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 Pasto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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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John Francis Anthony Pastorius III; Jaco Pastorius ( 1951 - 1987 )
자코 파스토리우스, 자코 패스토리어스[1]
  • 미국의 재즈 음악인, 가수, 베이시스트
  • 활동시기: 1964년 ~ 1987년
  • 장르: 재즈, 재즈퓨전, 빅밴드, 포크재즈, funk

 

2 # Biography[ | ]

 최철     (santuary)
서영도(2791067)님이 보내주신 글 Jaco Pas     08/06 23:18   395 line

  다음의 글은 1995년 미국의 Miller Freeman粳에서 간행된
Jaco: The Extraordinary and Tragic Life of Jaco Pastorius,
The World's Greatest Bass Player,  (Bill Milkowski 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4장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

   이봐 자네, 일렉트릭 베이스도 칠줄 아나?

 자코(Jaco Pastorius, 이하  자코 )는 1975년초쯤
마이애미에서 조 자비눌(Joe Zawinul, 이하  자비눌 )과 처음
만나게 된다.

 웨더 리포트는 Guzman 극장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시내에
들어와 있었다.  사운드 체크가 끝나고 자비눌이 극장 한
구석에 서 있을때였는데 마침  치렁치렁한 머리에 아무렇게나
옷을 입은 깡 마른 젊은이  하나가 그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둘간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자코:  캐넌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ey)이후로 선생님의
음악을 쭉 들어왔습니다.  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자비눌:   그래서?

자코:  제 이름은 존 프란시스 파스토리우스 3세(John Francis
Pastorius III)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베이시스트라고나 할까요.

자비눌:  썩 나가지 못해!

그러나 자코는 끈질겼고, 자비눌은 자코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코를 보니까 젊었을 때의 제가 생각나더군요.  저도
캐논볼의 밴드에 들어갈 당시  내가 최고다 하고
떠벌였으니까요.

자비눌은 데모 테이프를 요구했다.  다음날 아침 자코는
자비눌이 묵던 호텔에 테이프를 가지고 들렸는데 거기에는
자코가 아이러 설리번(Ira Sullivan) 그룹과 L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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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에서 밤에 늘상 연주하던 곡들이 들어있었다.  자비눌은
자코의 테이프가 마음에 들긴 들었으나 이미 웨더 리포트에는
알퐁소 존슨(Alphonso Johnson)이라는 훌륭한 베이시스트가
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자코는 약간 풀이 죽은 채로
호텔을 나왔으나 그 이후로 그는 편지와 연주 테이프들을 좀더
보내는 등 자비눌과 근 수개월에 걸쳐 연락을 취했다.

자비눌은 자코의 편지들의 필체에서 받았던 인상을 얘기한다:
마치 모짜르트의 악보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다고 할까요.
그 내용도 아주 마음에 들었었죠.  제가 보기에 자코는 정말
진지하게 음악에 빠진 젊은이 같았습니다.

자신의 솔로 앨범 녹음을 위해 뉴욕에 있는 동안 자코는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뮤지션들을 찾아 신고식을 하러 돌아다녔다.
정말 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죠 라고 기타리스트 존
아베르크롬비(John Abercrombie)는 회상한다.   그냥 이집저집
찾아다닌거죠.  케이스 자렛(Keith Jarrett)집에 가서는 그
앞에서 자기의 베이스를 연주했습니다.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도 찾아갔었죠.  자코는 우드스탁(Woodstock)에서
가서 잭 데조넷(Jack DeJohnette)을 만났습니다.  자코는
거부당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언제나 잼 세션에 굶주려
했었죠.  제 아파트에 와서도 저랑 거의 두 세시간 동안 즉흥
연주를 한게 기억납니다--뭐랄까 각자의 악기를 통해 서로에게
그냥 소리를 꽥꽥 질렀다고나 할까요.

