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종료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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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0 01 火 : 영업 종료 6시[ | ]

5시 반에 일어나 토스트 하나 구워먹고 버스를 탔다. 공항에 와서 탑승권을 받고나니 8시가 넘었다. 적당히 쾌변을 하고 면세점에 들어가 켈틱 십자가 목걸이를 하나 샀다.
더블린 공항은 새로 지었다는데도 고속터미널보다도 빈티난다. 그 전에는 완전히 남부터미널이었다고 한다.
비행버스를 타고 이륙했다. 졸고있는데 음료수를 끌고 왔다갔다한다. 난 쥬스나 마셔야지 하고 받았는데 받고나니 유료다. 그것도 16E라는 천문학적 가격! 허걱하고 곱게 돌려주었다. 하긴 비행버스이니 그런것이 포함되어있을리가 만무하지만 너무 비싸구나. 이어서 자야겠다.

에딘버러에 도착해서 민박집에 전화를 했는데 여자가 있으면 여자만 받는 스타일이라 받기가 곤란하단다. 당황해서 다른 민박집으로 전화했지만 글쎄 연결이 다 안된다. 에딘버러엔 한인 민박집이 세개뿐이다. 처음엔 동전넣고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10P짜리 전화카드를 하나 구입했다. 이건 나랑 WooRam이 결국 영국 떠나기전에 다 썼다. 영국 물가 역시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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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근처에서 찍은 에딘버러 시내

하는수없이 시내로 나와 i를 찾았다. 외국 나오면 어디 찾는게 가장 고역이다. 지도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다. 간신히 찾아서 인버니스와 스카이 섬으로 가는 항로를 물어보고 적당한 유스호스텔에 들어갔다. 프린세스 스트릿 유스호스텔인데 i 바로 앞에있다. 그나저나 이 나라는 죄다 공주거리(Princess St.), 왕자거리(Prince St.), 왕 사거리(King's Cross) 이따위다.
외국에서 걸어서 뭔가를 찾기보다는 그리 비싸지 않다면 하루종일 교통편을 몽땅 이용할 수 있는 데이 프리 패스따위를 사서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과 체력에 도움이 된다. 이후 이 교훈은 런던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i하나 찾는데도 꽤 애먹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별로 신통한 대답이 안나오지만 그래도 물어보는게 개중 낫다. 물론 그런 조언들보다야 당연히 지도를 더 믿어라.

여튼 방에 짐을 짱박고 시내로 나갔다. 우람군 카메라가 고장나는 바람에 카메라가게를 찾기위해 에딘버러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여긴 카메라가게가 별로 없다. 카메라가게라기 보다는 가게가 별로 없다. 우라질레이션. 나중에 스페인에서는 어딜가나 카메라 혹은 필름가게가 보여서 쪼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첫번째 갔던 집에서 카메라를 보더니 대뜸 묻는다.

어디사니?
한국인인데 지금은 더블린에 산다.
그럼 더블린으로 부쳐줄까, 서울로 부쳐줄까?
(허걱 -_-;)그게 무슨 말이냐. 되도록 빨리 고쳐줘라.
흠...
얼마나 걸리는데?
3주.
(컥...-_-+)

솔직히 고장난 부분이라고 해봐야 필름끼우는데 부품이 너무 오래되어 닳은 것 뿐이었고 그 수준이란 것은 종로 3가 카메라 선수들에게 가져가면 딴데보면서 농담따먹기하면서도 5분이면 떡을 칠 수준인데 그놈들은 일단 그렇게 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물어봐서 다른 가게를 알아냈다. 우리가 온 길과 정 반대다. 여튼 빡씨게 갔더니 문이 닫혀있다. 웃기는 것은 그 가게는 일주일에 3일을 연다고 자상하게 인쇄되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것이 6시 조금 넘어서였는데 6시에 문을 닫았고 내일은 쉬는 날이다. 아주 지랄리스틱하다. 이런 일은 계속 마주치게 된다. 나중에 유럽인의 노동관에 대해 조금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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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찍히는 우람

