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인터뷰2003

1 영화 살인의추억의 봉준호 감독 인터뷰 part 1 '추억하는 방법에 대하여'[ | ]

편자 주> 살인의추억과 봉준호 감독은 2003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등 국내의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감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올해 서른다섯을 먹은 봉 감독은 단 2편의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 인터뷰는 <살인의 추억>이 대박 행진을 해 나가던 2003년 5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글은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part 1은 <살인의 추억>에 대한 폭발적인 관객의 반응을 영화 수용의 세대론과 결부시켜 다룬 글이다. 88학번 동갑나기인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대화 속에 ‘80년대’가 조명을 받는다. (...)

2 # ... <살인의 추억>, 어떻게 보셨나요 ; 화성 연쇄 살인범 찾기와 ‘촛불 시위’[ | ]

대단한 텍스트가 만들어졌다 했다. 4백5십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이 영화를 누구든 보지 않고 못 배기고, 본 뒤엔 ‘미치도록’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고 못 배기게 되었다 했다. 비평가와 일반의 상찬을 함께 받기로는 이후 처음이라고도 했다. 모두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자 영화의 모든 것이 관심거리가 되었다. 살인의추억 홈페이지에는 ‘진범’을 추리하는 관객들의 상상력 넘치는 글들이 넘쳐나고,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재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한다. 기발한 유머, 머리를 쓰게 만드는 추리, 강간과 시체에 관련된 엽기 코드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매끈하게 직조된(well-made) 플롯,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은 어떤 영화나 소설이 성공하기 위한 일반적인 필요요건들이다. 그러나 다양한 계층에 속한 여러 성향의 영화 관객들을 한 번에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텍스트의 결은 이런 일반적인 요소보다 훨씬 더 두터울 것이다. 무엇이 영화를 ‘여러 겹’으로 만들고 있는 걸까?

[봉준호 감독] 남자 고등학생들이 재밌게 본다는데 저도 그게 이상하더라구요. 영화가 우충충하고 옛날 것들만 나오잖아요. 영화사 기획실 직원에게 물었더니, 고등학생들 의견을 모니터 해보면 걔들이 ‘분노’에 쉽게 빠져든다고 하더라고요.
분하다! 저 나쁜 범인, 개새X를 잡아야 된다.’

관객들이 범인 추리하기에 열 올리고, 재수사를 요구하는 것은 영화 후반부에서 형사들의 절실한 연기가 절실하게 관객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극히 시의적인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런 반응은 여러 겹인 관객들 중 20대 초~10대 후반 남성관객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분노’를 느낀다고 하데요. ‘저런 나쁜 새끼를 왜 못 잡냐? 우리가 나서자...’ 예를 들어 작년부터 인터넷에서 그런 체험들이 많잖아요.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라든가, ‘붉은 악마’라든가. 뭔 일이 있을 때 인터넷에서 능동적으로 모이고 일을 하는 벌이는 말이죠. 아마 화성 사건도 실제 사건이다 보니까.

그들의 반응은 ‘촛불시위’와 관계있었다. 부녀자들이 잇달아 강간당하고 살해된다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하다. 그러나 그 ‘분노’할 소재는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마련된 것이다. 1주기를 맞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도 지극히 한국적이며 동시에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건이다. 그보다 더한 ‘범죄’로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살해당해왔고, 한국전쟁 때는 이라크에서 그랬던 것보다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미군의 무기로 학살당했다. 미군이 주둔하는 이상 앞으로도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그러나 2002년이 다른 해보다 훨씬 더 오래 기억될만한 것은, 그 ‘분노’가 매우 새로운 방법에 의해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여태 없었다. 자발적으로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고 게시판을 통해 넷망에서 ‘분노’는 그야말로 삽시간에 번져나간다. 어느 순간 넷망의 ‘시민들’은 광화문 거리를 메우는 실재하는 군중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고 바꾸려 시도한다. <미선이 효순이> 일에서 보듯 그렇게 군중을 움직이는 힘은 매우 ‘단순하고 강렬하게’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다. (*주)

‘여러 겹’인 관객들, 수용의 세대론?

