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소개와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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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고, 1997, 모 감상회의 팜플릿

1 # 들어가며[ | ]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로 하자.

…지금 생각해 보면 만주 독립군의 후예, 이 시대 마지막 독립군이 정태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아무도 신경쓰고 있지않는 ‘가요 사전심의제도 철폐’를 혼자서 외롭고 쓸쓸히, 군자금 하나없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독립군에게 3. 3. 7 박수를 보내자 -- 전유성 (개그맨, 개그작가)

…그가 출연하는 운동권 집회에서 가끔 참가자들이 옛노래를 신청하는 일이 있다. 이런 주문이 오면 그는 즉각 “그렇게 듣고 싶으면 판사서 들으라”며 듣기 민망할 정도로 대놓고 면박을 준다. 이것도 그의 고집이다… -- 김영철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일전에 그와 통화했을 때 나는 여담삼아 물어보았다. “아직도 옛날 노래는 부를 생각이 없는거요?” 그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 부를 필요가 있으면 부를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그가 빛나는 자존심과 함께 갖게된 여유를 존중하고 싶다.-- 손석희 (문화방송 아나운서)

…이사람 부시맨 아니에요? - 불특정 다수

…그런데 그는 가사를 잘 외우지 못한다. 무엇을 말하는가?…(중략)… 그의 주관심은 창작에 있지 연주에 있지 않다. 그는 노래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데 뜻이 있지, 개척한 땅을 어떻게 잘 가꾸어 낼 것인가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다…(중략)…그는 ‘음악’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음악이다.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문호근 (민예총 대변인)

…염불하나? -- 울엄니

이것이 정태춘이라는 가수에 대한 몇가지 반응이라 하겠다. 여러분의 지금까지 반응은 어떠한가? 반응? 혹은 관심은 어떠한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알던 모르던 그것은 현재 중요하지 않다. 첫 번째 흥미를 가져 달라는 것 외에는…

2 # 데뷔 이전[ | ]

아주 옛날얘기 하나.
물론, ‘정태춘·박은옥’의 음악을 들었던 것은 훨씬 이전이다. 정태춘의 ‘촛불’, 박은옥의 ‘윙윙윙’ 이런곡은 내가 국민학교때하던 ‘임국희의 여성시대’같은 AM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나왔었다. 그때는 울엄마가 그런거 맨날 틀어놔서, 방바닥에서 “엄마 100원만”(100원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종이로된 야구놀이나 축구놀이를 산다.) 하면서 듣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마징가Z가 헬박사의 로보트와 싸워서 이길것인가 말것인가? 과연 지구는 평화를 찾을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지구평화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정태춘’인지 ‘박은옥’인지 내가 알바 아니었다.

약간 옛날얘기 하나. 사촌형하고 같은 방을 썼다. 사촌형은 길가 리어카에서 파는 ‘정태춘·박은옥 힛트곡 메들리’라는 카세트 테이프를 사왔다. 그러나, 그건 어디론가 쳐 박혀서 없어지거나 내가 있었으므로, ‘Metallica’나 ‘Venom’으로 덮혀 버렸을 것이다. 생각이 잘 안난다.

‘정태춘’은 1954년 3월 경기도 평택에서 5남 3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미군부대가 있는 지역이었지만 평택 읍내나 경기도 맨끝인 평택중에서도 그가 살던 마을 도두리(棹頭里:그의 고향인 도두리는 그의 초기곡에 매우 많이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는 평범한 농촌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말씨나 풍습도 충청도에 가깝고 장도 충청남도 둔포(屯浦)장을 보러 다녔다. 그는 농촌에서는 무지일찍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다(내가 기타를 실제로 처음본 것은 중학교 1학년때니까… ). 국민학교 5학년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하나 구해왔는데, 그것을 그와 셋째 형이 틈만 있으면 가지고 놀았다. 당시 그는 악보는 볼 줄 몰랐지만 한 번 들은 노래는 기타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음악수업은 평택중학교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으나, 현악반 담당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면서 현악반은 밴드부로 통합이 되어버렸고 분위기도 달라져버렸다. 담배도 몰래 피우고 공부도 안하고 그 지역에서 기타치고 노래부르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70년, 71년 즈음이었던 그때 그들은 팝송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초기 포크송을 많이 불렀다. 특히, 그 당시 인기가 좋았던 ‘김민기’의 음악을 너무도 좋아해서 그의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오면 벌떡 일어나 들을 정도 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다니다가 첫 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1972년 그는 서울에 있는 셋째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 재수를 했다. 본격적으로 음대 진학을 위해서 당시 을지로 6가에 있었던 서울음대를 드나들면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았고, 없는 돈을 모아 그때로서는 거금인 30만 원짜리 바이올린을 그에게 사주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는 그리 열심이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못 생겼다는, 위축감 등으로 사춘기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헤세와 이상, 잘 알지 못하면서도 쇼펜하우어를 읽었고, 항상 방황하고 죽음을 생각했다. 그는 레슨을 받으러 다니면서도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을 넣고 다녀야 마음이 놓였다. 결국 그는 입시를 몇 달 앞둔 그 해 가을 10월 유신 발표 방송을 들으면서 재수생활을 때려치우고 짐을 쌌다.

내부의 방황을 정리하지 못한채, 밀양으로, 울릉도로, 목포를 거쳐 제주도로, 일년에 한번 꼴로 가출을 했는데 이 시기 그는 고은의 초기 시를 좋아하였고 허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후에 디스크로 발표한 초기의 노래들은 바로 이 시기, 재수를 시작하면서 짓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발표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일기나 시를 쓰는 것처럼 노래도 그렇게 쉽게(?) 만들었고, 고향 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그저 솔직하게 노래로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의 초기작품들 ‘양단 몇 마름’, ‘나그네’, ‘겨울나무’, ‘얘기1’, ‘나는 누구인고’, ‘회상’ 등의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작품 속에는 ‘고향’과 ‘가족’들을 배경으로 한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당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가사와 가락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는 작사실력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백일장 같은데서 한번도 상을 타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시조 같은 정형시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취향이 작사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일관된 정서는 사춘기적 ‘자아’의 불확정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까? 가사에 집약되어 있는 정서는 ‘허무’함의 한숨이다. 물론, 모든 곡에서 보여지는 정서가 전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양단 몇 마름’, ‘그네’, ‘윙 윙 윙’같은 곡들이 이 시기의 정서 전반을 대변해 줄 수 는 없다. 방황 과 허무는 일종의 도피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또,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양단 몇 마름’의 경우는 트로트 풍의 곡이고, 2절 가사는 양병집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얘기1’, ‘그네’등에서 보여지는 전통에 대한 관심과, ‘윙 윙 윙’에서 보여지는 서양음악적 접근이 매우 이채롭다.

-양단 몇 마름

시집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옷장 속 깊이 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시집올 때 가져온 꽃신 한 켤레
고리짝 깊이 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보고
쳐다만 보고, 닦아도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 보고, 쳐다 보고, 닦아만 보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나그네

새벽 이슬 맞고 떠나와서 어스름 저녁에 산길돌고
별빛 속에 묻혀 잠이 들다 저승처럼 추위에 잠이 깨어
흰 안개 속에서 눈 부빈다

물 도랑 건너다 손 담그고 보리밭 둑에서 앉았다가
처량한 문둥이 울음듣고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을 돌며)
김형, 김형 하고 불러 보고 (먹구름 잔치에 깜짝 놀라)
먼 길을 서둘러 떠나야지 소낙비 맞으며 또 가야지

산아래 마을엔 해가 지고 저녁 짓는 연기 들을 덮네
멀리 딴 동네 개가 짖고 아이들 빈 들에 공을 치네
어미마다 제 아이 불러가고 내가 그 빈들에 홀로 섰네

낮에 들판에서 불던 바람 이제는 차가운 달이 됐네
한낮에 애들이 놀던 풀길 풀잎이 이슬을 먹고 있네
이제는 그길을 내가 가네 나도 애들처럼 밟고 가네

-나는 누구인고

갈바람 소리에 두눈을 감으면
내가 섰는 곳은 어딘고 나는 누구인고
옷자락에 스미는 찬 바람에 움츠린
나는 외로운 산길의 나그네로구나

하얀 달빛 아래 고개를 숙이면
내가 섰는 곳은 어딘고 나는 누구인고
풀밭아래 몸을 털고 먼 곳을 향해 떠나는
나는 외로운 밤길의 나그네로구나

찬 새벽 이슬에 단잠이 깨이면
내가 있는 곳은 어딘고 나는 누구인고
근심스런 눈빛으로 울 듯이 떠나가는
나는 내 먼 길을 헤매는 나그네로구나

-겨울나무

잎 떨어진 나무에 바람이 불고 부러진 가지에 연이 걸렸네
겨울 나무 꼭대기에 매가 앉아서
임자없는 까치집만 지키고 있네

우- 우-  홀로 멀리 서 있는 겨울 나무야

벌판에서 불어 온 저 흙바람에 잎새마저 앗기운 겨울 나무는
세월 가고 세월 오는 그 사이에서
굽어 가는 비탈길만 지키고 있네

우- 우-  홀로 멀리 서 있는 겨울 나무야

-그네<뮤지컬 춘향전 중에서>

그네를 딛고 올라서서 흔들흔들 흔들어 보자 솟아라 보자
그네야 높이 솟아서 먼데보자

쌍무지개 끈을 달아 학타고 날 듯 하늘에 올라
산머너 사당의 내님을 보자 꽃같이 어린님 내님을 보자

오월 춘풍에 옷자락 날리며 그네에 올라 높이
솟아라 청치마 홍치마 바람에 날리며 훨훨 높이 솟아보자

-윙 윙 윙

윙, 윙, 윙, 윙 고추 잠자리 마당 위로 하나 가득 날으네
윙, 윙, 윙, 윙 예쁜 잠자리 꼬마 아가씨 머리위로 윙, 윙, 윙

파란 하늘에 높은 하늘에 흰 구름만 가벼이 떠 있고
바람도없는 여름 한 낮에 꼬마 아가씨 어딜 가시나

고추 잠자리 잡으러 예쁜 잠자리 잡으러
등 뒤에다 잠자리채 감추고서 가시나

윙, 윙, 윙, 윙 고추 잠자리 이리 저리 놀리며 윙, 윙, 윙
윙, 윙, 윙, 윙 꼬마 아가씨 이리 저리 쫓아가며 윙, 윙, 윙
   -회상

해 지고 노을 물 드는 바닷가 이제 또 다시 찾아온 저녁에
물새들의 움을소리 저 멀리 들리는 여기 고요한 섬마을에서

나 차라리 저 파도에 부딪치는 바위라도 되었어야 했을걸
세월은 쉬지 않고 파도를 몰아다가 바위 가슴에 때려 안겨주네

그대 내 생각 잊었나 내 모습 잊었나
바위, 검은바위 파도가 씻어주고
내 가슴 슬픈 사랑 그 누가 씻어주리  음 -
저 편에 달이 뜨고 물결도 잠들며는
내 가슴 설운 사랑 고요히 잠이들까  음 -

그대 내 생각 잊었나 우리 사랑 잊었나
그대 노래 소리 파도에 부서지며
내 가슴 적시던 나을 벌써 잊었단 말이 음 -
또 하루가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내 가슴 설운 사랑 슬픔만 더해가리
음 -

-얘기1

단 너머 뒷집의 젊은 총각 구성진 노래를 잘도 하더니
겨울이 다 가고 봄 바람 부니 새벽 밥 해 먹고 머슴 가더라

선 너머 구수한 박수 무당  굿거리 푸념을 잘도 하더니
제 몸에 병이 나 굿도 못하고 신장대만 붙들고 앓고 있더라

어리야 디야 어리얼싸 어리야 디야 앓고 있더라

길 건너 첫 집의 젊은 과부 수절을 한다고 아깝다더니
정 들은 이웃에 인사도 없이 그 춥던 간밤에 떠났다더라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다 하기 동네 긴 골목을 뛰어가 보니
동구 밖 너머론 바람만 불고 초저녁 단잠의 꿈이더라

어리야 디야 어리얼싸 어리야 디야 꿈이더라

-산너머 두메

노저어 돌아오는 작은강 어구로
서산해는 저물어 가고
인적에 깨인 해오라기 물가를 날며
오락가락 산너머 두메엔 저녁연기 떠오르고

날 기다리고 있을 내 어린 누이동생
도회지 불빛은 먼데서 깜빡이고
돌아오는 이 발길은 이리도 가벼운데
지나간 날 옛일들이 꿈같이 멀어지누나

그는 계속 떠나고 싶어했고 벗아나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결국 1975년 군에 입대하게된다. 군대에 있으면서도 답답하면 가끔 삭발도 하고 노래도 지었다. ‘서해에서’와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여드레 팔십리(목포의 노래)’등은 군대에 있을 때 만든 노래들이다.

