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본명, 영어식) Henry Louis Gehrig, (통칭) Lou Gehrig, (별칭) Buster Gehrig, (애칭, 부인으로부터의) Luke Gehrig, (출생명, 독일어식) Heinrich Ludwig Gehrig
- (본명, 영어식) 헨리 루이스 게릭, (통칭) 루 게릭, (별칭) 버스터 게릭, (애칭, 부인으로부터의) 루크 게릭, (출생명, 독일어식) 하인리히 루트비히 게리히
- 20세기 초 MLB에서 활동한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 좌투좌타, 주 포지션은 1루수
- 1903년 6월 19일 뉴욕 맨해튼 출생, 1941년 6월 2일 뉴욕 브롱크스 자택에서 사망
- 독일계 미국인
- 1923년 뉴욕 양키스에서 데뷔해 1939년 은퇴할 때까지 양키스에서만 활동했다.
- 뛰어난 기량과 근면성실한 모습으로 인해 철마(鐵馬; The Iron Horse)란 별명을 얻었다.
- 선수 시절 주요 경력[1]
- 1939년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5]으로 은퇴했다.
- 양키 스타디움에서 남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표현으로 대표되는 은퇴 연설이 유명하다.
- 뉴욕 양키스는 게릭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6][7]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기까지의 삶
- 1903년 6월 19일 맨해튼 출생; 출생 당시 몸무게가 거의 6.4kg에 달하는 우량아였다고 한다.
- 독일인 이민자 부모님인 하인리히 게리히(Heinrich Gehrig)과 크리스티나(Christina)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받았다.
- 아버지는 판금 노동자로 일했지만 실직한 상태일 때가 많았고, 가정의 주된 수입원이자 루 게릭을 엄하게 키운 건 가정부로 일하던 어머니였다.
- 형제가 3명 있었지만 모두 소아병 등으로 어린 시절 사망했다.
- 1921년 칼럼비아 대학교에 풋볼 장학생으로 입학
- 대학 야구 경기에서 활약하던 중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폴 크리첼(Paul Krichell)의 눈에 띄었고, 1923년 4월 30일 뉴욕 양키스 입단에 합의했다.
결혼 생활
- 1933년 9월에 엘러너 트위첼(Eleanor Twitchell)란 여성과 결혼했다. 자녀는 없었지만 금슬 좋은 부부로 유명했는데, 엘러너 게릭은 80세의 일기로 눈을 감기까지 재혼하지 않은 채 ALS 연구를 지원했다.
- 루 게릭의 여러 유품들과 부인이 만든 남편에 대한 스크랩북은 쿠퍼스 타운 명예의 전당에서 볼 수 있다.
- 엘러너 게릭의 회고록 "My Luke and I"가 1977년 출간된 바 있다.
그 밖의 이야깃거리
- 은퇴 이후 짧은 여생 동안 뉴욕 가석방 위원으로 일했다.
- 근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루 게릭을 포함한 운동 선수들이 겪는 ALS 증상은 지속적인 외력에 의한 뇌손상 때문일 수 있다고 한다; 루 게릭이 뛰던 시절엔 보호헬멧이 제대로 도입되기 전이었고 게릭은 공에 맞아 의식을 잃은 적이 두어 번 있었다.
- 1941년 루 게릭의 생애를 담은 영화 "The Pride of the Yankees (국내번역명: 야구왕 루 게릭)"이 1941년 개봉된 바 있다.
- 베이브 루스가 스스로 본인 역할로 출연함으로써 화제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