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즉위전

1 개요

英祖 卽位戰
영조 즉위전
  • 전쟁(戰爭)을 연상시킬 만큼, 왕세제[1] 시절 영조의 입지를 위태롭게 했던 치열한 갈등 상황들을 다루는 문서
    • 영조가 왕세제였던 시절에 일어났던 갈등들은 노론과 소론의 갈등[2]: 왕자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왕세제로 만들고 왕세제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자 애쓰는 노론의 행동에 소론이 맞서는 구도의 갈등이다.
    • 즉위 전까지 계속 변화하는 영조의 입지: 노론과 소론이 대립 속에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영조의 입지도 변화한다.

2 배경

노론과 소론의 대립구도는 숙종대를 지나며 형성되었으며, 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경종대에 경종의 후계를 두고 심화되었다.

2.1 '노론 vs 소론'의 시작: 숙종

  • 노론과 소론의 대립구도가 형성된 배경은 숙종대이다.
  • 숙종대에는 정치집단 간 갈등을 숙종이 어떻게 판결하느냐에 따라 특정 집단이 갑작스럽게 힘을 잃거나 얻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 노론과 소론의 대립구도 형성 배경이 되는 환국[3], 무고의 옥, 병신처분이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 숙종대의 경신환국과 회니시비로 인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무고의 옥과 병신처분으로 노론과 소론 중 노론에 힘이 실리게 된다. ★
  • 이렇게 노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게 된다.

2.1.1 노론, 소론으로 분열 : 경신환국, 회니시비

2.1.1.1 경신환국
  • 시기: 1680년, 숙종6
  • 이유: 남인의 누명 (유악사건, 삼복의 변)으로 인해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4]
  • 결과(1): ‘서인’이 집권하고, 예송논쟁 이후 집권했던 남인이 축출되었다.
  • 결과(2): 남인 처벌을 두고, 서인은 강경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노론과 온건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
2.1.1.2 회니[5]시비
  • 시기: 1684년(숙종 10)-1716년(숙종 42)
  • 내용: 윤증이 송시열에게 자신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묘비에 쓰일 글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글을 부정적으로 써 분노한 윤증이 송시열을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가지고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윤증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 나오자, 송시열(노론)과 윤증(소론)의 제자 간에 일어난 분쟁을 회니시비라고 한다.자세한 내용[6]
  • 결과: 노론과 소론이 분열되었다. ★

2.1.2 소론의 약세: 무고의 옥

  • 시기:1701, 숙종 27
  • 이유: 남인이 지지하는 숙종의 후궁이자 세자(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일어났다.자세한 내용[7]
  • 결과(1): 남인이 거의 완전히 축출되었고, 희빈 장씨는 사사되었다.
  • 결과(2): 숙종이 희빈 장씨를 처벌하는 결정을 내리자, 세자를 보아서라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한 소론은 약화되었고 노론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2.1.3 노론의 강세: 병신처분[8]

  • 시기: 1684-1716, 숙종10-숙종42
  • 내용: 회니시비[9]에 대해 국왕이 윤증(소론)이 잘못한 것이라고 판정한 것을 말한다.자세한 내용[10]
  • 결과: 숙종이 편을 들어준 ‘노론’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소론의 세력은 약화된다.

2.2 소론과 경종, 노론과 연잉군: 경종

  • 경종대 주도 세력은 크게 소론과 노론으로 나눌 수 있다.[11]
  • 숙종대에 세자(경종)를 지지하던 소론은 즉위한 경종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고, 소론과 대립한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다. ★

3 즉위전 과정

경종대 노론과 소론의 대립구도 속에서 연잉군이 후계자로서 등장하였을 때부터 왕이 되기 전까지 변화한 연잉군의 입지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주요 사건은 소론의 시각에서 작성된 경종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12][13] 시간순으로 정리하였다. 각주에 달려 있는 날짜는 실록을 기준으로 한 날짜이며, 음력이다.

3.1 입지 생성 : 왕자라는 신분

  • 생부: 숙종, 생모: 숙빈 최씨[14]
  • 연잉군은 생부가 왕인 숙종인 왕자였다.
  • 그러나 원칙적으로 왕의 정실부인인 왕후가 낳은 첫번째 아들이 왕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생모가 숙종의 정실부인인 왕후가 아닌 숙빈 최씨였던 연잉군은 왕의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위치였다.
  • 연잉군의 입지: 그럼에도 왕자로 태어났으므로, 왕후의 아들이 없는 등 여러 이유로 인해 다른 후계자 후보가 없다면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기에 후계자로서 입지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3.2 숙종의 후계자?:정유독대

