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바로크시대와 바하에 관한 캡쳐[ | ]

버리기 아깝자너? :)

콘체르토 1 콘체르토 2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

J, S. 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하(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래머히르트(Elisabeth Lammerhirt)의 일곱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6세기 중엽 이후 대대로 음악가들을 배출했던 집안이었으며, 어린 J. S. 바하 역시 일찍부터 음악에 재질을 보여 그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694년 바하는 부모를 여의고 오르드루프(Ohrdruf)에 있는 그의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Johann Christoph Bach, 1671-1721)의 집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그는 형에게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배우는 한편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의 음악양식을 배우거나 형이 소장하고 있던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등의 작품을 악보로 접하게 된다. 또한 오르드루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훗날 바하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700년 바하는 함부르크 근처의 뤼네부르크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며 교회의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라인켄(Johann Adam Reinken) 등에게 오르간을 배운다. 1703년 학교를 마치고 3월부터 9월까지 바이마르의 궁정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다가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다. 1704년 바하는 작곡에 전념하여 내림나장조의 『카프리치오』(Capricio)를 작곡하였다. 1705년 10월 바하는 휴가를 얻어 뤼벡으로 북스테후데를 찾아가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후 깊은 감명을 받고 예정된 휴가기간을 마음대로 연장시켜 이듬해 초에 아른슈타트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연된 휴가기간 때문에 아른슈타트 종교국으로부터 문책을 받은 바하는 1706년 그곳의 오르가니스트를 사임하게 된다. 1707년 6월 바하는 뮐하우젠(Muhlhausen)의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10월 17일 그의 육촌 누이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와 도른하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708년 바하는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사임하고 바이마르로 초빙되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겸 바이올린 주자로 취임하여 이후 약 10년간 그곳에서 일한다. 당시 바이마르의 영주인 빌헬름 에른스트 공은 스스로가 종교적, 문화적 교양이 높은 사람이었고, 그 주변에 모여들었던 많은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을 높이 대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바하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의 오르간을 자신의 뜻대로 개조한 후 바하는 많은 수의 오르간 작품을 이 시기에 작곡하였다. 1714년 3월 빌헬름 공은 바하를 합주단의 악장으로 승진시켰으며, 이에 대한 답으로 바하는 매달 1곡씩의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부름을 받는 1717년까지 많은 칸타타와 오르간작품들을 작곡하였다. 바하는 1717년 바이마르의 빌헬름 공에게 자신을 궁정악장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때마침 쾨텐의 레오폴드 공으로부터 궁정악장을 제의받자 바이마르에 사표를 제출하고 쾨텐으로 옮겼다.

바하는 쾨텐의 레오폴드 공 아래서 가장 높은 지위와 좋은 작업조건을 획득하였으며 그가 쓴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음악을 사랑하고 아는 자비스러운 군주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서 평생을 보낼 것으로 생각한다."(1730년에 쓴 바하의 편지) 하지만 레오폴드 공이 재혼한 두 번째 부인이 음악에 대하여 문외한이었기에 영주의 음악열이 식었다고 생각한 바하는 1723년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로 옮기게 된다.

쾨텐시대에 바하는 17명의 우수한 단원으로 구성된 악단을 가지고 교회음악 보다는 많은 세속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나타난다. 바하 스스로도 이 악단에 비올라 주자로 참여하며 이탈리아풍과 프랑스 풍의 작곡기술을 발휘하며 관현악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쾨텐 시대의 바하는 성악음악 보다는 기악음악, 특히 합주음악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들로는 그의 아들인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을 위해 작곡한 소품들(1720)이나 브란덴부르크 주의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에게 헌정된 브란덴부르크협주곡(1721, 3, 24),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작곡한 평균률I(1722), 인벤션과 신포니아(1722),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의 모음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파르티타, 서곡 그리고 40여 개의 세속칸타타 등이 있다.

쾨텐에서 1720년 7월 7일 바하는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고 그 이듬해인 1721년 3월 12일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 1701-1760)와 재혼을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6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인 칼 필립 엠마누엘(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뛰어난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하는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 둔 13명의 자녀들 가운데 바하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맨 마지막의 두 아들인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Johann Christoph Friedrich Bach, 1732-1795)와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을 꼽는다.

1723년에 바하는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그리고 교회음악에 대한 심적 요구 등을 이유로 라이프치히로 옮긴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하는 토마스 교회의 작곡가였던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이후 니콜라이 교회 등 주요 교회들의 칸토르이자 음악감독으로도 일하게 된다. 라이프치히시대에 바하는 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일하면서 세속음악보다는 교회음악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작품들로는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건반악기 연습곡, 콘체르토, 『b단조 미사』의 일부분(1733) 그리고 오르간 음악 등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1724년 4월에 초연된 『요한수난곡』과 1725년 초에 작곡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연습곡, 『칸타타 BWV249a, 205(1725), 249b(1726), 198(1727)』 등이 있으며, 1729년 4월에 바하는 『마태수난곡』을 발표하였다. 이밖에 수많은 칸타타와 미사음악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734-35)가 발표되었으며, 말년에 바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1742), 『평균율 피아노 곡집 II』(1744), 『음악적 헌정』(1747), 『b단조 미사』(1748완성), 『푸가의 기법』(1745-50) 등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말년에도 쉼없는 작곡활동을 통해 바하는 과로로 인한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1750년 3월과 4월에 걸쳐 두 번의 눈수술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후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라이프치히에서 7월 28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바하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이름은 당분간 음악계에서 잊혀져 갔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바하라는 이름들은 대부분 그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다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라는 이름은 독일의 베를린을 중심으로 재발굴되었으며, 1780년대에 들어 모차르트 등의 음악가들을 통해 서서히 음악계에서 재조명되기 시작됐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형식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면을 많이 보인 작곡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에서 대위법을 최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작곡가이었으며, 당시까지의 음악적 기법이나 표현방법을 가장 잘 활용했던 음악가이었다.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적 기법을 수용하여 통합시켰다.

  • 바하의 음악에 수용된 영향

바하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음악적 경향은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이탈리아 : 코렐리(Arcangelo Corelli)와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음악으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협주양식, 리듬의 생동감, 형식의 명료함 등을 영향받음.

프랑스 : 쿠프랭(Francois Couperin)으로부터 클라브생(Clavcin)음악을 통한 화려한 장식음 기법과 멋을 그리고 륄리(Jean-Baptiste Lully)의 음악으로부터는 프랑스 서곡 양식을 받아 들였다.

독 일 : 파헬벨(Johann Pachelbel),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라인켄(Jan Adam Reincken) 등의 오르간음악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음악으로 재창조하였다.

  • 바하 음악의 영향

바하의 死後 약 50 여년간 그의 작품은 잊혀진 채로 남아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1780년대에 들어 모차르트 등의 음악가들에 의해 재조명되었으며, 곧이어 등장했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바하의 음악을 재조명하기 시작한 대표적 작곡가이다. 모차르트는 고트프리트 스위텐이라는 외교관을 통하여 바하의 음악을 만난다. 고트프리트 스위텐은 베를린에서 바하의 음악을 알게되었고, 그후 빈으로 돌아와 매주 일요일 바하와 헨델의 곡들로 작은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스위텐이 개최하던 음악회에 모차르트가 1782년부터 참가하면서 바하의 음악에 매료되었 다. 그는 바하의 푸가로부터 주제를 인용하여 작곡과 편곡을 하기도 하였다.

예) 교향곡 41번(Jupiter)의 마지막 악장에서 찾을 수 있는 5중푸가나 오페라 『요술피리』에서 푸가기법을 사용.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그의 스승인 알브레히츠 베르거에게서 바하의 단순 대위법, 2중 대위법, 단순푸가, 2중푸가, 3중푸가의 전부분에 걸쳐 상당히 철저하게 배운다.

베토벤도 B-A-C-H음을 기초로 서곡을 구상할 만큼 바하에 심취했었는데, 피아노 소나타 Op. 109, 1악장의 처음에 나오는 베이스음들은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테마를 인용하였거나, 피아노 소나타 Op. 110에는 커다란 푸가를 작곡하였다.

1802년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1749-1818)에 의해서 처음으로 바하에 대한 책이 <바하 전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08년에는 알베르트 슈바이쳐가 바하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낭만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바하의 음악은 계승되어 나갔다.

