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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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거북이

역시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떠들어두었으므로 별로 덧붙일 말은 없다.

  1. 뭐 시나리오의 완성도나 일관성 이런건 너무나 옛날 영화인지라 별로 말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표현주의 영화니까 그림만 보는게 낫다고 보는 사람도 꽤 있는듯 하다. 시나리오를 쓴 감독의 마누라는 파시스트적인 감성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2. 무성영화이므로 다분히 연극적인 것은 당연한데 초반이 더 연극적이고 뒤로 갈수록 모던해지는 괴이한 편집을 보이고 있다. 원작은 세시간이 넘는다고 하고 내가 본 최종 복원본이 두시간정도 되고 조르지오 모로더가 편집했던 판은 80여분이었다고 하는데 굳이 최종복원본까지 볼 필요는 없을것 같다. 감독이 일부러 앞뒤를 다른 느낌으로 한것 같지는 않고 앞쪽의 서곡(prelude)부분을 너무 늘어지게 편집한 느낌이 있다.
  3. 가슴과 손의 화해는 심장이라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앉아있다. 그 말은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라는 단호한 가사만큼이나 피곤한 소리다.
  4. 자본가와 노동자를 동시에 까고있다. 이거 설마 감독이 노린 것일까? 자본가는 음흉한 빅부라더이고, 노동자는 우매한 대중일 뿐이다. 20세기인데 대중이 아직도 마녀사냥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뭐 이 영화의 배경은 그것보다도 더 미래이지만서도...) 어쨌거나 권선징악적이지 않고 출연진 모두를 까고있는 이 영화는 포스트모던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두산백과에서 계급간의 화해 운운한 것은 개 풀뜯는 소리이다. 저런게 백과사전이라고...쯧. -_-+
  5. 물량공세가 장난 아니다. 어쩌면 대공황 직전의 시기여서 그 거품으로 이만한 자본을 동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무쟈게 많이 나오고 셋트에서 물장구치는 것 치곤 너무 물을 많이 붓는다.
  6. 사람으로 둔갑한 로봇이 노동자를 선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여배우의 움직임은 상당히 퇴폐적인 느낌이 있다. 이러한 퇴폐적인 모습은 역시 대공황을 암시하는 장면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19세기 말의 데카당스적인 문화의 연장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의 묘사는 19세기적인 느낌이 짙다. 중간에 백년전 여자의 스트립쇼도 나오니 관심있는 사람은 유심히 보시라. (재미는 없다.)
  7. 미학적 성취라는 면에서 프리츠 랑의 표현주의라는 것은 인상적이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미래주의적 이미지는 사실 크라프트베르크의 사운드까지도 이어지는 그런 감성이다. 난 기계문명이 썩 맘에드는 것은 아니드만 그들은 그것이 좋았나보다. 어쨌거나 그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적이고 또 절망적이다.
  8. SF로서는 상당히 훌륭하다. 로봇 둔갑장면이라거나 사악한 천재 변태과학자의 등장이라거나 그 당시에 이정도를 만든 것은 대단한 것이었을듯 하다.
  9. 전체적으로 감독의 감성은 바그너적인 면이 있다. 뭔가 웅장하고 비장미 넘치는 그런 것 말이다. 나중에 감독은 미국으로 도망가서 자기의 영화를 싫어했다고 하지만, 그동네 애들은 어째 하나같이 다 그런 면들이 있었나보다. 내가 가장 어처구니 없게 생각하는 그런 독일적 인간은 클라우스 슐체이다.
  10. 그나저나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가이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 이따우 영화를 찍으라고 저 많은 돈을 퍼부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_- 설마 뜰거라고 생각한걸까?
  11. 얼마전에 전함포템킨펫샵보이즈가 사운드트랙을 다시 녹음해서 입혔다. 이건 재미있을라나... 무성영화에 새로 음악을 입혀보고자하는 욕망이 왜 생기는지도 참 궁금한 일이다. -- 거북이 2005-11-9 10:36 pm

2 # 장길산

메트로폴리스 (1927) Metropolis

(아주 어린 시절,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세계 문학 전집 속에서 아주 음울하면서도 신비로운 작품을 접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여러 해가 흐른 이후에 그 작품이 바로 영화 ‘메트로폴리스’와 같은 내용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만들어진지 70년이 넘은 SF의 고전 메트로폴리스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국내 최초로 상영되었다. 게다가 오리지널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하는 이색적인 공연의 형식으로. 다른 예술 작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때때로 영화 역시 타인의 손에 의해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후대에 전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는 현재 여러 개의 판본으로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음악 역시 완전히 다른 여러 판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리지널 음악에, 마치 전 세대의 영화 상영 모습과 흡사한 실제 오케스트라 공연과 어우러진 공연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메트로폴리스는 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몇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미술과 건축을 공부했던 감독이 그의 심미안으로 창조한 놀랄 만한 미래 도시의 비주얼, 비참한 도시 노동자들의 표현주의적 묘사, 신분을 뛰어넘는 두 주인공의 낭만적인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마리아’라는 캐릭터의 창조.

암울한 노동자들의 행렬로 시작되는 영화는, 대 자본가 프레데센의 아들인 프레더의 호화스럽고 즐거운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신비로운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에게 매혹된 철부지 프레더는 지하의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고 새로운 사상을 머리 속에 품게 된다. 이를 알아챈 프레데센은 과학자 - 이후 B급은 물론 그 외에도 수 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치광이 천재 과학자의 원형 - 로트방에게 마리아와 닮은 인조인간을 만들어 줄 것을 청한다. 이렇게 창조된 인조인간 마리아는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메트로폴리스의 파괴를 선동하고, 난리 끝에 노동자와 자본가는 프레더라는 중개자를 통해 화해하게 된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장점을 가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내포된 현실에 대한 시각 탓에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손과 머리로 상정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을 마음이라는 중개자를 통하여 간단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너무나도 이상주의적 결론이 문제가 되었다. 신비로운 카리스마의 소유자 마리아가, 신비로운 방식 - 어떻게, 왜? 라는 설명이 제시되지 않으므로 - 중개자로 선택한 프레더는 혈연이라는 당위성을 빼고는 마리아에게 매혹된 철부지 청년에 불과하다. 역사의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할 의향은 없으나, 감독의 변명을 대신하여 약간의 사족을 달아볼 수는 있다. 합리적인 방법 혹은 투쟁을 통해서건 세력간의 대립이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재화의 한정이라는 경제의 법칙 역시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는 사실이다. 고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향하건, 아니면 사회주의로 향하건,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제 3의 길로 향하건 결국 갈등의 완전한 해소는 서로간의 이해나 이기심의 소멸 등의 다소 몽상적인 방식으로 밖에는 성취될 수 없다. 물론, 이것이 결코 성취될 가능성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제도적이고 사상적인 방식으로 이에 접근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현실이다. 비판자들에 대해 감독이 던졌다는 ‘이 이야기를 하나의 우화로 이해해 달라’는 변명을, 이러한 다소 비현실적인 순진한 이상주의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편애일까?

히틀러와의 연결점 등을 비롯한 골치아픈 문제들은 뒤로 하더라도 이 작품은 여전히 대단한 걸작이다. 프리츠 랑 감독은 행복하게도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여 자신의 환상을 형상화하여 독보적인 지위에 이르렀으며, 이제는 어른이 된 한 어린애의 마음 속에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신비로운 여인의 인상과, 생전 처음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체험하며 괴로워하던 한 낭만주의자 청년의 모습을 깊게 새겨놓았다.

p.s. 별점은 4개

2000-9-2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봄. 2000-9-4 새벽에 씀.

3 # 촌평


영화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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