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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및 경력==
==학력 및 경력==
* 1983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국사학전공 박사과정후기 졸업, 박사(문학).
* 1976년,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
* 와카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조교수, 히로시마대학 강사, 조교수, 교수 등을 거쳐 2019년 정년퇴직, 동 명예교수.
* 1978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 졸업.
* 1980년 4월 ~ 1981년 3월, 히로시마대학 조수.
* 1983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국사학전공 박사과정후기 수료.
* 1983년 4월 ~ , 오사카교육대학 부속고등학교 히라노 교사校舎 교사.  
* 1994년, 와카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강사.
* 1995년, 동 조교수.
* 1996년,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강사.
* 1998년, 동 조교수.
* 2001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조교수.
* 2002년 10월, 히로시마대학 박사학위 취득. 박사(문학)
* 2004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교수.
* 2012년 4월 ~ 2016년 3월,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장.
* 2019년, 정년퇴직 동 명예교수.  
* 메이지유신사학회 감사, 부회장 등 역임.
* 메이지유신사학회 감사, 부회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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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장 과제와 분석 대상 지역
** 서장 과제와 분석 대상 지역
** 제1편 일본 농업의 기본적 방향성을 둘러싼 모색
** 제1편 일본 농업의 기본적 방향성을 둘러싼 모색
*** 본편의 과제 / 『[[미구회람실기]]』에 보이는 해외 농업 인식 / '농업의 경제성'을 둘러싼 논의 / 히로시마 현 재래농법의 수준과 그 과제 / 아키타 현 부미腐米개량문제와 재래농법수준
*** 본편의 과제  
*** 『[[미구회람실기]]』에 보이는 해외 농업 인식
*** '농업의 경제성'을 둘러싼 논의  
*** 히로시마 현 재래농법의 수준과 그 과제  
***아키타 현 부미腐米개량문제와 재래농법수준
** 제2편 농정의 전개와 기술혁신의 역사적 위상
** 제2편 농정의 전개와 기술혁신의 역사적 위상
*** '소농조직화' 방침의 확정과 농정 / 히로시마・아키타 양 현 '농회체제'의 형성 / 러일전쟁 후 농정의 정책 논리 / 히로시마 현에서의 강권적 농정과 농민 / 아키타 현에서의 강권적 농정과 농민 / 총괄
*** '소농조직화' 방침의 확정과 농정  
*** 히로시마・아키타 양 현 '농회체제'의 형성  
*** 러일전쟁 후 농정의 정책 논리  
*** 히로시마 현에서의 강권적 농정과 농민  
*** 아키타 현에서의 강권적 농정과 농민  
** 총괄


* (편저) 『近代東アジア社会における外来と在来([[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외래와 재래]])』, 清文堂出版, 2011.   
* (편저) 『近代東アジア社会における外来と在来([[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외래와 재래]])』, 清文堂出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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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저) 『講座明治維新8 明治維新の経済過程([[강좌 메이지 유신]]8 메이지 유신의 경제과정)』, 有志舎, 2013.  
* (편저) 『講座明治維新8 明治維新の経済過程([[강좌 메이지 유신]]8 메이지 유신의 경제과정)』, 有志舎, 2013.  
: 목차는 해당 항목 참고.


* (집필 참가) [https://www.city.hiroshima.lg.jp/soshiki/5/5509.html 히로시마 시 피폭 70년사 : 그 날까지 그리고 그 날부터 1945년 8월 6일]
* (집필 참가) [https://www.city.hiroshima.lg.jp/soshiki/5/5509.html 히로시마 시 피폭 70년사 : 그 날까지 그리고 그 날부터 1945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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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7일 (화) 15:53 기준 최신판

1 개요[ | ]

勝部眞人(かつべ・まこと)
카츠베 마코토

2 학력 및 경력[ | ]

  • 1976년,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
  • 1978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 졸업.
  • 1980년 4월 ~ 1981년 3월, 히로시마대학 조수.
  • 1983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국사학전공 박사과정후기 수료.
  • 1983년 4월 ~ , 오사카교육대학 부속고등학교 히라노 교사校舎 교사.
  • 1994년, 와카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강사.
  • 1995년, 동 조교수.
  • 1996년,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강사.
  • 1998년, 동 조교수.
  • 2001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조교수.
  • 2002년 10월, 히로시마대학 박사학위 취득. 박사(문학)
  • 2004년,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교수.
  • 2012년 4월 ~ 2016년 3월, 히로시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장.
  • 2019년, 정년퇴직 후 동 명예교수.
  • 메이지유신사학회 감사, 부회장 등 역임.

3 저서[ | ]

