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일

WonIl 푸리 PuRi

아수라 2

1 # 작가론[ | ]

2000년 10월 16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41 (http://columnist.org)

[21세기 문화 문화인] 작곡가 원일씨

작곡가 원일씨는 철없는 아이처럼 음악의 장르간의 장벽은 물론 국경도 모른 체하며 '들어서 좋은 것'만 찾고 있다.

"저는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실은 음악 이전에 그저 '소리'를 좋아했고 그래서 좋아하는 소리들을 줄곧 찾았을 뿐입니다. 어려서 밥을 먹다 아버님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어요."

빈 국그릇을 장단 맞추듯 두드리자 아버지는 복 달아난다며 야단을 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렸을 적 그는 복이 없어 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성적이 전학년 꼴찌였다. 그런 건 아랑곳 않고 원일은 때려서 소리가 날 만한 것은 모두 악기처럼 두드렸다. 깨진 항아리,찌그러진 냄비, 판자, 막대기…. 쇠파이프나 대나무같이 관처럼 속이 빈 것은 기어이 구멍을 뚫고 불어 보았다.

"초등학교 때 아버님의 요양 차 고양에서 몇 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서울과 다른 시골의 분위기여서 동네 친구들과 그런 잡동사니들을 동시에 두드리고 불자 또 다른 음악이 됐어요. 땅바닥을 두드려서 나는 소리도 나름의 음악성이 있는 듯 했지요."

'음악성'이라는 대목에서 진지하다 못해 엄숙해진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는 아직 문짝이나 필통을 두드리던 개구쟁이 시절의 장난 끼가 번득거린다. 원일은 그처럼 명랑한 소년으로 자랐고 성적도 점차 올라갔다. 가장 큰 행운은 중학교에서 밴드부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중학이 아닌 밴드부에 진학한 셈이었고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했다. 쇠파이프를 불다가 만난 클라리넷은 너무 매혹적인 악기였기에 입이 붓도록 불어댔다.

"어느 날 국악고에 다니던 밴드부 선배가 놀러 오기 전까지는 클라리넷보다 좋은 악기가 세상에 없을 것 같았어요. 그 선배가 단소를 가지고 있어 불려 해도 너무 어려웠어요. 클라리넷보다 작은데다 구멍도 5개뿐인 간단한 구조여서 만만히 보았는데 말입니다."

선배에게 단소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자 아예 국악고에 놀러 오라고 했다. 남산의 국립 국악고를 놀러 간 그는 비로소 '국악'의 존재를 깨닫고 놀랐다.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소리를 내기 좋아했다지만 그에게 국악은 외국 음악처럼 멀고도 낯선 음악이었다. 국악고 출입이 잦아졌고 졸업 후에는 아예 식구로 들어갔다. 중학 시절의 클라리넷과 가장 가까운 피리를 전공했다. 그러나 어려서 국그릇을 때리던 그에게 타악기는 남일 수 없었다. 국악고에서 사물놀이를 지도하던 사물놀이의 쇠잡이 김용배(작고)는 개구쟁이부터의 쇠잡이를 알아보았다.

"선생님에게 쇠를 배우자 뭔가 고향에 오는 기분이었지요. 그때는 집이 다시 응암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학교가 끝나면 남산에서 집에까지 걸어가며 손바닥을 치며 연습을 했지요."

오른손에 채를 들고 장갑 낀 왼손을 때려 장단을 맞추면서 집에까지 가다 보면 두 시간이 짧았다. 그가 악기를 익히는 과정은 '피나는 수련'이라기보다 '즐거운 놀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것은 대학 입시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서울대 음대의 시험관들은 김용배와는 달랐기에 그는 진로를 추계예술대로 돌렸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라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추계예술대에 진학할 때는 기분이 상했으나 결과적으로 행운이었습니다. 장학생이 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학교에 빠지지 않고 자유롭게 문화 현장과 친할 수 있었거든요. 입학하자마자 친구들과 '소리 사위'그룹을 조직한 것도 그런 거지요."

대학에 들어간 1986년은 군사 정권의 말기로 대학가가 온갖 시위로 시끄러울 때였고 그는 공연을 통해 이에 참가했다. 신경림의 장시 '새재'를 음악극으로 공연한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곡에도 손을 대게 돼 그의 대학 시절은 여러 가지로 바빴다. 물론 학업에도 열심이었고 고교 시절부터 불던 피리도 놓지 않아 90년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상도 기뻤지만 그 부상 격인 군 면제는 그에게 3년의 시간을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계속 문화 현장에서 뛰다 93년에는 본격적인 타악 그룹 '푸리'를 창단했다. 사물놀이에 바탕을 두고 외국 음악을 수용한 것이다.

