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이야기

1 # 떠나기 전[ | ]

자전거 여행중에 인연이 닿는 곳이 있었다. 여행을 끝내고 겨울을 잘 보냈어야 했는데 어영부영 하다보니 시간이 다 가버렸고 좀 막막한 기분에 박한 품삯에도 불구하고 산골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강원도 영월 거운리 장화동 이란 곳인데 장화신은 고양이는 살지 않는것 같다.

여행다닐 때도 느낀 것이었지만 태백에서 영월쪽 라인은 대단히 탁하다. 예전에 탄광지역들은 개발독재시절 엉망으로 개발되었고, 지금은 버려졌다. 그래서 70년대적 촌스러움이 묻어있고 지저분하다. 그리고 강원도라고 해도 오대산 아래쪽은 산이 500m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인지 개발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동강 주변은 동강 살리기 운동과 레프팅으로 너무 알려져서 레저산업이 어설프게 발달하여 너저분해 졌고, 동강의 수질도 상류의 오염으로 그리 좋지 않다. 게다가 최근에는 제방공사와 도로건설로 더더욱 파괴되었다. 그리고 영월군 소재지와 지나치게 가까워서 그 탁함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영 아닌 곳이다. 만약 길이 제대로 나기 이전이라면 정말 아담하게 숨겨진 포근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길이 나면 과잉된 근대문명과 혼란스런 현대문명이 바이러스처럼 흘러들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것은 노동과 정적을 찿기 위해서 였다. 낮에 일하고 밤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은 태양과 달에 순응하는 것일테고,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한 문명의 이기와 작별하기도 원했다.

2 # 이곳에서[ | ]

벌써 이곳에 온지 석달이 넘었고, 이제 이 생활에 젖어 처음의 마음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이며, 슬슬 짜증과 분노가 피어오른다. 진심을 죽이려 한 것이 되려 더욱 피어오르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나의 오해와 잘못된 선택 때문이리라. 농사와 산골 또한 현대사회 속에서 변했다는 것을 간과한 결과였다.

농사라 하면 소끄는 농부가 생각나기 마련이다. 다행히 이곳은 워낙 비탈이 져서 소로 밭을 갈아야 한다. 덕분에 소와는 무척 친해졌다. 하지면 현대의 농사는 농약 덕분에 정말 더러워져 버렸다. 끝도없이 제초제와 살충제를 쳐대고, 화학비료를 살포해대는데 정말 지쳐버렸다. 그리고 농사의 본질이 이런 것인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소나 돼지등의 식용 가축을 사육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안좋게 생각하는데, 일단은 지난 조류독감 사태때 생매장 되던 닭과 오리가 떠오르면서, 인간이 먹기 위해 특정 생물을 도구화 하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좋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생산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소비자는 싸게 먹기 위해서 이런 시스템이 들어오게 되는데, 가축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말 지옥이 따로없을 것이다. 더럽고 지나치게 좁은 곳에 가두어진 채 스트레스 를 받으며 먹고 싸다가 어느 순간 목이 잘리는 거다. 게다가 인간을 위해서 이런 저런 사악한 주사와 사료를 먹으며, 지난 사태에서 보듯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몰살 당하기도 한다.

