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르지 리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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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스 리게티와의 인터뷰[ | ]

루카스 리게티는 죄르지 리게티의 아들로 몇몇 앨범을 내고 작곡가 겸 타악기 연주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홈페이지 http://www.lukasligeti.com 에 있는, 인터뷰 형식으로 된 FAQ를 번역하여 올립니다.

Q: Ligeti는 이탈리아 이름인가?
A: 아니, 헝가리 이름이다. 뉴요커들은 아마도 (George) Pataki와 (Alan) Hevesi 또한 헝가리 이름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느낄 것 같다. 유사성이 보이나?
Q: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가?
A: 강세는 첫 음절에 짧게 있다(헝가리어에는 예외없이 모든 강세가 첫 음절에 있다). 그렇지만 단어 전체를 기록재듯이 짧게 외치라는 소린 아니다. '리'에 강세를 두고(짧게) '게티'는 느긋하게 발음하면 된다.
Q: 유명한 헝가리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와는 어떤 관계인가?
A: 나의 아버지이다.
Q: 널리 알려진 헝가리 지휘자 안드라스 리게티와는 어떤 관계인가?
A: 별 관계는 없다. 대신 먼 친척 관계의 다른 예술가들 이름을 알려주겠다: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이자 20세기초의 교육자이며 아샤 하이페츠와 나탄 밀슈타인의 스승인 레오폴드 아우어, 그리고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가 있다.
Q: 당신의 아버지가 죄르지 리게티라는 사실로 볼 때, 매우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라고 일찍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을 것 같은데?
A: 그렇지 않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음악(대부분 클래식이었고 일부는 팝)을 들었고 나에게 재능이 있음도 명백했지만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고 8살 무렵의 피아노 레슨 따위도 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음악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라는 동안(이따금 내 아버지의 콘서트 등에서) 현대 음악을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아방가르드 음악은 내게 전혀 낯설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또한 내가 건강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갖고 현대 음악을 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맹목적인(starstruck) 현대 음악 풋내기가 겹겹이 화려한 옷을 보는 데에서 종종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곤 했다.
Q: 아버지에게서 작곡을 배웠는가?
A: 아니, 전혀.
Q: 아버지와 공동으로 작업한 적이 있는가?
A: 없다. 내 아버지는 혼자서 작업하는 타입의 예술가이다. 우린 많은 흥미거리를 공유하고 음악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작품을 존중하지만 아무도 공동 작업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Q: 왜 드럼인가?
A: 고등학교를 나오고 진로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되자, 나는 내 머리속에 24시간 돌아가는 멀티트랙 사운드트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작곡을 시작하기로 생각했다. 또, 나는 어느 정도는 남부럽지 않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는 것이 유리하리라 생각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기엔 너무 늦었다고 여기고 나는, 순진하게 그 대신 가장 쉬운 것: 타악기를 선택했다. 가장 쉬운 악기(드러머가 실수한다고 누가 눈치나 채겠는가?)라고 생각한 점도 있지만 나는 내 자신이 멜로디에는 상당히 유능하지만 리듬에는 약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내겐 타악기가 더 많은 배움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서로 모순된 것임을 인정하지만 내 짐작은 그랬다. 드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금세 깨달았지만 그것들을 다루는 데에 흥미를 느끼곤 인내했다!
Q: 당신은 헝가리계 유대인 부모의 자식이고 오스트리아에서 자라,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국가적/민족적/종교적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A: 난 내가 세계 시민의 일원이라고 느낀다. 내 친구들이 있으며 만나는 사람에게 좋은 대접을 받는, 그런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디에서든지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헝가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행운으로 여긴다. 사회주의 시절의 헝가리는 탈출해야 할 곳이었고 나의 부모는 나를 위해 내가 태어나기 몇년전에 그리하였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어릴 때에 오스트리아에 귀화했으며 오스트리아가 우리 가족에게 제공한 보호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어느 정도 살면서 미국의 공립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스타일로 자라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에 돌아와서도 나는 국제 학교에서 미국식의 학교 교육을 계속 받았다. 자라서 나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위해 미국 국적을 포기했고 18세 때에 오스트리아의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게 가장 큰 문화 충격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뉴욕과 빈, 미국과 오스트리아 모두 나에게 편안한 곳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의 지배적 문화에서 성립된 국가보다는 다양성 위에서 건설된 국가를 높이 사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을 매우 선호한다고 느낀다. 이에 대해서는 코트 디부아르(Côte d'Ivoire: 가나 옆에 있는 아프리카의 국가. 영어권에서는 Ivory Coast라 부른다)도 언급해야겠다. 나는 그곳에 처음 도착한 날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미국처럼 그 기본 원리에 다양성과 개방성을 포함하고 있는 국가이며 국가라기 보단 하나의 관념인 곳- 그곳의 비참한 현 상황은 날 슬프게 한다.
난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전통에 흥미가 있었으나 종교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면서 무신론자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빈에 거주할 때보다 나의 유대인적 근본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게 되었다.

-- 쾌변Z 2004-10-22 9:5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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