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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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The Function of Reason
이성의 기능

 

2 # 거북이[ | ]

일단 이 이성의 기능이라는 책은 말 자체를 너무 꼬아서 읽는 이를 괴롭게 한다. 번역의 문제는 아니고 문장 자체가 의고투인듯 하다. 19세기식이라고 하네. 난 한글만 읽었으니 어쩌면 김용옥에게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명징한 사고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논의를 정리해가면서 이성의 기능에 대해 화이트헤드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따라가보기로 한다. 그의 말은 복잡 다단하고 거북이의 이해력은 후달리기 때문에 이것은 그저 거북이가 소화하는 것의 수준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해하기 위해 거북이가 알고있는 몇몇 생각들을 징검다리로 붙여넣었는데 그것이 옳은 이해인지 억지로 끼워맞춘 것인지 자신이 없다. 기울임체는 거북이가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생각임을 밝혀둔다.
그런데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잘 모르는 것이거나 구라이기 쉽다. 화이트헤드는 그 몇안되는 예외일까? 휴우,

3 1부[ | ]

이성의 기능은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 결코 적자생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체가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 진화론이 생명 존재의 근원, 이유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없다.
  • 왜 생명은 내부의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진화의 방향이 왜 단순한 생명체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진행되었는가 역시 알려주지 못한다.
  • 적어도 생명은 생존에 대한 추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스스로의 생존에 맞도록 환경을 변형시키게 하는 원인이었고 그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것때문에 진화의 방향은 점차 고등생물로 변화하는 방향이 되었던 것이다.
  •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끝까지 남아있는 놈이 적합한 놈이라는 결과론적인 시각일 뿐이다.
"산다" "잘 산다" "더 잘 산다"
  • 추상적 사유능력은 동물적 생존전략이라는 기초가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 따라서 서구철학이 이성을 선험적인 차원에서만 논의한 것은 그 기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이 목적인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 즉 연역적으로 모든 것을 구성하려는 시도 역시 하나의 신앙일 뿐이다.
목적인에 대한 고려가 결여된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관한 맹신은 삶의 피폐를 낳는다. 즉 가치중립적 자연과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비이성적 맹신을 존중하라는 뜻은 아니다.
존재와 가치는 융합되어야 한다.
  1. 이성은 새로움을 강조하는 기관이다.
  • 인간이 언어와 문자를 발견하는 순간, 즉 삶의 기술에 대해 축적이 가능해진 순간 산다에서 잘 산다로 넘어간 것이다.
  • 잘 산다는 것은 불안정하다. 잘 산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들어가는 순간 어김없이 피로가 밀려들게 되고 피로에 의해 잘 사는것이 잠식되면 생존할 것인가 더 잘 살 것인가라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게된다.
  • 자연에 존재하는 안정의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 리듬, 맹목, 잠시
리듬은 주기성을 말한다. 생명은 리듬이다.
맹목은 충동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퇴행이다.
잠시는 개체의 교체로 퇴행을 조금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 피로는 이 안정의 방법들에 존재한다. 피로는 반反이성이다.
  • 피로와 이성이 짝을 이루는 것처럼 우주에도 모이는聚 힘과 퍼지는散 힘이 존재한다. 하향의 힘이 존재하는 것은 상향의 힘이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부정해서는 안된다.
심신일원론
  • 사실 이 하향과 상향의 속성이란 이원적인 것이 아니다. 정신적 경험이라는 것은 물질적 경험이 전제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상관성에 주목해야 한다.
  • 정신적인 것이 육체적인 것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충동, 그것이 욕망이다.
  • 그리고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 이성이다.
  • 혼돈된 상태를 한차원 위에서 포섭하고자 하는 것, 스스로를 제어하는 그것이 이성이다.

아 어렵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런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화이트헤드라는 인간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제어하는 그것이 이성이다라는 멘트에서 이성은 공부다라고 의미를 잡아낸 김용옥의 센스 역시 대단하다. 물론 김용옥은 이 책에서도 여전히 화이트헤드의 논의를 자기 합리화에 이용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만 다른 책들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다. 논지 자체가 붕 뜬 것도 아니고.
일단 여기까지 느낀 것은 이 책이 20세기 초의 저작이라 이후 진행된 과학혁명의 성과를 안고있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억지스러운 면이 느껴지긴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용옥 말대로 당시가 과학만능주의 만연의 시대라는 것을 먼저 알고있어야 할 것이다.