그 젊은 관객들의 반응이란 묻는 자에게도 의외였다. 나는 거의 ‘분노’를 못 느꼈으며 감독이 영화에 섬세하게 장치한 ‘80년대적인 것’을 어떻게 20대 관객들이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다분히 세대론적인 흥미와 의아함을 동시에 가졌었기 때문이다. 80년대에 ‘태어난’ 그들은 그 시대 일상의 분위기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처럼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사건 자체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00학번인 순이의 여자친구는 ‘그냥’ 송강호가 너무 재밌다고 했단다. 99학번 선이는 ‘등화관제가 왜 80년대의 상징인지’ 내게 물으며 ‘등화 燈火가 한자어냐’는 질문을 곁들였다. 그러자 98학번이라 ‘단순하고도 강렬한 분노’에 빠지기에는 이미 나이가 좀 많다고 할 수 있는 창이는 문제를 느끼고 회원용 게시판에서 이렇게 적절히 지적한 바 있다.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뭔가 핀트가 어긋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꼬맹이였기 때문에 추억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80년대에 대한 옛 기억은 희화화의 대상으로써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더 강조되어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이 생긴다는 거죠.”

그랬다. ‘분노’하지도 못했지만 관객들이 웃는 대목에서 별로 웃음도 나지 않았다. ‘무모증’ 환자를 찾아다닌다든가, 사람을 발로 짓밟기 위해 워커에 봉지를 덧쓰는 등등의 어처구니없는 형사들의 행태는 ‘희화(戱畵)’이긴 했지만, 지나가버렸어도 ‘웃음거리’는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데에는 분명 ‘세대론’이 껴들만하지 않은가.

[봉준호 감독] 사실 80년대에 집착하고 그런 것은 우리들만의 감각일 수 있어요. 논자들이나 평론가들이나 나도 인터뷰를 하다보면 그 이야기가 꼭 나오지만요.

(주) 한편 ‘분노’를 느껴 그것을 웹상에서 표현하는 방식이 단지 ‘촛불시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차원을 넘어선 관객들도 있다. 어떤 네티즌들은 사건 자체의 경과를 관찰한 뒤 ‘지문 확인이 안 되며, 힘이 세고 수법이 세련되며, 양심의 가책도 없기 때문에(!)’ 화성 사건의 진범이 ‘미군’이라는 추리를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네티즌들의 상상력이란 때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3 ... 당신은 어디 있/었/어요?; <부천 성고문 사건> vs [ | ]

80년대를 통과하고 그 시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본’ 또는 ‘생각해온’ ‘80년대적인 것’과 그의 것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대조해보고 싶어진다. 그것은 한편 아직도 가슴 속에 남은 20대의 불도장을 어루만져 보는 일이며, 다른 한편 ‘현실’의 요청을 꽤 유치한 패거리의식이나 세대의식으로 바꿔놓는 정신의 작업일 수도 있다. ‘386’세대는 당분간 더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봉준호 감독에게도 그랬다. 더구나 그는 나처럼 ‘88학번’이라 했다. 영화에는 1980년대의 정치사를 기억하게 하는 신문 기사들과 뉴스 화면들, 그리고 당시의 ‘일상사’를 재현하기 위한 문화적 아이콘들이 섬세하게 ‘삽입’되어있다.

[봉준호 감독] 일상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이 분리될 수 없다고 봐요.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는 자료 속에만 있는 시대이지만 80년대는 자료도 있으면서 내가 직접 민감하게 살았던 시대니까 ‘일상’과 ‘거시’는 다 뒤섞여버려요.
옛날 신문 본 적 있어요? 어떤 한 사건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상들의 모자이크죠. 실제로 ‘86 아시안 게임 개막’이라는 큰 기사 밑에 바로 ‘화성에서 세 번째 시체 발견’이 병치되어서 나오죠. 그걸 한 눈에 보면 그것 자체가 영화의 톤하고도 비슷한 거죠.

그리고 <살인의 추억>을 통해 봉준호 감독도 의 감독이나 문부식 씨처럼 ‘80년대적인 것’에 대한 유력한 해석자가 되었다.

그런데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왜 을 통해서 해야 했는지? 사실 단언컨대 화성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별로 안 중요했다. 다른 더 중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강력계 형사들조차 살인사건을 버려두고 시위 대학생들을 쫓아 다녔듯, 변태성욕자(?)가 저지른 듯한 개인적인(?) 엽기 범죄보다, 군과 경찰, 즉 정권이 ‘노동자ㆍ민중’과 학생을 상대로 저지르는 집단적 범죄가 더 중요했다. 그들이 그들을 ‘백주대낮에’ 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 당시에는 일반인들이 가진 느낌밖에 가진 게 없었지. 물론 그때도 나중에 크면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지만 이걸 영화화 하겠다 하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었고.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제 고2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때까진데, ‘야, 한 동네에서 계속 죽냐? 무섭다.’ 이 정도였지 우리의 기억에서 다 잊혀졌잖아요.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86년은 그야말로 또다른 죽음의 해가 아니었나. 그해에 송철순, 이경환, 김성수,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박혜정 등이 의문사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형사 문귀동은 86년 6월에 여대생 권인숙을 강간했다. ‘5.3 인천사건’에 연루된 좌익학생을 찾아낸다는 수사를 명분으로, 화성에서 고속도로를 타면 한 시간 내에 나타날 부천 ’경찰서‘에서. 어이없게도 대한민국 사법 기관은 사건을 폭로한 측을 오히려 비난했다. 성(性)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다며. <살인의 추억>이 사건을 80년대의 ‘성-정치’로 재해석했다면, 부천서 사건이야말로 당대인들에게 각인된 ‘성-정치’의 징표였다.