이맘때쯤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우르바니악(Michael
Urbaniak)은 Bottom Line劫 사장이였던 알란 페퍼(Alan
Pepper)씨를 통해 자코를 소개받는데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밤이었는데 클럽에 들렸더니 알란씨가
그러더군요,  플로리다에서 온 친군데 한번 만나보게.
베이스를 꽤 치더라구.   마침 객석에 자코가 베이스를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공연 후에도 자코가 57번가에 있는 제 아파트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한 일주일 동안 제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됫습니다.

이 시기 동안에 자코는 아버지를 찾아뵈러 필라델피아로 몇번
내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자코가 찾아갔던 뮤지션들중에는
기타리스트 팻 마르티노(Pat Martino)가 있었다.  그 둘은 몇몇
비공식 잼 세션에 참가했으나 녹음된 곡들은 없다.

1976년 1월 알퐁소 존슨은 웨더 리포트 탈퇴를 선언하고 드러머
빌리 코브햄(Billy Cobham), 키보디스트 조지 듀크(George
Duke)등과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CBS All-Stars란
그룹으로 여기에는 기타리스트 스티브 칸[Steve Kahn],
색소포니스트 톰 스캇[Tom Scott]등고 참가했었음).  알퐁소
존슨이 탈퇴함에 따라 그 때 마침 앨범  Black Market 의 녹음
작업을 반쯤 끝낸 상태였던 웨더 리포트는 한가지 고민을 안게
되었다.                  2

 처음에 저는 어떻게 알퐁소 존슨의 공백을 메울지
암담했었습니다, 라고 자비눌은 이야기 한다.   그런데 자코
파스토리우스라는 젊은이 생각이 나더군요.  마침 자코는 제게
자신의 솔로앨범을 믹싱 테이프를 보내왔었는데 정말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특히  Continuum 이란 곡이 특히 그랬죠.
그래서 자코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일 처음 물은 말이  이봐
자네 일렉트릭 베이스도 칠줄 아나?  였습니다.  왜냐구요?
자코가 플렛틀리스(베이스의 네크에서 플렛을 모두 제거해버린)
펜더 베이스에서 내던 사운드가 따뜻한 정감이 가면서도 아주
풍부했기에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업라이트(upright) 베이스를
치는줄로만  알았습니다.

곧 자비눌과 웨인 쇼터(Wayne Shorter, 이하  웨인 )는 곧
자코를 스튜디오로 불러  Cannonball 이란 곡(1975년 8월 8일
사망한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ey]를 추모하는 곡)을
연주하게 했다.   캐논볼도 원래 플로리다 출신이었던 터라
저는 그 곡에 플로리다 사운드를 원했었습니다.  게다가 자코가
캐논볼의 음악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도 익히 알고 있어서
자코야 말로 그 곡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코를 초청했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오디션이었던 거죠.
웨인과 저는 의논한 끝에 자코를 가입시키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Cannonball 이란 곡에서의 연주는 물론이고, 자코는 Black
Market이란 앨범에서  Barbary Coast (느린 펑키풍의 이곡은
자코의 깔끔한 뮤트 사운드가 일품)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처음에 저는 그 곡이 별로였습니다, 라고 자비눌은 이야기한다.
  너무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분위기가 나더라구요.
그러나 조금더 손을 보고 난 뒤에야 근사한 분위기를 낼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건 곧 자코의 대표곡이 되었습니다.

 Barbary Coast 란 곡은 철로위를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로
시작되는데 그 소리는 점차 멀리 사라진다.  이러한 사운드는
곡의 전체적 분위기를 더해주는 그런 것이다.  그 소리는 딕시
고속도로(Dixie Highway)변 철로 근처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수 있는 어떤
의미를 깊이 울려주는 것이다.  어렸을적 자코는 그러한
철로위를 수마일 동안 따라 돌아 다니면서 나중에 언젠가는
찾아가게 될 곳들을 꿈꾸곤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철로들은 포트 로더데일의 칼리스(Kalis) 장례회관을
지나가며, 바로 그 곳이 1987년 9월 24일 자코가 영원히 잠든
곳이다.

