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자살4

1 # 잘 안 이어지는 씨리즈, 한국의 자살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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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8월 4일 새벽,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한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한국 자살사(그런 게 있다면)에서 일종의 기념비이다. 대저 자살이란, 약하고 가난하며 자존감이 부족한 인간들이 생의 궁지에 몰렸을 때 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기록이, 그리고 특히 가난했던 근대 한국인의 자살이 이를 실증한다. 그런데 ‘왕(王) 회장’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업을 계승한 재벌기업의 황태자이며, 정권과 더불어 민족 통일 사업을 추진한, 그런 류의 사람이 자살한 것이다.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나약함’과 거리가 가장 멀고, 자살은커녕 오히려 어떤 다른 사람들을 자살하게끔 할만한 위치에 있을듯한 인간이 말이다.

정회장의 자살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살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런 자살은 김우진-윤심덕의 정사[double suicide]처럼 많은 아류를 낳는다.

재벌 건설회사 사장, 부산시장, 전남 도지사, 파주시장 같은 이들. 나이 50줄 이상에 든 ‘꼰대’인 동시에 ‘지도층’이다. 그 삶들은 실상과 무관하게 모범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부르주아이며 권력자였다. 많은 우리는 그들이 가졌던 것을 갖기 위해 오늘도 정신없이 뛰고 있다. 한데 그런 그들이 못 견뎌 스스로 죽어버린다.

장삼이사 중의 하나로 자라왔고 앞으로도 그럴 필자 같은 인간은, 사장님이나 시장님 같이 높은 분들의 인생을 모른다. 그들이 맺었을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타인들과의 관계, 소중히 여겨온 삶의 가치나 인간으로서의 꿈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지녔을 내면과 자의식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짐작하지 못한다. 그 죽음을 초래한 모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래서 앞에서 그들 중의 어떤 자살이 ‘아류’라 이야기한 것은 망자에 대한 크나큰 불경이다. 물론 살아있는 타인들은 자살의 형태와 이유를 분류하고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자살은 완연히 사회적인 현상이다. 더구나 자살은 전염성이 매우 높은 현상이다. (자살이 모방ㆍ복제되고 번져나가는 현상을 ‘베르테르(Werther) 효과'라 부른다. 베르테르는 유부녀를 사랑하다 권총 자살한 낭만적인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러나 자살자들은 모두 외롭디 외로운 단독자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 그들은 모두 천애 고아이다. 자살을 갈 길로 선택한 자는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써 죽음을 맞이하여 제 인간됨을 최후로, 외롭게 이루고자 한다.

설사 누군가의 자살에 영향 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완전히 혼자가 되어 유언이 적힐 백지를 내려다봐야 하고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나 강물을 쳐다보아야 한다. 자살은 사회적 행위가 아니다. 그 불행과 우울은 아무도 모른다. 그 마음은 온전히 자기만의 마음이다. 부모나 자식도, 친구나 애인도, 아무 필요가 없다. 남겨진 이들에게 모든 자살이 의문사가 되고, 큰 상처가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왠일인지, 오늘날 한국에서는 사장님도 시장님도 살아가기가 힘겹다. 그 존재도 외롭고 마음도 위태롭다. ‘그들도 우리처럼’ 두부처럼 무르고 풀꽃처럼 여리다. 인간으로서 그들과 우리가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혹은 삶이 끝없이 허망하다는 것을 그 자살들에서 새삼 배운다. ‘지도층의 자살’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바람직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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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가난한 ‘생계형 자살’은 자살이되 자살이 아니다. 그 죽음 또한 ‘더 이상 살기 힘듦’이라는 자기 판단에서 비롯되지만 그 판단을 하게 한 것은 외적인 힘이다. 자살은 생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간적 극한의 행위이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르는 악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항의이다. 그래서 ‘생계형 자살’은 타살의 일종이다.

‘생활고 때문에, ’사업 실패로’, ‘빚쟁이에게 시달리다 못해’ 하는 그 자살은 ‘애인의 변심을 비관하여’, ‘우울증 때문에’, ‘신병을 비관하여’, ‘가정불화로’ 등과 같이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발전할 때, 또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지 못해 희생양의 피를 윤활제로 필요로 할 때, 사람들은 많이 자살했다.