  • 정유독대: 1717년(숙종43) 7월 19일, 숙종이 노론의 대표였던 이이명을 사관 없이 만난 사건[15]
  • 사관이 없었기 때문에 만나서 숙종가 이이명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당시 사람들도 숙종과 이이명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알지 못했다.
  • 독대한 날, 세자를 지지하는 편이 아니었던 노론 인물인 이이명이 세자의 대리청정[16]을 주장했다.
  • 이 수상한 노론의 모습에 소론은 노론이 대리청정을 빌미로 세자를 바꾸려고 한다고 의심하였다.
  • 연잉군의 입지: 당시 살아있던 왕의 아들은 당시 세자였던 경종과 연잉군이었던 영조, 연령군이 있었다. 모두 왕비의 아들이 아니었고 나이가 경종, 연잉군, 연령군 순으로 많았으므로, 만약 노론이 경종을 대신할 세자를 골랐다면 영조(연잉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2.1 더 알아보기

영조가 즉위한 뒤[17]에 노론의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서 정유독대를 할 당시 숙종이 세자를 교체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서술이 등장한다.
영조가 즉위한 뒤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이 쓴 글이므로 '숙종이 마음에 두었던 후계자는 영조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숙종이 자신의 후계자로 영조를 선택했었던걸까? 그렇다고 보긴 힘들다. 이미 왕이 된 영조의 정당성 확보를 중요하게 여긴 후대에서 영조가 숙종이 선택한 후계자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기록이기 때문에 "단암만록"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3.3 즉위전의 시작: 경종 후계자 입양

  •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와 왕비의 아버지인 어유구가 종친 중에서 아들을 입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18]
  • 경종의 양자를 입양하고자하는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이 급하게 연잉군을 후계자로 세우려고 움직였다는 기록이 있다.
  • 연잉군의 입지: 만약 경종에게 양아들이 생겼다면 연잉군이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종의 양아들을 입양하려는 시도는 연잉군의 입지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3.4 노론의 공격: 건저

  • 건저란, 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를 정하던 일. 여기에선 경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 노론의 공격: 선의왕후와 어유구의 입양 시도에 놀란 노론이 마음이 급해져 먼저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노론이 아직 경종이 젊음에도 경종의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며 건저를 논의할 것을 주장했다.[19]
  • 과정
    • 노론의 건저 논의 건의: 노론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정소[20] 라는 인물이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21] 경종의 건강이 좋지는 않았지만 경종의 나이는 아직 30대였고 왕비인 선의왕후의 나이도 그보다 어렸기에 경종이 후사를 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종의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왕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볼 수 있는 과한 주장인데, 선의왕후와 어유구의 입양시도에 급해진 노론이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이다.[22]
    • 후계자 논의 시작: 왕의 허락하에, 후계자 논의가 시작되었다.[23]
    • 노론의 후계자 회의 시도, 소론의 불참: 노론에서 후계자 회의를 시도하였으나 소론[24]의 불참으로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였다.[25]
    • 노론의 급습 성공: 후계자 회의가 결렬되자 노론은 아예 직접 왕을 만나서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회의가 결렬된 그날 밤에 바로 경종을 찾아간다. 결론적으로, 노론의 급습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밤중[26]에 노론'들'[27]이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기에 급하게 경종을 찾아뵈었다면서 경종에게 후계자를 빨리 지정하라고 요청했다.[28] 이 과정에서 노론은 왕의 의견을 묻는 대신 후계자와 관련된 의견이 담긴 대비[29]의 손편지를 요구했고, 대비가 연잉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편지를 쓰자 노론은 대비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후계자를 결정하자고 경종에게 요구했고, 경종이 노론의 요구대로 움직여주어서 그날 밤 바로 연잉군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후계자가 결정이 된 것이다.
    • 후계로 연잉군 확정: 결국 연잉군이 후계자가 되었다. 위호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를 받았다.[30][31]
    • 소론의 힘없는 공격: 건저 과정에 못마땅했던 소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유봉휘란 인물이 건저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상소를 올렸다.[32][33] 상소에서 언급한 문제는 후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인데 너무 급하게 서둘렀다는 것, 후계를 정하는 과정에서 대신과 신하들이 왕을 겁박했다는 것, 왕인 경종의 온전한 의사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34] 물론 노론의 급습이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미 왕이 연잉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에 동의하고 그렇게 하라고 결정한 일을 신하가 문제삼는 무례한 일이었고 또 이미 후계자가 된 연잉군의 입지를 흔드는 일이었기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론은 이부분을 놓치지 않고 이를 이유로 유봉휘의 처벌을 주장한다. 소론측에서는 유봉휘가 나라를 위해 이러한 말을 꺼낸 것이라면서 유봉휘를 편들어주었다. 결과적으로, 유봉휘의 상소가 가져온 성과는 없었다. 후계자 결정에 소론이 가진 불만을 드러낼 수는 있었으나, 이미 왕이 정한 후계자를 바꿀 수는 없었다.
  • 연잉군의 행동: 계속 세제책봉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했다.[35]
  • 연잉군의 입지: 확대됨. 후계자를 논의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은 자칫하면 역모로 몰릴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고 후계자로 지정될 만한 인물이 숙종 대에 연령군이 사망했기 때문에 연잉군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연잉군의 입지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후계자로 연잉군이 거론되고 결국 연잉군이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후계자로서 연잉군이 가지는 입지는 확대되었다.

