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적 관점에서 본 해방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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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근현대사 연구회에서 열씸히(?) 활약하던 96년에 쓴 글이다.
원래 미소의대한정책이라는 글을 썼었던 나는 그것을 확장하여 해방 3년사 중 내가 맡았던 '대외적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비교적 열심히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대학 2학년 짜리가 쓴 글이니 만큼 넉넉하게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96년 8월.

1 # 2차대전 끝무렵의 미소의 대한정책[ | ]

1.1 #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 | ]

한국문제를 다룸에 있어 미국의 기본 방침은 연합국의 공동접근이었다. 태평양전쟁직전 미 국무성 산하 극동국은 중경임시정부의 활동과 국민당정부와의 관계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중경임정의 승인요청(이는 자칭 임정을 대표하는 이승만과 여러 재미 독립단체들에 의한 것이다.)을 고려하여 이에 관한 영국과 중국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에 관하여 중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영국은 중국내 독립운동단체들의 분열, 일본의 건재, 중국의 전통적 종주권등을 이유로 현시점에서 승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와같은 영,중의 반응외에도 다른 식민지처리문제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임정승인을 유보한다.
42년 4월, 중국이 외교적 이유(중국이 영토확장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로 임시정부를 승인하려 했으나 미국은 이를 저지했다. 국내와 별다른 연결이 없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한국민들이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이유를 댓지만 역시 기존의 미국정책에 혼선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실제로 중국이 임정승인을 철회한 이유는 소련이 다른 한국인 단체를 승인해서 생기는 문제와 영국이 식민지문제에 대하여 갖는 거부감등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체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꼭 다른 나라들과의 동의를 얻는 형식을 취해왔다는 전통적 미국 외교정책에 일치하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었고 중국, 소련의 이권이 개입되어있는 만큼 미리 정책을 세우기보다는 상황에 따른 탄력적인 대응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러한 전략을 취해왔는가. 실제로 미국은 당시 동북아문제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하여도 좋을 위치에 있었다.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쩔쩔매어 미국의 원조를 구걸해야할 입장이었고 영국은 동북아문제에서 결코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꾸준히 영국과 중국을 테이블로 끌어내었다. 이것은 안정을 위해서 강대국들이 누려야 할 '이권'때문이다.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동북아의 세력분포가 바뀌게 되었는데 동북아의 안정을 위하여 이 힘의 공백을 매울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가장 미국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뒤에 나올 신탁통치안이다. 어쨌거나 연합국간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지려면 각각 이익을 봐야했다. 소련은 동북아쪽에 국경을 대고있는 나라이고 일본이라는 강국에의해 희생된 적이 있는(러일전쟁 패배) 나라이므로 비록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기여한 바는 적다 하더라도 소련까지 포함하여 동북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것이 당시에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특히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의 처칠같은 경우는 제국주의가 끝나가던 그때까지도 소련은 루마니아를 영국은 그리스를 장악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련은 그 국력의 대가로 당연히 부동항을 하나 차지해야했다. 이것이 바로 연합국 공동접근의 실체이다.
어쨌든 이러한 미국과 연합국들의 이해는 카이로회담(43년 11월)에서 언급됨으로서 확정되었다. 이것은 어느 한 나라가 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것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미국 외교정책이 성공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어느것도 결코 구체적이지 않았으며 이는 후에 계속된 여러 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이러한 미국의 어정쩡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한국분단에 있어 엄청난 규정력으로 작용하였다. 얄타회담(45년 2월)에서는 소련까지 포함하여 한국문제가 합의되었다는 의미는 있지만 이는 카이로회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4월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동안 이루어진 소련과의 협조체제는 상당한 변화를 겪게되었고 이 또한 한국분단의 규정력중 하나가 된다. 포츠담회담(45년 7월)은 마지막 전시회담이었는데 여기서마저 영국과 소련의 지중해문제에 대한 대립으로 한국문제는 결국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당시 소련의 대일전참전에 대한 중소간의 대립, 트루먼 행정부의 소련에 대한 불신감등은 한국문제의 구체적 논의를 더욱 요원하게 했다.
그동안 미국은 꾸준히 한국에 대한 조사를 병행해왔지만 한국문제에 대한 구체적 합의없이 전쟁을 수행해왔다. 그 와중에서 루즈벨트가 죽고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고 소련이 참전하자 미국이 대한정책은 큰 기조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적대응에 머물고만다. 그런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 30분만에 결정되어 한국을 둘로 가른것이 일반명령 1호였던 것이다.
이렇듯 미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동북아정책과 국제관계속에서 큰 부담을 지지않고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목적하에 고려된 것이다. 이 고려속에는 소련을 견제하고 영국을 배제하며 중국을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참고문헌을 보길 바란다.