자코는 공식적으로 1976년 4월 1일 웨더 리포트에 가입한다.
그의 진한 리듬-앤-블루스의 필링은 웨더 리포트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성격을 상당부분 바꾸어 놓았고 이에 새로운
대중적 인기를 얻기에 이른다.  자비눌이 말하듯,  웨더
리포트는 알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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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존슨이 베이스를 맡고 있으면서 상당히 파워풀한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코는 자기만의 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코는 당시의 여타 베이스 주자들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가졌던 그
마력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강렬한 충격을 주는
연주자인 동시에 위대한 음악가였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공연에 백인들이 몰려오던 것도 모두 자코 덕이었습니다.
자코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희들은  극소수의 팬들만을
가진 재즈 그룹이라고 인식됫었으니까요.  대학가에서 인기가
있었다고는 해도 자코가 가입한 후에야 저희들은 가는곳 마다
공연이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자코는 이런 백인 젊은이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미국적인 스타가 됫던 겁니다.

자코의 매력중 하나는 바로 그루비한 필링에 바탕을 둔 베이스
연주를 할수 있는 본능적이고도 깊은 능력으로써, 자코는 웨인
칵크런 앤 씨씨 라이더스(Wayne Cochran & the C.C. Riders)와
10개월동안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러한 능력을 완벽에 가깝게
갈고 닦은바 있었다.  자코의 연주에서는 그루비한 필링을 밑에
깔면서도 밴드 전체를 밀어주고, 솔로 연주자들을 자극하는
그의 강력한 16분 음표 라인들을 들을수 있다.  아이디어의
명확함은 물론이고 그런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데 있어
자코가 보여주는 스피드에 누구나 놀라게 마련이다.  칩
스턴(Chip Stern)씨가 Musician劫에 기고했던 웨더 리포트에
관한 글에서 말했듯:  자코 파스토리우스야말로 이 시대에서
가장 독창적이고도 영감에 가득찬 뮤지션으로 미로슬라브
비투스(Miroslav Vitous)가 보여준
리드믹하면서도-화성적이고-멜로딕한 역할뿐만 아니라 펑키한
분위기까지도 낼수 있는 것이다.

타고난 외향적 성격의 자코는 쇼맨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는 사교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듯 했다.  자신만의
플로리다 히피 복장(헐렁헐렁한 비치 바지, 알록달록 물들인 티
셔츠, 어깨가지 내려오는 머리를 덮는 머리띠 혹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야구모자)과 와일드한 무대 매너로 인해 자코는 곧
카리스마적인 무대 이미지를 창출해 냈고 이는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자코가 좋아했던 장난중 하나는 무대 바닥에 베이비 파우더를
뿌리는 것이었는데 이는 가수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처럼
발을 질질 끌다 무대를 가로질러 미끌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한번도 베이비 파우더를 안뿌린 공연이 없었으니까요, 라고 한
웨더 리포트 공연 매니져가 회상한다.   게다가 만일 베이비
파우더가 다 떨어지는 날이라도 저더러 근처 가게에 가서 하나
사오라고 보낼 정도였고 제가 사가지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공연을 진행시키지 않았습니다.

피터 어스킨(Peter Erskine)은 아직도 자코의 베이비 파우더
장난을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저희들은 일본에
있었습니다.  그게 저의 첫 번째 웨더 리포트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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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죠[1978년 여름].  사운드 체크 도중에 공연 요원 하나가
무대위에 베이비 파우
더를 뿌리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뭐하는 거냐 고 물었죠.
그랬더니 자코가 무슨 대단한 비밀이나 되는냥 그 사람에게
쉬- 하더라구요.  자코는 저를 보고는 실실 웃으면서  다
알게돼  하더군요.

