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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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다. 실버톤 레코드사와의 길고도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막대한 기대를 업고 나온 스톤 로지스의 2집은 맨체스터 사운드라는 불꽃의 심지를 돋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때로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음악만큼이나 중요할 때도 있다.

1998년 일련의 클럽 공연들과 Sub라는 잡지의 샘플러 시디에 실린 데모 곡들에서 코스모스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꽃 이름을 가진 밴드는 역설적 이게도 우연히 뒤뜰에 핀 이국의 꽃을 발견한 듯한 감흥을 갖게 했다. 어떤 클럽 밴드들은 이렇게 낯설어서 위태로운 만큼이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이들이 만약 자신들의 음악을 체화 하려는 어떤 고민 없이 계속 활동했다면 컬트 팬들의 훼이보릿은 될 수 있었을 망정, 취향 이상의 논의의 차원으로 끌어들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앨범을 낸 밴드가 된다는 것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봄에 석기시대에서 발매된 이들의 데뷔앨범 [Standard]에서는 무수한 고민의 흔적들이 느껴진다. 근 삼년을 별러서 낸 앨범이니 그럴 만도 하다. ‘Remember, However’, ‘Oriental Boy’같은 초기 곡들이 한국어로 새롭게 불려졌을 뿐 아니라, 곡 자체도 많이 변했다. 삼년 동안 이들이 변화한 모습이 게으름이나 변질의 소산이 아니라 잦은 멤버 교체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한 결과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어째서 이들의 음악에서는 98년도의 에너지와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이들을 여타 모던락 밴드들과 구분하는 사운드의 핵은 기타와 함께 넘실대는 그루브를 만드는 키보드 연주에 살짝 얹힌 김상혁의 비음 섞인 아련한 목소리였다. 라이브 무대에서 초기 멤버였던 양용준 (현 델리 스파이스)의 건반 플레이는 현란한 조명과 어울려 사이키델릭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정규 앨범도 내지 않은 이들이 비중 있게 언급되던 이유였다. 하지만 쌈지 페스티발에서 오랜만에 본 이들의 공연은 이전처럼 영국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미국적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그런지하게 느껴졌다. 우선 예전에는 전면에 나섰던 키보드의 비중이 작아진 대신 기타가 그 자리를 메꾸고 있으며 김상혁의 보컬은 더 ‘남자다워’ 졌다. 새로 건반에 영입된 정우민은 앨범에서 휘몰아치는 연주보다는 또박또박 예쁜 사운드를 내고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그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는 듯 하다. 이것이 그녀의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밴드 전체가 지향하는 음악이 바뀌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보도자료에서도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이 처음과 달라졌다는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Cliche’, ‘캬라멜’, ‘Standard’ 등의 개별적인 곡들을 놓고 보면 김상혁의 곡 만드는 능력은 분명 뛰어나지만, 앨범 단위로 봤을 때 [Standard]는 수록곡 하나하나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한데 엉겨 있는 듯 인상이 분명하지 않다. (모호한: ‘The Obscure’는 이들의 12번째 수록곡 제목이기도 하다) 이들의 강점이었던 감수성도 여기서는 너무 가요스럽고, 우울하되 승화되지 못하고 무겁게 발목에 감긴다.

일정한 퀄리티 이상의 곡들을 놓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처음에 이들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기 때문인데, 솔직히 ‘Remember, However’와 ‘Oriental Boy’는 데모에 있던 곡들이 더 좋았다. 기약 없는 앨범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너무 진을 빼 버린 것일까?

이들이 한참 빛났던 98년도쯤에 앨범을 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은 물론 아직 젊은 이들이 가진 가능성을 차단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리더 김상혁의 말대로 ‘앨범 한 장 내고 끝낼 것도 아닌’ 이상은. 앨범을 낼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들에겐 기회가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3년 동안의 빚을 이번 앨범으로 청산한 코스모스는 되도록 빨리 자신들의 2집을 녹음해야 할 것이다. 술은 묵힐수록 좋은 맛이 난다지만 아무래도 음악의 속성은 술보다는 탄산음료 쪽에 더 가까운 듯 하다. --vanylla,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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