1.2 #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관심[ | ]

전시회담에서 한국문제가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카이로회담(43년 11월)에서였다. 그리고 이후의 논의에서도 한국은 독립되어야한다는 결의는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이야 단지 '결의'였을 뿐이었고 미국식 세계재편의 일환이었다. 이즈음까지 소련의 한국에 대한 언급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단지 신탁통치기간이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정도였다.
어차피 신탁통치는 이루어질 것이었기에 소련이 관심가진 것은 한국에 어떤 형태의 군대가 주둔하게되느냐였다. 당시는 군사적 점령이 바로 정치적 점령으로 이루어지는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4대국 신탁통치가 결정되긴 하였으나 그 구체적인 사항들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합국 위주의 한국점령이 이루어지면 소련과 국경을 접하는 '적대국'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소련의 관심은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을 부정하거나 그들을 선의의 동맹자로 규정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소련 외무인민부산하 제 2극동국이 작성한 치밀한 보고서(45년 6월 29일 작성)를 보면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얼마나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있다. 여기에는 일본을 비롯한 해양국가들이 극동을 통하여 소련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이 되어야하며 이를 위한 가장 확고한 방안은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는 판단부터 시작하여 한반도의 세력관계를 역사적으로 조사한 것과 한국의 주요 도시들의 지리적 중요성, 국내에 형성되어있는 정치세력들에 대한 평가, 미영중의 소련배재 의도, 열강의 한국내 이권확보상황 등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조사되어있다.

1.3 # 소련의 참전[ | ]

태평양전쟁(41년 12월~45년 8월)중 미국 외교의 가장 큰 목적은 소련을 대일전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과의 싸움도 힘겹게 수행하던 중이었으므로 참전할 수 없었다. 극동에 또다른 전선이 생길까봐 소일불가침조약(41년 4월)까지 맺은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전투(43년 1월)를 엄청난 희생끝에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역전시킨 소련은 결국 45년 5월에 독일을 항복시켰다. 연합국도 스탈린그라드전투가 끝난다음에야 노르망디상륙작전(44년 6월)을 감행하여 소련과 함께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미국으로서는 독일과 소련이 서로 싸울수록 좋았기때문에 늦게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소련이 대일전 참전을 미적거린 것은 연합국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소련이 처음으로 대일전 수행의사를 밝힌것은 모스크바외상회담(43년 10월)이었으나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영소정상회담(44년 10월)이었다. 여기서 소련은 대독전에서 승리한 후 준비가 갖추어지는 2~3개월내에 대일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련이 내건 정치적 조건은 후에 얄타회담(45년 2월)에서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외몽고의 현상유지, 사할린 부근 열도 회복, 쿠릴열도 인도, 대련항의 회복, 여순조차지 회복, 남만주철도 관리 등인데 이들은 모두 중국과의 구체적인 협의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협상이 오래걸리자 소련은 대일전참전을 지연시키려고하였다. 당시 연합국은 태평양전쟁이 46년이후에나 끝나리라고 볼 정도였으므로 소련이 배짱을 부린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하여(45년 7월) 강경책으로 나오자 소련은 기존의 약속을 지켜 45년 8월 8일에 대일전을 개시하였다. 소련으로서는 합의된 이익을 취해야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는 그때를 놓치면 소련은 거저먹는 것을 놓칠 수 있었다.

