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1.1.1.3 (토론)님의 2015년 1월 2일 (금) 20:41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ISBN:8982814477

  • 저자 :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 브라질)
  • 원제 : O Alquimista(1988)

1 # 거북이

어지간하면 베스트셀러와는 연이 안닿는 사람인데 이 책과는 닿게 되었다. 이 책에 계속 등장하는 인생의 '표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남미소설답게 환상을 가득 담고있는 이 우화는, 으례 우화가 그렇듯 뻔한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 뻔한 결론까지 다가가는 과정을 우리는 읽는 것이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라는 얘기다.

신비주의, 이성보다는 감성, 범신론, 운명론, Slow but steady wins the race.(from 성문기본영어? -_-) 등등의 키워드들로 이 소설과 소설가를 설명할 수 있을것 같다.

다행히 나는 이 소설이 주려는 교훈을 알고있다. 그것도 체험으로 말이다. 짧게 정리하자면

'노력했는데 왜 안되냐고 묻는 자는 아직 어리다. 노력하는 것은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조금 더 짧게 팍 줄여본다면

運七技三 (농담이냐고 물어보지 마라. 당연히 농담이다...-_-a)

바보같이 주어진 것에 충실히 따라서 대학에 들어왔다. 내가 나에 대해 결정하게 된 것이 대학시절부터라는 말이다. 그 이후 나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해왔다. 음악듣고, 책읽고, 영화보고, 세상에 불만품고, 가끔 연애도 하고 뭐 그렇게 말이다. 물론 하기 싫은 것도 해야했다. 전공공부, 군기피성 취업과 그에 따른 목구멍 풀칠형 삽질, 애정을 갈구하며 보여왔던 구차한 행동들 말이다. 그것들을 함께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좋아하는 것을 하고있지 못하면 몸에 피로가 쌓인다.'라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피로는 차곡차곡 꾸준히 쌓이다가 어느 순간 질적 전화를 일으키며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고 판단을 요구했다. 어쩌면 그것들은 내 삶을 바꾸게 만드는 동력이 된건지도 모른다. '불만은 나의 힘.'

반면에 내가 즐겁게 했던 것들은 나에게 뭔가 도움을 주었다.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 상당수는 음악이 매개된 사람들이었고, 대학시절 열심히 불만을 품으면서 대안을 생각해 왔던 것들이 내가 회사생활을 하는 큰 밑천이 되었으며, 고려바위를 만들어서 이것저것 쌓아갔던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다시보게 만든데다가, 내가 쌓아간 정말 자그마한 교양(지적자산? 상징자본? =_=)들이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재미나게 했다고해서 그것들을 통해 내가 원하고 있는 그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높은 이상과 불만스러운 현실에서 살고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 하고싶은 것들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어지간해선 배신때리지 않고 나에게 보은을 한다. 이것이 '기삼'이다. '운칠'은 어딘가에 있을것이고, 어쩌면 '운삼'이나 '운일'정도밖에 안되는 넘일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확실한건 내가 열심히 '기삼'의 길을 가지 않는 한 '운삼'은 커녕 '운일'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나는 일단 '기삼'의 길을 간다.

이것이 내 '자아의 신화'이다. 이쯤되면 나는 이미 연금술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내 삶을 바꾸는 연금술을 하고있다고 주장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한가지 불만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주변사람들보다는 스스로에게만 귀를 기울이며 살고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조금 상투적이긴 해도 안치환이 불렀던 김남주의 시 '자유'의 글귀가 여전히 나의 마음을 흔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나라는 하도 꼬여서 '만인을 위해 할 일'이 겁나게 많은 것 같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저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메고있는 나는, 비록 산티아고처럼 떠돌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욱 격정적으로 살고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거북이 2004-9-3 2:18 am

2 # 촌평

형이 이런책도 읽는구먼.
이 책은 도서관 신간에 꽂혀 있었지만 보진 않았군.
여튼 연금술엔 관심이 많아서.
중국의 따오이스트(마오가 아님,도교)들이 불사의 약을 만든것과 같이 이 서양의 연금술도 마음의 연금술에서 물질의 연금술로 변질되어 갔거든.
어떻든 서양의 신비주의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
읽어볼껄. 그럼 좋은 얘기를 할 좋은 기회가 되었을 텐데.


근데 그놈의 운칠기삼은 또 듣게 되는군.
다행히 이번엔 짜증이 나지 않아 다행이군.
저번엔 그놈의 운칠얘길 해서 환장하게 만들더니.
이젠 기삼이 더 사랑스러운 모양이군.
다행이야.


근데 자유 라는 시는 좀 이상하군.
사회적 인간이 자유라고...? 속박아닌가?
아마도 이 시가 만인을 통해 '내'가 아닌 '모든 것'이게 한다는 의미라면 대략동감.
다만 '함께' 하지 않을때도 여전히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그런 '자유' 만이 진정한 '함께' 를 우러낼테니...
그리고 '제 잇속만 차리'는건 나쁜게 아냐.
아마도 내뱉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게 나쁜거겠지.
진정한 이기주의는 필연적 이타주의로 귀결되고,
완벽한 이기주의적 독립은 다양성의 원천이니까.
자연은 자애로운가?
아니더만 자연도 이기적이지.
그런데도 아름다운건 스스로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할 뿐인데, 그 다양성이 어우러져 상상할 수도 없는 우주의 코스모스를 만든다는 것이지.
아마 신은 이기심일껄.
외계의 신이 만든 우주는 이렇게 아름답진 않을꺼야.


'바보' 라는 시는 좋군.
우리의 어리석은 습에대해 한탄하고 있으니, 그리고 독립적이지 못한 비굴함을 슬퍼하고 있고.
역시 독립적이지 못한건 예쁘긴 해도 아름다울 수 없나봐.
하지만 독립적인건 내 뜻대로 하기가 힘들지.
아마도 내 뜻대로는 '나'나 내 뜻대로 하고, 타자는 그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가지도록 해야겠지. 그 아름다움을 가지진 못하지만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할때 아마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까?


형이 사회나 높은 이상속에 함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스스로 잘 하면 사회도 이상도 내가 하는 만큼 따라오는 것 뿐이니까.
조바심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어떻든 형의 성실함은 항상 부럽군.
그리고 빌리 할리데이의 50년대 음반도 아주 좋구먼. 쓸쓸한 목소리가 멋진 모던재즈와 어울어지는 건 또다른 매력인걸. 내 파일방서 따운 받으소 음질도 아주 좋거든. -- LongWarm 2004-9-3 11:36 pm


학술분류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