 그날밤 저희들은  Elegant People 이란 웨인 쇼터씨의 곡으로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곡의 펑키한 부분으로 막
넘어가려는데 자코가 저에게 와서는  이거 잘봐! 하고 소리치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런 굉장한 제임스 브라운 동작을
해대는데, 무슨 스케이트를 타듯이 한발로 무대를 가로질러
미끌어 지더라구요.  믿을수가 없었죠.  너무 근사한 나머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곡내내 자코는 뒤돌아 저를
실실 쳐다보면서 힘들이지 않고 펑키한 베이스를
연주해냈습니다.  그렇게 멋진 신참 환영식은 처음 보았습니다.

웨더 리포트에 재적해 있는 동안 자코는 공연에서 솔로연주를
통해 자신의 영웅들을 추모했다.  지미 헨드릭스의  Purple
Haze 와  Third Stone from the Sun 과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Donna Lee , 윌슨 피켓(Wilson Pickett)의  Funky
Broadway ,  비틀즈(Beatles)의  Blackbird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혼합함으로써 자코는 관객들을
즐겁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로운 사운드에 귀를 열어주었고
이는 결국 록과 재즈 양진영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것이었다.
젊은 백인 록 팬들은 마치 그룹 후(Who)의 피트 타운쉔드(Pete
Townshend)처럼 베이스 기타를 공중위로 던지고, 앰프위로
공중제비를 하는 자코를 보기위해 웨더 리포트 공연장에
몰려들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찰리 파커와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분위기도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평론가들이 자코의 무대 행위들을 인기를 노린 얄팍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기는 했으나 그들도 자코의 훌륭한 연주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솔로 데뷰 앨범과 또 다른
앨범 Black Market (둘다 1976년에 출반)이 공개되면서 자코는
음악산업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신세대의 선두주자로, 혼자
힘으로 일렉트릭 베이스의 역할을 뒤바꾼 연주자로 알려지게
된다.  그의 베이스 연주능력은 베이스라는 악기의 짧은
역사(일렉트릭 베이스는 당시로부터 겨우 25년전에
발명되었었다)를 통들어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박자는
완벽했고, 스태미나는 끝이 없었으며, 자코가 창조해낸
멜로디들은 몽크 몽고메리(Monk Montgomery)나, 제임스
제머슨(James Jamerson), 덕 던(Duck Dunn), 제리 제몽(Jerry
Jemmott)등과 같은 베이스 선구자들이 남겼던 업적들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코의 독창적인 하모닉스
주법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크 그리들리(Mark C. Gridley)씨가 자신의 저서 Jazz Styles:
History and
                                     5
Analysis에서 지적하는 것 처럼, 자코는 단순히 스탠더드
재즈의 베이스 연주 스타일
들을 모두 커버 할수 있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연주라인은 아주 호소력이 있다, 이것은  Crazy About Jazz
라는 곡(웨더 리포트의 통산 11번째 앨범인 Weather Report에
수록된 곡)에서도 증명된다.   Dara Factor One (이것도 역시
11번째 앨범 수록곡)과  Dream Clock (앨범 Night Passage에
수록)란 곡에서도 볼수 있듯이  자코는 반복적이지 않으면서도
상호 교환적인 방식으로[이것은 스콧 라파로{Scott LaFaro}의
대표적 연주방식] 연주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타고난
펑크 연주자로,  자신의 솔로 데뷰 앨범(Jaco Pastorius)에서
샘 앤 데이브(Sam & Dave)라는 소울 싱어들의 반주에서 적절한
리듬감을 제공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웨더 리포트 시절의
Barbory Coast (Black Market),  Palladium (Heavy Weathr),
River Peoaple (Mr. Gone)와 같은 곡들에서는 댄스 감각까지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각지의 베이스 연주자들은 곧 자코의 메시지에 공감하게 된다.
스탠리 클라크(Stanley Clarke)가 래리 그러햄(Larry
Graham)이나 루이스 존슨(Louis Johnson)과 같은 이들이 개척한
엄지 슬래핑 테크닉에 중점을 둔 일렉트릭 베이스의 새로운
기준을 대표하고 있던 때에, 자코가 완전히 다른 개념을 가지고
등장한 것이다.  자코의 등장으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사운드를
탐구할수있는 영감을 받았을뿐 아니라 동시에  베이스 연주
테크닉의 범위 확장을 향한 자극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마크 이건(Mark Egan)은 그 시절들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저는 스탠리 클락씨의 곡들을 무척 많이 들었었고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시절의 그분 실력에 상당히
감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코의 연주 방식은
화성학적으로 볼때 훨씬 더 진보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아주 무서울 정도의 강렬한 태도로 연주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자코와 함께 공부했을 때 배운거라면 배운거죠--그냥
그와 같이 연주하는 것 만으로도, 그와 함께 방을 쓰는
것만으로도, 자코는 제가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감을
가지고 연주하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웨더 리포트 시절 자비눌과 웨인 쇼터는 여러면에서 자코의
스승이 되주었고 특히 자코는  리듬 섹션, 즉 드러머 알렉스
아쿠나(Alex Acuna)와 퍼커셔니스트인 마놀로 바드레나(Manolo
Badrena)와 절친했었다.   자코와 연주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라고 아쿠나는 자코에 대해 말한다.   자코의
그루비한 분위기는 아주 강렬했고 톤은 무척 독특하고
참신했습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목이 타고 푹푹 찌는데
홀연히 누군가 나타나 차가운 레몬 쥬스 한컵을 주는 것 같다고
할까요.  바로 그게 자코가 가입했을 때 제가 받았던
느낌입니다.

