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의마을

1 # 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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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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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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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2 # 잔등의 詩[편집]

       하늘은 돌아누워 있는 것일까.
       잔등을 이리로 향하고.
       누구도 하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나는 세상을 향해 잔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
       새가 늘 하늘의 잔등에        제 잔등을 부비며        하늘을 날아갈 때만 노래하듯이        나도 잔등의 뒤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리라.        새는 잔등을        하늘로 부비며        노래는 세상을 향하여 부르고 있었지,        그렇지, 나도 잔등 뒤켠에서        외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잔등을 맞부비는        그런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지.

3 # 열쇠[편집]

       유폐된 것에는        해방을.        자유로운 것에는        구속을.        ---그러기 위해서        멋도 없이 길다란 쇠붙이는 있다.        내 포켓에서        내 손가락의 애무를 받으면서        그것은 늘 차갑다.        한 장의 여닫이의 이편과        저편에서, 세상을 달리하는        이 신비를 그것은 쥐고 있다.        때로는 귀중한 것이        모셔지는 장소지만,        때로는 귀하신 분들도        들어가시는 장소.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열린 것은 닫히고        닫힌 것은 열리고.

4 # 호루라기의 장난[편집]

       호루라기는, 가끔        나의 걸음을 멈춘다.
       호루라기는, 가끔        권력이 되어        나의 걸음을 멈추는        어쩔 수 없는 폭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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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루라기가 들린다.        찔금 발걸음이 굳어져,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 권력이 없었다.        다만 예닐곱 살의 동심이
       뛰놀고 있을 뿐이었다.        속는 일이 이렇게 통쾌하기는        처음 되는 일이다.

5 # 燃燒[편집]

       가슴에 번호를 달고        스타트 라인에서 뒷발을 차며        앞으로 쏘아나가는 것은 속력.        경주에서는 새 기록을 세우기 위하여        젊음을 불태우고 있지만.
       이미 칠십의 초반에서 달리는        늙은 주자는, 항상        뒤떨어지기 위하여 숨이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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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인 지점이 어디쯤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有限의 끝,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낭떠러지,        낭떠러지에 한 걸음 잘못 내딛으면 영원,        영원이란 결국 소멸에 지나지 않는다.
       소멸을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빨리 달려왔던가, 또 얼마나        힘차게 뛰어왔던가, 이긴 자도 진 자도 없는        이 험난한 레이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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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고속으로 달리고        우리는 예사 속도로 움직여        허우적이는 동작의 한 컷을 영사하면, 그것은        땅 위로 조금 뛰어오른 데 지나지 않는다.
       개구리가 한 발자욱, 껑충        뛴 것을 누가 달렸다고 하던가.        늙은 주자는, 항상        뒤떨어지기 위하여 숨이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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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과 저승을 구획하는        접선에서,        도랑을 뛰어넘는 한 컷을 영사하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속도를 볼 수가 있으리라.
       개구리가 한 발자욱, 껑충        뛰는 것을 누가 그것은 속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뒤떨어지기 위하여 한 번 껑충 뛰는 그것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이 속도만은 젊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한다.

6 # 眼鏡[편집]


안경을 쓰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멀리가 보이지 않아서, 오늘에는
가까이가 보이지 않아서, 한평생을
나는 안경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살아왔다.

구부러진 유리알을 통하여
세상의 애환을 살아왔지만, 세상이
그렇게 슬프고 기뻤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 사람의 기쁨이, 어쩌면
한 사람의 슬픔이 되는 잔혹을, 나는
어느 한쪽에서만 보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한 사람의 슬픔이, 그 실은
한 사람의 기쁨이 되는 비정을, 나는
어느 한 면에서만 보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안경을 쓰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오늘에는
현실이 보이지 않아서, 한평생을
나는 안경을 벗지 못하고 살아왔나보다.

구부러진 유리알을 통하여
세상의 애환을 살아왔지만, 세상이
그렇게 밝고 어두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안경이 너무 밝아서, 어쩌면
세상의 어두운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어느 한 면만 쉽게 즐겼는지도 모른다.

안경이 너무 어두워서, 어쩌면
세상의 눈부신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어느 한 가지만 자꾸 슬퍼했는지도 모른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는
유리의 척도에 맞춰 세상을 보면서
그것이 세상인 줄 알면서 살아왔나보다.

그 잣대가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도, 그것은
구부러진 유리알, 그것이
아무리 어설픈 눈이라 해도, 내 눈으로
내 세상을 보면서, 내 발로
스스로 걸어가서 확인하면서, 나머지
세상은 슬기롭게 살 일이다.

7 # 小曲[편집]

       구름 흘러가면        뒤에 남기는 것이 없어 좋다.        짓고 허물고, 결국은        푸른 하늘뿐이어서 좋다.
       한 행의 시구        읽고 나면 부담이 없어서 좋다.        쓰고 지우고, 결국은        흰 여백뿐이어서 좋다.
       평범한 사람        남기는 유산이 없어서 좋다.        벌고 쓰고, 결국은        돌아가 흙뿐이어서 좋다.

8 # 시계는 열한 시 오십 구분[편집]

시계는 열한 시 오십 구분
일분이 지나면 날이 바뀐다.
날이 바뀌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바뀌는 날에 기대를 걸어 본다.
기대를 걸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언제나 속으며 믿어 본다.
믿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시계는 열한 시 오십 구분
일분이 지나면 새 날이 온다.

그래,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속아주자. 그리고, 희망찬 새 날을 희망해보자. - LaFolia, 200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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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이 당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 ,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41년 평양 숭인 상업 학교를 거쳐 일본 츄우오(中央) 대학 법학부 졸업
1954년 『문학예술』 편집위원
1957년 조지훈, 유치환 등과 함께 한국 시인 협회 창립
1957년 제5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59년 『사상계』 상임 편집위원
1973년 한양대 문리대 강사 역임 및 도미(渡美)
1994년 작고
시집 :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8), 『신(神)의 쓰레기』(1964), 『새의 암장(暗葬)』(1970), 『사슴의 관(冠)』(1981), 『서쪽, 그 실은 동쪽』(1992), 『그리고 그 이후』(1993), 『소로(小路)』(1994) ||


시인의마을

편집자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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