멘델스죤(Felix Mendelssohn Bartoldy)

20세의 멘델스죤 바르톨디에 의해 바하의 『마태수난곡』(Matthaus Passion)이 초연 100년만에 1829년 재연되었다. 멘델스죤은 첼터로부터 작곡을 배우면서 그리고 베를린의 노래학교에서 바하의 음악과 친숙해져 있었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내면적인 정신세계가 바로크 음악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창작세계에서 바로크 음악형식 등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멘델스존의 음악에서는 고전주의시대의 경향과 더불어 바로크(특히 바하)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피아노를 위한 『카프리치오 E장조』의 첫악장에서의 모방 기법을 이용한 지그 주제는 바하의 영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슈만이 보여 주었던 음악에서의 시적이고 해학적인 분위기는 바하의 음악 세계로 연결이 된다. 바하 평균율의 전주곡과 푸가는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바하의 폴리포니 기법은 슈만의 작품에서 주로 중간 성부에서 쓰여지면서, 낭만주의의 표현주의적 예술로 다시 활발하게 피어난다. 1840년이후 슈만은 폴리포니 기법 연구에 한층 정렬을 쏟는데, 그의 부인 클라라 슈만과 함께 1842, 1845, 그리고 1853년에 거듭 푸가 형식을 철저히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연구에 대한 결과는 슈만의 푸가곡 op.56, 58, 60 그리고 79에 잘 나타난다. 슈만은 1843년 그의 음악신문 에서 바하는 어느 작곡가보다 음악가들에게 항상 새로운 원천을 제공하는 작곡가라 극찬하기도 하였다.

쇼팽(Frederic Chopin)

쇼팽이 남긴 『24전주곡』은 C장조로 시작하여 관계 단조로 그리고 5도 순환의 조성의 틀로 진행되는데 이는 바하의 『평균율 피아노』를 기본으로 작곡한 것이다. 쇼팽은 바하의 음악에 몰두하기는 했었지만 자신의 작품에 엄격한 대위법형식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지오로 된 화음의 사용이나, 바로크음악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쇼팽의 이러한 작업은 이후에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음악에서도 다시 한번 찾을 수 있는데, 스크리아빈의 『24전주곡』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브람스(Johannes Brahms)

브람스는 일반적으로 베토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음악에서 바하의 음악적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브람스는 바흐의 대위법 예술을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취급했던 작곡가이었으며, 그가 비엔나 '징 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있을 때 바하의 음악을 청중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브람스의 모테트나 그의 최후 오르간용 코랄 전주곡에서 바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

1900년대에 들어서도 12음 기법을 완성한 아놀드 쇤베르크나 이골 스트라빈스키 등의 많은 작곡가들이 바하의 음악적 영향권 내에 머물고 있었다.

힌데미트(Paul Hindemith)

힌데미트는 이론서를 통하여 대위기법을 연구하고 이를 『음의 유희』(Lusdus tonalis)라는 작품을 통해 확인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2개의 푸가와 11개의 인터루디움은 곡의 첫머리에 놓인 프렐루디움 그리고 곡의 마지막에 놓인 포스트루디움으로 싸여 있다. 여기서 푸가는 바하의 평균율처럼 12개의 반음을 바탕음으로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전반적인 진행은 바하의 대위 기법 등을 현대적 기법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힌데미트의 15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성모마리아의 일생』이나, 『현악사중주 4번』 등에서 바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1887-1959, 브라질)

빌라-로보스의 『바하풍의 브라질리아라』(Bachianas Brasileiras)는 성악을 포함한 모음곡으로 바로크 시대의 음악적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빌라-로보스는 바하의 음악에 깊이 심취해서, 바하의 평균율 중에서 몇 곡을 합창과 첼로 앙상블로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브라질의 민속음악과 바하 음악의 유사성을 작품을 통해 주장하기도 하였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두드러지게 높아졌고, 필립 슈핏타를 중심으로 라이프치히에서 1850년에 '바하협회'가 창립되고(옛 바하협회) 1851년부터 1899년까지 46권의 <바하 전집>이 간행되었다.

20세기가 되자 우선 1900년에 '신 바하 협회'가 설립되고 1904년부터는 <바하 연감>을 발행하여 바하연구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악보의 출판이나 연주를 통해 바하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54년부터 괴팅겐 바하 연구소와 라이프치히 바하 자료보관소에서 <신 바하 전집>의 간행이 시작되었고, 그와 아울러 기본적인 자료의 재검토되었다.

현재 바하의 작품번호로 쓰이고 있는 BWV(Bach Werkverzeichnis)는 1950년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mieder)가 라이프치히에서 책으로 출판하였다. [차호성]

홍정수 에세이: 요한 세바스찬 바하

[미사: 전반적 설명] [나단조 미사] [수난곡: 전반적 설명] [요한 수난곡] [칸타타] [작은 설명: 오르간 곡]

바로크음악

(1) 역사적 배경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16세기 말경부터 1750년경까지의 음악을 말한다. 16세기 말은 "지오반니 가브리엘리"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학파의 시대이며 1750년이면 바하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바로크 음악 특히 대위법의 음악은 바하의 작고와 함께 대체로 끝났다고 하겠다.

바로크의 본래의 뜻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진주', '찌그러진 보석' 이란 뜻으로서 르네상스의 명쾌한 균형미로부터 떠나 번잡하고 까다로운 세부 기구의 과잉을 표현한 것'이다. 나라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그 공통되는 특성은 전형미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식과 균형을 깨뜨리고 강력한 표현을 중요시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범위를 좁혀 말한다면 바로크 음악은 17세기경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말하는데 '근대의 화성적인 원칙과 중세의 대위법적 방법이 결합한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7세기 초엽의 르네상스의 본고장은 이탈리아인데 신진 음악가들이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 양식인 화성적인 반주를 지닌 이른바 단음악(Monodia)을 기용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기획하는 것이다.

음악상으로는 르네상스의 작품에서부터 로코코(Rococo)양식으로 옮아가는 중간의 것으로서, 숫자 저음(Generalbass 數字低音)이라는 화성의 진행을 저음에 붙인 숫자로 약기(略記)하는 방법의 시대인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사회적인 기초는 절대주의인 왕권의 제도와 귀족 제도이며 주로 극음악과 기악 음악의 부류인데 이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베니스 나폴리파에서 주력을 두었는데 교회 음악, 오페라, 기악 부문이 모두 발전하여 유럽 전역에 그 힘이 미치게 되었다.

베니스의 성 마르코 교회에서는 59성부의 미사가 연주되었으며 오페라의 근원의 본고장도 이탈리아였다. 오케스트라 내지는 심포니도 그 본거점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대라고 하겠다. 바로크 음악의 거장 몬테베르디(C.Monteverdi 1567-1643)가 1612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한 것은 오페라에 의한 본격적인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오페라의 탄생

오페라(Opera)는 바로크 음악시대인 16세기 말에 생겼다. 16세기 말경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음악 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612)의 집에 신진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 불렀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정선에 따라 음악도 고대 그리이스의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위법을 버리고 단순한 선율에 간소한 화성의 반주를 붙이는 양식을 고안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단음악(Monodia)이며 여기에서 바로크 음악은 시작한다.

이것을 만든 것은 카메라타의 여러 사람들이지만 그것을 가곡으로 쓴 최초의 사람은 갈릴레이(V.Galilei 1520-1591)와 캇치니(G.Caccini 1545경-1618)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1)의 대본에 페리(J.Peri 1561-1633)가 오페라 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이것이 상연된 이래 카메라타의 역사는 오페라의 역사를 출발시키게 된다.

두번째의 작품도 리눗치니의 시에 페리와 캇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i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오페라의 확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페라 사상 결정적인 것은 몬테 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La Favola d'Orfeo)'를 1607년에 상연한 때부터이다. 그는 기악의 서주로 오페라를 시작했으며 댄스 음악이 있고 심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오페라는 큰 길이 개척되었다. 그리고 A. 스카를랏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폴리 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3)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1600년대인 바로크 시대에 오라토리오(聖譚曲)가 로마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성서에 의한 소재에 몇 사람의 독창과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서술적인 규모가 큰 가곡이다. 곡은 극적인 구성을 가진 연기나 무대 장치도 없이 연주한다. 따라서 교회 칸타타와 수난곡 (Passion music)과의 한계가 애매함을 볼 수 있다. 오라토리오는 중세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 상연했던 전례극(典禮劇), 신비극(Mystery) 등에서 생겼는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 뛰어난 작곡가로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카릿시미(G. Carissimi 1605∼1674), 17세기 독일의 쉬쯔(H. Schutz 1585∼1672), 그리고 18세기 헨델 (Handel 1685∼1759), 하이든(Haydn F. J. 1732∼1809) 등을 들 수 있다.

칸타타는 17세기 초엽에 단음악의 또 하나의 형식으로 생겨났다. 이는 본래 성악곡을 말했는데 17세기에는 기악 반주가 있는 대규모의 성악곡으로 되었다. 그 내용으로 보아 세속적인 실내 칸타타 혹은 세속 칸타타와 종교적인 내용 또는 전례용으로 된 교회 칸타타가 있다.