이성은 공부이고 공부는 수신이다.

4 2부[ | ]

이성은 목적 달성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충동이다.
  • 이성은 이해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스스로만 섬긴다. 이성은 내적 완결성을 추구할 뿐이다.
  •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은 서로를 규정하는데 사변이성이 실천이성의 축적을 기반으로 움직인다면 실천이성은 사변이성의 방향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적 접근
  •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수학과 논리학에 의해 사변이성은 스스로를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 아시아 문명들도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었지만 직관에 머물러있었고 사변이성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결국 (서구) 자연과학과 수학에 패배했다.
  • 사변이성이 폭발적으로 그 영향력을 넓혀간 것은 고작 18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변이성은 음악을 제외하곤 예술의 발달에 거의 이바지하지 못했다.
  • 18세기 이후 테크놀로지의 급성장은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이 만났기 때문이다. 이전 2천년간에 기술적 발전이란 없었다.
  • 이러한 성과의 그늘로 작용하는 것은 실천이성의 관성적 저항이며 이것은 인간 본성에 뿌리박고있는 타성이다. 그리고 그 타성의 주체는 성직자에서 과학자로 옮겨가고 있다. 타성은 바로 이성을 좀먹는 피로이다.
  • 중세는 천재들의 세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해석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도그마 속에서의 천재들이 주름잡았기 때문에 실천이성과 괴리되어 암흑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라철학이 얻어낸 그 사변이성의 성과란 찬란하다. 이후 실천이성과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서구 지성계를 자극한 것은 사변의 뒤에 가리워져 있던 관찰이라는 것이었다. 의고에서 벗어나려는 태도였다.
  • 과학은 일상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항해술 발달에 이바지한 그리니치 천문대의 설립이었다. 과학은 기술과 다르다.
  • 과학이 힘을 얻게 되면서 형이상학은 설자리를 잃게되었고 그때문에 과도하게 과학의 반동적 독단이 계속되었다. 신학의 자리를 수학이 차지해버렸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사변이성의 형이상학적 정식화The Metaphysical Formulations of the Speculative Reason 아웅 어렵다.
  • 과학만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며 그저 과학은 인간 지식의 일부분일 뿐이다.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협동이 필요한 것인데 과학(자)은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 과학적 사실은 새로운 공식(패러다임)이 나타나기 전까지 옳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독단의 궁극성은 붕괴된다.
  • 과학은 관찰된 사실의 기술이라고 폄하될 수도 있지만 과학이 귀납적 일반화와 그 다음 사실의 예측이라는 과정에서 사변이성의 도움을 받는 이상 그렇게 단언할 수 없다.
  • 과학기술적 산물과 그것의 기반을 이루는 자연과학의 사실은 등가물이 아니다. 그 자연과학적 사실을 과학기술적 산물까지 끌어오는 것, 그것에 사변이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철학이 실패하면 자연과학의 맹목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원론에 뉴튼의 유물론적 우주론이 들어가면서 물질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었으며 칸트는 자연 그 자체를 현상으로 간주하였다. 이후 자연과학에 무지한 이들이 칸트철학의 근간을 이루면서 철학은 (현상이 아닌) 근본적인 것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과학은 현상에 대한 기술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철학사적 배경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 과학적 방법과 사변적 사유가 분리되어 과학이 맹목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 진보의 앞길을 막는 것이다.
  • 과학적 견해가 증명의 근거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궁극적 합리주의에 관한 반역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화이트헤드의 그리스 찬양은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오직 그리스적 방법론만이 인간에게 사변이성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것이 인간 이성의 새로운 단계를 만들어내었다고 말하는 듯 하다. 나에게 이것은 매우 파시즘적 발상으로 읽힌다. 과연 그가 아시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건 약간 무의미한 이야기 아닌가 싶은데. 외계 생명체가 있어 지구의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인 그들의 사유 방식이나 방법론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와 무관하게 혹은 그 존재에 대해 철저히 무지한 채로 사변 이성의 발전을 이룩했고 인간 이성의 새로운 단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물리학과에서는 화학과에서 뭘 하는 지 별 관심도 없이 자기네 방법론을 극단으로 추구한 결과 화학과에서 바라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축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물론 모르고 나쁜짓 하는 놈들이 알고 하는 놈들보다 더 파렴치하고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만, 19세기 유럽인에게 그리스란 곧 동북아시아의 중국아닌가? 다만, 그 당시는 패권적 측면에서 영국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겠지만. 김용옥이 여기저기 찝적거리는 것을 보고 헤겔이나 주자가 외곬수로 파는 것을 파시즘으로 정리해 버리기는 좀 거시키니 하지 않을까. --SonDon
글쎄 내 보기엔 시간싸움이었던 것 같은데, 결국 크리티컬한 시점에서 서구가 동양을 추월해버려 세상이 이꼴이 난 게지.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중세를 '천재들이 (어쨌든) 근대를 준비하던 시기'정도로 규정하고 있는 주제에 인도 문명과 중국 문명에 관해 정체의 시기라고 못을 박고있거든. 김용옥이 이 부분에서 일갈할거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깨갱하고있다네. 권위에 약한 건지 원. --거북이