3 # 데뷔작 시인의 마을[ | ]

1978년 6월 제대한 그는, 입대 전부터 안면이 었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해 11월 그의 첫음반 ‘시인의 마을’이 서라벌 레코드를 통해 출반된다. 첫 음반은 반응이 좋았고, 음반사에서는 매달 생활비를 지급했다. 또한 1978년 그와 마찬가지로 신인가수였던 박은옥과 만나 연애를 시작하였다. 1979년 MBC신인가수상과 TBC방송가요대상 작사부분(‘촛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순탄하고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시기의 음악은 전시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중년층들이 알고 있는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들은 바로 이시기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정태춘의 첫 번째 앨범인 ‘시인의 마을’과 박은옥의 첫 번째 앨범은 ‘회상’(박은옥의 첫 번째 앨범 ‘회상’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은 ‘정태춘’이 작곡해 준 곡들이다. 아직 결혼하기 전인데, 그는 연애에도 주도면밀(?)한 면이 있었는 듯…)에 수록되어진 노래들이 바로 그것인데, 그의 입대전까지의 방황, 군입대에서 느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연애시절의 사랑이야기(?)등이 노래로 전달되어지고 있다. 고향에 있을때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고, 막상 고향을 떠나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하고, 다시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고… 마음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내적갈등의 연결고리가 어지럽게 물려있는 곡들이 많이 있다. 이 시기의 그는 항상 어디론가 가고 싶어한다. 군에 가기 전이나 군에 있을때나,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너무도 관념적이다. 고향? 강건너 어디? 그 자신 스스로를 찾지 못해 계속 떠돌아 다니는 젊은 시인의 모습이 노래 곧곧에 나타난다. 이러한 정서가 그의 잔잔한 음색과 가락을 통해 잘 표출되어진다.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그는 ‘공연윤리 위원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1978년 ‘시인의 마을’과 ‘사랑하고 싶소’등등의 곡에 대한 공윤의 심의 결정이 나오게 된다. ‘개작’지시가 내려졌다. 종합의견은 다음과 같다.

- 시인의 마을 1편은 오리지널 시의 확인을 위해 심이 보류된 작품이나, 확인결과 시작과 연결없는 대중가요 가사로는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부적절하다고 사료됨으로 전면 개작 요망함. -

- 사랑하고 싶소는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고 통속적임. 3절 ‘먼타향으로 떠나고 싶소’는 사랑하고 싶소라는 제목과 반대일 뿐 아니라 지나치게 방황을 강조하고 있음. -(이영미.『정태춘2』. 한울. 1994. pp.154~156. 내용을 요약. 이하 『정2』로 표기.)

이러한 공윤의 결정에 따라 당시 서라벌레코드의 사장은 정태춘의 동의를 얻어 가사를 수정을 하게되고, 그것이 통과되어 1집에 수록되게 된다.

첫번째얘기 하나.
‘정태춘이라는 사람의 노래를 ‘음악’으로 듣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고등학교 1학년때 부터이다. 이놈의 고등학교는 중학교하고 같이있는 학교. 그러니까 중·고등학교였는데, 나는 이놈의 중·고등학교에 딸린 중학교를 나온게 아니고 다른 중학교를 나와서 이놈의 고등학교에는 아는 새끼들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중학교때도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고등학교에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당연히 음악만 들었다.

첫번째얘기 둘.
시간이 좀 지나서 아 새끼들을 몇 명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새끼들이 잘 지내다가도 노래 얘기만 나오면 지랄을 하기 시작했다. 이새끼들은 내가 먼저 이야기 꺼내지도 않았는데, 지네끼리 얘기하다가 나한테 와서는 뭐라뭐라 물어보다가 내가 뭐라뭐라고 하면, 지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지랄로 끝났다. 텃세부리는 것도 아니고(당시의 텃세부리기는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만연하고 있는 집단가혹행위(이지매)하고는 아주 많은 거리가 있었다. ), 아 쓰발, 하여튼 계속 짜증나게 뭐라고 묻고 했는데, 그중에 어떤 한 새끼 -지금은 이름도 생각 안난다.- 가 정말 기분나쁜 얘기를 했다.

- 서해에서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데
고요히 잡아주는 손 있어  서러움을 더 해주나
저 사공이 나를 태우고  노 저어 떠나면
또 다른 나루에 내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서해 먼 바다 위론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데
나 떠나가는 배의 물결은  멀리멀리 퍼져간다
꿈을 꾸는 저녁 바다에  갈매기 날아가고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  물결 따라 멀어져간다

어두워지는 저녁 바다에  섬 그늘 길게 누워도
뱃길에 살랑대는 바람은  잠 잘 줄을 모르네
저 사공은 노만 저을 뿐  한 마디 말이 없고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육지 소식 전해오네

   -손님
길잃은 작은새는 어디로 갔나  연약한 날개도 애처로운데
지난밤 나그네는 어디로 갔나  바람도 거세인 이들판에

사랑으로 맞아주렴  우리는 모두가 외로우니까
따뜻하게 반겨주렴  언제라도 반가운 손님처럼

갑자기 누구라도 올듯하여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는데
스치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외로운 나그네의 노랫소리

- 하늘위에 눈으로

하늘 위에 눈으로  그려 놓은 당신얼굴
구름처럼 흩어져  오래 볼 수가 없네

산 봉우리가 구름에  갇히어 있듯이
내 마음 외로움에  갇히어 버렸네

너무나 보고 싶어  두눈을 감아도
다시는 못 만날  애달픈 내 사랑
   -시인의 마을

창문을 열고 음,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
당신의 텅빈(부푼)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맑은 한줄기 산들바람)

살며시 눈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가쁜 벗들의 말 발굽 소리(자연의 생명의 소리)

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 주리오(따뜻한 사랑 건네 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어 주리오(내 작은 가슴 달래 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주리오
(생명의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오
(사색의 시인이라면 좋겠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 처럼(수도승 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오는 소릴 들을테요

우산을 접고 비 맞아 봐요
하늘은 더욱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서
당신의 울적한 마음에 비 뿌리는
젖은 대기의 애틋한 우수

누가 내게 다가와 말 건네 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 주리오
누가 내 운명의 길동무 돼 주리오(내 마음의 위안 돼주리오)
어린 시인의 벗 돼 주리오


- 사랑하고 싶소

사랑하고 싶소, 예쁜 여자와 말이오
엄청난 내 정열을 쏟아 붇고 싶소
결혼하고 싶소, 착한 여자와 말이오
순진한 내 청춘을 거기 바치고 싶소
내가 살아 있오, 내가 살고 있오
크고 작은 고뇌와 희열 속에
멋도 모르고

얘기하고 싶소, 뛰도는 저 애들과 말이오
반짝이는 그 눈망울도 바라보고 싶소
안겨 보고 싶소, 저 푸른 하늘에 말이오
우리 모두의 소망처럼 느껴보고 싶소
내가 살아 있오, 내가 살고 있오
크고 작은 기대와 소망 속에
멋도 모르고

돌아가고 싶소, 내 고향으로 말이오
훌륭한 선친들의 말씀 듣고 싶소
떠나가고 싶소, 먼 타향으로 말이오
(사랑하고 싶소, 겨레와 이땅을 말이오)
내 나라 삼천리 두루 다니고 싶소
내가 살아 있오, 내가 살고 있오
크고 작은 애착과 갈망 속에
멋도 모르고

-사랑하는 이에게 2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써요
깊은 밤에 일어나   다시 읽어요
매일처럼 외로운   사랑을 적어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 보아요

내일 또 만날걸 알아요   오래 안볼 수는 없어
하지만 또 떨어져서  이렇게 밤이 오면
화가 나게 미워요  사랑하는 이여
내 맘모두 가져간  사랑하는 이여

-아하! 날개여

어둠이 내 방에까지 밀려와
그 우수의 계곡에 닻을 내리면
미풍에도 떨리는 나뭇잎처럼
나의 작은 공상은 상처받는다

빗물마저 내 창 머리 때리고
숲 속의 새들 울음 간혹 들리면
멀리 날고픈 내 꿈의 날개는
지난 일기장 속에서 퍼득인다

아하, 날개여 날아보자
아하, 날개여 날자꾸나

등불을 끄고, 장막을 걷고,
그림자를 떨쳐 버리고
내 소매를 부여잡고 날아보자
먼동에 새벽 닭이 울기까지라도
에 헤이, 에 헤이

기다리지도 않고 맞은 많은 밤들
(어쩌면,) 끝내 돌아가지 않을 듯한 무거운 침묵
꿈 꾸듯 중얼거리는 나의 독백도
방황의 사색 속에 헤메이고

세월속에 잊혀져 간 얼굴들
저 어두운 밤 바람에 흩날리면
누군가 내 창문 밖에 서성대다
비와 밤과 어둠 속에 사라진다

아하, 날개여 날아보자
아하, 날개여 날자꾸나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곳
내 영혼의 그늘 밖으로 나가보자
동녘 먼 데서 햇살 떠오르기 전에
에 헤이, 에 헤이
   - 사랑하는 이에게 3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깊은 밤에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 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

음, 달빛 밝은 밤이면  음, 그리움도 깊어
어이 홀로 새울까  견디기 힘든 이 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

- 촛불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사랑은 불빛 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름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여드레 팔십리(목포의 노래)

여드레 팔십리 방랑의 길목엔   남도 해무가 가득하고
어쩌다 꿈에나 만나던 일들이   다도해 섬 사이로 어른대누나
물 건너 제주도 뱃노래 가락이  연락선 타고 와 부두에 내리고
섬 처녀 설레던 거치른 물결만  나그네 발 아래 넘실대누나

어 헤이 얼라리여라
노 저어 가는 이도 부러운데
에 헤이 얼라리여라
님 타신 돛배로 물길 따라 가누나

떠나는 연락선 목 메인 고동은   안개에 젖어서 내 귀에 들리고
보내는 맘 같은 부두의 물결은   갈라져 머물다 배 따라 가누나
나 오거라 가거나 무심한 갈매기 선창에 건너와 제 울음만 울고
빈 배에 매달려 나부끼는 깃발만 삼학도 유달산 손 잡아 보잔다

어 헤이 얼라리여라
노 저어 가는 이도 부러운데
에 헤이 얼라리여라
님 타신 돛배로 물길 따라 가누나

첫번째얘기 셋.
“너는 맨날 외국노래만 듣냐?”. “니가 그거 들으면, 다 알아 듣냐?”. “가요는 왜 안듣냐?” “한국사람이 한국노래를 들어야 하는거 아니냐?” 물론, 그때는 대꾸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다(믿기지 않겠지만, 그때 당시 제성격은 지금과는 상이하게 엄청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집에와서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 보니, 쓰발 열불나서 잠이 안왔다. ‘개새끼가 왜 남의 아픈부분을 건드리고 지랄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새끼들(불특정 다수임. )은 정말 우리나라 노래를 john나게 많이 듣는건가? 하면 그런것도 아니었다. 정말 기분나빴던 것은…

첫번째얘기 넷.
내 나이또래에서 나처럼 외국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이 가지는 하나의 컴플렉스 - 이것은 비단 나만의 특정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닥쳐오는 ‘문화사대주의’ 라는 막연한 개념의 중압감이었을 것이다. 현재처럼 Rock음악이 ‘저항’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정착되기까지는 불과 몇 년이 되질 않는다(이 이야기는 후일에 다루기로 하자. 내가 처한 상황만을 보고 이야기 하자면, 그당시 내 주변에서는 ‘Rock = 미국음악 = 사대주의’ 라는 웃기는 논리가 통용되고 있었다. ). 웃기는 소리 같지만, 한사람 또 한사람 계속해서 ‘넌 외국음악만 듣는아이’라고 이야기하면, 그들앞에서는 ‘아니야, 아니야’하고 얘기 하지만, 혼자있을 때, 혹은 자려고 눈을 감을때, 어디 한구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말풍선이 있었다. ‘혹시, 그새끼 얘기가 맞는게 아닌가?’