(4) 악기의 발달

지금까지 합창 만능에서 벗어나 독창 또는 독주적인 음악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건반 악기로서 먼저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클라비코오드(Klavichord)인데 이는 셈여림이 가능한 것으로서 피아노의 전신이다. 그리고 줄을 튀겨서 소리를 내는 하아프시코오드(Harpsichord)가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쳄발로,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ecin)이라 부르며 이 시기에 사용된 악기였다.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는 기악이 성악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악기는 성악의 편곡을 연주하거나 또는 중창과 합창에 있어서 목소리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것이 이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기악의 독립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불세출의 제작가들이 출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바이올린족의 완성은 크레모나(the cremona school 1550~1760경)파의 위대한 제작자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크레모나는 알프스 산맥의 남쪽에 있으며 포 강에 임한 시가로서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가가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아마티(Amati) 가문과 구아르네리(Andrea Guarneri 1626∼1698) 가문에서 훌륭한 명기를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아마티의 제자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의 제품은 300년을 지난 오늘에도 그 성능이 대단하여 아주 귀한 명기로 인정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1700∼1725년대의 그의 작품이 독자적인데 음색이 투명하고 소리가 큰 것으로서는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는 1500개 가량의 여러 종류의 현악기를 제작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바이올린이 약 540대, 비올라 12대, 첼로가 약 50대 정도이다.

그리고 지우젭페 안토니오(Giuseppe Antonio 1687∼1745)의 작품도 우수한데 파가니니가 쓰던 마술의 바이올린(Wundergeige)도 지우젭페의 작품이다.

(5) 기악곡

이 시기에는 또 콘체르토(Concerto 協奏曲)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 말이 16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음악 용어로 쓸 때는 성악과 기악의 앙상블(Ensemble)로서 중창 또는 중주라는 뜻으로 통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주가 있는 독주를 의미하는 합주협주곡(Concerto grosso 合奏協奏曲)이 생겼다.

이것은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연주하는데 극소수의 인원으로 된 독주부인 콘체르티노(Concertino)와 관현악의 집단으로 구분한다. 이 둘이 대화풍으로 서로 응답하면서 연주해 나가는 형식의 음악인 것이다.

소나타(Sonata)는 17세기 말경에 생겼는데 기악 독주, 2중주, 3중주 등에 의해서 연주된다. 처음에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푸가 양식의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 (Sonata da Camera)로 구분하였으나 17세기에 이 둘이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협주곡이나 소나타는 2, 또는 3악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합주 협주곡은 고전파 시대에 협주곡으로 변화하였다.

모음곡(Suite 組曲)은 몇 개의 곡을 묶어 모은 기악곡이다. 이것 역시 17세기의 산물로서 몇개의 악곡을 같이 모은다는 것은 소나타나 교향곡과 같지만 모음곡은 소나타와 교향곡처럼 상호간의 내면적인 연결이 없고 단지 성격이 다른 곡을 대조시킨 것이다.

관현악(Orchestra)곡으로는 신포니아(Sinfonia)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페라의 발달과 함께 생겨났으며 처음에는 반주에 끝 역할을 하는 정도였으나 바로크 말기, 나아가서는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여 교향곡 시대를 이루었다.

오르간곡으로 17세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푸가(Fuga)이다. 이 형식이 점차 완성되어 바하 시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런데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독일은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비하면 별로 특색이 없었다. 오페라도 육성되지 못했으며 기악에 있어서도 대위법적인 폴리포니(Polyphony)의 양식으로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대위법과 폴리포니 음악은 9세기경부터 네델란드에서 비롯되어, 이것이 로마 교회의 의식과 결부되어 약 7백년간이나 발전했으므로 그 발달은 이미 귀로 듣기만 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크 말기에 바하와 결정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대위법적인 음악의 깊이까지 그 진가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바로크와의 융합을 이룬 금자탑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두 거인은 생활에 있어서나 창작면에서나 다른 점이 많았다. 작품면에서 볼 때 헨델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중점을 두었으며 기악적인 작품에 있어서도 성악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바하는 그와는 달리 성악 작품에 이르기까지 기악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그들은 바로크 음악의 최후요 최고의 대가라고 하겠다.

당시 사회적인 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십자군의 실패와 상업 자본이 대두하여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 개혁의 결과 봉건 세력과 법왕의 권한이 쇠퇴하고 절대 왕권에 의한 사회가 확립된 시대였다.

한편 가톨릭에 항거하여 종교 개혁과 절대 왕권의 궁정 문화 등을 배경으로 웅대하고 화려한 바로크 형식에 의한 여러 예술이 유럽 여러 나라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음악의 특징으로서는 대위법적인 다성(多聲) 양식의 완성과 화성 양식이 대두되었으며 숫자 저음에 의한 기보법의 보급을 들 수 있다.

한편 왕후와 귀족 사회에 있어서 세속 음악의 발전과 호화롭고 대규모적인 작품이 나타났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여러 나라의 음악이 발달되었고 조성 개념이 명확해졌으며 화성 이론이 현저하게 되었다.

작품에 있어서는 오르간과 하프시코오드에 의한 푸가, 코랄 전주곡, 변주곡, 모음곡, 소나타 등과 실내악에 [솔로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 주로 바이올린 협주곡인 [솔로 콘체르토], [콘체 르토 그롯소] 서곡과 관현악 모음곡, 서곡의 일종인 신포니아 등이 있다.

극음악으로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다성적인 가곡과 숫자 저음의 반주가 붙은 가곡이 있었다.

악곡의 형식에 있어서는 아리아나 무곡 등으로 된 A-B-A, 변주곡 형식(변주곡, 파르티타, 샤콘, 팟사칼리아)과 푸가, 옛 스타일의 론도 A-B-A-C-A-D-A 등. 작곡가로는 몬테베르디, 륄리, 코렐리, 퍼어셀, 쿠프랭, 비발디, 텔레만, 라모, J. S. 바하, 헨델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

홍정수

"그는 '개울'(Bach)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려야 한다."

베토벤이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에는 그가 얼마나 바하를 존경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생각에 '개울'의 뜻을 가진 바하라는 이름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보인 것이다. 물이라면 바다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바하에게 가장 큰 위치를 부여하겠다는 뜻이다.

베토벤이 11살 때에 『평균율』을 치는 것을 듣고 이에 관해 크라머(Cramer)가 쓴 글을 보면, "더 이상 바랄 수 없이"(Non plus ultra) 잘 친다고 기록하고 있다. 크라머는 베토벤이 도와주어야 할 아이이며 제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베토벤은 자라서 제2의 모차르트가 되지 않고 베토벤이 되었다. 그는 고전 시대에 바하를 어느 정도 자기 음악에 수용한 마지막 인물이다. 그의 전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정도이다. 고전 시대를 대표한 이 세 사람들만이 바하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베토벤의 유품을 정리한 쉰들러의 기록에 의하면, 평균율, 인벤션, 심포니, 토카타 등의 건반 음악 악보를 한꺼번에 묶은 악보의 앞장에는 1802년에 발간된 최초의 바하에 관한 단행본(Forkel이 쓴 것) 중의 한 부분이 인용되어 적혀 있다. 그런데 쉰들러는 이것이 베토벤의 필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예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바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이를 구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단지 식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베토벤이 그 옆에 커다란 의문 부호를 그렸다는 것이다. 쉰들러는 이것이 포르켈의 높은 바하 평가에 대한 베토벤의 상반된 의견을 잘 말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쉰들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은 바하가 단지 식자들만의 음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베토벤은 바하를 매우 가까이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하는 죽은 후에 일반인에게 거의 잊혀져 버렸다. 그는 주로 베토벤이 악보로 가지고 있었던 건반 음악 속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베토벤 역시 바하 음악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바하 음악에 위대성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말년에 바하와 비슷한 처지에 빠진다. 말년에 그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했다. 그가 음악을 숙고하면 할수록 그 외면은 더욱 심해졌다. 베토벤 당대나 그 직후의 사람들은 그의 말년 작품을 곧잘 '돌아 버린' 음악가의 작품으로 생각했다. 그는 모차르트처럼 시작하여 바하처럼 끝을 마친 것이다. 베토벤은 바하에게서 정신적 혈연 관계를 느낄 만했던 셈이다.

이런 관계를 파악한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베토벤과 바하는 일반 청중에게는 "반신반의의 위대성"이라고 말한다. 이 두 작곡가의 진정한 면이 일반 청중들에게는 거북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는 베토벤이 적은 의문 부호를 지우고 포르켈의 의견을 재확인한 셈이다.

바하와 베토벤이 나란히 비교되는 일이 또 있다. 바하의 평균율과 베토벤의 소나타가 폰 뷸로우에 의해 구약과 신약 성서로 비교된 이래로 이 비교는 자주 인용된다. 바하나 베토벤은 엄숙함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이들의 음악은 오락장이나 무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의 음악은 고고한 성격의 것이다.

음악을 종교적 경전과 비교하는 일은 19세기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하를 열심히 발굴한 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바하에게서 음악의 긍정적 첨단을 발견했다. 이 첨단은 시대의 맨 끝이라는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갈 수 있는 맨 끝에 놓였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여기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성을 보았다.