웨더 리포트 초년 시절 자코는 알디 메올라(Al Di Meola)의
솔로 데뷰앨범 Land of the Midnight Sun, 로커 이안 헌터(Ian
Hunter)의 앨범 All-American Alien Boy,
                                     6
그리고 조니 미첼(Jony Mitchell)의 앨범 Hejira(이 앨범에서
자코 파스토리우스란 베이스 귀신은 조용한 반주자로 등장)
등의 외부 프로젝트에 객원 연주자로 참가하기도 한다.  앨범
Hejira에서의 자코의 연주는  Black Crow 이란 곡과 쉽게
잊혀지지 않는 타이틀 트랙에서와 같이 신중한 절제감과
감미로운 감정으로 특징지워 진다; 뿐만 아니라 자코는  Refuge
of the Roads 란 곡에서 놀라운 보컬 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곡은 자비눌의  A Remark You Made 와 더불어 명실상부
베이스란 악기에 대해 자코가 보여준 가장 확실한 설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젊은 자코가 웨더 리포트에서 자리메김 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웨더 리포트의 1977년도 앨범 Heavy
Weather에서 자코는 두 곡( Havona 와 이미 고전이된 현란한
솔로곡  Teen Town )을 작곡하는 것은 물론 공동 제작자로서
자비눌과 나란히 서게된다.   그건 자코의 실력과 기여도의
문제였습니다, 라고 자비눌은 말한다.   자코는 그 앨범에 많은
기여를 했고, 저는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한다고 믿는
쪽이거든요.  그 시절에는 저희 멤버들 모두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나름대로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웨인은 정말
스튜디오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안에 오래 있기는
했습니다만 모든 일을 우리들에게 맏기는 쪽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코는 믹싱 보드(mixing board)에 관한한 아주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음악자체에 통달해있었으나, 바로 저의
강점이기도 하죠, 자코는 악기들에 반향(reverb) 효과를
첨가하거나 양질의 드럼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데 꽤 소질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믹싱 보드에서 발휘한 실력이
자신의 베이스 사운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겁니다.