3.5 노론의 패배: 대리청정 (신축환국)

  • 노론은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된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세제가 대리청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소론은 이에 맞서 대리청정을 반대한다.
  •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받아들였던 경종이 나중에는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소론의 편을 들고 소론을 등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대립상황에서 노론이 패배한다.
  • 과정
    • 왕세제의 입궐과 책봉례: 당시 숙종의 상중이었기 때문에 경종이 숙종의 신주를 모신 곳[36]인 창경궁에 머무르고 있어 창경궁으로 후계자가 된 연잉군이 창경궁으로 입궐한다.[37]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세제의 책봉례가 거행되었다.[38]
    • 노론의 공격적인 도박: 왕세제가 책봉례를 치른지 보름밖에 되지 않았는데, 노론 핵심인물[39]의 입장을 대신해 조성복[40]이라는 인물이 세제가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해야한다면서 대리청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41] 세제가 대리청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리 왕의 후계자인 왕세제라도 왕이 아직 살아있는데 왕 대신 다른 이가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발언이었다. 잘못하면 역모를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도 노론의 일부세력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이라는 공격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 노론의 도박 성공: 노론의 위험을 감수한 도박 같은 행위가 성공했다. 왕인 경종이 노론의 왕세제 대리청정 요청을 듣고선 바로 허락한 것이다. 경종은 자신의 몸이 너무 아파서 나라일하기 힘들고, 세자한테 나라일 맡기면 내 몸 돌볼 수 있다며 대리청정을 허락했다. 경종은 대리청정을 하라는 명령을 담은 비망기를 내렸고 예상치도 못하게 세제의 대리청정이 대뜸 결정되었다.
    • 소론의 방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자리에 있던 노론인 승지들이 대리청정을 거두어달라고 한다. 대리청정을 요청한 것이 노론의 핵심인물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부 노론세력은 세제의 대리청정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론의 핵심인물인 김창집과 그외의 노론 인물들은 이러한 소식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궐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42] 일반적으로 왕이 대리청정해야겠다고 말을 하면 신하들은 명을 취소해 달라고[43] 하는데, 궐조차 들어오지 않는 김창집의 태도는 일반적인 신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소론측은 당연히 대리청정을 거두어 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소론의 최석항이라는 인물은 뒤늦게 듣고 울면서 궁에 들어와 대리청정을 반대했다고 한다.[44]
    • 소론의 방어 성공: 세제가 대리청정하라고 명을 내린 경종은 노론인 승지들의 반대 등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대리청정을 고집했지만, 소론의 최석항이 대리청정에 반대하자 경종이 대리청정 명령을 취소하겠다고 한다. 결국 성공하는 듯했던 노론의 대리청정 공격은 소론의 방어가 성공하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후 경종이 예상치 못한 명령[45]을 내리기 전까지 소론과 노론은 서로를 공격하며 싸운다.
    • 예상치 못한 변수, 경종: 그런데, 경종이 갑자기 자기가 아프다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46] 소론은 당연히 경종의 명령에 반대를 한다. 세제를 지지하는 노론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리청정을 취소해달라고 한다. 사실 왕의 대리청정 명령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세제가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니까 노론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왕의 대리청정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리청정에 찬성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일단 보통의 신하들처럼 대리청정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갑작스럽게 왕이 대리청정을 진짜로 바라는 것인지 혹은 다른 속내가 있는지 가늠한다.
    • 변수를 기회로 잡는 노론: 신하들의 반대에도 경종은 대리청정을 고집했다.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경종은 반대하는 신하들의 충심을 알고 있다면서 다독이고는 자신의 병이 깊어 이제 일을 하기 힘드니 세자에게 나라 운영을 맡겨 나라를 유지하게 하라고 다시 한번 말한다.[47] 이쯤되니 노론은 왕이 꾸준히 병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경종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노론의 핵심인물들인 노론 사대신, 즉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는 더 이상 대리청정을 반대하지 않기로 한다. 더 나아가 대리청정을 할 때 지켜야할 규정인 대리청정절목의 내용을 작성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대리청정을 나서서 추진한다. 경종실록에서는 이러한 노론의 모습에 모든 이들이 놀랐다고 한다.
    • 놀란 소론의 방어 실패: 노론의 행보에 놀란 소론은 노론을 막고자 했다. 소론인 최석항이 노론이 대리청정절목 내용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을 문제삼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노론인 승지 홍계적이 상소가 왕에게 올라가는 것을 막았다. 소론 신하들도 왕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경종이 누구도 만나지 않고자 했다.
    • 소론의 마지막 방어 성공, 노론의 패배(신축환국): 이러한 상황에서 원래는 궐에 들어올 수 없는 상태였던 소론의 조태구가 경종을 만나려고 궐로 들어와 대리청정을 반대하였다. [48] 경종은 조태구를 기다렸다는 듯 반겼고, 조태구의 대리청정 반대 이후 대리청정을 거둔다.[49] 경종이 대리청정을 거두었으니 대리청정을 준비하던 노론의 입장은 난처해졌고 대리청정을 계속 반대해왔던 소론의 세력이 강화되며 소론이 유리해졌다. 세력이 강해진 소론은 노론을 공격했고[50] 노론인 인물들이 정치권에서 빠지게되고 소론이 등용되었다. 이것이 신축환국이다.
      • 소론의 분화: 이 즈음부터 노론에 대한 태도에 따라 소론이 분화된다. 노론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소론은 '준소'라고 하고 노론에게 온건한 태도을 보이는 소론은 ‘완소’라고 불렸다.
  • 세제의 행동: 경종의 대리청정 명령은 두번 내려졌는데, 첫번째 명령에서는 대리청정 명령을 거둬들여달라고 요청하려 했으나 이미 최석항의 설득 후 경종이 명령을거둔 상태라서 멈추었고 조금 지속되었던 두번째 명령이 내려졌을 때는 대리청정 명을 취소해달라는 상소를 올림.
  • 세제의 입지: 불안정했고 결국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노론이 먼저 대리청정에 대한 논의를 꺼냈을 때는 세제의 입지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는 신축환국 때문에 노론이 정치권에서 빠지게 되어 노론의 지지를 받는 세제는 지지 기반을 잃어서 세제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3.6 노론의 대패(大敗): 역모 고발 (임인옥사)