바하에 관해서는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통해 바하를 관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바하관은 상당히 낭만적인 데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최초의 영감을 중요시했고 이것을 고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하에게 영감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가공 작업이 더 중요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교회에서 음악회장으로 끌어내어 예배와 상관없는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적 바하는 이들의 생각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바하 당대에는 음악 자체가 낭만주의에서처럼 종교로까지 격상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은 높은 목적을 위한 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바하는 교회를 위한 음악적 봉사자였다. 그는 오선지를 메우는 작업을 하여 -상당 기간- 매주 칸타타 하나씩을 써냈다. 당대의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러한 일을 했다. 그래서 바로크 전성 시대의 작곡가들보다 더 많은 양을 작곡한 시대는 없었다. 한 마디로 음악의 '생산 시대'였다. 따라서 졸작이 범람한 시기이기도 하다. 바하가 아무렇게 작곡해도 나무랄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하는 신비스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에 대한 자발적 성실성의 면에서는 바하와 경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실성은 의도적인 것을 넘어서 음악으로 그대로 구체화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꼬박꼬박 기일을 지켜 작곡해 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작업을 일상화하여 이를 꾸준히 지탱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도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하를 그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에서 바하를 보았다. 바하가 낭만주의와 잘 부합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낭만주의자는 바로 베를리오즈이다. 그는 바하에 관해 증오를 토로한다. 그의 몽상과 엄격한 바하 음악의 구조는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배우고 숙고하는 바하의 음악과, 저항하고 고백하는 그의 음악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의 음악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그러나 바하의 음악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바하의 음악적 특징을 말하려면 그 때까지의 음악에 관한 전체적 특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만큼 많은 요소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음악이다. 그러나 남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의 폴리포니 음악이다. 연주자들이 자기의 성부가 다른 성부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각 성부들 하나하나가 다듬어져 있다. 심지어는 독일 찬송가에 화성을 붙인 호모포니적 코랄에서도 각 성부들이 상당한 독자성을 갖는다. 단선율 멜로디 를 중심으로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음악은 우선 어느 부분이 멜로디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불과 서너 개 음으로 구성된, 빠르게 움직이는 모티브는 음악을 끝없이 움직이게 하여 일정한 주기를 감지하기 어렵게 한다. 바하의 음악을 말할 때에는 주로 이 부분에 관한 것이지, 느린 악장의 선율적 음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하 음악에는 뛰어난 선율적 아름다움도 있다. 이는 요즈음 대중화된 멜로디를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인류의 기쁨이신 예수>, 칸타타 147번에서) 그런가 하면 당시의 거의 모든 춤곡이 그의 음악에 흡수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정교하게 다듬어진 보석 같이 깜찍한 음악도 있다. 여기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음악 문헌에서 보는 '가장 영원한' 곡이라면 나는 항상 바하의 2성부 인벤션과 3성부 심포니를 생각한다. 이 음악들은 전체에 손상을 미치지 않고는 한 음표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장인에 의해 깎인 사파이어의 연결처럼 고귀하다". 그런가 하면 극적인 면이 그의 <마태 수난곡>과 같은 곳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도대체 어느 오페라 작곡가가 줄거리를 그렇게 적절하게 음악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를 능가할 만큼 반음계 사용에 능한 작곡가는 없었다. 그를 능가하는 푸가 작곡가도 없었다. 그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능력 앞에 사람들은 말을 잃고 '신비'나 '비밀'과 같은 말로 그를 표현해 본다. 또 어떤 사람은 바다라고 말한다. 이 불분명한 단어들은 바하라는 구체적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하의 정신적 측면은 어느 작곡가보다 많이 거론되었다. 그가 작곡을 할 때에 어떠한 생각을 갖고 했겠느냐 하는 문제는 당연한 관심거리이다. 그러나 바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글이 없어 이를 탐구하는 일은 어려운 편에 속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탄원서나 공적인 기록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떠한 판단을 내리기 좋아한다. 그 결과는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루터교의 전통적 교회 음악관인 '하나님의 찬양'과 '영혼을 신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하를 교회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바하의 음악과 언행은 교회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독일성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루터교인인 그가 카톨릭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카톨릭 교회에서 바하 연주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말이다. 내가 들은 어느 천주교 신자의 이야기도 이와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바하가 미사를 썼기 때문에 천주교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교도 예배를 미사라고 말하며, 전래된 미사가 독일어화 되었을 뿐 카톨릭 미사의 골격과 거의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하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어 온 바로는 그가 가능한 거의 모든 사상들을 대표하는 꼴이 되어 있다. 특히 보수주의자, 혁신주의자, 합리주의자, 산술적 신비주의자와 같은 틀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바하의 생각보다는 말하는 자의 생각을 더 드러낸다. 누구나 바하가 자기의 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바하를 오늘날처럼 그렇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직책을 원해서 지원하게 되면 항상 제1의 후보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할 줄 몰랐고, 주로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을 공부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하는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살던 지방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 점에서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를 벗어난 일이 없는 칸트보다는 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칸트는 더 큰 대학에서 오라는 것을 뿌리친 반면에, 바하의 경우는 가고 싶어도 오라는 데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들의 대학 공부를 위해 봉급이 더 많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했던 것을 그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하는 거지 왕자와 비슷했다.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을 오늘날의 한국으로 옮겨놓으면, 마치 청주 어디쯤에서 교편을 잡고,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며, 이따금 그곳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여는 어떤 음악가와 흡사하다.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 방에 박혀 빌어온 악보를 베끼고 공부하여 열심히 작곡을 하는데도 서울에서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청주 사람들은 그의 피아노 솜씨가 굉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서울에서 온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는 지방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부모가 일찍 돌아가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과외 레슨을 해가며 그곳 대학을 졸업하였다. (실제로 바하는 대학을 못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 자신을 교육시키는 데에 커다란 갈증을 느끼는데, 그 갈증은 바다를 들이 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다가 되어 간 것이다.

바하라는 바다가 삼킨 음악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 후에 오는 음악학자들에게 막대한 양의 일을 남긴다. 이 바다로 흘러온 개울들을 확인하는 데에만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며 이 개울들이 이루어 놓은 바다를 구명하는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에 있었던 바하 운동은 그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고, 이로 인해 바하 협회가 결성되고 그의 작품이 연구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 대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B단조 미사(h-moll messe)에 관한 것인데, 원래 바하가 묶어 작곡한 것이 아니라, 독립되어 작곡된 것을 후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묶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악보들이 다른 데에서 확인된 것이다. 바하에 있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오늘날의 바하는 바하 연구가들의 작업을 제외시키고는 상상할 수 없다. 포르켈, 슈핏타, 슈바이처 등은 거의 일생을 바하 연구에 집중시켰다. 그래서 바하의 영광은 음악학자들의 영광이다. 당대에 영향을 끼친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바하는 매우 작은 작곡가이다. 바하의 커다란 위치는 그가 이룩한 음악적 영토 확장에서 나왔다. 거지 왕자는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토가 전설이나 소문이 아니고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음악학자들이 증명해낸 것이다.

바하라는 바다는 그 이후에 흐르는 물줄기에도 막대한 영향을 줌으로써 이를 규명하는 것도 엄청난 작업을 요한다. 바하는 커다란 흡입체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방출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하를 음악의 끝이라고 본 포르켈이나 슈바이처의 생각은 맞지 않다고 하겠다. 바하를 음악 또는 음악사의 끝이라고 보는 이들의 견해는 사실의 확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외경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바하 전후의 음악가들이 모두 그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맞지 않다. 그러나 음악사를 한 사람으로 설명하기에는 바하처럼 적합한 사람이 없다. 그가 음악사의 중심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하 연구가들이 그의 음악에서 가장 놀라는 부분은 당시의 미학인 감정이론 (Affektenlehre)의 구체화 방안인 음형 이론(Figurenlehre)을 매우 철저하게 지킨 점이다. 이 이론들은, 일정한 감정은 일정한 음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서는 가사와 연관된 음악이 숙고됨이 없이 음형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직접적 효과 위주의 헨델 음악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바하는 순수하게 음악적 부분인 푸가에서도 타의 추종을 용납하지 않았다. 바하는 질적으로 음악의 중심이다. 양적으로는 그도 방대한 양을 작곡했지만 친구였던 텔레만의 절반 정도도 쓰지 못했다.

바하는 자신이 음악(사)의 중심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독일의 제일 가는 음악가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받은 현실적 대우는 그런 생각을 갖게 하기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평범한 음악가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된 불운을 겪어야 했다.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그의 칸타타는 제대로 연주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 초연이자 마지막 연주가 되는 것을 늘 체험하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의 유행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음악을 따르는 것을 거부할 만큼 그의 음악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구식에 속했던 것이다.