 자코는 아주 날카로운 귀를 가졌었습니다.  모든 파트들을
아주 명확히 들을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멤버들 모두가,
20개의 손가락을 믹싱 보드에 댄 체,  호흡을 잘 맞추어
작업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건 컴퓨터 자동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시절의 얘기 입니다.  자코는 그야말로 적극적인
제작자였습니다.  웨인은 곡명을 지어낸다거나 다른 일을
맡았었습니다만, 음악을 테이프에 담는 것에 관한한 거의
대부분 자코와 제가 함께 일하는 형국이었죠.  다른 멤버들의
모두 귀가한 한참 뒤에도, 거의 항상 자코는 엔지니어와 같이
않아 믹싱을 하면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앨범 Heavy Weather는 이보다 덜 대중적이었던 앨범 Black
Market의 판매 실적을 훨씬 뛰어 넘는 등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초기 판매량은 40만장 가까이 육박했다; 이
앨범은 그 이후 골든 디스크화 되어 50만장이 팔려 나갔으며
콜롬비아 레거시(Colombia Legacy) 시리즈의 일환으로 CD로
재발매 되기도 했다.  많은 음악 팬들을 웨더 리포트 팬으로
변신시킨 곡은  Birdland 로, 자비눌이 당시의 한 유명한 뉴욕
재즈 클럽에서 1950년대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밴드의
곡을 듣고 영감
                                     7
을 받아 작곡한 경쾌한 곡이다.  리프(riff, 반복 악절)로
엮어진 이 곡은 1977년동안 수많은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많은
록과 팝 청취자들에게 재즈 입문서 같은 역할을 해냈다.
디스코 곡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 곡은 후에
메이나드 퍼거슨(Maynad Ferguson) 빅 밴드, 보컬 그룹 맨하탄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를 비롯한 많은 아티스트들의
단골 메뉴로 사용되었다.

앨범 Heavy Weather 수록 곡들중 또하나 놀라운 작품은  A
Remark You Made 이다.  이 곡은 자비눌이 특별히 자코의
노래하는 듯한 플렛틀리스 베이스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발라드이다.  자비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녀석은 특히
발라드를 작곡하기에 편한 사운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알퐁소 존슨도 웨더 리포트에 많은 강점들을 더해주었지만 톤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습니다.  제가 자코에게 써
주었던 곡이라도 알퐁소에게라면 절대 못 했을 겁니다.

자비눌은 세션이나 공연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능력울
가진 자코를 가리켜  The Catalyst(촉매의 역할을 하는 사람,
기폭제) 라고 부른다.   자코는 밴드에 가입할때만 해도 아주
펄펄 나는 젊은이였죠, 라고 자비눌이 이야기한다.   웨인과
제가 이미 40대에 접어들었을 때 바로 이 자코라는 젊은이가
자신의 정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우리 둘을 젊게 유지시켜
주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스태미나는 정말 대단했으니까요.
베이시스트 치고 그런 스태미나를 가진 사람은 보질
못했습니다.  그 16분 음표들을 그렇게 초고속으로 여러번 계속
연주하고도 절대 늦추거나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Volcano for Hire'란 곡에서 바로 그런 연주를 해댔었습니다.
이 곡은 그야말로 타오르는 16분 음표들로 매일밤 자코는 이
곡을 완벽히 끝장내곤 했습니다.  자코는 언제라도 연주할
태세가 되어있어서 저희 밴드를 뒤에서 밀어주었습니다.
그러니 멤버들 모두가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죠.
모든 밴드들은 제가 말하는 탄두(檄愷)--추진력, 모터가
필요합니다.  웨더 리포트에서는 바로 자코가 그 탄두였습니다.

1978년 자코는 그야말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는
Down Beat劫 독자와 평론가 투표모두에서 최고의 베이시스트로
뽑혔다.  앨범 Mr. Gone은 나오자 마자 골든 디스크가 되었다.
전세계의 뮤지션들과 팬들은 자코! 자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자코가 베이스 제국을 지배하게 될 무렵, 그의 가족은
파탄에 이르고 있었으니......

자코의 부인 트레이시(Tracy)는 1978년말에 이혼 소송을 제기,
결국에는 주택 소유권과 자녀 양육권을 얻게 됨으로써 자코는
쓰라림과 분노에 잠기게 된다.  이로 인해 자코는 점점더
음주와 마약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우울증 증세만 악화시켜,
급기야는 주기적으로 자학 증상이 발병 걷잡을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3 참고[ | ]

  1. /ˈdʒɑːkoʊ pæsˈtɔːriə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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