  • 신축환국으로 상황이 안좋았던 노론은 더 좋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 신축환국 이후, 목호룡이란 인물이 노론과 관련된 인물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임인옥사[51]노론의 핵심인물은 4대신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
  • 과정
    • 청나라의 왕세제 책봉 인정: 청나라가 왕세제 책봉을 인정하였다.[52]
    • 역모 고발: 목호룡[53]이란 인물이 노론과 관련된 인물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했다.[54]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주도자로 지목하며 경종을 해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노론 4대신 중 한명인 이이명을 추대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수많은 이들이 끌려와 신문을 받았다.
      • 삼수: 이 신문 과정에서 경종을 해치기 위해 구체적으로 구상한 내용이 드러났다. 경종을 해치기 위해 꾸민 방법은 세가지였는데, 이것을 삼급수(三急手), 혹은 삼수(三手)라고 한다. 그래서 이후 일어날 임인옥사가 삼수의 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삼급수에는 대급수, 소급수, 평지수가 있었다. 이 중 소급수는 실제로 일어났다고 한다.[55]
        • 1.대급수는 노론 인물인 김용택이 다른 사람[56]을 시켜 숙종의 국상 때 궐에 있는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칼로 직접 해치려고 한 것이며,
        • 2.소급수는 노론의 여러 인물이 상궁을 시켜 세자였던 경종에게 독약을 먹이려고 한 것이고,
        • 3. 평지수는 세자였던 경종을 폐위시키려고 한 것이다.
        • '삼급수'의 더 자세한 내용
      • 역모 고발은 강경파 소론인 준소가 계획한 것인가?: 역모에 가담한 인물 중 하나로서 끌려온 백망이라는 인물이 신문 중에 강경파 소론인 준소 인물인 김일경을 언급하며 소론이 세제를 위태롭게 하기 위해 꾸민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목효룡의 역모 고발 전에 세제가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있다고 주장하여 박상검, 문유도라는 환관과 궁인들이 처벌받는 일이 있었다.[57] 왕세자의 주장에 환관 박상검의 신문이 이루어졌는데 소론의 입장에서 작성된 경종실록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후대 노론의 시작이 반영된 경종수정실록에서는 박상검이 준소인 김일경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만약 정말 김일경이 연관되어 있었다면 김일경은 세제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보았다고 볼 수 있고, 백망이라는 사람이 말했듯이 김일경이 세제의 입지를 흔들기 위헤 이러한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 역모 고발이 준소인 김일경이 꾸민 일이 맞든 아니든 목호룡의 역모 고발은 노론과 왕세제에게 큰 위기였다.
    • 소론의 맹공격, 노론과 왕세제의 위기: 목호룡의 고발로 역모의 주동자가 된 노론의 정치적 입지는 아주 위태로웠다. 역모 고발로 역모와 관련된 인물들이 조사 받았는 과정에서 나온 노론이 경종 즉위 후에도 역모를 꾸몄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소론은 전에 노론이 세제에게 정치를 맡기겠다는 경종의 뜻을 받아들여 대리청정절목 내용을 마련한 행동을 삼수 중 경종을 폐위하려는 평지수라고 보았고, 소론은 역모를 주도한 인물은 노론의 핵심 인물인 노론4대신이라면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공격했다.세제의 처조카인 서덕수라는 인물도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세제도 역모죄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역모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세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58]
    • 왕세제 지키기: 역모 사건으로 노론의 입지는 물론 왕세제의 입지도 아주 위태로워졌다. 이에 왕과 대신들은 왕세제를 지키기 위해 목호룡의 고변에서 등장한 왕세제와 관련된 내용은 기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59] 덕분에 왕세제는 역모 사건에 휘말렸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60]
    • 노론의 큰 피해: 노론의 위기는 위기로 멈추지 않고 피해로 번졌다. 역모사건이었기에 관련된 아주 많은 노론 인물들이 처형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처형당한 노론 인물의 명수도 상당했지만, 무엇보다 처형당한 노론에 노론의 핵심인물인 노론4대신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도 포함되어 있어 노론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이명은 그의 아들이 역모 주동자였을 뿐만 아니라 역모 주동자들이 추대하려는 인물이었기에 처벌되었고, 김창집도 아들이 역모에 가담했기에 처벌되었다.[61]
  • 세제의 행동: 목호룡의 고변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며 왕세제 자리를 놓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 세제의 입지: 아주 위태로웠다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자신이 역모사건에 휘말렸고 지지세력인 노론의 핵심인물인 4대신이 처벌받았으므로 당연히 세제의 입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세제가 역모사건에 휘말려 자칫하면 폐위를 당하거나 혹은 처형을 당해 입지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모사건에 휘말린 세제를 지키려는 왕과 대신들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그의 입지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세제를 지켜준 대신에는 소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제가 왕세제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할 때 소론 인물인 조태구가 세제를 위로하며 세제에게 자리를 내려놓고 싶다고 하지 말라고 한 경종실록의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소론이 노론과 대립하기는 했어도 이미 후계자가 된 세제와는 대립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소론이 정치권을 장악한 상황이라고는해도 세제의 입지가 위협받거나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3.7 즉위전의 끝: 경종의 사망, 영조의 즉위