바하는 작품을 쓸 때에, 다른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는 그의 오르간 곡을 듣고 어리둥절하던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보거나, 그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작품에 쏟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듣고 자신이 그 음악 속에 고려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는 음악이 기분 좋게 만드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 자주 떠오를 수 있는 일이다. 음악이 무언가 심각한 것을 뜻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하는 큰 의미가 없다. 바하는 누구한테나 달려가서 날 좀 들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듣기 좋게 하는 것 위주로 연주하는 바하는 가장 바하 같지 않은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을 바하 음악은 요구한다.

수많은 그의 작품에는 졸작이 거의 없다. 이것이 헨델과 차이나는 점이다. 헨델에게는 숙고하지 않고 재빨리 만든 음악이 더 많다. 바하 음악은 가공의 세련됨이 너무 심하여 당시에 그의 음악을 연주해 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작품을 쉽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그의 음악을 부담스럽다고 하는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연주하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당연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였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바하의 불행이었고, 음악의 행운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만큼 음악에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바하에 대해서 정말로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음악에 깊이 들어간 사람이다. 바하에 관해서는, 남이 놀라니까 같이 놀라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간접적으로 놀라는 길은 나중에 직접적으로 놀라는 첫걸음이 된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이 일이 쉽지 않다. 바하에의 길은 휘파람을 불면서 가는 길이 아니다. '바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차르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덜 어울린다. 모차르트는 듣는 자가 같이 콧노래하는 것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바하는 이렇게 말을 걸지 않고, 혼자서 끊임없이 움직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게 흐른다. 바하는 개울이 아닌 바다이다. 바다의 출구는 없다.

개울은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를 낮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격적인 면을 묘사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재잘거리는 개울처럼 쉽게 말을 건다. 그는 자신이 전문가를 위해 작곡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을 위해 작곡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페라 가수들이 너무 노래가 어렵다고 불평하면 즉석에서 쉬운 노래를 만들어 주었다. 그의 음악은 아마추어에게도 피아노에 좀 앉아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바하는 대부분의 경우 의자를 권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하와 모차르트는 정반대의 음악가이다. 바하에게는 음악이 너무도 중요하여 인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는 음악 못지 않게 인간도 중요했다.

"그러면 누가 더 나은가?" 하고 물을 사람이 있겠다. 왜냐하면 베토벤, 모차르트, 그리고 특히 바하가 곧잘 음악의 챔피언처럼 소개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숭고한 예술적 투쟁'에서는 베토벤이, '인간을 위한 음악'에서는 '모차르트'가 , '음악 자체'를 위해서는 바하가 가장 유리한 우승 후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질없는 올림픽이다. 왜냐하면 이는 본인들이 경주에 참가하지 않은 채 제 삼자들만의 상상적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실 모두가 챔피언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음악은 전체적으로 가난해진다. 이 가난의 비참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적 올림픽은 끊임없이 개최된다. 간접적으로 놀라거나 간접적으로 좋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사람을 수없이 만난다. 부담스런 올림픽의 시발이다. 그때마다 나는 섣불리 누구라고 대답을 못한다. 망설임 끝에 나오는 대답은"바하"이다. 나는 이 문답을 동문서답처럼 느낀다. 이는 바하가 '좋아한다'는 말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외경'이란 단어가 바하에게는 더 어울린다. 또한 나는 바하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하기보다는 많이 듣는 편에 가깝다. 그가 많은 음악학도들에게 거의 비슷한 입장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음악학도의 애완물이 아니라 스승이다. 위대한 스승이다.


가-나 다-라 마-바 사-아 자-차 카-하

바로크 시대 "바로크"(프. baroque, 포르투칼어에서 유래, 뜻:"일그러진 둥근 보석")라는 말은 원래 어떤 예술적 특징을 가리키는 단순한 형용사였다. 그 특징이란 "과장되고, 무겁고, 지나치게 장식이 많은"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술사에서 고전과 르네쌍스 시대를 두드러지게 하고 그 앞 시대의 비실용적이고 과장된 예술을 낮추어 평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를 미술사에서 확정시킨 사람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55)와 뵐프린(Heinrich W lfflin, 1888)이었다. 음악사는 이 용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전음악 시대로 들어선 18세기 중엽 이후에 매우 부정적 의미의 바로크 음악이란 말을 사용하기는 했었다. 예를 들어 쟝 자크 루소는 그의 {음악사전}(1768)에 바로크음악에 대해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은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크라는 용어가 음악사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이는 음악학자 리만(Hugo Riemann)과 한드쉰(Jacques Handschin)이 바로크 시대에 대한 음악적 정의를 내린 이후부터이다. 리만은 바로크 시대를 "계속저음의 시대"로, 한드쉰은 "콘체르토 양식의 시대"로 규정했는데, 이는 언어의미적으로 이 시대를 특징지은 것이 아니고, 음악양식적으로 이 시대의 특징을 잡아낸 것이다. 물론 바로크가 지나서도 "계속저음"과 "콘체르토 양식"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경향의 음악에 의해 한쪽으로 밀린 것만은 분명했다. 그 이후로 바로크 시대는 1600- 1750년의 약 150년간을 의미한다. 이는 1600년경에 르네쌍스 시대가 끝나고, 이태리인들의 새로운 음악장르인 오페라와 함께 바로크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바로크 시대가 1750년에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은 바하가 죽은 그 해를 고전시대와의 분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바로크 음악은 새로운 음악 양식을 발전시킨다(몬테베르디식 표현 "제2작법"). 이런 새로운 양식들은 이전의 옛 양식과는 전혀 다른 음악적 사고에 의한 것이다. (1)장,단조 화성: 화성학의 형성은 교회 선법을 장단조로 대체시키고, 전통적인 네델란드 악파의 대위법적 음악을 옛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새로운 화성적 사고를 가능케 한 것은 (2)계속저음(Basso continuo)이다. 이것은 16세기 다성음악의 베이스 성부를 자유스럽게 같이 연주하던 저음성부 악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계속저음은 음악이 도중에 끊기는 것을 막으며, 화성을 악보에 기록하지 않고, 기록된 저음 성부, 관련된 숫자와 기호만으로 화성을 연주할 수 있게 한다. 계속저음을 바탕에 깔고 새롭게 만들어진 음악적 방식이 (3)모노디(Monody)이다. 이 말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한 개의 악기에 의해 반주되는 단선율 노래를 의미했다, 가사를 자유롭게 낭송하기 위해 고안된 바로크의 모노디는 독창으로 불려지며 그 아래에 계속저음 반주가 딸린다. 독창선율과 계속저음이 결합된 상태를 모노디라 부른다. 모노디 음악은 결국에 오페라를 가능케 한다. 이는 그리스의 비극을 오페라로 재현하려 했던 당시 음악가들이 새롭게 성취시킨 음악적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바로크 양식으로 중요한 것은 콘체르토 양식이다. 콘체르토(concerto)라는 말은 '경쟁한다'(concertare)라는 개념과 "협력한다"라는 개념이 같이 쓰이는 모순적인 용어 사용을 보인다. 하지만 초기에는 "경쟁한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고, 후기로 올수록 :협력한다"의 개념이 더 많이 쓰이게 된다. 전자의 개념에 의하면 연주 그룹들끼리, 성부들끼리 경쟁하여 음악적 대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각 성부는 장식이나 즉흥연주를 통해 더욱 자유스럽게 형성된다. 이 양식은 콘체르토 장르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장르에서도 사용된 원칙이었다. ①기악과 성악의 경쟁곡: 악기로 반주되는 성악곡(예:오르간에 맞추어 부르는 독창곡). ②단순히 '기악음악'이라는 의미. ③일정한 편성의 음악양식(대표적인 것은 콘체르토 그롯소. 이는 오케스트라 그룹(Concerto grosso)과 독주 그룹(Concertino)이 "경쟁하듯이" 연주한다는 의미.