1920년대에도 1960년대에도 한국인들은 그렇게 죽었다. 1920년 7월 19일, 진남포에 살던 실업가 김정민 씨가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자살 원인은 ‘전황(錢荒)의 여파에 따른 사업 실패’였다. 1921년 3월 6일에는 경성에 살던 실직자 김진포 씨는 ‘생활의 도리가 망연하야’, 4월 17일에는 춘천에 살던 김영순 씨가 ‘빚에 졸려 살 수 없어서’ 자살했다. 1921년 5월 11일에는 서울 광희문 성벽 밑에서 박한경이라는 노인과 그 부인 장씨가 생활난에 못 이겨 동반자살했다. 1920년대 한국사람들은 목을 매거나 강물에 투신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 외에도 빨래하는 데 쓰던 양잿물을 많이 이용했다.

1960년 11월, 14년 경력을 지닌 영등포경찰서 소속 김윤태 형사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당시 신문은 ‘적빈(赤貧)’이 고달파 그랬다고 썼다. 김형사의 불행이 보도로 알려지자 각계에서 뒤늦게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약 열흘만에 부평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관이 자살했다. 같은 이유였고 16년 근속 경관이었다. 같은 해 같은 달 8일에는 ‘생활고를 못 이긴’ 부산의 노모와 딸이, 12월 9일에는 서울의 모녀가 함께 음독했다. ‘쥐약 먹다’는 동사는 이제 잘 쓰지 않지만, 1960년대의 음독은 ‘쥐약’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오는 부산의 영도다리에서는 1960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만 78명의 사람이 바다에 투신했다.

사회적 타살로서의 생계형 자살은 온전히 경기 연동적인 현상이다. 경기 지표들이 나쁘면 자살률은 높게 되어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연법칙처럼 이를 관철해왔다. 세계적으로 높다는 현재의 자살률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시절의 기록적 증가와 2002년의 반등으로 달성된 것이다.

1998년의 자살자는 전년 대비 42.6% 증가했다. 이 대단한 기록은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기 어려울 듯한데, 자살이 경제와 관계 깊은 사회적 사실이라는 점은 자살자의 구성에 잘 나타나있다. 이 시기에 모든 연령대의 자살이 늘었지만 25세~44세 남자 자살자는 49.7%, 45-64세의 남자 자살자는 무려 67.8%가 늘었다. 실업자와 사업실패자가 그 폭증을 주도했던 것이다. 너무 높았기 때문인지 자살률은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17.4%, -8.3%가 빠졌다. 자살이 극적으로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역사적 양상을 ‘IMF극복ㆍ경기활성화’ 이외의 이유로 설명할 다른 길이 별로 없다. 이 감소 또한 역시 청장년층 남성들의 자살이 20% 이상 줄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자살자 수는 IMF 때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2002년의 자살자는 전년에 비해 24.6%가 늘었고 웬일인지 여성 자살자가 더 많이 늘어났다. 2002년의 한국인들은 '월드컵 4강'이나 '대선' 같은 집단적 항우울제를 맞은 듯했지만, 내실은 나빴던 것이다. 그해 여름과 겨울, ‘대한민국’은 뭔가 한껏 폼이 났지만 개개인들은 더 불행해지고 가난해졌다. ‘붉은 악마’로 하나 된 듯 잠시 착각했지만 ‘하나’는커녕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고 ‘붉은 악마’ 그들이 곧 실업자 대열에 편입됐다. 이제 한국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 4위이며, 그 증가율은 1등이라 한다. 당신이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은 자살로 죽을 확률보다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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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살에 매혹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부지(不知) 때문이다. 부지는 두려움 자체이다. 하지만 무에의 충동과 강력하디 강력한 오늘의 고통이 죽음의 공포를 매혹으로 바꿔낸다.

그들은 ‘돈 때문에’, ‘빚에 쪼달려’, 이미 인간됨의 0도 이하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당한 인간됨의 ‘훼손’은 다른 형태의 자살 원인이 되는 인정(認定)이나 사랑의 상실, 자존감의 훼손과는 종류가 좀 다를 것이다. 그 자살은 깊고도 오랜, 반복되고 누적된 절망, 갑갑하고 초라하게 반복된 일상에 의해 천천히 준비된 것이다. 그렇게 ‘쪼달려’ 죽는 자살은 낭만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그 자살은 사장님이나 시장님의 자살처럼 우발적인 것도, 깊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굶어죽는 자들은 때깔도 안 좋다.

