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쇼쇼

  다른 뜻에 대해서는 쇼쇼쇼 (2002)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ISBN:8984983446
  • 저자 : 이성욱
  • 원제 :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생각의 나무, 2004)

1 # 쇼쇼쇼[ | ]

실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대중문화’라고. 엄마 자궁의 양수를 헤엄치던 시절에서부터, 엄마가 틀어놓은 대중가요를 같이 듣고 아빠가 듣던 야구중계를 같이 들었다. 엄마 아빠는 다행히(?) 문화 귀족이 아니었다. 따라서 진작 클래식이나 골프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두고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간적 인지(認知), 즉 IQㆍEQ 같은 것이 한창 자라나던 다섯 살 때도, 열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에는 늘 라디오나 ‘테레비’(’텔레비전’이 아니다.)가 켜져 있었다. 그래서 그 싱싱하던 머리로 온갖 성인용 노래들과 테레비 드라마 속 이야기들을 외고 가슴에 새겼다. 그 의미는 물론 논리적으로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거기 묻은 삶의 파토스는 아이의 뇌리 깊은 곳에 무정형으로 남았다. 아동용 노래나 이야기야 굳이 따로 외고 새길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들은 비교적 단순 간명하니 한번 들으면 그냥 다 아는 거 아닌가.

사춘기 때와 고교생 시절엔 취향의 분화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겠다. 누구는 팝송이나 심야 음악 프로를 열심히 들었고, 누구는 야구장 혹은 극장, 혹은 ‘나이트’에 더 열심히 다녔고, 또다른 누구는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파거나 드디어 ‘술집’이란 곳에 출입을 시작했겠다. 불같은 열정, 혹은 은밀한 기쁨 속에 맛보고 행해진, 이 모든 과정은 내 과거인 동시에 당신의, 그리고 거의 모든 우리의 과거지사이다. 전기가 안 들어와서 테레비가 네모반듯한지 어떤지 모를만한 산간벽지에서 소년기를 보냈거나, 아비가 옥스브릿지 출신이라 이튼스쿨 같이 ‘천한 것들’과 격리된 특수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한 말이다.(심지어 강원도 오지나 이튼 출신이라 하더라도 ‘대중문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

요절한 문화평론가 이성욱의 유고집 <<쇼쇼쇼-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생각의 나무, 2004)는 특정한 시대의 대중문화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 어떤 ‘실존적, 문화적 과정 속에서 삶과 성에 대한 지배적 통념, 스타일, 취향, 미학 등을 키워왔는가?’(83쪽)를 성찰하고 있다. 즉 회고를 통해 대중문화에 관련된 나의 아비투스와 우리의 아비투스를 추적하여 객관화한다. ‘나’는 시대의 대중문화가 키우고 구성한 취향과 이데올로기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이를 깊이 들여다보고 솔직히 말하는 작업은 자체로 흔치 않다. 제목에서 드러나 있듯 시대의 문화와 자아를 교호작용하게 하는 매개는 주로 ‘세대’로 코드화되어 있다. 이성욱의 세대를 키운 유모들은 , 김추자, 에 ‘게다가 긴급조치’이다. 이들은 1970년대 초반에 전성(全盛)을 누린 총아들로서 1960년 이쪽저쪽에서 태어난 세대들의 아련한 문화적 행복의 추억과, ‘안 좋은’ 정치적 기억의 원질(原質)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디 ‘나를 키운 팔할’만 대중문화인가? 그 힘은 팔할 이상일 뿐 아니라, 지금 당장 먹고 호흡하고 입고 걸친 팔할도 대중문화다. ‘이즈막’(이성욱이 즐겨 쓴 표현이다.) 대중문화는 사실 문화 전체이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같은 원론(?)에서는 근대 초에 민중(민속)문화-고급문화-대중문화가 삼정립했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장악하기 이전, 그리고 신문 라디오 극장 ‘테레비’ 같은 것이 발명되기 이전의 서구에서야 그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사가의 머릿속에 있는 짧고도 원론적인 과거일 뿐이다.

인프라가 갖춰지고 대중이 나타나자말자, 실로 거대하고 복잡한 대중문화와 단순하고 한줌 밖에 안 되는 고급문화가 병존해왔다. 특히, 조선의 귀족문화가 매우 급격하게 죽음을 맞고 그보다 더 오래된 아래로부터의 민중문화 전통이 밀려든 외래문화의 간섭 하에 놓임으로써 한국의 고급문화는 지배권과 독자성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각 장르 마다 고급문화는 겨우 겨우 서구화된 형태로 새롭게 개발되었지만 그것은 끝내 통(通) 혹은 간(間) 장르적이지는 못했다.

예컨대 롯데자이언츠 팬이면서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좋아하고, 오페라 공연장에는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소설은 마르께스나 도스도예프스키 것이 아니면 읽지 않는가 하면 이효리 동정이 실린 스포츠신문을 탐독하다가 <파리의 연인>을 보고 감동먹는다. 참이슬 소주에 삼겹살 먹고, 하이네켄 맥주로 입가심 하고, 노래방에 가서 꼭 신승훈 노래를 불러 술을 깨고, BMV를 몰고 사라진다.

이렇게 분열적인, 턱없이 넘치거나 부족한 취향과 잡종적 행동의 비완결성이 대중문화적 현상이다. 그것은 비단 ‘대중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 문화의 전체적 양상이다. 실로 ‘이즈막’ 문화는 곧, 대중문화다. 그것은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 문화 전체라 해도 된다.

그런데, 대중문화가 갖는 복잡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격적인 의미의 한국 대중문화사 같은 책이 한 권도 안 씌어졌고 쓸 능력을 갖춘 필자도 거의 없다면 믿겠는가? 몇 년 전에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현대 대중문화의 형성>>을 보고 ‘앗 이런 책이 있었구나, 근데 왜 이런 책이 있다는 얘기를 아무도 안 해줬지?’ 하며 목차도 안 보고 그냥 기뻐서 샀다가, 집에 와서 본문을 펴보고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거품을 물며 쓰러졌던 기억도 난다. 그 책은 세상에나, ‘1920-30년대 미국 대중문화 형성과 사회적 효과’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던 것이다, 속지에는. (하긴 미국 현대 대중문화의 형성은 한국 대중문화사에도 아주 중요하기는 하다.)

이성욱이 너무 일찍 세상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한국 대중문화사를 쓸 수 있는 유력한 필자 후보 한 사람을 잃은 것이다.

<> 2004년 10월호--;; -- Hicnunc 2004-9-15 12:27 am

2 # 촌평[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