첫번째얘기 다섯.
그래도 마땅한 노래가 없었다. 들국화도 있었고, 시나위도 있었고, ‘봄·여름·가을·겨울’도 있었다. 그런데 옆에는 ‘Beatles’도 있었고, ‘Led Zeppelin’도 있었고, ‘Mahavishnu Orchestra’도 있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이제와서 ‘청사아∼안리’를 듣자니, 이건 별로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어쩌랴? 그렇다고 ‘군밤타령’을 들을것인가? 누가 그런거 판으로 발표한적이 있고, 구하기는 쉬운가? 그렇다고 무슨 양아치 같이 생긴 시끼가 부른 ‘밀양 머슴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들을것인가? 어린 나이에 나도 나름대로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4 # 결혼과 음악적 고민[ | ]

그는 드디어 1980년 5월 박은옥과 결혼한다. 즐거움도 아주 잠깐이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그는 새로운 고민에 맞부딪힌다. 차츰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연예인 노릇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노래만 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쇼맨쉽도 길러야 하고 오락프로그램에도 나가야 했다.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자신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정태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첫 레코드를 내고나서 문화방송의 ‘명랑운동회’같은 연예인 프로에 출연을 해보니까 어찌나 어색하고 싫던지 그게 내 기색에 역력히 나타났던가봐요. 사회자가 ‘닭살 돋게 굴지마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나한테 했을 정도로 제가 그런 데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때는 노래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도 없었고 다만 ‘내가 끼가 좀 부족해서 그런가?’하고만 생각했지요. 예술이란 남에게 감흥을 주어야 하는데 나는 왜 이런가 하고요. 일례로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고 농사만 짓던 저의 아버지가 ‘음악한다는 놈이 왜 그리 뻣뻣하냐’고 하셨을 정도로 저의 내면에서는 기존의 ‘가수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강한 저항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1989년 9월 27일 면담기록. 월간 《사회와 사상》11월호 인터뷰 특집 <80년대 사람들>에 수록된 것을 재수록한것. 이영미. 『정태춘』. 한울, 1989.p.254. 이하 『정1』로 표기.)

아내 박은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송 출연을 그만둔다면 생활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979년부터 준비를 하여 1980년 1월 출반된 그의 두 번째 음반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의 반응은 썰렁했다고 한다. 첫 번째 음반에서 그의 재질을 인정한 서라벌레코드사 사장은 두 번째 음반에서는 선곡을 그에게 맡긴것이다. ‘탁발승의 새벽노래’, ‘사망부가’등 어떻게 보면 첫 음반보다 그의 특성은 더 잘 드러나 있었고, 그 자신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노래를 수록하였지만, 안팔리는 것을 어쩌랴? 그때 까지만, 해도 그는 ‘가수’,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수의 경우 그러한 경로이외의 경로를 사용해서 인기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공식(?)같은 것에 너무도 둔감했던 것 같다. 결국 첫 음반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그의 본래의 모습이 두 번째 음반에서는 뚜렷이 드러난 셈이었고, 그것은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인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당장 생계의 문제로 닥쳐왔다.

이런 상태에서 만든 세 번째 음반 ‘우네’는 음반시장에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음반의 앞면에 실린 ‘새벽길’, ‘우네’, ‘비야, 비야’등 가야금, 피리, 해금 등의 국악반주로 연주되어 있는 공들인 음반이었다. 특히 ‘에헤라 친구야’는 앞면에는 국악으로, 뒷면에서는 양악으로 연주되어 있으며, 음반 ‘시인의 마을’에서는 양악으로 연주된 ‘여드레 팔십리’가 이 음반에는 국악으로 편곡, 연주되어 있어, 흥미있는 대비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보기 드문 음반이라고 한다(현재 서라벌 레코드에서 발매했던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와 3집 ‘우네’는 필자도 입수 할수 없었다. 수록된 곡들이 어떤곡들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음을 사과드린다. 한가지 변명을 하자면, 이 두장의 음반은 ‘정태춘·박은옥’부부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 실린 ‘우네’음반의 설명은 이영미씨의 셜명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음반의 연속적인 실패, 음반사의 경영악화는 그동안 받아왔던 생활비 지급의 중단을 의미했다. 딸 정새난슬도 태어나 식구는 늘었는데, 경제적인 문제는 오히려 더 악화되고. 밤업소에는 포크가수가 설 자리는 없었다. 포장마차를 할까, 뭐를해서 먹고 살까, 여기저기 레코드 회사를 다녀봐도 반응도 좋지 않고,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이 때, 지구레코드에서 4년에 800만원이라는 전속계약(?) 조건을 내놓았다. 1년에 100만원, 한달에 8만 3천원정도다. 세식구가 한달에 8만 3천원가지고 뭘해먹고 살것인가? 그러나, 결국 지구레코드에서 네 번째 음반을 내게 된다. 그것이 1984년 발매된 ‘떠나가는 배’였다. 이 음반은 잘 팔렸다. 1985년에는 ‘북한강에서’라는 그의 다섯 번째 음반이 나온다. 그러나 이 역시 모든 고민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의 음악활동시기중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라 하겠다. 청년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자아’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막연했고, 그도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고 무리없이(?) 살아야할 목표가 생기기 무섭게 그는 현실의 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이러한 개인이라는 내면의 삶과 생활이라는 외부의 삶의 문제가 뒤범벅이 되어 그에게 닥쳐왔다. 이 엄청난 무게에 대한 그의 반응이 노래 곳곳에 베어 들어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몇 년 안되는 짧은 시기에 만들어진 곡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의 성격은 천차만별이라 하겠다. 과거의 고향을 생각하기도 하고, 현재자신의 처한 주변을 생각하기도 하고, 미래의 불투명성을 타계하고 싶어하는 그의 몸부림을 간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고민에 대한 반응은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볼 수 있다. 그의 고민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자신의 내면에서만 존재했던 폐쇄적(?)인 문제거리들이 아니었다. 부인이 있고, 딸이 있고, 이제는 소위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한명의 가수이자, 한가족의 가장으로써 가지는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 들가운데서

바람아, 노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저 들가에, 저 들가에 눈 내리기 전에
그 외딴 집 굴뚝 위로 흰 연기 오르니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저 어스름 동산으로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저 하늘 끝, 저 하늘 끝 가보고 싶은 땅
얼레는 끝없이 돌고, 또 돌아도 그 자리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들판 건너 산을 넘어
   -이어도(떠나가는 배)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 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 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 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어둠 속으로 뭍결 너머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 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 가는배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붕숭아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지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 고운 내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 탁발승의 새벽노래

승냥이 울음 따라, 따라 간다 별 빛 차가운 저 숲 길을
시냇가 물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어서, 어서 가자
길섶의 풀벌레도 저리 우니 석가 세존이 다녀 가셨나
본당의 목탁소리 귀에 익으니, 어서, 어서 가자
이 발길 따라오던 속세 물결도 억겁 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할 이름 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 끝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만 극락 왕생하고
어머님 생전에 출가한 이 몸 돌계단의 발길도 무거운데
한수야, 부르는 쉰 목소리에 멈춰 서서 돌아보니
따라온 승냥이 울음소리만 되돌아서 멀어지네

주지 스님의 마른 기침 소리에 새벽 옅은 잠 깨어나니
만리길 너머 파도 소리처럼 꿈은 밀려나고
속세로 달아났던 쇠 북 소리도 여기 산사에 울려 퍼지니
생로병사의 깊은 번뇌가 다시 찾아든다
잠을 씻으려 약수를 뜨니 그릇 속에는 아이 얼굴
아저씨, 하고 부를 듯하여 얼른 마시고 돌아서면
뒷전에 있던 동자승이 눈 부비면 인사하고
합장해주는 내 손 끝 멀리 햇살 떠올라 오는데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해탈 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 이사람은

도회지에 황혼이 붉게 물들어 오면
여행자의 향수도 어디서 찾아든다
술렁대는 가을 바람에 잎새 떨구는 나무 아래
옷깃 여미고 홀로 섰는 이 사람은 누구냐

은행 나무 찬 바람에 그 잎새 흩어지고
가로등 뿌연 불빛 초저녁 하늘에 뿌리면
거리마다 바쁜 걸음 스쳐가는 사람 사이
처진 어깨에 발길 무거운 이 사람은 누구냐

땅거미 지고 어둔 변두리 가파른 언덕기로
어느 취객의 노랫소리 숨차게 들려오면
길 가에 흩어진 휴지처럼 풀어진 가슴을 안고
그 언덕길 올라가는 이 사람은 누구냐

깊은 밤 하늘 위론 별빛만 칼날처럼 빛나고
언덕 너머 목 쉰 바람만 빈 골목길을 달리는데
창호지 문살 한 귀퉁이 뿌연 등불을 밝히고
거울 보며 일기 쓰는 이 사람은 누구냐

-바람

이제는 사랑하게 하소서  여기 마음 가난한 사람들
길목마다 어둠이 내리고  벌써 문이 닫혀요
자, 돌아서지 말아요   오늘 밤의 꿈을 받아요
홀로 맞을 긴 밤 새에   포근하게 잠든 새에
당신 곁을 스쳐 갈   나는 바람이여요

이제 곧 어두운 골목길에도   발자국 소리 그치면
어둠처럼 고이 고이   당신 곁에 갈테요
밤 하늘 구름 저 너머  당신 꿈을 펼치고
못 다한 사랑 이야길랑   내게 말해 주세요
고운 사랑 전해 줄   나는 바람이여요

- 북한강에서
   -서울의 달

저무는 이 거리에 바람이 불고
돌아가는 발길마다 무거운데
화사한 가로등 불빛 너머
뿌연 하늘에 초라한 작은 달
오늘 밤도 그 누구의 밤길 지키려
어둔 골목, 골목까지 따라와
취한 발길 무겁게 막아서는
아, 차가운 서울의 달

한낮의 그림자도 사라지고
마주치는 눈길마다 피곤한데
고향 잃은 사람들의 어깨 위로
또한 무거운 짐이 되어 얹힌 달
오늘 밤도 어느 산길, 어느 들판에
그 처연한 빛을 모두 뿌리고
밤 새워 이 거리 서성대는
아, 고단한 서울의 달

어둔 밤 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오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 가듯 거슬러 올라 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오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 사망부가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거친 베옷 입고 누우신 그 바람 모서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바람 거센 갯벌 위로 우뚝솟은 그 꼭대기
인적 없는 민둥산에 외로워라 무덤 하나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 스쳐갈 뿐
아, 향불 내음도 없을
갯벌 향해 뻗으신 손발 시리지 않게
잔 부으러 나는 가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모진 세파 속을 헤치다 이제 잠드신 자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길도 없는 언덕배기에 상포자락 휘날리며
요랑 소리 따라 가며 숨 가쁘던 그 언덕길
지금은 싸늘한 달빛만 내리비칠
아, 작은 비석도 없는
이승에서 못다하신 그 말씀 들으러
잔 부으로 나는 가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지친 걸음 이제 여기와
홀로 쉬시는 자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펄럭이는 만장너머 따라오던 조객들도
먼 길 나던 만가소리 이제 다시 생각할까
지금은 어디서 어둠만 내려올 뿐
아, 석상 하나도 없는
다시 볼 수 없는 분 그 모습 기리러
잔 부으러 나는 가네

   - 애고, 도솔천아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선말 고개 넘어 간다
자갈길에 비틀대며 간다
도두리 벌 뿌리치고 먼데 찾아 나는 간다
정든 고향 다시 또 보랴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이깟 행차에 흥 난다고, 봇짐 든든히 쌋겄는가,
시름 짐만 한 보따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길을 막는 새벽 안개
동구 아래 두고 떠나간다
선말산의 소나무들 나팔소리에 깨기전에
아리랑 고개만 넘어가자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도랑물에 풀잎처럼
인생행로 홀로 떠돌아간다
졸린 눈은 부벼 뜨고 지친 걸음 채촉하니
도솔천은 그 어드메냐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등 떠미는 언덕 너머 소매 끄는 비탈 아래
시름짐만 한 보따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풍우설운 등에 지고
산천 대로 소로 저자길로
만난 사람 해어지고, 헤진 사람 또 만나고
애고, 도솔천아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노을 비끼는 강변에서 잠든 몸을 깨우나니
시름짐은 어딜 가고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빈 허리 뒷짐 지고 나- 나-
선말 고개 넘어서면 오월 산의 뻐꾸기야
애고, 도솔천아
도두리벌 바라보며 보리원의 들바람아
애고, 도솔천아
애고, 도솔천아
   - 장서방네 노을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 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비 바람에 거친 세월도 님의 품에 묻고
여러 십 년을 한결 같이 눌 바라고 기다리오
기다리다 맺힌 한은 무엇으로 풀으요
저문 언덕에 해도 지면 밤벌레나 될까요

어찌하리, 어찌하리 버림 받은 그 긴 세월
동구 아래 저녁 마을엔 연기만 피어나는데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해 지는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모르네
솔밭 길로 야산 너머로 갯바람은 불고
님의 얼굴 노을 빛에 취한 듯이 붉은데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 지고 서면
바람에 부푼 황포 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되돌리기 비나이다
가슴 치고 통곡해도 속절 없는 그 세월을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울 줄 모르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노을 빛이 들고
꼬부라진 동구 길엔 풀 벌레만 우는데
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 한여름밤

