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다른 뜻에 대해서는 퀴즈쇼 (1994)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 거북이[ | ]

이건 닥터스트레인지러브를 써준 녀석에게 써주었던 글이다. 이게 더 먼저고 그것이 나중이네. 세상에 영화관련 리포트를 두개나 써준것을 보면 나도 그녀석을 꽤 좋아했나부다. ㅎㅎ

  • 이거 다 쓰고보니 완전히 내 스타일의 글이 되어서 도저히 네가 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심히 미안하게 되었다. 이 글을 써먹지 않고 네가 툴툴대면서 새로이 글을 쓴다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진 않겠다. 허지만 노고는 잊지 말그라...^^

그리고 다음에 또 연락하마.

미디어 후려치기-'퀴즈쇼'에 나타난 언론공략

재미있는 것은 영화를 매스미디어라고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매스미디어를 분석하기 위한 텍스트로 이 영화라는 미디어가 쓰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 자체로 미디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은 주도하는 자가 어떠한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과학은 중립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자연과학자에게도 철학이 있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매스미디어는 아무나 쥐고 흔들 수 있는것이 아니다.
유권자라는 말과 소비자라는 말이 표현하듯 대중은 권력과 자본에 연관되어있다. 좋게 말해서 연관되어있는것이지 사실 종속되어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말 자체가 담고있듯 매스미디어는 많은 이들에게 정보를 공급할 수 있는 매체이다. 대중이 무지하다고 보는것은 아니지만 대중은 대개 수동적으로 이끌려가게 마련이고(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권력과 자본은 대중을 뜯어먹기 위해서 미디어를 이용한다. 미디어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것도 그때문이다.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배우이자 유명한 제작자가 직접 감독한 영화 퀴즈쇼(Quiz Show, 94)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한 강장제 만드는 회사가 협찬하여 진행하고있는 퀴즈쇼 21은 비교적 인기있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프로그램 제작자와 방송사, 광고주 이 셋이 야합하여 시청률을 끌어올리려는 계획을 짠다. 그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프로의 승자로 만들어 어메리칸 드림을 맛보게 하자는 것이고 이것은 적중하여 시챙률은 상승하였다. 그러나 자본의 회전은 그칠줄 모르는 것이어서 극도의 이윤을 만들기 위해 드라마틱한 요소를 넣기로 하고 그것은 바로 승리를 조작하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군중심리를 이용한 제스처와 프로그램의 진행, 정답을 미리 알려주어 적당한 시점에 맞추게끔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일개 평범한 유태인인 존 터투로가 지속적으로 승리하여 바닥에서 올라온 미국인의 이미지를 보여주었으나 시청률은 그만 정체된다. 그리하여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잘나가는 가문의 일원인 랄프 파인즈가 프로그램에 등장하게되고 그를 승리하게 만들어 미국의 지성이라는 평판을 만들며 일약 시청률과 강장제 판매고를 상승시켰다. 그러나 그사이에 돈을 허비했던 존 터투로가 돈이 필요하게되어 제작자들에게 불만을 품게되고 소송을 준비하는데 그것에 주목한 이가 바로 국회 조사관 롭 머로우이다. 롭 머로우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존 터투로의 증언을 발판삼아 이 야합관계를 밝혀내기 시작하는데 그는 미국의 새로운 희망이었던 랄프 파인즈를 구하고 싶어한다. 그의 목적은 TV를 봉괴시키는 것이지 개인을 파멸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제작자를 벼랑끝까지 몰아간 롭 머로우는 그에게 혼자 죽지는 말고 유착의 고리를 붕괴시키라 하였다. 광고주와 방송사측은 급한 나머지 인기가 치솟았던 랄프 파인즈에게 결백을 주장하라 하였고 랄프 파인즈는 더이상 속이는 것이 싫어져 청문회에 나갈수 있도록 기자회견을 갖는다. 랄프 파인즈는 양심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고백하여 청문회의 원하지 않았던 스타가 되고 광고주와 방송사측에 굴복한 제작자측이 자신들만의 행위라고 증언하여 TV를 무너뜨리려는 롭 머로우의 기대는 실패하고만다. 후기에 방송사와 광고주는 아무 피해도 없었으며 제작자는 후에 더 유명한 제작자로 성공하였고 랄프 파인즈와 존 터투로, 롭 머로우는 자신의 갈 길을 갔다고 나오며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제작자가 증언한다(아마도 그들이 결코 그렇게 진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한것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이었지 진실을 원한것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방송사와 스폰서 모두 돈을 벌었다, 물론 출연자들도 거액을 만져보았다, 다른 언론과 미디어들은 이 청문회마저 팔아먹고있다, 우리는 그저 흥행업자일 뿐이다, 당신들 위원회처럼.
이 영화가 두시간이 넘도록 보여주는 것의 총체가 여기에 담겨있다. 미디어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일지 몰라도 그것을 지배하는 자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미디어의 운용자들은 자신과 자신들의 지배자를 위해 진실을 취사선택하거나 종종 진실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게다가 경악스러운 사실은 미디어의 잘잘못을 밝히는 것도 스스로의 몫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O양 비디오 사건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수있다. 언론은 종종 자신들이 자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단지 성생활일 뿐이었고 그나마 인터넷이라는 막강한 복제매체가 있어서 O양이 고통받게 될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언론은 그것을 안보면 요새말로 '따'가 될 정도로 상황을 가속시켜 놓았다. 물론 목적은 판매부수를 위한 것이지만. 그리고 O양을 위로한다는 기사까지 1면 톱으로 때려대는 옐로 페이퍼의 위력과 가증스러움은 여기서 극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언론이 한번 저지르고나면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든 나쁜 결과를 가져왔든 복구할 재간이 없다. 당선이 안될것을 뻔히 알면서 홍보효과를 노려 출마하는 떨거지 대선주자들의 행보와 같은 속칭 언론 플레이를 낳거나 무고한 피해자에게 치명타를 날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퀴즈쇼는 위원회의 조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백퍼센트의 효과를 이미 발휘했다.

