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중앙일보 과학으로 세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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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기사읽기 : 조잡한 중앙일보에게 평화를!

1 # [과학으로 세상보기] '줄기세포 연구' 윤리문제 없나[ | ]

"프랑스 사람 중에는 무정부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허무주의자도 있지만, 반(反)파스퇴르주의자는 단 한명도 없다. 과학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이제 애국심을 의심하는 것으로 변했다." 1887년에 파리의 한 의사가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파스퇴르의 광견병 백신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한 얘기다.

최근에 황우석 교수는 체세포 이식을 통해 배아를 복제하고 이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생명공학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는 미국의 과학자들 앞에서 당당히 기자회견을 하고, 경이로운 성과라는 칭찬을 받아냈다. 미국의 요구라면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낼 정도로 힘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속시원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줄기세포 연구는 난치병 환자를 소생시키는 길을 열어준다.

황우석 교수를 노벨상 후보로 지지하는 노벨상추진위원회가 과학기술부에 의해 구상됐다. 윤리적인 문제가 불분명한 연구를 국가가 지원한다고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이에 반대했는데, 인터넷 게시판은 시민단체를 비난하는 목소리 일색이었다. 시민단체는 난치병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黃교수의 업적을 폄하하려고만 하며, 노벨상이 얼마나 영예로운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꼴통'에 '빨갱이'라는 얘기는 보통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번 연구에 윤리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만 보아도 자명하다. 우선 우리나라보다 생명과학.공학 연구를 훨씬 더 지원하는 선진국 대부분이 체세포 이식을 통한 배아복제는 법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이것이 자국의 기술적 우위와 의학적 혜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를 금지하는 것일까?

둘째로 黃교수는 귀국 인터뷰에서 "연구 실험 과정이 완벽하게 공개적이고 투명할 수는 없었다"고 하면서, 곧바로 인간 난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242개의 난자는 자발적으로 기증받았고, 연구는 한양대 윤리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하며, 연구비는 국가 연구비가 아니라 독지가의 기부금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투명하지 못했단 얘기인가? 지금은 소문만 무성하다. 그렇기에 시민단체는 黃교수가 연구과정 전체를 공개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 대해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고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느니, 매국노니 하는 것은 생명공학 연구자들도 간절히 원하는 "시민사회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줄기세포를 얻는 데에는 성체 줄기세포를 이용하는 법, 폐기처분되는 냉동 배아를 이용하는 법, 체세포의 핵을 난자에 이식해 배아를 얻어내 줄기세포를 얻는 법 등이 있다. 黃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셋째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체세포 핵을 난자에 이식하는 방법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자와 난자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배아가 아니라는 점에서) 냉동 배아를 이용하는 것보다 윤리적 문제가 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배아도 자궁에 착상시키면 생명으로 자랄 수 있고, 게다가 이렇게 자란 생명체는 바로 인간복제를 낳는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큰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난치병 환자를 돕는다는 목적의 가치와 순수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적이 숭고하다고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살인범을 잡기 위해 불법 도청을 하거나 고문을 해선 안 되듯이, 아픈 사람 10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해서도 안 되며 장기를 매매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합의다. 배아복제 연구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통과해야 한다. 한 생명윤리학자는 생명과학의 기술이 근본적으로 "감시 불가능하다(unpoliceable)"고 했는데, 우리는 인간의 체세포를 인간 난자에 이식해 배아를 만들어 이를 복제하는 기술을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논의에 첫발을 내딛고 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 2004.03.04 18:54 입력 / 2004.03.05 08:50 수정

2 # [과학으로 세상보기] 연극 '코펜하겐'을 보고[ | ]

토론토에 들렀다가 연극 '코펜하겐(Copenhagen)'을 보았다. 영국의 작가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의 작품인 코펜하겐은 1998년 런던에서 초연한 이래 유럽의 각국에서 공연됐으며, 2000년에는 뉴욕에서 대 호평을 받고 브로드웨이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의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양자 물리학의 '메카'였다. 1920년대에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천재적인 젊은이들은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에서 양자 물리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만들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었다.

