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Jmnote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4월 9일 (월) 21:32 판

시간은 모든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작년 이맘때쯤에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이 주연한 '돌이킬수 없는'이란 영화를 봤었더랬다. 비록 비디오로 본 것이긴 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거친 화면톤과,영화 내내 지속됐던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흔들림이 심했던 핸드 핸들링 촬영씬들, 폭력적이다 못해 스플레터 무비라는 착각을 일으킬만한 잔인한 살해 장면들, 지금까지 봤던 어떤 영화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느끼게 했던 강간 장면들이 너무나 여과없이 전달되어서 머리속에 너무나도 인상깊게 각인이 되었던 작품이었다.

영화의 시간 구조는 사건의 결과로부터 사건이 시작되기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고, 영화의 시작 부분에 항상 경고방송처럼 등장하는 영화사의 로고도 작품의 맨 끝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했던 문장들이었다.

"시간은 모든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몇일전에 서점에서 샀던 투르니에의 '외면일기'에서 나는 이 문장을 우연히 다시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구는 영화에 인용된 것이 다가 아니었다.

"시간은 모든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또 그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저 문장을 읽고나서야 영화를 보고나서 내내 품고 있었던 의문이 풀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하는 감독에게,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동시에 모든것을 시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라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에게서 끝이 나는 모든 현상들의 연속이기에 모든 것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끝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요즘은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시간들을 간절히 되돌리고 싶을때가 너무나도 많다.


전적으로 님의 생각에 동감하게 되면서, 투르니에의 말에 사족을 달고 싶군요. 동서양의 관점의 차이인것 같습니다만...

  • 시간은 모든것을 파괴한다.

- 좀 이상한 문장인것 같습니다. 시간이란 변화를 말하고, 모든 것은 변합니다. 즉 시간은 모든 것의 속성이 되지요. 바로 시간 때문에 일체가 존재하는 것인데, 시간이 일체를 파괴한다는 건 지극히, 고정된 형상이란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힌 시각입니다.

  • 시간이 사랑과 증오의 대상을 파괴한다. 고통과 죽음을 파괴한다.

- 역시 같은 말인데 사랑과 증오의 대상을 우리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것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 대상이 고정되어 있고 시간이 그 대상을 파괴하는 건 아니죠. 게다가 대상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대상은 가치중립적인 것인데, 그 대상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것은 '나'라는 자아입니다. 시간은 그 대상을 파괴하는게 아니라 '나'의 어리석은 집착을 파괴한다고 말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과 증오에서 나오는 자극을 질질 끌고 가다가 스스로 지쳐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상념을 버리는 것이죠. 게다가 육체라는 것이 당연히 시간속에 있기 때문에 사랑과 증오를 계속한다는 것은 새로이 생겨나는 뇌세포에 그것을 끊임없이 새겨나가는 것인데 일부러 그런짓을 하면 대단히 피곤할 겁니다. 피곤하니 자연스레 관두겠죠. 사랑은 계속하는게 아니라 지속적인 상호관계속에 새로운 사랑이 계속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증오도 마찬가지고.

고통과 죽음의 경우 아예 그 대상조차 없지요. 그것들은 '나'의 생각속에만 있는 것이니까. 고통은 생존에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의 본능적으로 주어지는 자극을 '내'가 관념화시킨 것입니다. 고통은 되려 축복이죠. 고통덕분에 불리한 환경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생기니까. 시간에 의해 고통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되려 고통때문에 변화가 생기니까 고통은 지극히 시간적인 개념이네요. 고통을 파괴하는게 아니라 '아 난 지금 고통스러워'라며 무력하게 방에 처박혀 있는 '나'는 파괴할지도...

그러고보니 파괴라는 것이 시간적인 개념이니까 시간이 대상을 시간적이게 만든다는 소린데... 대상또한 시간속에 있고... 그렇다면 시간이 대상을 파괴하는게 아니라 시간이 대상에 대한 '나'의 순간적으로 지어져 고집스럽게 이어지는 想을 파괴한다는게 적당하겠네요.

그리고 죽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파괴할 것도 없지요. 살아있으면 죽지않고, 죽으면 죽은줄을 모르니까. 다만 타인의 육체가 단시간에 심하게 붕괴되는 것을 본 '내'가 그러한 현상에 대해 공포를 가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역시 그리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想이죠. 그런데 시간은 죽음의 공포를 가중시키지 않나? 늙을수록 죽음을 생각하니까. 아마도 죽은 다음엔 더이상 공포를 느낄 주체가 사라지지 맞는 말일수도...

  •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 마지막 문장은 적당한 것 같네요. 다만 시간이 我想을 해치워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아서 이렇게 다들 고생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부수는 想보다 새로 만들어나가는 想이 더 많은 이상 苦의 원천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지요. 다만 이젠 더이상 어리석음의 결과속에 신음할 수 없다는 인식속에 거짓된 我를 벗겨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쓰고 보니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린 것 같은데,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문장이 영 눈에 거슬려서요. 게다가 투르니에 또한 바른 생각을 한 것 같긴 한데, 문장을 보면 고정된 무언가가 있고 시간은 그것을 파괴한다는 식으로 써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피곤하죠. 고정된 무언가도 없고 때문에 그것을 파괴할 필요도 없죠. 다만 모든것은 변한다는 철저한 인식속에 집착과 아쉬움만 버리면 피곤하게 살진 않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공평한 세상입니다. 사랑도 사라지지만 고통도 사라지니까. 또 생기기도 하고. 게다가 자비롭게 살면 고통은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가게 만들수도 있고. 인간에겐 자유가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자신의 想을 만들 수 있으니... -- LongWarm 2004-9-1 11:50 pm

인간의 자유의지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스스로에 대한 존재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고의 바탕이죠.
LongWarm님이 지적하신대로 저 문장속에 나타난 트루니에의 사유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진 서양문화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말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서양의 문화가 기독교의 종교관 위에서 형성된 문화라서 그런지, 그들의 문화 예술 작품을 살펴보면 유난히도 흘러가는 시간의 덧없음, 시간의 파괴성들을 형상화한 그림이나 소설등이 많더군요(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 작품들에 보면 그런 그림들이 많죠.)
저도 개인적으로 시간은 모든것을 파괴한다라는 말에는 원천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관계의 종말의 오는 것은 사실이죠.
언제 기회가 되시면 트루니에의 외면일기를 보시길 권합니다. 부담없이 읽을수 있는 소품집으로 읽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DarkTown 2004-9-2 12:3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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