1.4 # 소련의 북한 점령[ | ]

미국이 보기에 관동군의 전력은 결코 과소평가 할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보인 가미가제식 전투방식은 미국에 위기감을 갖게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그렇게 소련의 참전을 유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련의 참전은 원자폭탄 투하에 못지않게 일본의 조기항복에 결정적이었다.
이미 45년 7월까지 극동으로 부대를 이동시킨 소련군은 관동군의 약 2배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만주로 진공하기시작했다. 이때 한반도 일부가 작전지역에 들어갔는데 이는 단지 관동군의 후방을 차단하기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진공은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져 8월말까지 북한 전지역의 점령을 완료하였다. 미국이 제안하여 8월 16일에 동의된 일반명령 1호가 지켜져서 38선 이하로는 진공을 그만두거나 진공했더라도 철수하였다. 이것은 45년 7월에 있었던 포츠담회담에서조차 한국에서의 점령방침이 결정되지 않아 정치적 점령보다 군사적 점령이 우선시되어 나온 결과이다. 동구에서 소련이 어떻게 세력을 확보하는가를 똑똑히 본 미국은 동북아마저 그 꼴이 나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시 한국내 상황은 좌익이 엄청나게 득세하고 있었고 소련이 대규모 한인부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확실한(사실 확실하지 않았다) 정보도 있었으므로 미국은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던 것이다.
소련이 일반명령 1호를 승인한 이유는 얄타체제를 유지하기위해서이다. 당시 한반도보다는 쿠릴열도나 훗카이도, 사할린, 일본점령에 더 큰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점령지 확장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일본 북부도서의 점령은 자국에의 완전 귀속이고 일본점령 참여는 패전국 처리라는 큰 이슈였으나 한반도의 경우는 그런게 아니었으므로 자국의 방어막을 확보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한반도까지 걸고 넘어지면 얄타협조체제를 손상시킬 염려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소련이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한반도는 당시 소련에게 있어 전략적으로 덜 중요한 지역이었다는것 뿐이다.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기본적인 원칙은 적대적 정부의 수립을 막는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해방공간 전기간에 걸쳐 고수되는 원칙이다.

2 # 미국의 국가체제 조직[ | ]

2.1 # 급박한 상황[ | ]

전략적, 외교적 정책들이야 어찌되었든간에 남한에서는 미군의 진주와 동시에 국가체제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 직후 미소가 같이 점령했던 오스트리아같은 나라가 어떤식으로 동시철군을 이루어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단지 정황만으로 본다면 미국은 남한에 들어오자마자 평소에 하던 것처럼 점령국으로서의 통치기구를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이 점령했다는 특수한 사실을 경시했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들은 후에 모스크바 삼상협정이나 미소공동위원회등의 외교적 통일노력이 간단하게 묵살되고 분단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군은 점령군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이 인천항으로 입국한 것은 45년 9월 8일이었는데 여기서 '해방군'을 맞으러 나온 인파중 2명이 사살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것은 앞으로 미국과 남한민중들이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에게 정권을 이양했다가 금새 그 조치를 번복한 총독 아베는 이후 미군이 상륙할때까지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9월 9일,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하지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하지는 그날 발표한 성명에서 여전히 일본인들의 통치가 유효하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언론이 '미국과 일본의 동맹'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한국민들의 반응은 격렬한 것이어서 국무성이나 맥아더가 하지에게 하루빨리 일본인 관리들을 해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지는 남한에서의 상황이 매우 혁명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어렵다는 의견을 개진하였고 맥아더는 하지에게 한국내 정책의 전권을 일임하였다는 말과 함께 그가 어떤 정책을 펴더라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무성의 정책과 맥아더의 의견과 하지의 정책이 다소 차이가 있고 대립적인 면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매우 분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의 책임을 덜게하는 논거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전술적인 면은 혼선이 있었을지 몰라도 미국의 전략은 한치의 수정없이 그대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미군이 선택한 한인 조력자 집단은 한민당이었다. 일제하 매판 자본세력들과 영어를 잘하던 매국노들, 그리고 친일파들의 집단이었던 한민당이 미군의 개가 된것이다. 미군은 입국하자마자 일본인들과 매사를 상의하였고 그들로부터 영어로 번역된 정치적 행정적 문서들을 건네받았다. 여기에는 한국내의 좌익세력이 매우 강하다는것과 계급구성, 경제상황 등 대부분의 정보가 들어있었다. 당연히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추종하던 김성수 류의 한민당을 소개했을 것이고 영어에 능통하고 계급적 이해관계가 비슷한 이들을 미군은 주저없이 신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상륙한지 이틀만에 미군은 한민당 대표들과 만났다(한민당은 9월 9일에 결성되었다). 9월 12일에 정치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한민당과 야합을 추진하던 미군정은 곧이어 이들을 행정고문으로 영입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인다. 이미 인민위원회를 통하여 자치를 실현하려던 건준이 미군의 입국직전에 인공의 결성을 선포할 정도로 결집된 모습을 보여준만큼, 미군으로서는 그들을 저지할 세력을 하루빨리 결성해야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친일파들이 고개를 들기시작했고 이들이 경찰력을 장악하게됨에 따라 남한 민중은 해방전의 상황에 못지않은 압박을 받게 되었다.