"그룹 활동을 할수록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반응도 좋았어요. 그래서 94년에는 아예 중앙대 대학원 작곡과로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지요."

바로 그 해 서울 무용제에 출연작 '족보'의 작곡으로 음악상을 받았다. 이듬해는 문예진흥원이 주최한 가을 신작 무대 최우수 작곡자로 선정됐다. 작품은 '꽃상여'. 그가 영화음악 작곡에 손대게 된 것은 장선우 감독이 영국 영화 연구소(BFI)의 의뢰로 한국의 영화사를 정리한 다큐 물 '한국 영화사 씻김'의 작곡을 부탁해서였다. '씻김'으로 만난 장선우는 95년 '꽃잎'의 작곡을 부탁했고 그 곡으로 이듬해 대종상 음악상을 받는다.

그는 상과 함께 '영화 음악가'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었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에도 음악은 있었으나 영화 음악가는 없다시피 했다. 그는 무인지경 같은 영화 음악계를 질주하듯 '강원도의 힘'(홍상수 감독)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이재수의 난'(박광수) '링'(김동빈)의 곡을 지어 넣었다. 지난해는 '아름다운 시절'로 대종상 영화 평론가상 춘사상의 음악 부문을 휩쓸었으니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는 그에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96년 겨울부터 1년 간 그는 미국의 UCLA 민족 음악학과 객원 연구원으로 비교 음악학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각종 음악에 관심을 가진 그에게는 세계의 음악을 폭넓게 공부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문예진흥원의 최우수 작곡자가 돼 이를 이룬 것이다. 상으로 군복무를 면제받고 거기서 얻은 세월을 상으로 유학했으니 상복이 터진 인생이다.

"외국에 가면 갈수록 한국의 젊은이들이 외국에 자주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느 부문에서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우월감이나 외국 것을 무조건 경계하는 것은 우리를 낙후하게 할 뿐입니다."

양악만을 중시하고 국악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안되나 지나치게 국악을 내세우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국인이 하는 음악은 모두 한국 음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 전통 음악보다 그것에 바탕을 둔 창작곡을 들려주면 외국인들이 더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UCLA 시절 그는 창작곡집을 구상하여 97년 음반을 내놨다. 한국의 전통 음악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모든 음악과 악기를 동원한 이 음반의 이름은 엉뚱하게 '아수라'. 아수라(阿修羅)는 흔히 수라장이라는 말과 상통한 불교 용어로 그가 본 우리 사회였다. 아직 선진 사회의 꿈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리 사회에 개구쟁이 티를 벗어나지 못한 그가 던진 묵시록이었다.

"끊임없이 세상을 삼키려고 하는/ 이 공간에는 찬란한 자본의 흔적만이/ 헤매이는 발길은 자신을 파괴하고/ 숨막혀 오는 열기는 모두를 미치게 만들었어/…"

음반이 나온 지 한 달만에 IMF가 터져 한국 사회는 수라장이 됐고 그의 묵시록은 적중했다. 그렇다고 음반이 IMF불황을 피할 수는 없어 그는 돈 대신 우리 음악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잘 나가는 음악인이자 아직 개구쟁이같이 명랑한 그의 인생에서도 80년대의 대학가의 최루탄 냄새는 지워지지 않고 있음도 드러났다.

그렇다. 한국인이 하는 음악은 모두 한국 음악이다.

2 # Wonderful Days[ | ]

[김작가의 음담(音談) 악담(樂談)]

'원더풀 데이즈' O.S.T (원일) - 영상 충실하게 뒷받침…한국 영화음악의 새장

영화 뒤에서 구슬프게 흐르던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원일이란 이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성우 음악감독과 더불어 한국 영화 음악의 양대 축이며 전방위 음악인인 원일은 <원더풀 데이즈>의 영화 음악을 맡아 놀랄 만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원더풀 데이즈> OST는 한국 영화음악의 새로운 전환점이다.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 영화의 OST를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외국의 한물간 가수의 노래를 싼값에 사와 싣거나 너무나도 관습적인 배경음악들로 상영시간을 메웠다. 그다지 기억나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음악들이 OST란 명목으로 발매되고 또 외면 받지 않았던가.

