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걸어보기

목차

1 #[편집]

양재천을 밤에 걸었다. 가끔 뛰곤 하는데 이번에는 그냥 걷고싶어서 걸었다.

걸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이기적유전자를 읽으면서도 했던 생각인데, 과연 유전자가 우선인가 개체가 우선인가 하는 문제다. 도킨스는 크게 보아 유전자, 즉 논리이자 소프트웨어이자 알고리즘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도 결국 조심스러웠던 것은 개체의 독자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앞을 걸어가는 한쌍의 젊은 남녀를 보았는데, 그 젊은 남녀는 둘 다 키도 크고 잘 빠졌었다. 그러한 미적 쾌감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체형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최적화된 구성이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최적화는 아름다운 형태를 띠는데 아름답기 때문에 최적화가 되는건지 최적화가 좋은것이라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고작 단백질의 배열과 위치때문에 세상에서 그렇게 큰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지만 나만 해도 이쁜 여자가 좋으니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러다가 생각은 근처에 있는 잡초들로 튀었다. 왜 우리가 좋아하는 꽃나무나 벼 등은 잡초가 아닐까. 그런 이로운 것들은 키우려해도 잘 안자라고 잡초는 없애려해도 엄청나게 자라난다. 양재천변의 겨울은 황량하지만 여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은 잡초 정글이 된다. 물론 이롭다 어쩐다 하는 기준이 다 인간이라는게 문제지만, 사실 인간에게 좋은 것들은 대체로 다른 동물들에게도 좋은 아이템이다. 꿀도 과일도 열매도 그렇지 않은가. 왜 어떤 조직은 잡초가 되고, 어떤 조직은 꽃나무가 되는 것일까. 개체들의 경쟁과 그 사이의 변이들이 모여 더 나은 유전자를 만들어내게끔 하는 시스템인 것일까. 그러면 잡초들에게는 강인한 생명력이라는 유전자를 박아넣은 것인가.

그러면 유전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언어와 감정이라는 것을 통해 어떤 변이를 만들게 하려는 것일까. 단백질 배치 말고도 노래니 춤이니 이런 것들까지 반영되어 인간의 우성 인자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심지어는 호킹과 같은, 유전자 입장에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는 전달자도 인간 세상에서는 훌륭한 문화창조자가 된다. 그리고 이미 인간의 탐미성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기괴함과 추악함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학살, 전쟁, 파시즘에서조차 숭고미를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조화로운 것 같은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참 조화롭지 못한 무엇이 있다.

이런 류의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보고 싶어졌다. 눈을 감고 조금 걸었는데 나는 스무걸음을 채 똑바로 걷지 못하고 길에서 벗어났다. 어라 하다가 뭐 다시 해보지 그랬는데 다시 해도 똑같은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나는 다른 감각에 의존하여 아주 천천히 걸어야 겨우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서너번 실패한 나는 오기로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백걸음은 걸어보리라. 발바닥의 느낌으로 빨간 아스팔트 부분과 사이드의 대리석(?) 부분을 구분해야 했고 풀이 밟히지 않는지 체크해야 했다. 내 오른쪽으로 누군가가 조깅을 하여 스쳐지나가면 아 내 오른쪽에는 공간이 조금 있구나 하면서 왼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백걸음을 걷고 눈을 떴다. 내가 시각에 얼마나 의존하는가를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개는 인간보다 이만배정도는 코가 좋다고 하던데. 개는 후각으로 우리의 시각만큼이나 많은 것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냄새로 무엇인지 판단하고 거리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 세상을 보고싶어졌다. -- 거북이 2007-9-10 12:29 am

2 # 촌평[편집]

할룽 오라방. 요즘 심난해 하는 것 같아 평소 하지 않는 댓글 달기를 해보기로 하였소. 눈을 감고 걸었다니 참으로 잼난 일을 했구랴. 나도 가끔 해보긴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게 알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랄까? 얼마전에 '어둠 속의 대화'전에 갔었소. 전시라고는 하지만 보여주는 건 없고, 어둠 속에서 잡다구리한 체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었지라. 난 2마넌이나 내고 겪은 것을 오라방은 땡전 한푼 안들이고 했다니 참으로 경제적이오^^ 그르누이랑 친구먹고 함 해보시우.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고 하는데 이참에 함 개발해보구랴 ㅋㅋ -- 하로 2007-9-11 2:39 am

어둠속의 대화가 재미있었다는 사람들이 좀 있더구먼. 그르누이 정도의 후각 센서를 가질 수 있다면 시각을 포기할 수 있을지도 ㅎㅎ 일찍 자게나~ -- 거북이 2007-9-11 10:1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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