don't Give Up' 영국 9위, 'In Your Eyes' 미국 26위, 'Big Time' 미국 8위, 영국 13위, 'Red Rain' 영국 46위 등 좋은 순위를 기록했다. 이렇게 모두 다섯 곡의 히트곡을 낸 앨범은 미국에서만 300만장 이상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아래에서는 앨범의 이러한 상업적 성공 이면의 음악적·실험적 성과들을 점검해 보도록 하자.

앨범의 제작자는 85년의  앨범과 같은 게이브리얼/라누아 콤비가 맡고 있다. 엔지니어는 라누아와 케빈 킬렌(Kevin Killen)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전 앨범이 당시 막 설립된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기본적인 녹음·믹싱이 진행되었다는 점, 이후 리얼 월드 스튜디오·레코드 컴퍼니의 중요 멤버로 부각되는 데이빗 보트릴(David Bottrill)·데이빗 배스쿰(David Bascombe) 등이 보조 엔지니어 등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글자 그대로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이다: 드럼·퍼커션의 제리 마로타·마누 카체·스튜어트 코플랜드, 베이스·스틱의 토니 레빈·래리 클라인·빌 라스웰, 기타에 데이빗 로즈·다니엘 라누아·나일 로저스, 피아노·키보드·신서사이저·프로펫 등에 리차드 티·사이몬 클락, (일렉트릭) 바이올린에 샹카르, (백) 보컬에 로리 앤더슨·유순 두르·케이트 부시 등이 참여하고 있다.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도 피아노·퍼커션·신클라비어·CMI·프로펫·린 드럼 머신·CS80 등 신서사이저를 담당하고 있다. 정말 '초호화판' 멤버들이다.

이들 중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들은 새로이 등장한 드럼의 마누 카체(Manu Katche), 바이올린의 샹카르(Shankar), 게스트 보컬의 유순 두르(Youssou N'Dour)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의 면면에 감탄하기보다는 먼저 앨범을 꼼꼼히 들어보고 분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호화판 아티스트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졸작'에 불과한 수많은 앨범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 경우는 과연 어떠할까?

구체적 분석에 앞서 우선 앨범의 이해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말 한 가지를 인용해 보도록 하자: "리듬과 텍스츄어, 사운드에 온전히 바쳐졌던 와 이후 저는 제 기존 시스템을 벗어났던 거지요. 제가 에서 주목했던 것은 '노래'(songs)예요 ... 전 이전보다 좀 더 재미있게, 좀 더 열려 있게, 그리고 좀 덜 신비적이고 싶었어요 ... 그 사실과 그러한 사실의 부드러운 긍정 둘 다를 모두 포함한 '치료로서의 예술적 창조 작업'(creation as therapy)이 를 일관하는 핵심 요소예요 ... 는 이전 저의 어느 앨범보다 정서적으로 직접적인 표현 방식을 택한 앨범이에요."

앨범을 관통하는 한 마디 문장, 열쇠말은 '치료로서의 창조'이다. 게이브리얼은 특히 아내 질 게이브리얼과의 별거와 재결합 등 84-85년 동안 무척이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으며,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가 택한 탈출구이자 구원의 방식이 바로 '치료로서의 예술 활동'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앨범의 분석을 시작해 본다.

우리는 첫 곡 'Red Rain'이 시작되면 채 30초도 되지 않아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드럼·베이스·기타·키보드의 앙상블에서 실로 놀라운 '사운드적 충격'을 느끼게 된다. 그룹 폴리스 출신의 드러머 스튜워트 코플랜드의 하이-해트 사운드로 시작되는 이 곡에서 들려오는 게이브리얼의 보컬은 가히 절정의 기량과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레빈의 베이스 또한 단순한 반주의 차원을 넘어선 자신만의 예술적 표현 영역의 구축에 성공하고 있다. 이 곡을 포함하여 앨범의 사운드가 들려주는 전체적 질은 가히 최정상급이며, 이는 물론 프로듀서 라누아와 새로운 스튜디오 리얼 월드 덕분이다. 한편 게이브리얼이 연주하는 피아노는 이 곡뿐 아니라 앨범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음악의 정서적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앨범에서 피아노와 신서사이저는 깊이 있고 그윽한 베이스와 어울리면서 고통에 지친 화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는 치료적 요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Red Rain'의 가사는 '붉은 비'라는 강렬한 이미지의 제명이 보여주는 것처럼 1집의 'Here Comes The Flood'에 이어지는 내면적 무의식의 분출, 홍수를 다루고 있다: "저는 몇 년 전에 똑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곤 했어요. 전 큰 파도가 치는 검붉은 바다 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어요. 전 바다가 하얀 두 개의 벽에 의해 갈라질 때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는 것을 기억해요 ... 전 붉은 바다와 붉은 비가 내리는 이 이야기를 거부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 썼어요 ... 전 고통스러운 감정이 드러내지지 않으면 그것이 곪고 더 커질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밖을 향해 터져 나온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개인적 감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으면 그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홍수처럼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게 되지요." 이는 물론 19세기 에너지 보존 법칙에 입각했던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신분석 이론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 과연 '붉은 비'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지쳐 있는 우리들의 무의식 위로 홍수처럼 쏟아지는 우리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 느낌의 토로이다.

싱글 'Sledgehammer'는 그가 어린 시절 즐겨 듣던 60년대 (모타운 사운드적) 소울 음악에 바치는 오마쥬이다. 이 곡에서는 그의 곡으로는 오랜만에 혼 섹션 파트가 등장하는데, 이 브래스 혼 파트는 아프리카 출신 프랑스인 카체의 드럼과 레빈의 베이스와 멋들어지게 어울리면서 'Sledgehammer'를 2000년 3월 현재까지 그의 유일한 전미 1위 곡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곡의 내용은 중층적이고 은유적인데, '쇠망치'를 뜻하는 제명은 소울 음악의 본질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적 비유를 담고 있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좋은 책이란 마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쇠망치 같아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대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성을 말하고 있다: "제가 이 노래에서 한편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연인들 사이에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때론 섹스가 이 얼어붙은 관계를 깨는 무엇보다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에요."

한편 그는 4집의 초현실적인 비디오 클립 'Shock The Monkey' 이후 본격적으로 뮤직 비디오의 가능성을 천착해 왔는데, 특히 토킹 헤즈의 데이빗 번(David Byrne) 등과 작업했던 스티븐 R. 존슨(Stephen R. Johnson)이 제작한 이 곡의 '클레이메이션'(claymation) 비디오 클립은 음악 전문지 <The Rolling Stone>이 93년 10월호에서 발표한 특집 '역대 뮤직 비디오 100선'에서 당당 1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다음 곡 'Don't Give Up' 역시 영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어 9위에 오른 곡인데, 곡을 리드하는 레빈의 베이스가 두드러진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페이딩 솔로 베이스는 이미 재결성 킹 크림즌의 멤버로 활동하던 레빈의 역량이 유감 없이 발휘된 부분이다.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케이트 부시(Kate Bush)와의 듀엣으로 부른 이 곡은 원래 게이브리얼만의 솔로 보컬로 이루어진 곡이었으며, 대부분의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앨범 수록 이전에 수많은 다른 '실험 버전들'이 제작되었었다. 그 버전들 중 하나는 가스펠-컨트리 스타일이었으며, 노래를 주의 깊게 들으면 이러한 영향이 앨범 버전의 피아노 파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 더스트 보울(Dust Bowl) 지역 농부들의 어려운 상황을 그린 이 곡의 내용은 게이브리얼로 하여금 '아름다운 음악과 가사로 인하여 용기를 얻었다'는 수천 통의 편지를 받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한다(가사 참조). 게이브리얼의 피아노 소리가 어둠 속의 빛처럼 나직하고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다음 곡 'That Voice Again'은 제명처럼 '나는 너의 목소리를, 바람 소리를 듣고 싶고, 너와 함께, 너와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지만, 내 머리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모든 것에 자신의 색깔을 덧입히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아 ...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사랑하게 할 수 있어(only love can make love)'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한편 이 곡에서는 제너시스 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12-현 기타가 사용되고 있다.

[포기하지 말아요 Don't Give Up]

이 자랑스런 땅에서 우린 강하게 길러졌지
사람들은 항상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겼지
어른들은 언제나 투쟁하고 또 이기라고 말했지
하지만 내가 무너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이제는 더 이상 싸울 것도 없어
그게 아니라면 난 단지 모든 꿈이 깨져 버린 한 인간일 뿐
난 내 모습도 바꾸고, 심지어는 이름마저도 바꿔 보았어
하지만 세상은 네가 넘어졌을 때 아무도 널 원하지 않아

*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에겐 친구가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 난 당신이 잘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주변에서 언제나 보아 오긴 했지만
내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우린 정말 마지막까지 버틸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세상이란 참 이상한 거야

지난밤엔 차를 몰고 고향을 갔었지
내가 태어난 곳, 그 호숫가엘 말이야
날이 밝았을 때, 고향의 모습이 내게 펼쳐지더군
예전의 나무들은 불타 버리고 이젠 재가 되었어

**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에겐 우리가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 우린 뭐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하지 않잖아요?
   포기하지 말아요 - 왜냐고요? 우리에겐 우리 모두를 함께 품어 주는 그 곳이 있잖아요

   지금은 그냥 쉬어요 - 당신은 너무 걱정을 많이 해요
   다 잘 될 거예요 -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면 우리에게 기대어 쉬면 되잖아요
   포기하면 안돼요 - 정말 포기하면 안돼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더 이상은 못 견디겠어
옛 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를 쳐다볼 테야
어떤 일이 닥쳐도, 어떤 일이 생겨도
저 강은 흐를 테니까, 저 강은 흐를 테니까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었지, 정착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었어
하지만 어떤 직업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에겐 친구들이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포기하지 말아요 -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에겐 아직 우리가 있어요
    지금 포기하지 말아요 - 우린 당신 지금 그대로가 자랑스러워요
    포기하지 말아요 - 인생이 항상 그렇게 쉽지는 않았잖아요
    포기하지 말아요 - 왜냐고요? 우리에겐 우리 모두를 함께 품어 주는 그 곳이 있잖아요

LP 뒷면의 첫 곡 'In Your Eyes'에는 WOMAD를 통해 그가 서구 팝계에 처음으로 존재를 알린 세네갈의 뛰어난 싱어 유수 은두르가 게스트 보컬로, 인도 출신의 전위적 실험적 뮤지션 라비 샹카르가 일렉트릭 바이올리니스트로 참여하고 있다. 한편 1996년 발매된 CD-롬 에는 이 'In Your Eyes'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 있다: "처음 아프리카 음악을 배울 때 저는 그들이 낭만적 성적 사랑과 영적 사랑을 함께 노래하는 것에 매료되었어요. 그들의 종교적 관념에선 낭만적 성적 사랑과 영적 사랑이 분리되지를 않았거든요. 우리 서양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아프리카의 전통적 사랑 노래의 가사에서 신에 대한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구분해 내기는 참 어려워요. 개인의 낭만적 사랑이 -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진다면 - 분명 신성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거든요. 저도 이 노래 가사에서 가급적 애매한 표현들을 써서 두 사랑을 잘 구분 못하도록 했어요. 누군가 육체적으로 끌리는 사람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이후의 정신적 유대감을 이끌어내는 건 분명 육체적 매력이에요."

