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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일 (화) 20:50 판

ISBN:8932906447

  • 원제:The French Lieutenant's Woman(1969)
  • 작가:존 파울즈(1926-2005)
  • 번역:김석희

1 # 거북이

사실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지금 우리집에 있는 책들을 보니 문학은 전체의 30%가 채 되지 않고 그것들도 상당수는 읽지 않은 책들이다. 픽션도 나는 뭔가 옛날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들어 춘향전이나 열하일기 같은. 열하일기는 픽션이 아니라고? 열하일기는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있다. 옛날 글들 중에서 문사철이 구분되지 않은 글이 가진 매력이란 놀라운 것이다. 나는 픽션에 어색해하는 사람이라 그런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아서 유감이다.

누군가의 강추로 읽게된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흔히 얘기하는 역사소설이다. 역사소설은 나름 재미있다. 소설로 역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여운형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혈농어수'를 읽고있는데 이런 것은 길어서 읽긴 힘들어도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도움이 된다. 프랑스 중위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프랑스 중위는 줄거리만 보면 그렇고 그런 로맨스 소설이다. 그런데 엄청 두껍다. 별 내용도 없는데 왜 이리 두꺼운가 하고 보면 작가가 말이 많다. 이 존 파울즈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아는바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읽다보면 이건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니라 초-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여기저기 왔다갔다 한다. 즉 외면에서만 묘사하다가 갑자기 내면으로 쑤욱 들어갔다가 작가가 갑자기 글에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개인을 다면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결말을 굳이 두개로 만들기도 하는 등 상당히 세련된 글쓰기를 보여준다. 그 와중에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자신의 변태적 집착을 유감없이 표현하기 위해 구구절절 설명이 길다. 이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집착은 스팀보이에도 잠시 적었지만 여러 사람이 가지고 있다. 그중 존 파울즈는 발군이다. -_-

이 책의 주인공은 내 보기엔 사라도 찰스도 아니라 존 파울즈 자신이다. 그는 사라와 찰스를 무대에 올려놓고 꼭두각시처럼 연출을 하는데 그 중간중간에 두 사람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한다. 즉 파울즈는 자신이 얼마나 캐릭터를 잘 만들고 심리를 잘 묘사하면서 관객을 가지고 놀 수 있는가를 과시한다. 그는 너무 능숙한 연출가라서 얄미운 구석이 있다. 예를들어 로버트 프립(RobertFripp)이 기타 솜씨로는 데이빗 길모어(DavidGilmour)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로버트 프립보다는 왠지 데이빗 길모어에 더 정이 가는 것이다. 프립은 거장이고 선생님이지만, 정이 좀 안간다. 너무 잘하기 때문일거다. 파울즈는 프립같은 느낌이 있다.

당신이 남자라면 찰스에 동화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우유부단하면서 착한 젠틀맨의 표상이다. 남자들은 소심하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라를 덮쳤지만 슬픈 토끼처럼 넣자마자 싸버리고만다. (이 시점에서 파울즈는 엄청나게 사악하다. -_-) 여튼 그는 끝까지 소심하게 착한남자 컴플렉스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여주인공 사라인데, 얘는 줄거리만 따라가면 뭐 미친년이다. -.- 행동에 일관성도 없고 거짓말과 참말을 밥먹듯 섞는다. 그런데 그게 의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여성 특유의 변덕(어감이 나쁘지만 마땅히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걸)일 뿐인거다. 여성 특유의 조울(증이라는 말은 싫다)적인 면처럼 말이다. 사라는 거짓말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한다. 그러면 찰스는 돌아버린다. 이 불쌍한 토끼는 사라에게 한없이 농락당하는데 사실 사라는 별로 농락할 생각도 없지만 찰스 혼자 농락당하는 것인게다. 남자들은 알거다. 사랑하는 여자의 제스처 하나하나에 자기가 얼마나 동요하는지. 귀엽기도 하고 안되었기도 하고. 사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찰스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찰스는 울트라 부자라서 먹고사는데 하나도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세계여행을 하면서 종종 사창가를 방문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번뇌는 멈추지 않는다.

파울즈의 글쓰기는 대단한 면이 있다. 대사 하나하나가 인물들을 미묘하게 비틀면서 묘사한다. 책을 읽다가 아마 3-40군데는 접어둔 것 같다. 뭐 예를들면 이런 부분이다.

"그는 그녀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고 벽난로 위에 놓인 도자기 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죽는 날까지 도자기 양을 볼 때마다 격렬한 자기혐오감에 휩싸이곤 했다."

지금 업무시간이라 마음놓고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 그리고 이 글쓰기는 김석희의 훌륭한 번역에 의해 잘 살려져있다. 좋은 번역을 읽으면 참으로 마음이 므흣하다. 우리는 평소에 워낙 더러운 번역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토마스 핀천의 '브이를 찾아서'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핀천은 모던했을지 몰라도 무척이나 짜증났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몰지각한 아방가르드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실험은 파울즈처럼 관습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조금 비트는 스타일의 것들이다. 그런 류의 전위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함께 즐기는 아방가르드. 즐겁지 아니한가.

아 그리고 '프랑스 중위'는 소설에서 거의 의미가 없다. 사라를 잡년이라고 묘사하기 위해 쓰인 수식어인데, 사실 사라는 잡년이라기보단 성녀에 가깝게 묘사된다. -- 거북이 2008-1-3 6:06 pm

2 # 촌평

핀천도 결국은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작가인데, 그 사람에 대한 외부적 평판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아닌가 합니다. 나는 거북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제가 최근에 존 파울즈와 핀천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우연성coincidence를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전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전혀 로맨스 소설로 읽히지 않더이다. 그냥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메타픽션의 한부류. 전혀 사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 이야기. 그래서 한편의 소설 안에 사라에 대한 온갖 자의적 상상. 이 책이 메타픽션이라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찰스라는 남자-지금도 뭐, 유효한 남성성을 가진-에 대한 작가적 자의식의 발동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시대와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동조와 독자들에 대한 이해 등등이었습니다. 전 음- 주란언니(기억하시죠?)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요, 이 책은 두번째 책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영문판까지 구해놓고 이리저리 작가를 이해하기 위한 온갖 장치 마련. 제 주변 분들이 나름 책들도 많이 읽고 음악에도 올인하고 그러한 정서를 너무나 잘 이해하면서도, 워낙 연애에 문외한이라, 즉 실제로 인간들의 진면복을 보는데는 서투르고 피와 뼈를 가진 인간들의 감정에도 서투르기 때문에- 나라고 능숙한 건 아니지만- 제발 부디, 책은 읽지 않아도 좋으니 연애도 좀 하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어쩐지 다들 연애 보다는 책을 선택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럼, 게으른 백수-- 접니다! 조만간 뵈면 좋으련만... -- 소니마주 2008-1-18 4:49 am

아 그 사조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군요~ :-) 요전에 신꼬형에게도 전화를 함 드렸습니다만, 한번 뵈요. 전화번호도 신꼬형이 알고기신답니다. 그리고 새해 복~ -- 거북이 2008-1-18 10:2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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