2.2 # 국가체제 조직[ | ]

미군이 처음 진주했을때 받은 한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느낌은 거의 무정부상태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관료의 90%가 직장에서 이탈해있었고 경찰력이 거의 완전붕괴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미군이 선택한 것은 식민체제의 철저한 해체를 통한 새로운 국가체제의 형성이 아닌 구 질서의 부활이었다. 부활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복구였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한 일인 관료들을 모두 재등용했고 문제가 있는 경우 한인들로 교체한 다음 일인들을 고문으로 삼았다. 교체한 한인들도 한민당류의 친일파였음은 물론이다.
미군은 당장의 치안유지를 위해서 경찰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해방당시의 한국인 경찰은 전체 21000명중 1/3정도였다. 게다가 출근율이 20%조차 안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은 살기위해 잠적했었기때문이다. 그리고 인공이 가지고있던 자치적 치안조직이 상당했고 이들은 경찰서를 접수하는등 실질적인 행동을 취했기때문에 그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대부분의 미군정책은 좌익에 대해 어떤식으로 대응하느냐에서 나왔는데 이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스스로를 민주적이라고 여기는 미군마저도 한국의 혁명적 상황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억압적 통치구조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서 숨어들었던 경찰들과 북쪽에서 넘어온(북한의 혁명적 상황은 매국노들을 남한에 수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민중세력, 일본군이나 관동군에 있었던 이들을 규합하여 경찰력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매우 신속히 이루어져 11월에는 15000명선까지 확보하고 10월 인민항쟁이 있었던 46년 말에는 25000명선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이 남한만의 숫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찰력은 일제 말기보다도 두배이상 강화된 것이다. 경찰의 상부조직은 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출신들과 한민당 일파가 잡았다(경무국장에는 조병옥, 수도경찰청장은 장택상).
이 경찰들은 지금 우리가 여기는 경찰이 아니었다(물론 지금의 경찰도 우리가 여기는 경찰이 아니긴 하다). 당시 남한의 혁명적 상황은 넓은 의미의 내전이라고 말할 정도로 혼란된 상황이었기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에 가까운 경찰력이었다. 훗날 일어나는 10월 인민항쟁이나 4.3 민중항쟁을 막기위해 처음 투입되었던 것도 바로 이들 경찰력이었다.
미군은 경찰력의 복원과 더불어 군대창설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민위원회나 국군준비대 등의 사설무장세력과의 마찰이 생기자 국방경비대 창설이 45년 10월에 결정되었다. 군대창설의 문제는 경찰창설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군대는 국가를 방어하는 기구이며 따라서 국가가 있은 다음에야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미소가 분할점령하고있는 당시 상황에서의 군대창설은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아직 미소협조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인데 단정수립이라는 모습을 보일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워싱턴에서는 이를 반대했고 실제로 미군에 그러한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 그러나 하지는 '화산의 변두리를 걷는'다는 표현을 쓰며 한국내 좌익세력의 강력함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하지에겐 남한에서의 혁명적 상황을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미군이 후에 곤경에 처하리라고 보였기 때문에 그런 부담을 안고도 군대창설을 서두른 것이다. 그리하여 45년이 가기 전에 국방경비대는 조직되었고 대부분의 우익집단은 국방경비대에 흡수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비슷한 시기에 인공에서는 국군준비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당시 국군준비대는 상비군만 15000명을 확보하고있는 무시못할 세력이었다. 국방경비대의 성원을보면 일본군,관동군출신들이 고위직에 많고 학병출신이나 광복군 중국군출신들은 그 아래에 있었다. 고위층 중 상당수가 군사영어학교 출신인데, 군사영어학교 1기생 60명중 20명이 일본군 출신, 20명이 일본 관동군 출신, 20명이 광복군 출신이었다. 이러니 국방경비대는 자연히 친일 경력자들의 또다른 세력집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후에 광복군 출신들은 승진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이들중 많은 이들이 후에 제 1,2공화국을 거쳐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흐름을 있는 주축세력이 되었다.

