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1 # 수건[ | ]

눈 내리는 수도원의 밤
잠은 오지 않고
방안은 건조해서
흠뻑 물에 적셔 널어놓은 수건이
밤 사이에 바짝 말라버렸다
저 하잘 것 없는 수건조차
자기 가진 물기를 아낌없이 주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하고
켜켜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송이도 되지 못하고

2 # 솎아주기[ | ]

올해는 친구를 위해
'아는 사람'을 좀 솎아내야겠어.

만나면 하염없이 떠들어도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아는 사람'

저들에게는 가혹하면서
우리한테는 후한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을
올해는 좀
솎아내야겠어.

그럼
누구를 남겨두냐고?
그야 친구지.
어떤 사람이 친구냐고?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사람.
함께 침묵하고 있어도
마음 편한 사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지.

3 # 쌍둥이[ | ]

사랑이 일어나자 고통이 일어났다.

사랑이 주저앉자 고통 또한 주저앉았다.

사랑이 눕자 고통도 누웠다.

사랑이 살며시 일어났다.
고통도 살며시 일어났다.

사랑이 참다못해 말했다.
"제발 날 따라오지 마. 너 때문에 내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듣는단 말이야."

고통이 대답했다.
"너와 나는 쌍둥이인걸.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너도 포기해야 하는 거야."

둘은 인간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사랑을 맞아들인 사람들의 가슴은
이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어떤 사람은 고통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아예 사랑 맞기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직
사랑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사람한테서만
사랑이 완성되었다.

4 # 강연: 성인들이 읽는 동화[ | ]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동화작가 정채봉님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마련한 '금요일의 문학이야기'라는 제하의 무료문학강좌에서 강의한 내용.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눈망울 만큼이나 맑고 투명한 동심이 느껴진다. 결코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은. 거짓과 현학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 그의 빈 자리가 너무, 너무 크게 느껴진다. - LaFolia

시인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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