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르 드 글라스

예전에 초등학교 친구랑 걸어가다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떼레 데 글라스 가고싶어.
응?
떼레 데 글라스.
응? -_-
아이스크림가게 말이야...
몰러. 31같은거니?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는거야... [푸욱~ 하고 가슴에 칼을 맞다]

그때 이후로 그 떼레 데 글라슨지 먼지를 볼 때마다 그녀석이 생각나곤 했는데 오늘 드디어 가봤다.
나랑 일본어 학원에 같이 다니는 할아버지(37년생, 앞으로 변상이라 부르자)와 말이다...-.-a

변상은 무척이나 적극적인 노인이다. 등산, 어학배우기, 바둑, 골프, 테니스 등 참가하시는 모임이 한두개가 아니다. 그리고 해군생활을 삼십년 넘게 하신 분이라 몸도 정정하시고 원래 성격이 적극적이신지 뭐든 열성이 대단하시다. 일본어도 마찬가지셔서 요즘 학원만 가면 맨날 변상에게 '밟힌다'.
성격도 털털하신지라 잘 웃으시고 립서비스가 대단하셔서 항상 여선생들에게 귀엽네 이쁘네 발음 좋네(그것도 일어로 '쓰고이데스요~', '가와이이~') 하시는 바람에 여선생들도 쑥쓰러워하면서 좋아한다. 마흔 넘은 여선생이 수줍어하는 것을 보면 여자는 나이와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하게된다.

여튼 나는 이상하게 학부모들이나 노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라 학원 끝나면 항상 같이 나오곤 하여 서로 클래스 메이트라고 부르는데 오늘은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가자고 하시는 통에 같이 들어갔다. 역시 들어가니 여자애들 아니면 연인들이 있더군.
아무래도 노인이라 너무 달짝지근한 것은 별로라서 고구마, 미숫가루, 옥수수 아이스크림으로 한 파인트를 시켰다. 내가 돈 꺼내려고 주섬주섬하는데 '어림없는 소리!'하시더니 돈을 내신다. '난 한달에 연금이 이백씩 나오는 사람이야!' 흠 나보단 용돈이 훨씬 많으시니 내셔도 되겠군...-_-a

아주 맛있다고 하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신다. 그동안 집에 가면서 자제분들 얘기나 해군생활하시던 얘기를 가끔 묻곤 했는데 나는 뭔가를 얘기해도 될 놈이라고 생각하신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어떻게 애들을 키워냈다는 둥, 군 생활은 어땠다는 둥 각종 이야기 보따리가 풀려나오는데 나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면서 들었다. 군생활 하시면서 해외에도 많이 다녀오시고 외국인들과도 몸으로 부딪히면서 영어를 익히신 통에 여튼 자신감 하나는 이찌방데스다. 기성세대가 가지는 자신감이란 나는 그 험한 세상을 이렇게 살아왔다라는, 생존 자체가 성공인 그런 것은 아닐런지. 여튼 자제분 셋을 모두 집사주어 결혼시키셨다니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하면 부모 역할은 다 하신 셈이다.

군생활 얘기도중에 나는 슬쩍 물었다.

그때는 학생운동도 많았지요?
아 그럼~ 그래도 나는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 그러세요.
특히 광주는 정말 잘못된거지. [이쯤에서 나는 와 정말 열리신 분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를 습격해서 군인들에게 총을 들이댔으니 그건 폭동이야, 폭동 [허걱...-_-]
예...
그때 그놈들은 지금 3억씩 받았지? 우리 군인들은 아무 보상도 못받았다.
게다가 내가 월남가서 벌어온 돈 삼분지 일이나 떼어서 어디다 썼는지 아나?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지었다구. 우리는 그렇게 살았어.
아, 보직은 어떤 것이셨어요? [라고 나는 화제를 돌렸다.]

역시 노인은 노인이구나. 기성세대들 중에 광주에 대해 혹은 당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고 바라본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것이 모든 것이었고 시대정신이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어떤 식으로 역사에 죄를 지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뭐 여튼 좋은 분이라 다시 다른 얘기를 하면서 우린 웃었다. 어쩌다보니 두달새 선생이 세번이나 바뀌었는데 두번째 선생은 무척 노력가이지만 자신감이 넘쳐서 노인들 보시기에는 조금 건방질 수도 있는 그런 여자였다. 여튼 지금은 다른 여선생인데 어느날 변상이 물어볼게 생겨 예전 여선생에게 전화를 하셨댄다. 그런데 이 여선생이 좀 공손히 받았으면 좋은데 사무적으로 나온 모양이다. 왜 있잖은가. 선생대 제자들일때는 뭐든 잘해줄거같은 사람이 그 의무감에서 벗어나 일반인대 일반인으로 대하면 딱딱하게 변해버리는 그런. 그래서 눈치빠른 변상은 적당히 전화를 끊으셨다는데 무척 화가나신 모양이다. 그 여선생이 있을때 변상은 농담도 많이 하시고 그랬거든. 그래서 그나마 상황을 다 알고있고 말할만한 상대인 나에게 얘기를 하신것이다. 그러고보면 귀여운 할아버지다.
오늘은 젊으셨을적 사진을 몇장 가져오셨는데 아주 호남형으로 자~알 생기셨다. 난 남자에게 이런 말은 잘 안하는 편인데 젊은날의 변상은 관용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당당한 그런 얼굴이었다.

인기 많으셨겠는데요~
가끔 파티를 했는데 파티만 하면 여자들이 모이곤 했지...우하하하 [이 웃음 묘사는 과장이 아니다...-.-a]

이렇게 노인들과 가끔 털털하게 얘기하다보면 그 시대를 살아남은 분들에게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방식이 있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미우던 고우던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가 바뀐 지금도 우리의 삶을 옥죄려한다면 그것은 단호히 막아야 한다. 5060들이 소외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 길중 가장 손쉬운 것은 선거 참여인데 이번 대선은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었다. 이회창이 되면 어쩌나 했었는데 정말 아찔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저 이런 것들로 알려주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유쾌한 노인 친구가 한 분쯤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 거북이 2003-2-7 23:21

오늘은 문법강의의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 강의 신청자가 줄어서 걱정하는 가운데...

내일은 데모하러갑니다.
네? -_-
광화문에 모여서 데모해요. 군인들 다 모입니다.
북핵반대, 주한미군 철수 반대...
(커커걱) 혹시 1번 찍으셨습니까?
내는 노무현이라는 사람 모릅니다. 그저 운동권 출신 한명이 있는거죠.
저는 2번찍었는데요. ^^
뭐 우리 자식들도 2번 찍었더라고.
(집에 갈 때가 되어) 내일 데모 잘하세요~ 화이팅.

이것과 관계있는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_-

   
   
   
    -- 거북이 2003-2-2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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