2.3 # 어긋난 열망[ | ]

미군정이 취한 정책은 명백한 점령정책이었으며 이는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맞추어 대소 방어기지로서의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아래 진행시킨 정책은 한국인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첨예하게 몰고나갔다. 특히 이미 결집하고있던 좌익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군정이 모으기 시작한 우익세력은 친일파들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고 이들은 46년 초의 탁치논쟁때에 이르러 대등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상황은 한국인들의 열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3 # 소련의 국가체제 조직[ | ]

3.1 # 해방군[ | ]

흔히 알고있는 바와는 달리 소련도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소비에트적 국가수립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과 달랐던 것은 단지 북한의 혁명적 상황이 소련의 의도에 적합했고 따라서 북한 민중들과의 대립이 훨씬 덜했다는 점에 있다. 소련은 대부분의 정책을 북한 지도층과 협의 하에 자유적으로 행사한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소련은 미국 못지않게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내세웠고 오히려 미국보다도 국가체제를 먼저 수립하는 등의 발빠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소련은 미국보다 즉시 독립을 선호했고 여러가지로 한국 민중이 원하는 것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단지 소련의 이해관계와 그것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군이 일본과 별다른 대립없이 들어온 것과는 달리 소련은 일본군과 직접 교전을 하며 들어왔다. 북한 북부는 당시 관동군을 격퇴할때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소련군의 작전권에 들어있었고 이것이 수행되는 사이에 일반명령 1호가 승인되어 38선 북부만을 점령하게 되었다.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한 포고에서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에프스키는 '서울의 하늘'에 자유의 깃발이 솟을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일반명령 1호가 아니었다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북한에 들어온 부대는 제 1극동군 산하 제 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이었다. 순조로운 전투끝에 8월 26일에 평양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8월 말까지 북한 전역을 점령하였다. 소련군이 일본군과 교전을 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문에 미군과는 달리 소련군은 남한민중에게 해방군으로 다가온 것이다.

3.2 # 국가 체제 조직[ | ]