바로크 시대에 들어와서는 박자체계가 변한다. 특히 무용음악의 영향으로 강약의 차이가 있는 박자개념이 형성된다. 이를 <단계적 강세 박자>라 한다. 오늘날의 규칙적인 강약을 가진 마디박이 이 때부터 사용된다. 예: 4/4 강 약 중강 약, 3/4 강 약 약. 위와는 반대되는 전통적으로 남아 있는 음악이 있었다(몬테베르디식 표현 "제1작법"). 전통적 네델란드 악파(또는 프랑코 플랑드르 악파)의 선율적, 대위법적으로 고안되는 음악이 바로 옛 양식이다. 이 음악은 화성학 대신에 대위법을, 모노디 대신에 모방양식을, 장단조 조성 대신에 선법성을 사용한다. 이 양식은 <옛 양식Stile antico>과 <교회양식Stile ecclesiastico>이라는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새로운 양식이 옛 양식을 상당한 정도로 밀어내지만, 옛 양식은 바로크 말기에 바흐에 의해 그 절정을 경험한다. 물론 바하에게서는 모노디, 계속저음, 콘체르토 양식과 <단계적 강세박자>도 모두 중요해진다. 따라서 바흐는 새 양식과 옛 양식을 모두 포괄하는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더 비중을 갖는 것은 새 양식보다는 옛 양식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당대의 작곡가에 비해 현저하게 옛 양식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오페라를 가능케 하기 위해 단순한 음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다시 르네상스적 음악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폴리포니 음악의 위력이 증대한다. 오늘날 우리가 바로크 음악을 상상할 때에 대단히 장식이 많고, 쉴새없는 움직임을 가진, 비교적 파악이 잘 안되는 어려운 음악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느낌은 고전주의 작곡가들도 갖고 있었다. 사실 음악역사상 가장 비중 있는 폴리포니 음악은 바로크 시대에 나타난다. 바하의 푸가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바하는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해 보아도 현저하게 어려운 기법을 구사한 작곡가이다. 바로크의 중심 국가인 이태리만을 두고 보면 바로크 음악이 너무 어려운 것은 아니다(코렐리, 비발디, 프레스코발디 등). 특히 나폴리 악파의 음악은 앞에 열거된 작곡가들의 음악보다 현저하게 가벼워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전주의의 단순성 앞에 무너진 바로크 음악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의 음악이었다. 18세기 초반에 고전주의적 성향의 움직임이 프랑스(부퐁논쟁)와 -특히 현저하게- 독일에서 일어난 것도 이 지역에서의 어려운 음악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음악가로는 오페라를 보편적 장르로 성공시킨 몬테베르디, 이태리음악을 수용하여 독일화시킨 쉿츠,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콘체르토를 많이 남긴 비발비, 그리고 이 시대 음악을 종합한 듯한 바하와 헨델이 있다. [홍정수]

참고문헌: Jacob Burckhardt: Der Cicerone, Eine Anleitung zum Genuß der Kunstwerke Italiens, 1855. Heinrich Wolfflin: Renaissance und Barock, 1888) R. Haas, "Die Musik des Barock", 1928. M. Bukofzer: "Music in the Baroque Era from Monteverdi to Bach", 1947. I. Ahlgrimm: "Zur heutigen Auffuhrungspraxis der Barock-Musik", 1979. W. Braun, "Die Musik des 17. Jahrhunderts", 1981. J.-Cl. Veilhan, "Die Musik des Barock und ihre Regeln, 1982. J.H. Baron, "Baroque Music. A Research and Information Guide", 1992.


중세음악

유럽의 중세는 지중해 세계의 통일을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로부터의 연속이 아니라 이들 지중해 세계의 통일이 붕괴된 후 서유럽 지역에 새로운 문명사회가 형성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유럽세계의 성립과 중세의 성립은 거의 같은 시기로 보고 있으며 음악사에 있어서도 유럽음악의 성립과 중세음악의 성립은 같은 현상이다.

서양음악사에서 종교음악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서양음악의 뿌리가 흔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특히 서양음악의 본산지가 기독교 문화권임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정식으로 음악을 시작한 곳 역시 교회였다. 중세에는 교회에 가는 일이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자 위기의식을 느낀 성직자들은 사람들을 끌기 위해 뭔가 재미있는 꺼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래를 불렀고 곧 연극과 뮤지컬까지 하게된 것인데. 물론 모두가 성가였고 성극이었다. 때문에 중세 음악의 대표적인 형태는 '그래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라고 하는 무반주 합창곡이다.

결국 종교의 활성화를 위해 시작된 음악이니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또 음악 그 자체보다는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이 시대 음악의 특징이다.

중세는 봉건 사회 제도의 지배하의 그리스도교의 사회로서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강력한 종교적 지배를 받던 때였다. 거의 천년 이상을 기독교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예술, 음악 분야에서의 두드러진 발전은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암흑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서양 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또 기독교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중세기의 음악사는 기독교의 교회 의식과 결부시킨 성가(Plainsong)로 시작한다. 중세의 음악은 대부분 교회 중심으로 발달하고 교회를 온상으로 많은 작곡가들이 배출되었는데 유럽 주요 지역에서 발달한 성가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 : 모사라베 성가 (Mozarabic Chant) 토레도 중심

프랑스 : 갈리안 성가 (Gallian Chant) 갈리아 지방

이탈리아 : 암브로시오 성가 (Ambrosian Chant) 밀라노 중심

로마 : 로마 성가 (Roman Chant) 로마중심

음악적 특징

(1) 로마네스크 음악(Romanesque Music)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되었던 음악으로서 이것은 로마네스크 미술과 통하는 양식이다. 그 주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음악으로서, 고대음악처럼 단선율이지만 대체로 성악이며 기독교적인 가사를 가지고 있다. 이 음악은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 성가로 절정을 이룬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음악을 존중했으나, 처음에는 기독교 박해로 숨어서 음악을 하다가, 기원후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은 후에야 비로소 성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은 처음에는 시리아, 팔레스티니, 소아시아 등지의 음악, 즉 유태적이거나 그리이스적인 음악들을 필요에 따라 적당히 기독교적으로 고쳐서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그후 로마의 각 지방에서 조금씩 서로 다른 양식의 음악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로마의 교회세력이 크게 떨치자 지금까지 지방에서 행해지던 교리와 의식, 성가등을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성가의 경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39년경∼397년)가 개혁한 암브로시오 성가(Ambrosian Chant) 이래 2세기후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40∼604)가 제정한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로서 마침내 그리스도교 음악을 통일시켰다.

이 전통적인 교회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는 단선율의 라틴어 가사로 된 단순한 것이지만 그 유동적인 선율은 실로 거룩하고 아름답다. 이 성가는 지금도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인 음악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순수한 음악임과 동시에 예배에 속하는 기능 음악이다. 이 시대의 예배에는 두 가지 기본적이 형식이 있다. 그것은 성무일과(Office)와 미사(Mass)인데 성무일과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순서대로 예식으로 모두 8개가 있다. 성무일과를 위한 그레고리오 성가는 안티포날레(Antiphonale) 또는 안티포날(Antipho nal) 이라고 하는 의전 책에 수록되어 있다. 미사는 성무일과 보다는 늦게 발달했지만 카톨릭 교회의 기본적인 예배로 'MASS'라는 말은 '가시오 집회는 끝났소(Ite missa est)'라는 의식을 끝내는 구절에서 유래 되었다. 미사에는 평소에 일반적으로 지켜지는 일상부 미사와 특별한 절기에 지켜지는 특별 미사가 있는데, 일상부 미사는 보통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로 이루어진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음악적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 하나의 선율로 이루어진 단선율 음악이다. 그리고 가사면에서 본다면 모두 라틴어로 쓰여져 있지만, 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과 비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으로 구분되며, 선율의 윤곽은 가사의 강세형을 반영하지만 선율을 특별한 감정 또는 서술의 효과를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정확한 박자와 마디의 표시가 없어서 길게 낭송하는 듯이 보인다. 음계는 헥사코드(hexachord)라고 불리우는 6음 음계 체계로 이루어졌으며, 음의 기록은 네우마(neuma)라고 불리우는 기호들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는데, 보다 명확한 기보를 위해서 f음을 대표하는 붉은 선을 그어 그 아래 위에 기호들을 위치시켰고 조금 지나서 c'음을 표시 하기위한 노란선이 그어졌고, 11세기에 이르러 귀도 다레초에 의하여 4선 보표가 사용되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성가 (Gregorian Chant)

교회 세력이 점점 확장되고 위상이 높아지자 기독교의 중심지인 로마 교회는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교리와 의식, 성가 등을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하게 된다. 그리하여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540~604)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레고리오 성가이다. 이 정통적인 교회 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는 단성부 음악으로서 하모니와 대선율도 없는 그지없이 단순한 형태이지만 그 유려한 선율은 매우 아릅답다. 신기한 것은 1990년대 초반에 이 그레고리오 성가가 갑자기 일반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EMI 사에서 Canto Gregoriano라는 이름으로 나온 그레고리오 성가 음반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빌보드 Album Chart (클래식 차트가 아닌)에도 오랜기간 상위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음악평론가들은 이 믿기지 않는 이상현상을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신비의 세계에 빠져들고픈 심리'라고까지 평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레고리오 성가는 현대에 들어보면 거의 명상 음악같은 분위기일 정도로 잔잔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2) 다성음악-고딕음악(Gothic Music)

