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기행

1 # 2003-12-13[ | ]

어머님은 간이 안좋으시다. 우리집안 특유의 무신경이 어머님 간을 그지경까지 방치해놓은 것이다. 우리집 남자들은 확실히 문제가 좀 있다. 간이 심하게 안좋아졌을 때는 사실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나도 여전히 고작인 것이나마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괜찮은 의사를 찾아서 꾸준히 모시고 다녔고 그런대로 어머님은 더 상태가 나빠지진 않고있던 참이었다.

내 동생은 도시에서 노동자로 사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백일정도 자전거 무전여행을 떠났었다. 이 녀석도 어지간히 영적인 놈이다. 하여간 그 백일을 돌고 돌아왔는데 훨씬 몸상태나 얼굴이 좋아보이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 난 내돈 다 쓰면서 유럽을 돌았지만 돌아왔을때는 너무나 지쳐있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이 녀석이 여행다니는 도중에 강원도 홍천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면서 몸을 치료하는 분 한명을 만났고 그분과 얘기하다보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고 이것도 인연이니 싶어 어머님을 그곳으로 모시고 갔다. 이것이 이번 홍천방문의 목적이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오 비발디 파크 갔냐'라고 얘기했던 거기 맞다. 훨씬 오지이긴 하지만.

내가 전날 친구들이랑 놀다가 집에 못가는 바람에 다음날 아침에 집에 가고 있었는데 이미 나를 빼고 가족들은 모두 출발했다. 나는 혼자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용문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기차여행은 왠지 버스보다 아늑하고 로맨틱하다.
용문역에서 만난 우리는 또 한시간 이상을 타고 들어갔다. 가는 도중에 졸려서 꼬박꼬박 졸았지만 막판에 하도 덜컹거려서 길이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게되었다. 그래도 계속 잤다.

그곳은 참 산좋고 물좋은 곳에 있었다. 확실히 깊숙히 들어와야 좀 도시를 걷어낸듯한 기분이 난다. 가보니 아직 주인아주머니는 안계셨고, 할머니 한분만 계셨다. 그 할머니는 백수가 훨씬 넘은 분이신데 정신도 말짱하시고 말씀도 재치있게 잘 하시는 분이었다. 우리는 좀 더 기다려서 주인아주머니를 만났다.
주인아주머니는 가까운 분을 암으로 잃고 서양의학이 포기한 질병에 대해 자연요법으로 대응해본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시다. 구하겠다는 차원은 아니고 물좋고 공기좋은 곳에서 운동하고 좋은걸 먹으면 낫는다는 소박한 삶의 방식이다. 산에서 나는 약초같은것도 직접 채취해서 먹고말이다. 마냥 소박한 것은 아니고 대체요법이나 운동에 대해서도 꾸준히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표정이 좋은 아주머니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인기가 이동네의 '효리' 이상이었다.
일단 서로 좀 겪어봐야 알겠기에 어머님은 그곳에서 며칠 기거해보시기로 했다. 며칠이 좋으면 몇달, 몇달이 좋으면 몇년이 될 수 있는 그런것 아니겠는가. 종교적인것도 아니고 이윤추구도 아니니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다.

동생은 근처에 신세진 산장이 있다고 같이 가자한다. 이녀석 말로는 십키로쯤은 될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밤의 산길을 걷게되었다. 이녀석과 어떻게 살 것인가, 인과론 등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참 걸었는데 말이 십키로지 길이 꼬불꼬불해서 얼추 십오키로는 되지않나 싶다. 다 걷고나니 우리는 세시간 이상 걸었다. 도로변이긴 했ㅈ만 눈도 채 안녹은 산길을 말이다.
그 칠흙같은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핫브레이크와 건빵을 먹었다. 맛있더라. 들어갈수록 인가가 줄어들어 어느시점부터는 빛이 전혀 없게 되었다. 우리는 별빛에 기대어 계속 걸어들어갔는데 어두운 산이 앞을 떡 가로막고 있으면 뭐랄까 자연의 엄정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가끔 시커먼 겨울바다를 보면서 느꼈던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내동생은 산에서 이런 느낌을 여러번 느꼈다고 했다. 하긴 지금 우리는 행선지가 있지만 행선지가 없는 나그네에게 빛이 없는 산길이란 절대고독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을거다.
사실 그동안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데, 별들이 무리지어 떠있기도 하더라. 그리고 서울에 비하면 정말 하늘 가득 별이 있고, 은하수도 잘 보였다. 난 산길을 걸으면 종종 하늘을 봤다.