  • 생감과 게장을 먹은 경종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경종은 끝내 사망하였다.[62]
  •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며 복잡하고 치열했던 즉위전이 막을 내렸다.
  • 세제의 행동:
    • 생감과 게장을 전달한 세제?: 당시 영조가 게장과 생감을 같이 경종에게 올렸다는 이야기 있었다.[63]
    • 경종을 위한 약처방에 참여한 세제: 왕세제였던 영조가 건강이 악화된 경종의 약 처방에 참여했다.[64] 세제는 어의인 이공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처방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가 처방되었으나 경종은 사망하고 만다. 이러한 세제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세제가 일부러 경종을 죽였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 세제의 입지: 경종이 사망하였으니 하나뿐인 후계자로서 세제가 가진 입지는 완전히 단단해졌다.

3.8 연잉군의 입지 변화 정리: 즉위전의 시작과 끝

4 즉위전의 후유증

즉위전에서의 사건들은 영조가 즉위한 후에도 영조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4.1 노론과 소론의 대립

  • 영조가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여전했다.
  • 즉위한 영조는 바로 탕평교서를 발표해 탕평정치를 할 것을 공표했다. 그리고는 집권세력이었던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을 등용했는데 탕평을 하고자 하는 영조의 의지와 다르게 노론은 소론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여젼히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정권을 잡은 것에 만족하기 않게 계속해서 소론을 처벌해달라는 노론의 요구에 영조는 다시 소론을 등용한다.