한여름 밤의 시원한 바람은 참 좋아라
한낮의 태양 빛에 뜨거워진 내 머릴 식혀 주누나
빳빳한 내 머리카락 그 속에 늘어져 쉬는 잡념들
이제 모두 깨워 어서 깨끗이 쫓아 버려라
한여름밤의 고요한 정적은 참 좋아라
그 작은 몸이 아픈 나의 갓난 아기도 잠시 쉬게 하누나
그의 곁에서 깊이 잠든 피곤한 그의 젊은 어미도
이제 편안한 휴식의 세계로 어서 데려 가거라
아무도 문을 닫지 않는 이 바람 속에서
이무도 창을 닫지 않는 이 정적 속에서
어린 아기도 잠이 들고 그의 꿈 속으로 바람이 부는데

한여름 밤의 시원한 소나기 참 좋아라
온갖 이기와 탐욕에 거칠어진 세상 적셔 주누나
아직 더운 열기 식히지 못한 치기 어린 이 젊은 가슴도
이제 사랑과 연민의 비로 후드득 적셔 주어라
한여름 밤의 빛나는 번개는 참 좋아라
작은 안락에 취하여 잠들었던 혼을 깨워 주누나
번쩍이는 그 순간의 빛으로 한밤의 어둠이 갈라지니
그어둠 속에 헤매는 나의 길도 되밝혀 주어라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이 소나기 속에서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이 번개 속에서
어린 아기도 잠이 들고 나의 창으로 또 번개는 치는데

지구 레코드에서의 음반발매와 더불어 1985년 1월 ‘정태춘 노래마당’을 부산 카돌릭센터에서 열게된다. 후에 ‘정태춘, 박은옥 얘기 노래 마당’으로 바뀌게 되는 이 공연은 몇 년 동안의 활동의 공백을 깨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을 의미했다. 1987년 10월까지 계속된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으로 그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과 부산, 대구, 마산, 인천, 광주, 진주, 천안, 제주, 청주, 대전, 전주, 춘천, 원주, 울산 등 거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가졌다. 공연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며 대개 소극장이었다. 이 소극장 공연은 그의 활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방송이나 음반으로만 대중을 만나왔기 때문에 대중과의 만남은 항상 간접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 공연은 전국 각지의 관객과 만나 아주 가깝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대중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음반이나 방송에서는 할 수 없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공윤’과의 악연은 계속된다. 박은옥이 부른 ‘사랑하는 이에게2’, ‘하늘위에 눈으로’, ‘사망부곡’(사망부가의 원제목은 사망부곡이었다. ), ‘나그네’등의 곡에 대한 ‘개작’지시가 계속 되어졌다. ‘공윤’의 종합의견은 다음과 같다.

- 사랑하는 이에게1, 사랑하는 이에게2 / 내용치졸, 전면개작, 문맥통일 결여(소명이유 없슴).
하늘위에 눈으로 / 1행과 7행의 표현이 미숙함. 부분개사 사망부곡 / 대중가요로 부적당, 부분개사 나그네 / 2절 3행 전체는 특정인을 지칭, 혐오감을 조성, 개작바람(『정2』, pp.159~162. )

5 # 무진 새노래[ | ]

두번째얘기 하나.
중학교 2학년때부터 노래를 같이 듣던 친구새끼가 하나 있었다. ‘김동하’ 라고 물론, 지금은 그새끼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도 모른다. 하루는 그새끼네 집에 갔는데 - 그새끼는 그때 학교에서 방송반에 있었다. - ‘정태춘·박은옥 戊辰 새노래’라는 테이프가 있었다. “야 이거 좋냐?” 그새끼曰 “들어보면 알거아니야.” 그때는 단순히 표지가 매우 특이해서(?) 관심을 보였다. “야! 이거 나 빌려줘” “학교 선생이 들어보라고 빌려준거니까 복사하고 가져와” 그래서 집에와서 중학교때 한번도 듣지 않았던 ‘중학영어’ 테이프에다가 복사를 하기 시작했다.

두번째얘기 둘.
알고보면 울엄마도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아들새끼라고 하나 있는게 john나게 공부안하고 영어공부하라고 ‘테이프’사주니까 거기다 노래나 녹음하고, 오디오 사주면 공부 열씨미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오디오 사주니까 허구한날 황학동에나 가서 귀신난장 같은 판만 사오고… 하여튼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온 음반이 바로 1988년 ‘삶의 문화’에서 제작했던 ‘정태춘·박은옥 戊辰 새노래’ 였다.

두번째얘기 셋.
그때가 바로 ‘정태춘·박은옥’의 음악을 제대로 들었던 처음이었다. 그러고 그 전에 있던 히트곡 메들리라는 테이프도 찾아 보았다. 역시 있더만, 다행하게도 덮어 쓰지 않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나와 이들 부부간의 인연이었다.

서구와 미국 지향의 음악문화 풍토, 방송체계 자체의 문제, 전통문화의 문제 등 평소 그가 단편적으로나마 이전부터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또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머릿속에서만 엉켜 있던 문제들을 하나씩 실마리 잡을 수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때부터 전국 16개 도시를 돌면서 팬들에게 내 직접 노래를 들려주고 노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순회공연중에서 ‘애기’를 해보니까 저 자신이 정리가 되는 부분이 많았고 노래를 지어 부르는 데에도 도뭄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의식은 없었고, 당시에 ‘민요연구회’모임을 좋아했지만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왜 노래가 저래야 하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중략)… 얘기노래마당을 하고 있을 때만해도 저 자신이 ‘가수중에는 그래도 내가 글재주가 있고 한데, 왜 상업적으로 성공을 못하고 경제적인 고통을 받아야 하나’하는 생각을 할 때였습니다. 3년 동안 얘기 노래마당을 하고있는 동안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요. 87년 민주화 열풍(6.29를 말하고 있다. )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격변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저는 나름대로 나 혼자 순수성을 지켰던 몇 년동안의 생각, 즉 ‘순수하게 자유롭다’는 식의 자신의 모토(?)를 좀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다른 가수처럼 텔레비전에 안 나가고 순수성을 지킴으로써 자유인인 척 했던 것이 실은 자유로왔던 것도 아니고 역시 체제내에서 구속되고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요.”(『정1』, pp.253~254. )

또한 그 동안 심의에 걸려 음반으로는 발표할 수 없었던 ‘인사동’과 같은 노래들도 공연을 통해 부를 수 있었다. ‘얘기 노래마당’을 하면서, 1987년에는 ‘정태춘·박은옥 발췌곡집’으로 그동안 발표되었던 작품 중에서 잘 알려진 노래들만을 모아 음반을 내게된다. 그리고, 1988년 그의 새로운 경향이 음반으로 표현화된 6집음반 ‘정태춘·박은옥 무진 새노래’를 발표하게 된다. 이 음반에는 그동안의 심의를 의식하여 발표하기 힘들었던 몇 편의 노래들이 실렸고, 신작인 ‘아가야 가자’가 실렸다. 그로서는 이러한 작품들이 그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작품을 다듬어 발표한 것이었으며, 단지 6월투쟁으로 가시화 되었던 민중의 힘이 공연윤리위원회로 하여금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심의기준을 완화하지 않으면 않으면 안되게 함으로써 비로서 음반으로의 발표가 가능해 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윤’의 개작지시는 다를바가 없었다. ‘실향가’, ‘아가야 가자’에는 유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인사동’, ‘한밤중의 한시간’, ‘그의노래는’, ‘고향집가세’, ‘얘기2’ 거의 전곡에 대한 ‘개작’지시가 내려졌다. 종합의견은 다음과 같다.

- 유의사항;1, ‘실향가’중 3절 1, 2 행의 표현과 2, ‘아가야, 가자’는 3절중 ‘동무’란 표현은 ‘친구’로 수정함이 바람직하며, 4행은 유의(‘삼천리라더냐 그뿐이라더냐’란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한밤중의 한시간’;선동적인 요소가 없도록 전면 개작 바랍니다.

‘인사동’;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등이 방치되었던 것도 사실이며 또 작가의도도 이해는 되나 가사표현이 객관적으로 볼 때 오해를 줄 수 있는 소지가 많으므로 제목을 포함 가사내용을 전심 지적과 같이 개작하시기 바랍니다.(“인사동”이란 제명하에 본 가사내용을 볼 때 인사동의 전 골동품 가게를 매도할 소지가 있으며 ‘이놈 저놈’은 욕설이란 비속한 표현의 지적이 아니고 누구나 다란 선의의 인물까지 매도되는 의미로 수정을 요하는 것이며, 아울러 대화체로나 가능한 ‘양코쟁이, 게다신사’는 외국인을 경원시하려는 적개심이 내포된 가사말로 부적합한 표현임을 지적한 것임) ‘그의 노래는’;대중가요의 다양한 발상이나 표현을 억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단지 1절 1부터 4행과 4절 5, 6행은 쾌적한 자연을 동경한다는 의도를 일탈한 과격한 표현이오니 수정을 요하는 것임.(아울러 ‘시영아파트 하수구에서 왕모기나 잡으며’등의 가사 표현보다는 ‘서울 변두리 들판에서 잠자리를 쫓는’등의 미화된 표현으로 수정함이 바람직하오니 4절 6행 포함 재고 바랍니다.) ‘얘기2’;가사 3,4절은 전면 재구성(1절 ‘문둥이’란 표현 포함)바랍니다. 건전하게 사회를 비평함은 바람직하나 3, 4절 중반 이후의 가사는 지나치게 자극적표현들로만 일관되어 거의 구호화된 의미의 가사 내용으로, 수정(특정병 환자인 ‘문둥이’를 가사로 사용함은 부적합함)바랍니다.
유의사항:3절 3행의 ‘지식의 시장에 늘어선 젊은이’란 가사는 배움에 대한 의욕을 비하 시킬수도 있는 표현임에 유의,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고향집 가세’;6절 중 ‘문둥이’란 표현과 3행은 가사 앞 뒤 내용에 맞게 적합한 표현으로 부분 수정 바랍니다. 순수한 작가의 의도는 이해되며 또한 문맥의 불통은 아니나 6절 3행은 오인할 요소(최근 대학가에서 주장하는 미국군 철수 구호와 함께 미군 부대내의 융단 같은 잔디와 고향의 산비탈 잡초등, 비유되는 표현을 감안할 때 미군에 대해 배타성을 암시, 강요하는 의미도 없지 않음)가 있으므로 고향을 그리는 무난한 여타 표현으로 수정함이 합당하겠다는 지적을 밝힙니다. 아울러 건전한 사고에서 제사한 의견에 감사드리며, 충분히 심의에 반영되었음을 알리오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정2』, pp.166~168. 이 곡들이 심의를 받은 것은 한두번이 아님을 밝힌다. 그래서 필자가 몇번의 심의결과를 요약하였음을 밝힌다. )

종합의견에서 보다시피 시대의 흐름을 타고 심의도 바뀌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도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당신의 곡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하여튼 통과는 안된다.’ 다 좋다. 통과는 안된다. 그것이 그에게 돌아온 결과였다.

세번째얘기 하나.
몇 달을 그렇게 들었다. 지금생각하면 어쩌면 그때 그 새끼들이 오히려 나에겐 - 결과적으로 -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촌스럽(?)기도 했고, 국악기를 사용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 한밤중에 한 시간

한 밤중의 한 시간 깨어 일어나
어둠 속에 잠 들은 이 세상을 보라
폭풍우 지난 해변처럼 밀려오는 정적만이
피곤한 이 도회지를 감싸안고 재우는구나

높고 낮은 빌딩사이, 그 아래 골목마다
어깨끼리 부딪치며 분주히 오가던 그 많은 사람들
눈을 감으면 되살아나는 그네들의 외침 소리
이제 모두 떠나가고 어둠만이 서성대는데

아, 이 밤과 새벽 사이, 지나가는 시간 사이
파란 가로등만이 외로이 졸고
차가운 그 불빛 아래 스쳐가는 밤 바람만이
한낮의 호사를 얘기하는데
새벽 거리에 뒹구는 저 많은 쓰레기처럼
이 한밤의 얘기들도 새아침엔 치워지리라
(어둠의 노래를 속삭이는데
별빛 아래 잠든 도시 침묵같은 그속삭임
멀고 먼 저 언덕까지도 깃발되어 나부껴도
새벽거리에 내려앉은 뿌연 안개처럼
이 한 밤의 노래들은 새 아침에 또 숨겨지리라)

아, 이 밤과 새벽 사이, 스쳐가는 밤 바람 사이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고
졸고 있는 가로등 그늘에 비켜 앉은 어둠만이
한낮의 허위를 얘기하는데
저 먼 변두리 하늘 위로 새벽 별이 빛나고
흔들리는 그 별빛 사이로 새 아침은 또 깨고 있구나
(바람의 노래를 외고 있는데
이슬 내리는 도로위엔 일터 나가는 새벽 사람들
무심한 그 발걸음으로 또 하루는 지워지고
저 먼 변두리 하늘위로 새벽 별이 빛나면
흔들리는 그 별빛 사이로 새 아침은 또 깨어 나리라)