치스챠코프는 들어오자마자 평남인민위원회와 접촉했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들었으며 곧바로 제 1극동군 휘하의 군사위원회 장교들을 입국시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9월 14일 소련군 사령부는 '인민정부 수립요강'을 발표했다. 일반명령 1호가 발효된지 한달밖에 안된 시점에서 '정부'수립요강이라니! 소련 역시 외교적 단일정권 수립 노력과 더불어 다른 점령지역과 마찬가지로 들어오자마자 정부를 수립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최고 사령관인 스탈린이 직접 정책에 대한 대강을 하달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관심이 별것 아니었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치스챠코프는 곧 소비에트 민정을 수립(10월 3일)하였고 이는 북한에서 소련군의 일을 처리하는 기관이었다. 이 민정이라는 말은 인민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기관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지 결코 북한 지도자들이 주가되어 일을 처리한 것은 아니다. 즉 미군정과 전혀 차별성을 갖지 못하는 기관인 것이다. 소비에트 민정은 25군 직속의 위수사령부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주로 인민위원회의 사업을 지원하거나 묵인하는 형태로 북한을 통치해나갔다. 후에 한국인의 독자적 정치조직인 행정 10국이 구성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동시에 북한지역의 행정을 장악할 한국인 기구를 만들기 위해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결성되었다. 북한지역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각 도인민위원회간의 연계가 적었기에 이를 묶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중앙행정조직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각 도인민위원회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리감은 46년 2월에 결성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구성으로 극복된다.
남한에서의 혁명적 상황을 진압하기 위하여 미군은 경찰력의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반면 북한에서의 혁명적 상황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소련은 독자적인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것은 미군정이 미국무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군대를 창설한 만큼의 중요한 문제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일국일당원칙은 결코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산당을 창당하는 것은 '확보된 지역의 사회주의화'라는 소련 정책에 의해 남북한의 통일정부수립을 뒷전으로 미룬 것이라 하겠다.
9월 19일 귀국한 김일성은 귀국과 동시에 독자적인 공산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당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인 박헌영이 직접 북으로 올라가 상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의 힘은 소련에 있었고 김일성은 소련을 업고있었다. 결국 조공 북조선분국은 창당되었고 명목상 조공 산하에 있었지만 이는 명백한 독자적 공산당의 창당이었다. 이후 10월 13일의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대중앞에 극적으로 등장한 김일성은 당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움직이기 시각했다.
해방직후 북한의 최고 정치지도자는 누가 뭐래도 조만식이었다. 따라서 소련측도 조만식을 포용하기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으나 조만식은 소련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소련은 일찍부터 북한의 한국인 행정조직을 구성하려했으나 조만식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공 북조선분국을 창설하여 북한의 힘이 소련에 있다는것이 보다 확연해졌고 조만식은 그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결국 조만식이 연금된 채로 11월 19일에 결성된 행정 10국은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경찰력의 확보인데 일단 소련이 사설 무장집단을 해산시킨 다음 김일성그룹이 장악한 보안대가 생겼다. 김일성그룹의 권력장악과정이 한민당과 매우 유사함을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또 사법국에서는 몇몇 악법을 제외하고는 일제때의 법률이 계속 효력을 지닌다고 공표했다. 이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외압 세력의 존재,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타 정당간, 계파간의 투쟁, 해방정국 인민들의 폭발적인 요구와 지원들.... 북한 역시 안정된 상황이 아니라 혁명정 상황이었고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이것저것 다 가려 할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소련의 정책중 다시한번 미군과 유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정치세력의 배제이다. 미군이 중경임시정부의 입국을 막은 것처럼 소련도 무정 휘하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막았다. 김일성의 헤게모니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정도의 힘을 가진 세력이 들어오는 것은 노선에 혼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기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중국에 가까운 세력이었으므로 소련은 자신들에게 결코 좋을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3.3 # 점령군[ | ]

소련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점령정책을 취했을 뿐 결코 한국인의 열망에 부응하는 노력을 보인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이해와 한국 민중의 이해가 미국의 이해와 조금 더 가까웠던 것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군보다 일관된 방침을 관철해 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이 내건 동시철군이나 즉시독립과 같은 외교적인 모습들도 자신들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한 것들이었고 이미 삼상회의 전에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상당하게 수립해놓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참여하였고 미국과 결의안을 체택하였다. 남북한이 급속하게 이질화되는 가운데 두개의 외적 규정세력이 만난것이다.
소련으로서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4 # 모스크바 삼상회의[ | ]

4.1 # 신탁통치의 기원[ | ]