시간이 흘러 41년이 되면 하이젠베르크는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핵분열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책임자가 된 반면, 보어는 점령국의 반(半)유대인으로 힘들게 살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으로 옛 스승이자 친구인 보어를 찾아간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눈 대화는 보어를 무섭게 격앙시켰다. 연극 코펜하겐은 보어의 부인 마그레테의 독백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41년 9월에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찾아 코펜하겐에 왔는가?" 이 질문은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차례 반복된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옛 스승인 보어에게 "과학자가 핵분열의 결과에 대해 연구를 계속할 도덕적 권리가 있는가"를 물었을 뿐인데, 이를 오해한 보어가 벌컥 화를 내고 대화를 중단했다고 술회했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의문은 남는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런 얘기를 던진 의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하이젠베르크가 미국과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던 보어로부터 미국의 원자탄 기밀을 캐내려 한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해석도 있으며, 정반대로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원자탄 개발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연합군에 넌지시 알려주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설득해 독일과 미국 모두의 원자탄 계획을 지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41~44년에 하이젠베르크가 독일 점령지역을 여덟 차례나 방문, 독일이 승리해야 하는 필연성을 선전하고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해 41년 코펜하겐 방문의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연극 코펜하겐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연극의 묘미는 "왜 41년 하이젠베르크가 코펜하겐으로 보어를 방문했는가?"라는 문제를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하이젠베르크의 동기와 행동에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발견한 원자 세계에서의 불확실성과 인간 삶에서의 불확실성의 기묘한 대비는 연극 전체를 관통한다. 작가 프레인은 "삶은 항상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묘하다"고 말하는데, 41년 9월의 코펜하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의 행동과 동기의 다층성.미확정성.비예측성이 관객을 연극에 몰입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코펜하겐은 단순한 '과학 연극'은 아니다. 과학자.과학이론.과학사의 사건이 연극의 소재로 쓰이지만, 연극의 핵심적인 모티브는 사람의 행동이 유발하는 수많은 해석, 이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가능성,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이 결국 하나의 현재와 과거로 귀결되는 인간사, 그리고 그렇게 닫혀버린 과거를 다시 열 때 갑자기 부닥치는 해석의 유연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연극은 연쇄반응, 상보성 이론, 불확정성 이론은 물론 독일 원자탄 개발에 대한 약간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어야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작가의 역량도 관객의 감상의 깊이도 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잡종적'인 소양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 극단이 '코펜하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3월에 공연을 시작하려던 계획을 연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획이 취소된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우리도 이 흥미진진한 연극을 무대에서 곧 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 2004.02.19 18:33 입력 / 2004.02.20 09:29 수정

3 # [과학으로 세상보기] 신임 과학기술 보좌관께[ | ]

1년 전 참여정부가 신설한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은 과학기술계의 숙원이었다. 대통령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대통령에게 과학기술계의 목소리와 과학기술의 현안을 효과적으로 보고하고, 정책 부처들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달 30일 박기영 순천대 교수가 새롭게 과학기술 보좌관에 임명되었기에, 여기서 과학기술사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신임 보좌관에게 바라는 바 몇 가지를 적어보려 한다.

우선 '이공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큰 틀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이공계 위기는 직업과 직위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사나 변호사 친구들을 부러워할 틈도 이유도 없는 유명 대학 교수나 스타급 과학자들에게는 우수한 학생이 이공계에 진학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반면에 적은 연봉에 임시직이라는 불안정한 상태로 연구에 종사하는 일선 연구원들에게는 더 많은 급여와 안정된 연구 조건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들에게는 과학기술 연구에 종사해 국부를 창출하는 자신들이 의사나 변호사에 비해 턱없이 가난하다는 현실이 바로 위기의 본질이다.

물론 전문 과학기술 인력의 급여를 갑자기 두배로 올리는 식의 정책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가 스스로 인식을 재고하고 또 과학기술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인식을 바꾸도록 유도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보좌관의 위치는 과학기술계 내의 상이한 입장을 정치적으로 조율할 수 있으며, 정책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사회적 분위기를 바꿈으로써 개선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과학 연구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朴보좌관은 생물학 연구에 20년 가까이 전념해 과학 연구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연구자 출신이다. 좋은 연구는 남이 개척하지 않았던 미지의 땅을 더듬어 탐험하는 것과 흡사하며, 따라서 주어진 예산과 청사진에 맞추어 건물을 짓는 식의 활동과는 무척 다르다.

지금의 과학 연구는 대규모 연구비를 필요로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비를 집행하는 정부기관의 입장에서는 연구자가 연구비를 미리 계획하고, 계획한 대로 실행하며, 사용한 대로 결과를 내길 바랄 것이다. 그렇지만 연구에는 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이, 성공보다는 실수와 실패가 지배적이다. 현장의 연구자들은 행정 관료들이 연구의 이러한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연구자 출신의 신임 보좌관은 일선 연구와 행정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방도를 적극적으로 강구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학기술과 시민사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의 모색이다. 언론에 보도된 朴보좌관의 경력 중에는 그녀가 1980년대 초엽에 YMCA의 '두리암'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있다. 두리암은 당시 과학기술과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두던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만들었던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운동단체였으며, 나중에 청년과학기술자협의회로 발전했다.

참여정부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는 과학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시민사회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과학기술 정책은 연구.개발, 국가 경쟁력 제고, 국부의 창출을 위해 구상되고 입안되었다. 현재 정부는 '과학문화'의 보급에 주력하는데, 이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이 있다. 생명과학기술.나노과학.정보통신기술.핵에너지와 핵폐기물 정책, 그리고 과학기술 프로젝트가 낳는 갈등과 위험은 더 적극적인 시민참여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시민 패널과 전문가들의 토론을 통해 이러한 첨예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합의회의'와 같은 다양한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이 더 절실하다. 사회운동과 비정부기구(NGO)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신임 보좌관에게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안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해본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 2004.02.05 18:10 입력 / 2004.02.06 09:29 수정

4 # 촌평[ | ]


홍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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