여튼 우리는 하루 종일 에딘버러 시내를 헤맸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정말 뽀지게 돌았더라. 어쨌든 에딘버러는 그럴만했다. 어떻게 이런 풍경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여기에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 그대로가 남아있다.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실 에딘버러에서 특별한 볼거리라고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인간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에딘버러 페스티벌 시즌이 아니라면 고작 에딘버러 성 정도다. 하지만 스콧기념탑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는 정말 예술이다. 언덕에 지어져있어 여기저기 구석구석 입체적으로 만들어져있는 것도 재미있고 예전엔 서민들이 다닐수 없었다는 로열 마일 주변에 오면 중세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중세나 근대에 현대가 끼어있다는 느낌, 그것이 에딘버러 구시가의 이미지다. 이것이 유럽이다(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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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다구 하나로 승부하는 스콧기념탑

우리는 기껏해야 20년 안쪽에 부숴버리고 또 짓는다. 이놈들은 200년이 넘은 건물안에서 살고들 있다. 인간들이 보수적이지 않을 수가 없을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마인드가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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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들은 못다녔다는 로열 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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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가일스 성당. AFC일게 뻔해서 안들어갔다.

지나가다가 헬스장을 하나 보았다. 이거 우리나라로 치자면 조선시대 관청자리에 러닝머쉰을 가져다놓고 뛰고있는 꼴이며 사랑방에서 아령들고 땀내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놈들에겐 이게 일상이다. 에딘버러 성도, 세인트 가일스 성당도 어디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겐 항상 2-3백년이라는 시간이 함께한다. 어딜가나 볼 수 있는 녹지들과 함께 말이다. 사방에 깔린 공원과 나무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의 때가 묻은 공간, 이것이 삶의 질을 차이나게 하는, 정말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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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어디에나 있는 거리의 악사. 이 친구는 스코틀랜드답게 퀼트를 입고 백파이프를 물고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똑같이 무료한 삶속에서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템포가 너무 느려 항상 다른 자극을 찾아 헤메기에 맥주나 마약에 탐닉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뭐 자조적인 말이지만 일상은 일상일 뿐이라는 말이라도 뱉어보고싶은거다 나는. 그만큼 에딘버러는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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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인지 저녁인지로 유명하다는 터키식당인 케밥마할에서 먹은 카레스러운 음식. 괜찮았지만 독한 향신료는 나를 맛가게했다. 결국 양고기를 조금 남기다.

여긴 6시만 넘으면 모두 닫는다. 간신히 찾아낸 두번째 카메라 가게도, 아까 지나가다가 저녁에 와야지 찜했던 HMV나 버진같은 대형 판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는다. 오직 버거킹과 바만이 조용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동네 친구들은 밤이면 집에가서 밥먹고 가족끼리 놀거나 바에 간다고 하는데 정말 무료할거 같긴 하다. 고작 인구 40만인, 인구만으로 따지면 상계동만도 못한 도시이다. 이천만이 박터지게 모여있는 수도권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은 일년에 한번있는 페스티벌을 위해 사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여기의 바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예약받고 있었다. 이후 본 유럽은 대부분 그런 느낌이다.
선조들의 유산과 함께 살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매우 조심스러운 이들의 삶은 나에게 작지만 긴 파장을 던진다. 난 뭘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난 왜 어제도 밤샘해가며 일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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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루드 언덕. 나중에 민박집 아저씨께서 드라이브 해주셔서 봤던 이 언덕은 정말 오방 이쁘다. 다른 이상한데 가지 말고 여기서 꼭 반나절은 보내길 권한다. 정말. T_T 난 고작 이십분쯤 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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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toise, the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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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 본전생각이 간절하다는 홀리루드 궁전. 문을 닫고 있길래 아저씨에게 사진만 부탁했다. 아저씨들은 꼭 건물은 잘 안찍고 사람만 찍어준다.