   - 실향가

고향하늘에 저 별, 저 별, 저많은 밤 별들
눈에 어리는 그 날, 그 날들이 거기에 빛나네
불어오는 겨울 바람도 상쾌해
어린 날들의 추억이 여기 다시
춤을 추네 춤을 추네

저 맑은 별 빛 아래 한 밤 깊도록 뛰놀던 골목길
그 때 동무들 이제 모두 어른되어 그 곳을 떠나고
빈 동리 하늘엔 찬 바람결의 북두칠성
나의 머리 위로 그 날의 향수를 쏟아 부어
눈물 젖네 눈물 젖네

나의 옛 집은 나도 모르는 젊은 내외의 새 주인 만나고
바깥 사랑채엔 늙으신 어머니, 어린 조카들, 가난한 형수님
아버님 젯상에 둘어 앉은 객지의 형제들
한 밤의 정적과 옛 집의 사랑이 새삼스레
몰려 드네 몰려 드네

이 벌판 마을에 긴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며는
저 먼 들길 위로 잊고 있던 꿈 같은 아지랭이도 피어오르리라
햇볕이 좋아 얼었던 대지에 새 풀이 돋으면
이 겨울 바람도, 바람의 설움도 잊혀질까
고향 집도 고향 집도

   - 그의 노래는
시영(후미진) 아파트 하수구에서 왕모기나 잡으며
하루 종일을 보내는 애들
서울 변두리 검은 하천엔 썩은 물만 흐르고
(학교 앞에는 앳된 병아리를 팔고)
역한 냄새 속에서 웃지도 않고 노는 애들
(비닐봉지에 사담아 집으로 돌아가는 애들)
자연이란 이들에게 무슨의미가 있을까
맑을 시냇물과 쾌적한 바람이란
(거친 벌판과 깊은 산과 긴 강물이란)

여름이면 그늘 밑으로 겨울이면 양지 쪽으로
숨이 차게 옮겨 다니는 저 노인들
모진 세파에 이리 깎이고 저리 구부러진 채
이제 마지막 일만 초조히 기다리는 이들
세월이란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덧없는 과거와 희망찬 내일이란

미친 운명은 광란처럼 나의 숨통을 조이고
나는 허덕이다 꿈을 깨고
크고 작은 역경 속에서 저 자신을 학대하며
뚫고 나서면 또 거기 시련이
휴식이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음의 평화와 육신의 안식이란

그의 노래는 별빛도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 나와
화사한 그대 향락의 옷자락 끝에 묻어
발길마다 채이며 떨며 매달려
이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무슨의미가 있을까
가려진 실상(슬픈환락)과 전도된 가치속에서
   - 우리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무얼 얻나
노래 부르는 시인의 읍을 통해서 우리는 무얼 얻나
모두 알고있는 과오가 되풀이되고
항상 방황하는 마음 가눌 길 없는데
사랑은 거리에서 떠돌고 운명은 약속하지 않는데
소리도 없이 스치는 바람 속에서 우리는 무얼 듣나
저녁 하늘에 번지는 노을 속에서 우리는 무얼 느끼나

오늘은 또 순간처럼 우리 곁을 떠나고
또 오는 그 하루를 잠시 멈추게 할 수도 없는데
시간은 영원 속에서 돌고 우리 곁엔 영원한게 없는데
부슬 부슬 내리는 밤 비 속에서 우리는 무얼 듣나
빗소리에 무거운 어둠 속에서 우리는 무얼 느끼나

- 고향집가세

내 고향집 뒤 뜰의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
담 너머 논 둑 길로 황소 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무너진 장독대 틈 사이로 난쟁이 채송화 피우려
푸석한 스레트 지붕 위로 햇살이 비쳐오겠지
에헤야, 아침이 올게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담 그늘의 호랭이꽃 기세등등하게 피어나고
따가운 햇살에 개흙 마당 먼지만 폴폴 나고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 뚝딱거리는 괘종시계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게야 텅 빈 집도 아늑하게
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장독대의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실한 놈들은 다 싸보내고 무지랭이만 겨우 남아도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 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에헤야, 어머닌 계신 곳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마루 끝 판장문 앞의 무궁화 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
원추리 꽃밭의 실잠자리 저녁 바람에 날개 하늘거리고
텃밭의 꼬부라진 오이 가지 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
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 어머니는 손을 씻으실게야
에헤야, 수제도 좋아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마당에 쑥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도시도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게야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새빨간 봉숭아 물을 들이고
새마을 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꼬박 졸기도 할게야
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어릴적 학교길 보리밭엔 문둥이도 아직 있을는지
큰 길 가 언덕 위 공동묘지엔 상여집도 그냥 있을런지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융단같은 골프장 잔디와
이 너머 산비탈 잡초들도 지금 가도 또한 있을는지
에헤야, 내 아버지는 그 땅아래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얘기2

저 들 밭에 뛰놀던 어린 시절 생각도 없이 나는 자랐네
봄 여름 갈 겨울 꿈도 없이 크며 어린 마음 뿐으로 나는 보았네
도두리 봄 들판 사나운 흙바람 문둥이 숨었는 학교길 보리밭
      (장다리꽃 피었는)
둔포장 취하는 옥수수 막걸리 밤 깊은 노성리 성황당 돌 무덤
달 밝은 추석날 얼근한 농악대 궂은 밤 동구 밖 도깨비 씨름터
배고 픈 겨울 밤 뒷동네 굿거리 추위에 갈라진 어머님 손잔등을

이 땅이 좁다고 느끼던 시절 방랑자 처럼 나는 떠다녔네
이리로 저리로 목적지 없이 고단한 밤 꿈 속처럼 나는 보았네
낙동강 하구의 심난한 갈대 숲 희뿌연 안개가 감추는 다도해
호남선 지나는 김제 벌 까마귀 뱃놀이 양산도 설레는 강마을
뻐꾸기 메아리 산골의 오두막 돌멩이 구르는 험준한 산계곡
노을 빛 뜨거운 서해안 간척지 내 민족 허리를 자르는 휴전선을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었네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
길 잃고 헤매는 교육의 현장과 지식의 시장에 늘어선 젊은이
(서울로 서울로 모이는 군중들)
예배당 가득히 넘치는 찬미와 정거장 마다엔 떠나는 사람들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노래와 젖은 논 벼 베는 농부의 발자국
빛 바랜 병풍과 무너진 성황당 내 겨레 고난의 반도땅 속앓이를

얼마 안 있어 내 아이도 낳고 그에게 해 줄 말은 무언가
이제까지도 눈에 잘 안띄고 귀하고 듣기 어려웠던 얘기들
아직도 풋풋한 바보네 인심과 양심을 지키는 가난한 이웃들
환인의 나라와 비류의 역사 험난한 역경 속 이어온 문화를
총명한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과 당당한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깨었는 백성의 넘치는 기상과 한뜻의 노래와 민족의 재통일을

- 아가야 가자

아가야 걸어라, 두발로 서서 아장 아장
할매손도 어매손도 놓고 가슴펴고 걸어라
흰 고무신, 아니 꽃신 신고 저 넓은 땅이 네 땅이다
삼천리 강산 거칠데 없이 아가야 걸어라

아가야 걸어라 두 다리에 힘주고 겅중 겅중
옆으로 뒤로 두리번 거리지 말고 앞을 보고걸어라
한 발자욱, 그래 두발자욱 저 앞길이 환하쟎니
가슴에 닿는 바람을 이겨야지 아가야 걸아라

아가야 걸아라 어깨도 펴고 성큼 성큼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동무하여 걸어라
봄 햇살에 온누리로 북소리처럼 뛰는 맥박
삼천리라더냐 그 뿐이라더냐 아가야 가자

- 인사동

장승 하나 뻗쳐 놓고  앗따 번쩍 유리 속의 골동품
버려진 저 왕릉 두러 파헤쳐  이놈 저놈 손벌린 돈딱지
쇠죽통에 꽃 담아 놓고  상석 끌어다 곁에 박아 놓고
허물어진 종가 세간살이  때 빼고 광 내어 인사동
있는 사람, 꾸민 사람 납신다  불경기에 파장들이 다 넘어가도
푸대접 신세 귀한데 가니   침 발라 기름 발라 인사동

놋요강에 개 밥 그릇까지  가마솥에 누룽지까지
두메 산골 초가 마루 밑까지  뒤져 뒤져 쓸어다 돈딱지
열려문에 효자비까지  충의지사 봉덕비 향내음까지
고려 신라 백제 주춧돌까지  호시탐탐 침 흘리는 인사동
양코쟁이, 게다 신사 납신다  문 열어라 일렬종대 새치기 마라
푸대접 신세 물 건너가니  침 발라 기름 발라 인사동

그가 느끼는 공윤심의는 다를바가 없었다. 그는 ‘무진 새노래’에 역시 그 내용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음을 아쉬워 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러한 것은 상당한 변화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이 음반의 출반을 계기로 작품창작이나 활동의 새로운 변화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진 새노래’는 그에게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리는 음반이었다. ‘삶의 문화’라는 자신의 독자적 창작활동의 공간속에서 나온 첫 번째 창작음반 - 87년 발췌곡1집을 냈다 - 이었고, 작곡에서의 ‘전통’에 대한 관심에서 더 나아가 ‘소리’자체의 ‘전통’성에 대한 탐구가 반영되기 시작한다. 북, 꽹과리, 태평소, 피리, 가야금까지… 이러한 모든 부분에서 이것들이 80년대 후반이라는 ‘현재’에서 어떻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국악을 접목시켰던 한국의 가수들, 혹은 - 소위 순수 -음악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 본다면, 70년대의 프로그레시브 뮤직이나 재즈, 혹은 20세기 현대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서양의 음악들을 듣는 우리나라 감상자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마도, ‘황병기’와 ‘김영동’이라는 두명의 인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 몇 명의 인물을 추가 시킨다면 ‘송창식’과 ‘김수철’정도가 있겠고, ‘김영동’과의 어떠한 연관관계를 거론하는 ‘슬기등’이라는 음악집단, 대략 이정도가 그래도 방송전파를 타고 나올수 있는 음악인 들 이었다.(그러나, 이들의 음악이 전파를 탄다는 것은 거의 드문 경우였다. ‘김수철’이 그중 가장(?) 많이 나왔으리라. ) 보다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접할 수 있는 소위 ‘국악가요’라는 것 혹은 ‘국악’이라는 질문에 대해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들을 보기로 하자. 일반 대중들이 떠올리는 ‘국악’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대략 몇가지로 규정 되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슨무슨 씨름대회에서 나오는 타령하는 여자들’ 혹은, 연말연시 ‘무슨무슨 특집’이라는 쇼 프로그램에 나오는 또다른 타령하는 남자, 여자들 혹은 라디오 공개방송이나 아주가끔나오는 ‘사물놀이’정도… 당시의 TV나 라디오를 지배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지배적인 내용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대중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국악’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음풍농월’류 혹은 ‘우리것’이니까 당연히 우리가 좋아 해야만 한다는 ‘쇼비니즘’적인 발상의 산물이라는 영향력이 너무도 지배적이다. 이러한 방송계의 풍토에서 ‘무진 새노래’가 가지는 위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보아야 함이 바람직 할 것이다.
이전의 음반에 비해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의 가사는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산문적이며, 보다 직설적이다. 이 즈음부터 가사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소리와 ‘현재’의 이야기를 다루어야한다는 이 두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그의 방법은 이 음반을 통해 조금씩 구체화 되기 시작한다. 조금은 다르지만, 이러한 구성을 시도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정도? 그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음반을 통해 그를 접하게 되는 그의 팬들은 ‘가사 정형성’의 파괴를 우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산문화 경향이라는 것이 단순한 정형화의 파괴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다. 그는 우리말의 맺고 끊어짐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곡을 진행시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호흡과 그의 음악적 마디는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6 #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 ]

세번째얘기 둘.
고등학교 2학년때 H대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에 간적이 있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았다. 난 이사람이 ‘Alice Cooper’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농담이고, 어디서 많이보던 사람의 인형두개가 있었다. ‘벗겨진 사람’하고 ‘믿어주세요’였는데, 그날 개박살 났다. 사람이었으면, john나게 아팠을 거다.

세번째얘기 셋.
공연도 보고 친구들과 얘기도 하고 참 즐거운(?)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가 중간고사기간이어서 시험은 조졌다. 선생한테 john나게 혼나고, 불쌍한 우리엄니 john나게 실망했다.