이번에 김선일씨 동영상을 보았다. 이전 미국인 참수 때보다 훨씬 덜 자극적인 영상이었다. 이라크인들이 아무래도 미국인에게 감정이 훨씬 격했나 보다. 어떻든 이 동영상들에선 사람 머리가 잘린다. 처음보는 사람에겐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보다보면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무엇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가축의 목을 치는 것이다.(이쯤에서 지옥의묵시록에 나왔던 의 소 목을 정글도로 잘라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얼마나 충격적인 영상인가. 주인공은 이제 미쳐버렸다. 그리고 더한 짓거리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들도 미쳐버렸다. 역시나 미친놈은 미친걸 모른다던가. 우리도 그러하니.)
지난 여행에서 계곡의 민물고기를 다른이가 잡아, 집에와서 아직도 살아있는 것을 껍딱을 벗겨 회를 치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나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개구리를 잡아 바로 바위에 내려쳐 쭉 뻗으면 그자리에서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알을 베어 통통한 것을 한입에 꿀꺽 할때도 처음엔 충격적이었다. (참고로 나는 물고기도 먹고 개구리도 먹었다. 하지만 내가 잡아서 먹을 생각은 없고, 그다지 다시 먹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 충격이 가시고 나면, 단지 그 생물들이 죽는 과정 그 사실만 남게된다. 두 동공에 그 살들이 분해되는 영상만 투영되지 그것이 머리로 연결되진 않는다. 김선일씨 영상도 그랬다. 물론 반복해서 보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지만, 그 광경을 볼때 더 이상 비극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목이 잘려나가고 피가 스르륵 흐르는 영상만이 눈 위로 지나갈 뿐이다.
이러한 동일한 과정임을 고려할때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은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이며, 죽음뿐 아니라 삶과 생각과 느낌도 그 시스템이 다른만큼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론 다를 바 없을거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때 가령 담배의 경우 담배잎을 크게 만들어 따는 것이 지상 목표인 농부에게 담배는 어떻게 대우받는가? 인간의 생식기라 할 수 있는 꽃이 싹 훓어지거나 꽃대가 잘려나가고, 인간의 팔이라고 할 수 있는 처음 잎과 가지 사이에 돋아나는 순들이 모두 제거되거나 제거하는 약을 뿌린다. 어린 가지만 녹여 없애는 약이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아랫부분부터 잎들을 따게되고 나중엔 몽땅 따게 된다. 그렇게 다 따고나면 뽑고, 다른 작물을 심는다.
이번에 정말 인간들에게 놀라게 되었는데, 자신들이 필요한 곳에서는 지식을 집적하여 최대의 결과를 뽑아내고 만다. 제초제를 뿌렸는데 햇볕이 쨍쨍한 날엔 몇시간 만에 모두 노랗게 타 죽어버린다. 첨에 정말 놀랐다. 이렇게 강력할 줄이야. 조금 오바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히틀러랑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량 학살용 화학무기로 식물들을 싹쓸이 하는 것이다. 그 약통에 쓰여있는 말이 정말 가관이다. 식물전멸제초제. 설마 했는데 진짜 전멸하는 것이었다. (지금 든 생각인데 위에 여기저기 순들을 잘라내는 것은 마치 731부대 같다.)
그리고 또 놀랐던 것은 생장촉진제 이다. 처음에 정말 손가락 만하던 담배들이 팔뚝만하게 되자 이것을 뿌렸는데, 정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었다. 마치 어린애가 날이 지나자 청소년이 되고, 또 하루 지나자 청년이 되어있는 식이다. 거의 마술같았고, 인간의 능력에 태어나서 첨으로 놀란 것 같다.
그리고 살충제를 쳐서 애벌레들과 딱정벌레 등을 싹쓸이 한다. 그중 딱정벌레들이 꽤 웃기는데 실컷 잎을 따먹고는 꽃에 붙어서 짝짓기를 한다. 약 뿌리기 전까진 천국인 셈이다. 그리고는 어느정도 자라면 생장 억제제를 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잎이 더 커지고 노랗게 익게 한다.
무슨 생체실험이 따로 없다.

