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1 개요[ | ]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2 책소개 (알라딘)[ | ]

<금강경>은 단순히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보다는,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의 깨달음에 던지는 보편적인 메시지이다. 저자는 금강경의 내용을 우리 말로 꼼꼼하게 풀이한다. 또한 '해제' 등을 수록하여, 금강경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도 특징이다.

3 # 거북이[ | ]

일단 김용옥의 보기드문 역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인데 그 이유로는 몇가지를 들 수 있다.

  1. 서문이 짧다. 대개 김용옥의 책은 서문이 책 내용의 절반에 달하는 일기장이자 자유게시판이었다.
  2. 횡수가 적다. 책의 본문은 정말 '금강경'의 내용을 문헌학philology적으로 강해하고 있다. 대개 김용옥의 책은 서문이나 본문이나 다 일기장이나 자유게시판에 가까웠다.
  3. 구성이 있다. 들어가는 말/금강경 개설/금강의 의미/소승과 대승/금강경 강해 1-363/후기/참고서적/번역 이렇게 되어있는데 김용옥의 책 중에 이렇게 짜임새가 있는 책은 전무했다. 스스로도 이제 뭔가 해낸것 같다는 자화자찬을 하고있는데 이정도만 해주면 괜찮다.

내가 가장 고무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다른 데에 있다. 87페이지에 보면 도올서원의 강의풍경을 초기 불교집단에 비유하여 좀 민망하게도 스스로를 붓다에 비유한 부분이 나온다. 도올서원은 자발적인 지원으로 한달간 아침마다 김용옥의 잡담을 듣는 강좌로 나와 SonDon이 들었던 경험이 있는데...뭐 초기 불교집단과 비슷한 모습이 있으니 썩 나쁜 비유는 아니지만 조금 쑥스럽지 않나 싶긴 하다. 어쨌거나 여기서 재생(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들으면서 스스로를 특권화하기 위해 자신을 교조화하고 그러면 초기의 생동하는 모습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가정형만 빼면 적어도 내가 다녔던 도올서원의 풍경과 똑같아진다. 특권화된 계층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곳의 재수들은 분명 다른 재생들과는 구분되게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조차 김용옥 주변에서 뭔가 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에 가까웠다. 김용옥은 그 안에서 교주였던 거다. 나같은 평범한 재생은 그의 권위에 짓눌려 단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강의 녹음하다가 졸아서 혼난 기억은 있지만...-_-a 어쨌든 이 부분은 스스로를 비판하는 마음이 (우연히?) 담긴 재미있는 고백이다.

여전한 자가당착도 보이긴 한다. 114페이지를 보면 학생들이 자신의 '방만한'(스스로의 표현이다. ㅎㅎ) 책들 중 모순되는 부분을 가지고 와서 왜 이땐 이렇게 요땐 요렇게 말합니까 하고 따졌단다. 당연한 일이다, 나도 그러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니까. 이걸 그는 방편설법이라며 강변한다. 뭐 방편설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적어도 방편설법이니 뭐니 말하고 싶으면 그 순간 자신은 학자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도인이거나 도올교의 교주인 것이지. 학자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어쨌거나 문헌학적(?) 감상은 여기까지.

세조가 불교에 심취하여 우리말로 번역을 했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단종은 뭐야 그럼...-_- 붓다가 울겄네.
내용에 대해서는...잘 모르겠다. -_- 일단 왜 이렇게 중언부언하게 책이 적혔는지, 왜 암송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이걸 보고 이해한 내용은 집착과 아상을 버리라는 메시지 한구절 뿐이다. 물론 중요한 말이지만, 뭐랄까 체감이 잘 되지 않는다. 암송해봐야 하나...-.- -- 거북이 2004-10-31 12:17 pm

4 # 촌평[ | ]

아쉬운 일이다. 금강경에 대한 책을 읽었으나 감상이라곤 또올이에 대한 감상밖에 없으니... 바로 이래서 문제다. 대승은 너무 우주적이고 난해하다. 초기불교 경전들을 읽으면 얼마나 쉬운지 모르는데... 여튼 불교의 골수가 담긴 책을 읽고 별느낌이 없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집착과 아상을 버리라' 는 말은 '한구절 뿐이다' 라는 식으로 말해질일이 아니라는 걸 형도 잘 알리라고 본다. 집착과 아상을 버리면 불교의 목표인 붓다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으므로 금강경은 형에게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계'라는 것을 매우 거추장스러워 한다. 하지만 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한번 계를 하나라도 지켜보는 건 어떨까. 삶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수 있으리라... 불교가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진다는건 잘 알지? 계를 지켜 마음이 편해지면 자연스레 명상에 이르고 명상이 깊어지면 붓다의 지혜에 이르게 되어 스스로 붓다가 될수있다. 붓다가 무엇일까. 별거 아니다. 번뇌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여러분이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면 이미 붓다이다. 불교는 교조적이지 않다.
어느 누구에게도 붓다가 되길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에게 번뇌가 있다면 한번 붓다의 길은 걸어보는 건 어떻느냐고 묻는것이 불교이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대가 걷는다면 참으로 새롭게 느낄 그 길을... 도올은 정신차릴 일이다. 녀석은 길을 보기만 하고 가질 않으니... 그 결과는 녀석의 삶이 말해주듯 언제나 미움받고 고통스러워 하며 스스로 사람들위에 군림하지 않으면 자괴감을 느끼는 불쌍한 인생일 뿐이다. LongWarm,2004-10-31 6:06 pm

5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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