원일은 그 동안 인디 밴드인 어어부 프로젝트의 초기작과 자신의 독집 앨범 등을 통해서 동서고금의 음악들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새 음악에 대한 실험을 꾸준히 해왔다. 그 원일은 최근 많은 화제가 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의 영상에 황홀한 음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 A Prayer >, <마르의 테마>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메인 테마까지. 원일이 그 동안 선보였던 음악과 새로운 시도들이 치열하게 결합하여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를 높여줌은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가 창출해내는 시너지 효과마저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원일이 그 동안 어느 한 쪽의 음악에 편향되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과 영감을 구현하는 음악적 탐색을 해온 결과물이다.

이 앨범에서 대중적으로 매력적으로 들릴만한 곡은 러브홀릭의 강현민이 작곡한 일 것이다. 엔딩 타이틀이기도 한 이 노래는 두 장의 걸작 앨범을 발매한 뒤 해체해 대중음악의 전설이 되어 버린 유&미 블루의 이승열 목소리를 오랜 만에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원더풀 데이즈>는 분명히 많은 논란을 빚을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논란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성과 중의 하나는, <로보트 태권V>처럼 단지 주제가만 기억 나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작품 전반에 걸쳐 영상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영화 음악임이 틀림없다.

김작가. 대중음악만담가. <mailto:antirite75@hanmail.net> 2003.07.26 18:39 입력

3 # 연합인터뷰[ | ]

"음악극 집단 `바람곶'을 창단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원일 교수" - 김경희 기자

"음악은 더 이상 무대의 중심이 아닙니다. 연주 중심의 음악 활동은 활기를 잃었구요. 전통 음악이 공연 예술에서 현대적인 장(場)을 획득할 수 있는 활로를 모색해야 합니다"

창작 집단 '푸리'의 대표로서 전통 국악과 현대 음악을 결합한 '퓨전 국악'을 선보이며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 음악 활동을 펼쳐 온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원일(36) 교수가 이제까지의 활동을 정리하며 제2의 음악 활동의 시작으로서 음악극 집단 '바람곶'의 창단을 선언했다.

"음악극이란 'music theatre', 즉 음악이 주가 되는 총체적인 공연 양식을 의미합니다. 현시대는 오감을 구분하는 근대적 공연 양식에서 벗어나, 고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우리의 전통이 '광대'들의 한 판 놀음이지요. '바람곶'은 철저하게 전통 음악을 기본으로 시, 노래, 연기, 춤, 드라마, 영상, 조명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는 무대를 선보일 겁니다. 제대로 된 '광대'들의 연희를 목표로 하는 셈이지요"

원 교수가 '음악극'이라는 생소한 시도를 감행한 데에는 무대 음악을 만드는 데서 느낀 한계와 전통 음악의 현대적 활로 모색이라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외부 프로덕션에서 의뢰 받은 작업을 하다 보니, 다 만들어진 작품에 음악만 만드는 것 밖에 안 되더라구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여건상 할 수가 없었지요. 이제는 제가 원하는 종합적인 공연을 선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전통 음악의 내부적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고 느꼈구요. 오늘날 전통 음악이 문화 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비하고 그나마 정체되어 있습니다. 전통 음악이 현대성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데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게 절실합니다. 제 작업도 이러한 시도 가운데 하나구요"

그런 의미에서 '바람곶'은 완결된 전통 음악을 대본으로 하는 공연을 선보임과 동시에 그 안에 다양한 시도를 녹인 '잡종(hybrid)'으로 거듭날 것을 추구한다.

"바람곶은 기본적으로 음악적 완벽성을 지양합니다. 완성된 악보를 대본 삼아 공연이 구성되는 거지요.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양식으로서 현대음악이나 연기, 춤, 노래 등의 요소,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와 같은 다양한 연희 형태, 갖가지 무대 기법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하니까 '바람곶'의 성원들은 국악, 서양 악기를 두루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무대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재능이나 기교보다는 맑고 건강한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면서 철저한 워크숍을 거치며 작품이 연희자 개개인의 내면에 스며들어,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현될 때 비로소 한 작업이 완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원 교수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바리 설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다.

"원래는 '바리'를 주제로 한 교향곡을 써 볼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너무 낡은 개념이더라구요. 사실 '바리 설화'는 보편적인 탄생 설화라서 국제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쉽고, 그만큼 서사도 강한 작품이잖아요. 음악극에 제격인 소재지요. 곧 문헌 자료 검토를 시작으로 작업에 착수할 계획입니다"

"광주에 첫 번째 워크숍 위한 연습실까지 잡아 놨다"는 원 교수는 "아직 구체적인 성원이 결정된 상태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국제무대 진출을 염두에 두고 강도 높은 준비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3/09/01 11:24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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