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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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2 # 거북이[ | ]

솔직히 말해 이 소설은 좀 지겨웠다. 지겨운 이유는 몇가지 있었는데 구구절절 이것저것 묘사하기 좋아하는 작가의 성향이 그렇기도 하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인 주제에 도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슬람 문화에 대해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날이 긴 소설 읽기에 약해지는 나를 느끼게 되어 좀 슬프다. 고작 두권짜리 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전에는 어떻게 열권짜리 대하소설들을 읽었나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상당히 개성적이다. 먼저 들고 싶은 점은 성 혹은 성욕에 대한 개방성 되겠다. 절대 야한 소설이 아닌데 이 소설은 성에 대한 얘기를 일상적인 묘사들과 아주 천진하게 뒤섞는다. 이슬람 세밀화가와 도제 사이는 일상적 소년애 관계가 있었는지 그것에 대한 묘사도 나오고, 이스탄불 최고의 미녀이면서 요조숙녀인 양하는 여주인공 셰큐레는 상대 남자들이 얼마나 자기를 만족시켜줄까를 생각하고 종종 상대의 그것을 응시하곤 한다. 남자 둘이 서로 죽일듯 격투를 하다가도 상대방에 대한 욕정을 느끼는 등 가지가지다.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는 사랑과 성을 구분하지 않는다. 욕정을 비하하지 않고 사랑의 한가지 방법으로 긍정하고 있다.

이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장을 하고 자신의 미모에 취하는 한 이야기꾼에 관한 삽화인데 사실 소설 전개상 전혀 필요없는 에피소드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 소설 전개와 관계없는 에피소드를 많이 넣었는데 이것들은 나름대로 당대를 반영하고 있고 또 작가는 열심히 고증을 한 사람으므로 실제로 16세기 이야기꾼들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이야기꾼은 속옷에 양말 따위를 넣어 가슴을 만들고 다른 남자들이 이 가슴을 입에 넣기 위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이므로 마치 강한 여자가 된 것과 같은 쾌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강하고 동시에 동정받는 여자가 되어 돈많고 힘센 남자가 자신을 미친듯 사랑해주길 원한다고도 고백한다. 가끔 여자들과 얘기해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여자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솔직하게 얘기한 것인지는 좀 의문이 많다. 나는 내세에 꼭 팜므파탈로 태어났으면 싶은 사람이라 여자들의 그런 심리는 꽤나 궁금하다.

그 다음으로 인상적인 것은 이 소설의 전개방식이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화자가 계속 바뀌면서 이어지고 있어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것과 동시에 장면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화자가 전환될 즈음에 다음 장면의 단서가 될 서술로 장을 끝내는 점은 영화에서 씬과 씬을 나누는 방법과 유사하다. 화가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전체적으로 색채감이 넘치고 그것 또한 영화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화자를 바꾸면서 그 화자의 입장에서 능청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성실하고 믿음직한 남자인 카라에서 요조숙녀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계산을 하고 있는 여우인 셰큐레로 전환하여 연약한 여자의 말투로 바뀌는 것을 보면 가끔 감탄스럽다. 오래된정원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이 소설은 결코 추리소설이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멜로물로도 보기 어려운, 뭐 그런 시대물이다. 작가가 그려내고자 한 것은 서양화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물이 터키로 침입해오는 가운데 터키는 어떻게 전통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쳤는가를 얘기하고 싶은 듯 하다. 여기에 묘사되는 세밀화가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관점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그들의 미학은 이렇다. 그림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신의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옛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고 또 모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의 내용에 집중하게 해야지 스타일에 신경쓰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림은 개별적 특성이 아닌 일반적 특성을 반영할 수 있게 해야한다. 그것이 신의 그림이다. 그렇게 그림만을 그리다가 나이들어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미덕이다. 장님이 되어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 현실의 말이 아니라 신의 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지고의 그림을 보고 신의 화풍이 확립된 다음에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장님이 되어도 좋다. 사물을 원근법에 따라 그리는 것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사물은 신의 뜻에 따라 위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듯 그려야 한다.

아마도 옛 그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작가는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도판을 넣어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을. -_- 화원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줄었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 거북이 2005-9-3 2:32 pm

  • 휘스레브와 쉬린 : 소설 전체에 걸쳐 나오는 사랑이야기로 우리의 춘향전과 유사한 위치를 가진 이야기인듯 하다.

3 같이 보기[ | ]

4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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