예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의 과감성이나 종종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 보면 화이트헤드는 김용옥 말대로 깡좋은 철학자임에 분명하다. 예술의 발전이라. 그 부분에 있어서 발전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 부터가 나와는 좀 맞지 않는다.
예술이란 인간 감성 표출의 놀이터이다. 어떤 장르에서 놀 건덕지가 있느냐 없느냐. 새로운 놀이터가 필요한가 아닌가. 누가 기존의 놀이터를 화끈하게 넓힐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일 뿐이다. 천년 전의 감성에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가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있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역시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물론 현대미술을 굳이 추켜줄 생각도 없다. 하지만 현대미술에는 현대인들이 스스로 쌓아올린 현대 문명과의 어긋남 속에서 성장해왔고 그 와중에 균열을 정말 치밀하게 드러내는 작품들 또한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실천이성의 관성적 저항과 과학자들이 그 타성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은 역시 화끈한 철학자나 내놓을 수 있는 명쾌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이트헤드에게 이것을 묻고싶다. 왜 당신은 자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그 타성의 핵심은 바로 자본가이며 가진자가 아니었는지. 자본은 피로이다!

어쨌거나 화이트헤드는 이 장에서 철학이 없는 과학은 공허하다 혹은 민폐를 끼친다라는 한마디를 다각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과학에 을 대주는 자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사변적 사유와 과학적 방법이 만날 수 있는가에까지 결론을 못가져가고 있다.

ㅋㅋㅋ 칸트 때만 해도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라고 씨부렸는데, 생각해보면 참 재밌지 않어? --SonDon
다들 뭐랄까 이원론을 상정한 다음에 합일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고패턴이 엿보이는듯. 그래서 마르크스 형님이 변증법에 대해 얘기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화이트헤드도 양적전화가 질적전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것 같네.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나는 다시한번 마르크스는 진정 휴머니스트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네. --거북이

5 3부[ | ]

