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본 일본인의 한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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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朝鮮觀の史的展開→ 한국관의 역사적 전개
역사적으로 본 일본인의 한국관
  • 1982년의 일본 책
  • 1990년 한국어판 출간
  • 저자: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
  • (한국어판) ISBN 9788974740238

2 #[ | ]

이 책이 주는 상당히 놀라운 두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매우 형편없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 두번째는 일본인들의 그 형편없는 역사의식이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전국시대 직전(조선 초기)까지 한반도에 조선이 있는지 고려가 있는지 삼한시대가 전개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당혹스러운 사실이 적혀있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이가 모르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조선 통신사를 영접했던 인물이 일기에 남긴 기록이 그러했던 것이며 이는 일본 지식인들의 천박한 한국관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일본인인 저자가 직접 지적하고 있다.

한국측 기록중에서 일본에 관한 것들은 상당히 찾아보기 어려우며 고대로 올라갈수록 왜구에 관한 기록등에 치우쳐있다. 일본측 기록에는 몇가지 주목할만한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들을 짚으면 다음과 같다.

4세기 임나일본부 .
7세기 쇼토쿠 태자 천황의식과 소중화의식 형성
7세기 중엽 의자왕의 왕자 풍장의 일본 도피(?) 풍장을 인질로 인식
8세기 중엽 당의 정월삭의식 신라보다 하석에 있다고 격렬히 항의하여 자리를 바꿈. 신라는 일본의 조공국이라고 주장. 이후 신라와의 대외관계에서 계속 신라를 속국 대접.
11세기 말엽 고려 문종의 병으로 중국과 일본에 의사 요청 고치지 못하면 국치라 하여 요청문구의 불손함을 핑계삼아 파견 거절. 여전히 한반도를 속국으로 인식중.
13세기 초엽 고려와 왜구에 관한 분쟁 왜구가 고려를 분탕질 친 것에 대해 반격을 했는데 일본 내습으로 착각하여 긴장. 이후 왜구 진압에 일본 조정도 일조
13세기 말엽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
14세기 말엽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 아직도 여몽연합군이 침공한 것으로 인식,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풍이 불어서 퇴치했다고 생각
15세기 중엽 조선 통신사의 내일 사신들을 영접한 관리가 한반도에 조선이 있는지 고려가 있는지 삼한시대가 전개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음
15세기 중엽 조선 통신사의 내일 조선 통신사들의 내일을 정치적 안정의 도구로 이용. 조선 통신사들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불안정. 정권이 휘청댈 정도로 대우함.
1592년 임진왜란, 정유재란 우리에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그 유휴 에너지를 소진하기 위해 임진왜란이 벌어졌다고 단순하게 알려져있지만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이 중요했는데 그 무역로가 막힌 상황을 뚫기 위해서 일으켰다는 원인도 존재. 당시 정한론자들은 대대로 조공을 바쳐오던 조선이 예를 다하지 않는다고 인식. 역시 신공황후의 한반도 지배설과 일본서기등에 기록된 3국의 조공같은 것이 이론적 배경이 됨. 이후 중국과 한국에 있어 일본의 이미지는 극도로 악화.
1607년 국교재개 도쿠가와 막부 성립후 일본은 대외적 평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조선에 국교재개 요청. 조선은 일본을 경계하면서 이를 허용.
근대 이후 생략

문제는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일본측 기본 사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8세기 초에 성립되었는데 이 사서들은 그 진위가 매우 의심스러운 허구들로 가득차있고 여러가지 역사적 기록과도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즉 이 사서의 성립으로 8세기 이전까지의 사건들도 일본 내에서는 사실로 간주되었으며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한국침략에 관한 주된 근거로 사용되었으니 말 그대로 소망을 적은 것이 역사적 실체가 되어 이후 역사의 촉매가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허구적 기록들인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계속해서 그 사료들을 인용하면서도 기본 사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두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왜곡된 역사를 가지고 이후 사실로 벌어졌던 역사를 전개했으니 왜곡된 역사도 서술해야한다는 관점일 것이다. 저자는 특히 조선 통신사의 사례를 들면서 일본의 쇄국이 얼마나 심했으며 일본의 지배자들에게 국제감각이란 전혀 없었음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물론 한반도에서 건너간 문화들에 대해서는 굳이 크게 비중을 다루어 언급하진 않고있다. 사실이므로.

에도 시대와 이후 근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여러 방면으로 일본 지식인들의 예를 들어가며 그들이 가지고있는 한국관에 대해 개별적 언급을 하고있다. 일본 학계에서 공식적 용어로 사용하는 것 중 하나가 '전통적 한국관'이라는 표현이며 이것은 기본적으로 신공황후, 임나일본부, 3국의 조공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번국 내지는 속국 인식이다. 이런 뒤틀린 한국관이 전통적 한국관이라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러운 일인데 이는 당대 지식인들 전반이 가지고 있는 정통 사관이다. 특히 이것은 일본혼(야마토다마시이, 국수적 순수주의에 가까운)과 천황제(소중화의식에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관에 이르는)와 결합하여 자연스럽게 정한론으로 흘러나왔다. 당연히 히데요시의 침략도 지도자가 직접나선 친정으로 신공황후의 뒤를 이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일제의 조선지배 당위성으로 이어진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인 요시다 쇼인(1830-1859), 키도 타카요시(1833-1877), 사이고타카모리(1827-1877), 후쿠자와유키치(1835-1901) 등 메이지 유신을 성립시키고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이 전통적 한국관의 소유자였다. 사이고 타카모리같은 경우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정한론 문제로 대립하여 서남전쟁까지 일으켰다가 패해 죽은 인물이지만 그것은 그 방법론상의 문제였다. 즉 언제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좋은가의 의견차이를 가지고 내전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이쯤되면 거의 모든 일본의 지식인들이 전통적 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 일본을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는, 만엔짜리 지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도 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일본인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손으로 꼽을만한 숫자이다. 문필가인 나카노 시게하루(1902-1979),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의 정치가 요시노 사쿠조(1878-1933), 사회주의자 고도쿠 슈스이(1871-1911), 자유민권론자 스에히로 뎃쵸(1849-1896), 미술 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등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들은 결코 일본사회의 주류 지식인이 아니었다.

어릴적 대구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는 지한파인 저자는 조선시대 한일 교류사를 전공자로 이 책을 서술함에 있어 틈틈히 선조들의 오류들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학자적 태도는 경외스러운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일본 학계의 주류는 못되지 싶지만.
역자는 후기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을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만큼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얼마나 멸시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지 일본인들 역시 잘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무지가 지금까지도 꾸준히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음을 또한 말하고 있다.

아바Abba의 히트곡 중에 Knowing me, knowing you라는 곡이 있다. 후렴구는 knowing me, knowing you, is the best I can do.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 -- 거북이 2003-5-13 1:1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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