이렇게 미디어가 가지고있는 힘을 판단한다면 그것의 오남용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먼저 각각의 미디어가 가진 특성을 확인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미디어는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하느냐 청각적 이미지를 이용하느냐, 문자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좀 다르다. 이것은 수용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예를들면 인터넷이 현재 가장 각광받는 매체로 떠오르는 것은 그 동시성과 상호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반면 TV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시청자가 그것을 판단하기도 전에 또다른 이미지를 보내버리기때문에 수용자를 무척 수동적으로 만든다. 라디오도 그점에서는 마찬가지나 시각적 이미지에 비해서 강도는 약하다. 반면 신문같은 활자매체는 읽는다는 수용자의 적극성을 요하는 매체이므로 수용자가 취사선택을 할 수도 있고 반론같은 것을 가질수도 있다.
또 미디어의 소유정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공중파는 일반인이 소유할 수 없다. 돈이 좀 있다면 케이블 방송국 하나정도는 차리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신문이나 잡지는 능력껏 발행할 수 있는데 신문이 좀 더 자본을 요구하고 잡지는 비교적 소규모로 찍을 수 있다. 역시 여기서도 인터넷이 막강한 역할을 하는데 인터넷은 자본이 거의 필요없다. 컴퓨터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웹에디터를 이용하여 쉽게 자신의 주장을 인터넷에 띄울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인터넷, 잡지, 신문, 라디오, TV의 순서로 수용자의 적극성을 유도할 수 있는 매체라 하겠다. 반면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매체의 순서는 비교적 이것과는 반대이다. 어떻게든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것이 영향력이 강하다.

이런 특성을 파악한다면 기존 매체들의 '정곡을 찌른'것이 바로 딴지일보이다. 처음에 이걸보고 이거 안기부(였으나 지금은 국가정보원)에서 가만 내비두나 싶을정도로 우려되는 것이었으나 의외로 국민의 정부에서 내비두는 바람에 커버린 사례이다. 물론 딴지일보 역시 스포츠신문같은 면이 많지만 어쨌든 틈새를 공략하는데는 성공하였다. 허나 딴지일보는 그저 가십을 모아놓은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딴지일보식의 전략으로 공신력을 갖춘 언론을 규제하기는 힘들다.
역시 이 부분에서는 시민단체밖에는 없다. 이미 NGO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중 하나가 되고있잖은가. 시민단체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재정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산업화가 심화될수록 자발적인 시민단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독립성이야 정부에서 공인된 법인으로 지정하면 되는것이고 재정문제는 재벌에게 걷어서 정부가 나눠주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후원자와 수혜자가 직접 연결되는 한 유착은 피할 길이 없다. 물론 독립성과 재정문제를 확고하게 하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나 여기에서 논할 문제는 아니다. 허나 현재처럼 신자유주의가 판치고있는 한 이런 길은 매우 요원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대학이 바로서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할지 모르나 학문이 바로서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대학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허나 우리사회는 교수가 정치에 뛰어들거나 사회참여하는것은 용인하면서도 학생이 그러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대학에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자신들이 대학에 다닐때 가지고 있던 도덕성과 지식이 결코 유치한 것이 아니었음을. 허나 대학을 기업의 인력 풀정도로 만드는 작금의 상황과 학생은 공부나 하라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으면 역시 힘든 일이다.
이 두가지 시민단체와 대학이 언론의 감시자가 된다면 언론은 바른 길을 나아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11년전 이땅에서도 실험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한겨레 신문의 창간이다. 현재는 미디어재벌로 성장하고 있고 점점 본래의 취지를 상실해가고 있어 문제가 되긴 하나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균형을 잃지 않은 언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외에 한겨례측에서 주도한 잡지, 사회교육 등의 분야에서도 권위를 얻고있어 척박한 언론풍토의 한가닥 희망이 되어주고있다.