사변이성이란 미지에 대한 무한한 충동이다.
  • 사변이성은 뭔가를 성취했을 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 자체에 대해 곧 회의한다.
  • 그리스인들의 위대성은 그들이 사변이성의 초월성을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것 자체도 인식하려했던 그 시도에 있다.
  • 그리스인들이 만든 발견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허나 그것을 검증하는 것 자체도 결코 쉽지 않다.
직관과 일치하는가
일관적이고 명료한가. 나는 명쾌라는 말이 더 좋다. 복잡한 것들은 대부분 진리가 되지 못한다.
  • 사람들은 경험과 직관이 단순하다고 여기고 연역적인 것에만 몰두해왔지만 사실 경험과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귀납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인류는 근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몇가지 지배적인 도식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매우 크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회의할 수 있다. 하지만 사변이성의 가장 강력한 기능중 하나가 바로 도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한 문명이 그 문명의 소유자들에게 부과하는 궁극적인 도덕적 요구는 그 소유자들이 그들이 이득을 본 잠재적 발전의 이 자산을 반드시 후계자들에게 전수하거나 또 그것에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 아시아 문명이 찬란함을 발한 후에 정체된 것은 묵상에 안주하여 호기심을 질식시켰기 때문이다. 사변이 이성에서 사라져버렸다. 잘 나가다가 꼭 이따위 헛소리를 해댄다. 시대적 한계인가.
  • 수천년간 축적된 기하학이 결국 근대문명의 봇물을 트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 사고가 바로 사변이성의 예술이며 이것은 기존 도식의 초극도 가능케 한다.
사변적 사고는 당대의 많은 이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흐름 덕분에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다. 사변을 제한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반역이다.
  • 이러한 사변적 사고의 한 극점이 바로 우주론이다. 그것은 스스로 변해나가기도 하고 다른 사고들을 고쳐서 담아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그리하여 무엇에나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주론의 임무이다.
  • 경험은 무엇보다 강렬하지만 그 경험이라는 것은 감각기관과 우리의 사고체계를 통해서만이 인식될 수 있다. 경험의 직접적 관찰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명증을 가지고 보편성을 얻은 다음 우리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사변이성이 기능하는 것이다. 공유될 수 없는 비밀은 단지 비밀로 남을 뿐이다.
  • 명료함은 희미함과 분리될 수 없다. 무엇이 작은 것이고 무엇이 큰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느것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 어느 순간 진리가 그 자체로 궁극이라고 여겨졌다면 이후 역사는 정지하고 진보는 없이 머물러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움직이는 사변이성 덕분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안정이란 곧 퇴보다. 우리는 사변 이성의 끝없는 훈련인 공부를 추구해야 한다.
  • 그리스인들은 끝없이 호기심이 많았고 매우 체계적인 방법론을 통해 접근했다. 그들은 가리는 것이 없었으며 일반적인 것을 추구했고 그것을 또 실천하고자 했다. 이것들 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그것은 진정한 공부가 될 수 없다.
우주론과 이성의 기능
  • 사변이성은 두가지 양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의 체계속에서 그것들을 해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일반화하고자 하는 끝없는 지향이다.
  • 우주론이란 무언가를 설명하지 못해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설명해버려도 안된다. 우주론은 세계의 모든 불완전성을 공유한다. 우주론은 세계를 이해해나가는 방식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명료성과 일반성에 대한 점진적 접근의 증거들이다.
  • 우주론은 언제나 붕괴되어왔고 또 새로 만들어져왔다. 인간은 더듬거리면서 세계를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 자연에 있는 상향의 기운, 헤체에 대항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 그리고 비록 모호하긴 하지만 그 상향의 기운을 바라보고 조절하는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이성이라 부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긴 사유를 통해 도달한 부분이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성을 먼저 인식한 다음에 그 인식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식인과 지성인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게다. 어떻게하면 나의 이 즐거움을 다른 이들과 함께 할 것인가.
그나저나 그의 그리스 문명에 대한 찬양은 장난이 아니다. 종종 느껴지는 제국주의 시대 지식인의 냄새는 뭐랄까 역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걸까. 사실 화이트헤드야 이성의 기능이 무엇일까라고 가정을 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이런 공리주의적 결론에 도달했지만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심심해서 공부를 한다. 아니면 허영심을 위해 공부한다고 해도 좋고 나 스스로의 눈치를 보느라 공부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재미없는 공부는 하고싶지 않다. 재미있는것만 하기도 벅차고 열심히 재미있는 것을 하다보면 어느새 재미없는 부분까지 다 넘어간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뭔가 멋진 부작용이 나오면 그것도 좋은거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나를 지켜보고있는 또다른 나(애칭 토트)도 커나가면서 나를 채찍질한다. 그럼 그것으로 된 것 같다. --거북이

6 같이 보기[ | ]

7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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