다성음악의 발달은 오르가눔(Oraganum)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서양음악 구조의 두가지 큰 법칙은 화성법과 대위법인데, 9세기 중엽 서양음악에서 최초의 대위법이 나타나게 된 것이며, 대위법의 기초가 바로 오르가눔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오르가눔은 기존 선율에 대해 5도위나 4도 아래로 중복되거나 옥타브로 한 번더 중복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을 평행오르가눔이라고 불렀다(이런 현상을 기존 선율의 종적 확장이라고 한다.) 그 후 11세기경 기존 선율은 저성부에 놓이고 대위선율은 상성부에 놓이게되는 자유 오르가눔과 12세기의 화려오르가눔이 탄생하게 된다. 이와 관련된 악파가 생 마르샬(St. Martial)악파이며, 전기 고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서양 예술사에 알려진 최초의 위대한 다성음악 작곡가는 12세기 말경 노트르담 교회의 합창단장이었던 레오닌이 있는데, 그는 후에 모테트의 모체 가 되는 디스칸투스 양식으로 된 클라우술라를 도입하였다. 그후 13세기경 중세의 이상적 음향(Sound Ideal)인 3성부 음악을 이루는데 기여를 한 페로틴이 나타나 노트르담 성당을 중심으로 노트르담 악파를 형성한다.대체로 10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네덜란드와 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다성음악(Polypony)형식의 교회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교회의 건축양식에서 유래되었다. 다성음악은 구라파 북쪽 민족들 사이에 대략 6,7세기경부터 시도되었던 것을 10세기에 이르러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노래되던 그레고리우스 성가를 정선율(定旋律, Cantus Firmus)로 하고 여기에 새로운 성부(오르가눔, Organum)를 추가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다성음악-고딕음악은 음악을 교회 음악에서 벗어내어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으려는 운동으로 눈부신 개혁과 시도가 계속된 14세기의 찬란한 아르스노바(Ars Nova, 새 예술)와 15세기가 되면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인 다성 음악의 극치를 이룬 네델란드악파(Netherland School)의 음악을 포함하고 있다.

(3) 아르스노바(Ars Nova)

13세기를 안정과 통일의 시대라고 한다면 14세기는 변화와 다양함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후기 고딕시대로 분류되는 14세기에는 이전의 신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 인간 이성과 성스러운 계시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본주의(Humanism)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에 르네상스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된다. 이러한 기운을 안고 14세기초 프랑스에서 그리고 조금 늦게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음악형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프랑스에서 그리고 조금 늦게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음악형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프랑스 작곡가이자 이론가인 필립 드비트리(PHILLIP PE DE VIRTY/1291 ~ 1361)의 논문 제목을 따서 아르스 노바(Ars nova/신예술)라고 불렀으며 이전시대를 아르스 안티카(Ars antiqua/구예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1300년경에 최초로 신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후 대략 300년의 터울로 신 음악이 그것이다.

14세기에는 종교음악 작곡으로부터 세속음악 작곡으로 그 강조점이 크게 변하게 되었으며, 다양하고 자유스러운 리듬, 그리고 일정한 조의 중심을 향해 진해하는 화성감각이 자라나게 되었다, 즉 5도와 8도가 드물어지는 반면, '고정형식(Formes fixes)'이라고 불리우는 발라드(ballardes), 론도(rondeau), 비를레(virelais)가 발생한다. 이 모든 14세기의 특징을 창출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바로 기욤 드마쇼(Guillaume de Machaut)이다. 15세기 초 영국에서도 장조 조성으로 향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지도적인 작곡가로는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이 있다.

(4) 세속음악(Secular Music)

11세기경까지 유럽의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성직자들이 주도하였으나 12세기에 이르러 봉건사회의 기사계급은 그동안의 교회와 수도원의 전통적인 권위의 지배 속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였다. 또한 오랜 십자군 전쟁 이후 극단적인 종교열은 침체했고 동방의 화려한 이국문화의 접견으로 세속적 요소가 사회생활에 팽대해졌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세속음악은 점차 민중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대부분의 세속음악은 단선율로서 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 이러한 세속음악은 12세기경부터 귀족계급인 남 프랑스의 투르바두르(Troubadour)와 북 프랑스의 투르베르(Trouvere)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작품도 많이 나왔다. 그들은 자작의 시에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다. 여러 곳의 왕궁과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여 간단한 악기의 반주로 그것을 노래했다. 시의 sodyhd은 사랑노래와 발라드 풍의 이야기, 자연의 찬미,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인(藝人)도 고용하여 다녔는데 자작의 시를 그들에게 노래시켰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8세기경부터 종글뢰르(Jongleur) 영국에서는 민스트럴(Minstrel)이라고 했다. 13,4세기경에는 독일 남부에서 오스트리아에 걸쳐 미네쟁거(Minnesange)라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있었다. 이들은 기사계급이 많았는데 이후 세속음악은 점차 기사계급에서 교양있는 시민계급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독일의 마이스터징거(Miestersinger)이다. 이들은 16세기경까지 계속되는데 독창적으로 창작곡을 내는 것보다 기존의 성가나 세속음악을 수정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5) 기보법의 발달

그레고리 성가를 위한 기보법이 9세기경에 네우마(Neuma)라는 그리이스말로 창안되었으며 1세기경에는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쪼(Guido d'Arezzo)는 네우마를 4개의 평행선상에 두고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기보법을 창안하였고, 또한 계명부르기를 고안하였다.13세기경에는 쾰른의 성 요한 수도원의 수도사이며 교사인 프랑코 데 콜로니아(Franco de Colonia)에 의해 음의 높낮이뿐만 아닌 길이도 표시할 수 있는 정량기보법을 창안하였다. 오늘날의 5선보에 의한 편리한 기보법이 완성되기까지는 천여년의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바로크 음악 바로크 음악이란...

바로크음악은 1600년경에 시작되어 1750년 바하의 죽음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의 음악에 적용되는데,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대를 음악사에서는 바로크(baroque)시대라고 부른다. 바로크라는 시대양식개념은 본래 미술사 분야에서 일어나 그 후 음악사 분야로 이행되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920년의 C.작스의 논문 이다. 이 무렵부터 음악사에도 적용되어 일반화하였다. H.리만처럼 이 시대를 통주저음(通奏低音)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크음악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재인식되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에서 지지자가 생겼다.

바로크음악은 16세기의 르네상스음악에 이어 17~18세기 전반에 전개되었다. 이 음악은 원칙적으로 통주저음(通奏低音:書法)에 바탕을 두고 셈[强]과 여림[弱], 합주와 독주, 명(明)과 암(暗)이라는 두 극(極)의 대비효과로써 심리적으로 감동과 극감(劇感)을 이끌어내려 한 것으로, 이 시대 미술작품에서의 바로크양식에 대응한다.

바로크음악은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 분야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유럽에서 발전하였는데 극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오페라이다. 극과 음악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으나 16세기 말의 피렌체의 G.카치니, J.페리 등이 당시의 인문주의 이념에 입각, 고대 그리스극(劇)의 재흥을 꾀하여 서창풍(敍唱風)의 모노디양식을 창시해서 근대 오페라의 방향을 잡았고, 그 후 몬테베르디의 작품은 이를 결정적인 것으로 하였다. 1637년에는 베네치아에 공개 오페라극장이 개설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다. A.체스티, A.스트라델라, A.스카를라티, 18세기의 페르골레시, 요멜리 등의 공헌에 힘입어 초기의 모노디양식은 근대 오페라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또한 오페라의 깊은 영향을 받고 종교적인 제재(題材)에 의한 극음악 ·오라토리오 ·수난곡(受難曲:패션) 등도 작곡되어 G.카리시미 등의 작품을 낳았다. 극음악의 이념을 실내악적인 방향으로 추구한 칸타타에도 볼 만한 작품이 적지 않다.

한편 기악음악의 분야에서도 이탈리아의 주도권이 두드러졌다. 오르간음악의 프레스코발디,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기악합주곡분야의 비탈리, 토렐리, 코렐리, 비발디, 독주크라비아에서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등의 작품은 종래의 성악양식에 의한 서법(書法)을 완전히 청산하고 기악 독자적인 이념을 추구하여 토카타 ·푸가 ·소나타 콘체르트 등의 기악형식을 확립하였고, 또한 장 ·단조에 의한 기능화성법의 바탕을 이루었다. 17~18세기의 이탈리아 출신의 음악가들은 전유럽의 악단에서 활약하여 이탈리아음악이 곧바로 국제음악으로 통용되었는데, 프랑스 ·영국 ·독일 등도 각기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음악을 전개하여 나갔다. 프랑스의 륄리, 캉프라, 쿠프랭, 라모 등, 영국의 J.블로, H.퍼셀 등의 음악작품이 그것이다. 독일에서는 특히 프로테스탄트 작곡가의 활약이 눈에 띄며 종교음악 ·오르간음악의 장르에서 본고장의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여 17세기의 슈츠, 샤이트, 샤인, D.북스테후데, 파헬벨 등의 작품이 나왔다. 크라비아 ·기악합주곡의 장르에서도 걸작이 적지 않아 특히 텔레만의 이름은 높았다.