서너시간을 걸어가니 겨우 산장이 보였다. 산장에 들어가니 산장지기가 내 동생 그림자만 보고도 알아맞추더라. 산장지기는 수염을 도사처럼 기른 분이었는데 배려와 넉넉함이 있는 분이었다. 우리는 들어가자마자 배고파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옆에 등산객들이 있었는데 그분들도 자연스럽게 우리랑 떠들면서 라면을 먹었다. 이런데서 술과 음식을 나누면 아무래도 쉽게 친구가 된다. 나중에는 고구마도 구워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서 자꾸 이것저것 먹게되었다. 난 피곤해서 먼저 떨어졌고 내동생은 남아서 사람들과 더 얘기를 나누었다.

2 # 2003-12-14[ |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주변에 산이 둘러싸고 있고 한가운데에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지형이었다. 살기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얘길 들어보니 조금만 산에 들어가면 먹을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수렵과 채집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린 아침부터 난데없이 나타난 영계삶은 놈이랑 된장국에 빵빵한 밥을 먹었다.

여긴 물이 얼어서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나오기때문에 옆의 내린천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 양쪽에 양동이 두개를 들고 물을 떠오려니 그 짧은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힘들었다. 비틀비틀 길어오면서 출렁대어 바지가 다 젖었다.
여긴 개들이 여러마리 있는데 이놈들이 사람들을 참 좋아한다. 허스키 한마리는 나에게 달려들어서 두 발로 내 허벅지에 흙도장을 찍었다. 개 먹거리를 대기 힘들어서 몇마리는 처분해야 한다고 한다. 얘들을 마냥 방목할 수는 없어서 가끔은 내놓고 대체로 개집에 넣어두는데 이놈들이 개집에 들어갈 때가 되면 그게 싫어서 낑낑대며 땅바닥을 뒹군다. 그 모습을 보고있으면 귀여우면서도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짐승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진도개 잡종녀석은 아주 똑똑하고 말도 잘 듣는다. 오골계 두마리가 도망가서 근처 산에 들어가 거의 야생 독수리처럼 된 것이 있다. 이놈들은 뛰어다니는게 아니라 펄럭거리며 나는 통에 잡기가 힘들었는데 그걸 아침이가 가서 물어왔다. 아침이는 지금 새끼를 배어서 숨겨놨다가 영양보충이라도 하고싶었나본데 그만 산장지기에게 걸려서 뺏기고 말았다. 녀석의 얼굴을 보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근처 산에 들어가면 몸에, 특히 간에 좋은 겨우살이라는 놈과 벌나무라는 놈이 있댄다. 동생은 이곳 분들과 함께 가서 채집해본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거 베려면 편도 네시간의 산길을 걸어야 한단다. 그걸 끓여서 보리차처럼 여기선 먹는다. 여기서 벌나무 보리차같은 것을 꾸준히 마시신다면 어머님 건강은 더이상 나빠질래야 나빠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외에도 강에서 나는 물고기들 하며 다들 뭣도 먹고 뭣도 먹고 하는 얘기를 계속 했는데 여기서 먹으면 약 아닐 것이 뭐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와 함께 얘기를 많이 했던 형님 한분은 서울에서 와인 딜러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곳에 자주 온 덕에 건강을 유지하지 않았는가 싶다.

우리는 와인 딜러 형님의 차를 얻어타고 춘천까지 나왔다. 춘천 가는 길에 위쪽에서 내려다 본 산장 주변은 천연 요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좋게 춘천에서 바로 기차를 타고 성북역에 도착하니 6시 반. 오늘 가지기로 했던 노원청년단 저녁 회동을 하기 위해 WooRam안미남군을 노원역으로 불러냈다.

오래간만에 자연을 접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나는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나같이 만 27년 이상을 도시에서 보낸 사람에게 자연보다는 빌딩이 고향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난 강북 근처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도시인의 비애랄까.
하지만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면서 느긋하게 인생의 속도를 줄이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물론 그러고 지낼 수 있는 돈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음악이나 영화정도는 어찌어찌 해결할 수도 있을것이고. 하지만 내가 그 북적거림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도시에서의 자아실현 욕구를 버리면 가능할까? 역시 모르겠다. 난 아직 자연에서 버틸 준비는 안되어있는 사람인가보다. 강릉 출신의 후배녀석과 함께 강릉에 놀러갔을 때 그녀석이 말하길 젊은 애들 치고 서울, 하다못해 강릉이라도 나오려고하지 않는 젊은 애들은 하나도 없다더라. 그만큼 심심하다는 얘기겠지. 그럼 저 시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천국'(TalkingHeads : Heaven is the place, nothing ever happen)인가? 역시 어려운 문제다. 나는 내가 부지런하다고 최면을 걸고있지만 다른 누구 못지않게 귀차니즘의 포로로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거북이 2003-12-17 12:24 am

3 # 촌평[ | ]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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