이런 짓들이 만성이 되면 사실 사람 목을 알라를 부르며 간단히 쳐 내듯이 인간복제로 어떤 짓들을 할지 모를 일이다. 사실 이런 과정 속에서 내가 사람을 죽이는 듯 고통스러웠던건 당연히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나는 보살의 지위에 있었을 것이니...
하지만 무생물을 포함한 일체가 일관된 목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런 일들은 거북스럽고(거북이스럽다는 말은 아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농사와 평화가 비슷한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과거의 농사라 하더라도, 제초와 살충과 수확의 과정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다만 예전엔 좀 덜 먹는 대신 인간이 엿먹진 않았는데, 지금은 농민들이 곯는다는 것이다. 분사기로 농약을 뿌리면서 마스크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극도의 피곤이다. 눈이 충혈되고 피부에 벌겋게 반점들이 생긴다. 아무리 많이 자도 피곤하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는 술과 고기로 푼다. 여행다니며 만난 농민들이 좀 무디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농약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3 # 그래서 어떻게...[ | ]

어떻든 '이곳'에서 내가 겪은 산골생활은 나를 피곤하게 한다. 농약과 비료, 산을 홀라당 개간하여 만든 대단한 경사의 밭, 그 험한 길을 오르는 4륜구동 화물차, 그 화물차를 개조해 만든 약펌프 (정말 이곳에서도 내가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기나긴 약줄, 약줄에 묻어있는 약으로 떡이된 흙, 그 더러운 흙으로 떡이된 내 옷, 잡초 제거를 위한 기나긴 비닐(이 비닐도 무서운 거다. 담배비닐은 하얀색 반투명인데, 비닐아래로 풀들이 갇혀 자라다가 결국 말라 죽는다), 그리고 널부러진 비료푸대, 수백개의 빈 약통, 아무데나 버리고 아무데서나 태워 더러운 산과 더러운 하늘, 그리고 냄새나고 더러운 계곡, 그리고 일차선 시멘트 포장로를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레프팅 업체의 차들과 주말이면 들어오는 외지차들. 그 차를을 피하며 약줄을 당기는 나. 작물에 그늘을 지운다해서 베어지는 나무와 예초기로 사라져가는 풀들. (예초기를 돌리고 나면 몸이 풀 범벅이 되고 풀냄새가 나는데, 그 느낌이 호러 영화를 많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육체를 갈아서 튀기는 살들과 피비린내가 연상된다.)

사실 자동차와 농약과 농업 쓰레기만 없다면 아무리 흙에서 굴러도 좋았을 것이다. 깨끗한 하늘과 깨끗한 계곡, 온 산에 가득한 꽃과 나비와 새들과 산짐승들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하늘은 비닐태우는 연기로 더럽고, 계곡은 쓰레기로 가득하며, 꽃은 말라 죽거나 베어지며, 나비는 약에 맞아 죽는다. 새들과 산짐승은 피해를 준다하여 적으로 간주된다. 작물을 심고, 작물 사이의 골에도 호밀같은 걸 뿌리는데, 이 미제 호밀에는 살색의 약이 발라져 있는데 새가 먹으면 죽는다 한다. 사람이 그 먼지를 조금만 마셔도 목이 메이고 구역질이 난다. 콩도 마찬가지. 초여름에 가득한 산딸기는 약이 무서워 못 따먹는다. 산 꼭대기에는 고랭지 농사를 짓는다고 홀랑 벗겨 놓았다. 그리고 임도를 시멘트 포장까지 해 놓았다. 관광버스도 올라갈 정도라니 말 다했다.

내가 격은 농사는 답답할 뿐이다. 12시간 넘게 밭에서 구르지만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다. 간간히 밝게 비치는 달만이 내 마음을 달래준다. 농사가 이렇게 잔혹한 것이었다니... 풀과 벌레와 산짐승도 먹어야 되는데 그들을 다 죽이고 사람이 쳐먹어서 비만이 되고, 그 부른 배를 두르고 어떤 유희에 몰두해서 인구과잉과 노동과잉과 오염과잉의 스트레스를 풀까 고민을 하는 것을 보면, 그럴법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지구촌에서 수없이 굶어죽고, 찬란한 무기에 맞아죽고, 전생의 공포속에 학대를 자행하고, 분노에 떨면서 목을 치는 이 상황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른 생물의 분노와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에 그들은 감정이 없는 줄 안다. 백인들은 다른 인종과 종교인들의 분노와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에 그런 짓들을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분노와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에 그들은 감정이 없는 줄 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감정이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잔혹하게 대한다. 그럼 없는 듯 하지만 실존하는 분노와 공포는 어디로 가나. 아무래도 직접 되돌아 가는 것 같지는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잔혹성을 키워 서로 죽여서 그 갚음을 받는다.