여기서 미디어의 폐해는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았다. 여론조작의 대표적인 정론지 조선일보가 아직도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는 권위지인 상황에서 두말하면 잔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TV가 이미지를 계속 내보내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경고는 언론학자들의 지겨운 메뉴이다.
그럼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뜻이 있고 컴퓨터를 좀 다룬다면 자기의 홈페이지를 독자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것이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가 대개 쓰레기지만 자신의 의지가 명확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재조직해서 영양가있는 정보로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대학신문이나 교지에 자신의 목소리를 실어보는 것이 있다. 그것들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까닭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목소리를 내고싶으면 그쪽에 의견을 밝히는 상호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정도는 대학생에게 충분히 요구할 수 있다.
이 외에 무엇이 더 있을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듯 미디어를 바꾸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거북이

2 # 촌평[ | ]


from 복수는나의것

사려깊은 글 감사합니다. 거북이씨 몇 줄 안되는 글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게 하네요. 간단한 말이지만 '어린왕자와 여우'로 충분합니다. 모든 영화 다음에 답글을 보내는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니네요. 그래서 이 부분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대학생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아이를 좀 특이하게 (저는 당연하지만 남들의 눈에) 키웠습니다. 함께 영화와 책을 보며 교육을 시켰다고 할까요? 가족이 함께 영화 연극과 책 등을 보면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했습니다. 그 수 많은 영화 중에 '퀴즈쑈'를 말하고 싶네요. 자녀와 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잘 못 판단한 결정의 슬픈 결과와 남들의 눈에 비친 멋진 인생의 이면의 허망함과 고통, 자신이 인정하는 당당한 삶의 차이를 그 영화는 교육하기에 적절하지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인생의 길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영화의 장점은 흥미와 함께 처음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한편으로 볼 수 있어서 유리합니다. 뭐 감상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초교에서 고교까지 한번도 학원이나 기타 사설 학원에 보내지 않았고요. 고교 3학년 때 빼고는 학교의 과외 교육도 안받게 했습니다. 학교에 양해를 구해 그냥 집에 보내면 했는데 선생님도 그렇게 해 주데요. 꼭 교육이라기 보다 그냥 함께 대화하며 생각을 교환하지요. 그래도 충분한 학창 시절이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과 교육 방식의 차이지요. 자녀가 잘 따라 주어서 고맙고요. 저는 여기서 지식은 학교에서, 문화적인 것은 가정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효과적인 일면을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대학에 다니는데 내게는 누구보다도 대화의 좋은 상대이며 자신의 인생을 충실히 준비하는 과정이지요. 큰 차이는 그 아이는 컴퓨터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저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점인데요.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지요. 참, 저는 영화 '심플플랜'을 참 인상깊게 보았는데 여기에 수록이 안되었네요. 제가 못 찾았나요? -- 안빈 2005-4-13 9:53 am

그럼 심플플랜에 관한 글을 보내주세요. 저는 못봤구요. 보내주시면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교육관이 저와 상당히 비슷하시네요. 전 아직 미혼인 주제입니다만...하하 -- 거북이 2005-4-13 10:13 am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 "퀴즈쇼"
내가 퀴즈쇼란 영화를 보며 느낀 또다른 점은 미국인들의 권위와 특권의식과 그에 따른 강박관념이다. 특히 백인, 프로테스탄트, 앵글로 색슨 이라는 기본적인 권위의식과 더불어 '하바드'라는 지식인의 허울을 쓴 또다른 특권의식인 것이다. 내가 보기론 롭머로우가 랄프파인즈 개인적인 호의를 배푼 것은 사회정의 구현같은 그런 건전하고 올바른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바드'라는 동료의식 때문이었다. 롭머로우가 학벌에 의한 특권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인물이라는 것은 영화의 첫번째 장면에서부터 알 수 있다. 지식인입네하는 허울 속에 숨겨진 그 끝없는 멍청함이란. 사실, 학위나 간판이 올바른 지식인의 잣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의사결정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추론에 의해서 나타나는지 조금만 추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유태인 출신인 존 터투로도 허위의식과 강박관념에 쌓여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난 이 사회에서 시이저를 죽일 수 있는 브루투스의 단호함이 그립다. --Walrus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