4.2 임인옥사: 역모에 연루된 왕

  • 세제시절 영조는 임인옥사의 발단이 된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
  • 경종과 대신들이 세제를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세제는 노론4대신과 달리 처형당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역모로 그대로 둔다면 영조는 역모에 연루된 왕이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 영조는 왕의 권위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음은 영조가 한 일들이다.
    •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영조는 역모를 고발했던 목호룡을 처형했다. 노론과 영조에게 역모 사건을 꾸민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김일경도 함께 처형했다.
    • 역모사건에 가담한 노론의 행위를 역모로 보았고 역모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이명과 김창집은 신원해주지 않았다.[65] 그러나 역모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으나 휘말려 임인옥사로 죽은 노론의 이건명과 조태채의 신원이 이루어졌다.[66] 신원은 원통함을 풀어준다는 것이므로, 영조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본 것이다. 후에 영조는 이이명과 김창집도 신원해주었다.[67]
    • 역모에 휘말려 죽은 자신의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한다. 영조는 서덕수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속아넘어갔을 뿐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고 한다.[68]
    • 임인옥사의 원인인 역모사건이 소론의 무고[69]로 판결했다.[70]
    • 신유대훈을 선포해, 경종대의 건저와 대리청정은 인원왕후와 경종의 뜻이라고 발표하고 목호룡의 역모 고발을 조사한 기록인 임인옥안을 불태웠다.
    • 영조가 한 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1) 영조가 한 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2)
  • 결국 영조는 역모사건은 소론(정확히는 준소)이 꾸며낸 사건이며, 경종의 대리청정 명령에 대리청정절목까지 마련한 노론의 행위가 경종을 왕위에서 밀어내기 위한 평지수가 아니며 노론 4대신이 한 행위는 충심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정한 것이다.
  • 그렇다고 영조가 일부러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노론의 편을 들어 위와 같이 정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노론의 입장이 반영된 경종수정실록뿐만 아니라 소론의 입장이 반영된 경종실록도 역모사건이 준소가 꾸민 일이라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4.3 경종독살설: 형을 죽이고 왕이 된 동생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
  • 왕위를 노리고 영조가 경종을 해쳤다는 가설이다.
  • 경종독살설을 명분으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 이인좌의 난: 독살설은 가설로 끝나지 않고 반란으로까지 번졌다. 바로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지나지 않은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71]라는 인물이 정치권에서 세력을 잃은 소론 과격파와 남인들과 합심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이런 이유를 갑자기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경종의 첫번째 왕비였던 단의왕후 심씨의 동생이자 소론 강경파(준소)심유현이 먼저 제기한 경종독살설이 이렇게 반란군의 이유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72] 경종독살설이라는 가설이 반란군이 이유로 삼을 만큼 힘을 얻은 것은 즉위전에서 등장한 삼수 중 독약을 이용해 경종을 해치고자 한 소급수 때문일 것이다. 또한 경종설을 먼저 제기한 심유현이 경종의 임종을 지켜본 인물이기에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73]
    • 나주괘서사건과 신치운의 발언 : 놀랍게도 경종독살설은 영조가 즉위한지 30년이 넘어섰을 때까지도 영조를 괴롭혔다. 영조 31년, 이인좌의 난에 휘말려 유배간 윤지라는 인물이 자신의 유배지인 나주에서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 붙인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다. 이인좌의 난의 연장선이었다. 역모사건인 나주궤서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처형한 영조는 역적을 없앤 것을 축하하며 과거시험을 연다. 그런데 이 과거시험에서 소론 강경파(준소), 남인 인물의 자제들이 영조를 비방하는 글을 쓴다.[74] 이에 이러한 글을 쓴 인물들을 신문하는데, 그중 신치운이라는 인물이 경종이 사망한 이후로 게장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고 말한다.[75] 영조가 경종에게 생감과 게장을 바쳐 이것을 먹은 경종이 사망했다는 경종독살설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 영조는 생감과 게장은 자신이 바친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당연히 경종독살설을 부인했고 억울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 현재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 것은 어의의 말을 부시하고 내린 영조의 독단적인 선택이 아니다. 다른이들은 영조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담당어의인 이공윤만이 영조의 의견에 반대했다. 무엇보다 경종을 지지하여 경종이 사망하면 누구보다 곤란한 소론이 약제조에 참여했고 영조의 인삼과 부자를 고집하는 의견을 반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영조가 독살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76]