일차대전 직후 당시 미국대통령 윌슨은 전후 식민지 처리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웠다(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데는 이 나라가 이상을 숭상'만'하는 나라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미국은 초기부터 타락한 유럽을 떠나 새나라를 만든다는 이상주의적 개척정신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며 그러한 정신은 여전히 미국인들에게 남아있고 이것은 애국심의 원천이기도하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라면 언제든지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잘 왜곡된 애국심에 의해 뒷받침된다. 미국 문화에서 흔히 보이는 제국주의적 요소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리고 자치능력을 가질때까지 위임통치를 실시한다는 명분으로 점령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 단지 식민지 재분할 논리였던것 뿐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이승만의 위임통치건의는 묵살되었다.
이차대전 말기에 대통령이던 루즈벨트는 전형적인 미국식 이상주의자였고, 대전후 세계 최강대국의 수뇌로 그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구상은 42년 8월에 정책으로 입안되었다.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장한 것은 43년 3월에 이뤄진 영국외상 이든과의 논의에서였다. 곧 이는 보도되었고 망명 한국인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카이로회담(43년 11월)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어떤 절차를 거친후)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이뤄질 것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 역시 일제에의해 왜곡되어 제대로 국내에 알려지지않았다. 이어 이뤄진 테헤란회담(44년 11월)이나 얄타회담(45년 2월)에서도 구체적인 사항이 명시되지 않은채 구두합의 정도만 이루어졌다. 이는 미국의 정책이 일관적인 것도 확정된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들과 구체적인 상의도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게다가 자국내의 반대자들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안을 주장해왔던 루즈벨트가 사망(45년 4월)하자 더이상의 구체적인 합의는 이루어지기 힘들게 되었다.
트루먼이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자 상황은 변했다. 트루먼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당시는 국제적 협력을 모색하기 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놓치면 안되는 시대였기도 하다. 트루먼은 홉킨스를 특사로 파견하여 소련과 회담(45년 5월)을 가졌고 여기서 그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약속, 탁치안 지지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원자폭탄실험의 성공으로 인하여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불만스러워졌다. 그러나 원폭투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항복은 소련의 참전 뒤에 이루어졌다. 당시의 관례대로라면 군사적 점령이 곧 정치적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소련군은 이미 미국보다 빨리 한국에 진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은 일반명령 1호를 소련측에 제안하여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고자하였다. 일반명령 1호는 미국이 남한의 곡창지대와 수도 서울을 확보할 수 있는 북위 38도선 까지 진주하고 소련은 그 이북에 진주한다는 미국에 유리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념을 표방하는 양군이 한 나라의 남북에 주둔하게 되었다. 어떻게 신탁통치를 해 나갈것인지 계획조차 마련되지 않은채로.

4.2 #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 | ]

미국은 자기들을 정의의 나라라고 여겼기때문에 최대한 민주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려하였다.
이미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 지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럽국가들은 전세계 총생산의 70%를 생산하는 미국의 도움없이는 회생하기 힘든 상황이었고(뉴딜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미국과 대응할만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는 소련밖에 없었다. 미국은 그런 군사,경제력으로 UN을 장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UN관리하의 신탁통치는, 특히 미영중 대 소라는 대립구도에서 서유럽국가들의 지원까지 있으면 한국은 미국이 주무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기식의 시스템을 한 나라에 이식해 놓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종속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다른나라를 지배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인것이다.

4.3 # 모스크바 삼상회의[ | ]

이상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탁통치가 미국에만 좋다는 것은 모든 나라가 다 알고있었다. 따라서 미국을 제외하곤 모두 즉시독립을 선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45년 12월 16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러나 삼상회의에 참여한 국가는 미영소였고 영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점령국이 아니었으므로 결정은 오로지 미소에 달려있었다.
중요한 것은 당시는 냉전 심화의 조짐이 보이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서로 타협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먼저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일본 처리문제가 소련의 점령 참여 보장으로 확정되어 소련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실제로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만족한 소련은 한국문제에 관하여 상당히 유화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은 UN주재하의 신탁통치라는 속보이는 안을 내놓았고 소련은 임정수립하의 후견안을 제안했다. 결국 소련측에서 제안한 삼상회의 결의안을 미국은 거의 수정하지 않고 동의하였다. 합의하에 결정된 전문은 아래와 같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의제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의 4국정부에 그 참고에 공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조선 인민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 4국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남북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연방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4.4 # 미소의 목적[ | ]

