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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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관련자료:없음 [ 2828 ] 보낸이:정철 (zepelin ) 1998-09-25 01:27 조회:69

난 술을 안좋아한다. 다들 알다시피.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맛이 없다. 특히 쏘주는 너무 쓰다.

어렸을 때는 파를 안먹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먹는다. 파에는 파의 맛이 있고 그것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술도 즐기게 될 날이 오려나? 게다가 너무 비싸다. 술은 그렇다쳐도 안주를 보면 시디가 생각나서 맘 편 하게 못먹는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한 일년 놀다보니 여러 주('색'은 빼자) 잡기를 형들과 즐기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술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함과 더불어 지금까지 인간을 따라다녔다.

머리로는 알고있었다. 사람들 사이는 술이 있어야 돌아가는 거라고.
그리고 입학후 술을 먹어보면서 사람들 사이의 윤활류로는 술만한게 없다 는 것을 알긴 했다. 그래도 뭔가 뼈저리게 느낀적은 없었다. 난 술을 먹으 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술자리의 타인이었던 적이 많았거든.
아마 이런 감정 알거다. 뭔가를 하고 있지만 거기서 자기를 포함하여 그 자리를 객체화 시키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논평하고있는 자신을 느끼 는 감정 말이다. 그런 감정을 하고 있던 때가 많았다.

그저께 졸업사진을 찍었다. 오마이갓. 빨리 졸업해야지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세상에 벌써 졸업이라니 아찔하다. 졸업논문 발표도 끝나고 사진도 찍었다고 술을 먹기로 했다.

그래서 95학번 한 열명이 모였는데 처음에는 그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고기 를 구워먹었지만 그다지 흥이 나질 않았다. 어쨌거나 같이 사진찍은 물주를 하나 부르기로 하고(93이었다) 우리는 호프집으로 갔다. 역시 처음에는 그 다지 흥도 안나고 술도 천천히 먹고 교수님 뒷다마나 까면서 놀고있었다.
약 먹고 하는 놈들이 둘이나 있어서 이놈들이 술을 잘 안먹었던 거다. 나도 좀 뺐고.

어쨌거나 3000두개를 비우자 물주가 왔다. 다들 안도감에 찬 표정으로 그 를 환영한 뒤 본격적으로 비우기 시작했다. 두어놈이 이날의 리더였다. 잔을 들면 결코 비우지 않는적이 없었다. 이놈들이 먼저 퍼마신 뒤 잔을 주면 이것을 피하기란 힘든 것이다. 술이 주는 동지감이란 일종의 고통공유가 아닌가싶다. 먼저 먹은 놈이 잔을 주고 그걸 먹어주는것.

그런 일도 있었다.
삼수한 놈이랑 휴가나온 군바리랑 다른 친구 하나랑 술을 먹었는데 삼수 생이 군바리랑 술 들고 마셔!하면 피할 재간이 없다. 머뭇거리다간 '이 개*끼 내가마시는데 니가 빼? 친구냐?' 그러면서 지들끼리 '에이 씨*'이러고 마시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5-6000가까이를 마셨다.
술이란 그런것이다.
그리고 그날 산 Portishead의 Dummy를 들으면서 집에 왔는데 죽여주더만.

이렇게 시동이 걸린 우리는 좀 넓은 자리로 옮겼다. 세 박씨(우리과 박씨 세명은 막나가고 잘 노는걸로 유명하며 모두 올해 졸 업불가다..^^)가 늦게 오자 우리는 뭐 암말 않고 비우다 만 피쳐를 주었고( 한 1500정도 있었다) 엄살을 피우던 그놈들은 각자 알아서 그정도를 두세샷 에 해치웠다(원샷에 비우면 인간이 아니다).

이것으로 유쾌한 시간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온갖 옛날얘기를 다 꺼내가며 낄낄대고 퍼마시고 주거니받거니 했 다. 그리 친하던 동기들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동기였고 야외조사가 많은 우 리과는 더욱 이야깃 거리가 많아서 별별 얘기들을 다 했다. 간만에 술자리 자체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고 온 놈(그놈은 알콜 리더중 하나였다)이 있어서 갖은 포즈를 다 찍어가며 술상 위에서 굴렀다.