농사마저 구할만한것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가잔 말인가. 그건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어떻게 하면 안 죽이고 고통을 주지 않으며 뛰지 않고, 현대사회의 인과에서 벗어날 까를 골몰할 듯 하다.

노자에 보면 자연은 잔혹하다 했다. 아상이 있는 사람이 세포를 위해 살아가지 않듯, 자연도 그 스스로의 흐름에 따를 뿐 사람에겐 관심이 없다. 일체의 다른 이름인 신 또한 사람엔 관심이 없다. 다만, 사람이 특정부위가 아플때 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그 부위를 치료하듯(치료하기 위해 절개나 절제를 하기도 한다.) 신 또한 인간으로 인해 그 스스로가 정말 아플때 신경을 좀 써줄지는 잘 모르겠다.

자연이 잔혹하듯 생명도 잔혹하다. 식물은 태양과 구름과 땅을 먹고, 동물은 식물을 먹고, 동물은 동물을 먹고, 사람은 모든것을 먹는다. 요즘 보면 지구도 먹어치우고 사람도 먹어치운다. 그러면 세상의 본질은 잔혹함이며, 우리의 삶은 잔혹해서 얻어지는 쾌락과 타인의 잔혹으로 얻어지는 고통인가? 세상이 잔혹한데 작물을 어떻게 대하든 동물을 어떻게 대하든 타인을 어떻게 대하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이렇게 생각해야 하나? 백보 양보해서 인간이 유정물이라 여기는 동물을 잡아먹지 않는다고 하자. 농사마저 하지 않으면 너는 무얼먹고 살 건가...

모두 오해다. 자연은 잔혹하지 않다. 잔혹함이란 인간의 감정일 따름이지, 자연은 인간적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신 또한 짐짓 인간적일 수는 있어도 인간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신은 신으로서 존재할 따름이고,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인간에 응할 수도 있다.
인격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욕심장이 같기도 하다. 인간의 맘을 알아주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따라서 인격신이 되려면 예수처럼 사람인데 신의 마음을 가지거나, 신인데 인간의 육신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맘을 알아줄 뿐만 아니라 소원을 들어주길 바란다. 전지전능 하길 바라는데, 인격신은 사람이기 때문에 전지전능 할 수 없다.
자연은 혹 전지전능 할 수 있겠지만(실제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가능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필요에 의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기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지 않은가...될 만한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된다. 인간의 바램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전체의 필요에 의해서 돌아가는 일을 인간들이 자신들의 요구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어떻든 자연은 잔혹과는 상관 없으며 다만 변할 따름이다. 변하는 것에는 자아가 없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80년 동안 일관성을 가지는 이 육체는 무엇인가. 만물은 그 기간이 길든 짧든 존재를 지속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그러한 순간적 일관성마저 없다고 한다면 혼돈만 있을 따름이고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비존재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의 감관으로 인지되는 것을 제외하고 그 밖의 것을 알 수 없듯, 존재는 존재 이외의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를 열망하게 되고 존재를 계속하기 위해선 순간적 일관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존재를 위한 순간적 일관성이 고정적 일관성이 되면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고정이 되면 느낄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면 존재를 증거할 아무것도 없다. 이는 일원적 고정이든 다원적 고정이든 마찬가지이다.