  • (단독저서) 『明治農政と技術革新(메이지 농정과 기술혁신)』, 吉川弘文館, 2002.
    • 서장 과제와 분석 대상 지역
    • 제1편 일본 농업의 기본적 방향성을 둘러싼 모색
      • 본편의 과제
      • 미구회람실기』에 보이는 해외 농업 인식
      • '농업의 경제성'을 둘러싼 논의
      • 히로시마 현 재래농법의 수준과 그 과제
      • 아키타 현 부미腐米개량문제와 재래농법수준
    • 제2편 농정의 전개와 기술혁신의 역사적 위상
      • '소농조직화' 방침의 확정과 농정
      • 히로시마・아키타 양 현 '농회체제'의 형성
      • 러일전쟁 후 농정의 정책 논리
      • 히로시마 현에서의 강권적 농정과 농민
      • 아키타 현에서의 강권적 농정과 농민
    • 총괄
  • (편저) 『近代東アジア社会における外来と在来(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외래와 재래)』, 清文堂出版, 2011.
    • 제1편 근대 일본의 외래와 재래
      • 제1장 나카야마 토미히로中山富廣 - 재래산업 타타라 제철의 쇠퇴와 그 역사적 의의 : 이즈모 타나베 가 '철업 창시 이래 영업 상태 개략'을 실마리로
      • 제2장 토쿠나가 미츠토시徳永光俊 - 일본에서의 농법 개량과 지속 : 재지・외래・재래
      • 제3장 누노카와 히로시布川弘 - 근대 일본 사회에서의 '외래'와 '재래' 사이 구조적 연관
      • 제4장 카와니시 히데미치河西英通 - 세토 내해 어업자와 조선 인식 : 메이지기 어업 조사 보고서의 기술로부터
      • 제5장 마에히라 후사아키真栄平房昭 - 근대 대만 항로와 오키나와 : 외래・재래를 둘러싼 동아시아 해운사의 한 시점
      • 제6장 사카네 요시히로坂根嘉弘 - 근대 일본 징세제도의 특질
      • 제7장 키무라 켄지木村健二 - 근대 세토우치 농촌에 있어서 외래로서의 조선 소 수용
    • 제2편 근대 중국・조선에서의 외래와 재래
      • 제8장 카츠베 마코토 - 동아시아에서의 농민 조직화와 재지사회 : 산업조합・합작사・금융조합
      • 제9장 벤노 사이이치弁納才一 - 20세기 전반 중국 재래 면업의 근대적 전개와 농촌 경제 구조
      • 제10장 장풍張楓 - 재래직물업의 전개와 제도적 기반 :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 제11장 대안강戴鞍鋼(장풍 역) - 근대 상해 지역의 '외래'와 '재래'
      • 제12장 박섭朴ソプ - 한국 근대 농촌 개발과 촌락의 공동성
      • 제13장 소순열蘇淳烈 - 식민지 조선 외래농업기술의 수용과 지역의 변용
  • (편저) 『講座明治維新8 明治維新の経済過程(강좌 메이지 유신8 메이지 유신의 경제과정)』, 有志舎, 2013.
목차는 해당 항목 참고.
  • (집필 참가) 『山口県史(야마구치 현사)』
  • 누노카와 히로시布川弘, 『〈近代都市〉広島の形成('근대도시' 히로시마의 형성)』, 吉川弘文館, 2018.
저자가 투병으로 인해 원고 정리가 불가능한 관계로, 저자의 가족들과 협의 하에 대신 편집. 저자 누노카와 히로시는 이듬해 작고.

4 같이 보기[ | ]

(번역)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학창 시절에는 뒤처진 사람이었습니다. '왜 역사를 배우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공부에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항에 관한 책만 뒤지고 있었습니다. '온통 역사만 본다고 해도 현대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에는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초조함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본격적으로 역사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학부 3학년 때였습니다. 사카모토 쇼조坂本賞三 선생님의 율령국가에서 섭관 시대에 이르는 강의에서, 교과서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무수한 무명의 사람들이 법이나 제도의 틀 바깥으로 삐져나와 움직이는 모습, 그것이 새로운 사회의 틀을 만들어 정치가 그 뒤를 쫓아가는 형태로 조금씩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던 시대적 전환이 충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역사가 움직인다는 것은 이러한 것인가?!' 하고 느꼈을 때, 이러한 시점에서 근대의 일본 사회를 생각해 보고 싶다! 고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동기들과 공부의 차이가 컸고, 곧 쓰게 된 학부 졸업 논문도 심각했습니다. 이대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싶어 대학원에 진학해 겨우 역사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초조함'을 핑계로 농땡이를 부렸던 면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마 연구라는 길로 나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의 연구는 메이지~다이쇼 시기에 농업정책의 희생양이라고 생각되어졌던 중소 농민이, 자신들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기술 개선을 시도하는 모습을 끄집어내고자 사료와 격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소농민이 스스로 문자 사료를 남기는 일은 없었기에, 그들을 우민시하는 측의 기록에 남은 조그만 표현이나 우민관의 뒷면을 읽어내려 그들의 주체성을 검증해 나갔던 것입니다. 학계의 상식과는 서로 맞지 않는 역사상이므로 아직 공인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마 50년 후에는 인정받고 있을 테지요.
그런데, 그들의 자주성・주체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의 주체성을 묻는 프로세스이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지, 현대사회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무엇을 주체적이라고 할 것인지・・・. 선행연구와 격투하고 문자 사료의 세계에 침잠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새삼스레 스스로의 원점을 다시 살펴보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다시금 갈고 닦는 것이 연구의 프로세스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말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여, 무라(ムラ, 촌락) 사회의 역사적인 문제 속에서 과제를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뒤떨어진 학생의 기분은 나도 실로 잘 알기에, 다소 전문적인 부분을 몰라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은 딱히 노 프라블럼입니다. 하지만 항상 학생들에게 '스스로가 어떻게 역사와 마주하려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사회에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려 하고 있는가'는 생각하도록 역설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와 같이 역사를 배우는 것을 경시하는 사회가 될수록, 그 물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스스로의 연구대상과 깊게 마주하면 어찌할 바 없이 스스로에의 질문이 불가피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의 길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러한 학문을 학창 시절에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평생의 재산입니다. '학문은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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