세번째얘기 넷.
2호선 지하철 역 주변에 공연 포스터가 붙었다. ‘정태춘’의 음악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가 연세대학교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연황토색 바탕이 포스터에는 ‘정태춘’혼자 갈대밭에 앉아있는 사진이 덜렁 인쇄되어 있는 그런 포스터 였다. 물론 번개같이 띄어서 둘둘 말았다. 친구새끼들 또 지랄했다. “야 씨발, 여자사진도 아닌데, 야 버려라 버려.” 그러나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런데, 애들하고 술먹다가 잊어버렸다. 엉, 엉, 엉… 새끼들, 도움이 안된다.

88년 겨울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그는 이제 대중집회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는 작은 소극장과 폐쇄된 스튜디오가 아니라 대학 운동장에서, 대학로에서,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집회장에, 즉 탁 트인 광장에서 고무신을 신은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계기는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였다. 1988년 12월에 시작하여 1989년 10월에 이르는 약 10개월간 전국을 걸치면서 이루어졌던 이 공연은, 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계기이기도 했다. 자신의 새로운경향의 노래들을 중심으로 하는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통해 전국의 대중들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날 계획을 구체화 하였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이전의 대중가요 공연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가 일관된 흐름을 가진 작품으로서 노래와 사설, 슬라이드등의 구성으로 일관된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고 있는 공연이다.(아쉬웁게도 이 공연을 기록한 영상이나 음반이 남아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곡을 들려 들일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제외 시키기로 하겠다.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참고하고 싶은 이들은 『정1』,pp.213~240.를 참조하면된다. 이 음악극의 모든 시나리오와 곡들이 수록되어있다. ) 1988년 12월 부산에서 시작한 이 공연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유료공연으로는 다음해 4월초 서울에서 일단락된다.
이 공연은 뒤이어,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와 결합하여 당시 가장 커다란 이슈 중의 하나였던 전교조지지 무료 야외공연의 계획으로 변화하게 된다. 각 대학 총학생회나 지역 총학생회 연합에서 이 공연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제작비 150만원과 만명 단위의 대중이 모일 수 있는 운동장이나 야외 공연장을 제공하고, 그는 무료로 공연을 하면서 공연 프로그램을 팔아 모자라는 제박비를 충당하고, 공연 도중 전교조를 위한 모금을 하여 전교조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대중가요권의 관행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의 공연이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무료공연, ‘올바른 교육의 자리매김을 위한 기획공연’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전교조 지지공연이란 단순한 공연일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전교조 지지를 위한 대형집회였다. 그의 대중적 명성과 그 지역의 전교조, 운동단체들의 대중동원력이 총동원되어, 1989년 9월부터 꼬박 한달동안 전국에서는 대형 대중집회가 이루어졌다. 총관객은 20만명이 넘었고, 총제작비는 5천여 만원이었으며, 프로그램 판매액만도 천만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교조 지원 모금액은 2천 5백만원 정도였다. 한 달 동안 18회의 공연을 치루는 것이어서, 5톤짜리 트럭 두 대에 장비를 싣고 버스 한 대에 꽉 찰 정도의 공연자들과 함께 매일처럼 지역을 이동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공연의 형식이 달라짐에 따라 공연의 내용도 약간씩 추가, 삭제 되었다.(『정1』, pp.276~278. )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소위, 운동권이라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거리감이 좁아졌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 가지는 독자적 유통구조와 수용자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장소의 중앙에 서게 된다.

7 # 아! 대한민국[ | ]

네번째얘기 하나.
대학교 시험봐서 뚝! 떨어지고, 집에는 후기공부한다고 야부리치고, 애들하고 모여서 영화보고, john나게 놀았다. 그리고 재수한답시고, 학원다니면서, 그렇게 살았다.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걸어 15분정도면 뒤집어 써서 버스나 전철타고 어디가는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처지라 처음에는 고생이 좀 심했다. 그러던 여름정도 인가 사바사바한 경로를 통해서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을 입수할 수 있었다.

네번째얘기 둘.
고 2때 보았던 그의 공연에서 들었던 몇곡의 노래를 포함해서 여러곡들이 들어있었다. ‘박은옥’의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음악운동을 통해 사회운동에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그는 삶의노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것인가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러한 음악운동의 성과를 모아 새로운 음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새노래들과 이전에 공윤심의에 걸려 음반화 하지 못했던 ‘인사동’등을 다시 심의에 넣는다. 그 많은 작품중 심의에 통과한 것은 고작 ‘황토강으로’ 뿐이었다. 당시의 공윤심의 종합의견은 다음과 같다.

- <개작) 버섯구름의 노래; 본 작품은 남북통일, 평화, 핵전쟁의 관념물들이 마구 뒤섞여 무엇을 뜻하는지 식별할 수 없으므로 개작하시기 바람.
인사동; 본 작품은 실재 특정 상가 지역을 지나치게 비방, 비하 묘사하고 있으므로 개작 바람.
형제에게; 지나치게 강조된 부정적인 내용을 순화 개작 바람.
어허, 배달나라 광영이여;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치우쳐 의미 연결이 모호한 부분과 극단적으로 투쟁을 강조한 내용을 순화 개작 바람.
우리들의 죽음; 어떤 가정의 부주의가 우선된 불행한 사태를 굳이 이념적인 사회문제로 결부한 것은 대중가요로 부적당하므로 전면 개작 바람. 끝.(『정2』, pp.176~177. )

예상한 바 그대로였다. 그리고 불법음반을 냈다. 그와 ‘공윤’과의 공식적 법정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음반은 무엇보다도 ‘누렁송아지’음악극 이후 그가 발견한 국악기 소리의 재발견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소리 전반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반드시 한계가 있겠지만, 그 소리는 바로 ‘힘’과 ‘공격성’이라 하겠다. 그가 찾아 갈 곳도, 그가 하는 노래도 이제 강건너에 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전통은 ‘박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북, 꽹과리가 아닌, 90년 대한민국의 북, 꽹과리 였다. 그는 이전의 생각과 표현력을 더욱 집요하게 추적하고 정선했다. 심의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이음반의 수록곡들은 이전의 여느 곡들 보다 길어진 가사, 전통악기에 대한 공격적(?)해석을 통해 그가 다시한번 거듭남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사의 과격함(?)으로 인하여 이 앨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본인이 겪었던 의견들 대략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데모노래가 그렇듯(?) 이것도 데모노래다’라는 주장. 소위 운동권 노래를 듣는다는 사람들중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다 같이 부르기에 부적합한 노래다.’라는 주장. ROCK의 저항성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이건 좀 심하다라는 주장도 있다. 그들의 경계와 주장은 전혀 설득적이지 못하다.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 ‘로버트 짐머맨’의 음악은 저항의 음악이고, ‘김민기’, ‘정태춘’의 음악은 데모노래라는 식의 주장. 어느 경우는 ‘정태춘의 음악은 너무 조직적이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없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이러한 식의 발언의 저변에 깔려있는 의도에 대해 나는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이란, 아니, 음악은 당연히 세상을 ‘강건너 불 보듯이 해야만 한다’는 식의 방관자적 논리로 음악을 짜맞추려하는 그 토대자체에 벌써 모순이 있다고 본다. 이런식의 주장들이 ‘히틀러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라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지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들다.
또, ‘그의 음악이 너무도 많은 가사를 담고있다’는 의견역시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정태춘의 음악=데모노래’이기 때문에 간단명료한 가사를 가져야만 한다는 식의 다른 형태의 강제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운동권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을 저변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운동권 음악’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앨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잘 걸고 넘어지는 곡은 ‘아! 대한민국’과 ‘우리들의 죽음’이다. ‘무슨 보고서인가?’, ‘이 노래는 예술적 승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곡’이라는 식의 반론을 항상 제기한다. 이러한 의견제기는 매우 근시안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들은 아예 ‘정태춘’의 음악에 대해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리얼리즘을 하나의 -부정적의미에서- 형식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주장은 리얼리즘이 여러다양한 형식중 가장 낙후된 형식의 형태로 인식하는데서 오는 해석적오류라 생각한다. ‘우리들의 죽음’ 최루성인 것은 나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그 최루성은 트로트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다. 논지가 다른방향으로 흘렀는데, 트로트를 우리의 전통가요라부르는 무리들에게 정태춘은 ‘나 살던 고향’이라는 곡으로 대답하고 있다(이 이야기는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음반을 다루면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네 번째 곡 ‘일어나라 열사여’를 보자. 이곡은 이전의 운동권음악이 가지고있던 지배적 멜로디인 서구적 행진곡풍이 아니다. 기존의매체에서 지배적으로 인식시키고자 했던 타령조의 ‘음풍농월’ 혹은 ‘세월한탄’의 가락이 아닌 분노와 저항의 장단이요, 가락인 것이다. 종종 한민족은 ‘恨’의 민족이라는 말도 안돼는 이야기(단순하게 흑인노예의 역사를 보자. 그들의 역사를 볼 때 결코 恨이란 개념을 우리 고유의 것인양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게다가 恨 = 순종의 미덕(?)이라는 말 역시 어폐가 있다. )를 심어주려는 이들이 있는데, 이러한 패배주의에 대한 맹목적 순종에 대해 정태춘은 이 노래의 ‘소리’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후반부로 치닫으며 작열하는 풍물의 ‘공격적’음색은 이러한 모든 다양성을 단순히 ‘恨’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거세시키고 ‘강건너 불보듯’하라는 식의 강요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황토강으로’는 이러한 역동성을 지닌 ‘풍물’을 강물의 굽이침에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다.
그의 음색에 대해 이런 의문을 던져본다. ‘그의 목소리가 창, 혹은 판소리의 그것과 어떠한 유사점, 혹은 계승되어졌다는 일말의 단서라도 있는가?’ 대답은 별로다. 오히려 그의 음색은 너무도 평범한(?) 포크가수의 음색이다. 그의 음악에서 보여지는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부분이란 바로 그러한 단편적 이미지의 연관성이 아닌 현시대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전통을 소화시켰으며, 그것이 ‘정태춘’이라는 가수의 경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결과는 ‘인사동’, ‘그대 행복한가’, ‘우리들 세상’에도 예외 없이 녹아들어있다. 이 앨범을 통틀어 단연 돋보이는 곡은 ‘일어나라 열사여’, ‘황토강으로’, ‘그대 행복한가’, ‘우리들 세상’이라 하겠다. ‘그대 행복한가’를 통해 그는 누구도 이야기하기 꺼려했던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러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해답을 ‘우리들 세상’을 통해 자신의 대답을 이야기한다. 이 앨범의 대부분의 연주는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 드럼대신 북을, 건반대신 꽹과리와 태평소를 사용하여 자신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키는데 커다란 한발을 내 딛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반의 확장은 단순히 그가 소리를 연구함에 있어 기존의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았으며, 그 소리의 발견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러한 연구를 토대로 대중가수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 인지를 스스로 보여준 경우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순한 의미의 포크가수 혹은 데모노래나 부르는 가수로 그를 해석하려하는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하겠다.
- 정태춘의 불법음반 ‘아, 대한민국…’을 처음들었 때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걸죽한 입담과 지독한 풍자, 놀라운 실험정신과 날카로운 도전의식으로 충만한 그 음반이 ‘불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성세대와 기득권의 울타리에 조그마한 흠이라고 갈세라 전전긍긍하는, 낡고 고리타분한 미의식의 수호자들이 그렇게 엄청난 저항과 공격석의 미학을 곱게 용납할 리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오랜 싸움도 바로 그런 낡디낡은 윤리학과 체제수호의 미학이 쳐 놓은 견고한 그물망을 뚫고 새로운 가치와 미학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자는 싸움이 아니었던가.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은 그 싸움의 과정에 쏘아 올려진 가장 위력적이고 날카로운 화살이었고, 가장 환하게 빛나는 불꽃이었다.
‘아, 대한민국…’이 햇수로 7년 만에 마침내 ‘불법’의 딱지를 떼고 당당히 우리를 찾아오게 된 것은 단순한 ‘복각’이나 개인적인 ‘기념’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오랜 싸움이 만들어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문화사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80년대 전 역사를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쉽게 괄호쳐 버리는 세태 속에서 정태춘의 걸걸한 목소리는 문득 우리를 수년전의 그 뜨겁던 가슴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어느틈엔가 투박한 세상사에 휩쓸리면서 펑퍼짐해져버린 우리의 의식을 날카롭게 찔러온다.
시대착오라고?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정태춘의 노래들을 가슴으로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 아침 신문을 저 깊은 행간까지 다시 한번 천천히 들여다 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거현장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아이들만 남아 있던 집에서 불이나고, 기만과 협잡분열과 억압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실, 그것이 과거의 일일 뿐인가?
정태춘은 기존의 가치와 신념이 송두리채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던 저 90년대초, 혼돈의 시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좌절,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함께 모두어 이 노래들을 토해 내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목소리는, 지금의 차분한 시각에서 보면 더러 목에 힘이 들어가 있거나 지나칠 정도로 호흡이 가파르거나 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요즘의 호흡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시대착오와는 정녕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다시 한 번 보듬이면서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다. 이 음반의 역사적인 복원이 단순히 검열 철폐의 기념비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새로운 노래와 삶의 미래’를 향한 출발로서 새겨져야 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1990년 10월 불법(?)음반으로 나왔던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음반이 1996년 6월 공윤의 사전심의 폐지로 인해 합법(?)음반으로 나왔을 때, 문화평론가 김창남씨가 쓰신 앨범 해설지임. 이 글보다 더 잘 쓸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실었다. )