그는 3집 이후의 음악적 실험과 WOMAD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속한 문화 이외의 정서 표현 방식을 자신의 음악에 도입하고 있다. 물론 게이브리얼 자신의 말처럼 이 노래의 '눈'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문화를 초월한 인간 보편의 심성, 즉 '마음의 창'이란 명제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저는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당신은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모든 생각을 느끼고 알 수 있고, 또 그와 대화할 수 있다고 믿어요. 물론 제가 무슨 예언자처럼 굴려는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 노래는 모든 곡이 아름답고 뛰어난 앨범 중에서도 'Don't Give Up'과 함께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트랙으로 꼽을 만 한데, 게이브리얼은 자기 공연의 말미를 - 이전 'Biko'로 마무리하던 보다 어두운 시절의 라이브와 달리 - 이후 이 두 곡으로 장식하곤 하게 된다.

'Mercy Street'는 '자비의 거리'라는 제목처럼 이해와 관용을 바라는 한 인간의, 거의 구도적인 소망을 담은 곡이다. 이 곡은 '치료로서의 창조 행위'라는 본 작의 주제에 걸맞게도 '치료로서의 글쓰기'(writing as therapy)에 관한 곡이다. 이 곡에는 'for Anne Sexton'이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미국의 평범한 주부였던 앤 섹스튼은 이상적 '아버지 상'(father figure)에 관련된 정신적 문제를 가졌던 여성인데, 그녀는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글을 써보라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To Bedlam And Par Away Back>이란 일련의 글들을 썼는데, 그 중에는 <Mercy Street>라는 미발표의 희곡과 시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Mercy Street>는 - 그것이 신이든 의사이든 신부이든 또 무엇이든 - 한 여성, 인간이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 상'에 관한 연극이다.

이에 대한 음악적 화답인 게이브리얼의 곡 'Mercy Street' 역시 이러한 꿈의 이미지와 메시지로 가득 찬 곡이다. 노래의 후렴에서 게이브리얼은 '자비의 거리를 꿈꾸며, 너의 속마음을 드러내, 자비의 거리를 꿈꾸며, 너의 아버지 팔에 다시금 안기어, 자비를 꿈꾸며, 그것이 너의 한숨을 가져갈 거야, 자비의 거리를 꿈꾸며'라고 노래한다. 그는 86년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그녀를 살게 만들었고, 그녀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그런 추구, 노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지요."

'최고·일류'를 뜻하는 'Big Time'은 현대 사회에서 거의 종교·신의 위치를 차지한 '성공'(success)에의 맹신을 풍자하는 곡이다. 앨범의 가사에는 제명 뒤에 부제처럼 'suc cess'라고 적혀 있는데, 이렇게 글자를 떼어놓으면 앞부분 'suc'의 발음은 영어의 비속어 'suck'(성기를 빨다)과 같은 발음이 되어, '엿먹어라!' 정도의 뜻이 된다. 이 곡은 미국 8위에 올라 그의 두 번째 (그리고 현재까지 마지막) 전미 탑 10 히트곡이 된다.

마치 킹 크림즌 재결성 3집 <Three Of A Perfect Pair>(84) 수록곡 'Nuages (That Which Passes, Passes Like Clouds)'를 연상케 하는 다음 곡 'We Do What We We're Told - Milgram's 37'는 게이브리얼의 표현대로 '텍스츄어와 분위기'가 중심 테마로 작용하는 이질적인 곡이다(이 곡은 원래 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에 실린 곡이다). 제명인 '우리는 명령받은 대로 행동한다 - 밀그램 37'에는 특이한 배경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 교수인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독특한 심리학 실험을 행한다. 실험자인 학생들은 피실험자인 환자들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명령'받는다. 그러나 처음에는 약하게 진행되던 충격의 강도는 곧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강도에까지 이르게 되고, 환자들은 고통에 못 이겨 소리치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은 '명령'받은 대로 환자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전기 충격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러나 실제 실험에서 전기 충격 장치는 작동하지 않으며, 다만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가짜 환자들이 충격의 강도에 따라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거짓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다만 '실험자'인 학생들뿐이다. 따라서 실제로 실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환자들이 아니라, 실험자인 '학생들'이다.

이러한 괴상한 실험은 '인간이 한 조직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때, 그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게 되는가'를 알기 위한 실험이다. 쉽게 말하면 이는 일제의 마루타 실험이나, 나치의 수용소에서처럼 극한적 상황에 놓인 개인(예를 들면 말단 병사)의 심리 상태와 태도를 알기 위해 고안된 실험이다. 결과는? 몇몇 학생들은 충격 버튼을 누르기를 거부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명령받은 대로' 버튼을 눌렀다. 여하튼 괴로워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실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학생의 비율은 무려 80%에 가까운 수치였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곡의 말미를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하나의 의심,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전쟁, 하나의 진리, 하나의 꿈" - 그것이 부정적인 것인지 긍정적인 것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뿐이다. CD의 마지막 보너스 트랙 'This Is The Picture'는 1984년 1월 1일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던 백남준의 비디오 기획 <Good Morning, Mr. Orwell>을 위해 작곡된 곡이다. 곡은 미국의 전위 뮤지션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과의 공동 작품이며, 노래도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하여 불렀다. 이 곡은 따라서 앤더슨의 앨범 <Mr. Heartbreak>(?년)에도 'Excellent Birds'라는 제명의 상이한 버전이 실려 있다. 거의 같은 멤버들이 연주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판단으로는 본 게이브리얼 앨범의 새로운 믹싱 버전이 전자를 압도하는 사운드적 안정성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

이상 대략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체적으로 앨범의 사운드는 녹음·믹싱·엔지니어링 등 기술적 측면에서 완벽하며, 86년 당시의 기준에서는 가히 '충격적'이다 - 사실 지금 들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물론 게이브리얼이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막 설립한 리얼 월드 스튜디오 덕분이다(심지어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앨범 사운드의 비밀은 물론 기존의 다양한 어쿠스틱·일렉트릭·일렉트로닉 악기들의 소리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한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있다. 여기서 사운드의 측면에서 그의 솔로 앨범을 지배하는 악기들의 변천을 정리한 평론가 크리스 웰치의 탁월한 지적을 들어보자:

"의심의 여지없이 게이브리얼이 이전 앨범들에서 사용한 주요 악기들은 노래들의 구상과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집에서 그는 주로 피아노를 사용했으며, 2집에서는 새롭게 개발된 린(Linn) 드럼을 사용했다. 3집에서는 프로펫(Prophet)이, 4집에서는 페어라잇(Fairlight)이 그 역할을 담당한 반면, 에서는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크게 의존했다."

물론 에는 1-4집의 모든 악기들이 골고루 사용되고 있으나, 새로이 설립된 스튜디오와 새로 채용한 신개발 전자 악기·기계들이 들려주는 '소리'는 단순한 음향적 측면에서도 1-4집의 성과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모든 공은 물론 게이브리얼 자신 그리고 특히 프로듀서 다니엘 라누아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 라누아는 실로 인생과 음악의 양 측면에서 자기만의 '어두운' 시기를 지나 보다 열린 '밝은' 세계로 나아가려던 당시의 게이브리얼에게 가장 적합한 프로듀서였다. 라누아는 게이브리얼이 이제껏 자신의 다섯 장 앨범들에서 추구해 왔던 음악적 실험의 성과를 충분히 포섭하면서도 그 위에 상업적 대중성과 정치적 저항성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게이브리얼만의 그릇'을 만들어 내기에 최적의 공간을 창조해 주었다.

는 한 마디로 그가 75년 그룹 탈퇴 이후 행해 왔던 모든 실험과 성과가 가장 완숙하고 정교한 형태로 혼합된 우리 시대의 '걸작'이다. 앨범은 그야말로 음악적 완성도, 대중성, 비타협성의 측면에서 모두 '만점'이다. 그러나 앨범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자신의 음악을 '타락'시키지 않은 채, 아니 보다 비타협적이고 보다 더 자기 자신의 모습에 충실한 채로 이 모든 것을 성취했다는 사실이다(실상 이른바 프로그레시브·아트 록으로 분류되었던 아티스트들 중 자신의 음악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이 정도의 대중적 성공을 거둔 경우는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과 피터 게이브리얼의 본 작 정도밖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앨범에 나타난 모든 사상은 그가 이후 추구해 온 생각의 필연적인, 더욱 완숙한 결론이다. 더욱이 앨범에 담겨 있는 음악은 - 이후 그가 창조해낸 '두렵고 무시무시한' 살과 몸의 음악을 뛰어넘어 -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성숙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듣는 이는 이 '슬프고 아름다우며 또한 즐거운' 앨범에서 따듯한 위로와 애정의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서른 여섯 살이 된 1986년의 5집 에서 비로소 자신의 음악적 개성과 색깔을 완전히 구축한 것이다.

1.15 # 1989: '리얼 월드 레코드 컴파니'의 설립과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 & <Passion Sources>

  RealWorld

1986년 앨범의 상업적 성공을 채 만끽하기도 이전인 1987년 가을 게이브리얼은 아내 질 게이브리얼과의 17년에 걸친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독신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그는 87년 앞으로 5년간 지속되게 될 심리 치료를 받게 된다. 80년 이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던 피터와 질의 결혼 생활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던 게이브리얼에게 나타난 새로운 여성은 미국의 영화 배우인 로재너 아르켓(Rosanna Arquette)였다. 그는 영화 감독 마틴 스콜시즈(Martin Scorsese)의 영화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의 음악을 위해 83년 스콜시즈를 만났다가 함께 작업하던 아르켓을 만나게 된다.

1959년 생으로 게이브리얼보다 아홉 살 연하인 아르켓은 영화 <Desperately Seeking Susan>으로 데뷔했다. 그녀는 <Pulp Fiction>의 '조디', 의 '가브리엘' 등으로 출연했으며, 옴니버스 영화 <New York Story>의 마틴 스콜시즈 감독 부분에 등장했고, 85년 역시 스콜시즈 감독의 <After Hours>에 출연했다(물론 이 '로재너'(Rosanna)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물론 낯설지 않다. 'Rosanna'는 토토(Toto)의 앨범 (82)에서 빅 히트를 기록했던 싱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토토의 'Rosanna'가 바로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로재너'라는 사실이다! 당시 그녀와 연인 관계에 있던 토토의 키보드 주자 스티브 포카로(Steve Porcaro)가 그녀에게 자신의 곡을 바쳤던 것이다).

그녀는 83년 이후 게이브리얼이 최종적으로 질과 이혼하게 되는 87년까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83년 이후 또 다른 뮤지션 제임즈 뉴튼-하워드(James Newton-Howard)와 함께 살았으며, 게이브리얼이 이혼한 87년에는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고, 이후 89-92년의 3년 동안 게이브리얼과 동거하게 된다. 92년 이후 게이브리얼의 연인으로 등장한 여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일랜드 출신의 싱어 시니어드 오코너(Sinead O'Conner)와 독일의 모델 클라우디아 쉬퍼(Claudia Schiffer)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89년 게이브리얼은 오랜 시절 자신의 꿈이었던 두 가지 소망을 이루게 된다. 그것은 - 아마도 모든 아티스트들의 꿈일 -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 '리얼 월드 레코드 컴퍼니'의 설립과 스튜디오 '리얼 월드'의 완성이다. 그는 이를 위해 영국 배스(Bath) 부근의 박스(Box) 지역에 200년 가량 된 옛 농장과 건물을 구입했다. 게이브리얼이 86년 앨범의 성공 이후 그 여세를 몰아 실시한 세계 투어 <This Way Up>은 제너시스 이래 그가 행한 투어 중 최초로 흑자를 본 투어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그가 이제까지 얼마나 어려운 음악적 창작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이제까지 작업을 해 왔는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있다.