4.4 후계자 자격

  • 영조가 세제가 되기 전,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와 왕비의 아버지인 어유구가 종친 중에서 아들을 입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한 후에도, 선의왕후는 영조가 못마땅했던 것 같다. 영조가 즉위한 후에 영조가 이인좌가 영조의 아버지가 숙종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이인좌가 당시 대비였던 선의왕후 어씨의 밀명을 받들어 반란을 도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인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의왕후에게 영조는 말도 안되는 주장[77]을 해서라도 끌어내리고 싶은, 후계자 자격이 없는 왕이었을 것이다.
  • 그럼 정말 연잉군이던 시절의 영조는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아니다. 다음은 영조가 후계자 자격이 있다는 근거이다.
    • 형제계승: 경종, 영조대는 가문의 모든 것을 본가의 적통인 맏아들이 상속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종법이 정착된 상황이라서 일반적인 집에서는 종법에 따라 본가의 적장자가 가문을 이끌었다. 만약 본가에 적장자가 없다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끌게 했다. 만약 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이끌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었다면, 영조가 아니라 선의왕후와 어유구가 들인 양자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렇지만 제왕가는 일반집과 달리 아들이 없으면 양자가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계승하도록 했기 때문에, 경종과 영조처럼 왕위를 형제에게 계승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78]
    • 삼종혈맥 (三宗血脈)”: 삼종혈맥은 조선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숙종의 유지를 말한다. 그런데 삼종혈맥의 시작인 효종의 하나뿐인 아들이 현종이었고, 또 현종의 하나뿐인 아들이 숙종이었다. 대대로 독자였으니, 효종, 현종, 숙종, 이 세 인물의 피를 물려받은 왕실 남자는 숙종의 아들인 경종과 연잉군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경종의 후계자는 연잉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경종의 후계자를 정할 당시 대비였던 인원왕후 김씨도 경종의 후계자를 정할 때 삼종혈맥의 계승을 말한 숙종의 유지를 염두에 두고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에는 경종과 영조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경종의 후계자로 연잉군을 선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조는 숙종의 유지인 삼종혈맥에 따라 정해진 유일한 후계자다.

