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대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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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상세한 글을 읽으려면 대외적관점에서본해방정국을 보시오.

1 # 신탁통치 혹은 점령[ | ]

신탁통치의 근원은 19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대통령이던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외치며 동시에 위임통치라는 해괴한 말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권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일차대전 전승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분리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물론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제하에 놓여있었고 민족 자결주의는 우리 차례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윌슨을 멋지다고 생각한 루즈벨트는 자기도 본받아서 이차대전 직후 신탁통치라는 이름으로 위임통치 비슷하게 하려했다. 40년에 이미 범미국신탁통치안이라는 정책이 마련되었고 이것은 시행되기도 전인 41년에 중국의 망명 한인들에게 알려져 반발을 샀다. 한국인들은 즉시 독립이 아니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아시아에서 해방된 국가는 자치능력이 부족하므로 교육을 통한 준비기가 필요하다면서 이를 42년 8월에 확실한 정책으로 삼는다. 이것이 해외로 알려지자 김구, 이승만 등은 즉각 반발했지만 망명 정객의 반발쯤이야 간단히 무시되었다.
43년 11월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미영중의 수뇌들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했고 이는 우리에게 와전되어 많은이들은 곧 독립되리라고 예상하였다. 같은 시기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루르벨트는 한국민은 사십년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스탈린에게 말했고 스탈린은 적당히 동의했다.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도 구두합의만이 재확인되었다. 여기서 스탈린은 영국도 회담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당시 극동에 딱히 이권이 없던 영국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소련이 우리나라에 큰 관심이 없고 단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죽는다.
뒤를 이은 트루먼은 처음부터 소련과의 우호관계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상보다는 현실을 중요시했던 그는 신탁안의 세부사항은 정하지도 않고 회담을 적당히 마무리지으며 소련의 참전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곧 원자탄이 개발되어 일본을 쉽게 깰 수 있을것처럼 보이니까 소련 참전 이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일본에 잽싸게 원자탄을 뿌렸다. 하지만 일본은 폭탄 맞고도 며칠을 더 버텼으며 그새 소련은 순식간에 선전포고를 하고 부대를 이동시켰다. 원폭투하는 일본의 군사력을 부담스러워 하던 소련의 부담을 오히려 덜어주고 트루먼의 계획은 깨졌다. 미국은 소련의 신속한 대응에 겁을 먹고 소련이 극동에서의 힘을 키우기 전에 일반명령 1호를 제안하였으며 소련도 손해볼게 없어서 이를 받아들인다.

먼저 신탁통치안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자. 신탁통치란 식민지 민중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권력의 부여를 유보하는 것이다(커밍스).
신탁통치안은 처음부터 많은 벽에 부딪쳤다. 영국같은 우방에게서도 거부당했던 것이다. 물론 영국은 미국에게 너무 유리하다고 거부한 것이지 한국민을 위한 조치는 아니었다. 신탁통치안의 배후를 들여다보면 강대국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이미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전쟁 당시 세계 총 생산의 3분의 2이상 차지)이었고 연합국의 대부분은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힘들 처지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탁통치가 이루어진다면 미국은 다른 점령국과는 관계없이 피점령국가를 자신들의 시스템에 맞게 개조할 것이었다. 미국은 그런 의도에서 이삼십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그러한 결과는 필리핀에서 이미 충분히 맛본 터였다. 게다가 피점령국은 해방되어도 미국밖에 의지할 나라가 없기때문에 미국에 종속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미국은 신탁통치와 더불어 점령안도 구상하고 있었다.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처하고있는 만큼 자유롭고 상호 신뢰속에서 신탁통치안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지만 안되면 무력으로라도 점령할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트루먼은 소련을 결코 믿지 않았기때문에 점령안은 미국의 극동전략에 있어서 신탁통치안과 같은 혹은 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일본 본토 진입이 어떻게 될지, 관동군의 여력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종용했고 두 정책은 모두 보류되었다.

2 # 38선 획정[ | ]

미국의 대한정책 중 가장 먼저 이루어 진 것이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진주하기로 한 '일반명령 1호'이다.
38선 획정은 45년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밤중에 있었던 철야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그것도 대령 두 명에게 30분의 시간을 주고 그 때 결정하라고 시킨것이었다.
그들이 그은 38선은 실제로 너무나 북쪽에 있었고 땅의 비옥도로 보나 인구로 보나 남한쪽이 훨씬 유리했다. 미국은 소련의 의도를 시험한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38선 제안을 그냥 받아들였다.
소련으로서는 별로 손해볼 게 없었다. 이미 대일전 참전 조건으로 일차대전 이후 잃었던 권리들을 다 되찾았고 주된 관심은 동구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없는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앞으로의 더 중요한 사항들에 악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분할 점령은 자신들의 영역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서도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이미 미국은 오래전에 동북아 정책을 구상했다. 그런데 소련이 너무 빨리 진주하는 바람에 소련의 의도를 시험해서 전략을 수정해야 할 입장이었다. 또 미국은 인구의 상당부분과 수도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족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버리고 점령을 선택했다.