한편 스튜디오 건립을 위해 완벽한 기기와 기계를 구입하려는 게이브리얼의 관심은 미국에서만 300만장이 팔린 앨범의 인세로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여하튼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간신히 리얼 월드 레이블과 스튜디오를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리얼 월드 레이블에서 최초로 발매된 두 매의 음반은 자신이 음악을 담당한 영화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의 사운드트랙 과 <Passion Sources>였다. 스콜시즈는 이후 그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특히 와 , <Plays Live>의 'I Go Swimming', 'I Don't Remember' 같은 곡을 좋아했다. 영화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원래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54년 작품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Christos Xanastavronetai)를 영화화한 것으로 윌렘 대포우(Willem Dafoe)가 예수역을 맡아 88년 유니버설에서 발표되었다.

사운드트랙 <Passion - Music For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와 <Passion Sources>는 89년 발매되었다. 은 영화에 사용된 자신의 21곡을 모은 앨범이며, <Passion Sources>는 영화에 사용된 다른 아티스트들의 다섯 곡을 포함해 앨범에 참가했거나 영감을 준 아티스트들의 곡 등 모두 14곡을 모은 컴파일레이션 앨범이다.

LP 2장, CD 1장으로 발매된 앨범은 이전 85년 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말끔히 벗어 던지고 동서음악 교류사의 새 장을 연 기념비적 작품이다. 앨범에는 데이빗 보트릴·데이빗 로즈·데이빗 샌시어스·나산 이스트·빌 코뱀·마누 카체·존 하셀·로빈 캔터·리차드 에바스·매니 엘리아스·라비 샹카르·유순 두르 등 자신의 앨범에 참여해 주었던 범(汎) 서구권 아티스트들 이외에도 누스라트 파테 알리 칸·무스타파 압델 아지즈·바바 말·파탈라·두둔 다이예 로제·호삼 람지·마흐무드 타브리지 자데흐·쿠드시 에르구너·뮤지시엥 뒤 닐 등 놀라운 멤버들이 참가하고 있다.

우리에겐 완전히 생소하고 낯선 이름들이지만 누스라트 파테 알리 칸·호삼 람지·쿠드시 에르구너 같은 전통 음악인들은 각기 해당 분야의 명인(名人)들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우리 나라의 박동진이나 김덕수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 (전통) 음악인들의 국적은 파키스탄·터키·인도·아이보리 코스트·바레인·이집트·뉴 기니·모로코·세네갈·가나 등으로 유대에서 활동했던 예수라는 인물을 그린 영화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높지만, 한편 서구 문명권에 비교적 가까운 북 아프리카·중동 지역 출신이라는 공통점과 한계를 가지기도 한다. 앨범의 사운드는 게이브리얼 자신의 '은 나에게 소리와 기악 편성의 흐름(a fluidity of sound and instrumentation)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처럼 영화 맥락 자체의 내적 흐름에 완벽히 결합된 유연성·유동성을 보여준다.

앨범에서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이 그가 단독 제작한 첫 번째 작품이라는 사실과 이 앨범이 '동서 음악 교류사', 보다 정확히 말해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음악 교류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이다.

우선 처음으로 하나의 앨범을 온전히 자신이 제작한 게이브리얼의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은 가히 경탄할 만한 수준이다. 이는 나의 두 번째 지적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특히 을 <Passion Sources>와 함께 들어볼 경우, 우리는 그가 '세계 각지의 전통 민속 음악과 현대 서구 (대중) 음악의 결합'이라는 지난한 과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했는가를 알 수 있다. <Passion Sources>에는 누스라트 파테 알리 칸·바바 말·쿠드시 에르구너·호삼 람지·압둘 아지즈 엘-사예드·뮈지시엥 뒤 닐 등의 오리지널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박동진의 중 1편, 김덕수의 중 1편이 원래의 전통적 형태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Passion Sources> 앨범을 먼저 들어보고 후에 앨범에서 해당 아티스트가 연주한 곡을 들어봄으로써, 수록곡들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게이브리얼이 이들 아티스트들을 자신의 음악에 어떠한 방식으로 엮어 넣었는가를 알 수 있다.

결론은 한 마디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새로운 음악'의 탄생이다. 그것은 모든 참다운 만남이 그렇듯, 참여한 동서 아티스트들 모두의 원 개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 살아 있으면서도 - 즉 어느 한 편의 일방적 희생이나 적응에 기초한 것이 아닌 - 동시에 기존 양자 모두의 음악과 도 구별되는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음악적 언어의 창조이다.

예를 들어 <Passion Sources>의 호삼 람지(Hossam Ramzy)가 연주한 'Fallahi'와 누스라트 파테 알리 칸(Nusrat Fateh Ali Khan)이 연주한 'Shamas-Ud-Doha Bader-Ud-Doja'를 듣고 앨범에서 각기 그들이 참여한 'Before Night Falls'와 'Sandstorm' 혹은 'Passion'을 들어보거나, 쿠드시 에르구너(Kudsi Erguner)의 'Ulvi'를 듣고 의 'Wall Of Breath'같은 곡을 들어보면, 우리는 '프로듀서' 피터 게이브리얼의 역량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는 ECM과 같은 뉴 에이지 계열, 재즈-프로그레시브 계열의 몇몇 드문 앨범들에서나 성공했던 가히 완벽한 '화학적 결합'이다. 앨범에 수록된 21곡은 마치 하나의 곡처럼 자기의 '유기적 흐름'을 유지하며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따라 흘러간다. 한편 이러한 인상은 우리가 완성된 영화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속에 사용된 음악을 살펴볼 경우, 더욱 배가된다. 원작 소설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이렇게 완전히 하나의 새로운 작품처럼 유기적으로 구성된 것은 실로 흔치 않은 일이다.

한 마디로 은 하나의 '잘 빚어진 항아리'이며, 마틴 스콜시즈와 피터 게이브리얼이 만들어낸 '에스닉·월드 뮤직 계열의 걸작'으로 동시대의 여타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성취도를 단숨에 뛰어넘는 마스터피스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내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앨범에 사용된 서구적 음계·화성의 문제이다. 예수의 활동 무대는 서력 1년 이후의 유대, 즉 현재의 중동 지방이다. 영화의 주연 배우를 윌렘 대포우라는 백인 서양 배우를 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나머지 모든 곡들이 일정한 중동 문명권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앨범의 음악적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예수의 희생적 사랑'을 노래하는 12번 곡 'With This Love'와 그 반복 악절인 16번 곡 'With This Love - Choir'가 난데없이 중세 그레고리우스 성가 이후의 유럽 지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서구적 화음과 음계로 구성되어 불리어지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실상 이는 당시 유럽이 소위 '이교적'(?) 그리스·로마 문명을 제외하면 완전한 '야만인'의 거주 지역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예수의 전기적 역사 도큐멘터리가 아니며, 오히려 인성과 신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간 예수의 보편적 고뇌를 그린 작품이라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영화가 당시 유대 사회를 그린다고 해서 영화 감독이 당시 유대 사회를 글자 그대로 '있었던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 아닌 만큼 - 실상 이런 '있었던 그대로'라는 이념은 19세기 독일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류의 실증주의 역사학에서나 통용되던 인식론적 오류라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 영화 음악도 당시 유대·중동의 음악을 그대로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마치 한국인인 내가 부처의 생애를 그린 영화의 음악을 만들면서 전반적인 음악적 기조를 인도적 기원과 리듬을 갖는 음악을 사용하고, 결정적인 '부처의 자비'를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후의 국악을 집어넣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이러한 게이브리얼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선택은 그의 무의식적인 '자(自) 문화·문명 중심주의' 이외의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피터 게이브리얼과 마틴 스콜시즈의 실수요 착각이며, 참다운 '동서 문명의 새로운 회통(會通)'을 바라는 우리로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부분이다.

1.16 # 1990: <Shaking The Tree: 16 Golden Greats> - 첫 솔로 베스트 앨범

 

89년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와 앨범에 참여해 주었던 세네갈의 유순 두르의 앨범 에 게스트 아티스트로 참여한다. 동년 6월 두 사람은 공동 작곡의 듀엣곡 'Shaking The Tree'를 싱글로 발표한다. 게이브리얼이 -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 다른 아티스트와 듀엣 곡을 발표한 것은 이 곡이 처음이다. 96년 발매된 게이브리얼의 CD-롬 에는 'Shaking The Tree'의 곡 해설이 실려 있다: "이 노래는 아프리카의 모든 여성들, 세계의 모든 여성들을 위해 훌륭한 세네갈 싱어인 유순 두르와 함께 쓴 곡이다 ... 이 곡은 남성 지배적 사회에 대한 비판이며, 또한 여성들의 커져 가는 자기 확신과 지위에 대한 찬가이다."

이어서 그는 그러한 과정에서 파생되는 두려움과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을 잇는다: "심리학자 롤랜드 메이(Roland May)의 말처럼, 우리는 어떻게 해도 상처받게 된다 ... 당신이 자신의 감정적 문제에 직면해도 그것은 고통스럽고, 도망가도 역시 고통스럽다. 나는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이며,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좋아한다. 당신은 고통받게 되고, 당신은 배우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개인적 고통과 성공을 거의 동시에 맛본 게이브리얼로서는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을 것이다(한편 90년 현재 그는 여전히 87년부터 받기 시작한 심리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였다).