변하기 위해선 육체든 영혼이든 육체를 위한 영혼이든 영혼을 위한 육체이든 간에 다른것이 되어야 한다. '존재'가 달라지기 위해선 '내'가 아니어야 하고 그러자면 '남'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남'이 되면 '남'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그래서도 안된다. 따라서 나와 남이 결합해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결합의 방법중의 하나가 먹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나'라고 여기는 존재들은 '남'을 먹는 것이다. 산것을 먹기도 하고 죽은 것을 먹기도 하며, 움직이는 것을 먹기도 하고, 땅에 붙어있는 것을 먹기도 한다. 성교 또한 이러한 먹기의 한 방편이 아닌가 한다. 보통 속어로 '먹었다'라는 것이 성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일이다.

식욕이든 성욕이든 욕망이란 존재의 지속과 연결되는데, 바로 이 욕망이 문제가 된다. 즉 자연은 변하며, 먹고 먹히는 것은 존재의 본성으로서 당연한 것인데, '먹음'을 유도하는 도구인 욕망(쾌락중추의 자극)이 과도하게 커지면 존재를 위한 욕망이 아니라 자극을 위한 욕망이 되어, 자극을 위해 존재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욕망이 과도하게 커지는 이유는 인간이 실존을 떠나 이상에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수단을 발달시켜 지식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집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지식을 도구를 통해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도구로서 구현한 인공적 환경과 지식으로 구현한 사회적 환경속에서 살게 되었다. 인간 육체의 실존에서 국가와 민족 인류와 사회라는 허상의 시스템에 함몰되게 된 것이다.
생존을 위한 만능의 인간에서 식량을 획득하기위한 기능적 인간으로 변모하여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바친 결과 야생인간의 불안에서는 벗어났으나 사회적 인간의 불안에 접어들었고, 재화의 무한생산이라는 허상속에 지구적 생존을 위한 식량을 특정국가나 민족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잉여된 식량이란 조건속에서 욕망은 안전핀이 빠진 것이다.
존재를 위한 식욕에서, 욕망을 위한 유희와 질주로 그 길을 바꾼 인간은 현대사회를 만들어 놓았고, 그 현대사회화된 농업을 접한 나는 불안한 것이다. 그 과도한 욕망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고, 내가 완전히 파악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의 생존이 중요한 나로서는 불안한 것이다. 또한 느낄 수 있는 많은 오감을 가진 존재로서 먹히는 것이 고통임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다른 존재에게 그같은 고통을 주는것이 불안한 것이다.

사실 제행무상(세상은 허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은 일관된 상이 없다는 말이다. 즉 역동적인 세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의 도리를 체감한 사람은 그같은 느낌을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물론 육신을 파괴할때 받는 느낌은 도인이나 범인이나 같다. 또한 그 강렬한 육체적 자극도 같다.
하지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존재가 붕괴할때 가지게 되는 감정인데, 도인은 육체가 붕괴할때 존재의 불안을 가지지 않고 단지 그 자극을 흘려보낼 뿐이다. 왜냐하면 육체 또한 실존이지만 근본적 실존은 그 육체를 포용하는 것이고, 일시적 육체의 붕괴는 근본적 실존의 존재방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극은 느끼지만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그 결과가 비교적 확실한 치료를 받을때 아픔을 느끼긴 하지만, 불안해 하거나 고통스러워 하진 않는것과 같다.

하지만 나는 도인이 아니다. 따라서 아직 고통을 느끼는 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아상이 있는이상 타자의 고통을 알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죽임을 행하는 내 자신이 꺼림직한 것이다. 또한 설사 도인이라 하더라도 도인은 세인들보다 더욱 육체적 실존에도 충실하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정도만 먹는다. 동물들이 그렇듯이 생존을 위한 죽임과 먹음에는 불안이 없다.
자연은 우리보다 먼저 생겨났고, 그 자연을 따라가기에도 우리 개체는 힘겹다. 과도한 죽임을 하는 것 조차 힘겨운 것이다. 다만 사회화되어 거대해진 인간아닌 그 어떤 허상은 힘이 세어진 만큼 과도한 죽임을 특정 목적을 위해 무표정하게 혹은 웃으며 감행하는 것이다. (이라크 교도소의 미군들을 보라.)

