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의 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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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A Hen in the Wind, Kaze no naka no mendori
風の中の牝鶏, 風の中の牝どり
바람 속의 암탉
  • 1948년 일본 영화
  • 감독: 오즈 야스지로
  • 장르: 드라마
  • 상영시간: 84분
  • 2004년 한국 개봉

2 줄거리 (네이버)[ | ]

전쟁 직후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여인의 수난을 그린 작품. 미조구치 겐지의 <밤의 여인들>에서 창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인기 여배우 다나카 기누요가 호연했다. 전작인 <셋방살이의 기록>이 도시 인정물의 연장선상의 희극적인 작품이었다면, <바람 속의 암탉>은 패전 후의 생활고와 가혹한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 가족간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던 오즈의 작품 세계에서 전후 일본사회에서 겪는 여성의 수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이다. 전후 일본의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묘사로 동시대의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작품이지만, 오즈의 후기 영화미학으로 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에 나간 남편 슈이치는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없다. 남편 없이 어렵게 가정을 꾸려가던 도키코는 아이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판다. 그러던 중 슈이치가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남편에게 매춘 사실을 고백하는데..

3 # 거북이[ | ]

일단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수식어로 '하이쿠의 운율로 바라본 세상'이라고 썼던데 뭔가 어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봐도 그렇고 그는 상당히 오래도록 비슷한 문제를 반복적으로 변주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이쿠같은 간결한 느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때문인지 오즈의 사진을 보면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는 노인네라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이 비평적으로도 어중간하고 시간도 짧은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시간이 되는 영화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목이 조금 인상적이기도 했고. 암탉을 나타내는 한자 牝鷄에서 이 牝자는 묘한 느낌을 준다. 도덕경을 읽다가 눈에 들어왔던 이 한자는 나에게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글자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잠깐 말해본다. 스포일러니 읽지않아도 되지만 뭐 알아도 영화보는데 별로 지장은 없다.
전쟁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들을 힘겹게 키우는 여인이 있는데 그만 아들이 장염에 걸려 입원하게 된다. 아들은 간신히 나았지만 아들의 병원비가 없어서 그녀는 그만 몸을 팔게된다. 몸을 팔아 아들을 치료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전쟁에서 돌아왔고, 순진한 그녀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불어버린다. 남편은 부인을 용서못한 채 방황을 하는데 그 와중에 두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부인이 정말 한번밖에 몸을 팔지 않았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 사창가로 찾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인을 밀치다가 그만 부인이 계단아래로 떨어진 사건이다. 이 두개의 사건을 통해 남편은 간신히 부인과 화해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은 '바람속의 수탉'이라고 바꾸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부인의 매춘사실을 알게된 이후에 급격한 갈등구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남편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부인을 용서하지 못한다. 부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창녀촌까지 찾아갔고 거기서 만난 몸팔던 처자를 비난하지 않으면서 그녀를 위해 직장까지 구해주려는 그이지만 부인의 그것은 용서하지 못한다. 그는 부인에게 손도 대지 않으려했지만 그러면서도 부인의 몸을 탐한다. 부인이 아무리 메달려도 매몰차게 밀치던 그는 급기야 부인이 계단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그녀에게 손을 내뻗지 않고 혼자만 계단위로 올라가버린다. 부인은 혼자 계단을 올라가서 다시금 남편에게 용서를 빈다.

이러한 남편의 행위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남성의 이중성이다. 이런 것은 매춘과서비스의경계같은 논의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나는 창녀가 필요하지만 내 여자만은 안된다는 남성의 본질적 이중성에서 나오는 비극인 것이다. 계단 아래로 떨어진 부인을 구하지 않는 그가 마지막에 부인에게 다시 잘해보자고 말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남편이 부인을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남편을 더욱 껴안는다. 당시에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고 항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인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여러가지 얘기를 해주는 또다른 몸팔던 처자도 마찬가지다. 남성의 논리로 세상을 만들어두고 여성의 희생을 강요한 주제에 그 시스템에 속박되어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을 핍박한다.

나도 남자라 남편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짓은 이제 그만둬야하지 않을까. 정조, 순결, 지조 이런 것들에 집착하면 좀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을 볼 때마다 자꾸 느껴지는 것은 '바람 피우는건 자유다. 들키지만 마라.'라는 교훈이다. 부인의 친구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했냐며 부인을 책망한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무관심인가. 집착이 도착되는건 순간 아닌가. 나는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성 하나만 놓고 끝까지 그 사람만을 좋아한다고 하는 말은 말이 되는가. 속박은 애정의 다른 표현인가.

피곤한 문제다. -- 거북이 2004-6-10 1:57 am

4 같이 보기[ | ]

5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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