- 아, 대한민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있지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 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들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외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있지 않나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양심과 정의가 넘쳐 흐르는 이 땅  식민 독재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있지 않나 우린 바보같이 살고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 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 떠나는 자들의 서울
가는구나, 이렇게, 오늘 또 떠나는구나   찌든 살림, 설운 보퉁이만 싸안고 변두리마저 떠나는구나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지 저들을 버리는 배반의 도시   주눅든 어린 애들마저 용달차에 싣고 눈물 삼키며 떠나는구나
아, 여긴 누구의 도시인가, 동포 형제 울며 떠나가는 땅   환락과 무관심에 취해버린 우리들의 땅, 비틀거리며, 구역질하며…
가는구나, 모두 지친몸으로 노동도 버리고 가는구나   어디 간들 저들 반겨 맞아줄 땅 있겠는가 허나 가자, 떠나는구나

가면 다시는 못돌아 오지 저들을 버리는 독점의 도시   울부짖는 이들을 내리치는 저 몽둥이들의 민주주의,  쩔뚝거리며 떠나는구나
아, 여긴 누구의 도시인가, 동포형제 울며 쓰러지는 땅   분노와 경멸로 부릅뜨는 우리들의 땅,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며…
가는구나, 하늘 맑은 곳으로 이제 주 소없이 떠돌지라도   사람의 땅에서 쫓겨 그 땅에 눈물 뿌리며 저들 식구가 떠나는구나
사람의 땅에서 쫓겨 그 땅에 눈물 뿌리며 오늘 또 떠나는구나

- 우리들의 죽음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시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 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 훨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방문은 꼭 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숙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방문을 세차기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둥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

- 일어나라, 열사여(이철규 열사 조가)
더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 칼 쥐고 총 가진자들   싸늘한 주검 위에 찍힌 독재의 흔적이   검붉은 피로, 썩은 살로 외치는구나

더이상 욕되이 마라   너희 멸사봉공 외치는 자들   압제의 칼바람이 거짓 역사되어 흘러도   갈대처럼 일어서며 외치는 구나

여기 하나이 죽어 눈을 감으나   남은 이들 모두 부릅뜬 눈으로 살아   참 민주, 참 역사 향해 저 길   그 주검을 메고 함께 가는 구나

더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저기 적 민중 속으로 달려 나오며 외치는   앳된 목소리들 그이 불러 깨우는구나

일어나라, 열사여, 깨어나라 투사여   일어나라, 열사여, 깨어나라 투사여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바람이 분다, 저길 보아라 흐느끼는 사람들의 어깨 위   광풍이 분다. 저길 보아라 죽은 자의 혼백으로 살아온다
반역의 발굽아래 쓰러졌던 풀들을 우리네 땅 가득하게   일으켜 세우는구나
바람이 분다, 욕된 역사 위 해방의 깃발되어 저기 오는구나

자, 부릅떠야 하네, 우리들 잔악한 압제의 눈빛을 향해    자, 일어서야 하네, 우리들 패배의 언 땅을 딛고
죽어간 이들 새 역사로 살아날 승리, 부활의 상여를 메고  자, 나아가야 하네, 우리들 통일, 해방 세상 찾아서

- 황토강(黃土江)으로
저 도랑을 타고 넘치는 황토물을 보라   쿨렁 쿨렁 웅성거리며 쏟아져 내려간다
물도랑이 좁다 여울목이 좁다   강으로, 강으로 밀고 밀려간다
막아서는 가시덤불, 가로막는 돌무더기   예라, 이 물줄기를 당할까보냐   차고, 차고 넘쳐간다

어여 가자, 어여 가 구비구비 모였으니   큰 골짜기, 마른 골짜기 소리 지르며 넘쳐 가자
어여 가자, 어여 가 성난 몸짓, 함성으로   여기 저기 썩은 웅덩이 쓸어버리며 넘쳐 가자
가자, 어서 가자 큰 강에도 비가 온다   가자, 넘쳐 가자 황토강으로 어서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가자, 넘쳐 가자

어여 가자, 어여 가 쿠르릉 쾅쾅 산도 깬다   옛다, 번쩍, 천둥 번개에 먹장구름도 찢어진다.\\
어여 가자, 어여 가 산 넘으니 강이로다   강바닥을 긁어버리고 강둑 출렁 넘실대며
가자, 어서 가자 옛 쌓은 둑방이 무너진다.   가자, 넘쳐 가자 황토강으로 어서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가자, 넘쳐 가자

- 형제에게
갇힌 자 더욱 자유로운 땅   이 땅에 흐느끼는 소리여   높은 담벽 아래 시들은 풀잎   저보다 더욱 초라한 역사여
깨인 자들에게 쏟아지는 시련   달빛 속으로 쫓기는 양심들   주검 없이 죽어간 청춘의 꽃들   다시 활짝 피일 참 세상은 어디
아, 묶여서도 통일이라네   다시 만나야할 형제 있으니   아, 갇혀서도 해방이라네   조국의 역사로 살아 숨쉬니

- 그대, 행복한가
그대, 행복한가
스포츠 신문의 뉴스를 보며 시국을 논하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어린이 유괴 살해 기사는 있지, 있어
그대, 행복한가
보수 일간지 사설을 보며 정치적으로 고무 받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점심 굶는 어린애들 얘기는 있지, 있어
그대 알고있나, 정말 알고있나   우리 중 누가 그 애들을 굶기고 죽이는 지   정말 알고있나, 알고있나

그대, 행복한가
시장 개방, 자유 경제, 수입 식품에 입맛 돋우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칼로리와 땀 냄새는 있지, 있어
그대, 행복한가
주한 미군 기동 훈련과 핵무기에 고무 받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평화와 인도주의 구호는 있지, 있구 말구
그대, 알고있나, 정말 알고있나   우리 중 누가 그것들의 희생양이며 표적인지   정말 알고있나, 알고있나

그대, 행복한가
거듭나는 공화국마다 그 새 깃발을 쫓아 행진하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민족과 역사의 거창한 개념은 있지, 있어
그대, 행복한가
막강한 공권력과 군사력에 고무 받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보호하고 지키려는 그 무엇은 인지, 그 무엇이
그대 알고있나, 정말 알고있나   우리 중 누가 그것들의 대상이며 주인인지   정말 알고있나, 알고있나

그대, 알고있나
끊임 없이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을 매도하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 그들을 가두는 법전과 감옥이 있지, 법전과 감옥이
그대, 알고있나
노동하는 부모 밑에 노동자로 또 태어나는 저 아이들, 아이들   그래, 저들은 결국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들의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 우리들 세상
이제 집 사기는 다 틀렸네   예라, 더런 놈의 세상, 미친놈의 세상   승질나서 뒈지겠네

맑은 하늘의 햇살이 남한이나 북한이나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제일 세계나, 제삼 세계나
아니, 서울의 변두리 셋방살이 내 집에도   차별없이 평등히, 따숩게 내리 쪼일 때
일층의 젊은 싸모님 햇살이 따가워   넓은 마루 유리문에 그물같은 거튼을 치고
발톱에, 발톱에 매니큐어, 매니큐어   빨갱이 보다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를 때
지하실에 우리 집 애들   책가방만한 창가로 흘러드는   찌그러진 한조각의 햇살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며 놀다
그 창에 대고 조용히 묻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이제 잘살기는 다 틀렸네   예라, 있는 놈의 세상, 가진 놈의 세상   열 받쳐서 미치겠네, 하체 힘도 쪽 빠지네

맑은 하늘의 햇살이 남한이나 북한이나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제일 세계나, 제삼 세계나
아니, 서울의 변두리 비닐 하우스 동네에도   차별없이 평등이 따숩게 내리 쪼일 때
썩어가는 나라 자본에 독점의 발톱이   한 필지, 두 필지 숨차게 줄을 그어댈 적에
촌놈들 살겠다고 떠나온들 무엇하나   파출부에 날품팔이 생몸 팔아 연명할 적에
못난 부모들 막일 나가고,   버려진 애들 아무거나 줏어 먹고,   아무데나 묽은 똥질을 할 적에
깡패들이 들이 닥쳐 그 집을 부술제
그 아이들이 조용히 묻네   “우리들 세상은 이제 망한건가요?”
아니, 이제 바로 시작이다.\\
저 망치, 몽둥이를 뺏아라. 이제 너희들의 것이다   이 더런 집들을 때려부수자, 부숴, 부숴! 부 숴 버 려 !\\
그만
“이젠 또 무엇을 부술까요?”   여기 패배와 순종, 체념과 그 비굴
이 애배의 의식에 내리쳐라   이 죽은 의식에 내리쳐라, 쳐라, 쳐라!\\
이제 바로 시작이다
이제 바로 시작이다
우리 세상, 우리 세상, 우리 세상!

이렇게 해서 그는 공윤에 대항해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91년 2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된다. 93년 공윤의 사전심의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그들의 새음반이 발매 된다.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그것이다.(그의 ‘사전 심의 철폐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 이음반은 91년 바뀌어버린 세상에 그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베어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가장 고민이 된 것은 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가치들, 민중성이라든가 하는 그런것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노래에 담아낼것인가 하는 고민이었죠. 작품이 잘 안 만들어지고 그랬어요. 슬럼프가 온 거죠.…(중략)…꼭, 그게 유일한 계기는 아니지만, 유럽과 제3세계권의 노래테이프를 듣게 됐어요. 말로만 듣던 아르헨티나의 소사라든가, 나카라과의 과다바랑코, 그리이스의 데오도라키스, 독일의 시인이자 가수인 볼프 비어만 등등, …(중략)… 뚜렷한 주장을 하지 않고, 좀 편안하게 생각나는 것을 써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정2』, p.33. )

그는 이뿐만 아니라, 그는 몇번의 해외여행과 공연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얻게 된다. 그의 이야기이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이 친절하다는게 참 충격적이었어요. …(중략)… 나는 선진국이란 말에 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몇 번 가보면서 그네들이 우리보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중략)…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건 확실히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이죠. …(중략)… 우리가 항상 화 내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지 못하며 사는게, 원래 우리 품성이 나쁘다던가, 예절교육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는 거죠. 물질적 토대,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지 않아서예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자상하게 대해주며 아름다운 사람들로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아름다운 세상은, 그럴수도 있을 만한 물질적인 토대가 마련되어야 해요. 그게 없으면 헛거예요. 여태까지 우리가 싸워왔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요.”(『정2』, pp.33~37. )

이 음반은 그가 완전한(?) 도시인임을 자청하고 나온 음반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경기도 평택의 도두리만이 자신의 고향은 아닌 것이다.(실제로 그가 92년 지은 ‘도두리의 봄’이라는 곡이 있다 그 곡의 내용은 대략 농촌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이미 서울의 정태춘인 것이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경우 음반 사진을 의도적으로 종로 한복판에 촬영하였다. )

8 # 92년 장마 종로에서[ | ]

다섯 번째얘기 하나.
하여튼 대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에는 지하조직(?)이었던 ‘짜라투스트라’에 가입해서 카페를 전전하다가, 그해 10월 ‘정태춘·박은옥’의 새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몇달있다가 군대에 끌려갔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이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차분하다’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말을 바꾸어 보자. 전작이 ‘동적’이라면, 본작은 ‘정적’이라는 이야기이다. 전작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소심한 사람들도 이 음반에 대해서는 긍정적 반응 혹은 ‘관심’을 보인다.
이 음반에는 72년 작품인 ‘양단 몇 마름’도 수록되어 있고, 내가 들어본 그의 음반들 통틀어 유일무이 한 경음악(?)도 들어있다. 이 음반의 지배적인 테제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그것은 아마도 1992년의 삶일 것이다. 이 음반에서는 두 개의 전작에서 사용되었던 국악기들이 어느정도 절제되어있으며, ’88년의 ‘무진 새노래’ - 비록 수술당하기는 했지만 - 에서 보여 주었던 화자 - 한명의 도시인 -으로 다시 다시 돌아간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화자가 아니다.
입시의 무게에 눌려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박은옥의 ‘비둘기의 꿈’. 듣는이들이 마치 동네여기저기를 돌아다닌듯한 느낌속으로 안내하는 ‘사람들’. ‘나살던 고향’을 통해선 일본 관광객들의 작태를 이야기할때는 트로트 선율로서, 우리땅의 풍경을 노래할때는 판소리가락으로 ‘트로트가 과연 전통이라는 얼굴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이음반의 동명 타이틀 곡인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곡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를 마지막으로 하고자 한다.
이 곡에는 미안하게도 국악기가 하나도 안들어가 있다. 이제 ‘정태춘’에게 있어 ‘전통’이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특정의 악기사용, 혹은 우리의 의식,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쇼비니즘’적 전통의 맹신이 아닌 것이다. ‘정태춘’은 이러한 일련의 음악작업을 통해 현재에 있어서 ‘전통’과의 단절을 시대의 조류라고 치부해 버리려는 생각, ‘옛것은 옛것이고, 현재는 현재다.’라는 식의 피상적 단절론에 대해 ‘전통’이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고, 또 어떻게 현재에 있어 소화되고 발전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전통’에 대한 기형적 인식에 대한 비판도 빼 놓을 수 없으리라. 이곡을 통해 ‘전통의 계승주체가 누구이며, 현재에 있어 이것들 모두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이 음악은 바로 ‘현재의 서울’이다.