소련 역시 처음에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미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좌익이 주축이 된 인민위원회였고 민족주의세력도 힘이 있는 이들은 중도좌파에 속해있는 인물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소가 분할점령한 상태에서 미국이 그런것에 응할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했고 그런 상황에서 삼상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미영중소 주도의 신탁통치안을 실시한다는 것을 얻어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대 공산주의 진영이 3대 1이라는 것을 높게 봤던 것이다. 반면 소련은 그것을 양보한 대신 한국임시정부의 참여를 확정지어 나름대로 이익을 챙겼다. 한국임시정부의 구성은 좌익이 강세일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삼상회의 결정은 양국의 이익이 교묘히 배합된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을 처음 주장한 미국조차 어떤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몰랐지만 어쨌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은 통과되었다.
결의문을 살펴보면 미소공위 설치, 국내 제 정치단체들과 협의, 임시정부수립, 임정참여하의 신탁통치방안 협의, 미소의 확정의 순서대로 진행될 것이었다. 즉 외국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련이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미소의 후견하에 임시정부의 주도로 나라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찬탁반탁의 문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의 문제였는데 거센 반탁운동 속에서 이런 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일관성 있는 의견을 더욱 영향력있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시독립에의 강한 열망은 삼상회의 결의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하였고 이를 악용하여 득세한 민족반역자들에의해 결국 폐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미소가 너무도 불안정한 국내정세를 보고 결의 당시부터도 가변적이었던 신탁통치안을 계속 추진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자국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하는 것을 택한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탁치안의 지지목적도 결국은 자국에의 우호적 정부수립이었고 단정수립으로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 맺으며[ | ]

이것은 96년 2학기때 95학번들에 의해서 준비되던 자료집에 넣을 글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들에 의해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어쨌는 거기에는 나도 일조를 했다.
그렇지만 이 글은 나에게 빨리 정리해야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주었고 지난 겨울에 쓰다가 못 쓴 이래 한학기 내내 나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 다시 정리하려고 책을 폈지만 지난 겨울의 지겨웠던 기억들 때문에 도저히 잡다한 글들을 다시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들도 길고 종류도 다양했다. 그래서 어느날 그냥 대충 정리하여 글을 맺어버렸다.
사실 이글은 '대외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45년말의 정세'라는 주제를 일학년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준으로 쓴다는 기획이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써본적이 없던 나는 책 읽기에도 급급했고 체계적인 정리도 하지 않아서 나 스스로마저 정신없게 만들었다. 처음에 대체적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를 조망하고 그 체제에 맞추어 단락을 결정한 다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것은 지금 생각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어쨌든 그랬어야 했다.
결국 이 글은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라는 문제를 스스로 터득하게 한 나름대로 훌륭한 연습이 된 것이다.

5.1 # 참고문헌(중요한 글에는 :D표시를 해두었다.)[ | ]

  •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Korean War,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86년이전,일월서각
해방공간에 관한 가장 저명한 저서이기는 하나 이미 오래전 연구이다. 게다가 이정도로 저명한 사회과학서적 치고는 매우 형편없는 구성과 에세이적인 어투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좋다. 한국어판이 86년이다.
  • 한국현대민중운동연구,서중석,92년,역사비평사 :D
일제시기부터 단정수립까지의 민족국가 수립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쓰여진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보강)이다. 다양한 방면의 치밀한 연구서로 해방공간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1~2회독을 한 책이지만 아직도 전체적인 조망을 하기 힘든 방대한 책이다.
  •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박명림,96년,나남출판 :D
전체를 다 읽진 않아서 뭐라고 할수는 없지만 비교적 연구가 잘 되어있지 않은 소련측 자료나 북한쪽의 자료를 다루어서 한국현대민중운동연구와 더불어 일독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준다. 최근에 저명한 학술상(기억이 안나네..)을 받았다.
  • 한국국제관계사 연구 2,구대열,95년,역사비평사 :D
해방공간을 외교적 차원에서 집대성한 획기적인 연구다. 다른 연구서들이 국내부분에 치우쳤던 것을 보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1권은 일제시기이다.

일단 이상의 것들이 단행본으로 정리된 책 중에서 도움되었던 것들이고 이하는 논문이다.

  •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사 중
    •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안진
    • 분단의 배경과 고착화 과정, 김학준
    • 해방 직후의 소련의 대북한정책, 박재권 :D
    • 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46, 이완범 :D
    •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 진덕규
    • 해방 3년사의 쟁점, 이완범
    • 서론:해방,분단,한국전쟁의 총체적 인식, 박명림
    • 8.15의 민족사적 인식, 송건호
  • 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1945~1946, 김성보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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