동원되다 하나씩 죽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또는 ‘추억된’ ‘80년대적인 것’에 대해서, 또 그 ‘영화적’ 처리의 적절함에 대해서 사실 봉준호 감독은 여러 차례 질문을 받았고, 여러 차례 비슷하고도 다른 방식으로 답했다. 그날 인터뷰 자리에서도 감독은 자신의 ‘해석’을 ‘변주 變奏’했다.

[봉준호 감독] 제일 핵심적인 시대의 이미지는 ‘동원’이예요. 한복 입은 여고생들, 시위진압 전경들도 결국 ‘동원’된 거고, 민방위 훈련을 중요하게 쓴 거도 그것 때문이에요. 등화관제는 영화적ㆍ시각적으로 중요했죠. ‘빛과 어둠’. 훈련이 어둠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거니까 영화적이잖아요.
80년대 모티프 중에서 등화관제가 나한테는 중요했고 그 속에서 여중생이 죽어가는 것부터 모션이 떠올랐어요. 여중생 피살사건 경우 실제 ꡐ민방위 날ꡑ에 발생했어요. 어둠 속에서 여중생이 죽어갔다는 것.
행사에 동원된 여고생들도 그랬겠지만 국가가 걔네들을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국민, 여고생까지 뭘 해야한다, 이런 상태였고 모든 것이 그랬던 것 같아요. 중ㆍ고등학교 때 맨날 전국체전이니 아시안게임이니 뭐니 불려나가서 청소하고 줄서서 그런 것하고 그랬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닌데.

‘떼거지로 동원되어 몰려다니는 동안 하나씩 죽는다’, 그러니까 감독의 머릿속에는 ‘전체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대립(혹은 통일?)’의 이미지가 있다. 사회는 대단히 전체주의적이며 폭력적 규율로 유지되는데, 문제의 사건은 극히 개인적인 ‘변태적 취향’에 근거한 ‘성’범죄이자 일탈이다. 봉준호의 말대로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인간이 ‘개떼처럼’ 타의로 동원되기 십상이었다. 무엇보다도 86년과 88년의 국제 스포츠 대회가 그랬다. 아마 전두환에게는 ‘국민’들이 모두 자기 사단 병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운동권이 쓰던 은어 중 ‘빌한다, 모빌한다 mobilize’는 말을 기억하시는지? 군사 정권뿐만 아니라 운동권도 사람들을 ‘동원’했다. 시위ㆍ집회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필요했고, 여러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곧 정권에 맞서는 대항이 ‘도덕적’이라는 점을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봉준호 감독] ‘강제성’은 없었지만 꼬시기는 했죠. (웃음) ‘얘, 나랑 같이 어디 가지 않을래?’‘너, 롯데백화점 가봤니?’ 하면서. 종로 3가에 많이 나가서 모였죠.

‘폭력의 나날’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차츰 짜증스러워졌다. 내가 영화에서 본 ‘80년대적인 것’은 ‘일상적 폭력’, 또는 ‘폭력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사정없이, 그리고 너무 쉽게 서로를 때린다. 형사가 피의자와 같이 한 그릇에서 자장면을 먹는다. 그러다 문득 형사가 피의자를 매몰차게 구타한다. 동료 형사들은 자기들끼리 때린다. 같이 술 먹다가 수사하다가.

나를 가르친 80년대의 중ㆍ고등학교 선생들 중 몇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폭력을 행사했다. 그 중에서도 중2 때 담임에게 ‘엎드려 뻗혀’ 자세로 각목으로 맞은 열 몇 대, 고2 때 자습 시간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맞은 석 대의 뺨따귀는 가해자들의 얼굴과 더불어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 몇 번 이외에도 선생들에게 많이 맞은 내가, 자잘하게 얻어맞은 일들을 도무지 기억도 못 하고 맞을 때도 폭력이라 느끼지 못했다는 데 있다. 80년대에 우리는 학교에서뿐 아니라, 술집ㆍ군대ㆍ경찰서ㆍ검찰청에서 너무 자주, 또 많이 맞지(때리지) 않았나? 원래 인간이란 그렇게 많이 서로 맞고 때리는 건가?