90년 11월 게이브리얼은 첫 솔로 베스트 모음집 <Shaking The Tree: 16 Golden Greats>를 발매한다. 수록곡을 앨범 별로 살펴보면, 'Solsbury Hill', 'Here Comes The Flood' 등 의 두 곡, 은 한곡도 선곡되지 않았고, 'I Don't Remember', 'Family Snapshot',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등 의 네 곡, 'Shock The Monkey', 'San Jacinto', 'I Have The Touch' 등 의 세 곡, 'Sledgehammer', 'Mercy Street', 'Don't Give Up', 'Big Time', 'Red Rain' 등 의 다섯 곡, 그 외 의 'Zaar', 기존 미발표곡인 'Shaking The Tree' 등 모두 16곡이다. 에서 다섯 곡, 에서 네 곡이 선곡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에서 세 곡, 그것도 실상 전혀 히트하지 않은 'San Jacinto', 'I Have The Touch'가 선곡된 것은 이 곡들에 머무는 -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들을 들어주었으면 ... 하는 - 그의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이는 'Mercy Street'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그는 90년 홈 비디오 <The Desert And Her Daughters>를, 91년에는 그간 발표한 비디오 클립의 베스트를 모은 를 발매하여 영국 뮤직 비디오 판매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17 # 1992: 6집 - "나에게 말을 해"

 

1992년 9월 피터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솔로 정규 6집 앨범 와 이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모은 컴파일레이션 <Plus From Us>를 동시에 발표했다. 와 <Plus From Us>는 모두 리얼 월드 레이블에서 발매되었으며, 배급은 영국 버진, 미국 게펜이 맡았다. 앨범 는 와 마찬가지로 게이브리얼과 다니엘 라누아에 의해 공동 제작되었다. 엔지니어로는 데이빗 보트릴(David Bottrill), 리차드 블레어(Richard Blair) 등이 참여했다. 이 두 사람은 또 한 사람의 엔지니어인 리차드 에반스(Richard Evans)와 함께 이후 리얼 월드 스튜디오·레이블을 이끄는 중심적 엔지니어·프로듀서 군단을 형성하게 된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앨범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하다: 우선 밴드의 기본 진용은 드럼의 마누 카체·베이스의 토니 레빈·기타의 데이빗 로즈 등으로 동일하며, 키보드와 신서사이저 프로그래밍에 새로이 '리얼 월드 군단'으로 본격 등장한 데이빗 보트릴·리차드 블레어·리차드 에반스 및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리얼 월드 레이블의 민속 악기 주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두둔 디아예 로제·호삼 람지·샹카르·쿠드시 에르구너·아윱 오가다·드미트리 포크로프스키 앙상블·아드지오 드러머즈·바바카르 파예 드러머즈 등이 그들이다. 한편 이외의 게스트 뮤지션들로는 브라이언 이노·시니어드 오코너·존 폴 존즈·윌리엄 오빗·피터 해밀 및 다니엘 라누아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버전들에도 바비 맥퍼린·후안 카니자레스·데이빗 샌시어스 등이 참여하였다.

앨범은 거의 대부분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믹싱되었다. 앨범보다 두 달 먼저 첫 싱글 'Digging In The Dirt'가 발매되어 영국24위에 올랐으며, 93년 1월 두 번째 싱글 'Steam'이 발매되어 영국 24위, 미국 32위를 기록했다. 3월에는 세 번째 싱글 'Blood Of Eden'이 영국 43위를, 9월에는 네 번째 싱글 'Kiss That Frog'가 영국 46위를 기록했다. 전작 의 엄청난 성공에 견주어 본다면 적어도 상업적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으나, 이미 전작 이후 '국제적 아티스트'로 부상한 그의 신작 는 이러한 싱글들의 대체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만 100만장 이상, 전 세계적으로 400만장 이상이 팔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직전 게이브리얼은 87년 이후 받아오던 심리 치료를 중단했으며, 다음 해인 92년을 자신의 새로운 앨범 의 제작에 바쳤다. 이러한 두 시기 상의 연관성으로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는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 '심리학적' 측면이 강조된 작품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이러한 '심리 치료적' 측면의 부각을 위해 게이브리얼이 본 작의 화두(話頭)로 제시한 중심 개념은 '소통'(communication)이며, (us)이라는 제명 또한 이러한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앨범을 여는 첫 곡은 '나에게 말을 해'(Come Talk To Me)이다.

이후 96년 발매된 CD-롬 에는 다음과 같은 게이브리얼의 곡 해설이 붙어 있다: "나는 1980년에 세네갈의 고수(鼓手) 두둔 디아예 로제와 'Come Talk To Me'의 리듬을 녹음했어요. 그리고 몇 년 후에 전 이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후에 전 곡을 이리저리 다르게 편곡해 봤어요. 이 곡의 뼈대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 비평가 케네스 타이넌(Kenneth Tynan)이 말한 것처럼 '우린 자기 상처에 맞는 이빨 자국을 찾아 헤매지요.' 우리 상처는 우리의 과거에서 온 거니까요. 사람들은 자기한테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내는 본능적 능력이 있어요 ...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육체적 접촉과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어요. 거기서 저는 여기서는 열지 못하는 저의 어떤 부분을 열어볼 수가 있었어요." 이렇듯 는 이전 , 특히 의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제작된 앨범이다.

게이브리얼은 인터뷰에서 원래 자신의 앨범을 위해 모두 23곡을 만들었으며, 이 노래들은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사회적인 것까지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은 앨범의 유기적 연관성을 위해 보다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노래들을 골랐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첫 곡에서부터 그의 이러한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곡 'Love To Be Loved', 'Blood Of Eden', 'Only Us', 'Washing Of The Water', 'Digging In The Dirt' 및 'Secret World' 모두는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타인 혹은 자신과의 소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심리적 갈등과 치료에 관한 노래들이다.

'Come Talk To Me'에 이어지는 다음 곡 'Love To Be Loved'는 제명 그대로 '사랑 받기를 사랑하는' 한 인간의 소망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곡이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난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하는 걸 필요로 해, 날 둘러싼 이 어둠 속에서, 난 누가 날 좋아하는 걸 좋아해, 이 공허와 두려움 속에서 난 누가 날 원하는 걸 원해, 난 누가 날 사랑하는 걸 사랑해.'

시니어드 오코너와의 듀엣 곡인 세 번째 싱글 'Blood Of Eden'는 그가 꿈꾸는 이상적 '인격'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곡으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 두 성향이라 할 '남성과 여성이 함께 만나는 에덴', 남성적 아니무스(animus)와 여성적 아니마(anima)가 잘 조화된 이상적 인격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 곡인 두 번째 싱글 'Steam'은 이전 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모타운적' 싱글 'Sledgehammer'의 연장선상에 있는 곡이다. 이 노래에서 그는 쓰레기와 문화, 죄인과 성인, 붉은 색과 초록 색, 뱀과 사다리 등등의 문화적 상징을 끌어들이며 '이 몽상가의 몽상에서 현실을 끌어내라'고 청자에게 권유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 곡이자, 라는 제명의 기원이 된 곡 'Only Us'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us)는 두 사람, 관계, 그리고 우리 모두로서의 '우리'를 의미해요. 전 어떤 책에서 인류 문명의 기준은 그 문명이 '우리'(us)와 '그들'(them)의 경계를 어디에 설정하는가의 문제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그들'이라는 상자 속에 집어 넣어버리면, 당신은 '그들'을 당신이 '우리'라는 상자에 넣어 분류한 사람들보다 훨씬 쉽게 무시하고 내차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전 '우리'라는 상자를 꽉 채우고 대신 '그들'을 빈 상자로 만들려고 해보았지요."

'Only Us'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난 언제나 내가 입을 다물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걸 알아요 ... 내가 점점 더 멀리 갈수록 난 점점 더 모르게 돼요. 적도 친구도 모두 다만 우리인 거예요 ... 내가 보는 것은 다만 숨쉬는 우리, 잠자는 우리, 꿈꾸는 우리들이에요. 우리, 다만 우리만이 있는 거예요.' 이는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즈가 <The Dark Side Of The Moon>(73)의 'Us And Them'에서 노래한 것과 완전히 동일한 맥락이다.

'Washing Of The Water'는 그가 이전부터 노래해왔던 영적 정화(淨化)의 매개체로서의 '물'의 이미지가 드러난 곡이다. 'Washing Of The Water'라는 제명은 글자 그대로 유대교·기독교·회교 등 중동 문명권 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세례'(洗禮)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가사를 포함해 노래의 전반적 분위기는 가히 가스펠에 가깝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현대의 성가'에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작곡가·작사가인지, 얼마나 뛰어난 보컬리스트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앨범의 첫 싱글 'Digging In The Dirt'는 '사회적 의식에 의해 거부되어 개인의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을 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악마적 속성이 자아에 의해 인정되었을 때는 그 힘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정신의 작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노래의 화자는 자기 마음속의 더럽고 지저분한 '진흙을 파내고' 있다. 이 곡을 포함하여 앨범의 가사에서 나타나는 전반적 특징은 - '인간 정신 구조의 보편성(들)'에 관해 말하는 그 내용에 걸맞는 - '신화적 상상력'의 모티브이다. 이는 물론 이전 제너시스 시절의 이후 그가 끊임없이 추구해 왔던 주제이나, 와 의 실험을 거친 그의 새로운 상상력은 신화로부터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심리학적·정서적 차원의 섬세함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Fouteen Black Paintings'는 터키의 전통 음악인이자 회교 윤회-금욕주의 종파('The Whirling Dervishes')의 종정인 쿠드시 에르구너(Kudsi Erguner)의 아름다운 전통 네이 플룻(ney flute)으로 시작되는 곡으로 무척이나 아름답고 힘있는 간결한 가사를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국 투어 중 기타리스트 데이빗 로즈의 권유로 텍사스의 한 교회당을 방문하게 된다: "처음에 로즈가 제게 설명을 해주었을 땐 정직히 말해서 전혀 관심이 안 갔어요. 그런데 로즈가 하도 꼭 가 보아야 한다고 해서 따라 나섰지요. 그런데 거기 도착했을 때, 이 '열 네 개의 검은 그림들'로 둘러싸인 교회당은 제가 가보았던 어느 곳보다도 영적인 장소였어요. 정말 강렬한 체험이었고, 전 그 곳 전체가 마틴 루터 킹, 간디 같은 인권, 민권 운동에 바쳐져 있다는 걸 알았어요."

따라서 이 곡은 우선 에 담겨진 몇 안 되는 정치적 저항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종교적인 지향의 곡이기도 하다. '열 네 개의 검은 그림'은 한 마디로 '인간의 존엄성에 바치는 성가'이다.

[열네 개의 검은 그림 Fourteen Black Paintings]

From the pain come the dream
From the dream come the vision
From the vision come the people
And from the people come the power
From this power come the change

고통에서 꿈이 온다
꿈에서 상상력이 온다
상상력에서 민중이 온다
그리고 민중에서 힘이 온다
이 힘에서 변화가 온다

네 번째 싱글 'Kiss That Frog'는 게이브리얼에 따르면 정신분석가인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elheim)의 책 <매혹의 사용>(The Uses Of Enchantment)에서 힌트를 얻은 곡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개구리 왕자'를 소재로 한 것이다: "전 주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적절한 동화를 찾고 있었어요. 이 동화는 주인공인 공주가 개구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왕자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에 관한 것이지요. 베텔하임은 이 동화가 성(性)에 눈뜨는 과정을 나타내는 좋은 비유라고 말하고 있어요. 동화의 밑바닥에는 성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지요 ... 베텔하임은 이 동화의 정신적 배경에는 처음에는 싫었던 것이 나중에는 즐거운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다음 투어 및 동일한 투어 라이브 앨범의 제명이 되는 마지막 곡 'Secret World'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사적인 세계, 즉 그들이 한 공간 안에서 개인으로서 점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꿈과 욕망이 교차되는 사적 세계들에 대한' 곡이다. 그는 CD-롬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상적 부부 관계에는 세 개의 공간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하나씩, 그리고 부부를 위해서 하나, 이렇게 세 개 말이에요." 물론 이는 공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말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 최인훈이 소설 에서 말하고 있는 바, 인간 존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심리적 측면인 '밀실과 광장' 중 밀실에 해당되는 공간일 것이다.

이렇게 앨범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작업의 배면에 깔려 있는 '숨겨진 의미 찾기'라는 요소이다. 즉 그의 작업들은 당신에게 주어진 '문화적 수수께끼'이다. 만약 당신이 그 의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작품은 당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 혹은 '무의미한 것', '무관심한 것'으로 남게 된다.