3 # 미군의 진주[ | ]

먼저 45년경의 상황을 살펴보자.
일제와 친일 지주들이 갖고있던 토지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는 당시 남한의 가장 큰 문제였다. 인구의 태반이 농민이었고 그들의 생활은 극빈의 상태였기때문에 가장 큰 화약고였다. 그리고 항일운동이 좌익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일반인들은 좌익에 대한 관심이 강했고 해방과 더불어 좌우익의 대립이 심해지자 사람들이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갖는 상태였다.
미국은 9월 8일에 점령군으로 진주하였다. 2차대전 후 점령은 패전국에 한해서만 하게 되어있었는데 우리는 미소에의해 점령되었으니 패전국으로 간주된 것이다. 포고 1호에는 정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없이 엄벌에 처한다고 적혀있다. 그들은 곧 조선총독부를 접수했는데 이는 일제가 미군정으로 치환된 것이다. 질서 유지를 위해서 미군정은 맞아 죽을까봐 숨어있는 친일 행각자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군경의 고위직에 앉혀놓고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 건준의 특사나 여운형등을 제쳐놓고 한민당 측의 미국 유학파들과 만나서 그들을 요직에 앉히고 한민당과 임정을 이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또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위해 정당설립을 자유화시켜 친일파들이 날뛰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인공을 부인하면서 당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인공이 반발하자 강제로 당사를 접수하고 조직을 와해시켰으며 인민위원회를 무력으로 분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우익은 임정을 추대하려했으나 별로 힘이 없던 임정을 추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대신 이승만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곧 모스크바 삼상협정결과가 발표되고 온 나라안이 탁치문제로 벌집 쑤신듯 하였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은 반탁을 애국으로 간주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해서 자신들이 면죄부라도 받은 양 활개치고 다녔다. 좌우익이 서로를 매국노라고 헐뜯는 동안 미국은 난감한 입장에 빠졌다. 자신들은 모스크바 삼상협정을 실천해야 할 입장인데 우익이 반탁이고 좌익이 찬탁이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삼상협정에 따르면 곧 임시정부를 수립해야했고 이대로라면 좌익쪽의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그 와중에서도 좌익의 가장 큰 무장세력인 국군준비대를 해산시키고 학병동맹을 습격하는등 좌익 탄압을 가속시켰다.
이즈음 미국은 이제서야 국내 자문기구이자 의견수렴기구인 민주의원을 구성한다. 처음엔 여운형도 포함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순전히 우익일색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으로 취임한 이 단체는 전혀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대항하여 좌익측도 민전을 결성하는데 민전 역시 대표성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한다. 탁치문제로 부상한 좌우익의 대립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점차 심화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성공적으로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남한에서도 토지불하를 실시하려 했으나 그것이 실시되지 못하고 신한공사를 만드는데 그쳤다.
어쨌든 미소공동위원회는 열렸고 여기서 발표된 공동성명 5호는 삼상협정을 지지하는 내용이었으며 결국 좌익은 물론이고 우익의 대부분이 우여곡절을 통해 동의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좌익 정당의 수가 우익에 비해 현저히 적은것과 우익측이 공위 동의가 찬탁을 뜻하는 것을 명시하자고 주장하자 그것을 거부하여 공위는 무기한 휴회로 들어갔다. 우익측이 반탁투쟁을 임시정부수립 후로 미루거나 좌익도 임시정부수립을 우선시 했더라면 벌어지지 않을 비극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면 미군은 조약에 따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좌익은 일단 미국을 안심시켜 내보내야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휴회는 곧 결렬로 이어졌다.
공위 결렬후 우익은 반공선전과 대 좌익 테러를 강화했으며 미군은 좌익을 분열시키고 좌우합작을 시도하려했다. 당시는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미군은 우익이 너무 극성스럽게 반탁운동을 펼치자 피곤해졌다. 그래서 중도파를 키워 자신들의 대리자로 만들 생각을 했다. 중도파는 중도 좌익과 우익을 합쳐서 만들려했다. 또 중도 좌익을 좌익에서 분열시켜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깔려있었다. 게다가 중도파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되면 모스크바 삼상협정이후로 정책에서 밀리던 미국은 소련을 누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민전측에서 제시한 합작 5원칙은 미군의 의도와는 어긋났고 미군은 좌익을 포용하지 못한채 입법의원을 설치하여 좌우합작은 실패했다.
좌우익의 제 정당들이 다양한 이합집산과 노선변경을 겪은 후 이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 때는 일차공위에서 막혔던 협의 대상 규정문제가 합의된 듯 하더니 다시 그 문제가 걸려서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 때는 미국의 냉전 정책이 거의 완성되던 시기여서 미국은 대소 강경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후 미국의 협조 노력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런 여러 문제는 난항을 거듭하다 UN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결국 단정 수립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크게 몇가지 기준을 설정하고 나머지를 현지 사정에 맞추어 실행되었다.