영화의 인물들도 계속 서로 치고 받는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다. 머리통에 쉼 없이 가해지는 생각 없는 손길들은 마치 내 머리통을 내리쳤던 선생이나 고참들의 주먹인 것 같았고, 시도 때도 없이 ‘피의자’들에게 날아든 형사들의 발길은 89년 어느 가을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당한 백골단의 옆차기를 기억나게 하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영화에 ‘동일화’되어갔다.

영화 후반부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뉴스를 배경으로 하여 대학생들과 형사들이 싸우고, 와중에 늘 맞던 백광호가 못 박힌 각목으로 형사를 쳐 복수한다. 영화를 보다 나도 그 폭력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는 마음이 불편하기는커녕, 통쾌ㆍ후련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우리는 그런 걸 ‘대항폭력’이라 불렀던 것 같다.

‘우리 안의 파시즘?’

문제는 저 ‘더럽게 나빴던 80년대’를 회고ㆍ성찰할 때, ‘우리’조차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반성을 상대적인 데가 아니라, ‘절대적인 반성’ 속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폭력’이나 ‘동원’도 결국 저들의 그것과 동전의 뒷면에 있는 것이었고 우리 또한 결국 ‘파시즘적’이었다...

[봉준호 감독] 그래요? 나는 우리 과가 리버럴해서 그런지 별로 그런 것 못 느꼈었는데. 시위할 때 문화나 행태 같은 것은 그런 게 좀 있긴 했죠.
교문싸움하면 ‘전투조’라고 그래서 각목이랑 ‘그거’(^^) 하는 애들이 쫙쫙 줄 지어 나가고 끝나고 돌아오면 마치 출정 나갔던 군인들 돌아올 때처럼 양쪽에서 줄 서서 박수치고 그랬거든요. 난 그게 넘사스럽고 쪽 팔리고 그랬어요. ‘이게 무슨 뻘쭘한 짓인가. 끝났으면 각자 찢어지면 되지.’ 이상한 세레모니 같은 게 있었죠.

저 대항폭력의 폭력성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며, 또 그것이 ‘단순히’ ‘어쩔 수 없는’ 것을 지나 ‘최소한’의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대항폭력’도 때로 끔찍하며 특히 화염병은 ‘끔찍한’ 폭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끔찍함’을 무엇으로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문부식 씨 같은 이는 저 ‘끔찍함’에 ‘역으로’ 지나치게 매혹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대항폭력이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것이었다’며 쉽게 말하는 것보다, 어쩌면 ‘모든 폭력을 부정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더 쉬워 보인다. ‘비폭력’은 숭고할지 몰라도 ‘비폭력! 비폭력!’ 구호를 외치는 건 변태스럽기 십상이다. 심오해지고 진지해지는 방법은 그 길 외에도 다양할 듯하다. 다시 문부식 씨와는 다른 방식으로 심오해지고 싶다.

[봉준호 감독] 전 사면복권 받았어요...... 근데 그런 게 좀 닮은 거다? 비슷한 행태가 있었지만, 난 본질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아.

봉준호 감독은 6공화국으로부터 ‘처벌’을 받은 적이 있다. 89년 5월, 부산 동의대의 학내 농성을 진압하던 전경 6명이 건물로 진입하다 화재로 죽은 사건이 있었다.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을 계기로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많은 대학생들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외에 이 법으로 구속되거나 수배되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 프락치 구타사망 사건도 있었어요. 동양공전 학생 하나가 동아리 방에서 죽었죠. 가을 축제 땐데 그 날 분위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학회실에 있는데 선배가 조용히 오더니 도청될지 모른다며 매직 팬으로 조용히 쓰더라고요. ‘프락치가 동아리방에서 죽었다. 여차저차하니 누구누구는 어디 어디로 가라’ 그런 내용이었어요. 기타 치면서 놀고 있었는데, 분위기 썰렁해졌죠. 그 사건이나 동의대 사건은 정권 입장에서 봤을 때 얼마나 호재였겠어요. 신이 났지 뭐.

그러나 누군가 죽어서 신이 난 건 정권이었지 우리가 아니었다. 그 시대에 왜 ‘개인들’이 없었겠는가. 우리도 이미 ‘성숙한 개인들’이었다.