- 저 들에 불을 놓아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 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이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 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그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 저리 헤집으며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어두워가는 안개 들판 너머, 자욱한 연기 깔리는 그 너머
열나흘 둥근 달이 불끈 떠오르고 그 달빛이 고향 마을 비출 때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소작 논배미엔
짚더미 마다 훨 훨 불꽃 높이 솟아오른다
희뿌연 달빛 들판에 불기둥이 되어 춤을 춘다
   - 비둘기의 꿈

봄 햇살 드는 창밖으로 뛰어나갈 수 없네
모란이 피는 이 계절에도 우린 흐느껴
저 교회 지붕 위에 졸고 있는 비둘기
어서 날아가라, 계속 날아가라, 총질을 헤대고
그 총에 맞아, 혹은 지쳐 떨어지는 비둘기들
음… 그래, 우린 지쳤어
좋은 밤에도 우린 무서운 고독과 싸워
기나긴 어둠 홀로 고통의 눈물만 삼켰네

아, 삶의 향기 가득한 우리의 꿈 있었지
노래도 듣고, 시도 읽고, 사랑도 하고
저 높은 산을 넘어 거치른 들판 내닫는 꿈
오… 제발, 우릴 도와줘
내가 사랑한 것들 참 자유, 행복한 어린 시절들
알 수 없는 건 참 힘든 이 세상의 나날들

안녕, 이제 안녕, 여기 나의 노래들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안녕, 모두 안녕, 열 아홉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안녕, 부디 나의 노래 잊지 말아 줘

- 사람들

문승현이는 쏘련으로 가고  거리엔 황사만이  그가 떠난 서울 하늘 가득 뿌옇게, 뿌옇게  아, 흙바람…
내 책상머리 스피커 위엔  고아 하나가 울고 있고  그의 머리 위론 구름 조각만 파랗게, 파랗게,  그 앞에 촛대 하나

김용태씨는 처가엘 가고  백선생은 궁금해하시고  “개 한 마리 잡아 부른다더니 소식 없네, 허 참…”
사실은 제주도 강 요배 전시횔 갔다는데
인사동 찻집 귀천에는  주인 천상병 씨가 나와 있고  “나 먼저 왔다, 나 먼저 왔다.  나 먼저 커피 줘라, 나 먼저 커피 줘라
저 손님보다 내가 먼저 왔다.  나 먼저 줘라, 나 먼저 줘라“
민방위 훈련의 초빙강사  아주 유익한 말씀도 해주시고  민방위 대원 아저씨들 낄낄대고 박수 치고
구청 직원 왈, “반응이 좋으시군요, 또 모셔야겠군요”

백태웅이도 잡혀가고  아, 박노해, 김진주  철창 속의 사람들  철창 밖의 사람들  아, 사람들…
작년에 만삼천여 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이천이삼백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천이백여 명의 농민이 농약뿌리다 죽고  또 몇 백명의 당신네 아이들이 공부, 공부에 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고, 죽고, 죽고… 지금도 계속 죽어가고…
압구정동에는 화사한 꽃이 피고  저 죽은 이들의 얼굴로 꽃이 피고  그 꽃을 따먹는 사람들, 입술 붉은 사람들  아, 사람들…
노찾사 노래 공연장엔  희망의 아침이 불려지고  비좁은 객석의 꽉찬 관객들 너무나도 심각하고  아무도, 아무 말도…

문승현이는 쏘련에 도착하고  문대현이는 퇴근하고  미국의 폭동도 잦아들고  잠실 야구장도 쾌청하고
프로 야구를 보는 사람들, 테레비를 보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 나 살던 고향

육만 엥이란다
후꾸오까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 버스 부산 거쳐, 순천 거쳐
섬진강 물 맑은 유곡 나루
아이스 박스들고, 허리 차는 고무 장화 신고
은어 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 사일 풀코스에 육만 엥이란다

초가 지붕 위로
피어 오른는 아침 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까스 불에 은어 소금구이
혓바닥 사리살살 굴리면서
신간선 왕복 기차값이면
조선 관광 다 끝난단다 음, 음
육만 엥이란다

초가 지붕 위로
피어 오른는 아침 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 호텔 싸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써비스 한 번 볼만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 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 값이
육만 엥이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나니나니나

(곽재구 시집 「서울 세노야」중에서
‘유곡나루’ 전문과 작곡자 일부 가필)
   - ’92년 장마, 종로에서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96년 6월 7일 사전심의 조항이 폐지된다.

그 이후 그는 ‘자유’콘서트에 출연하게된다.(그가 다니는 공연이라는 것이 지면상에 소개된 이것만은 절대 아니다. ’93부터 현재까지 그의 공연출연 자료만 모아보았는데, 적어도 1000여건은 되는 듯. ) 수많은 공연중 ‘97년 눈에 띄는 공연이 있는데, 그것은 97년 4월에 있었던 공연이다. “고려가요와 창작가요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벌어진 이 공연은 대중가수로는 ’송창식‘, ’정태춘‘, ’우순실‘씨등이 출연했다.

그의 현재 이야기들을 모아 그가 ’97 년 현재 생각하고 있는 방향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가요사전심의 폐지는 언더그라운드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양한 기호를 가진 음악팬들을 만족시키는 개성있는 음악인들이 나올 수 있을 것같아요.” “지금 우리는 대안없는 시기에 살고 있어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위해 부지런히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96년 가요계를 정리하며 제도권 음악에 반기를 든 「크라잉 너트」,「옐로우 치킨」, 「이스크라」등 신흥 록그룹들이 젊은이들로부터 환영은 받았다. 그러나 음반유통의 제한으로 소수의 마니아 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와 달리 음반은 사전심의 완화에 별 영향을 안 받을 정도로 스스로 순치된 부분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본격 대두된다 하더라도 관성적으로 거부하게 마련이다.” “가요시장의 수요층이 10대 위주이고 방송사가 이들의 입맞에 맞춰 말초적 음악만을 제공하는 등 왜곡된 룰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다양한조류가 흐르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왜 콘서트를 하는가? 변화하는 시대를 점검하고 싶다. 사회를 바로 잡겠다는 희망과 실천이 꿈틀대던 우리 사회는 90년을 전후로 분명 변화하고 있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 함께 노래 부르고 얘기하고 싶다.” “포크의 형식은 미국에서 건너 왔지만 이곳의 포크는 우리의 정서와 상황, 민족음악, 역사를 담아야 한다.” “대중음악의 주류는 통속적이기 마련이다. 그 주위에 진지한 작업들이 폭넓게 펼쳐져 있기만 한다면 희망은 있다. 음반 사전심의 철폐 이후 비주류 음악들이 활성화했다. 고정관념을 깨는 삐삐롱스타킹같은 자유로운 젊은 후배들도 보기 좋다.” ”우리 국악을 현재에 되살리려는 작업은 포기 할 수 없는 과제다. 좀더 가볍고 친숙하게 우리 장단을 되살린, 우리의 현실을 담은 음악을 만들겠다.”

그는 현재를 새로운 작업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우리의 음악적 모국어, 국악 쪽 작업을 다시 하겠다.”“김덕수패 사물놀이와 서양 재즈그룹 레드선의 협연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국악 리듬에 서양 선율을 결합한 자유로운 구조의 노래를 만들고 싶다. 레게의 경쾌함부터 록의 `파워'까지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좀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박은옥씨의 새앨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제까지 내 노래만 불러온 아내도 변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의 윤민석, 의 하덕규씨 등의 곡으로 앨범을 만들참이다.”

9 # 앨범목록[ | ]

여섯번째얘기 하나.
97년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의 새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음악 감상회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정태춘·박은옥의 음반들 1. 시인(詩人)의 마을(정태춘의 새노래들) ; 정태춘의 첫 번째 앨범 ; 1978년 서라벌 레코드사.
詩人의 마을 / 사랑하고 싶소 / 촛 불 / 西海에서 / 그 네 / 木浦의 노래(여드레 팔십리) 아하! 날개여 / 겨울나무 / 사랑의 보슬비 / 산너머 두메

2. 회상 ; 박은옥의 첫 번째 앨범 ; 1978년 서라벌 레코드사.
3.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 1980년 서라벌 레코드사.
4. ‘우네’ ; 1980~83(?)사이 서라벌 레코드사.

5. ‘정태춘·박은옥’(떠나가는배/우리는) : 1984년 지구 레코드사.
떠나가는 배(이어도) / 손 님 / 시인의 마을 / 님은 어디가고 / 사랑하고 싶소 / 탁발승의 새벽노래 시장에 가면(혜은이);건전가요 / 우리는 / 사랑하는 이에게3 / 하늘위에 눈으로 / 촛 불 / 나는 누구인고 나그네 / 얘기 1

6. ‘정태춘·박은옥’(북한강에서/바람) ; 1985년 지구 레코드사.
북한강에서 / 사망부가 / 애고, 도솔천아 / 서해에서 / 여드레 팔십리 / 바람 / 붕숭아 / 장 서방네 노을 들 가운데서 / 정화의 노래;건전가요

7. 정태춘·박은옥 발췌곡집1 ; 1987년 삶의 문화.
회상 / 시인의 마을 / 봉숭아 / 떠나가는 배 / 우리는 / 서해에서 / 북한강에서 / 바람 / 탁발승의 새벽노래 사랑하는 이에게 3 / 촛불 / 윙윙윙

8. 정태춘·박은옥 戊辰새노래 ; 1988년 삶의 문화.
실향가 / 이 사람은 / 고향집 가세 / 아가야, 가자 / 우리의 소원은 통일;건전가요 우리가 추억이라 말하는 / 한밤중의 한시간 / 사랑하는 이에게2 / 그의 노래는 / 얘기 2

9. ’90정태춘 “아, 대한민국…” ; 1990년 삶의 문화.
아, 대한민국… / 떠나는 자들의 서울 / 우리들의 죽음 / 일어나라, 열사여 / 황토강으로 한여름 밤 / 인사동 / 버섯구름의 노래 / 형제에게 / 그대, 행복한가 / 우리들 세상

10. 정태춘·박은옥 발췌곡집2 ; 1991년 삶의 문화.
한여름 밤 / 우리들은 / 사망부가(思亡父歌) / 장서방네 노을 / 서울의 달 / 들 가운데서 / 하늘 위에 눈으로 얘기 1 / 애고, 도솔천아

11. ’93 정태춘·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 1993년 삶의 문화. (‘아, 대한민국…’ 과 ‘ ’92년 장마, 종로에서’ 이 두장의 음반은 1996년 합법음반으로 삶의 문화에서 다시 출시 되었다. ) 양단 몇 마름 / 저 들에 불을 놓아 / 비둘기의 꿈 /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 비둘기의 꿈(경음악) 사람들 / LA스케치 / 나 살던 고향 / 92년 장마, 종로에서

10 # 참고문헌[ | ]

참고문헌 이영미. 『정태춘』. 한울, 1989.
이영미. 『정태춘2』. 한울, 1994.
정태춘. 「지금, 80년대와 단절은 있는가? 中 ‘법정에 서며’」 『反시대(창간호)』. 새물결, 1994.
김창남. 『하위문화집단의 대중문화 실천에 대한 일연구 -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 』 서울대학교대학원 신문학과 박사논문, 1994.
강 헌. 「말할수 있는 것과 말할수 없는 것.中 ‘정태춘, 우리 대중음악의 마지막 독립군’」 『REVIEW(제7호)』, 리뷰 앤 리뷰. 1996.
기타 : 음반해설지, 국내 발간일간지.

변명 지금은 새벽 4시다. 역시 나도 안된다. 막판 뒤집기나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쓰기는 다 썼는데, 영 찜찜하다. 처음부터 욕심이 너무 컸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 반도 못했다. 아직까지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11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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