  1. 변혁 세력 저지를 위한 군경의 강화
  2. 우익 정치세력과의 연대
  3. 좌익세력 철저 탄압과 분열 조장

이 세가지 또한 단 한가지, 남한 사회의 효율적 지배라는 목적의 세칙이다.

4 # 소련의 진주[ | ]

소련은 진주 직후 자신들이 점령이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의 의사가 없고 단지 일제를 몰아내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소련도 처음에는 일제가 남긴 기구들을 그대로 끌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고문단의 의견도 존중하고 이미 좌익진영의 활동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구태여 일제의 기구를 쓸 필요는 없었다. 소련 역시 자신들에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억압했으며 행정권을 넘겼다 하더라도 국제적인 문제에서의 명의는 항상 소군정의 이름으로 했고 군사권을 여전히 쥐고있었다. 그들이 미군과 달랐던 것은 북한의 환경이 자기들에게 좀 더 유리하였다는 것 뿐이다. 그들 역시 우호적인 정부수립이라는 생각 외에는 별다른 점령정책없이 진주하였다.
소련은 먼저 자신들의 관할에 있는 지역부터 정치조직을 구성하고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미국처럼 단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진행시켜가고 있었다고 하는편이 더 정확하다. 북한 5도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봐도 그렇고 수뇌부가 남한쪽에 대해서나 통일방안에 대해서나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정책과는 달리 소련의 정책은 처음부터 북한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공 북조선분국이 수립된 것은 북한에서 단독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곧이어 조만식이 주축이되어 조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그 때쯤 신의주 사건이 터졌다. 소군정에 항의하던 학생들에게 발포한 사건이다. 이때 사태수습을 위해 김일성이 나섰고 그는 본격적으로 조공에 참여한다. 당시 김일성은 남한의 이승만처럼 인기가 있었고 소군정이 지지하던 상황이었다. 신의주 사건을 수습하는데서 조공과 조선민주당과의 반목이 심화된다.
탁치문제는 북쪽에서도 큰 이슈였는데 조만식은 반탁이었다. 소련은 이를 괘씸하게 여겨서 그를 연금시켰고 김일성은 그를 정치적으로 매장시켰다. 이후 주도권을 잡게된 김일성은 인민위원회의 간부진을 구성하고 곧 토지개혁을 시작한다.

5 # 모스크바 삼상협정[ | ]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의제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의 4국정부에 그 참고에 공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조선 인민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 4국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남북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연방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모스크바 삼상협정은 양쪽 모두 타협한 방안이었다. 미국은 미영중 대 소련이라는 상황을 유리하게 보았고 소련은 조선에서의 상황이 친소정부를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손해라고 느낀다면 언제든 조약을 깰 수 있었다. 반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손해볼게 없었다.
모스크바 삼상협정은 기본적으로는 신탁통치안이지만 미국이 주장하는 신탁통치안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그들과의 협의를 거쳐 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이나 그 기간이 5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미국이 자신들의 동맹국을 끌어들여 소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던 것도 여기서는 미소의 입장이 대등하게 제시되어있다. 게다가 약속대로 조선 임시정부를 구성한다면 이미 신속하게 국가를 형성하고있던 인민위원회와 인공의 영향력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소련이 원하던 친소적인(혹은 반소적이지 않은) 정부수립에 유리했다. 협정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자마자 조공에서 지지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격렬한 반탁운동과 미국의 인식이 탁치보다는 점령쪽으로 변해가면서 모스크바 삼상협정은 휴지가 되어갔다.
사실 모스크바 삼상협정은 일반명령 1호가 제안되고도 몇달이나 후에 발표된 것이다. 게다가 소련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시큰둥한 면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뭉쳐서 이를 지지했어도 시행 될까말까 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반탁운동을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세에 치일대로 치인 우리 민족은 즉각적인 독립을 너무나 갈망했다.
물론 외세에 의해 채결된 것이므로 모스크바 삼상협정에 그들의 입장이 주로 반영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입장이 조금이나마 반영되는 상황에서라면 더 나은 결과를 낳을수도 있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강대군이 분할점령하여 신탁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통일 독립국가가 되었다(물론 여러 상황이 우리와는 달랐겠지만).
그러나 민심에 야합하여 대세의 주도권을 잡으려던 우익진영은 곧 거센 반탁운동을 벌였다. 당시 우익진영은 탁치안이 실시될 경우 공산정부가 수립되리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꼈다. 소련에서 찬탁 지령을 받기도 한 좌익은 반탁운동에 반하여 찬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이 헤게모니 싸움에서 우익쪽이 승리하였고 이것은 이승만의 입지를 강화해주면서 미국의 단정수립을 용이하게 했다.
아무리 강한 점령국이라 하더라도 피점령국의 의사가 강하기만 하다면 그것을 완전히 꺾어가며 정책을 펼 수는 없다. 하지만 자파의 세력확보를 위해 좌우익은 국론을 분열시켰고 이 과정에서 분열된 국론은 우리의 발언권을 앗아갔으며 우리의 운명은 미소의 손아귀안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6 # 마침[ | ]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커밍스의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미국은 한국의 독립이나 자결권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다. 신탁통치는 그 고도의 수사적인 장식으로 되어있었지만 실은 미국의 이익을 증가시키려는 전후구상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신탁통치가 최선의 방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미국은 즉시 이를 포기했던 것이다.
미국의 목적은 오로지 우호적인 한국의 건설에 있었으며....