이런 의도에서 게이브리얼은 앨범의 자켓 안에 수록된 10곡에 해당하는 10개의 작품들을 실었는데, 각 곡마다 한 개의 작품이 배당된 이 작품들은 스코틀랜드의 데이빗 매치·아이너 휴즈와 아일랜드의 핀바 켈리·이스라엘의 자독 벤 다비드·이디오피아의 미카엘 베트-셀라시에·영국의 앤디 골드위시·에브루고의 주시·미국의 조던 베이즈먼·카메룬의 빌리 비조카·독일의 레베카 호른 등 모두 10명의 전문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앨범의 수록곡들 중 몇몇 싱글들을 중심으로 비디오 클립을 제작했는데, 각 곡에는 상기한 해당 아티스트들이 미술 감독의 자격으로 참여하여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 아티스트들과의 비디오 클립과 제작 과정을 담은 것이 93년 발매된 홈 비디오 <All About Us>이다. 이들 중 싱글 'Steam'의 비디오 클립은 93년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뮤직 비디오' 부분을 수상했다.

1.18 # 앨범 의 음악적 성과에 대한 논란 - 하나의 중간 결산

그러나 당신이 예리한 관찰자라면 에 관한 이제까지 필자의 글에서 정작 무엇보다도 중요한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의도된 것이다. 나는 80년 라디오에서 그의 'Games Without Frontiers'를 들은 이후 그와 제너시스의 음악 세계에 매료되어 꾸준히 그의 음악을 들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자리에 기술된 이전의 모든 앨범들에 대한 나의 기술이 그의 앨범들을 꾸준히 들어온 사람들의 대체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이 앨범에 대해서는 명쾌한 입장의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음악적으로 는 '애매한' 앨범, 무엇인가 '망설여지게' 만드는 앨범이다. 한 장의 앨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 가사의 인식론적 성취, 커버의 아름다움과 참신성, 참여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면모 이전의 - 단순하고 소박한 그것의 음악적 성취이다. 92년에 발매된 의 음악적 성취에 관한 전문가·일반인들의 의견은 8년이 지난 2000년 현재에도 여전히 분분하며, 어떤 '최종적인 동의 혹의 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다. 는 그런 면에서 논쟁적인 작품이며 또한 여전히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를 여러 번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그것에 담겨진 음악의 기술적·테크놀로지적 성과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보여주는 기술적 완성도, 섬세한 후반 작업의 탁월성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에 덧붙여 아름답고 유려한 작곡, 더욱 풍부하고 심오해진 가사, 안정되고 잘 조화된 편곡, 게스트 뮤지션들의 탁월한 역량 등 앨범에서 구체적 하자 요소를 찾아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심지어 여기에 세련된 커버 작업과 비디오 <All About Us>의 성취가 더해지면 우리는 더욱 곤혹스러워진다. 그렇다면 의 문제점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 자신이 정리해 본 바에 따르면, 를 들어본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문제점'이란 실로 단순하다: "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다 듣기가 어렵다. 물론 는 모든 면에서 좋은 앨범일 것이다. 하지만 앨범의 소리는 왠지 답답하다. 그래서 는 꺼내서 잘 듣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 좋은 앨범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도 있지만, 선뜻 '정말 좋은 앨범'이라는 말,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

한 마디로 는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망설임'을 갖게 만드는 앨범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이미 가 발매된 지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아래에서 나는 - 최종적 결론은 아닐지라도 - 지난 8년간의 논의를 토대로 앨범에 대한 음악적 '중간 점검'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92년에 발매된 정규 스튜디오 6집 앨범 는 그가 리얼 월드 레이블과 스튜디오를 세운 이후 처음 발표한 작품이다. 물론 그 이전에 89년 영화 음악 이 발매되었지만, 이는 영화와의 유기적 연관도가 매우 높으므로 순수한 그 자신만의 의도로 완성된 작품이라 보지 않기로 한다. 는 리얼 월드 레이블의 법적인 공동 소유권자인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자신의 레이블에서 발매한 온전한 자신만의 작품이다. 그는 아마도 86년 5집 의 성과에 대한 부담과 함께 처음으로 제작하는 '온전한 자신만의 작품'에 대한 도전적 의욕을 느꼈을 것이다. 는 이후 6년, 이후에도 3년만의 작품이다.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돈과 인력과 공간이 있었다. 이 경우 문제시되는 것은 오직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이 발표한 앨범의 배면에 깔린 그의 음악적 아이디어들 및 그것의 현실적 성공 여부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앨범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그는 인터뷰 등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 작업 과정은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때보다 더 어려웠어요. 에서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그 결과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저는 가 80년의 가 그랬던 것처럼 동시대보다는 이후에 더 잘 이해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에 대해 이렇게 자부심에 가득 찬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아래에서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듣는 이'로서의 우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우선 앨범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말 중 하나는 그가 이 앨범을 발표한 92년 이후 그 자신의 표현대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변화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미 앨범에서 화가·컴퓨터 아티스트 등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앨범의 음악과 커버 작업을 행했으며, 93년 이의 작업 과정을 담은 홈 비디오 <All About Us>를 발매한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한편 그는 같은 해인 93년 '리얼 월드 멀티미디어 사'를 창립하고 이를 통해 94년 첫 CD-롬 <Xplora 1>, 96년 두 번째 CD-롬 를 발매했다. 그는 데이빗 보트릴·리차드 블레어·리차드 에반스 등 3인 프로듀서·엔지니어 군단의 도움을 받아 리얼 월드 스튜디오와 레이블의 위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바로 이들이 프로듀서 다니엘 라누아와 함께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의 녹음과 믹싱을 담당했다.

앨범의 진정으로 특이한 점들 중 하나는 수록곡들의 앨범 버전보다 싱글에만 실린 리믹스 버전들이 음악적으로 더 높은(?) 성과를 들려준다는 이상한 사실이다(최소한 더 쉽게 '끝까지 들을 수 있는' 버전이다). 이는 물론 싱글로 발매된 곡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첫 싱글 'Digging In The Dirt'의 앨범 버전보다 각기 데이빗 보트릴, 리차드 에반스가 리믹스한 'Instrumental', 'Richard E Mix'가, 두 번째 싱글 'Steam'의 앨범 버전보다 봄 스쿼드(The Bomb Squad)가 리믹스한 'Oh, Oh, Let Off Steam Mix & Dub'이 그러하다. 특히 네 번째 싱글 'Kiss That Frog'의 앨범 버전보다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이 리믹스한 'Mindblender Mix'가 월등히 훌륭하다. 한편 'Steam' 싱글 CD에 수록된 매시브 어택/데이빗 보트릴의 리믹스 'Games Without Frontiers - Massive/DB Mix'는 원 곡과는 또 다른 의미의 뛰어난 '오리지널리티'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희귀한 '걸작 리믹스' 버전을 들려준다.

이러한 경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게이브리얼의 원 곡보다 오빗의 리믹스 버전이 '더 낫다'면 - 물론 그러한 리믹스 프로듀서를 선택하고 돈을 지불한 게이브리얼의 공도 무시될 순 없지만 - 그 공은 당연히 오빗에게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리믹스 곡들을 만들어 낸 공은 1차적으로 각기 데이빗 보트릴·리차드 에반스·봄 스쿼드·윌리엄 오빗·매시브 어택에게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게이브리얼은 훌륭한 리믹스 엔지니어·프로듀서들을 선택했다. 그것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흡수하고 리드해 나가려는 노력을 한 그의 공이다. 그러나 정작 라누아와 자신의 공동 제작으로 앨범에 수록된 버전들의 소리는 '답답하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하나는 그의 멀티 미디어, 첨단 테크놀로지에의 지나친 경도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음악 제작에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며, 시대의 조류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아티스트의 당연한 노력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한 음악가의 기술 수용은 어디까지나 그 음악 자체의 향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음악적 향상'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또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앨범을 청취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앨범의 테크놀로지적 측면이 음악과 메시지 자체를 압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의 주제는 그의 말대로 '관계 혹은 소통'(relation or communication)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다운 (인간) 관계와 소통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은 앨범이 그 매체(?) 혹은 수단으로 선택한 기술적 성과에 압도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타인 혹은 자연, 기계와 소통하려는 그의 의도는 제 의도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혹은 그러한 과정에서 문제를 느끼고 발언하는 주체는 '사람',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람의 '몸'이다(그가 '기계 자체의 생명과 소통'을 말하는 크라프트베르크의 랄프 휘터가 아닌 이상 이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앨범에서 참으로 관계 맺고 소통하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컴퓨터라는 '기계' 혹은 그것의 '몸'이다(실로 는 기존 스테레오 앰프보다 '컴퓨터'에서 플레이될 때 더 나은 소리를 들려준다). 이것은 이후 그가 추구해온 자신의 입장에 위배되는 결론이다. 에서의 '인간'이란 소통의 주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기계 속의 유령'(Ghosts In The Machine)에 불과하다.

아마도 게이브리얼이 이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기술) 철학적 언명은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학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다음과 같은 명제일 것이다: "매체가 메시지이다"(Media is a message).

이 첫 번째 이유에 연관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설적으로 테크놀로지 조작상의 미숙함이다. 이것은 순수한 나 자신의 가설인데, 나는 아마도 게이브리얼이 를 제작할 91-92년 당시 막 새로 개발되어 도입한 리얼 월드의 기기들의 조작과 운용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갖기 이전에 앨범의 녹음과 믹싱을 포함한 후반 작업이 완성되지 않았는가 하는 가정을 생각해 보았다. 이는 역시 첫 번째 이유와 맞물리는 것으로 그와 제작진이 새로운 기기의 특성과 음색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 기기들의 기술적 진보의 측면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이유를 종합한 나 자신의 결론은 '앨범의 문제는 다른 어떤 요소도 아닌 프로듀싱 작업에 있다'는 것이다. 음악 앨범의 프로듀서는 영화에 있어서의 감독의 지위에 비할 수 있다. 프로듀서는 이름 그대로 제작 과정 전반을 감독하고 통제하며 각 부분과 상황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행한다. 앨범을 구성하는 제반 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완벽한 제1급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은 쉽게 말해 '이견의 여지없는 제1급의 앨범'은 아니다.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니다. 전체란 글자 그대로 각 부분·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종합이다. 바로 이 점에 참다운 프로듀서의 역할이 있으며, 는 최소한 바로 이 점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상기의 두 이유와 함께 가 만족스럽지 못한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또 다른 이유들을 구성할 것이다.