‘생활고 때문에’, ‘빚에 내몰린’ 자살자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죽은 그들 뿐 아니라, 우리 또한 한갓된 축생일 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죽은 그들은 좀더 여린 짐승이며 살아있는 우리는 좀더 질기고 냉정한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사회도 아니며, 사회이기는커녕 그저 아귀지옥임을 말해준다. 사회란 인간의 교통과 연대에 의해 유지되는 곳이라 들었는데, 이렇게 버려지는 짐승과 자해하는 왕따가 많은 곳이 사회일 리가 없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 전체가 ‘우울’이라는 자살 소질을 갖고 있으며, 먹을 것이 별로 넉넉지 않은 동물 집단은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약한 개체를 자살로 내몬다는 설명을 해왔다. 약한 개체들도 기꺼이 자살을 택한다. 유전자도 그것을 명한다. 그렇게 죽는 그들은 모두 이타적이다. 이만큼 우리 사회의 자살신드롬을 명쾌히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살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이 탈락함으로써 무한경쟁을 향한 우리의 질주와 동물적 공격성에 숨통이 트인다. 게다가 그들은 희생양이 되어 우리 가해를 대속하고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카드빚을 진 젊은이와 카드빚을 ‘추심’하기 위해 협박 전화를 돌리는 젊은이가 서로 다른 인간들인가.

한쪽에서는 느닷없이 ‘웰빙’을 외쳐댄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생, 살아가기 being 자체가 모두의 화두인 것이다. ‘웰빙’은 우리가 함께 처한 동물적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는 절망의 구호거나, 나는 이 아귀도와 무관하(고 싶)다는 뺀질뺀질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인다.

자살을 줄이기 위해 지금 당장, 사회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 방법 밖에 없고 너무 지당하기 때문에, 되려 그 대안은 아무 말도 아니다. 한국 경제란 것이 한국 정부의 정책의지로 좋아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경기가 좋아지면 자살자는 줄어든다. 그러나 경기가 좋아져도 약자가 죽음에 내몰리는 ‘자연상태’는 치유되지 않는다. 이 정권은 자살자 수의 증가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거나, 자살이 오로지 개인의 실존과 관계된 문제라는 입장을 지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 정권 하에서 아수라적 자연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이며 경기가 회복되어도 생계형 자살자는 잘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 시사되었다. 대통령인 그가 직접 나서서 ‘장사의 논리’를 입에 올렸다. 이 정권은 안 그런 척하지만, 매우 천박한 사고를 정치철학으로 갖고 있다. ‘장사의 논리’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이유가 분명한 자살교사자 내지 방조자였다. 고리대금업자나 해결사들이 특별히 나쁜 인간들이라서 약한 그들을 자살로 내몰았겠는가. 장사의 논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장사의 논리가 생을 망친다. -- Hicnunc 2004-7-20 6:23 pm

2 # 촌평[ | ]


강한 동의를 할 수 밖에 없는 글이네요. :) 말씀하신 집단 항우울제도 사실 우리가 만들었다기 보단 하늘에서 떨어진 것에 가까운데요, 그런 것들은 사실 지금의 우리 상태를 치유해주기엔 너무 약합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지금처럼 노동자 층을 구분해서 다들 아찔한 경계로 몰아넣은 것이 정말 경기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구매력을 빼앗은 다음에 그들에게 내수가 죽었다고 하소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데 말이죠.

가끔 자살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뭐 저는 생명으로 태어난 주제에 딱히 자살할 권리는 없다고 그냥 신념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가능하면 존재가 민폐는 되지 말아야 할텐데...인간이라는 종은 특히 그 존재만으로 지구에 민폐가 되고있긴 하니까요.

웰빙은 재미있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중 압권은 롯데리아에서 나온 웰빙버거가 아닌가 싶어요. ㅎㅎ -- 거북이 2004-7-23 12:0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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