소련의 대한정책은 슈티코프의 연설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련은 조선이 진실한 민주주의적 독립국가가 되기를 요망하며 소련과 우의적 국가가 되기를 요망한다. 그리하여 조선이 장차 소련을 침범함에 필요한 요새지와 근거지가 되지 않기를 요망한다.

결국 양쪽 모두 외세였다.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신탁통치안, 모스크바 삼상협정, 38선 획정이 모두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에 왔다갔다했다. 그 어느쪽도 우리의 통일정부 수립은 신경쓰지 않았다. 통일정부가 자기들에게 친한 쪽으로 세워지면 금상첨화였고 분단이 되더라도 서로의 침략 야욕을 막을 방어선만 있으면 되었다.
우리에게도 그 책임은 있다. 이데올로기와 권력확보를 위한 내분이 있었고 그때문에 가장 중요한 국론통일에 실패한 것이다.

7 # 참고도서와 연표[ | ]

분단전후의 현대사 중
 한국의 해방과 미국정책(브루스 커밍스)
 소련의 대북한정책 1945-1946(와다 하루끼)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사 1
해방 전후사의 인식 3 중
 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1946(이완범)
해방 전후사의 인식 6 중
 해방 3년사의 쟁점(이완범)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서중석)
1945년
08.10   소련군 웅기에 진주.
08.15   일본 항복.
08.15   여운형, 정권이양교섭 수락.
08.15   건준 발족.
08.16   미국, 일반명령 1호 제안.
08.16   조공 재건.
09.02   맥아더, 분할 점령안 발표.
09.06   하지, 미군정 실시 포고.
09.06   건준, 인공 수립 선포.
09.09   한민당 결성.
09.13   건준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
09.19   김일성 귀국.
10.16   소련사령관의 명령서 발표.
10.16   이승만 귀국.
10.20   조공 북조선 분국 결성.
11.05   전평 결성.
11.11   조선인민당 결성.
11.23   김구 귀국.
12.12   하지, 인공 부인.
12.28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통치안 발표.

1946년
01.02   조공,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발표.
01.05   조만식 연금.
02.08   김구와 이승만, 독촉 결성.
02.14   민주의원 결성.
02.15   좌익 단체들,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03.30   북한, 토지개혁 종결.
05.07   일차 미소 공위 결렬.
06.03   이승만, 정읍발언.
06.14   좌우합작회담 시작.
08.28   북로당 창당대회.
10.01   시월 인민항쟁.
11.23   남로당 결성.
12.12   입법의원 개원.

1947년
01.24   김구, 반탁투쟁위 결성.
02.19   북조선 인민회의 창설.
06.05   여운형, 근로인민당 결성.
07.10   이차 미소공위 결렬.
07.19   여운형 암살.
09.17   미국, UN에 한국문제 상정제의.
09.26   슈티코프, 동시철군 주장.
12.22   김구, 단정수립 반대성명.

1948년
01.23   북한, UN위원단 입국거부.
02.07   2.7 구국투쟁.
02.26   UN, 단독 선거 결의.
04.03   4.3 민중항쟁.
04.19   남북연석회의.
05.10   5.10 단독선거.
08.15   남한, 단정수립.
09.09   북한, 단정수립.

8 # 촌평[ | ]

오호 이런 글도 있었군. 이것이 대외적관점에서본해방정국의 모태가 된 글 같다.

봉화 '96 겨울 집단학습

                        미소의 대한정책

                                                        95 정철

라고 적혀있으니 학부 2학년 겨울방학때 쓴 것이군...-_-a -- 거북이 2004-1-27 6:3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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