우선 한편, 라누아와 게이브리얼은 이전 그들이 공동 제작했던 전작 의 엄청난 성공에 따른 '부담감'을 떨치지 못 한 것이다. 이는 의 빅 싱글 'Sledgehammer'와 거의 비슷한 의 싱글 'Steam' 등에서도 다시 한 번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물론 의 공동 프로듀서 라누아와 게이브리얼은 상업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던' 전작 의 길을 답습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 상기한 'Steam' 정도를 제외하고는 - 전체적으로 그러한 '쉬운 길'보다 '예술적 실험의 길'을 택했다. 이 점은 우리가 높이 사주어야 할 부분이고 그들의 이러한 시도 자체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그들의 소중한 실험에 대한 성실하고도 냉정한 평가를 지향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의 '의욕 과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부정적 의미보다는 바람직한 측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한 작품의 냉정한 평가에서 긍정적 요소로만 작용하기는 어렵다. 그의 6집 는 자신의 제작으로, 자신의 레이블에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첫 작업'이다. 그것이 정말 한 아티스로서는 '꿈의 작업'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는 정말 공을 들여 앨범의 모든 부분, 모든 소리, 모든 이미지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왜인지 잘 꺼내어 듣게 되지 않는' 앨범, 분명 '객관적으로 좋은 앨범이지만, 내가 정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닌' 앨범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앨범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완벽'하다는 점에 있다. 앨범의 구조와 결, 편곡과 연주 등 모든 제작 과정은 한 마디로 정성과 기술의 완벽한 결합이다. 수록된 모든 곡들 하나하나에는 제작자 게이브리얼이 적절히, 섬세히, 때로는 드러나도록, 때로는 숨겨지도록 배치하고 구성해 넣은 온갖 아름다운 소리와 실험들로 가득 차 있다 -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앨범이 '동시대보다 후대에 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게이브리얼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에는 단 한 가지, 듣는 이가 들어가 그것을 듣고 즐기고 소통할 수 있는 '빈 공간', 즉 '허'(虛)가 없다.

철학자 김용옥의 말대로, 실로 불완전은 궁극적으로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다(The Imperfection is ultimately a higher value than the Perfection). 이러한 여유, 여백, 빈 공간이 앨범이 없기 때문에 청자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불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비판적 관점을 제외한다면 는 역시 뛰어난 앨범이다.

첫째 거듭 말한 것처럼 는 기술적 테크놀로지 수용의 측면에서는 동시대의 거의 어떤 그룹, 어떤 앨범도 이룩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운드적 진보를 보여준다.

둘째 이와 연관하여 와 그에 뒤이은 리얼 월드의 다양한 작업들은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이 자신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초의 '종합 예술적 기획'이라 부를 만 하다.

셋째 에서 그는 자신이 혹은 이후 추구해왔던 다양한 세계 민속 전통 음악의 도입에 덧붙여 첨단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에서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진실로 새로운 개념의 '월드 뮤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넷째 그러나 는 상대적으로 세계 각지의 민속 음악적·문화적 요소들이 병렬적으로 배치되었던 이전의 ·과는 달리 자신의 기본적 신화적·정서적 지향을 보다 기독교적인 서구 문화에서 찾고 있다. 이는 'Blood Of Eden'과 같은 제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이전의 '세계 시민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서구 기독교 문화'에로 회귀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문화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평가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섯 째 는 자신의 심리 치료 경험이 십분 반영되어 그의 표현대로 '치료로서의 예술 창작' 개념이 정립된 앨범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후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1.19 # 1993-94: '리얼 월드 멀티미디어'의 창립과 CD-롬 <Xplora 1>의 발매

1994년 2월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첫 CD-롬 <Xplora 1 - Peter Gabriel's Secret World>를 발매했다. 이는 93년 자신이 설립한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Real World Multi Media Company)와 미국인 스티브 넬슨의 브릴리언트 미디어(Brilliant Media)에 의해 공동 제작된 작품이다. 맥킨토시 컴퓨터와 윈도우 95에서 실행할 수 있는 <Xplora 1>에는 게이브리얼이 안내자로 직접 등장해 리얼 월드 스튜디오와 앨범 의 제작 과정·WOMAD 페스티벌 등을 소개해 준다. <Xplora 1>에는 100분 분량의 동영상, 30분 분량의 음악, 100 여 개의 기본 스크린, 200-300쪽 가량의 책 분량에 해당하는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팝·록 아티스트가 제작한 최초의 CD-롬이었던 <Xplora 1>의 제작에는 미화 25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편 본 CD-롬은 94년 가장 많이 판매된 음악 관련 CD-롬이 되었으며, 1994년 인터액티브 미디어 페스티벌, BIMA상, 디지털 미디어상 등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Xplora 1>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에서 사용자는 앨범 와 앨범에 실린 아티스트들의 작업 및 비디오 클립의 제작 과정 등이 들여다 볼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월드 뮤직 섹션으로 WOMAD 페스티벌의 무대와 백 스테이지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리얼 월드 레코드 섹션으로 사용자가 화면에 나타난 앨범 커버를 클릭하면 앨범에 담긴 음악과 제작 과정 등을 감상할 수 있고, 해당 아티스트의 국가를 방문해 그 곳의 관광지 등에서 민속 음악을 즐길 수도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진첩, 여권 등의 사용자 개인 파일, 게이브리얼의 홈 비디오 파트, 그가 참여하고 있는 인권 단체들인 국제사면위원회, '증언'(Witness) 프로그램 등에 대한 정보가 수록된 파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이브리얼은 오래 전부터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은 단순한 하나의 음악가(musician)라기 보다는 '체험 디자이너'(experience designer)이며, '멀티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밝히고 있다. 96년 의 발매에 즈음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최근 이런 종류의 작업에서 제일 큰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전 이런 작업이 앞으로 예술가로서의 제 작업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출판사 리얼 월드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작업이고요. 어떤 면에서 이런 CD-롬은 '일종의 상호적인 창조·체험 디자인 레이블'(a sort of interactive creator and experience design label)로 - 전 이 이름을 선호합니다 - 발전해 가고 있는 우리 레코드사가 시작한 하나의 운동이기도 해요. 전 제가 정말 혁명의 첨단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한편 96년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에서 발매된 CD-롬 의 첫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니체는 '좋은 책이란 모름지기 얼어붙은 호수를 가르는 망치 같아야 한다'고 썼다. 한 아티스트가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면, 그는 이미 자신의 도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멀티미디어는 예술을 그러한 도구 상자처럼 다루며 탐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며, 또한 이것이야말로 내가 더욱 진척시키고 싶은 분야이다 ... 나는 몇 년 이내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젊은이들이 자신들만의 멀티미디어 언어를 만들어 내리라고 생각한다 - 그 '말'은 텍스트와 번역의 장벽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채택하게 될 언어이다 ... 우리를 서로 보다 잘 이해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테크놀로지 개념 위에 인간 관계, 정신적 영역 및 자연 등의 새로운 영역을 더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 우리(=서양, 인용자 첨가) 사회는 예술 작품의 창조는 재능을 부여받은 소수의 엘리트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많은 전통 사회에서 이러한 말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예술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 나는 매료되었다. 나는 이제 내가 선택하는 어떤 종류의 매체를 통해서도 나의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 또한 나와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1.20 # 1994: <Secret World Live> - 두 번째 솔로 라이브 더블 앨범

 

1993년 4월 이후 그는 5개 대륙을 순회하며 100만 명 이상이 관람하게 될 <Secret World Tour>를 시작한다. 그는 이 순회 공연 중 1993년 11월 16-17일의 이탈리아 모데나 실황을 담은 자신의 두 번째 더블 라이브 앨범인 <Secret World Live>(이하 )를 발매한다. 한편 그는 이와 함께 본 라이브의 비디오 <Secret World Live>를 발매했으며,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에서 <Computer Animation: Vol. 2.>를 발매했다.

의 커버는 관계와 소통을 주제로 삼았던 의 후속 작업에 걸맞게 전화기를 쥔 손이 그려져 있다. 그는 또한 공연 중 무대에 설치된 전화 박스에서 관객들에게 '나에게 와 말을 하라'(come talk to me)고 외친다. 은 게이브리얼 자신과 피터 월시(Peter Walsh)에 의해 공동 제작되었다. 85년 게이브리얼과 함께 싱글 'I Have The Touch - 85 Remix'를 함께 리믹스했던 믹서·엔지니어·프로듀서 월시는 의 엔지니어였던 케빈 킬렌(Kevin Killen)과 함께 녹음과 믹싱도 담당했다.

라이브 밴드의 라인업은 드럼의 마누 카체·베이스의 토니 레빈·기타의 데이빗 로즈·키보드의 장 클로드 네므로·일렉트릭 더블 바이올린의 샹카르·두둑의 레본 미나시안·백 보컬에 폴라 콜, 파파 웸바 등이다. 특기할 점은 라이브 밴드의 멤버였던 키보드의 데이빗 샌시어스가 빠지고 장 클로드 네므로가 들어온 사실이다. 한편 그의 키보드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레빈의 베이스, 카체의 드럼와 어울리면서 공연 전반을 감싸주는 따듯한 위로감과 아름다운 서정미의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더블 라이브 앨범 는 여러 면에서 10년 전인 83년에 발매된 첫 더블 라이브 앨범 <PG Plays Live>(이하 )와 비교된다. 우선 앨범의 사운드는 전작 보다 훨씬 세련되고 잘 조절되어 있다. 따라서 에서 의 매력, 즉 거친 라이브적 박력과 흥취를 찾기는 어렵다. 대신 이 추구한 가치는 '내면적 심리의 섬세한 표현'이며, 그 주된 정서는 '물 흐르는 듯이 부드러운 서정성'이다. 실로 청자가 앨범을 듣고 있으면 마치 어느 따듯한 봄날 오후 작은 배를 타고 잔잔한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배는 때로 격류를 만나기도 하고, 무심히 떠내려가기도 하며, 때로 배 위에 탄 사람들은 지난 기억들로 고통스러워하거나 혹은 모두 어울리는 즐거운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Secret World Live>는 그 의미에 걸맞게 'Come Talk To Me'로 시작되어 싱글 'Steam'으로 이어진다. 'Steam'에는 원 곡에 없는 부분이 짧게 덧붙여져 있다.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다음 곡 'Across The River'에서 CD 1의 마지막 곡 'Solsbury Hill'까지 이어지는 부분이다. 'Across The River'는 원래 92년 WOMAD 10주년 기념 컴파일레이션 <Worldwide: Ten Years Of WOMAD>를 위해 작곡된 곡이며, 특히 이전 폴리스의 스튜어트 코플랜드의 드럼이 '일품'인 곡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곡은 본 라이브에서 바로 그 본격적 드럼 파트가 시작되기 직전 부분에서 'Slow Marimba'로 넘어간다.

앨범의 또 다른 백미 중 하나는 93년 8월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차트 39위를 기록했던 'Red Rain'이다(이 싱글에는 라이브에서 연주되었으나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San Jacinto', 'Mercy Street'이 실려 있다). 가창력의 측면에서만 따진다면 이 곡은 수록곡 중 단연 압도적인 파워를 보여주는 곡이다. 'Solsbury Hill'은 과 에 모두 수록된 유일한 곡인데, 이 곡을 들어보면 이 전체적으로 에 비해 좀 더 깔끔하고 세련된 편곡을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앨범의 또 다른 백미는 'Sledgehammer'에 이어지는 CD 2의 마지막 세 곡 'Secret World', 'Don't Give Up', 'In Your Eyes'이다. 특히 'Secret World'는 스튜디오 원 곡의 답답한 느낌이 사라져 세련미와 힘이 잘 조화된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다(전체적으로 에 수록된 의 모든 라이브 곡들은 원 곡의 '부담스러움'이 사라진, 보다 자연스럽고 충만한 연주를 들려준다). 이 세 곡에서는 연주 전반을 리드하는 카체-레빈의 드럼-베이스 파트에, 최근 샹카르의 작업 중 가장 빛나는 연주임에 틀림없는 바이올린, 부드럽고 다감한 네므로의 키보드, 날카롭고 섬세한 로즈의 기타, 폴라 콜의 코러스 등이 잘 어우러져, 무대 위의 아티스트와 청중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드문 '정서적 합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편 게이브리얼이 '젊은 세대의 피터 브룩'이라 부른 캐나다인 로베르 르파쥬(Robert Lepage)가 무대 미술을 담당했으며, 최근 요요마 등과 작업한 영화 감독 프랑수아 지라르(Fran ois Girard)가 제작한 라이브 비디오 <Secret World Live>는 96년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장편 뮤직 비디오' 부분을 수상했다.