5 같이 보기

6 참고

  1. 흔히 알고 있는 왕세자(王世子)와 같은 위치. 영조는 경종의 동생이었기에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王世弟)가 됨.
  2.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꼭 딱 노론과 소론의 갈등 뿐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주로 노론과 소론의 갈등임.
  3. ‘국’면이 전’환’됨. 숙종이 편들어주는 정치집단이 갑작스럽게 힘을 얻으며 이루어지는 정권 교체를 말함.
  4. '영조 즉위전'은 영조 즉위 전의 경종대 노소론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환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
  5. 회니=송시열은 ‘회’덕, 윤증은 ‘이’산에 살았다고 함.
  6. '영조 즉위전'은 영조 즉위 전의 경종대 노소론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환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
  7. '영조 즉위전'은 영조 즉위 전의 경종대 노소론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환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
  8. 병신지화(노론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처분이었으므로 병신’처분’이라고 보고, 소론의 입장에서는 화를 입은 사건이므로 병신지’화’라고 봄.
  9. 본 문서의 2.1.1.2 회니시비 참고.
  10. '영조 즉위전'은 영조 즉위 전의 경종대 노소론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환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
  11. 기타세력: 연잉군을 지지하는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세번째 본처(정실), 경종대의 대비.), 경종을 지지하는 선의왕후 어씨(왕비. 경종의 두번째 본처(정실). 아버지는 어유구(어유귀).)
  12. 경종실록은 경종이 사망하여 영조가 즉위 한 후에 편찬되었는데, 당시에 소론이 집권하고 있었기에 소론의 입장이 반영되었음.
  13. 경종'수정'실록은 노론 중심임.
  14. 숙빈 최씨의 출신:무수리였다는 설, 인현왕후의 몸종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보통 권력 없는 양인으로 보는 듯함.
  15. 당시 사관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아주 놀랄만한 일이었음. 원래는 사관이 항상 함께 해야 함.
  16. 세자가 왕을 대리하여 국가의 정무를 보는 것
  17. 영조 4년(1728)
  18. 출처: 수정필요 .( 의릉 이야기 (cha.go.kr))
  19. 입양시도 때문에 급해진 노론이 건저 논의를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음.(실록x)
  20. 사간원(임금에게 옳지 못한 일을 말하여 고치도록 하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의 정육품 벼슬인 '정언'이었음.
  21. 1721년 (경종 1년) 8월 20일
  22. 입양 시도 때문에 노론이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음.
  23. 1721년 (경종 1년) 8월 20일
  24.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
  25. 1721년 (경종 1년) 8월 20일
  26. 밤 2경. 밤 9~11시경.
  27. 많은 사람들이 찾아감. 다음은 찾아간 인물들임. 김창집·이건명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판윤(判尹) 이홍술(李弘述),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 우참찬 임방(任埅), 형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대사간 홍석보(洪錫輔), 좌부승지(左副承旨) 조영복(趙榮福), 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
  28. 1721년 (경종 1년) 8월 20일
  29. 인원왕후 김씨
  30. 연잉군은 아들 자를 쓰는 ‘세자’가 아닌 아우 제를 쓰는 ‘세제’라는 위호 받음
  31. 1721년 (경종 1년) 8월 21일
  32. 1721년 8월 23일
  33. 유봉휘의 상소가 소론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음.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 8월 23일 신사 3번째기사의 사관의 말 참고.
  34. 앞선 노론의 급습과 관련된 경종실록의 기사 속에서도 사관(소론 입장)이 노론이 보인 행동의 문제점을 언급함.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이 다른 대신들과 의논되지 않은 채로 급하고 빠르게 진행된 것, 노론(이건명)이 왕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대비가 후계자에 대해 손수 쓴 편지(‘자전의 수찰’)가 있어야 후계와 관련된 일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문제점으로 꼽음.
  35.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 8월 21일 기묘 1번째기사,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 8월 22일 경진 1번째기사,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 8월 23일 신사 4번째기사(왕세제 임명에 대한 반대의견을 보인유봉휘의 상소 사건 이후), 경종 1년 8월 25일 계미 5번째기사
  36. ‘혼전’이라고 하며, 숙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은 ‘효령전’이었음
  37. 1721년 9월 6일
  38. 1721년 9월 26일
  39. '김창집 등'의 인물. 경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성복의 대리청정 건의에 경종이 허락했을 때 같은 노론인 승지들도 반대의견을 보였으나 '김창집 등'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며 궐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함. 김창집 외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김창집은 노론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음. 이러한 점에서 노론의 핵심인물인 김창집이 다른 노론과의 의견통일 없이 조성복의 손을 빌려 대리청정건의를 했다고 추정할 수 있음.
  40. 1681-1723. 당시 사헌부 종3품의 집의였음.
  41. 1721년 10월 10일
  42. 경종실록 5권, 경종 1년 10월 10일 정묘 1번째기사
  43. =명을 거두어 달라고
  44. 최석항과 함께 승지와 홍문관원들도 모두 합세하여 대리청정을 거두어달라고 함.
  45. 대리청정 명령
  46. 1721년 10월 13일
  47. 1721년 10월 16일
  48. 이후 조태구가 궁궐에 들어온 과정에 대해 노론이 트집잡았지만 국왕이 들어주지 않았음.
  49. 1721년 10월 17일
  50. 1721년 12월
  51. 삼수의 옥이라고도 한다.
  52. 1722년 3월 26일
  53. 남인 집안의 서얼
  54. 1722년 3월 27일
  55. 신문이 있었던 당시에, 소급수가 시행되었다고 자백한 날짜에 정말로 경종이 먹었던 것을 게워내는 등 소화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56. 백망(白望)
  57. 1721년 12월 23일.'박상검의 옥'이라고 부름.
  58. 출처: 다시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E%84%EC%9D%B8%EC%98%A5%EC%82%AC(%E5%A3%AC%E5%AF%85%E7%8D%84%E4%BA%8B)
  59. 1772년
  60. 이렇게 안전해진 왕세제는 이후 1722년 9월 18일에 왕세제로서 성균관에 합격했음. 5월 27일에는 청이 사신을 보내어 왕세제를 공식적으로 책봉하기도 했음. 출처: ㅊ
  61. 이후 영조대에 있었던 기유처분 때 이 때 처벌되었던 노론들이 신원되었지만, 이이명과 김창집은 역모와 직접 관련되어있었기에 신원되지 못했음. 출처: 기유처분
  62. 1724년 8월 25일
  63. 자세한 내용은 밑의 '경종독살설'에서 서술함.
  64. "승정원일기",경종 4년 8월 24일. 양력으로는 1724년 10월 11일임.
  65. 기유처분(己酉處分). 1729년, 영조 5.
  66. 출처: https://ncms.nculture.org/confucianism/story/2616
  67.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3919851#home
  68.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3919851#home
  69. =거짓말
  70. 경신처분(庚申處分). 1740년, 영조 16.
  71. 남인 집안. 소론과 결탁함.
  72. "영조실록", 영조 4년 3월 14일.
  73. 출처: 경종독살설 연구
  74.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
  75. "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0일
  76. 출처: 경종독살설연구: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가능성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음.
  77.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
  78. 출처: 다시 수정'조선후기 왕의 권위와 권력의 관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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