저녁까지 도시를 방황한 나와 우람은 종종 앉아서 쉬곤했다. 공원에 앉아있는데 털이 복슬복슬한 개가 주인따라 지나가더라. 우람에게 '저놈 귀엽지 않냐?'라고 말하고 보니 옆 나무로 가서 오줌을 찍 갈긴다. 흠 펑크의 발상지답게 개도 펑크적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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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강아지를 만난 예쁜 길. 칼튼 힐 쪽이다.

작은 도시지만 열심히 걸었더니 꽤 힘들다. 내일은 명소 몇곳을 돌아본 다음 인버니스와 스카이섬으로 가는 표를 끊어야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동네 클럽이라도 한번 가서 맥주라도 마셔야지. 옆동네인 글래스고나 아래쪽 맨체스터에는 클럽도 많건만 여기는 라이브클럽 하나도 변변한 것이 없는 동네라고 한다.
해질녁에 보는 스콧 기념탑은 정말 멋지다. 뽀대 하나는 죽이는데 뭘 위해 저렇게 만든건지 모르겠다. 그냥 뽀대좋은 탑이다.

빡씨게 돌아다니고와서 유스호스텔로 들어왔다. 이 프린세스 스트릿 유스호스텔은 계단이 많아서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주 꾀죄죄하니 잘 찾아야 한다. 계단은 진짜 많다. 올라가다보면 그래퍼티가 그려져있는데 조금만 더 와요, 힘내세요 따위의 말들이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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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는 계단. 뛰어올라가면 숨이 찰 정도는 된다.

유스호스텔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본다. 전 여정을 통틀어 하루밖에 유스호스텔을 이용하지 않은 주제에 설명하면 우습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묘사해보자. 여기는 방 하나당 침대가 4-6개정도 있는 공동 침실이 여러개 있고 세면대와 화장실이 두세개정도 있다. 따라서 혼자다니거나 낮에 물건을 두고다니거나하면 도난 위협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거실처럼 쓰이는 공간이 있는데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어 과자를 먹거나 농담따먹기를 한다. 여기는 기증받은듯 싶은 여러가지 같잖은 책들이 있다. 물론 영어다. 인터넷도 사용이 가능하다. 부엌이 있는데 취사도구가 대충 있어서 요리가 가능하다. 공동생활을 하니만큼 언놈이 쓰고있으면 당연히 기다려야 한다. 하루야 묵을만했지만 여러날 지내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정도 시설인데 하루에 11P 정도이니 결코 싸진 않다. 에딘버러에서 묵은 한인민박인 패밀리 민박은 9P였다. 한인 민박집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대충 다 나온다.
여튼 유스호스텔은 정말 최소한의 생존도구(?)들만이 있는 곳이다. 미니멀한 삶이라고나 할까. 양키친구들은 여행을 다니면 거의 유스호스텔에서 묵는다. 유스호스텔이 가진 강점이 있다면 그것은 각종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영어가 어느정도 된다는 가정하에서 의미가 있긴 하다. 나는 우람의 유창한 영어에 밀려 그 안에서 별로 뻥끗하지 못했다. 그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절대로 한인민박이 추천이다. 외국 친구들은 유스호스텔에서 만나 자기들끼리 룰루랄라 잘도 떠든다. 아 영어, 된장. 여튼 여기는 남녀혼숙인데 우리방에 묵은 여자애 하나는 2년째 여행중이라는 당혹스러운 멘트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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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호스텔. 여기서 오래살면 바퀴벌레와 친해질거 같다.

나와 우람은 씻고 거실에서 농담따먹기 좀 하다가 인터넷 좀 하다가 민박집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여자분이 나가는 바람에 내일부터는 좀 편해지게 되었다.

가끔씩 찰나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종종 무척 빛나는 것들이기도 한데 걷다가보니 적을 틈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많다. 나는 워낙 하드디스크가 안좋은 놈이라 그런게 기억에 잘 안남아있기도 하고 또 적기가 불편하기도 하다. 어떻게든 이런 시디롬(=일기장)에 기록을 하고있지만 말이다. 아쉬운 일이다.


워리메리쫑 <= 영업 종료 6시 => 비내리는칼튼힐

거북이유럽서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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