1.21 # 1996: CD-롬 - 예술과 자연 그리고 심리학의 만남

1996년 게이브리얼은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에서 자신의 두 번째 CD-롬 를 발표했다. 역시 지난 번 <Xplora 1>과 마찬가지로 음악 감독 리차드 에반스, 기술 감독 마이클 코요티(Michael Coyote) 등 파트별 디렉터 이외에도 총감독에 마이클 컬슨(Michael Coulson), 제작자로 리얼 월드 그룹의 마이크 라지(Mike Large), 랠프 데릭슨(Ralph Derrickson)이 참여했다.

의 내용은 (화면에 등장하는 '도우미' 역의 피터 게이브리얼과 함께) 이브를 찾아 떠나는 아담 역의 '실행자'가 겪게 되는 다양한 예술적·심리적 체험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는 기본적으로 네 개의 '세계'(world)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세계는 각기 게이브리얼의 곡을 하나씩 포함하고 있다. 또한 각 세계는 각기 한 사람의 예술가를 초빙하여 해당 곡의 주제에 걸맞는 그들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의 기본적 네 세계와 해당 수록곡 및 아티스트는 다음과 같다:

1) 진흙(Mud) - 'Come Talk To Me',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2) 정원(The Garden) - 'Shaking The Trees', 헬렌 채드윅(Hele Chadwick). 3) 이익(Profit) - 'In Your Eyes', 카티 드 몽쇼(Cathy De Monchaux). 4) 예술과 자연(Art And Nature) -'Passion', 닐즈-우도(Nils-Udo).

그리고 세계 '이익'과 '예술과 자연' 사이에는 히든 파트인 낙원(Paradise)이 숨겨져 있다. 참가한 예술가들 중 영국의 헬렌 채드윅은 96년 43세의 나이로 타계했는데, 그녀의 작품 가 - 이는 실제 카카오를 끓인 것이다 - 표지로 선택된 본 CD-롬 는 그녀에게 바쳐져 있다. 참여한 아티스트들 중 닐스-우도는 나무, 꽃잎, 나뭇잎 등 순수 자연물들로만 작업하는 작가인데, 그는 물위에 떠 있는 갈대 둥지 위에 어린 소년이 누어 있는, 의 기본 컨셉트 작품을 제작했다.

이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에 힘입어 예술적·기술적 측면에서 의 수준은 가히 동시대 최고의 수준이라 불릴 만하며, <Xplora 1>와 마찬가지로 팝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훌쩍 뛰어 넘어버린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화면의 시각은 360도 회전이 가능하며, 22,000장의 사진이 들어간 120 개의 기본 스크린이 있다. 여기에는 80분 분량의 비디오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에는 특별 제작된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도 에서의 제작자들이 가장 정성스럽게 공들인 부분은 역시 '실행자'가 게이브리얼의 곡들을 스스로 '리믹스'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수록된 네 곡은 모두 각기 실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12 가지 종류의 기본 반주(loops) 위에 18-21개에 이르는 파트별 악기 연주들(flyings)이 제공되어 있다. 실행자는 이들을 선택해 거의 무한한 조합의 리믹스를 스스로 '제작'할 수 있으며, 이를 녹음·전송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 힘입어 는 96년 말 '밀리아 도르'(Milia d'Or) 상을 수상했다.

한편 CD-롬의 제명 는 전작 <Xplora 1> 즉 '탐험'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마도 게이브리얼이 영향받은 융의 아니무스/아니마 이론처럼 '이브'는 '아담'과 상보(相補)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그것은 실제의 이성 짝일 수도 있으며, 무의식, 자연, 혹은 예술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브'(아담)을 찾아간다, 혹은 탐구한다. 이는 역시 게이브리얼 자신의 이혼과 그에 이어졌던 심리 치료의 경험이 그의 예술 세계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의 가장 독특한 점도 바로 이 부분에 있는데, 에는 위 네 명의 예술가들 이외에도 10여명의 심리학자, 종교학자, 예술가들이 등장해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설명한다.

한편 각 파트의 말미에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등장해 사랑·우정과 만남·헤어짐에 대한 자신의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전후는 다른 사람들): "전 제가 정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전 능력 있는 사람한테 끌려요/전 애인이 항상 같이 있는 건 싫어요/전 발 크기가 중요해요. 발 사이즈가 클수록 일이 잘 풀렸거든요/전 이혼한 적이 있지요. 다른 사람하고 만나고 데이트하는 것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집에 들어와 같이 사는 건 '노'예요/사랑하고 우정은 거의 같은 것 같아요.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면 좋은 배우자가 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적당한 선의의 거짓말을 제 때에 잘 하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지요." 이렇게 CD-롬 를 실행해 따라 가다 보면 게이브리얼이 참으로 자신의 삶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한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1.22 # 국제 사면 위원회 등에서의 활동: 1980-1999

어린 시절 게이브리얼이 인도의 간디에게 크게 감명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영향은 그로 하여금 비폭력 저항운동과 평화주의에로 이르도록 만들었으며, 한편 그를 채식주의로 이끌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생각이 드러난 최초의 곡은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메시지를 담은 제너시스 시절의 70년 2집 에 담긴 'Knife'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78년 의 'Mother Of Violence', 80년 의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같은 곡을 통해 본격적으로 피어나게 된다.

그는 80년대 초 이후 국제사면위원회의 멤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브루스 스프링스틴, 스팅, 트레이시 채프먼, 심플 마인즈, 유순 두르 등과 함께 대표적 저항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음악을 통한 저항 운동이 집단적 운동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피어난 계기는 역시 아일랜드의 붐타운 랫츠(The Boomtown Rats)의 리더 밥 겔도프(Bob Geldorf)가 주도하여 피터 게이브리얼과 로저 워터즈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준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이었다. 이후 산발적으로 지속되던 반인종차별·반전·반독재 투쟁의 물결이 또 한번 결집된 계기는 국제사면위원회를 돕기 위해 86년 6월 4일부터 시작된 자선 투어 <Conspiracy Of Hope>이었다. 게이브리얼은 물론 이 공연에 참가하여 'Biko' 등을 부른다. 그는 이 투어 도중 경찰에 의해 대로에서 아들이 분신 살인 당한 이후 칠레 인권 운동에 뛰어들게 된 베로니카 데-네그리, 스티브 비코의 동료 등의 방문을 받기도 한다.

게이브리얼은 이후에도 백인 600만, 흑인 3700만의 국가에서 온갖 인종차별은 물론 흑인의 투표권조차 부정하고 있던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야만적 정책에 반대하는 <반-아파르트헤이드>(Anti-Apartheid) 운동 자선 콘서트, 88년 <넬슨 만델라 70회 생일 기념 파티>(Nelson Mandela 70th Birthday Party) 콘서트, 동년의 <Human Rights Now!> 콘서트에 참여한다.

한편 그는 독재 국가의 인권 운동가들에게 비디오 카메라를 포함하여 증언용 혹은 교육용 멀티미디어 등을 무상으로 보급하는 국제 운동 '증인'(Witness)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89년 그는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기금 마련을 위한 컴파일레이션 CD <Rainbow Warriors>에 'Red Rain'을 실었으며, 90년 4월 16일에는 <An International Tribute To A Free South Africa> 콘서트에 참여한다. 그는 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여 약 2만 5천 여명이 운집한 스티브 비코의 사망 2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는데, 그는 이 곳에서 'Biko'를 불러줄 것을 갑자기 요구받아 밴드 없이 자신의 CD 녹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한편 그는 이 곳에서 스티브 비코의 가족 및 넬슨 만델라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전해 듣기도 한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민족이 이란·이라크·시리아·터키 등 4개국에 분산되어 거주함으로써 분리 독립 운동과 학살을 번갈아 경험하게 된 쿠르드(Kurd)족 난민들을 돕기 위한 91년의 자선 공연 <The Simple Truth>, 92년에는 <Lawyer's Committee For Human Rights> 콘서트에 참여했다. 한편 98년 3월 10일에는 <The 10th Annual Reebok Human Rights Awards> 시상식에 참여했다. 동년 12월 10일에는 프랑스 파리 베르시의 옴니 스포르(Palais Omnisport De Bercy A Paris)에서 열린 <The 50th Anniversary Of Amnesty International>에 참서했다. 특히 퀸·조지 마이클·애니 레녹스·패신저즈·루치아노 파바로티·트레이시 채프먼·폴 매카트니·에릭 클랩튼·브루스 스프링스틴·유순 두르 등이 참여한 본 공연의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자신의 솔로 7집 에 수록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Signal To Noise'를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유순 두르와 함께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1.23 # + 밀레니엄 돔 프로젝트

   

게이브리얼은 98년 일본에서 발매된 앨범 (Snowflake)의 제작에 참여했다. 이노우에 아키라(井上 鑑)가 제작하고 게이브리얼 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빗 로즈가 공동 프로듀서 및 작곡자로 참여하고 있는 본 음반은 어린이를 위한 파울 갈리코(Paul Gallico)의 동화 의 낭독 음반이다. 앨범은 두 장의 CD로 구성되어 CD 1은 일본어판, CD 2는 영어판으로 제작되었으며, 일어판의 낭독에는 야노 아키코(矢野顯子), 영어판의 낭독에 피터 게이브리얼이 참여하여 자신의 연극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낭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음악은 이노우에 아키라·데이빗 로즈·야가와 수미코(矢川澄子)에 의해 작곡되었다. 앨범은 현재 일본 도시바 EMI 레이블로 일본 국내에서만 발매되어 있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2000년 1월 1일 0시 영국 그리니치에서 노동부가 주관하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토니 블레어 총리 등이 참석한 '밀레니엄 돔 개관 기념 콘서트'(The Millenium Show)에 참여했다. 그와 마크 피셔(Mark Fisher)에 의해 공동 기획된 이 공연에서 게이브리얼은 음악 총감독을 겸임했다. 2천 5백만 파운드의 제작비가 소요되어 1만 2천 5백 석의 관중들 앞에서 2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전세계 12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관람한 '밀레니엄 쇼'는 각기 자연·산업·미래라는 주제로 나뉜 3막으로 나뉘어 공연되었다.