결론은 죽임은 어쩔 수 없고,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식인조차 특정상황에선 당연한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인간을 인간이 잡아먹는 일은 잡아먹는 인간의 정서가 불안해지기 때문에 잡아 먹히거나 둘다 죽는 방법도 있을지 모르겠다.), 과도한 죽임은 무의미하며 존재의 본질에 반하는 (되려 자신의 정서가 불안해지거나, 모르는 새에 그 습이 배겨서 주위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과도한 죽음의 순환을 일으켜 생존환경을 열악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하며, 이는 동, 식물 심지어 무생물에게 까지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튼 농사라는 것에 많이 실망했다. 물론 농사 자체가 나쁜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한 적정수준을 고려하여 다른 존재의 고통을 최대한 줄이며 산다면 농사 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바른 생활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중도라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잉여의 유혹을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최소한의 삶이라는 실존에 충실한 가치는 너무나 먼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래도 환경을 바꾸어 고요해진다는 것은 인류가 점령한 지구에서 어려울 듯하다. 역시 자신의 습을 바꾸어 고요해질수밖에 없다. 이곳의 거친 생활 또한 나의 삼독을 이겨내는 힘을 기르는 기회가 될 터이니 역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언제나 문제는 '게으름을 여의고 바위같은 결단을 하는 것'인가...
많은 강호제현들의 질책과 수정 부탁드린다. -- LongWarm 2004-7-2 2:49 am

4 # 촌평[ | ]

욕망도 좋고 파멸도 좋다. 다만 그 결과에 불평한다면 그건 나쁘다.
현대사회는 너무 갑갑하다. 이땅의 수많은 청년백수들은 무엇을 위해 스트레스를 받으며 책상위에서 청춘을 보내는가.
더 이상 자신을 가두지 마라.
자신의 욕망에 관용하라. 그 욕망의 끝에 모호하게 강제된 생존의 욕구에 이를때까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보라.
무엇이 너를 살리는 듯 죽이고 있는지.
생존과 번식과 존재의 지속은 과연 우리의 필요조건인가.
죽어야 산다는데, 무엇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치나.
남과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당신은 죽은 것인가.
당신은 당신인데 왜 기준은 남의 기준인가.
당신은 육신의 실존을 믿으면서 왜 사회적 인간으로 살지?
육신이 당신이라면 육신만 잘 굴려가면 만사가 좋을텐데.


당신은 당신인데 왜 욕망은 육신의 욕망인가.
육신은 어리석다. 안정된 생존을 위해 충분하고 과도할 때까지 욕망하는게 육신의 본성이다.
게다가 육신의 습에 접어들면 정신마저 육신이 하는 짓을 되풀이한다.
맹목적으로 부여된 생존에 갇히고 육신의 욕망에 갇히고 정신마저 옥죄어 든다.
사고의 습을 버리고 욕망의 습을 버리고 생존의 습을 버려라.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라.
어차피 당신은 죽을테니...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는 나의 사반세기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지금은 어두운데 그 어디에도 새벽이 온다는 보장은 없다.
설사 새벽이 오더라도 어제 밤이 어두웠음을 증명할 수 없다.


나는 정말 살고 있는 것일까... -- LongWarm 2004-7-3 3:22 am


어려운 일이다. 아니다 생각되었을 때 그것을 벗어버릴 수 있는 여건에 있다면,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도 좋을 것이지만 뭐든 제대로 알려면 일년이상은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던 너도 어지간히 힘든 길을 걸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종종 너는 자신의 욕망에 상당히 관용적으로 보여서 가끔 위험해보이기도 한다. 좀 더 경험해보렴. -- 거북이 2004-7-3 1:5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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