그날의 대단원은 노래방 가기 직전의 파도였는데 내 잔이 없어져서 다른 놈들은 맥주잔이었는데 난 500잔으로 원샷을 하게 되었다. 머리 깨지기 직 전이었는데 도저히 피할 수 없어서 그걸 마시고 모두 함께 나왔다. 배불러 서 맥주가 목구멍 너머로 나오려고 했다.

어쨌거나 그 선배가 배를 쨋다.

비록 삐리리했지만 우리는 본격적인 데모를 겪은 마지막 세대이다. 95년 전노사면반대투쟁과 96년 연대항쟁때 참여한 학번이었고 그래서 운동권노래 들 한두곡쯤은 다 안다. 난 술먹고 그런 노래 부르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 는데 그것을 너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때문이었다. 대학생들이 그러는 건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고 단지 대학문화일 뿐이다.

하여간에 우리는 흥에 겨워서 '철의 노동자'(내 주제곡이다)와 '자연대 학 생회가'를 불렀다. 내 생각인데 아마 대학생활의 마지막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노래방에 갔는데 나는 '사랑할수록'을 부르고 잤다. 이 망할자식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죽어라 부르더만. 그리고 디비 자는 나를 둘러메고 친구놈 하나가 자기 집에가서 버렸다. 이걸로 그날 일은 끝이다.

중요한건 여기부터다.

술을 정말 즐기는 인간도 있긴 있는듯하다. 하지만 술은 사람들 사이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좀 어처구니없는 동지감을 만드는데 정말 그만이다. 이것이 이나라를 이모양 이꼴로 만든 학연 지연의 원흉인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 이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이 외국보다는 우리 나라에서 편안하다는 감정을 갖는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과에서 술안먹는 모임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영화 소모임이었는데 영화를 보고 각자의 느낌을 말하는 모임으로 영화보 고 전통찻집 같은데서 얘기하는 것이다. 그때만해도 술이 싫다라는 생각을 더 많이했었고 노알콜모임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술 안좋아하는 여자애 들(우리과 96여자애들은 유례없이 이쁜애들이 많았다)을 꼬드기는데도 성공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좋았는데 애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모임은 정이 없대나? 어찌어찌하여 일년이 지나자 한 둬놈 빼고 딴 모임으로 갔다. 그 둬놈은 성실한 놈들이었고 개인적으로 친한 애들이기도 했다. 이론상의 문제는 그다지 없었다. 단지 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것 뿐이었다.
나는 생활에 쫓겨 같이 만든 친구놈에게 팽개치고 딴 일하러 돌아다녔는데 결국 다른 학회처럼 친알콜모임이 되었다.

아직 술맛을 모르지만 조금씩 알게될것 같다. 그저께의 술자리는 정말 유쾌했거든. 다들 그러더라...그래도 동기가 최고야라고. 최고까지는 아니지만 동기들은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래도 많이 마시는건 삼가해야지.

August 8, 2001 (00:58)

2 # 한줄잡담[ | ]

  • 진짜순수소녀  : 요즘 술을 많이 마신다. 회사동생이랑, 회식자리에서, 그리고 집에서 혼자.이유는 사귀면 안될사람과 사귀기 때문. - 2005-7-13 11:38 pm
  • LongWarm  : 술은 써서 싫어. 특히 소주는... 난 여전히 아이인가?... - 2004-10-9 8:51 am
  • 노영아  : 산 정상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정말 시원하고 맛있는데. 밤샘 촬영하고 마시는 소주도 참 쓰지만 몸을 달게 하는데. - 2004-10-9 12:23 am
  • 거북이  : 나는 드디어 500 한잔도 제대로 못먹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소주 한잔도, 맥주 한잔도 왠만해선 안마시려고 하는 참이다. - 2003-10-9 1:37 pm

3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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