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시인의마을

1 # 서 해[ | ]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2 # 바 다[ | ]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3 # 집[ | ]

우리 육체의 집을 지어도 그 문가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마
음의 집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집을 찾아가도
그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그것도
제 집을 찾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비울수록 무겁고 다가갈수록 멀어라!

4 # 아 이[ | ]

저의 아이는 높은 계단을 올라가
문득 저를 내려다봅니다
그 높이가 아이의 자랑이더라도
저에겐 불안입니다

세월을 건너 눈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곤 이내 눈이 멀겠지요
우리가 손 잡을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5 # 소 녀 들[ | ]

웃음 속에 어찌 얼룩이 없겠습니까
웃음은 얼룩 속에 있습니다

여름 한나절 땀 흘리는 버스 안에서
소녀들은 한껏 웃습니다

저들의 웃음 소리는 처음 펴보는
부챗살 같습니다

저들이 웃을 때마다 부챗살
하나 하나가 꺾여 나갑니다

웃음 속에 어찌 세월이 없겠습니까 저들의 웃음 속에 세월은 잠자고 있습니다

6 # 벽[ | ]

담쟁이라도 타고 오르지 못하는 붉은 벽 앞에 서면 새어
나오지 못하는 고통의 신음 소리 들린다 무너뜨릴 수 없고
불태울 수 없는 고통의 울부짖음 소리 들린다 담쟁이라도 타
고 오르지 못하는 붉은 벽 앞에 서면 매달리고 싶다 타고 오
르고 싶다 먼지 낀 침묵의, 함성의 붉은 벽 앞에 서면 알몸
으로 불타오르고 싶다

7 # 비단길 1[ | ]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 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8 # 그대 가까이 2[ | ]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9 # 병든 이후[ | ]

나는 당신이 그리 먼 데 계신 줄 알았지요 지금 내 살갗에
마른버짐 피고 열병 돋으니 당신이 가까이 계신 줄 알겠어요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당신이 조
금 빨리 오셨을 뿐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
어요 당신 손 잡고 멀리 가고 싶지만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오시는 당
신. 우리 한몸 되면 나의 사랑 시들 줄을 당신은 잘 아시니
까요

10 # 이 별 1[ | ]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
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
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
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
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
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11 # 이 별 2[ | ]

아직 그대는 행복하다 괴로움이 그대에게 있으므로 그러나
언젠가 그가 그대를 떠나려 하면 그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
행해질 것이다 괴로움이 그에게 옮아갈 것이므로

12 # 숨길 수 없는 노래 2[ | ]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
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
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
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 李晟馥 시집 <그 여름의 끝> 中에서..., '94.09.19 --LaFolia


 

서울대 및 동대학원 불문과 졸업
1977년 '정든 유곽에서'로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1983년 제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0년도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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