이와 같이 바로크기는 근대음악의 탄생시대이고 성장시대였는데, 이 시기의 최후에 나타나 여러 경향의 음악을 종합해, 기념비적인 음악작품을 창조한 사람이 모두 1685년생인 헨델과 J.S.바흐의 두 사람이다. 또 기악음악의 발전에 때맞추어 중세 이래의 여러 악기가 개량되어 새로운 종류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바이올린 ·오르간 ·쳄발로 등이 연주되었고 18세기 초에는 피아노도 발명되었다.

(1)일반적 특징 1세기 반의 역사 속에서 바로크음악은 가지각색으로 변화하였다. 나라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양식을 만들어냈지만, 앞의 르네상스시대나 후의 고전주의시대의 음악과 비교하면 먼저 그 어느쪽에도 없는 통주저음의 존재가 바로크음악을 특징짓는 요소로서 떠오른다. 최저성부(最低聲部)가 그 악곡 전체의 화음을 뒷받침하는 기능을 지닌 이 기법은 오르간 ·쳄발로음악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 사용되었다. 바로크음악의 독특한 울림은 확고한 베이스의 선(線)과 그 위에 전개되는 상성부의 선율성이라고 하는 양외성부(兩外聲部:最高와 最低聲部)의 강조에 의거한다. 바로크예술이 지닌 빛과 그림자의 효과나 대비성은 음악에서는 협주양식에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음향체를 협주적으로 어울리게 하는 방법은 바로크음악의 선구자 G.가브리엘리에 의해서 추구되고, 17세기에 기악과 성악의 양면에서 발전하였다.

한편 르네상스시대에 배양된 폴리포니의 악곡원리는 바로크음악에서도 중요한 작곡기법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17세기를 통해서 차차 확립되어 간 장조 ·단조의 조성에 따라서 화성적 ·수직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의 변질이 나타나 있다. 음악표출에 관해서는 아직 고전파에서와 같은 ‘개(個)’의 표출은 아니었다. 작곡가는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유형적(類型的)인 정감의 표출을 의도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시 수사학이나 시학에서 관념을 차용한 것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크음악은 장르적으로 관찰하면 성악에 대한 기악의, 교회음악에 대한 세속음악의 대두와 발전의 시대였다. 성악에서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기악분야에서는 모음곡 ·트리오소나타 ·콘체르토그로소 ·변주곡 등이 즐겨 작곡되었다. 이 곡들은 모두 다악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개개의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닌 악곡(樂曲:樂章)을 통일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하나의 보다 큰 형식을 형성하는 수법도 이 시대에 자주 쓰인 형성원리(形成原理)였다. 【역사】 ⑴ 초기(17세기 전반):바로크음악은 오페라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는 언어의 극적인 표출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피렌체의 문인그룹 ‘카메라타’는 언어의 리듬에 지배된 독창에 의한 음악적 낭송(朗誦)형식이라고 해야 할 모노디양식을 만들어냈으며, C.몬테베르디는 대담한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하여 마드리갈에서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리고, 그것을 제2의 작법(언어를 중시한 새로운 작곡법)이라 명명하여 새로운 음악적 태도를 표명하였다. 피렌체의 모노디는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매력적이 아니었지만, 언어의 극적이고 자유스런 표출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의 성립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1600년에는 최초의 오페라가 J.페리와 G.카치니에 의해 발표되었고, 1607년에는 모노디원리를 사용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완성됨으로써 최초의 예술적인 바로크오페라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오페라는 그 후 베네치아악파 ·나폴리악파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한편 좀더 실내악적인 방향으로는 칸타타가 성립되었고 모노디양식과 협주양식은 H.쉬츠에 의해서 독일에도 도입되었다. 그는 북방의 영향을 받은 폴리포니양식과,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양식에 입각하여 그 후 J.S.바흐에 이르는 독일 프로테스탄트음악의 길을 독일 중북부에 마련하였다. 한편 남독일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탈리아오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⑵ 중기(17세기 후반):이 무렵이 되자 기악이 눈부시게 발달하였으며, 특히 바로크음악의 구성관(構成觀)을 구현한 트리오소나타의 작법이 완성되고 이것은 형식 및 악곡구성원리가 되었다. 모음곡형식을 취한 실내소나타와 교회소나타는 대부분 트리오소나타로 작곡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발레에 중점을 둔 궁정오페라가 륄리에 의해서 전성기를 이루고, 또 류트 ·클라브생 음악도 그 감각적 색채를 연마해 나갔다.

⑶ 후기(17세기 말∼18세기 중엽):조성이 완전히 확립되고 근대 화성악의 기초가 J.P.라모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합주협주곡의 명인 A.코렐리 ·A.비발디, 독일에서는 G.P.텔레만 ·G.F.헨델 ·J.S.바흐 등 거장이 배출되어 바로크음악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아르스 노바의 탄생이후 두번째의 신음악이 탄생 되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6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보통 1600 ~ 1750 년까지의 역사적 기간과, 그시대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다른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 ~ 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 음악 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 자연 철학이나 철학과 어느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뿐아니라 어떤 시기에 생산된 음악이든지 간에 당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된 경향, 관념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볼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을 뜻하는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 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 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한다.

단선음악(Monody)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 것이 무엇인가? 9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배해 오던 음악적 통념은 대부분의 경우 다성음악이었다. 즉 몇개의 성부가 얽혀서 이루는 복잡한 음악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음악은 여러 성부가 아닌 단성으로 이루어진 독창 양식을 창출한 것이다. 이것을 단선음악(Monody)이라 부르는데, 이 양식은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이스 고전에 대한 존경심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다. 이상적인 그리이스의 모방은 반주를 없애고 독창 성부만 남기는 것이지만 이 단선음악은 독창과 반주의 선율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으며, 반주 는 극히 축소되어 몇 개의 간단한 수직화음으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이 단선 음악이 급기야는 오페라를 탄생시 키게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오페라는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프로렌스의 일단의 음악가와 시인들의 모임인 카메라타(Florentine Camerata) 에서 발생하였는데, 이 집단의 최초의 대변자는 갈릴레이(Vincenzo Galilei)로 유명한 천문학자의 아버지이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 스스로 단테의 '지옥'에 비올반주에 의한 테너 독창곡을 쓰기도 하였다. 단선음악의 지도자로는 페리(Jacopy Peri, 1561 ~ 1633)와 카치니(Giulio Caccini, 1546경 ~ 1618)가 있었으며, 오페라 라고 불릴 수 있는 최초의 것으로는 리누치니(Ottavio Rinuccini)의 대본을 작곡한 페리의 다프네(Dafne)이다.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의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다. 즉 17세기에는 플로렌스와 베니스가, 18세기에는 나폴리가 음악적으로 지도적인 도시였다. 또한 로마는 종교음악 분야에서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7세기 한 동안은 오페라와 칸타타 분야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음악을 사용하여 이념과 감정을 표현 또는 재현시키려 노력하였다는 것 이다. 이것을 특정 감정 표상법(Doctrine of affection)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르네상스의 무지카 레세르바타 (Musica reservata)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음악은 '분명한 이념'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 은 17세기 철학을 지배하였던 데카르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숫자 붙은 베이스

위에서 언급했듯이 르네상스가 이상으로 하였던 기본적인 음향은 독립된 여러 성부들이 이루는 다성음악이었다. 그러나 바로크의 이상적인 음악(SOUND IDEAL)은 튼튼한 베이스 위에 흐르는 선율이 붙은 것으로써, 이 베이스와 자연스러운 화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렇게 베이스를 강조한 형태를 두고 통주 저음(Through bass), 또는 지속 저음(Basso continuo)이라 불렀다. 또한 베이스 음표 아래나 위에 화성의 성격을 숫자나 기호로 지시하기 때문에 숫자 붙은 베이스(Figured Bass)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 지속 저음은 음악이 대위법에서 화성음악으로, 선적 선율 구조에서 화성적 구조로 넘어가는 다리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교회의 역활이 전 시대보다 비교적 덜 중요하게 된 반면, 귀족 또는 종교적 후원자들이 음악활동 을 지원하여 여러개의 아카데미가 형성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비록 널리 알려 지지는 않았지만, 지금과 같이 입장료 를 받고 연주회를 공개하는 상업적인 음악회가 1672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시도되는데, 본격적인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이다.

역시 성악 부분에 여전히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오페라 이외에도 오라토리오, 칸타타등이 발전을 보였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악음악들의 많은 형식인 협주곡, 모음곡,소나타 등이 바로크 시대에 완성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작곡가로는 오페라 작곡가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17세기 중엽의 가장 위대했던 독일 작곡가인 하이리히 쉬츠, 장밥티스트 륄리, 코렐리, 존 블라우,핸리 퍼셀, 안토니오 비발디 등이 있으며, 이러한 형시의 완성자는 바로 잘 알려진 헨델(1685 ~ 1759) 과 바흐(1685 ~ 17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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