이 거대한 행사를 위해 게이브리얼과 리차드 에반스·데이빅 보트릴·리차드 채플(Richard Chappell) 등 리얼 월드의 스태프들은 98년 11월 이후 약 2년에 걸친 준비를 했다. 무용단과 레이저 쇼 등이 포함된 본 라이브 공연에는 엘리자베스 프레이저·이알라 오 리오나이르드·아프로 켈트 사운드 시스템·블랙 다이크 밀즈 브래스 밴드 등이 참가했다. 리차드 에반스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120곡을 사용해 보았는데, 그 중 피터의 새로운 싱글로 유력한 '64'번 곡, 때 제작되었으나 실리지 못한 18번 곡 'Feed The Flame', 그 외에도 'Father And Son', 공연을 위해 새로이 제작된 '100 Days To Go'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1.24 # 글을 마치며 - 7집 + α

   

1980년대 이후 게이브리얼의 가장 야심적 프로젝트는 예술·음악·시각 멀티 미디어 테마 파크인 '리얼 월드 테마 파크'(Real World Theme Park)이다. 디즈니 랜드와 실험적 멀티 미디어 체험 공원이 결합된 개념의 이 테마 파크는 그와 브라이언 에노·로리 앤더슨·로베르 르파쥬 등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참가를 승인한 '꿈의 아티스트들'로는 필립 글래스·다비드 방 티겜·크라프트베르크 등이 있다. 현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시가 유력한 후보 물망에 올라있으며 피터는 이를 자신의 '평생 가장 커다란 꿈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추진 중이다.

한편 97년 이후 계속 미루어지고 있던 게이브리얼의 솔로 7집 이 2000년 '상반기' 중 발매된다고 한다. 앨범이 예정대로 2000년 안에 발매된다고 해도 92년 이후 정규 앨범으로는 무려 8년만의 일이다. 93년의 <Secret World Live> 이후에도 7년만의 일이다. 물론 그는 그 사이 94년의 <Xplora 1>, 96년의 등 두 장의 CD-롬 발표, 1998-2000년 동안의 '밀레니엄 쇼' 기획 등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최소한 음악적으로는 너무 긴 공백기였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는 이미 그의 새로운 신보가 발매되어 있을 것이다(앨범은 2003년에야 발매되었다 - 통신주). 그는 의 발매에 이어 또 한 차례의 세계 순회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 그 사이에도 게이브리얼은 미셸 라아다(Michelle Lahada)의 제작으로 2000년 2월 발매된 유수 은두르의 신보 <Joko - From Village To Town>(SMALL·Sony France)에 수록된 아프리칸 포크·발라드 풍의 곡 'This Dream'에서 백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 그의 야심적 7집 에 수록될 음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피터 게이브리얼과 상당한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있는 영국의 평론가 크리스 웰치가 98년에 발표한 전기 <The Secret Life Of Peter Gabriel>의 189쪽에는 그의 7집 신보가 '원래 97년 가을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늦어도 올해 말에는 발표될 예정'이라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상 수록곡들을 싣고 있다: 'Signal To Noise', 'Children', 'While The Earth Sleeps', 연주곡 'Seven Zero', 'Lovetown', 'Party Man'. 그러나 5집 의 'This Is The Picture'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독집에 기존에 발표된 곡을 전혀 넣지 않던 관행으로 보아 이러한 리스트로 그가 자신의 신보 을 발매할 것 같지는 않다(위에 적은 곡들 중 'While The Earth Sleeps', 'Lovetown', 'Party Man' 세 곡이 영화 음악으로 이미 발표된 곡들이다).

이제 아래에서는 마지막으로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내려보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아마도 그가 미래의 음악사에 남게 될 특징 및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그는 이전 60-70년대를 풍미했던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그룹 제너시스의 창단 멤버로서 확실한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적 보컬과 함께 이후 '씨어트리컬 록'이라는 장르를 확립시킨 무대 연출의 창안자로 남게 될 것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 및 기독교 문화를 넘나들며 제너시스 데뷔 이후 그가 보여주었던 가사의 완성도는 초기 킹 크림즌의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 반 데어 그라프 제너레이터의 피터 해밀(Peter Hammill), 러시의 닐 파트(Neil Peart) 등과 함께 가히 최상의 예술적 형상화 능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그의 노래말이 '가장 영국적인 밴드'로서의 제너시스의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한 점 역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그가 75년 제너시스의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이후 현재의 솔로 활동까지 꾸준히 추구하고 있는 '인간 무의식의 탐구'라는 주제는 60년대 이후 여전히 현대 예술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테마가 된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개인적 심리 치료·상담의 경험에서 알게 된 심리 치료의 테마를 '치료로서의 예술 창작'이라는 개념과 온전히 접합시킨 보기 드문 현대의 아티스트이다. 앨범 와 CD-롬 는 이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셋째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들로 인하여 전통적 '저급/고급', '대중/학술' 문화 사이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개념의 (대중) 예술 개념을 창안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동시에 음악과 미술, 멀티 미디어, 비디오 아트 등의 작업들과 맞물리면서 더욱 강화되게 된다. 이는 특히 앨범 와 및 그에 이어졌던 다양한 예술과 멀티 미디어 작업의 만남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넷째 그는 자신의 비폭력·평화주의의 신념에 따라 국제사면위원회 및 각종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Wallflower', 'We Do What We're Told', 'Fourteen Black Paintings' 등 수많은 저항 음악을 작곡하는 등 자신의 직업 및 재능과 정치적 실천을 유리시키지 않는 '바람직한 참여'의 방식을 창출해 내었다.

다섯째 그는 기존의 어느 서구 아티스트도 성공하지 못했던 '서구와 비서구' 음악·문화의 화학적 결합이라는 과제를 만족스러운 형태로 수행했다. 이는 그가 설립한 리얼 월드 레이블 및 WOMAD 페스티벌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독보적 공헌이다. 물론 이는 '비서구'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 종종 신비적·이국적 차원의 - 소개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현실적 결과물들은 이미 단순한 '선구적' 차원의 작업 이상의 것이다. 이는 이전의 수많은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및 재즈·뉴 에이지 계열의 아티스트들이 도전한 과제였지만 그들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서구가 주체가 되는 실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 또 다른 '현대의 거장들'이라 할 로저 워터즈, 로버트 프립, 브라이언 이노 모두 이런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런 관점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그의 와 앨범은 이제까지의 성과를 단번에 넘어서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앨범들이다.

여섯째 그가 발굴하고 공동 작업을 펼친 아티스트들에 관한 점이다. 그가 발굴한 리얼 월드 레이블과 WOMAD 페스티벌의 아티스트·엔지니어·프로듀서들도 그렇지만, 그의 개인 밴드 멤버인 토니 레빈, 제리 마로타, 데이빗 로즈, 마누 카체, 데이빗 샌시어스, 장 클로드 네므로 등의 아티스트들은 각기 그와의 초기 작업 당시에는 그렇게 최고의 일급 뮤지션들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티스트들은 그와의 작업을 거치며 가히 세계 정상급 연주인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물론 이에는 아티스트들 자신의 잠재적 역량이 선행된 것이겠지만, 이런 '잠재적 역량'을 알아보고 그들의 역량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창조한 리더 피터 게이브리얼의 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와 작업하면서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프로듀서들로 성장하게 되는 (리얼 월드 스튜디오 등의) 리차드 에반스, 리차드 블레어, 데이빗 보트릴 및 스티브 릴리 화으트, 다니엘 라누아, 피터 월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아티스트·프로듀서로서의 피터 게이브리얼 역시 '초지일관 뛰어났던' 식의 전천후 천재적 뮤지션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 -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의 잠재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만든 뛰어난 역량과 비전의 아티스트인 것이다.

여하튼 '조만간 발매될' 그의 새로운 신보는 - 이전 60-70년대 프로그레시브·아트 록의 '위대한' 그룹·아티스트들 중 예스, ELP, 핑크 플로이드 등 수많은 그룹이 단지 과거의 명성에 기댄 '기대 이하의' 앨범들을 발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과연 어떠한 음악이 담겨 있을까'하는 기대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1950년 생이며, 이미 음악 경력 30년을 훌쩍 뛰어 넘어 버린 한 아티스트의 앨범이 무수한 신예 아티스트들이 넘쳐 나는 오늘 2000년을 맞은 현재까지 동시대에 의미 있는 '오늘의 앨범'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일은 경탄할 일이다. 피터 게이브리얼의 이 오늘 날 보기 드문 '살아 있는 거장 아티스트의 신보'라는 명성에 걸 맞는 내용과 실질을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이 특집을 마친다.

[부록] 한편 게이브리얼은 솔로로 독립한 이래 싱글 B-면, 영화 음악, 트리뷰트 앨범 등 엄청난 수의 앨범 미수록곡들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래에 이제까지 발표된 게이브리얼의 앨범 미수록곡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단 동일한 곡의 '상이한 버전'(different version)인 경우는 본 특집의 <제너시스 & PG 타임라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Single B-Sides

  1. 1978 - 'Me And My Teddy Bear'
  2. 1980 - 'Shosholoza'
  3. 1982 - 'Soft Dog'
  4. 1986 - 'Don't Break This Rhythm', 'I Have The Touch - 85 Remix'
  5. 1987 - 'Curtains', 'Ga Ga'
  6. 1988 - 'John Has A Headache'
  7. 1992 - 'Quite Steam'
  8. 1994 - 'San Jacinto (live)', 'Mercy Street (live)'

Original Soundtracks

  1. 'Walk Through The Fire', <Against All Odds>, 1984
  2. 'Lovetown', , 1993
  3. 'Party Man' with The World Beaters, , 1995
  4. 'Taboo' with Nusrat Fateh Ali Khan, <Natural Born Killers>, 19몇 년?(연도 따라 순서도 바꿔줄 것)
  5. 'I Have The Touch - 96 Remix', , 1996
  6. 'I Grieve', <City Of Angels>, 1998

Tributes & Etc ...

  1. 'Exposure', 'Here Comes The Flood', on Robert Fripp's , 1979
  2. 'Excellent Birds' with Laurie Anderson, <Mr. Heartbreak>, 19몇년?
  3. 'No More Apartheid' with NMA, <No More Apartheid>, 1988
  4. 'Shakin' The Tree' with Youssou N'Dour, 1989
  5. 'Across The River', <Worldwide: Ten Yeats Of WOMAD>, 1992
  6. 'Be Still' with Peace Together, <Be Still>, 1993
  7. 'Summertime', <The Glory Of Gershwin>, 1994
  8. 'Suzanne', <Tribute To Leonard Cohen>, 1995
  9. 'In The Sun', <Diana·Tribute>, 1997
  10. Akiko Yano, PG, Akira Inoue &David Rhodes, , 1998
  11. 'The Carpet Crawlers 1999', <Genesis - Turn It On Again: The Hits!>, 1999
  12. '100 Days To Go', <Real World Notes(#9)>, 2000

이상입니다. 아래는 위에서 말씀드린 '피터 게이브리얼 & 리얼 월드 레코드'의 공식 사이트인데요, 초기화면 의 뺑뺑 돌아가는 것들 중 파란 색 peter gabriel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아주 잘 만든 '아름다운' 사이트입니다. 시간되면 그냥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시길:

http://www.realworld.co.uk/index/flash/

혹은 다음의 소닉넷에서는 각 앨범을 클릭하시면 노래들을 들어보실 수 있지요:

http://www.vh1.com/artists/az/gabriel_peter/albums.jhtml

1.25 # 촌평


PeterGabriel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