4 ... 어떻게 말할 건가요; 재밌는 ‘80년대’[ | ]

많은 이들이 죽고 잡혀간 대신 80년대의 대학은 자본과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면도 있었다. 학생운동의 ‘대의’는 쉽게 공감을 얻었고 ‘정의감’은 넘쳐흐르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인지 ‘운동’해야 되는 양심적이고 순수한 어떤 90년대 학번들은 80년대 학생사회를 ‘이상적인 상태’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 또한 80년대가 만든 괴상한 콤플렉스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봉준호 감독] 무슨 콤플렉스처럼? (웃음) 상당히 날조되었다고 봐야죠. (중략)
어제 일이 있어서 연세대에 갔는데 민주광장 백양로 앞에서 애들이 힙합공연을 하더라고요.
‘우리는 연세! 오~예!’ 이상한 것도 막 하고요.
야, 잘 놀더라. 거 신기해서 한참 봤네. 여학생들도 예쁘고요.(웃음)
‘와~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못 저랬는데.’ 억울한 생각이 물밀듯이 막 드는 거야.
‘내가 지금 다시 대학에 가면 얼마나 재미 발랄하게 지낼까’ 하는 생각에 참...
근데 우린 또 우리 나름대로 재미있었어.

우리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 ‘80년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나눴다. 김호철이나 ‘농활’도 피비 케이츠나 ‘미림극장’과 함께 소재로 등장했다.(*주) 살인의추억박하사탕품행제로의 중간 길이나 제3의 길로 갔다고 말했지만, 과연 과 가 대립하는 것인가? 유제하나 이문세 노래만 좋았던 것이 아니라, 김호철 노래도 좋았고 ‘농활’도 재미있었다. 봉준호는 1989년 <농활 야사>라는 만화를 그려 소질을 발휘하고 학교에서 유명해졌었다 한다. 80년대에 ‘농활’은 어이없게 어렵고 엄숙했으나, 웃을 수밖에 없는 일투성이이기도 했다. ‘개인들’이 중요하다면 과 의 중간 길은 언제나 가능하고 수없이 많지 않을까. 둘 다를 좋아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80년대도 혼란스럽고 풍부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말한다면

그러니까 그 불에 타서 재처럼 되어버린 연대(年代)가 우울ㆍ암울하기만 했다면 거짓말이겠다. 아니, 사실 ‘암울한 80년대’란 말은 너무 유치하다. 그 말은 너무 쉽게, 일면 진실이며 일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시작된 죽음의 연도인 86년 가을만 해도 그렇다. ‘아시안 게임의 환희’에 ‘전국민’이 온통 들뜨지 않았던가. 게다가 누군가들에게는 희망찬 때였다. ‘3저 호황’ 때문에 경제는 안정적이었고 국민소득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으며 졸부들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암울한 80년대’란 말이 유치한 것은 수식어구가 달랑 하나에 피수식어가 달랑 하나라서 그러하다.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말해야 된다. 사실 너무 빨리 90년대가 왔던 탓이 크다.

그러나 시대의 총아들은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고 앞으로도 오래 그렇게 할 것이다. ‘6-10항쟁이 내 정신의 뿌리’라며 매일 좌충우돌하는 현 대통령도 있고, ‘학살’로 그 시대를 개막하고는 이제 끝까지 돈 떼먹고 천당에 가려는 전 대통령도 있다. 또한 김문수나 김민석 같은 이는 그 시대와 ‘개인’의 삶에 대해 좀 다르게, 그러나 특히 난처하고도 난해하게 우리 ‘개인들’에게 질문한다. 그러니 어떻게 그 시대에 대해 말하고 쓸 것인가. 당신은 20대의 날들에 대해 어떻게 추억할텐가. 들으니 ‘재수한 94 애들’이 올해 ‘서른’을 먹었다 한다.


(주)

  • 김호철= 80년대 말, ‘전투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진짜 노동자> 같은 행진곡 풍 민중가요들을 수없이 작곡한 작곡가. 원래는 군악대 출신의 연주자였다 한다.
  • 미림극장 = 80년대 후반~90년대 초 서울대 녹두거리 근처에 있던 2본 동시상영관. <미림 아트홀>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그 동네 대학생과 고시생의 대표적 문화공간의 역할을 했다 한다.

5 촌평[ | ]

감사합니다. 거북님, 손돈님. 아직도 서툴러서리.;;-- 올린 넘 2004-8-24 6:01 am

6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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